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자고 있어요. 오늘 아침 오빠가 친척분들께 인사하러 갔잖아요. 오빠가 너무 비싼 선물을 준비했다고 하면서 난리를 피워서 오빠와 한바탕 싸웠어요. 오빠가 한현진을 집에 버려두고 혼자 갔거든요. 아마 지금쯤 방에서 울고 있을 거예요.”강민서의 말에 민경하가 어리둥절해졌다.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안다니까요. 다른 사람이 왜 자기 말이라면 다 들어야 하는 건데요.”신미정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래? 요즘도 자주 싸우니?”“네. 한현진은 아직도 오빠가 예전 같은 줄 알고 뭐든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니까요. 하지만 오빠가 이젠 한현진을 기억하지 못하잖아요. 한현진이 그러는 걸 볼 때마다 짜증을 내더라고요.”신미정이 눈을 감았다. “넌 지금 어디야?”“저요?”강민서가 멈칫하더니 말을 이었다. “저도 집이죠. 지금 바닥에 기름칠하는 중이에요. 좀 이따 위층에서 내려오다 미끄러지면 애가 떨어지지 않고는 못 배길 거예요.”강민서의 통화를 듣고 있던 민경하의 얼굴이 의문으로 가득 찼다. 주먹을 쥐고 있던 신미정의 손에 더 힘이 실렸다. “그래, 잘하고 있어.”신미정의 말투가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강민서는 조금 불안해졌다. “엄마, 왜 그래요?”차에 올라타는 한현진의 모습을 보며 신미정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것도 아냐. 너무 티 나게 굴지 마. 며칠 있으면 시은 씨 딸 결혼식이야. 한현진도 불러서 같이 와.”강민서가 멈칫했다. “엄마, 한현진은 그분과는 앙숙 같은 사이였잖아요. 안 가려고 하지 않겠어요?”“안 가겠다고 하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가게 만들어.”신미정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넌 똑똑하니까 이 정도는 어려운 일 아니겠지.”미간을 찌푸린 강민서가 한참 만에야 말했다. “알겠어요.”전화를 끊은 신미정이 휴대폰을 있는 힘껏 내동댕이쳤다. 그녀의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전화를 끊은 강민서가 고개를 돌리자 이상한 눈빛으로 자기를 훑
“안 가요.”“그래요.”민경하가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 “마침 회장님께 보고드리면 되겠네요.”그의 말에 강민서는 하마터면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잠, 잠깐만요.”민경하는 느긋하게 강민서를 바라보았다. 주먹을 꽉 움켜쥔 강민서는 한참 만에야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가면 되잖아요.”영화관에 도착해 민경하가 ‘살의’를 예매했다는 것을 안 강민서는 그대로 몸을 돌려 영화관을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민경하에게 끌려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미쳤어요? 설 연휴에 저더러 한현진 흥행이나 도우라고요?”민경하가 말했다. “편견은 버리고 봐요. 영화 평점은 높으니까.”강민서가 민경하의 말을 받아치기도 전에 옆에서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없네. 코미디 영화를 예매했더니 미스터리 영화나 보여주고 있네. 누가 이거 보러 왔대? 노이즈 마케팅이나 하는 것들이 발연기나 하는 거로 모자라 이런 식으로 관객수까지 속이다니.”강민서가 민경하를 밀어냈다. “누가 관객수를 속였다는 거예요? ‘서강월’ 티켓으로 ‘살의’를 보고 있으면서 그쪽 돈을 벌어간 게 누군지도 모르는 거예요?”강민서에게 된통 혼난 그 사람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민경하가 얼른 강민서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죄송해요, 취해서요.”“미친.”욕설을 내뱉은 그 사람이 상영관을 나섰다. 강민서는 씩씩거리며 민경하를 노려보았다. “어물쩍 넘어갈 줄밖에 몰라요?”민경하가 말했다. “사모님을 뭐라 하는 건데 왜 강민서 씨가 화를 내고 그래요?”“전...”민경하가 이를 악물었다. “전 한현진이 오빠 얼굴에 먹칠할까 봐 그러는 거예요. 고작 영화 하나 촬영하면서 관객수를 속인다는 말이나 들으니, 나중에 흥행 기록이 엉망이면 얼마나 X 팔려요.”말하며 민경하를 뿌리친 강민서는 프런트 데스크로 달려가 전석을 예매해 버렸다. 민경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한참을 웃더니 강민서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한편, 한현진이 탄 차는 곧 보육원에 도착했다.
