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자고 있어요. 오늘 아침 오빠가 친척분들께 인사하러 갔잖아요. 오빠가 너무 비싼 선물을 준비했다고 하면서 난리를 피워서 오빠와 한바탕 싸웠어요. 오빠가 한현진을 집에 버려두고 혼자 갔거든요. 아마 지금쯤 방에서 울고 있을 거예요.”강민서의 말에 민경하가 어리둥절해졌다.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안다니까요. 다른 사람이 왜 자기 말이라면 다 들어야 하는 건데요.”신미정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래? 요즘도 자주 싸우니?”“네. 한현진은 아직도 오빠가 예전 같은 줄 알고 뭐든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니까요. 하지만 오빠가 이젠 한현진을 기억하지 못하잖아요. 한현진이 그러는 걸 볼 때마다 짜증을 내더라고요.”신미정이 눈을 감았다. “넌 지금 어디야?”“저요?”강민서가 멈칫하더니 말을 이었다. “저도 집이죠. 지금 바닥에 기름칠하는 중이에요. 좀 이따 위층에서 내려오다 미끄러지면 애가 떨어지지 않고는 못 배길 거예요.”강민서의 통화를 듣고 있던 민경하의 얼굴이 의문으로 가득 찼다. 주먹을 쥐고 있던 신미정의 손에 더 힘이 실렸다. “그래, 잘하고 있어.”신미정의 말투가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강민서는 조금 불안해졌다. “엄마, 왜 그래요?”차에 올라타는 한현진의 모습을 보며 신미정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것도 아냐. 너무 티 나게 굴지 마. 며칠 있으면 시은 씨 딸 결혼식이야. 한현진도 불러서 같이 와.”강민서가 멈칫했다. “엄마, 한현진은 그분과는 앙숙 같은 사이였잖아요. 안 가려고 하지 않겠어요?”“안 가겠다고 하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가게 만들어.”신미정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넌 똑똑하니까 이 정도는 어려운 일 아니겠지.”미간을 찌푸린 강민서가 한참 만에야 말했다. “알겠어요.”전화를 끊은 신미정이 휴대폰을 있는 힘껏 내동댕이쳤다. 그녀의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전화를 끊은 강민서가 고개를 돌리자 이상한 눈빛으로 자기를 훑
“안 가요.”“그래요.”민경하가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 “마침 회장님께 보고드리면 되겠네요.”그의 말에 강민서는 하마터면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잠, 잠깐만요.”민경하는 느긋하게 강민서를 바라보았다. 주먹을 꽉 움켜쥔 강민서는 한참 만에야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가면 되잖아요.”영화관에 도착해 민경하가 ‘살의’를 예매했다는 것을 안 강민서는 그대로 몸을 돌려 영화관을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민경하에게 끌려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미쳤어요? 설 연휴에 저더러 한현진 흥행이나 도우라고요?”민경하가 말했다. “편견은 버리고 봐요. 영화 평점은 높으니까.”강민서가 민경하의 말을 받아치기도 전에 옆에서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없네. 코미디 영화를 예매했더니 미스터리 영화나 보여주고 있네. 누가 이거 보러 왔대? 노이즈 마케팅이나 하는 것들이 발연기나 하는 거로 모자라 이런 식으로 관객수까지 속이다니.”강민서가 민경하를 밀어냈다. “누가 관객수를 속였다는 거예요? ‘서강월’ 티켓으로 ‘살의’를 보고 있으면서 그쪽 돈을 벌어간 게 누군지도 모르는 거예요?”강민서에게 된통 혼난 그 사람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민경하가 얼른 강민서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죄송해요, 취해서요.”“미친.”욕설을 내뱉은 그 사람이 상영관을 나섰다. 강민서는 씩씩거리며 민경하를 노려보았다. “어물쩍 넘어갈 줄밖에 몰라요?”민경하가 말했다. “사모님을 뭐라 하는 건데 왜 강민서 씨가 화를 내고 그래요?”“전...”민경하가 이를 악물었다. “전 한현진이 오빠 얼굴에 먹칠할까 봐 그러는 거예요. 고작 영화 하나 촬영하면서 관객수를 속인다는 말이나 들으니, 나중에 흥행 기록이 엉망이면 얼마나 X 팔려요.”말하며 민경하를 뿌리친 강민서는 프런트 데스크로 달려가 전석을 예매해 버렸다. 민경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한참을 웃더니 강민서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한편, 한현진이 탄 차는 곧 보육원에 도착했다.
