"형님이랑 친한 사이가 아니면 나 진 여사랑 약속도 잡지 않았어."송민희가 차에서 내리자 차 안은 많이 조용해졌다.강단해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엄숙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누구도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그렇게 한참 지나서야 강단해가 입을 열었다."너 유 부시장 따님과는 어떻게 됐어?"강단해의 목소리는 워낙에 톤이 높고 울림이 강해서 자연스레 위엄이 느껴지는 데다가 표정도 사뭇 엄숙했다.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하지만 강열한 눈빛에서 젊은 시절의 풍채를 느낄 수 있었다.그런 강단해 앞에서 강현우는 자연스레 허리를 펴고 자세를 바로잡았다."그런 여자는 도전할 멋도 없어요. 그저 몇 마디만 하면 바로 넘어와요. 그런데 더이상 만나지 않으려고요. 유 부시장이 옛 사건에 연류되어 올해 안으로 부시장 자리에서 물러난대요."더이상 진급할 가능성이 없다는 건 더이상의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혼사는 당연히 없던 일로 하는 것이 맞다.강단해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물었다."그 정보 믿을 만해?""유 부시장 딸이 말한 거예요. 틀림 없어요. 반년 동안 아까운 시간만 낭비했어요."강단해는 여전히 엄숙한 표정으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한성그룹에서 강한서의 입지는 만만치가 않았다. 강단해 스스로가 맞서기에는 역부족이라 그는 강현우의 혼사에 신경을 썼다.실력이 막강한 사돈이 있다면 그에게 엄청난 도움을 줄 수 있으니까.만약 유 부시장이 자리에서 물러난다면 그 혼사는 치를 필요가 없다.그런데 다시 사돈을 맺을 상대를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주에 돈 많은 부자는 많지만, 자금력을 탄탄한 세가는 적다. "아빠, 송병천이 돌아왔다고 들었는데, 지난번 자선 이브닝 파티에서 그 집 작은 딸이 병이 발작하여 요즘 집에서 몸을 추스리고 있다고 해요. 엄마가 송병천과는 먼 친척 관계잖아요. 그럼 우리도 문병을 가야 되는 거 아니에요?"강단해가 눈을 치켜뜨면서 말했다."송가람은 송병천의 친딸이 아니야."그러자 강현우가 가볍게 웃
증조할아버지는 왠지 강민서가 낯익었다. 좀 생각해보자 며칠 전에 사진첩에서 본 기억이 떠올랐다."왠지 낯익다 했더니 아가씨 그 놈 여동생이지? 다 한식구네. 마침 잘왔어. 오늘 내가 야채를 많이 캤는데, 점심에 야채전을 만들어 줄게."증조할아버지는 워낙 시골 사람이라 소박하고 마음이 너그럽다. 구십이 다 되는 나이에 젊은이 따지고 싶지 않았고, 강한서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자 상대방이 바로 친근하게 느껴졌다.강민서가 피식 웃더니 말했다."누가 당신이랑 한식구래? 유현진은 우리 집에서 자선사업이라도 하는 줄 아나? 평소에 쥐새끼 마냥 친정집에 돈을 보내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아예 사람을 집안에 들여? 당신들은 염치라는 게 없어?"이 말에 증조할아버지의 얼굴이 바로 굳었다. 그는 손에 쥐었던 호미를 버리고 강민서를 향해 손가락질하면서 말했다."젊은이가 무슨 말을 그렇게 고약하게 해.""유씨 집안에서 하는 건 괜찮고 말하는 건 안되나? 늙은이가 아직도 도둑놈 심보를 버리지 못하고 말이야. 이렇게 고급 저택에 살아보니까 시골 그 낡아빠진 집과는 비교할 수 없지? 버러지들 같으니라고."증조할아버지는 화가 치밀어서 손이 막 떨리고 목소리도 떨렸다."너 말을 똑바로 해. 시골 사람들이 어때서? 뭐 버러지? 우리의 노력으로 부지런히 경작을 해서 생계를 유지하는데 왜 버러지야. 그리고 너희들 먹는 거, 입는 거 어느 하나 농삿일을 거치지 않은 거 있어? 젊은 친구가 왜 이렇게 야박해!""내가 틀린 말 했어? 당신 스스로 봐봐. 유씨네 가족들 다 버러지만도 못한 인간들이야.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약을 가져다 주라고 한 거야? 유현진이 임신하지 말아야지. 임신해서 뱃속의 아이가 당신들 같이 버러지 같으면 어떡할라고."강민서는 말하면서 박스를 들고 집 안으로 걸어갔다.증조할아버지가 화가 난 나머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강민서의 손목을 잡더니 소리쳤다."나가! 당장 나가! 그 물건 가지고 당장 여기서 나가!"증조할아버지가 힘써 강민서의 손목을 잡아당
강한서가 멍해지다가 눈길이 어두워지더니 한마디 했다."이 일은 내가 처리할게.""어떻게?"유현진은 사뭇 담담한 어투로 물었다."만약 증조할아버지가 수술실에서 무사히 나오지 못하면 당신 강민서를 감옥에 보낼 수 있어?"강한서는 눈썹을 찌프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유현진이 맥 빠진 표정으로 물었다."못하겠지! 그럼 당신은 뭘 어떻게 처리해서 누구한테 보여줄 건데?"강한서지 지금 막 입을 열려는데 수술실 등이 꺼졌다. 의사가 수술실에서 나오면서 말했다."환자는 이미 위험에서 벗어났어요. 환자가 뇌전증 병력이 있는 데다가 연세도 이렇게 많은데 옆에 사람이 없으면 어떡해요? 제때에 병원으로 이송해서 다행이지 아니면 엄청 위험했을 거예요."유현진은 비로소 한시름을 놓았다. 의사의 잔소리가 끝나자 유현진이 인사를 했다. "제가 너무 방심을 했어요. 감사합니다. 의사선생님!"