정신을 차린 한현진은 도일준과 악수를 나누었다. “보육원에 지원을 아끼지 않아 주셔서 감사해요.”그 사람은 얼굴을 꽁꽁 가렸을 뿐만 아니라 악수할 때도 장갑을 벗지 않았다. 상대방과 악수를 한 한현진은 그의 손이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남자 손이 이렇게까지 작은 건 본 적이 없는데, 키가 작아서 그런가?’상대방이 말했다. “돈이란 건 태어날 때 가지고 올 수도 없고 죽어서 가지고 갈 수도 없는 거잖아요. 제가 아직 걸을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저를 위해 음덕을 쌓는 일이겠죠.”그 말은 마치 이미 속세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본 한 인간의 죽기 직전 유언 같았다. 한현진은 도일준을 훑어보았지만 너무 꽁꽁 숨기고 있던 터라 자세히 볼 수 있는 것은 눈뿐이었다. 하지만 눈을 봐서 그다지 나이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이상한 사람이었다. “요즘... 요즘 잘 지내셨어요?”상대방이 건넨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멍해졌던 한현진의 눈빛이 깊어졌다. “절 아세요?”도일준의 눈빛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는 마치 별거 아닌 듯 가볍게 말했다. “전 현진 씨 어머니이신 하현주 씨와 안면이 조금 있는 사이에요.”하현주의 친구들은 이미 대부분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했었다. 그녀와 친구들은 하현준의 휴대폰에 저장된 연락처에 따라 하나하나 직접 부고를 보냈었다. 하현준의 장례식에서 한현진은 눈앞의 사람을 본 기억이 없었다. 어머니가 병상에 누워있던 그 몇 년 동안에도 한현진은 이런 사람이 병문안 온 것도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몇 번 안면이 있는 사이일 뿐인데, 이렇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게다가 좋은 일을 하려는 목적의 사람이 다른 곳도 아니고 하필 엄마가 후원한 적이 있는 보육원에 기부를...?’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엄마 지인분이셨군요. 연락처를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엄마께서 생전에 늘 젊은 시절의 창업은 주변 친구들의 도움을 많이 받으셨다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명절마다
노원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 번인가 왔었던 게 전부야. 올 때마다 현금으로 가지고 오셨어. 지난번에 왔을 때 먹는 약을 봤더니 항암치료제더라고. 아마 아프신 것 같아. 그것도 아주 많이.”방금 모자가 떨어지며 드러났던 듬성듬성한 머리를 떠올리니 아마 항암치료의 부작용인 것 같았다. ‘설마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좋은 일이라도 하시려는 걸까.’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쩐지 이상한 사람 같았다. 게다가 요즘 같은 시대에 현금으로 기부하는 것도 조금 이상했다. 처음에는 2000만 원을, 그다음에는 4000만 원을 기부했다. 만 원권으로 그렇게 많은 현금을 가지고 오는 것도 쉽지는 않았을 텐데. 무엇보다 현금다발을 들고 오는 것이 그다지 안전한 방법도 아니었다. 한현진은 고개를 숙여 사진을 확인했다. 역시 눈밖에 알아볼 수 없었다. 사진에 잠시 머무르던 손가락을 움직여 카톡 채팅창으로 들어간 한현진이 송민준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빠, 도일준이라는 사람 좀 알아봐 줘요.]아직 비행기에 있을 송민준은 아마 착륙해서야 이 문자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송민준이 3일 동안 M 국에 머무르자 서해금은 매일매일을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지내고 있었다. 설 연휴가 끝나는 날, 송민준이 돌아왔다. 한현진과 강한서가 공항으로 마중을 나갔고 세 사람이 함께 한현진의 본가로 돌아갔다. 송병천은 비록 티를 내지 않았지만 아들이 M국으로 가 있는 동안 그 역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시 대사관에서 걸려 온 전화는 아무래도 그에게 지우기 힘든 트라우마를 남긴 모양이었다. 집에 도착해 차를 끓였다. 잠깐의 휴식 후 송병천이 물었다. “어떻게 됐어? 비행기 사고 원인은 알아냈어?”차를 한 모금 마신 송민준이 찻잔을 내려놓고 나서야 대답했다. “알아냈어요.”송병천이 다급하게 물었다. “사고 원인이 뭐야?”서해금이 고개를 숙이고 귤을 까고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무미건조한 송민준의 눈빛이 슥 서해금을 훑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더니 말했다. “여보, 깔린느가 설립되었을 때, 아름 언니가 제조했던 첫 향수 제조 방법이 유출됐던 일 기억해요?”그 말에 멈칫한 송병천이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 일이었다. 강한서를 비롯한 아이들은 그 일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했지만 송병천은 알고 있는 일이었다. 