정신을 차린 한현진은 도일준과 악수를 나누었다. “보육원에 지원을 아끼지 않아 주셔서 감사해요.”그 사람은 얼굴을 꽁꽁 가렸을 뿐만 아니라 악수할 때도 장갑을 벗지 않았다. 상대방과 악수를 한 한현진은 그의 손이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남자 손이 이렇게까지 작은 건 본 적이 없는데, 키가 작아서 그런가?’상대방이 말했다. “돈이란 건 태어날 때 가지고 올 수도 없고 죽어서 가지고 갈 수도 없는 거잖아요. 제가 아직 걸을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저를 위해 음덕을 쌓는 일이겠죠.”그 말은 마치 이미 속세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본 한 인간의 죽기 직전 유언 같았다. 한현진은 도일준을 훑어보았지만 너무 꽁꽁 숨기고 있던 터라 자세히 볼 수 있는 것은 눈뿐이었다. 하지만 눈을 봐서 그다지 나이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이상한 사람이었다. “요즘... 요즘 잘 지내셨어요?”상대방이 건넨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멍해졌던 한현진의 눈빛이 깊어졌다. “절 아세요?”도일준의 눈빛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는 마치 별거 아닌 듯 가볍게 말했다. “전 현진 씨 어머니이신 하현주 씨와 안면이 조금 있는 사이에요.”하현주의 친구들은 이미 대부분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했었다. 그녀와 친구들은 하현준의 휴대폰에 저장된 연락처에 따라 하나하나 직접 부고를 보냈었다. 하현준의 장례식에서 한현진은 눈앞의 사람을 본 기억이 없었다. 어머니가 병상에 누워있던 그 몇 년 동안에도 한현진은 이런 사람이 병문안 온 것도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몇 번 안면이 있는 사이일 뿐인데, 이렇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게다가 좋은 일을 하려는 목적의 사람이 다른 곳도 아니고 하필 엄마가 후원한 적이 있는 보육원에 기부를...?’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엄마 지인분이셨군요. 연락처를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엄마께서 생전에 늘 젊은 시절의 창업은 주변 친구들의 도움을 많이 받으셨다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명절마다
노원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 번인가 왔었던 게 전부야. 올 때마다 현금으로 가지고 오셨어. 지난번에 왔을 때 먹는 약을 봤더니 항암치료제더라고. 아마 아프신 것 같아. 그것도 아주 많이.”방금 모자가 떨어지며 드러났던 듬성듬성한 머리를 떠올리니 아마 항암치료의 부작용인 것 같았다. ‘설마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좋은 일이라도 하시려는 걸까.’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쩐지 이상한 사람 같았다. 게다가 요즘 같은 시대에 현금으로 기부하는 것도 조금 이상했다. 처음에는 2000만 원을, 그다음에는 4000만 원을 기부했다. 만 원권으로 그렇게 많은 현금을 가지고 오는 것도 쉽지는 않았을 텐데. 무엇보다 현금다발을 들고 오는 것이 그다지 안전한 방법도 아니었다. 한현진은 고개를 숙여 사진을 확인했다. 역시 눈밖에 알아볼 수 없었다. 사진에 잠시 머무르던 손가락을 움직여 카톡 채팅창으로 들어간 한현진이 송민준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빠, 도일준이라는 사람 좀 알아봐 줘요.]아직 비행기에 있을 송민준은 아마 착륙해서야 이 문자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송민준이 3일 동안 M 국에 머무르자 서해금은 매일매일을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지내고 있었다. 설 연휴가 끝나는 날, 송민준이 돌아왔다. 한현진과 강한서가 공항으로 마중을 나갔고 세 사람이 함께 한현진의 본가로 돌아갔다. 송병천은 비록 티를 내지 않았지만 아들이 M국으로 가 있는 동안 그 역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시 대사관에서 걸려 온 전화는 아무래도 그에게 지우기 힘든 트라우마를 남긴 모양이었다. 집에 도착해 차를 끓였다. 잠깐의 휴식 후 송병천이 물었다. “어떻게 됐어? 비행기 사고 원인은 알아냈어?”차를 한 모금 마신 송민준이 찻잔을 내려놓고 나서야 대답했다. “알아냈어요.”송병천이 다급하게 물었다. “사고 원인이 뭐야?”서해금이 고개를 숙이고 귤을 까고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무미건조한 송민준의 눈빛이 슥 서해금을 훑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더니 말했다. “여보, 깔린느가 설립되었을 때, 아름 언니가 제조했던 첫 향수 제조 방법이 유출됐던 일 기억해요?”그 말에 멈칫한 송병천이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 일이었다. 강한서를 비롯한 아이들은 그 일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했지만 송병천은 알고 있는 일이었다. 당시 제조 방법을 유출된 건 회사의 한 인턴 때문이었다. 그 직원은 인턴 기간이 끝나자 첫 제조 방법을 가지고 다른 회사로 이직했다. 