의사는 손짓하면서 말했다."아니에요. 조금 있다가 일반 병실로 옮길 테니 그때 가보면 될 거예요." 의사가 떠나고 나서 유현지은 강한서와 더이상 말하지 않고 유상수에게 알리려고 전화를 했다. 유현진의 힘이 빠진 뒷모습을 보자 강한서는 마음이 아팠다. 그는 바로 휴대폰을 들고 강민서의 번호를 눌렀다.예상대로 강민서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그는 다시 집으로 전화했다. 이번에는 도우미 아줌마가 받았다."도련님, 사모님은 친구 만나러 나갔어요."강한서가 차갑게 한마디 했다."강민서를 바꿔요."강한서는 화가 엄청 났을 때에만 성을 붙여서 강민서를 불렀다.도우미 아줌마는 고개를 돌려 강민서를 쳐다봤다. 강민서는 애써 손짓했다."그, 아가씨는 지금 집에 없어요. 아침 일찍 친구랑 나갔어요."눈을 치켜뜨던 강한서는 다시 한번 말했다."전화 받으라고 하세요."도우미 아줌마가 답했다."아가씨는 지금 진짜 집에 없어요......"강한서가 굳은 표정으로 다시 한번 말했다."마직막으로 말할게요. 당장 전화 받으라고 하세요."상대방쪽에서 소음이 들리더니 전화가 끊겼다
점점 더 굳어지는 강한서의 얼굴에 신미정이 다급히 호통치며 말했다. "너 그 입 닥치지 못해!"그러고는 머리를 돌려 강한서에게 말했다. "한서야. 나도 얘기 들었어. 이번에 민서가 심했어. 아까 돌아오는 길에 사돈한테 연락했더니 병원에서 뇌전증이라고 연락이 왔었대. 이미 좋아졌고 이 일은 사고야. 민서도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민서도 많이 놀랐어."뇌전증이라는 말에 강민서는 또다시 큰소리로 떠들어대며 말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나 별로 힘도 안 썼거든. 그리고 날 잡지 않았다면 내가 밀었겠어? 마침 뇌전증이 발작한 거 가지고, 재수 없게! 죽지 않았으니 말이지 죽기라도 해봐. 누가 내 말 믿어줬겠어!"강한서는 표정이 일그러졌다. "강민서, 너 혹시 목격자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강민서는 흠칫하면서도 계속 뻔뻔스럽게 말했다. "내가 뭐 어쨌는데. 난 그냥 약 가져다주려고 한 것뿐이야. 못 들어가게 하니까 내가 살짝 민 거 가지고."사고 당시 강한서와 유현진은 다 집에 없었고 도우미도 사고가 발생한 뒤에야 나왔으니 강민서는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뗐다.강민서가 여전히 뻔뻔하게 굴자 강한서는 민경하에게 휴대폰으로 사건 당시 영상을 켜라고 했다. 민경하는 음량을 제일 높게 조절했다."한 집안사람이라… 그쪽 집안은 원래 이렇게 뻔뻔스러워요?""큰 집에서 지내는 게 시골의 개집 같은 곳보다는 편하죠?""다행히 임신 안 해서 그렇지. 만약 임신이라도 했어봐, 유씨 집안 사람들처럼 못나고 역겨울걸요."강민서의 한마디 한마디에 강한서는 표정이 점점 더 굳어졌다.강민서는 자기가 한 말이 전부 감시카메라에 그대로 찍혔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강한서는 쌀쌀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선택해. 지금 당장 나와 함께 병원으로 가서 용서해 달라고 싹싹 빌던가, 아니면 영상 경찰에 넘겨서 고의 상해죄로 감방 가던가. 우리 집안에서 아무도 널 상관하지 못한다면 다른 곳에 넘기는 수밖에!"강민서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서 입술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오
"이 연세에 이렇게 다치시면 얼마나 위험한데요.""그런데 강씨 가문 사람들은 하나도 안 보이네요. 그 집에서 사고가 났는데 왜 코빼기도 안 보인대요?"사람들은 너도나도 한마디 하며 유현진이 어르신을 잘 보살피지 못했다고 비난하고 있는 것 같았다.유현진은 머리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시끄러워 죽겠어!"어르신은 그들이 가증스러운 관심에 눈살을 찌푸리며 호통쳤다. "다들 썩 나가!"모두 순식간에 입을 꾹 다물었다.이내 하나둘 병실을 나가기 시작했다.유현진도 병실을 나가려는 순간, 어르신이 그녀를 불러세웠다. "현진아, 나 물 한 잔 다오."유현진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친척들은 그 모습에 서로 눈길을 주고받더니 입술을 오므리며 병실 문을 닫았다.유현진은 물에 빨대를 꽂아 어르신의 입가에 가져갔다. 어르신은 힘겹게 물 두 모금을 마시고 침대에 도로 누웠다.그러고는 이불을 툭툭 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로 와서 앉아."유현진은 컵을 내려놓고 어르신 옆에 앉았다."강한서 이놈은?"어르신이 살며시 물었다.유현진은 머리를 푹 숙이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까만 해도 있었는데 급한 일 있는지 자리 비웠어요."어르신은 입술을 오므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유현진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어르신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왜 미안해. 네 잘못도 아닌데."유현진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집에 있었더라면 그런 일은 없었을 거예요.""아니야. 내가 욱해서 그래. 다 늙어서 어린애랑 싸워 보겠다고. 말하게 내버려 뒀으면 됐을걸."어르신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실 사돈들과 한번 만났으면 싶었어.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하기도 해서 말이야.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만났네." 어르신은 유현진의 손등을 토닥이며 계속 말했다. "내가 미리 생각했어야 했는데."유현진은 의아했다. 이내 어르신은 자주 입는 옷 주머니에서 통장 하나를 꺼내 유현진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몇
