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단해는 송민희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채 나지막이 말했다. “투정 그만 부리고 차에 가서 기다려.”송민희가 강단해의 옷을 잡고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안 된다고 했잖아요. 형님은 아들이 없어요, 딸이 없어요? 당신이 왜요?”“한서와 민서가 오겠다고 했으면 왜 나한테 전화했겠어? 어쩔 수 없으니까 날 찾은 게 분명하잖아.”화가 난 송민희가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자기 아들딸도 풀어주지 않으려는 사람을 당신이 뭔데 도와주려는 건데요? 게네들이 안 온다고 해도 친정집 식구들도 있잖아요. 형님은 동생도 있는데 왜 당신이 나서서 나대는 거예요?”강단해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말을 왜 그렇게 하는 거야? 내가 나서서 나대다니? 형수님도 우리 강씨 가문 식구잖아. 형수님에게 일이 생기면 우리 가문은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니라는 거야?”“강씨 가문 체면을 생각하기는 한 거예요?”송민희가 냉소 지었다. “그럼 오늘 밤 무슨 일이 있어서 형님이 경찰서에 잡혀 왔는지 알기는 해요?”강단해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든 우리가 그냥 모른 척 넘어갈 수는 없잖아.”“검찰이 전 의원을 데려갔어요. 형님은 전 의원을 딸과 장씨 가문을 맺어줬고요. 지금 검찰에서 전 의원의 비리를 캐고 있어요. 만약 형님이 정말 전 의원과 어떤 관련이 있다면 우리 가문도 같이 휘말리는 거라고요. 그런데도 형님을 풀어주는 일에 힘쓰고 싶어요? 사람들이 이 일을 빌미로 공격할까 봐 두렵지는 않아요?”강단해가 굳은 얼굴로 입술을 짓이겼다. “형수님께서는 전 의원과 경제적 거래가 없다고 하셨어. 이번 일은 형수님관 관련 없을 거야.”“형님 말이면 다 믿는 거예요? 형님이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다면 당신이 이렇게 부랴부랴 달려와 형님을 감싸주려고 했겠어요?”강단해가 입술을 짓이겼다. “아무리 그래도 한 가족이잖아. 이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어.”“내버려둘 수 없으면요? 어떻게 할 건데요? 우리 가문 이미지 전부를 걸기라도 할 거예요? 아주버님이 돌아가시고 지금
말하며 송민희는 휴대폰으로 가족사진을 보여주었다. “형사님, 오해예요. 저 사람은 제 남편이에요. 얘들은 우리 조카들이고요. 설이라 조카들이 고모부에게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해주고 싶다고 해서 일부러 식당까지 빌려 설 인사를 하려고 했거든요. 술을 마시기 싫어서 일부러 저러는 거예요.”강단해의 얼굴이 분노로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저 여자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는 거예요.”경찰은 강단해를 힐끔 쳐다보더니 송민희가 보여준 사진을 자세히 관찰하고는 그녀에게 휴대폰을 돌려주며 손을 흔들었다. “입구 막지 마시고 차는 옆으로 빼주세요.”“알겠어요. 얼른 갈게요.”경찰에게 사과한 송민희는 고개를 돌리자마자 웃음을 거두고 조수석에 올라타 차갑게 말했다. “가자.”뒷좌석의 강단해는 직업 군인 출신인 두 조카 사이에 앉았다. 강단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그는 지금 차에서 내리기는커녕 조금만 움직여도 손목을 꽉 잡혔다. 한평생 이런 창피는 당해본 적이 없는 강단해가 어두운 얼굴로 송민희에게 소리쳤다. “넌 정말 대단한 여자야. 내일 당장 이혼 서류 제출해.”송민희가 그런 강단해를 힐끔 쳐다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안 할 거예요.”스포츠카가 강한서가 타고 있던 차량을 지나치자 강한서는 갑자기 차창을 내려 덤덤한 시선을 보냈다. 멈칫, 행동을 멈춘 강단해는 그제야 송민희가 이곳을 정확하게 찾을 수 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의 얼굴이 분노로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들이 경찰서를 나서자 강한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강단해는 송민희에 의해 잡혀갔지만 그가 데려온 변호사는 아직 경찰서에 있었다. 그 변호사는 지금 강단해의 비서와 연락해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상의하려고 했다. 소리 없이 그 변호사에게 다가간 강한서가 상대방의 휴대폰을 쓱 가져갔다. 그에 변호사가 깜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대표님?”강한서가 휴대폰을 돌려주며 태연하게 말했다. “돌아가세요.”“하지만—”“아니