당시 제조 방법을 유출된 건 회사의 한 인턴 때문이었다. 그 직원은 인턴 기간이 끝나자 첫 제조 방법을 가지고 다른 회사로 이직했다. 그로 인해 깔린느의 첫 향수는 폐기 되어야 했고 향수 제조에 투입되었던 모든 인력과 자금은 전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1년 후 깔린느의 메인 향수인 미스틱이 출시되고 나서야 회사는 기밀 유출 사건의 손해를 메꿀 수 있었다. 서해금이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인정이 없는 게 아니라, 이미 그런 일을 한 번 겪어봤었잖아요. 아람 언니도 그 일로 회사에 인턴을 채용하지 않는다는 규정도 세웠었고요. 깔린느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규정을 어긴 적이 없어요. 만약 이번 일로 특혜가 주어진다면 회사에 계신 다른 직원분들께 뭐라 드릴 말이 없잖아요.”서해금의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다. 당시 기밀 유출 사건으로 인해 회사의 인턴에게 트라우마가 생긴 한아람은 더 이상의 인턴 채용을 거부했었다. 하지만 그 말에 한현진은 오히려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웃음소리는 모두가 진지한 상황과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소리였다. 모두의 시선이 한현진을 향했다. 한현진이 컵 안에 담긴 대추를 돌리며 태연하게 말했다. “아주머니, 회사 인사 규정에는 호흡기 질환이 있는 사람은 채용하지 않는다는 조항도 있어요. 하지만 천식이 있는 가람 언니도 깔린느 직원으로 출근하고 있잖아요. 인사팀에서 서류 심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건가요, 아니면 특혜인가요?”한현진의 말에 서해금은 턱, 말문이 막혔다. 그와 달리 송가람은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그게 어떻게 같아요? 깔린느는
“됐어.”송병천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규정은 온도가 없어. 그렇다고 인간에게도 온도가 없는 거야? 우리가 처음 해외로 갔을 때, 네가 주차장에서 강도를 만났었지. 그때 세은이가 발견하고 사람을 부르지 않았다면 네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을 것 같아?”“지금 세은이 아빠가 사고를 당했어. 그저 인턴으로 출근할 기회를 주자는 건데 지금 넌 그 제안을 반대하며 회사 규정을 들먹이고 있어. 정말 회사 규정대로라면 넌 깔린느에게 이력서를 넣을 자격조차 없어.”송가람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송병천과 서해금이 재혼 후 송병천은 늘 송가람을 끔찍이 아꼈었다.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이렇게 심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내가 자격이 없으면, 한현진은 자격이 있어?’제일 먼저 인턴 얘기를 꺼냈던 강한서가 덤덤히 목소리를 냈다. “아저씨, 화 푸세요. 가람 씨도 아람 아주머니가 겪으셨던 일이 또다시 반복될까 봐 걱정돼서 그러는 거예요.”한현진이 눈썹을 실룩였다. ‘송가람 환심을 살 타이밍 하나는 잘 보네.’역시, 강한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송가람이 눈시울을 붉혔다. 강한서를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에 억울함이 잔뜩 묻어있었다. ‘쯧.’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은 그래도 강한서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한 한현진은 탁 소리 나게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강 대표님, 제 기억이 맞다면 강 대표님 회사에서도 인턴이 대형 사고를 친 이력이 있죠? 그래서 강 대표님께서도 줄곧 인턴을 채용하지 않으시고선 저희에겐 그런 제안을 하시더니 이젠 또 가람 언니 편을 드는 거예요?”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인턴 채용은 깔린느의 일이니 당연히 제가 끼어들 자격은 없어요. 전 그저 가람 씨도 생각이 있어서 반대하는 것 같아서 그래요. 아무래도 특혜를 받아 입사한 사람이니 만약 사고가 생기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건가요?”“제가요.”한현진이 서해금을 보며 말했다. “아주머니, 실수가 반복되는 게
하지만 만약 한현진이 내건 조건이라면 서해금은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역시나 한현진의 말에 서해금이 표정이 조금 흔들렸다. 그녀가 입술을 짓이기며 말했다. “현진아, 아주머니도 세은이가 인턴으로 들어오는 걸 반대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이렇게 큰 회사에 너와 아버지의 한마디로 모든 걸 결정할 순 없어. 나도 다른 부서들과 얘기도 해봐야 하고 직원들의 마음도 신경 써야 해. 예전에도 딸을 인턴으로 써달라는 임원이 있었지만 회사 측에서 모두 거절했어. 안 된다고 단호하게 얘기해 놓고는 자기 일에는 이렇게 입장을 번복한다면 어떻게 기강을 세울 수 있겠니?”“세은이 아빠 일은 나도 안됐다고 생각해. 내 마음도 너희들과 다르지 않아. 네 아빠는 사람 간의 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잖니. 