어르신의 마음은 사람의 마음을 비치는 거울과 같이 뭐든 다 보아낼 수 있었다.어르신은 곧 아흔 살의 장수 노인이다. 하지만 근 몇 년동안 어르신의 자식들은 다 이 세상을 떠났으며 마지막 남은 자식도 반신불수로 병상에 누워있다.자식들을 먼저 보내고 나니 손주들과의 감정도 점점 멀어지면서 어르신은 고향 집에서 외롭게 지냈다. 하지만 고향 집의 철거 소식이 전해지자 수많은 "효자"들이 나타나 효자 노릇을 하려고 했다.그러니 어르신은 그들의 생각을 다 꿰뚫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어르신의 철거 보상금을 노리고 있다.어르신은 이미 돈을 중요시하는 나이가 아니다.하지만 얼마 남지 않은 돈을 나누어주고 나면 정작 아프다고 해도 보러와 줄 이는 없을 것이다.나이를 먹어가니 자식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할망정 짐만 되었다.이 돈이라도 손에 쥐고 있으니 한주시에 오겠다고 했을 때 그나마 데리러 오는 사람이 있고 어르신의 뜻에 따라 행동했다. 하지만 그들의 신경은 전부 그 돈에 있었다.병실에서 환우들과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 사람들은 전부 프로그램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지만 어르신은 스크린에 비친 유현진을 보며 문득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증손녀가 보고 싶어졌다.유현진은 다른 사람과 달랐다. 그녀는 어르신이 달콤한 음식을 섭취하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았으며 담배와 술도 공제했다. 게다가 한밤중에 감기라도 걸릴까 봐 에어컨의 따뜻한 바람도 틀어주었다.그녀는 여전히 어렸을 때처럼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사탕을 입에 넣고서도 어르신이 속상해할까 봐 맛있다고 말해주던 아이였다.그녀는 누구보다 착했다.유현진은 눈물을 참으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꼭 강씨 가문 사람들이 사과하게 할게요."어르신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 "교양 없는 어린애랑 뭔 말을 한다고."어르신은 유현진의 손을 잡더니 통장을 쥐여주며 말했다. "어서 숨겨. 아무도 못 보게."병실 밖에서 둘째 작은어머니가 뒤꿈치를 들고 병실을 염탐했다.하지만 칸막이 커튼 때문에 두 사람의 행동을 볼 수 없어 속이
넷째 삼촌이 넷째 작은어머니의 옷소매를 끌어당기며 그만 말하라는 눈치를 주었다.유상수의 공장에서 출근하는 처지에 이런 거로 서로 책임을 밀며 시시콜콜 따지는 모습은 보기 좋지 않았다.유상수는 이 못난 사람들을 힐끗 쳐다보며 쌀쌀하게 말했다. "병원비 내라는 말은 안 할 테니 걱정하지 마!""아주버님, 그 말이 아니라요. 병원비가 얼마나 한다고요? 할아버지 연세도 많으시고 게다가 이렇게 다치기까지 했으니 건강이 점점 더 안 좋아질게 뻔하잖아요. 이렇게 두는게 아니라 할아버지가 퇴원한 뒤에 누구랑 같이 살아야 할지 의논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맞는 말이다.어르신이 쌩쌩할 때도 그들은 이 문제로 몇 번이고 의논한 적 있었다.다들 어르신의 철거 보상비를 노리고 있으니 누구나 열정적이었다.하지만 어르신이 고집을 부려 아무 데도 안 가겠다고 하니 당시 이 일은 잠시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 병상에 누워있게 되었으니 이 말은 다시 한번 칼도마에 오르게 되었다.유상수는 그 돈은 성에 차지 않았지만 고향 집에 있는 땅이 욕심났다. 하지만 어르신은 여태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유상수는 마침 이번 사건을 기회로 해서 어르신과 감정을 배양한 뒤에 빼앗아 내려고 했다.다들 어르신의 부양권을 얻기 위해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유현진은 병실 문 앞에 서서 이 사람들의 연극을 지켜본 뒤에야 어르신이 왜 통장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었다.유현진은 병실 문 앞에서 한참 동안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사람들이 한창 얼굴을 붉혀가며 의논하고 있을 때, 유현진이 문을 열고 나왔다.사람들은 유현진을 보더니 이내 하던 말을 끝냈다.둘째 작은어머니의 시선은 그녀에게서 떠나지 않다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어 물었다. "현진아. 할아버지 뭐라 하셔?"유현진은 쌀쌀하게 말했다. "별말 없으셨어요. 물 한 잔 마시고 쉬고 계셔요."둘째 작은어머니가 그 말을 믿을 리가 없었다. "물 한 잔 마시는 게 이렇게나 오래 걸렸어? 다른 말씀은 없었고?"유현진