그로 인해 깔린느의 첫 향수는 폐기 되어야 했고 향수 제조에 투입되었던 모든 인력과 자금은 전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1년 후 깔린느의 메인 향수인 미스틱이 출시되고 나서야 회사는 기밀 유출 사건의 손해를 메꿀 수 있었다. 서해금이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인정이 없는 게 아니라, 이미 그런 일을 한 번 겪어봤었잖아요. 아람 언니도 그 일로 회사에 인턴을 채용하지 않는다는 규정도 세웠었고요. 깔린느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규정을 어긴 적이 없어요. 만약 이번 일로 특혜가 주어진다면 회사에 계신 다른 직원분들께 뭐라 드릴 말이 없잖아요.”서해금의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다. 당시 기밀 유출 사건으로 인해 회사의 인턴에게 트라우마가 생긴 한아람은 더 이상의 인턴 채용을 거부했었다. 하지만 그 말에 한현진은 오히려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웃음소리는 모두가 진지한 상황과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소리였다. 모두의 시선이 한현진을 향했다. 한현진이 컵 안에 담긴 대추를 돌리며 태연하게 말했다. “아주머니, 회사 인사 규정에는 호흡기 질환이 있는 사람은 채용하지 않는다는 조항도 있어요. 하지만 천식이 있는 가람 언니도 깔린느 직원으로 출근하고 있잖아요. 인사팀에서 서류 심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건가요, 아니면 특혜인가요?”한현진의 말에 서해금은 턱, 말문이 막혔다. 그와 달리 송가람은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그게 어떻게 같아요? 깔린느는
“됐어.”송병천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규정은 온도가 없어. 그렇다고 인간에게도 온도가 없는 거야? 우리가 처음 해외로 갔을 때, 네가 주차장에서 강도를 만났었지. 그때 세은이가 발견하고 사람을 부르지 않았다면 네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을 것 같아?”“지금 세은이 아빠가 사고를 당했어. 그저 인턴으로 출근할 기회를 주자는 건데 지금 넌 그 제안을 반대하며 회사 규정을 들먹이고 있어. 정말 회사 규정대로라면 넌 깔린느에게 이력서를 넣을 자격조차 없어.”송가람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송병천과 서해금이 재혼 후 송병천은 늘 송가람을 끔찍이 아꼈었다.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이렇게 심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내가 자격이 없으면, 한현진은 자격이 있어?’제일 먼저 인턴 얘기를 꺼냈던 강한서가 덤덤히 목소리를 냈다. “아저씨, 화 푸세요. 가람 씨도 아람 아주머니가 겪으셨던 일이 또다시 반복될까 봐 걱정돼서 그러는 거예요.”한현진이 눈썹을 실룩였다. ‘송가람 환심을 살 타이밍 하나는 잘 보네.’역시, 강한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송가람이 눈시울을 붉혔다. 강한서를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에 억울함이 잔뜩 묻어있었다. ‘쯧.’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은 그래도 강한서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한 한현진은 탁 소리 나게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강 대표님, 제 기억이 맞다면 강 대표님 회사에서도 인턴이 대형 사고를 친 이력이 있죠? 그래서 강 대표님께서도 줄곧 인턴을 채용하지 않으시고선 저희에겐 그런 제안을 하시더니 이젠 또 가람 언니 편을 드는 거예요?”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인턴 채용은 깔린느의 일이니 당연히 제가 끼어들 자격은 없어요. 전 그저 가람 씨도 생각이 있어서 반대하는 것 같아서 그래요. 아무래도 특혜를 받아 입사한 사람이니 만약 사고가 생기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건가요?”“제가요.”한현진이 서해금을 보며 말했다. “아주머니, 실수가 반복되는 게
하지만 만약 한현진이 내건 조건이라면 서해금은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역시나 한현진의 말에 서해금이 표정이 조금 흔들렸다. 그녀가 입술을 짓이기며 말했다. “현진아, 아주머니도 세은이가 인턴으로 들어오는 걸 반대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이렇게 큰 회사에 너와 아버지의 한마디로 모든 걸 결정할 순 없어. 나도 다른 부서들과 얘기도 해봐야 하고 직원들의 마음도 신경 써야 해. 예전에도 딸을 인턴으로 써달라는 임원이 있었지만 회사 측에서 모두 거절했어. 안 된다고 단호하게 얘기해 놓고는 자기 일에는 이렇게 입장을 번복한다면 어떻게 기강을 세울 수 있겠니?”“세은이 아빠 일은 나도 안됐다고 생각해. 내 마음도 너희들과 다르지 않아. 네 아빠는 사람 간의 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잖니. 너도 그렇고. 그러니 이렇게까지 얘기가 나온 이상 내가 계속 반대한다면 너무 인정머리 없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현진아, 난 최악의 상황을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어. 