너도 그렇고. 그러니 이렇게까지 얘기가 나온 이상 내가 계속 반대한다면 너무 인정머리 없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현진아, 난 최악의 상황을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어. 인턴을 채용한 후 문제가 생기는 날엔 네가 그에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할 거야. 혹시 나중에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아줌마가 인정이 없다고 원망하지 마.”듣기엔 꾸밈없는 솔직하게 내뱉은 말 같았다. 마치 서해금에겐 아무런 사심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송병천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뭔가 얘기를 꺼내려고 하자 송민준이 송병천의 발을 꾹 디뎌 입을 닫게 했다. 한현진이 웃으며 말했다. “아주머니께서 회사 일은 신중하게 고민하시는 것도 제 어머니의 노력이 헛되게 하지 않으려고 그러시는 건데 저도 당연히 이해하죠.”말문이 막힌 서해금이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이해하면 됐어.”송병천에게 혼난 송가람은 밥 먹을 때가 되었지만 방으로 들어가 나오려 하지 않았다. 마지막엔 서해금이 달래러 올라가서야 얼굴을 비췄다. 서해금의 표정은 굳어있었고 송가람은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마도 방에서 서해금에게 혼난 모양이었다. 송가람은 늘 금이야 옥이야 하며 가족들의 손에 떠받들려 살았다. 부
한현진의 말에 번뜩 정신을 차린 송가람이 뻗었던 손을 거두었다. 송가람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처음부터 바로 조건을 얘기할 수도 있었는데 왜 굳이 제 얘기를 꺼낸 거예요? 아빠가 절 미워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거예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어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한현진은 일어서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송가람은 서 있고 한현진은 앉아 있었으니 송가람이 한현진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서늘한 한현진의 눈빛에 송가람은 어쩐지 오히려 한현진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언니가 착각하셨네요. 제가 무슨 재간이 있어서 언니가 할 말을 예측할 수 있겠어요. 아빠가 언니를 싫어하시는 건 본인에게서 문제점을 찾으셔야죠. 아빠가 언니를 아껴주고 사랑해 주며 인간의 도리를 가르쳤지만 언니는 오히려 주 기장님 죽음이 우리와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했어요. 그러니 아빠가 어떻게 화나지 않을 수 있겠어요?”그 말에 송가람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건 그냥 사고였어요. 현진 씨는 그저 그 일을 이용해 아빠 앞에서 좋은 이미지를 세우려는 것뿐이잖아요.”한현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은혜에 보답하는 건 인간의 제일 기본적인 도리 아닌가요? 가람 언니에게 그런 건 그저 좋은 이미지를 위한 연기에 불과한 거였군요. 그럼 언니가 강한서를 구해준 것도 그런 이유라고 생각해도 될까요?”송가람이 움찔 몸을 굳혔다. “헛소리하지 마. 한현진, 내가 한서 오빠를 구한 이유로 오빠가 나에게 마음을 주니까 이렇게 쪼잔하게 구는 거잖아. 내가 뭘 해도 마음에 안 들고 날 적대시하는 거잖아. 하지만 네가 아무리 그래도 오빠는 여전히 널 기억도 하지 못해. 오빠 마음속에 넌 그리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고.”한현진은 차분하게 미쳐 날뛰는 송가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의 송가람은 한 번도 이렇게 한현진 앞에서 난리를 피운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송병천에게 혼나고 서해금에게 꾸지람까지 듣고 분노를 이기지 못한 탓인지 드디어 한현진에게 폭언
대장은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건 물론이죠. 이미 먼저 주혁 씨에게 연락했어요. 집에서 가족들과 상의한 후 곧바로 답을 준다고 했습니다. 그의 집안 사정으로 회사가 이렇게 좋은 혜택을 주는데 그가 신청하지 않겠어요? 절대 그럴 리 없죠.”원율은 잠시 담배를 피운 뒤 담배 끝을 비벼 끄며 말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른 부서에도 더 전해야 하니까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대장님, 일 보세요.”원율을 보내고 나서 대장은 다시 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혁 씨, 가족이 두 명이니까 연간 십만 원도 안 되게 더 내면 돼. 한 달에 만 원도 안 되고 가족이 병원 갈 때 드는 비용은 전부 보장돼. 이 작은 돈 아끼려고 하지 말고 큰 기회를 놓치지 마.”