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만약 한현진이 내건 조건이라면 서해금은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역시나 한현진의 말에 서해금이 표정이 조금 흔들렸다. 그녀가 입술을 짓이기며 말했다. “현진아, 아주머니도 세은이가 인턴으로 들어오는 걸 반대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이렇게 큰 회사에 너와 아버지의 한마디로 모든 걸 결정할 순 없어. 나도 다른 부서들과 얘기도 해봐야 하고 직원들의 마음도 신경 써야 해. 예전에도 딸을 인턴으로 써달라는 임원이 있었지만 회사 측에서 모두 거절했어. 안 된다고 단호하게 얘기해 놓고는 자기 일에는 이렇게 입장을 번복한다면 어떻게 기강을 세울 수 있겠니?”“세은이 아빠 일은 나도 안됐다고 생각해. 내 마음도 너희들과 다르지 않아. 네 아빠는 사람 간의 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잖니. 너도 그렇고. 그러니 이렇게까지 얘기가 나온 이상 내가 계속 반대한다면 너무 인정머리 없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현진아, 난 최악의 상황을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어. 인턴을 채용한 후 문제가 생기는 날엔 네가 그에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할 거야. 혹시 나중에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아줌마가 인정이 없다고 원망하지 마.”듣기엔 꾸밈없는 솔직하게 내뱉은 말 같았다. 마치 서해금에겐 아무런 사심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송병천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뭔가 얘기를 꺼내려고 하자 송민준이 송병천의 발을 꾹 디뎌 입을 닫게 했다. 한현진이 웃으며 말했다. “아주머니께서 회사 일은 신중하게 고민하시는 것도 제 어머니의 노력이 헛되게 하지 않으려고 그러시는 건데 저도 당연히 이해하죠.”말문이 막힌 서해금이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이해하면 됐어.”송병천에게 혼난 송가람은 밥 먹을 때가 되었지만 방으로 들어가 나오려 하지 않았다. 마지막엔 서해금이 달래러 올라가서야 얼굴을 비췄다. 서해금의 표정은 굳어있었고 송가람은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마도 방에서 서해금에게 혼난 모양이었다. 송가람은 늘 금이야 옥이야 하며 가족들의 손에 떠받들려 살았다. 부
한현진의 말에 번뜩 정신을 차린 송가람이 뻗었던 손을 거두었다. 송가람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처음부터 바로 조건을 얘기할 수도 있었는데 왜 굳이 제 얘기를 꺼낸 거예요? 아빠가 절 미워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거예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어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한현진은 일어서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송가람은 서 있고 한현진은 앉아 있었으니 송가람이 한현진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서늘한 한현진의 눈빛에 송가람은 어쩐지 오히려 한현진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언니가 착각하셨네요. 제가 무슨 재간이 있어서 언니가 할 말을 예측할 수 있겠어요. 아빠가 언니를 싫어하시는 건 본인에게서 문제점을 찾으셔야죠. 아빠가 언니를 아껴주고 사랑해 주며 인간의 도리를 가르쳤지만 언니는 오히려 주 기장님 죽음이 우리와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했어요. 그러니 아빠가 어떻게 화나지 않을 수 있겠어요?”그 말에 송가람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건 그냥 사고였어요. 현진 씨는 그저 그 일을 이용해 아빠 앞에서 좋은 이미지를 세우려는 것뿐이잖아요.”한현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은혜에 보답하는 건 인간의 제일 기본적인 도리 아닌가요? 가람 언니에게 그런 건 그저 좋은 이미지를 위한 연기에 불과한 거였군요. 그럼 언니가 강한서를 구해준 것도 그런 이유라고 생각해도 될까요?”송가람이 움찔 몸을 굳혔다. “헛소리하지 마. 한현진, 내가 한서 오빠를 구한 이유로 오빠가 나에게 마음을 주니까 이렇게 쪼잔하게 구는 거잖아. 내가 뭘 해도 마음에 안 들고 날 적대시하는 거잖아. 하지만 네가 아무리 그래도 오빠는 여전히 널 기억도 하지 못해. 오빠 마음속에 넌 그리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고.”한현진은 차분하게 미쳐 날뛰는 송가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의 송가람은 한 번도 이렇게 한현진 앞에서 난리를 피운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송병천에게 혼나고 서해금에게 꾸지람까지 듣고 분노를 이기지 못한 탓인지 드디어 한현진에게 폭언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기며 손톱이 손바닥에 박히도록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고 나서야 그는 겨우 한현진에게 악담을 퍼부을 수 있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걸 보니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하네요. 가람 씨가 절 해하려 했다면 왜 또 굳이 절 구했겠어요?”한현진이 실망 가득한 눈으로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송가람은 믿고 내 말은 못 믿는다는 거야?”차가운 강한서의 목소리가 울렸다. “전 그저 제가 본 것만 믿어요.”한현진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녀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강한서, 난 차라리 네가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어.”