인턴을 채용한 후 문제가 생기는 날엔 네가 그에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할 거야. 혹시 나중에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아줌마가 인정이 없다고 원망하지 마.”듣기엔 꾸밈없는 솔직하게 내뱉은 말 같았다. 마치 서해금에겐 아무런 사심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송병천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뭔가 얘기를 꺼내려고 하자 송민준이 송병천의 발을 꾹 디뎌 입을 닫게 했다. 한현진이 웃으며 말했다. “아주머니께서 회사 일은 신중하게 고민하시는 것도 제 어머니의 노력이 헛되게 하지 않으려고 그러시는 건데 저도 당연히 이해하죠.”말문이 막힌 서해금이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이해하면 됐어.”송병천에게 혼난 송가람은 밥 먹을 때가 되었지만 방으로 들어가 나오려 하지 않았다. 마지막엔 서해금이 달래러 올라가서야 얼굴을 비췄다. 서해금의 표정은 굳어있었고 송가람은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마도 방에서 서해금에게 혼난 모양이었다. 송가람은 늘 금이야 옥이야 하며 가족들의 손에 떠받들려 살았다. 부
한현진의 말에 번뜩 정신을 차린 송가람이 뻗었던 손을 거두었다. 송가람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처음부터 바로 조건을 얘기할 수도 있었는데 왜 굳이 제 얘기를 꺼낸 거예요? 아빠가 절 미워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거예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어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한현진은 일어서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송가람은 서 있고 한현진은 앉아 있었으니 송가람이 한현진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서늘한 한현진의 눈빛에 송가람은 어쩐지 오히려 한현진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언니가 착각하셨네요. 제가 무슨 재간이 있어서 언니가 할 말을 예측할 수 있겠어요. 아빠가 언니를 싫어하시는 건 본인에게서 문제점을 찾으셔야죠. 아빠가 언니를 아껴주고 사랑해 주며 인간의 도리를 가르쳤지만 언니는 오히려 주 기장님 죽음이 우리와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했어요. 그러니 아빠가 어떻게 화나지 않을 수 있겠어요?”그 말에 송가람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건 그냥 사고였어요. 현진 씨는 그저 그 일을 이용해 아빠 앞에서 좋은 이미지를 세우려는 것뿐이잖아요.”한현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은혜에 보답하는 건 인간의 제일 기본적인 도리 아닌가요? 가람 언니에게 그런 건 그저 좋은 이미지를 위한 연기에 불과한 거였군요. 그럼 언니가 강한서를 구해준 것도 그런 이유라고 생각해도 될까요?”송가람이 움찔 몸을 굳혔다. “헛소리하지 마. 한현진, 내가 한서 오빠를 구한 이유로 오빠가 나에게 마음을 주니까 이렇게 쪼잔하게 구는 거잖아. 내가 뭘 해도 마음에 안 들고 날 적대시하는 거잖아. 하지만 네가 아무리 그래도 오빠는 여전히 널 기억도 하지 못해. 오빠 마음속에 넌 그리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고.”한현진은 차분하게 미쳐 날뛰는 송가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의 송가람은 한 번도 이렇게 한현진 앞에서 난리를 피운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송병천에게 혼나고 서해금에게 꾸지람까지 듣고 분노를 이기지 못한 탓인지 드디어 한현진에게 폭언
[두 여배우 모두 연기력이 그렇게 뛰어나면서, 대체 얼마나 보는 눈이 없어야 한열을 좋아할 수 있는 거지?][그건 좀 아니지 않나? 한열도 미남상이긴 하잖아. 이런 사람인 줄은 몰랐지만.][세 사람 같이 촬영했었잖아요. 한현진이 한열과 신하리가 사귀는 걸 몰랐을까요? 이건 뻔히 알면서도 만난 거잖아요.][살려줘! 나 한현진 정말 좋아한단 말이야. 전에 햇살 유치원 사건 때문에 엄청 호감이었는데. 봄의 연인의 중전마마 역도 완전 잘 소화했었다고. 대체 바람은 왜 핀 거야. 연예계에 사고 안 치는 연예인이 있긴 한 거야?] [두 여신을 동시에 만나다니. 한열, 능력도 좋아. 지까짓게 뭔데...] [한열은 신하리에게 빌붙으려는 목적이었던 거예요. 지금 소속사와 계약 해지를 준비 중이예요. 회사에서도 전혀 신경 안 쓰고 있고요. 신하리가 아니었으면 한열 주제에 어떻게 유명 감독에게 캐스팅 될 수 있었겠어요. 정말 어떻게든 여자 덕 좀 보겠다고 애쓰네.]아래의 댓글들은 더 이상 눈을 뜨고 볼 수도 없었다. 대부분은 그들을 욕하는 악플이었다. 한열과 신하리의 공개 연애에 대해 두 사람의 팬들은 자신의 배우가 아깝다며 강력한 불만을 토로했다. 두 사람이 열애를 인정한 후부터 양측의 팬들은 줄곧 다툼을 이어왔다. 두 사람의 커플 팬계정인 [이열치열]은 팬들의 감정 쓰레기통 같은 곳이 되어버려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한열은 열애 인정으로 회사와 갈등을 빚어 계약을 해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지금의 인지도와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한 채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회사 측은 말도 안 되는 루머를 퍼뜨렸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었던 터라 잠깐의 파장을 일으킨 후 곧 사그라들었다. 공개 연애 후 꽤 빠른 속도로 떨어지던 한열의 인기는 요즘 다시 천천히 오르고 있는 추세였다. 회사 측에서 밀어주던 신인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한열의 뒤를 이어받아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회사 측은 화가 치밀었다. 그러니 한열이 바람 폈다는 기사가