만약 유현진이 강민서에게 손을 댄다면 일은 더 복잡해질 것이 뻔하니 강한서는 유현진을 이 일에 얽히게 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유현진은 강한서가 강민서를 두둔하는 줄로 알고 마음이 차가워졌다."강 대표 일 처리가 별로네. 증조할아버지가 어떻게 해결해? 어떻게 하면 화가 풀리실까? 그 나이에 똑같이 돌려주기라도 할까? 이거 놔!"강한서는 눈살을 찌푸리고 그녀를 꼭 잡은 채로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당신이 하는 걸 보고만 있으라고? 유현진, 너 진정하고 생각 좀 해봐. 너 여기서 얘 따귀 때리면 뒷수습 어떻게 할지 생각해 봤어?"유현진은 손을 움찔하더니 입술을 깨물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한서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계속 말했다. "증조할아버지 아직도 누워계시는데 당신이 이 일로 우리 집안과 등진 거 알게 되면 마음이 편하실까?"유현진은 쌀쌀한 눈빛으로 강한서를 노려보며 말했다. "강민서만 아니면 증조할아버지 저렇게 안 됐어.""그래서 사과시키려고 데려왔어. 직접 사과드리게 할게. 증조할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다 해드릴 거야."유현진은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강한서, 모든 일이 돈으로 해결되는 건 아니야. 난 그냥 못 지나가."말을 끝낸 유현진은 강한서의 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한 발 옮겼다.유현진은 충동적으로 손을 휘두르지 않고 그저 쌀쌀하게 서 있었다.유상수는 신미정이 집안사람을 대동해 어르신의 병문안을 온 일에 대해 너무 고마워서 꼬리를 흔들며 어르신이 휴식하든 말든 상관 안 하고 병실로 모셨다.어르신은 잠에 들지 않았다. 어르신은 강한서를 보더니 표정을 가다듬고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강한서, 이놈."강한서는 입꼬리를 내렸다. 어르신의 목소리는 많이 허약해졌다.강한서는 어르신의 허약한 목소리에 마음이 아팠다. 그는 머리를 돌려 강민서에게 말했다. "앞으로 와."두 경호원은 억지로 강민서를 앞으로 끌어왔다. 강민서는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앞으로 다가와 대충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죄송해요. 고의는 아니었어요."강한서는 미간
한현진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딱딱하게 물었다.“말해 빨리, 나 잘 거니까.”“네가 싫다고 해도 내가 강제로 몰아붙이는 거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하다가 네가 진짜로 하기 싫어질 수도 있는 건데 그걸 내가 구별할 수 있을까? 네가 진짜 싫은 건지 아니면 그냥 하는 말인지 잘 몰라서 실수하면 어떡해?”“잘 나가다가 내가 갑자기 왜 화를 내겠어?”“지금도 갑자기 화내잖아, 아까는 막 나 유혹하더니. 아무 예고도 없이 화내는 게 한두 번이야?”그 말을 들은 한현진은 돌아누워 강한서와 눈을 맞추며 따지기 시작했다.“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이유도 없이 자꾸 화만 낸다 그거야?”“아니, 그런 게 아니라 네가 진짜 하기 싫은 건데 내가 그걸 못 알아보고 계속하다가 너 다치게 할까 봐 그러지.”“진짜 싫으면 내가 너 물 거니까 그딴 걱정 할 필요 없어.”그 말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강한서는 언제 풀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미 자유로워진 손으로 한현진의 손목을 잡으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한현진이 그걸 왜 혼자 풀어냈냐고 따지기도 전에 혀를 입속으로 밀어 넣으며 치열을 고르게 훑고 지나가는 강한서에 한현진의 몸은 빠르게 나른해졌다.강한서가 입을 뗐을 때 한현진의 얼굴과 입술은 이미 빨개져 있었고 그녀는 가만히 누운 채 숨만 내뱉으며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한현진 위에 올라타 있었던 강한서는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바라보더니 득의양양하게 말했다.“안 깨물었네.”한현진이 그 말의 뜻의 완전히 깨닫기도 전에 강한서는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시간을 얼추 계산해보니 3달은 넘은 것 같아 사실상 관계를 한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었기에 한현진은 쥐고 있던 강한서의 머리채를 놓아주고 몸에 힘을 뺐다.그렇게 키스를 이어나가던 강한서는 한참 만에 한현진을 놓아주더니 그대로 이불을 덮어주고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자자 이제.”그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천장만 바라보던 한현진은 문득 인터넷에서 봤던 피드가 하나 떠올랐다.