멈칫하던 강민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신미정을 불렀다. “엄마...”신미정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민서야, 엄마가 오늘 일부러 너한테 그렇게 못되게 대한 거 아니야. 네가 한현진을 도와 날 속인 게 정말 너무 화가 나서 그랬어. 그래서 그런 거야. 너 어렸을 때 엄마가 널 얼마나 아꼈는데. 뭐든 좋은 건 전부 너에게 줬어. 네가 경찰서에 들어갔을 때도 내가 여기저기 부탁해서 겨우 꺼내줬는데, 네가 엄마를 나 몰라라 하면 안 되지.”강민서가 시선을 내리고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엄마, 전 못 도와드려요. 오빠가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그럼 넌 그렇게 두 눈 멀쩡히 뜨고 엄마가 들어가는 걸 보고 있을 거야? 넌 이 안에 어떤 상황인지 알기는 해? 7, 8명이 한방을 쓰고 있어. 침대도 없고 악취도 심하다고. 보일러도 없어서 추위에 덜덜 떨고 있어. 민서야, 엄마 몸이 안 좋아서 정말 못 견디겠어. 엄마 좀 도와줘.”강민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저도 어떤 곳인지 알아요. 거기선 엄마 성질 좀 죽여요. 안에 있는 사람들, 전부 범죄의 벼랑 끝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최대한 건드리지 마셔야 조금이라도 편하게 지낼 수 있어요.”강민서의 말에 신미정은 울던 것도 멈추고 그만 멍해졌다. 살려달라고 전화한 것이지 설교나 들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불쌍한 척해도 통하지 않자 연기는 아예 집어치운 신미정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강민서! 이 배은망덕한 것. 내가 널 괜히 예뻐했어. 사인하고 돈 좀 내면 되는 건데, 그것도 못 해줘? 내가 이 나이에 여기서 이러고 있으라니, 네가 사람이니? 네가 이런 애인 줄 진작 알았다면 애초부터 태어나자마자 널 목 졸라 죽여야 했어.”“내가 여기 있으면 너에겐 뭐 좋은 일이라고! 나에게 이런 오점이 생기는 한, 다른 사람이 넌 안 헐뜯을 것 같아? 고고한 재벌집 자제들이 너와 계속 친구 해줄 것 같냐고. 네가 그동안 한 짓들 때문에 넌 제대로 된 집안과는 결혼도 할 수 없을 거야. 너—”강민서
사실 강민서는 민경하가 무슨 일이냐며 물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오늘 밤 있었던 일이든, 조금 전 신미정과의 통화 내용이든 그 어떤 것도. 한참 동안 화장을 닦던 강민서의 배가 꼬르륵 소리 냈다. 침묵을 깨는 소리에 강민서는 괜히 뻘쭘해졌다. 오늘 하루 종일 신미정이 결혼식에서 한현진에게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 마음을 졸이고 있느라 아무것도 먹지 못했었다. 배가 신호를 보내서야 그녀는 배고프다는 것을 인지했다. 하지만 지금은 배고픔보다는 창피함이 더 크게 다가왔다. 민경하는 아무 말 없이 옆에 있던 보온 도시락을 열어 강민서에게 건넸다. 향긋한 호빵 향이 물씬 풍겨오자 강민서는 그만 멍해졌다. 민경하가 말했다. “엄마가 민서 씨 드시라고 만들어주신 고구마 호빵이에요. 조금 식었을 거예요. 드시기 싫으면 다른 거 먹으러 가요.”“아뇨.”강민서가 도시락을 품으로 확 당기며 시선을 내렸다. 그녀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충분히 좋은걸요.”민경하가 차창을 비스듬히 열고는 물을 강민서에게 건넸다. “드세요. 다 드시면 집에 데려다줄게요.”강한서가 고개를 숙여 작게 대답하고는 고구마 호빵을 들어 한 입 한 입 먹기 시작했다. “고구마 호빵도 만들 줄 아시고, 아주머니가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요.”민경하가 말했다. “맛있어요? 엄마도 얼마 전에 배운 거예요. 지난번 같이 식사할 때 민서 씨가 계속 고구마 호빵을 드셨다면서 배워보신 거라고 하더라고요. 대표님께서 민서 씨를 데리러 가라고 하셔서 엄마가 드셔보라고 조금 담아주셨어요.”그 말에 강민서가 오물거리던 입을 멈추었다. 코끝이 찡해오더니 후드득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똑같이 자식을 둔 어머니였다. 강민서는 심지어 민경하의 여자친구도 아니었지만 고윤은 강민서를 위해 한 번도 만들어 본 적 없는 호빵 만드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그녀의 친엄마인 신미정은 눈 하나도 깜짝하지 않고 그녀는 끝도 없는 낭떠러지로 밀어 넣었다.