한현진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지금 예능부 기자 채용 문턱이 이 정도로 낮아진 거야? 두 눈이 멀어도 기자로 활동할 수 있나봐?”진윤: ...‘우리 여신님 사석에서는 이렇게 독설을 날리는 사람이었어?’휴대폰 너머에서 한참을 듣고 있던 차미주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 사진 너와 한열 아니야?”한현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건 나랑 오빠야.”“하지만 이 사진들은 정말 한열과 비슷해 보여. 게다가 네 오빠가 운전한 거 한열 차 아니야?”한현진은 그날 송민준이 운전한 차를 눈 여겨 본 적이 없었다. 만약 정말 한열의 차를 운전하고 온 거라면 파파라치가 착각했을 수도 있었다. 다시 페이스북을 다운로드 받고 인기 검색어를 확인한 한현진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연예 부문의 인기 검색어의 TOP 5는 전부 한열의 바람에 관한 이슈가 차지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새로운 꽃뱀, 이열 커플 사이에 끼어들다], [이열 커플, 결별 위기 스크린 밖에서도 삼각관계], [한열 살아있네], [찐사랑을 못 숨겨] 등이었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검색어들이 가득 했다. 한현진이 페이스북에 로그인하자 수백 개의 DM과 십만 개가 넘는 댓글이 쏟아졌다. 굳이 읽어보지 않아도 신하리와 한열 두 사람의 팬들의 남긴 수많은 욕이거나 일반 네티즌의 호기심에 가득한 댓글일 것이 분명했다. 인터넷이 얼마나 필터 없이 악랄한 글로 난무한 곳인지 잘 알고 있는 한현진은 아예 댓글을 확인하지도 않고 뉴스피드로 들어갔다. 한열과 한현진의 기사는 두 시간에 터졌다. 그러니 지금쯤이면 각 마케팅 계정에서는 이미 타임 라인까지 정리한 피드를 올리기 시작했다. 한현진은 관련 피드를 대충 훑었다. 마케팅 계정의 분석에 의하면 한열과 신하리는 [살의] 촬영 이전에 이미 사귀기 시작했고 송민영이 하차된 후 한열이 자신의 여자친구인 신하리를 여주인공으로 추천했으며 영화 홍보 현장에서의 친밀한 스킨십 사진이 폭로되어 어쩔 수 없이 공개 연애를 택한 것이었다. 그 계정
한현진은 반나절이 걸려서야 일의 자초지종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쩐지 지난번 홍혜림 씨 사건이 있었을 때 왜 진윤 씨가 갑자기 나타나 상황을 반전시키나 했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는 거잖아.’순간 한현진은 뻘쭘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방금 전화를 받고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입도 벙긋하지 말았어야 했다. 진윤의 말처럼 이건 정말 비열한 짓이었다. 유치한 강한서가 벌일 만한 일이 맞긴 한 것 같았다. 강한서 본인 역시 이번 일은 너무 얍삽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어쩌다 아이를 달래주었다. “내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탓이라고 해. [정상에서]에서 지금 자체 테스트 중인 스킨 한 세트 줄게. 어때?”진윤이 작게 울먹이며 말했다. “스킨 세 세트?“강한서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와중에 딜을 하는 걸 보니 그리 큰 상처를 받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세 세트 전부 줄게.”진윤이 곧바로 울음을 멈췄다. 절판되어 더는 살 수 없는 게임 스킨과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한 여신 중 아무리 바보라도 그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래요. 제가 오해한 거라고 하죠.”말하며 한현진을 쳐다보던 진윤은 여전히 아쉬워하며 말했다. “현진 누나, 왜 이렇게 빨리 결혼하셨어요. 남자 때문에 손에 넣었던 트로피도 놓칠 수가 있어요.”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결혼이 커리어 영향주지 않아. 이간질 하려고 하지 마.”“형님은 남자니까 당연히 영향을 안 받으시겠죠.”강한서에게 농락을 당한데다 하루아침에 구닥다리에게 여신을 뺐긴 진윤은 누구보다 빨리 흑화 했다. “결혼하면 아이도 낳아야 하잖아요. 어떤 유명한 감독이 임산부를 캐스팅하려고 하겠어요. 제일 예쁠 나이를 남편과 아이에게 바치면 나중에 아이가 클 때쯤엔 본인의 레전드 시절은 이미 지났다고요. 제가 다 아쉬워서 그래요. 너무 불공평해요.”비록 진윤은 그저 이간질을 하기 위해 꺼낸 말이었지만 그 말은 현실이기도 했다. 임신과 출산은 여자의 커리어엔 고난과 역경이