강한서는 영문은 몰랐지만 그래도 한현진에게 벨트를 건네주었다.“뒤돌아서 손 등 뒤로 보내.”강한서는 한현진이 뭘 할지 알았지만 그래도 고분고분하게 뒤로 돌고는 손을 등 뒤로 교차시켰다.오래전에 배웠던 로프 묶는 방법을 오늘에서야 쓰게 되니 기뻤는지 한현진은 잔뜩 흥분한 채로 강한서의 손목을 묶었다.“이제 뒤 돌아도 돼.”한현진의 말에 따라 뒤로 돈 강한서는 손이 묶인 채로 그녀 앞에 꿇어앉았다.방금 샤워를 하고 나와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뒤로 넘겨두었는데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니 머리카락도 앞으로 툭 하고 떨어져나와 그의 반쪽 얼굴을 가려버렸다.얼굴 앞에 드리운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검은 눈동자에 한현진의 심장은 다시금 두근대기 시작했다.이제 보니 여자들이 정장을 입은 남자가 꿇어앉아 있는데 환장하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맘에 들어?”낮은 목소리로 누구 하나 홀리려고 작정한 듯이 말하는 강한서에 한현진은 귀를 붉힌 채 말했다.“응, 맘에 들어.”“강운 그룹 사모님이 이런 취향인 줄은 몰랐는데, 진작에 나 이렇게 묶어 놓고 싶었겠네?”웃음을 흘리며 말하는 강한서에 한현진은 헛기침을 하며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는 입을 열었다.“그건 아니고. 난 네가 날 이렇게 대해주길 더 원했어.”오랜 시간 동안 부부로 살아온 좋은 점이라 하면 아마도 서로에게 더 뻔뻔해질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그래서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해도 부끄러움이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강한서는 가만히 꿇어앉아 제 아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나는 내가 싫다고 해도 네가 억지로 하는 걸 더 좋아해. 그리고 다 한 다음에 침대에 꿇어앉아서 나한테 용서를 비는 게 보고 싶었어. 내 취향은 그런 거라서.”한현진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강한서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그럼 전에 우리가 싸울 때 내가 화나서 입 맞췄을 때는 왜 나 때린 거야? 그날도 내가 억지로 너 몰아세우고 하려고 했었잖아, 좋아한다면서 그때는 왜 나 죽이겠다고 그런 건데?”“진짜
송가람은 생각했다. ‘오빠는 그날 히비스커스 호텔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아직 나를 어떻게 마주하면 좋을지 모르겠는 거야. 게다가 내가 오빠 외숙모 때문에 다치기까지 했으니 분명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을 거야. 그러니 이렇게 간단한 문자에도 오래 고민하는 거겠지.’강한서가 대화창을 보며 물었다. “뭐라고 답장한 거야?”한현진이 불퉁한 말투로 말했다. “이래도 안 돼, 저래도 안 되라고 하니까 어쩌겠어. 어떻게 답장하면 좋을지 모르겠으니까 모르겠다고 했지.”한현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송가람에게서 답장이 왔다. [한서 오빠, 사실 그날 호텔에서 있었던 일은 저희 엄마가 너무 하셨어요. 오빠가 그렇게 대답한 것도 어쩔 수 없어서 그랬다는 거 알아요. 저 오빠 원망 안 해요.]눈을 마주친 강한서와 한현진 두 사람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이쪽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상대방이 알아서 넘어왔다. 두 사람이 이렇게 열띤 토론을 펼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한현진이 문자를 보냈다. [몸은 어때. 삼촌 일은, 내가 미안해.]송가람은 다시 한 번 그동안 강한서가 연락하지 않은 이유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얼른 답장을 보냈다. [전 괜찮아요, 오빠. 네가 멋대로 결정했다고 오빠가 널 미워하지만 않는다면요.]한현진: [치료 잘 받아.]송가람이 얌전함을 표현하는 이모티콘을 전송했다. [오빠, 생일 파티할 거예요?]한현진: [아니. 그럴 기분이 아니라서.]그 말에 송가람의 얼굴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느 사실 강한서가 조금 보고 싶었다. 고백 멘트를 작성하던 송가람은 서해금의 충고를 떠올리고 문자를 삭제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한현진을 회사에서 쫓아낼 때까지만.’송가람이 여전히 문자를 작성하고 있던 그 시점에 상대방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현진 씨에게 들으니까 요즘 회사에서 대회 준비가 한창이라던데. 요즘 바빠?]송가람: [네. 조향 대회가 있어서요. 지금 한창 참가자 신청을 받고 있어요.]한현진: [네가 대회에서 좋은