주혁은 돈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가장 싫어한 건 그 돈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족을 위한 보험에 가입하면 이번 주 금요일에 반드시 그들과 함께 건강검진을 받아야 했다. 설령 병원이 서대금이 손수 준비한 곳이라 해도 그에게는 그 사실이 부담스럽고 꺼려지는 일이었다.대장은 계속해서 재촉하며 보험 가입 후의 이점을 설명했다. 결국 주혁은 마지못해 동의했다. “그럼 내 아내와 아들도 함께 가입시켜줘. 나중에 주민등록증 사진 보내줄게.”“알겠어. 잘 쉬고 빨리 회복해. 듣자 하니 곧 송가람 씨 밑에서 일하게 된다면서? 잘 됐어. 정해지면 꼭 한턱 쏴.”주혁은 송가람 밑에서 일하게 될 생각에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빛에 부드러운 감정이 스며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확정되면 한 번 쏠게.”최종적으로 제출된 명단에 주혁의 가족이 포함된 것을 확인한 한현진은 비로소 안심했다. 체크업은 금요일과 토요일로 이틀에 걸쳐 나뉘어 진행되었고 한현진은 주혁이 토요일에 가는 것을 일부러 확인한 후 같은 날에 병원을 가기로 했다.주혁은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왔다. 그의 아내는 평범한 주부였고 깔끔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한현진이 그녀를 보았을 때 그녀는 주혁
회의실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떠나자 한현진은 물건을 정리한 뒤 아직 자리에 앉아 있는 서해금을 향해 파일을 들고 다가갔다. “아주머니, 방금 지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해금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네가 직원들을 생각해서 한 거니까 당연히 지지해야지. 우리 모두 같은 회사에 있는 한 하나의 팀이니까.” 한현진도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주머니가 제가 먼저 조사를 했다고 문제 삼지 않으셔서 다행이에요. 그리고 집에 보내주신 곤약도 가람 씨 통해 잘 받았어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서해금은 여유 있게 말했다. “가족끼리 서로 아끼는 거지. 너무 예의 차리지 마.”한현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머니, 제가 회사에 온 이래로 여러모로 신경을 많이 쓰게 해드렸어요. 제가 성격이 직설적이고 고집도 세서 가끔 말이 거칠어질 때도 있어요. 그런데도 아주머니께서 항상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주셔서 감사해요.” “아빠한테 들었어요. 아주머니가 아빠한테 저를 칭찬해 주셨다고요. 그 말을 들으니 저도 마음이 무겁고 어쩌면 제가 너무 어리석게 행동했나 싶어요.”“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서해금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얘가 무슨 말이야. 어른이 아이와 다툴 일이 뭐가 있겠어? 현진아, 아주머니는 네 친엄마는 아니지만 너희 어머니와는 정말 소중한 친구였어. 네가 송씨 가문에 돌아올 수 있게 되어 아주머니는 그 누구보다 기뻐.” “지금 네가 집안에서 가람이랑 함께 지내는 걸 보니 젊은 시절 너희 어머니와 함께 보낸 시간들이 가끔 떠올라. 우리가 반평생을 함께 지냈고 너희는 진짜 자매가 된 거지. 이것도 하나의 인연이란 거야.”한현진은 속으로 토할 뻔했다. ‘정말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고?’만약 당시 아이를 바꾼 일과 그녀 어머니의 죽음이 모두 바로 눈앞에 있는 이 온화하고 친절한 여자과 관련이 있었다는 여러 가지 증거들이 없다면 이렇게 진심 어린 말투를 들었을 때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
하지만 이 제안이 실행되면 소문이 돌아 사람들이 그것을 한현진 덕분이라고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서해금은 아마도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서해금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제안은 나쁘지 않지만 실비보험은 본래 회사가 직원들에게 제공하는 기본적인 보장이기에 만약 직원들에게 요금을 부과하게 되면 일부 사람들은 이를 회사가 급여를 삭감하려는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일부 직원들의 가족은 병원을 거의 가지 않아 이 비용이 꼭 필요한 지출은 아닐 수 있어요. 그런데 전액을 회사가 부담하게 된다면 일부 직원들이 가족을 허위로 신고해 다른 사람의 보험을 대신 받으려 할 가능성도 생길 수 있을 겁니다.”한현진은 그녀가 이렇게 말할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에 처음부터 말하는 방식에 약간의 여유를 두었다. 서해금이 자신의 의문을 제기하자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직원들이 가족을 위한 보험을 구매할지 말지는 전적으로 자발적입니다. 회사는 강제로 요구하지 않아요. 다만 구매의 문턱을 낮춰놓고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죠. 원하는 사람은 구입하고 원하지 않는 사람은 추가 비용을 부담하지 않도록 말이에요.” “서 대표님 생각은 어떠신가요?”