한현진: ?강한서가 들고 있던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것은 차미주의 목소리였다. “현진아! 너 내연녀가 되어버렸어. 게다가 그 상대가 네 사촌 동생이래.”강한서: ?강한서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그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전여친, 현여친이 뭐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게다가 이 목소리, 왜 이렇게 귀에 익은 거지?’“저... 저기 혹시 전화 잘못 하신 거 아녜요?”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곳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 현진 누나?”한현진이 멍해졌다. ‘날 알아?’“네. 제가 한현진이예요. 누구세요?”상대방은 말이 없었다. 그에게서는 그저 조금 흥분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무슨 일이야?”진윤이 이를 악물었다. “방금 전화 받은 사람 누구예요!”강한서가 말했다. “내 와이프.”“그럴 리가 없어!”진윤이 바득 이를 갈았다. “이 사생팬 같은 아저씨가! 혹시 일부러 날 속이려고 옆에 성대모사하는 분이라고 모셔놓은 거 아녜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너처럼 유치한 인간인 줄 알아? 그리고 현진이는 아무도 대체할 수 없어.”진윤은 강한서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거짓말 좀 그만 해요. 현진 누나는 지금 그 티베탄 마스티프와 데이트하는 중이라고요. 만약 누나가 정말 형님 와이프라면 형님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누나가 딴 남자와 데이트하는 걸 지켜볼 수 있어요?”더 이상 진윤을 대꾸하기 귀찮았던 강한서가 그에게 영상통화를 보냈다. 몇뿐 후, 휴대폰 화면으로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여신과 딱 붙어 앉아있는 전남편 형님을 확인한 진윤은 순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한현진은 휴대폰에 비춰진 진윤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진윤 씨가 강한서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야?’진윤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어댔다. “거짓말쟁이! 뻔뻔한 인간! 전
유난히 예쁘게 잘 나온 사진을 보며 한 현지는 신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멍청하게 나온 것 같다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강한서는 굳이 자신이 찍겠다면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한현진이 눈을 실룩거렸다. “네가 사진을 찍겠다고? 168cm인 나를 138cm로 만들어 버리는 네가? 강 대표님 본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강한서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 실력이 그렇게 별로야?”한현진이 말했다. “쌀을 뿌린 휴대폰을 닭이 부리로 쪼아도 내가 찍은 것 보단 낫다고 할 수 있어.”왠지 수치를 당한 것 같은 기분에 강한서가 이를 악 물면 말했다. “그럼 난 왜 우리가 데이트했을 때 내가 찍어준 사진을 밤새도록 보고 있었던 거야?”강한서가 괜히 그 얘기를 꺼낸 탓에 잊혀 가던 한현진의 기억이 문득 돌아왔다.“사진을 보면서 넌 그저 사진을 찍을 줄 모르는 것뿐이라고 날 설득 하지 않는다면 호텔 앞에서 바로 너와 싸우 버릴 것 같았거든. 내 외모에, 감독님께서도 나에게 각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 하셨는데 넌 대체 어떻게 날 사실 눈으로 찍을 수 있었던 거야?”강한서: ...“사시눈... 처럼 나왔어?”한현진이 일을 악물었다. “내가 뛰어다니는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니까 유체 이탈한 것처럼 찍어줬잖아! 내가 피드를 업로드할 때 실수로 그 사진까지 넣었더니 애들이 나한테 대체 어디서 이런 심령사진을 찍었냐고 물었었어.”“...”활활 타오르던 강한서의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어쩌다 가끔... 몇 십 장뿐이었잖아.”한현진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하.”뭔가를 말하려던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자 무릎 정도까지 오는 어린 아이가 옆에 쭈그려 앉아 불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아직 더 놀 거예요? 저희 잠깐 놀게 해주시면 안 돼요?”강한서가 고개를 돌리자 뒤에는 어린 라이 대여섯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한현진: ...창피함에 고개
