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단해는 송민희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채 나지막이 말했다. “투정 그만 부리고 차에 가서 기다려.”송민희가 강단해의 옷을 잡고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안 된다고 했잖아요. 형님은 아들이 없어요, 딸이 없어요? 당신이 왜요?”“한서와 민서가 오겠다고 했으면 왜 나한테 전화했겠어? 어쩔 수 없으니까 날 찾은 게 분명하잖아.”화가 난 송민희가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자기 아들딸도 풀어주지 않으려는 사람을 당신이 뭔데 도와주려는 건데요? 게네들이 안 온다고 해도 친정집 식구들도 있잖아요. 형님은 동생도 있는데 왜 당신이 나서서 나대는 거예요?”강단해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말을 왜 그렇게 하는 거야? 내가 나서서 나대다니? 형수님도 우리 강씨 가문 식구잖아. 형수님에게 일이 생기면 우리 가문은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니라는 거야?”“강씨 가문 체면을 생각하기는 한 거예요?”송민희가 냉소 지었다. “그럼 오늘 밤 무슨 일이 있어서 형님이 경찰서에 잡혀 왔는지 알기는 해요?”강단해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든 우리가 그냥 모른 척 넘어갈 수는 없잖아.”“검찰이 전 의원을 데려갔어요. 형님은 전 의원을 딸과 장씨 가문을 맺어줬고요. 지금 검찰에서 전 의원의 비리를 캐고 있어요. 만약 형님이 정말 전 의원과 어떤 관련이 있다면 우리 가문도 같이 휘말리는 거라고요. 그런데도 형님을 풀어주는 일에 힘쓰고 싶어요? 사람들이 이 일을 빌미로 공격할까 봐 두렵지는 않아요?”강단해가 굳은 얼굴로 입술을 짓이겼다. “형수님께서는 전 의원과 경제적 거래가 없다고 하셨어. 이번 일은 형수님관 관련 없을 거야.”“형님 말이면 다 믿는 거예요? 형님이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다면 당신이 이렇게 부랴부랴 달려와 형님을 감싸주려고 했겠어요?”강단해가 입술을 짓이겼다. “아무리 그래도 한 가족이잖아. 이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어.”“내버려둘 수 없으면요? 어떻게 할 건데요? 우리 가문 이미지 전부를 걸기라도 할 거예요? 아주버님이 돌아가시고 지금
말하며 송민희는 휴대폰으로 가족사진을 보여주었다. “형사님, 오해예요. 저 사람은 제 남편이에요. 얘들은 우리 조카들이고요. 설이라 조카들이 고모부에게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해주고 싶다고 해서 일부러 식당까지 빌려 설 인사를 하려고 했거든요. 술을 마시기 싫어서 일부러 저러는 거예요.”강단해의 얼굴이 분노로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저 여자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는 거예요.”경찰은 강단해를 힐끔 쳐다보더니 송민희가 보여준 사진을 자세히 관찰하고는 그녀에게 휴대폰을 돌려주며 손을 흔들었다. “입구 막지 마시고 차는 옆으로 빼주세요.”“알겠어요. 얼른 갈게요.”경찰에게 사과한 송민희는 고개를 돌리자마자 웃음을 거두고 조수석에 올라타 차갑게 말했다. “가자.”뒷좌석의 강단해는 직업 군인 출신인 두 조카 사이에 앉았다. 강단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그는 지금 차에서 내리기는커녕 조금만 움직여도 손목을 꽉 잡혔다. 한평생 이런 창피는 당해본 적이 없는 강단해가 어두운 얼굴로 송민희에게 소리쳤다. “넌 정말 대단한 여자야. 내일 당장 이혼 서류 제출해.”송민희가 그런 강단해를 힐끔 쳐다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안 할 거예요.”스포츠카가 강한서가 타고 있던 차량을 지나치자 강한서는 갑자기 차창을 내려 덤덤한 시선을 보냈다. 멈칫, 행동을 멈춘 강단해는 그제야 송민희가 이곳을 정확하게 찾을 수 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의 얼굴이 분노로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들이 경찰서를 나서자 강한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강단해는 송민희에 의해 잡혀갔지만 그가 데려온 변호사는 아직 경찰서에 있었다. 그 변호사는 지금 강단해의 비서와 연락해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상의하려고 했다. 소리 없이 그 변호사에게 다가간 강한서가 상대방의 휴대폰을 쓱 가져갔다. 그에 변호사가 깜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대표님?”강한서가 휴대폰을 돌려주며 태연하게 말했다. “돌아가세요.”“하지만—”“아니