한현진이 홱 손을 거두며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왜 내 이불을 덮고 있는 거야?”몸을 일으키던 강한서가 한현진의 말에 멈칫했다. “누구 이불인지 잘 봐요.”고개를 숙여 덮고 있던 이불을 확인한 한현진이 입을 닫았다. 그녀는 조용히 강한서의 이불에서 빠져나와 자기 이불을 가져와 다시 덮었다. “나 예전엔 얌전히 잤어.”한현진이 애써 해명했다. “임신해서 그런 게 분명해. 배 속의 아기 때문이야.”강한서가 침대에서 내려와 잠옷을 벗고는 셔츠를 걸치더니 단추를 잠그며 말했다. “괜찮아요. 먼저 몸정이라도 쌓자면서요. 이해해요.”말하며 그가 고개를 들었다. “다음엔 그냥 한 이불 덮자고 얘기해요. 빙빙 돌려 말할 필요 없어요.”“...”‘난 그런 적 없거든.’요즘은 정말 이상한 일투성이였다. 분명 잠들기 전엔 각자 자기 이불을 덮고 잠이 들었다. 하지만 아침이 되면 그녀는 늘 강한서의 이불 속에서 눈을 떴다. 처음 몇 번은 강한서가 일찍 일어난 덕에 뻘쭘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엔 얼굴을 마주 보며 눈을 뜬 탓에 강한서는 한현진이 그의 몸을 탐해 한밤중에 기어들어 온 것이라고 오해할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한현진은 정말 그런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임신한 후로 한현진은 눈을 감기만 하면 깊은 잠에 빠졌다. 어떨 땐 강한서를 유혹해볼까 생각하다가도 강한서가 침대에 올라오기도 전에 먼저 잠에 들곤 했다. ‘설마 내가 이 정도로 잠버릇이 심해졌다는 거야?’강한서는 침대에 앉아 괴로운 얼굴을 한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기분이 꽤 상쾌해졌다. “병원 가게 이젠 일어나서 준비해요.”머리를 움켜쥔 한현진이 멍한 채로 대답했다. 그녀가 방에서 내려왔을 땐 테이블에 꽃 한 다발이 놓여있었다. 꽃잎에 이슬까지 맺혀 있는 싱싱한 꽃이었다. 꽃다발 앞으로 다가온 한현진은 옆에 하늘색 보석함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멈칫하던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넥타이를 매고 있던 강한서가 한현진이 돌아보자 설명했다
“꽃도 민 실장님이 고르신 거지?”한현진이 꽃을 만지며 물었다. “역시 민 실장님 안목이 좋아. 싱그러운 것 좀 봐.”강한서가 그만 참지 못하고 말을 내뱉었다. “꽃은 제가 산 거예요.”한현진이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꽃은 왜 샀어?”“전—”강한서가 한현진의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꽃 파는 여자아이가 불쌍해 보이길래 전부 사 왔어요.”‘개자식, 한번 답답해 보라지.’한현진이 콧방귀 뀌었다. “어쩐지 시들시들하더라니, 땡처리하는 걸 사 온 거네.”그녀의 말에 강한서는 어리둥절해졌다. ‘민 실장이 사 온 줄 알았을 땐 싱그럽다고 하더니, 내가 사 온 거라니까 시들시들하다고?’강한서는 꽃다발을 노려보며 화가 난 듯 꽃망울 하나를 꽉 움켜쥐었다. 그리곤 차에 탈 때까지 한현진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 강한서의 모습에 한현진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땐 겨우겨우 참았지만 아무도 없이 단 둘뿐이자 그는 온 얼굴로 기분을 드러냈다. ‘이런 같잖은 연기력으로 무슨 기억 잃은 척을 해.’산부인과 검진을 받는 곳은 한성대학병원이었다. 이곳에서 검진과 진료를 받는 사람은 대부분 퇴직한 공무원이거나 연예계의 배우들이었다. 개인 정보 보호와 기밀성이 좋은 병원이었다. 한현진의 주치의는 한준우의 선배였고 전에 이미 진료를 보인 적이 있던 터라 한현진의 몸 상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강한서는 검진 내내 한현진 옆에 붙어있었다. 검진 결과를 받을 때마다 그는 한참을 들여다보며 확인하곤 했다. 그 모습에 한현진이 웃으며 말했다. “네가 의사도 아니고, 보면 알아?”강한서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아직도 아침 일 때문에 화가 난 듯했다. 한현진이 입을 삐죽이며 마음속으로 욕을 지껄였다. ‘쪼잔하긴.’초음파 검사를 진행하던 의사가 갑자기 놀란 기색을 보이더니 곧 미간을 찌푸리고 모니터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표정이 조금 굳어져 있었다. 한현진의 심장도 같이 덜컹 내려앉았다. 매번 검사를 진행할 때마다 의사의 갑작