서해금은 입술을 꽉 다물고 잠시 침묵한 후 말문을 열었다. “현진 씨, 구입을 개방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쪽은 괜찮지만 보험사와의 협상이 필요해요. 어떤 보험사도 손해 보려고 하진 않잖아요.” 한현진이 살짝 웃으며 답했다. “보험사와의 협상은 제가 맡을게요. 지금 여쭤보는 건 서 대표님 개인의 의견이에요. 동의하시는지요?” 서해금은 당연히 반대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회의실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반대한다고 말하면 그 소문이 바로 회사 전체에 퍼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녀가 그동안 쌓아온 직원들을 위하는 좋은 상사의 이미지가 무너질 게 뻔했다. 서해금은 절대 자기를 망칠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서해금은 잠시 침묵한 뒤
이틀 후 깔린느 정기 회의에서 서해금은 직원들의 건강검진을 언급하며 각 부서가 직원들의 시간을 조율하고 차례로 검진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말했다. 말을 마친 후 시간을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그럼 특별한 사항 없으면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잠깐만요.” 한현진이 서해금의 말을 가로막았다. 모두가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서해금도 눈을 들어 한현진을 응시하며 여유 있게 말했다. “현진 씨, 더 지시할 거라도 있어요?” 한현진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지시라뇨. 이 자리에 계신 분들 모두 제 선배님들이세요. 업무적인 부분은 앞으로도 많이 배우고 의지해야 할 분들입니다. 다만 서 대표님께서 직원 건강검진에 대해 언급하신 걸 듣고 마침 오늘 회사 고위층 분들도 다 계셔서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어서요.” “서 대표님, 괜찮으실까요?”모두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한현진이 아마도 회사 관리와 관련된 문제를 제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회사에 온 지 몇 달이 되었고 비록 진씨 가문 사모님 홍혜림을 중심으로 몇몇 고객을 끌어들였지만 서해금의 기반은 그렇게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실력 차이가 매우 컸고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 큰 진전이 없었으니 한현진은 분명히 조급할 것이다.서해금은 두 손을 가볍게 포개어 테이블에 놓고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정기 회의는 원래 경영진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어떤 의견이라도 편하게 말씀하세요. 좋은 제안이라면 우리는 반드시 적극적으로 채택할 겁니다.” 그녀는 매우 너그러운 태도로 민주적인 자세를 보여주었고 이것이 바로 서해금이 이렇게 확고한 위치를 유지하는 이유였다. 회의에서 나온 의견과 제안은 결코 당면에서 거절하지 않으며 오히려 지지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뒤에서는 다른 수단을 써서 상대를 밀어내는 법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다루는 데 그녀는 능숙했다.한현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서 대표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직설적을 말
송가람은 급히 말을 이었다. [지금 저도 정확히 알 수가 없어요.] 그녀는 강한서보다 더 초조해했다. 황 닥터는 금지된 물품을 소지하고 있던 이유로 출국 금지 명령을 받았고 당분간 국내로 돌아오지 못한다고 했다. 그가 오지 않으면 강한서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는 분명히 모든 것을 기억해 낼 것이다. 송가람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한서 오빠, 저랑 같이 외국에 가서 교수님한테 진료받으러 갈래요? 그쪽에서 꼭 잘 봐주실 거예요.] 송가람은 더 이상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강한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가람아, 평소 같았으면 바로 갔겠지만 지금은 안 될 것 같아. 너도 알잖아. 요즘 한주시 상황이 얼마나 복잡한지. 난 지금 이곳을 떠날 수 없어. 정말 어쩔 수 없으면 여기서 다른 의사를 찾아서 진료를 받는 방법을 찾아볼게.][그럴 수는 없어요!] 송가람이 목소리를 높였다. 강한서는 잠시 멈칫했다. [왜 안 되지?] 송가람은 자신이 너무 지나치게 행동했다는 걸 깨닫고 잠시 말을 더듬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 [교수님은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뇌과학 전문가 중 한 분이세요. 국내 의사들하고는 비교도 안 되죠.]