“하하하.”한현진이 마른 웃음을 지었다.“오빠. 제가 티슈 없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강한서가 눈을 씰룩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핑계였다. 그는 입술을 달싹여 아내를 따라 염치 없이 말했다. “형님, 저도 없어요.”송민준이 가방과 티슈를 두 사람에게 던지며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겼다. 한현진: ...“오빠가 나한테 화 난 건 아니겠지?”강한서가 우울하게 말했다. “너보단 날 먼저 걱정해야 할 것 같아. 네 오빠가 아무리 너에게 화가 나도 결국은 나에게 그 화살이 돌아올 거야.”한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좀 놓이네.”강한서: ?한현진이 그의 손을 잡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차피 오빠가 널 탐탁지 않아 한게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오늘 이 일로 크게 달라지진않을 거야.”“...”‘행복은 본인이 누리고 잘못은 내가 뒤집어쓰고. 정말 좋은 아내네.’강한서는 한현진을 데리고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입덧이 끝난 이후로 한현진의 식욕은 줄곧 안정적이었다. 매 끼니마다 많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지만 배고픔도 빨리 찾아왔기에 하루에 몇 끼씩 먹어야 했다. 그 덕에 지금의 한현진은 송아지처럼 튼튼하기만 했다. 강한서는 임신한 한현진을 위해 오랫동안 공부했지만 한현진에게는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그의 주변엔 임산부가 많이 없었지만 많은 아내들이 임신 후 남편을 괴롭힌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현진에겐 모든 임신의 호르몬 변화가 거짓말처럼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의사는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큰 반응 없이 잘 먹고 잘 지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의사는 강한서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산책을 자주 다니며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면 된다고 했다. 한현진은 정서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조금 유치해지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한현진은 강한서의 팔을 끌며 굳이 아이들의 흔들 목마에게 타게 해달라며 떼를 썼다.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채영 언니.”문채영이 가방에서 포장한 선물 박스를 건넸다. “첫 만남이라 어떤 선물을 준비하면 좋을지 몰라 제가 직접 향낭을 만들었어요. 향 맡아봐요.”한현진이 조금 의외라는 듯 말했다. “언니도 조향하세요?”문채영이 미소 지었다. “제가 조향에 입문하게 된 것도 민준이 덕분이었어요. 전엔 이런 거 만드는 거 좋아했었거든요.”한현진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조향하는 송민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줄곧 송민준은 그쪽으론 취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민준은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불쾌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주문부터 해. 배고파.”멈칫하던 문채영이 시선을 내려 눈에 맴도는 서운함을 숨겼다. 한현진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언니, 오랜만에 오셨을 텐데 오늘은 한주 음식으로 드시는 게 어때요?”문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현진 씨가 먹고 싶은 거로 주문해요.”주문한 음식 서빙을 마치고 룸을 나서려는 종업원에게 송민준이 갑자기 말했다. “장어 국수도 주문할게요.”문채영이 힐끗 송민준을 쳐다보자 시선을 올린 그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지.”‘그래,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다고 하는 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하고 많은 국수 중에 왜 하필 장어 국수야?’‘오빠가 장어 국수라고 말할 때 언니 표정을 보면 설마 두 사람 사이에 장어 국수와 관련된 스토리가 있었던 건가?’호기심이 활활 불타오른 한현진이 몰래 테이블 아래로 강한서의 손을 꼬집었다. 그러자 강한서는 그녀에게 새우를 발라 주었다. 한현진: ...강한서과 문채영은 너무 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한현진은 문채영의 외할머니와 강한서의 할머니가 먼 친척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촌수가 먼 사이라 피가 거의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지낸지 한참 후에야 두 가문이 몇 세대 전에는 친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현진이 고개를 들자 옆에 서 있는 벤틀리가 보였다. 송민준이 운전석에 앉아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차창은 닫혀 있었으니 송민준은 당연히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강한서의 차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차를 세운지 한참이 지나도 두 사람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송민준은 강한서가 또 이상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송민준의 목소리를 들은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을 놓고 그녀의 옷을 정리하며 단정하게 자리에 앉았다. 