한현진에게 식단을 다시 짜준 의사는 그녀에게 혈당 관리를 잘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쌍둥이는 아무래도 한 명을 임신한 것보다 위험 부담이 높았다. 그러니 태아의 성장 속도를 엄격하게 조절해야 했다. 태아가 작아야 발육도 잘 되고 건강했다. 그리고 훨씬 수월하게 출산할 수 있었고 산후 회복도 더 빠를 수 있었다. 강한서는 휴대폰을 꺼내 의사가 알려준 모든 것을 메모장에 기록했다. 열심히 듣고 있던 한현진은 물컵을 가지려다 메모장에 하나하나 적어 내려가는 강한서의 모습을 보고는 괜히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회사의 나이 지긋한 임원이 정색하며 회의 기록을 작성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전혀 의사의 말을 받아적는 모습 같지 않았다. 진료실에서 나온 후 강한서는 줄곧 한현진의 손을 잡고 있었다. 한현진은 그런 그에게 기억 잃은 연기를 계속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눈치를 주지도 않았다. 흥분되고 걱정스러움이 섞인 강한서의 감정을 한현진은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꽉 맞잡은 손가락 사이로 강한서의 마음이 조금씩 전해졌다. 사실, 그녀도 그와 같은 마음이었다. 아이를 가진 것만으로도 한현진은 하늘이 가엽게 여겨준 것이라 생각했었다. 쌍둥이라니, 감히 꿈 꿔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너무 갑작스러운 일도 아닌 듯했다. 그녀는 얼마 전 꿨었던 해파리 꿈을 떠올렸다. 꿈속의 예쁜 물방울은 두 개로 갈라졌었는데 어쩌면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말하던 태몽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그녀의 식욕 역시 같은 개월 수의 임산부보다 더 왕성했다. 게다가 너무 쉽게 배고픔을 느꼈다. 이제 보니 쌍둥이를 임신했으니 식욕이 좋은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쌍둥이... 교수님 말처럼 남자아이 하나, 여자아이 하나면 얼마나 좋겠어.’‘물론 딸이든 아들이든 내 새끼면 다 좋지.’혼자만의 생각에 푹 빠져있던 한현진은 앞을 제대로 보지 않아 남자에게 부딪혀 그의 손에 들려있던 약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깜짝 놀란 한현진이 사과하며 허리를 숙여 그 남자의 약
굳은 얼굴의 한현진의 머릿속에는 이성과 욕심의 전쟁이 한창이었다. 그녀는 한참 만에야 강한서의 말에 대답했다. “그래.”말을 마친 그녀는 심장 근처를 부여잡고 생각했다. ‘한현진, 정말 못났다.’하지만 고개를 돌린 순간 마주한 강아지처럼 반짝이는 강한서의 눈을 마주하자 또 생각했다. ‘좀 못나도 뭐 어때. 강한서가 더 못나 보이는데.’강한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럼 전 민 실장에게 전화할게요.”목소리를 가다듬은 한현진이 말했다. “나도 오빠한테 전화할게.”한현진은 휴대폰을 들고 한쪽으로 걸어가 송민준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오빠, 바빠요?”송민준이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친구랑 술 마시고 있어. 왜?”룸에서 나온 듯 전화 너머의 시끄럽던 소리가 순간 사그라들었다. “별일은 아니고...”한현진이 떠보듯 말을 꺼냈다. “오빠, 오빠 도장 오빠한테 있어요?”송민준은 한현진의 물음에 대답 대신 오히려 질문을 던졌다. “내 도장은 왜?”“아니, 지난번 부동산 명의 변경했었잖아요. 소유권 이전 등기 신청하려고요.”한현진은 송민준에게 거짓말을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혼인신고 할 때 증인의 도장이 필요한 것 때문이라고 얘기하면 그는 제일 먼저 도장을 숨길 것이 분명했다. 지금 송민준과 송병천에게 강한서는 아직도 기억을 잃은, 관찰 대상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송민준이 말했다. “내 도장은 아버지가 숨기셨어. 네가 강한서에게 속아 혼인신고를 하게 되면 제일 먼저 나에게 증인을 해달라고 할 수 있다고 내 도장을 가져가셨어.”“...”뭐든 대충 흘려보내던 아버지가 이런 일에선 전에 없던 명석함을 보였다. “아빠도 참. 내가 그런 멍청한 일을 하겠어요?”한현진이 나지막이 불평했다. 송민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오히려 아버지가 선견지명이 있으셨다고 생각해.”“...”“친구가 불러서 먼저 끊을게. 소유권 이전 등기 신청은 나중에 내가 사람 시켜서 마무리할 테니까 넌 신경 쓰지 마.”