의사를 바꾸면 강한서가 예전에 사용한 약에 대해 물어볼 것이었고 그렇다면 그녀는 그것을 말해야 하므로 폭로될 위험이 있었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었다. 강한서는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네.]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그 약은 효과가 좋았어. 매번 먹고 나면 머리가 맑아지고 잡생각들이 사라졌거든.] [그런데 지금은 그 약이 다 떨어져서 최근에 다시 두통이 찾아왔어. 그 약만 있으면 황 닥터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 텐데.]송가람의 눈이 번쩍였다. ‘맞다. 그 약이 있었지.’ 그녀는 속으로 들뜬 마음을 억누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서 오빠,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하지만 이 보험은 직원 개인에게만 해당되며 가족은 이 보험을 가입할 수 없다. 지금 강한서의 의도는 이 혜택을 직원의 가족에게까지 확장하려는 것이다. 주혁은 집에 두 명의 환자가 있고 약을 자주 복용해야 한다. 만약 그가 회사의 이 선의를 거절한다면 그의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 예전에 아들을 위해 인공 와우 이식 수술을 받을 돈을 마련하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직장을 잃었던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절대로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강한서의 개인적인 의도도 있었다. 이런 세심한 직원에 대한 배려는 점차 아래 직원들이 한현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위층은 작은 이익에 별로 신경 쓰지 않지만 일반 직원들에게는 다르다. 대부분 사람들이 열심히 돈을 버는 이유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다. 그들 대부분은 삼십대에서 마흔다섯 사이로 이 나이대의 사람들은 부모님을 부양하고 자식들을 키워야 한다. 회사가 약속한 성과급 같은 허황한 말보다는 이런 쉽게 보상받을 수 있는 실비보험이 직원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주기 때문에 더욱 마음을 얻을 수 있다. 한현진은 마치 뭔가 깨달은 듯 강한서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이렇게 사람 마음을 얻는 거구나.” 강한서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사실 처음엔 이런 생각까지는 못 했어. 할머니가 병원에 갈 때는 항상 진씨 아저씨랑 같이 가서 내가 직접 겪을 일이 거의 없었거든. 이런 일도 거의 없었고.” “그런데 한 번은 민 실장이랑 같이 출장 가는 길이였어. 그때 민 실장 어머니께서 비를 맞으면서 우리를 마중 나왔는데 길이 미끄러워서 자전거를 타다 넘어지셨어. 가벼운 사고가 나이었고 수술이 필요한 정도로 심했었지.”“그때 민 실장한테 병원에 남아서 어머니를 돌보라고 하고 혼자 고객을 만나러 갔어. 며칠 만에 일을 마치고 병원에 들렀더니 수술은 다행히 성공적이었어.” “그런데 입원부터 치료까지 전부 합쳐서 거의 천만 원 가까이 들었더라. 민 실장은 보험 청구를 했
강한서가 가식적인 말투로 말했다. “부탁할게. 나중에 내가 너랑 여정 씨에게 크게 한 턱 쏠게.”강한서에게 등을 돌린 신우가 손을 들어 중지를 내밀었다. 한현진이 강한서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신우 씨가 널 꽤 귀찮아하는 것 같아. 전에 여정 씨에게 신우 씨는 욕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아닐 걸?”강한서가 헛소리를 지껄였다. “난 우리 사이가 좋다고 생각해. 봐봐, 지금 얼마나 열심히 우릴 도와주고 있어.”한현진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그래? 난 왜 신우 씨가 마지못해 하는 것 같지?’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이제 이런 일로 신우 씨 번거롭게 하지 말자. 우리 다른 방법 찾아보자. 언제까지 부탁할 순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도 계속 신우에게만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신우처럼 능력 있고 입도 무거운 사람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현진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언제까지 신우에게 부탁할 수는 없었다. 신우의 할아버지가 위독하시기 때문에 지금은 삼촌들의 후계자 싸움이 가장 치열한 시기였다. 수많은 눈이 서로의 약점을 노리고 있었기에 신우의 처지 역시 살얼음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그 어떤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 신씨 가문에서 요즘 경쟁이 제일 치열한 것이 바로 제일 많은 계약금이 걸린 프로젝트였다. 강한서는 이 기회를 빌려 신우에게 투자금을 보태 그동안 진 신세를 갚을 생각이었다. 그날 오후, 지문 대조 결과가 나왔다. 편지 봉투와 그림에는 한현진과 강한서의 지문을 제외한 세 사람의 지문이 있었다. 그 세 사람 중 한 명은 주혁의 아내였고 또 다른 사람은 주혁의 아들인 주지호였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지문 대조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또 다른 사람의 지문이었다. 그 결과에 한현진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이 정보를 따라 뭔가를 캐낼 수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이렇게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사 결과는 결국 시스템에조차 등록되어 있