한현진이 귀를 쫑긋 세웠다.“누구야?”강한서가 휴대폰을 한현진에게 건넸다. “내 불륜녀.”그 말 한 마디에 수화기 너머의 한성우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네 뭐라고?”강한서를 힐끔 쳐다본 한현진은 강한서의 손에서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강한서는 한현진이 보내는 칭찬의 눈빛을 알아보고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성우는 호기심에 겨워 잔뜩 흥분한 채 난리를 부리고 있었다. “두 사람 대체 뭐하는 거야? 네 불륜녀를 감히 조강지처 앞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밝힌다고?”두 사람은 한성우를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한현진은 사랑의 라이벌을 한 번 떠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송가람의 질문에 대답하지는 않고 오히려 반문했다. [가람아, 다친 건 어때? 아직도 아파?]강한서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이건 너무 하잖아. 내가 언제 이렇게 오글거리는 말을 한다고 그래?”한현진이 생각해도 이건 너무 강한서 답지 않은 문자였다. 그녀는 [아직도 아파?]라는 문자를 삭제했다. 하지만 강한서는 여전히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이렇게 자상하게 얘기하지마. 지난 번에 홍혜림 씨를 만났을 때도 다신 연락하지 않겠다고 얘기했어. 하지만 네가 이렇게 답장을 보내면 나중에 만났을 때 내가 더는 선을 긋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들이대면 나더러 어떡하라고.”강한서의 말에 한현진은 [다친 건 어때?]라는 글을 지우고 문자를 다시 작성했다. [계획 없어. 좋은 제안이라도 있어?]강한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일에 뭐할까 고민한 건 가까운 사이에서만 가능한 거야. 네가 이렇게 물어보면 걔가 뭐라고 생각하겠어?”한현진이 눈썹을 씰룩였다. “조용히 해. 애초부터 네 불륜녀에게는 내가 답장할 거라고 얘기했잖아. 네가 뭔데 나서?”강한서가 말했다. “내가 답장은 네가 하라고 얘기한 건 맞지만 이렇게 하는 건 아니지. 현실 반영은 해야 하잖아.”한성우는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형수님, 불륜녀라뇨. 강한서에게 언제부터 불륜녀가 있었어요. 남자예요, 여
여러 루트를 통해 송가람은 드디어 시계 관련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지금은 재고가 없어 7일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오늘 마침 빈해시의 한 고객이 시계를 반품했고 송가람이 동의한다면 먼저 그 시계를 가질 수 있다고 했다. 빈해시는 한주와 그리 멀지 않았다. 오늘 저녁이면 시계를 받을 수 있었다. 전화를 받은 매니저가 말했다. “고객님은 오늘 두 번째로 이 시계에 관해 물어보신 분이세요. 점장님 친구 분이라고 하셔서 먼저 연락드렸어요. 만약 구매 의향이 있으시다면 지금 바로 보내드릴게요.”송가람이 물었다. “저 말고 또 누가 물어본 거죠?”“죄송해요, 고객님. 그건 고객님 개인 정보라 말씀 드릴 수가 없어요.”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현진이 분명했다. 송가람은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결국은 자신이 한현진보다 먼저 시계를 구해내고야 말았다. 송가람이 태연한 말투로 말했다. “지금 준비해줘요. 물건은 바로 저에게 보내주시고요.”“알겠어요. 돈을 입금해주시면 저희가 영수증과 함께 시계를 포장해 최대한 빨리 보내드릴게요.”송가람은 자신이 가진 절반 이상의 돈을 신미정에게 사기 당했다. 이 시계까지 사고 나면 송가람은 거의 전 재산을 탕진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한현진에게 골탕을 먹이는 것은 물론 강한서의 마음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 송가람은 큰마음을 먹고 계좌 이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송가람이 입금을 하자마자 한성우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세상에, 대박. 팔렸어요. 형수님, 저희 회사에서 영업을 하시는 게 어때요? 한 달 매출의 절반을 원하신대도 괜찮아요.”한현진이 말했다.“꿈 깨요. 이렇게 쉽게 속는 바보가 그렇게 많을 줄 알아요?”그 시계는 신우의 사촌 동생의 것이었다. 사긴 했지만 하고 다닌 적은 없었고 집에 한 달 째 고이 모셔두고 있다가 갑자기 실증이 나 환불한 것이다. 이런 명품 시계는 애초부터 재고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구매한 지 한 달이 되어서야 환불을 하려니 쉽지 않