[두 여배우 모두 연기력이 그렇게 뛰어나면서, 대체 얼마나 보는 눈이 없어야 한열을 좋아할 수 있는 거지?][그건 좀 아니지 않나? 한열도 미남상이긴 하잖아. 이런 사람인 줄은 몰랐지만.][세 사람 같이 촬영했었잖아요. 한현진이 한열과 신하리가 사귀는 걸 몰랐을까요? 이건 뻔히 알면서도 만난 거잖아요.][살려줘! 나 한현진 정말 좋아한단 말이야. 전에 햇살 유치원 사건 때문에 엄청 호감이었는데. 봄의 연인의 중전마마 역도 완전 잘 소화했었다고. 대체 바람은 왜 핀 거야. 연예계에 사고 안 치는 연예인이 있긴 한 거야?] [두 여신을 동시에 만나다니. 한열, 능력도 좋아. 지까짓게 뭔데...] [한열은 신하리에게 빌붙으려는 목적이었던 거예요. 지금 소속사와 계약 해지를 준비 중이예요. 회사에서도 전혀 신경 안 쓰고 있고요. 신하리가 아니었으면 한열 주제에 어떻게 유명 감독에게 캐스팅 될 수 있었겠어요. 정말 어떻게든 여자 덕 좀 보겠다고 애쓰네.]아래의 댓글들은 더 이상 눈을 뜨고 볼 수도 없었다. 대부분은 그들을 욕하는 악플이었다. 한열과 신하리의 공개 연애에 대해 두 사람의 팬들은 자신의 배우가 아깝다며 강력한 불만을 토로했다. 두 사람이 열애를 인정한 후부터 양측의 팬들은 줄곧 다툼을 이어왔다. 두 사람의 커플 팬계정인 [이열치열]은 팬들의 감정 쓰레기통 같은 곳이 되어버려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한열은 열애 인정으로 회사와 갈등을 빚어 계약을 해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지금의 인지도와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한 채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회사 측은 말도 안 되는 루머를 퍼뜨렸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었던 터라 잠깐의 파장을 일으킨 후 곧 사그라들었다. 공개 연애 후 꽤 빠른 속도로 떨어지던 한열의 인기는 요즘 다시 천천히 오르고 있는 추세였다. 회사 측에서 밀어주던 신인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한열의 뒤를 이어받아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회사 측은 화가 치밀었다. 그러니 한열이 바람 폈다는 기사가
한현진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지금 예능부 기자 채용 문턱이 이 정도로 낮아진 거야? 두 눈이 멀어도 기자로 활동할 수 있나봐?”진윤: ...‘우리 여신님 사석에서는 이렇게 독설을 날리는 사람이었어?’휴대폰 너머에서 한참을 듣고 있던 차미주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 사진 너와 한열 아니야?”한현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건 나랑 오빠야.”“하지만 이 사진들은 정말 한열과 비슷해 보여. 게다가 네 오빠가 운전한 거 한열 차 아니야?”한현진은 그날 송민준이 운전한 차를 눈 여겨 본 적이 없었다. 만약 정말 한열의 차를 운전하고 온 거라면 파파라치가 착각했을 수도 있었다. 다시 페이스북을 다운로드 받고 인기 검색어를 확인한 한현진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연예 부문의 인기 검색어의 TOP 5는 전부 한열의 바람에 관한 이슈가 차지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새로운 꽃뱀, 이열 커플 사이에 끼어들다], [이열 커플, 결별 위기 스크린 밖에서도 삼각관계], [한열 살아있네], [찐사랑을 못 숨겨] 등이었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검색어들이 가득 했다. 한현진이 페이스북에 로그인하자 수백 개의 DM과 십만 개가 넘는 댓글이 쏟아졌다. 굳이 읽어보지 않아도 신하리와 한열 두 사람의 팬들의 남긴 수많은 욕이거나 일반 네티즌의 호기심에 가득한 댓글일 것이 분명했다. 인터넷이 얼마나 필터 없이 악랄한 글로 난무한 곳인지 잘 알고 있는 한현진은 아예 댓글을 확인하지도 않고 뉴스피드로 들어갔다. 한열과 한현진의 기사는 두 시간에 터졌다. 그러니 지금쯤이면 각 마케팅 계정에서는 이미 타임 라인까지 정리한 피드를 올리기 시작했다. 한현진은 관련 피드를 대충 훑었다. 마케팅 계정의 분석에 의하면 한열과 신하리는 [살의] 촬영 이전에 이미 사귀기 시작했고 송민영이 하차된 후 한열이 자신의 여자친구인 신하리를 여주인공으로 추천했으며 영화 홍보 현장에서의 친밀한 스킨십 사진이 폭로되어 어쩔 수 없이 공개 연애를 택한 것이었다. 그 계정
한현진은 반나절이 걸려서야 일의 자초지종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쩐지 지난번 홍혜림 씨 사건이 있었을 때 왜 진윤 씨가 갑자기 나타나 상황을 반전시키나 했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는 거잖아.’순간 한현진은 뻘쭘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방금 전화를 받고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입도 벙긋하지 말았어야 했다. 진윤의 말처럼 이건 정말 비열한 짓이었다. 유치한 강한서가 벌일 만한 일이 맞긴 한 것 같았다. 강한서 본인 역시 이번 일은 너무 얍삽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어쩌다 아이를 달래주었다. “내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탓이라고 해. [정상에서]에서 지금 자체 테스트 중인 스킨 한 세트 줄게. 어때?”진윤이 작게 울먹이며 말했다. “스킨 세 세트?“강한서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와중에 딜을 하는 걸 보니 그리 큰 상처를 받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세 세트 전부 줄게.”진윤이 곧바로 울음을 멈췄다. 