민경하는 은연 중에 자신의 미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차에서 내린 송민준은 카키색의 캐주얼한 외투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평소 한열이 자주하던 헤어스타일과 비슷했고 선글라스를 콧등에 걸친 채 입술을 앙다물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넓은 어깨에 긴 다리의 그가 우뚝 서 있으니 카리스마와 매력이 흘러넘쳤다. 전엔 그가 한열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이런 차림에 선글라스까지 쓴 모습을 보니 만약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아마 그를 한열로 착각할 것도 같았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이 가방을 메고 송민준을 향해 걸어갔다. “오빠, 오늘 왜 이렇게 멋져요?”송민준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내가 언제 안 멋진 적이 있었어?”한현진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어떤 날이든 멋지긴 하죠. 그래서 언제 데뷔할 생각이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건네받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난 열이와 캐릭터가 너무 비슷해. 내가 데뷔하면 연예계에 걔 자리가 있긴 할 것 같아?”한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송민준은 손을 들어 검지로 콧등에 걸린 선글라스를 아래로 내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강한서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쟨 차에서 뭐하는 거야?”“업무 통화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한현진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가자. 우린 먼저 올라가는 게 좋겠어. 혼자 미적거리라고 해.”룸에 도착하자 송민준은 그제야 물었다. “너희 두 사람, 대체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이렇
한현진이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강한서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마음 약해질 줄 알았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한현진이 말했다. “처음엔 마음이 약해졌는데 조금 전 불쾌한 일이 있었거든.”한현진은 간단하게 주혁이 무릎 꿇은 일을 서술했다. “난 사실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건 아니었어. 하지만 꿇어앉아 있는 기사님 모습을 본 순간 화가 치밀더라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러니까 날 강박하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 기회를 빌려 바로 전근시켰어.”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오는 길에 계속 마음이 불편했어. 내가 너무 극단적으로 처리한 건 아닌가 싶었거든. 기사님은 지금 아들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돈이 부족한 상황이거든. 전근하면 월급은 당연히 전보다 줄어들 텐데.”강한서가 한현진의 손등을 토닥였다.“인공 달팽이관은 보청기와 비슷한 거야. 생명과 직결된 문제도 아니니 돈이 부족하다고 해도 당장 급할 건 없어. 하지만 굳이 너를 속여 가며 부업을 하려고 했어. 난 그 부분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멈칫한 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기사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모르지.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무릎을 꿇고 자존심 따위는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원하는 건 자신의 존엄보다 훨씬 더 소중한 걸 거야. 전근이 제일 좋은 선택이었어. 네가 그 사람을 곁에 두는 건 내가 불안해.”강한서는 한현진의 손을 잡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약해지지 마. 네가 마음 약해질 때마다 난 심장이 떨려.”“휴. 신세를 지기도 했고 기사님 집에는 장애인이 두 명이나 있잖아. 안타까워서 그러지. 내가 언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약해지는거 봤어? 난 아주 독한 사람이라고.”강한서는 곧바로 태클을 걸었다. “강운이에겐 마음 약하게 굴었잖아.”지나간 이야기를 꺼내려는 강한서의 태도에 한현진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불쌍해 보이는 주 변호사님 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