멈칫하던 강민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신미정을 불렀다. “엄마...”신미정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민서야, 엄마가 오늘 일부러 너한테 그렇게 못되게 대한 거 아니야. 네가 한현진을 도와 날 속인 게 정말 너무 화가 나서 그랬어. 그래서 그런 거야. 너 어렸을 때 엄마가 널 얼마나 아꼈는데. 뭐든 좋은 건 전부 너에게 줬어. 네가 경찰서에 들어갔을 때도 내가 여기저기 부탁해서 겨우 꺼내줬는데, 네가 엄마를 나 몰라라 하면 안 되지.”강민서가 시선을 내리고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엄마, 전 못 도와드려요. 오빠가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그럼 넌 그렇게 두 눈 멀쩡히 뜨고 엄마가 들어가는 걸 보고 있을 거야? 넌 이 안에 어떤 상황인지 알기는 해? 7, 8명이 한방을 쓰고 있어. 침대도 없고 악취도 심하다고. 보일러도 없어서 추위에 덜덜 떨고 있어. 민서야, 엄마 몸이 안 좋아서 정말 못 견디겠어. 엄마 좀 도와줘.”강민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저도 어떤 곳인지 알아요. 거기선 엄마 성질 좀 죽여요. 안에 있는 사람들, 전부 범죄의 벼랑 끝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최대한 건드리지 마셔야 조금이라도 편하게 지낼 수 있어요.”강민서의 말에 신미정은 울던 것도 멈추고 그만 멍해졌다. 살려달라고 전화한 것이지 설교나 들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불쌍한 척해도 통하지 않자 연기는 아예 집어치운 신미정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강민서! 이 배은망덕한 것. 내가 널 괜히 예뻐했어. 사인하고 돈 좀 내면 되는 건데, 그것도 못 해줘? 내가 이 나이에 여기서 이러고 있으라니, 네가 사람이니? 네가 이런 애인 줄 진작 알았다면 애초부터 태어나자마자 널 목 졸라 죽여야 했어.”“내가 여기 있으면 너에겐 뭐 좋은 일이라고! 나에게 이런 오점이 생기는 한, 다른 사람이 넌 안 헐뜯을 것 같아? 고고한 재벌집 자제들이 너와 계속 친구 해줄 것 같냐고. 네가 그동안 한 짓들 때문에 넌 제대로 된 집안과는 결혼도 할 수 없을 거야. 너—”강민서
사실 강민서는 민경하가 무슨 일이냐며 물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오늘 밤 있었던 일이든, 조금 전 신미정과의 통화 내용이든 그 어떤 것도. 한참 동안 화장을 닦던 강민서의 배가 꼬르륵 소리 냈다. 침묵을 깨는 소리에 강민서는 괜히 뻘쭘해졌다. 오늘 하루 종일 신미정이 결혼식에서 한현진에게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 마음을 졸이고 있느라 아무것도 먹지 못했었다. 배가 신호를 보내서야 그녀는 배고프다는 것을 인지했다. 하지만 지금은 배고픔보다는 창피함이 더 크게 다가왔다. 민경하는 아무 말 없이 옆에 있던 보온 도시락을 열어 강민서에게 건넸다. 향긋한 호빵 향이 물씬 풍겨오자 강민서는 그만 멍해졌다. 민경하가 말했다. “엄마가 민서 씨 드시라고 만들어주신 고구마 호빵이에요. 조금 식었을 거예요. 드시기 싫으면 다른 거 먹으러 가요.”“아뇨.”강민서가 도시락을 품으로 확 당기며 시선을 내렸다. 그녀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충분히 좋은걸요.”민경하가 차창을 비스듬히 열고는 물을 강민서에게 건넸다. “드세요. 다 드시면 집에 데려다줄게요.”강한서가 고개를 숙여 작게 대답하고는 고구마 호빵을 들어 한 입 한 입 먹기 시작했다. “고구마 호빵도 만들 줄 아시고, 아주머니가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요.”민경하가 말했다. “맛있어요? 엄마도 얼마 전에 배운 거예요. 지난번 같이 식사할 때 민서 씨가 계속 고구마 호빵을 드셨다면서 배워보신 거라고 하더라고요. 대표님께서 민서 씨를 데리러 가라고 하셔서 엄마가 드셔보라고 조금 담아주셨어요.”그 말에 강민서가 오물거리던 입을 멈추었다. 코끝이 찡해오더니 후드득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똑같이 자식을 둔 어머니였다. 강민서는 심지어 민경하의 여자친구도 아니었지만 고윤은 강민서를 위해 한 번도 만들어 본 적 없는 호빵 만드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그녀의 친엄마인 신미정은 눈 하나도 깜짝하지 않고 그녀는 끝도 없는 낭떠러지로 밀어 넣었다.