송가람은 조금 멍해졌다. 서해금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한서와의 만남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 때문에 모녀가 몇 번을 싸웠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서해금이 갑자기 뜻을 굽히니 송가람은 심지어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의아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한참만에야 정신을 차리고 환한 얼굴로 말했다. “엄마, 정말 반대 안 할 거야?”서해금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내가 아무리 반대해도 무슨 소용 있어? 내가 반대한다고 네가 내 말을 들은 적이나 있어? 넌 엄마를 원수 취급하려고 했잖아.”“엄마, 정말 날 속이려고 하는 말 아니지?”송가람이 몇 번이고 서해금의 마음을 확인했다. 서해금이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어? 지금 네 꼴을 봐봐. 강한서를 위해 얼마나 비참한 모습을 하고도 돌아서려 하지 않는지. 이런 널 보고 내가 뭘 어떡할 수 있겠어?”송가람이 와락 서해금을 끌어안았다. 날아갈 듯이 기쁜 마음이 도무지 감춰지지 않았다. “엄마, 전엔 다 내가 잘못했어. 난 그냥 한서 오빠가 너무 좋아서 그랬어. 엄마, 걱정하지 마. 내가 한서 오빠를 좋아하는 걸 반대하지만 않으면 앞으로 뭐든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할게.”서해금이 가볍게 송가람의 등을 쓸었다. 그녀의 눈빛이 밝게 빛났다. “벌써 좋아하지 마. 내가 말한 조건 잊지 마. 엄마는 깔린느에 반 평생을 쏟아부었어. 깔린느는 엄마가 너에게 남겨주는 거야. 그러니까 네가 깔린느를 지킬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줘. 네에게 그런 능력이 있어야 앞으로 네 결혼 생활이 어떻든, 깔린느가 네 손에 있는 이상 아무도 널 함부로 대할 수 없어.”“알겠어, 엄마. 엄마가 날 위해서 그러는 거 알아. 엄마를 실망시키지 않을게.”전엔 아무리 말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더니 강한서를 미끼로 사용하니 이제야 조금 말귀를 알아듣는 것 같았다. 서해금이 답답한 마음을 꾹 누르며 나지막이 말했다.“세은이가 회사에 입사할 때, 한현진이 어떤 약속을 했었는지 기억해?”송가람은
스쳐지나면 바로 잊어버릴 만큼 그저 평범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평범한 미모에 파묻힌 두 눈은 은서하의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저도 모르게 뒤로 한걸음 물러선 은서하는 실수로 바닥에 놓인 화분을 건드렸다. 꽃병이 흔들리는 소리에 은서하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한현진 역시 그 소리를 듣고 무의식적으로 은서하를 쳐다보았다. 은서가 얼른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죄송해요, 대표님.”은서하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하지만 그리 티가 나는 떨림은 아니라 한현진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괜찮아요.”한현진이 사인을 마친 서류철을 은서하에게 건넸다. “결재 다 했어요. 가봐요.”한현진이 건넨 서류철을 받아 꼭 끌어안은 은서하가 가볍게 허리를 숙여 한현진에게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섰다. 은서하는 사무실 문을 닫으며 다시 한 번 주혁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듯, 상대방 역시 사무실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서하는 얼른 시선을 피하며 문을 닫았다. 서류철을 끌어안은 은서하의 머릿속은 백짓장이 되었다. 그녀는 멍한 눈으로 서류철을 쥔 손에 꽉 힘을 실었다. 결재 서류에 크고 작은 구겨진 자국이 났다.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걷던 은서하는 누군가와 부딪혔다. 품 안의 서류가 툭 날리며 바닥 여기저기에 엉망으로 흩어졌다. 은서하가 부딪힌 건 그녀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었다. 꽤 가까운 사이였던 그 사람은 허리를 숙여 은서하를 도와 서류를 주으며 핀잔을 줬다. “넌 키가 작아서 내 얼굴에 부딪히지 않아서 다행이야. 아니면 내가 얼마 전에 고친 코가 너 때문에 부러질 뻔 했잖아.”은서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코를 고쳐? 너 성형했어?”“기억력이 너무 형편없는 거 아냐? 성형한지 이제 6개월도 지났어. 이번엔 다시 손 좀 본 거야.”상대방은 말하며 은서하의 이마를 톡 쳤다. “너도 얼른 그 복코 수술 좀 해. 네 얼굴은 코 때문에 다 망쳤어. 날 수술해준 의사 선생님이 기술이 꽤 좋아. 할 생각 있으면 얘기해. 소개해줄게