절판되어 더는 살 수 없는 게임 스킨과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한 여신 중 아무리 바보라도 그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래요. 제가 오해한 거라고 하죠.”말하며 한현진을 쳐다보던 진윤은 여전히 아쉬워하며 말했다. “현진 누나, 왜 이렇게 빨리 결혼하셨어요. 남자 때문에 손에 넣었던 트로피도 놓칠 수가 있어요.”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결혼이 커리어 영향주지 않아. 이간질 하려고 하지 마.”“형님은 남자니까 당연히 영향을 안 받으시겠죠.”강한서에게 농락을 당한데다 하루아침에 구닥다리에게 여신을 뺐긴 진윤은 누구보다 빨리 흑화 했다. “결혼하면 아이도 낳아야 하잖아요. 어떤 유명한 감독이 임산부를 캐스팅하려고 하겠어요. 제일 예쁠 나이를 남편과 아이에게 바치면 나중에 아이가 클 때쯤엔 본인의 레전드 시절은 이미 지났다고요. 제가 다 아쉬워서 그래요. 너무 불공평해요.”비록 진윤은 그저 이간질을 하기 위해 꺼낸 말이었지만 그 말은 현실이기도 했다. 임신과 출산은 여자의 커리어엔 고난과 역경이
한현진: ?강한서가 들고 있던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것은 차미주의 목소리였다. “현진아! 너 내연녀가 되어버렸어. 게다가 그 상대가 네 사촌 동생이래.”강한서: ?강한서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그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전여친, 현여친이 뭐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게다가 이 목소리, 왜 이렇게 귀에 익은 거지?’“저... 저기 혹시 전화 잘못 하신 거 아녜요?”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곳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 현진 누나?”한현진이 멍해졌다. ‘날 알아?’“네. 제가 한현진이예요. 누구세요?”상대방은 말이 없었다. 그에게서는 그저 조금 흥분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무슨 일이야?”진윤이 이를 악물었다. “방금 전화 받은 사람 누구예요!”강한서가 말했다. “내 와이프.”“그럴 리가 없어!”진윤이 바득 이를 갈았다. “이 사생팬 같은 아저씨가! 혹시 일부러 날 속이려고 옆에 성대모사하는 분이라고 모셔놓은 거 아녜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너처럼 유치한 인간인 줄 알아? 그리고 현진이는 아무도 대체할 수 없어.”진윤은 강한서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거짓말 좀 그만 해요. 현진 누나는 지금 그 티베탄 마스티프와 데이트하는 중이라고요. 만약 누나가 정말 형님 와이프라면 형님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누나가 딴 남자와 데이트하는 걸 지켜볼 수 있어요?”더 이상 진윤을 대꾸하기 귀찮았던 강한서가 그에게 영상통화를 보냈다. 몇뿐 후, 휴대폰 화면으로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여신과 딱 붙어 앉아있는 전남편 형님을 확인한 진윤은 순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한현진은 휴대폰에 비춰진 진윤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진윤 씨가 강한서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야?’진윤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어댔다. “거짓말쟁이! 뻔뻔한 인간! 전
유난히 예쁘게 잘 나온 사진을 보며 한 현지는 신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멍청하게 나온 것 같다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강한서는 굳이 자신이 찍겠다면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한현진이 눈을 실룩거렸다. “네가 사진을 찍겠다고? 168cm인 나를 138cm로 만들어 버리는 네가? 강 대표님 본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강한서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 실력이 그렇게 별로야?”한현진이 말했다. “쌀을 뿌린 휴대폰을 닭이 부리로 쪼아도 내가 찍은 것 보단 낫다고 할 수 있어.”왠지 수치를 당한 것 같은 기분에 강한서가 이를 악 물면 말했다. “그럼 난 왜 우리가 데이트했을 때 내가 찍어준 사진을 밤새도록 보고 있었던 거야?”강한서가 괜히 그 얘기를 꺼낸 탓에 잊혀 가던 한현진의 기억이 문득 돌아왔다.“사진을 보면서 넌 그저 사진을 찍을 줄 모르는 것뿐이라고 날 설득 하지 않는다면 호텔 앞에서 바로 너와 싸우 버릴 것 같았거든. 내 외모에, 감독님께서도 나에게 각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 하셨는데 넌 대체 어떻게 날 사실 눈으로 찍을 수 있었던 거야?”강한서: ...“사시눈... 처럼 나왔어?”한현진이 일을 악물었다. “내가 뛰어다니는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니까 유체 이탈한 것처럼 찍어줬잖아! 내가 피드를 업로드할 때 실수로 그 사진까지 넣었더니 애들이 나한테 대체 어디서 이런 심령사진을 찍었냐고 물었었어.”“...”활활 타오르던 강한서의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어쩌다 가끔... 몇 십 장뿐이었잖아.”한현진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하.”뭔가를 말하려던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자 무릎 정도까지 오는 어린 아이가 옆에 쭈그려 앉아 불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아직 더 놀 거예요? 저희 잠깐 놀게 해주시면 안 돼요?”강한서가 고개를 돌리자 뒤에는 어린 라이 대여섯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한현진: ...창피함에 고개