한현진이 홱 손을 거두며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왜 내 이불을 덮고 있는 거야?”몸을 일으키던 강한서가 한현진의 말에 멈칫했다. “누구 이불인지 잘 봐요.”고개를 숙여 덮고 있던 이불을 확인한 한현진이 입을 닫았다. 그녀는 조용히 강한서의 이불에서 빠져나와 자기 이불을 가져와 다시 덮었다. “나 예전엔 얌전히 잤어.”한현진이 애써 해명했다. “임신해서 그런 게 분명해. 배 속의 아기 때문이야.”강한서가 침대에서 내려와 잠옷을 벗고는 셔츠를 걸치더니 단추를 잠그며 말했다. “괜찮아요. 먼저 몸정이라도 쌓자면서요. 이해해요.”말하며 그가 고개를 들었다. “다음엔 그냥 한 이불 덮자고 얘기해요. 빙빙 돌려 말할 필요 없어요.”“...”‘난 그런 적 없거든.’요즘은 정말 이상한 일투성이였다. 분명 잠들기 전엔 각자 자기 이불을 덮고 잠이 들었다. 하지만 아침이 되면 그녀는 늘 강한서의 이불 속에서 눈을 떴다. 처음 몇 번은 강한서가 일찍 일어난 덕에 뻘쭘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엔 얼굴을 마주 보며 눈을 뜬 탓에 강한서는 한현진이 그의 몸을 탐해 한밤중에 기어들어 온 것이라고 오해할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한현진은 정말 그런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임신한 후로 한현진은 눈을 감기만 하면 깊은 잠에 빠졌다. 어떨 땐 강한서를 유혹해볼까 생각하다가도 강한서가 침대에 올라오기도 전에 먼저 잠에 들곤 했다. ‘설마 내가 이 정도로 잠버릇이 심해졌다는 거야?’강한서는 침대에 앉아 괴로운 얼굴을 한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기분이 꽤 상쾌해졌다. “병원 가게 이젠 일어나서 준비해요.”머리를 움켜쥔 한현진이 멍한 채로 대답했다. 그녀가 방에서 내려왔을 땐 테이블에 꽃 한 다발이 놓여있었다. 꽃잎에 이슬까지 맺혀 있는 싱싱한 꽃이었다. 꽃다발 앞으로 다가온 한현진은 옆에 하늘색 보석함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멈칫하던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넥타이를 매고 있던 강한서가 한현진이 돌아보자 설명했다
“꽃도 민 실장님이 고르신 거지?”한현진이 꽃을 만지며 물었다. “역시 민 실장님 안목이 좋아. 싱그러운 것 좀 봐.”강한서가 그만 참지 못하고 말을 내뱉었다. “꽃은 제가 산 거예요.”한현진이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꽃은 왜 샀어?”“전—”강한서가 한현진의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꽃 파는 여자아이가 불쌍해 보이길래 전부 사 왔어요.”‘개자식, 한번 답답해 보라지.’한현진이 콧방귀 뀌었다. “어쩐지 시들시들하더라니, 땡처리하는 걸 사 온 거네.”그녀의 말에 강한서는 어리둥절해졌다. ‘민 실장이 사 온 줄 알았을 땐 싱그럽다고 하더니, 내가 사 온 거라니까 시들시들하다고?’강한서는 꽃다발을 노려보며 화가 난 듯 꽃망울 하나를 꽉 움켜쥐었다. 그리곤 차에 탈 때까지 한현진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 강한서의 모습에 한현진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땐 겨우겨우 참았지만 아무도 없이 단 둘뿐이자 그는 온 얼굴로 기분을 드러냈다. ‘이런 같잖은 연기력으로 무슨 기억 잃은 척을 해.’산부인과 검진을 받는 곳은 한성대학병원이었다. 이곳에서 검진과 진료를 받는 사람은 대부분 퇴직한 공무원이거나 연예계의 배우들이었다. 개인 정보 보호와 기밀성이 좋은 병원이었다. 한현진의 주치의는 한준우의 선배였고 전에 이미 진료를 보인 적이 있던 터라 한현진의 몸 상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강한서는 검진 내내 한현진 옆에 붙어있었다. 검진 결과를 받을 때마다 그는 한참을 들여다보며 확인하곤 했다. 그 모습에 한현진이 웃으며 말했다. “네가 의사도 아니고, 보면 알아?”강한서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아직도 아침 일 때문에 화가 난 듯했다. 한현진이 입을 삐죽이며 마음속으로 욕을 지껄였다. ‘쪼잔하긴.’초음파 검사를 진행하던 의사가 갑자기 놀란 기색을 보이더니 곧 미간을 찌푸리고 모니터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표정이 조금 굳어져 있었다. 한현진의 심장도 같이 덜컹 내려앉았다. 매번 검사를 진행할 때마다 의사의 갑작