시원하게 욕을 날린 신우는 의리 있게 강한서의 부탁을 들어줬다.10여 년 전 주혁이 경찰서에 남겼던 지문을 받은 강한서는 곧 생체 인식 실험실에 보내 두 지문을 대조하도록 했다. 2시간도 지나지 않아 결과가 나왔다. 한지와 편지봉투에서는 주혁의 지문을 찾을 수 없었다. 그 결과에 한현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뭔가 착오가 있는 거 아냐? 그때 직접 손으로 나에게 건네줬었어. 심지어 장갑도 하지 않았는데, 지문이 안 나왔다고?”신우가 말했다. “여긴 여정이와 여정이 사수가 함께 만든 실험실이에요. 게다가 형사들과 자주 협력하는 곳이기도 하고요. 지문 대조 시스템은 여길 따라올 곳이 없어요. 한 번도 틀린 적 없었어요.”신우의 말은 지문 대조 결과가 틀렸을 리가 없다는 얘기였다. 신우는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냈다. 이제 막 담배 한 대를 꺼내려던 그때, 손에 들린 담배가 강한서의 손에 내쳐져 툭, 쓰레기통으로 떨어졌다. 신우: ???머리가 복잡했던 한현진은 두 사람을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왜 없는 거지?”여전히 오리무중에 빠진 한현진과 달리 강한서는 이미 눈치 채고 있은 듯 말했다. “혹시... 지금 그 사람은 애초부터 주혁이 아니었던 거야. 그래서 경찰에게 지문이 남아있을까 봐 그런 방법의 자신의 모든 지문을 지워버린 거야. 자신의 진짜 신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강한서의 추측에 한현진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떻게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그건 너무 많이 앞서간 거 아냐? 기사님은 가족도 있고 아이도 있어. 만약 정말 사람이 바뀐 거라면 가족들은 눈치 채야 하는 거 아냐?”“데가 이 세상에는 그렇게 똑같이 생긴 사람은 없어. 아무리 닮은 쌍둥이라고 해도 가족들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잖아.”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어쩌면 가족들은 원래 그 사람이 돌아오길 바라지 않을 수도 있지.”한현진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얼른 강한서에게 물었다.
“얼른 다시 가져와. 급히 쓸데가 있어.”강한서: ?“왜 그래?”한현진이 말했다. “전화로 얘기하긴 복잡한 일이야. 아무튼 얼른 전화해서 그림 다시 가져오라고 해. 만약 안 건드렸으면 못 건드리게ㅔ 하고 만약 꺼냈으면 얼른 다시 포장하라고 해. 내가 금방 갈게. 만나서 더 자세하게 얘기해 줄게.”강항서가 대답했다. “알겠어. 지금 당장 다시 가져올게.”한현진은 일찍 퇴근하고 집으로 향했다. 전화에서 한현진이 워낙 급하게 얘기한 탓에 강한서도 그녀가 걱정이라 손에 있던 일을 미리 마친 후 칼퇴근해 집으로 돌아왔다. 만나자마자 강한서를 본 한현진이 물었다. “기사님 아직 그림 안 넣었지?”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네가 너무 일찍 얘기해서 넣지도 못한 상황이야. 네가 그림을 가진 후로 우리 두 사람을 제외하면 아무도 그림을 본 적이 없어.”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랍에서 일회용 장갑을 꺼내 낀 후 그림과 평지를 함께 꺼내 일회용 봉투에 넣었다. 한현진의 행동을 본 강한서의 눈가가 파를 뛰었다. “증거 수집해?”한현진은 봉토를 밀봉하며 말했다. “정말 증거가 될 수도 있어. 일단 가직해 둬.”“대체 무슨 일이야?”한현진이 장갑을 벗고 나서야 강한서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과 본인의 의심과 의혹을 얘기했다. “이번 주에 기사님께서 뭔가 사고를 친게 틀림없어. 그래서 재판장에서 지문 인식하는 걸 거부하는 거겠지. 만약 기사님이 전과범이고 회사에서 그 사람을 그대로 둔다면 기사님이 영향을 끼치는 것 나뿐만이 아니야. 그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내가 생각해봤는데 일단 지문을 수집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일단 고여정 씨께 이 사람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아봐. 그래야 만일이 사태에 대비를 하지.”한현진의 말을 들은 강한서가 의문을 제기했다. “주혁 씨의 지문은 이미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어. 무슨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신상 조회를 하면 바로 나올 텐데 지문을 지우는 게 무슨 소용 있어?”한현진이 멈칫했다. “없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