“하하하.”한현진이 마른 웃음을 지었다.“오빠. 제가 티슈 없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강한서가 눈을 씰룩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핑계였다. 그는 입술을 달싹여 아내를 따라 염치 없이 말했다. “형님, 저도 없어요.”송민준이 가방과 티슈를 두 사람에게 던지며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겼다. 한현진: ...“오빠가 나한테 화 난 건 아니겠지?”강한서가 우울하게 말했다. “너보단 날 먼저 걱정해야 할 것 같아. 네 오빠가 아무리 너에게 화가 나도 결국은 나에게 그 화살이 돌아올 거야.”한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좀 놓이네.”강한서: ?한현진이 그의 손을 잡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차피 오빠가 널 탐탁지 않아 한게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오늘 이 일로 크게 달라지진않을 거야.”“...”‘행복은 본인이 누리고 잘못은 내가 뒤집어쓰고. 정말 좋은 아내네.’강한서는 한현진을 데리고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입덧이 끝난 이후로 한현진의 식욕은 줄곧 안정적이었다. 매 끼니마다 많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지만 배고픔도 빨리 찾아왔기에 하루에 몇 끼씩 먹어야 했다. 그 덕에 지금의 한현진은 송아지처럼 튼튼하기만 했다. 강한서는 임신한 한현진을 위해 오랫동안 공부했지만 한현진에게는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그의 주변엔 임산부가 많이 없었지만 많은 아내들이 임신 후 남편을 괴롭힌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현진에겐 모든 임신의 호르몬 변화가 거짓말처럼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의사는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큰 반응 없이 잘 먹고 잘 지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의사는 강한서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산책을 자주 다니며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면 된다고 했다. 한현진은 정서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조금 유치해지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한현진은 강한서의 팔을 끌며 굳이 아이들의 흔들 목마에게 타게 해달라며 떼를 썼다.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채영 언니.”문채영이 가방에서 포장한 선물 박스를 건넸다. “첫 만남이라 어떤 선물을 준비하면 좋을지 몰라 제가 직접 향낭을 만들었어요. 향 맡아봐요.”한현진이 조금 의외라는 듯 말했다. “언니도 조향하세요?”문채영이 미소 지었다. “제가 조향에 입문하게 된 것도 민준이 덕분이었어요. 전엔 이런 거 만드는 거 좋아했었거든요.”한현진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조향하는 송민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줄곧 송민준은 그쪽으론 취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민준은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불쾌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주문부터 해. 배고파.”멈칫하던 문채영이 시선을 내려 눈에 맴도는 서운함을 숨겼다. 한현진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언니, 오랜만에 오셨을 텐데 오늘은 한주 음식으로 드시는 게 어때요?”문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현진 씨가 먹고 싶은 거로 주문해요.”주문한 음식 서빙을 마치고 룸을 나서려는 종업원에게 송민준이 갑자기 말했다. “장어 국수도 주문할게요.”문채영이 힐끗 송민준을 쳐다보자 시선을 올린 그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지.”‘그래,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다고 하는 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하고 많은 국수 중에 왜 하필 장어 국수야?’‘오빠가 장어 국수라고 말할 때 언니 표정을 보면 설마 두 사람 사이에 장어 국수와 관련된 스토리가 있었던 건가?’호기심이 활활 불타오른 한현진이 몰래 테이블 아래로 강한서의 손을 꼬집었다. 그러자 강한서는 그녀에게 새우를 발라 주었다. 한현진: ...강한서과 문채영은 너무 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한현진은 문채영의 외할머니와 강한서의 할머니가 먼 친척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촌수가 먼 사이라 피가 거의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지낸지 한참 후에야 두 가문이 몇 세대 전에는 친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현진이 고개를 들자 옆에 서 있는 벤틀리가 보였다. 