한현진에게 식단을 다시 짜준 의사는 그녀에게 혈당 관리를 잘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쌍둥이는 아무래도 한 명을 임신한 것보다 위험 부담이 높았다. 그러니 태아의 성장 속도를 엄격하게 조절해야 했다. 태아가 작아야 발육도 잘 되고 건강했다. 그리고 훨씬 수월하게 출산할 수 있었고 산후 회복도 더 빠를 수 있었다. 강한서는 휴대폰을 꺼내 의사가 알려준 모든 것을 메모장에 기록했다. 열심히 듣고 있던 한현진은 물컵을 가지려다 메모장에 하나하나 적어 내려가는 강한서의 모습을 보고는 괜히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회사의 나이 지긋한 임원이 정색하며 회의 기록을 작성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전혀 의사의 말을 받아적는 모습 같지 않았다. 진료실에서 나온 후 강한서는 줄곧 한현진의 손을 잡고 있었다. 한현진은 그런 그에게 기억 잃은 연기를 계속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눈치를 주지도 않았다. 흥분되고 걱정스러움이 섞인 강한서의 감정을 한현진은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꽉 맞잡은 손가락 사이로 강한서의 마음이 조금씩 전해졌다. 사실, 그녀도 그와 같은 마음이었다. 아이를 가진 것만으로도 한현진은 하늘이 가엽게 여겨준 것이라 생각했었다. 쌍둥이라니, 감히 꿈 꿔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너무 갑작스러운 일도 아닌 듯했다. 그녀는 얼마 전 꿨었던 해파리 꿈을 떠올렸다. 꿈속의 예쁜 물방울은 두 개로 갈라졌었는데 어쩌면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말하던 태몽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그녀의 식욕 역시 같은 개월 수의 임산부보다 더 왕성했다. 게다가 너무 쉽게 배고픔을 느꼈다. 이제 보니 쌍둥이를 임신했으니 식욕이 좋은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쌍둥이... 교수님 말처럼 남자아이 하나, 여자아이 하나면 얼마나 좋겠어.’‘물론 딸이든 아들이든 내 새끼면 다 좋지.’혼자만의 생각에 푹 빠져있던 한현진은 앞을 제대로 보지 않아 남자에게 부딪혀 그의 손에 들려있던 약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깜짝 놀란 한현진이 사과하며 허리를 숙여 그 남자의 약
굳은 얼굴의 한현진의 머릿속에는 이성과 욕심의 전쟁이 한창이었다. 그녀는 한참 만에야 강한서의 말에 대답했다. “그래.”말을 마친 그녀는 심장 근처를 부여잡고 생각했다. ‘한현진, 정말 못났다.’하지만 고개를 돌린 순간 마주한 강아지처럼 반짝이는 강한서의 눈을 마주하자 또 생각했다. ‘좀 못나도 뭐 어때. 강한서가 더 못나 보이는데.’강한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럼 전 민 실장에게 전화할게요.”목소리를 가다듬은 한현진이 말했다. “나도 오빠한테 전화할게.”한현진은 휴대폰을 들고 한쪽으로 걸어가 송민준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오빠, 바빠요?”송민준이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친구랑 술 마시고 있어. 왜?”룸에서 나온 듯 전화 너머의 시끄럽던 소리가 순간 사그라들었다. “별일은 아니고...”한현진이 떠보듯 말을 꺼냈다. “오빠, 오빠 도장 오빠한테 있어요?”송민준은 한현진의 물음에 대답 대신 오히려 질문을 던졌다. “내 도장은 왜?”“아니, 지난번 부동산 명의 변경했었잖아요. 소유권 이전 등기 신청하려고요.”한현진은 송민준에게 거짓말을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혼인신고 할 때 증인의 도장이 필요한 것 때문이라고 얘기하면 그는 제일 먼저 도장을 숨길 것이 분명했다. 지금 송민준과 송병천에게 강한서는 아직도 기억을 잃은, 관찰 대상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송민준이 말했다. “내 도장은 아버지가 숨기셨어. 네가 강한서에게 속아 혼인신고를 하게 되면 제일 먼저 나에게 증인을 해달라고 할 수 있다고 내 도장을 가져가셨어.”“...”뭐든 대충 흘려보내던 아버지가 이런 일에선 전에 없던 명석함을 보였다. “아빠도 참. 내가 그런 멍청한 일을 하겠어요?”한현진이 나지막이 불평했다. 송민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오히려 아버지가 선견지명이 있으셨다고 생각해.”“...”“친구가 불러서 먼저 끊을게. 소유권 이전 등기 신청은 나중에 내가 사람 시켜서 마무리할 테니까 넌 신경 쓰지 마.”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