은서하는 부끄러운 듯 두 손을 움켜쥐고 웅얼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건 대표님께서 전에 이 팀장님을 통해 주신 외할머니 병원비예요. 2000만 원. 카드 비밀 번호는 000000이예요.”한현진은 카드를 받는 대신 펜을 내려놓으며 은서하에게 물었다. “돈은 어디서 났어요?”은서하는 말이 없었다. 한현진이 태연하게 말했다. “합법적인 루트로 얻은 돈이 아니라면, 제가 이 돈을 받는다고 해도 결국 다시 돌려주어야 할 거예요.”은서하가 다급하게 말했다. “불법적인 돈이 아녜요. 저 회사 사내 대출을 받았어요.”깔린느에는 직원 복지를 위한 사내 대출이 있었다. 대출 이자는 3년에 3% 정도로 낮은 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이자가 낮다고 해도 결국은 갚아야 하는 빚이었다. 은서하는 안 그래도 경제적인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대출 이자는 그녀에겐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한현진이 손가락으로 책상 위의 마우스를 살며시 쓸더니 갑자기 말했다. “혹시 제가 이 일을 계기로 서하 씨를 제 사람으로 끌어들일까 걱정인 거예요? 서하 씨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을 빌미로 곤란한 일이라도 시킬까 봐?”한현진의 말에 은서하는 그만 멍해졌다. 그녀는 한현진이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얘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 은서하는 입술을 짓이기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인이었다. 한현진이 입사한지도 시간이 꽤 지났다. 사람들은 이젠 한현진이 회사에 들어온 목적을 어느 정도는 눈치 챌 수 있었다. 다만 서해금이 깔린느에 너무 오랫동안 몸담고 있었던 터라 깔린느의 핵심부서에는 전부 서해금의 사람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런 서해금에게서 실권을 빼앗으려는 한현진을 좋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설사 서해금의 편에 서지는 않더라도 그녀의 눈 밖에 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은서하도 그들과 같은 생각이었다. 그녀는 그 어떤 진영에도 서고 싶지 않았다. 은서하는 그저 조용히 출근하고 월급을 받아 외할머니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면 충분했다. 은서하의 침묵의 의미를 알아차린 한현진
강한서의 말에 죄책감이 든 한현진이 말했다. [널 탓하는 게 아니야. 그냥 물어본 거야.]강한서: [물어보는 네 말투가 나에겐 너무 상처였어. 지금 그 문자를 봐도 마음이 아픈 것 같아.]한현진: [...]강한서는 지식만 빨리 습득하는게 아니었다. 그의 비꼬기 기술도 무서운 속도로 발전했다. 하지만 강한서는 자신의 상대가 누군지 잊은 모양이었다. 한현진이 미안함이 가득 담긴 말투로 문자를 작성했다. [그럼 어떡해? 이젠 메시지를 삭제해도 소용없는데. 아니면 네가 아예 날 삭제할래? 그럼 내가 보낸 문자도 볼 수 없고, 그렇게 괴로워할 필요가 없잖아.]강한서는 한참 동안 답장이 없었다. 아마 한현진의 제안에 충격을 받은 듯 했다. 한현진: [삭제했어?]강한서: [...]한현진: [오빠, 얼른 삭제해. 난 오빠가 슬픈 건 싫어.]한현진은 차례로 문자를 잔뜩 전송했다. 결국 한현진의 등살에 못 이긴 강한서가 체념하며 답장했다. [여보, 내가 잘못했어.]한현진이 배배 꼬인 말투로 말했다. [오빠는 그저 자랑이 하고 싶었을 뿐인데, 오빠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어? 잘못한 건 나야. 이렇게 사소한 일로 시시콜콜 따지기나 하고.]말이 없던 강한서는 잠시 후 한현진에게 가방 사진을 잔뜩 보냈다. [자기야, 하나 골라.]한현진은 버럭 화를 내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오빠, 이게 무슨 뜻이야? 지금 내가 가방 때문에 이러는 것 같아?]강한서: [다 사.]한현진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됐어. 농담이야. 사긴 뭘 사. 회사 조직개편에 성공하면 네 수입도 지금처럼 높지는 않을 거야. 우리 아이도 키워야 하는데 아껴야지. 돈 함부로 쓰지마.]강한서에게 한성 그룹이 유일한 수입원은 아니었다. 앞으로 한성 그룹의 수입이 줄어들더라도 그는 여전히 적지 않은 돈을 벌 수 있었다. 하지만 강한서는 이 가족을 위해 계산기를 두드리는 한현진의 모습이 귀엽기만 했다. [애들은 애들이고, 넌 너야. 아직 우리 와이프를 희생시켜야 할 정도는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