송민준이 운전석에 앉아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차창은 닫혀 있었으니 송민준은 당연히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강한서의 차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차를 세운지 한참이 지나도 두 사람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송민준은 강한서가 또 이상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송민준의 목소리를 들은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을 놓고 그녀의 옷을 정리하며 단정하게 자리에 앉았다. 민경하는 은연 중에 자신의 미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차에서 내린 송민준은 카키색의 캐주얼한 외투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평소 한열이 자주하던 헤어스타일과 비슷했고 선글라스를 콧등에 걸친 채 입술을 앙다물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넓은 어깨에 긴 다리의 그가 우뚝 서 있으니 카리스마와 매력이 흘러넘쳤다. 전엔 그가 한열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이런 차림에 선글라스까지 쓴 모습을 보니 만약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아마 그를 한열로 착각할 것도 같았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이 가방을 메고 송민준을 향해 걸어갔다. “오빠, 오늘 왜 이렇게 멋져요?”송민준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내가 언제 안 멋진 적이 있었어?”한현진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어떤 날이든 멋지긴 하죠. 그래서 언제 데뷔할 생각이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건네받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난 열이와 캐릭터가 너무 비슷해. 내가 데뷔하면 연예계에 걔 자리가 있긴 할 것 같아?”한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송민준은 손을 들어 검지로 콧등에 걸린 선글라스를 아래로 내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강한서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쟨 차에서 뭐하는 거야?”“업무 통화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한현진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가자. 우린 먼저 올라가는 게 좋겠어. 혼자 미적거리라고 해.”룸에 도착하자 송민준은 그제야 물었다. “너희 두 사람, 대체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이렇
한현진이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강한서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마음 약해질 줄 알았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한현진이 말했다. “처음엔 마음이 약해졌는데 조금 전 불쾌한 일이 있었거든.”한현진은 간단하게 주혁이 무릎 꿇은 일을 서술했다. “난 사실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건 아니었어. 하지만 꿇어앉아 있는 기사님 모습을 본 순간 화가 치밀더라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러니까 날 강박하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 기회를 빌려 바로 전근시켰어.”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오는 길에 계속 마음이 불편했어. 내가 너무 극단적으로 처리한 건 아닌가 싶었거든. 기사님은 지금 아들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돈이 부족한 상황이거든. 전근하면 월급은 당연히 전보다 줄어들 텐데.”강한서가 한현진의 손등을 토닥였다.“인공 달팽이관은 보청기와 비슷한 거야. 생명과 직결된 문제도 아니니 돈이 부족하다고 해도 당장 급할 건 없어. 하지만 굳이 너를 속여 가며 부업을 하려고 했어. 난 그 부분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멈칫한 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기사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모르지.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무릎을 꿇고 자존심 따위는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원하는 건 자신의 존엄보다 훨씬 더 소중한 걸 거야. 전근이 제일 좋은 선택이었어. 네가 그 사람을 곁에 두는 건 내가 불안해.”강한서는 한현진의 손을 잡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약해지지 마. 네가 마음 약해질 때마다 난 심장이 떨려.”“휴. 신세를 지기도 했고 기사님 집에는 장애인이 두 명이나 있잖아. 안타까워서 그러지. 내가 언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약해지는거 봤어? 난 아주 독한 사람이라고.”강한서는 곧바로 태클을 걸었다. “강운이에겐 마음 약하게 굴었잖아.”지나간 이야기를 꺼내려는 강한서의 태도에 한현진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불쌍해 보이는 주 변호사님 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