그 말에 찌릿, 강한서의 심장이 저렸다. 주먹을 꼭 쥔 강한서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송가람이 미간을 찌푸렸다. “현진 씨, 그 말은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꺼져.”한현진이 냉담한 얼굴로 강한서를 밀어내고 곧장 자리를 벗어났다. 그의 가슴팍에 아직 밀어내던 한현진의 손길이 느껴졌다. 강한서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표정을 숨긴 강한서의 얼굴에선 그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송가람이 나지막이 말했다. “한서 오빠, 괜찮아요? 현진 씨도 그래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저주를 퍼부으면 안되죠.”입술을 짓이기며 송가람의 말에 대꾸하지 않던 강한서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얼굴은 좀 어때요? 아직도 아파요?”송가람이 눈시울을 붉히며 대답했다. “전 괜찮아요, 오빠. 현진 씨 너무 탓하지 말아요. 현진 씨는 계속 제가 오빠를 구한 게 마음에 걸려서 저에게 적대감을 보이는 거예요. 오빠에게 그러는 게 아니라.”강한서가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진 씨 편 들 거 없어요. 한현진 씨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지내면서 이미 알고 있어요.”시선을 내린 송가람이 생각했다. ‘이 정도면 뺨 맞은 것도 나쁘진 않네.’잠시 생각하던 송가람이 조심스레 물었다. “오빠, 현진 씨가 아름드리에서 지내는 게 어차피 오빠 기억이 돌아오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데 왜 내보내지 않는
민경하는 어이가 없었다. “장난으로 하는 얘기 아니에요. 사모님 성격 몰라서 그러세요? 사모님께선 자그마한 일도 참고 넘어가는 법이 없는 분이세요. 게다가 지금은 임신까지 하셨잖아요. 다른 분 때문에 사모님께 욕을 하셨다니, 대표님께선 정말 아이가 사모님 발목이라도 잡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욕은 안 했어요...”무력한 기분에 강한서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어떻게 달래야 하는 건지 생각이나 좀 해줘요.”민경하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기억이 돌아왔다고 얘기하세요. 그러면 사모님이 기쁘셔서 그 일은 바로 잊으실 거예요.”“...”“그 방법은 제외하고요.”잠시 생각하던 민경하가 말했다. “강에 다시 빠지시던가요. 그러면 사모님께서 마음이 아프셔서 바로 잊으실 거예요.”강한서가 바득 이를 갈았다. “좀 정상적인 대책을 생각할 순 없어요?”민경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대표님, 저 공대 나왔어요. 저에게 연애 상담을 하시면 저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내가 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은 거야. 아가씨도 달래고 도련님도 도와야 하다니. 이까짓 연봉으로 이것저것 다 시키는 꼴이라니.’“아니면 취한 척하세요.”민경하가 나지막이 말했다. “사모님께서는 술에 취한 대표님께는 관대하신 편이시니까요.”강한서가 멈칫하더니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고맙다는 말도 없어?’전화를 끊고 고개를 돌리니 강민서의 총알이 또 다 떨어지고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다행히 총알 한 발이 과녁을 명중했다. 사격장 사장님이 계속 세 치 혀를 놀리며 강민서를 꼬드겼다. “제 말이 맞죠. 맞힐 수 있으시다니까요. 몇 라운드만 더 하시면 손에 익히실 수 있어요. 연속 20발을 명중시키시면 저 위에 있는 상품 중에서 아무거나 고르시면 돼요.”강민서가 통이 크게 또 비용을 지불했다. 그 모습에 민경하가 시간을 확인했다. ‘저 실력으론 아마 날이 밝기 전까진 이 사격장을 벗어날 수 없을 거야.’민경하가 앞으로 걸어가 강민서
강한서의 행동에 한현진이 어리둥절해졌다. “강한서, 너 뭐 하는 거야?”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깜짝 놀란 강한서가 움찔하며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사레까지 들려 캑캑 기침했다. 새하얗던 얼굴이 은은한 빨간빛으로 물들었다. 머뭇거리던 강한서가 애써 침착한 척 허리를 숙여 술병을 주우며 나지막이 말했다. “목이 말라서요.”한현진이 강한서 뒤에 있는 정수기를 힐끔 쳐다보더니 침묵했다. ‘술과 물도 구분 못 해?’“강한서, 우—”우리 집에 가자. 한현진이 아직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강한서가 관자놀이를 누르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머리 아파요.”“...”‘방금까지 닥치라던 기세는 어디 간 거야? 그 잠깐 사이에 이렇게 약한 척한다고?’강한서를 훑어보던 한현진의 머릿속에는 갑자기 기괴한 추측이 떠올랐다. ‘설마 취한 척 방금 있었던 일을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은 아니겠지?’‘말을 내뱉을 때는 기세등등하더니, 이제 와서 눈치를 보시겠다?’“그래.”짧게 대답한 한현진이 비꼬며 말했다. “머리 아프면 네 그 착한 가람 동생 불러줄까? 송가람에게 머리 마사지 좀 해달라고 할래?”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말 하지 마요.”한현진이 흥 콧방귀 뀌며 강한서 옆을 지나쳐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강한서가 그런 한현진을 불러세웠다. “오, 오늘 밤 어디로 갈 거예요?”한현진의 발걸음이 멈칫 멈춰 섰다. 그녀는 웃는 듯 웃지 않는 표정으로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왜, 내가 네 집에서 자면 네 가람 동생이 화낼 것 같아? 그래서 내가 아름드리로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미안한데, 난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줄 생각이 없어. 꼭 네 집에서 지내면서 네 가람 동생 열을 올릴 거야.”그 말에 강한서의 두 눈이 반짝였다. 눈빛에 가득 찬 생기가 감춰지지 않을 것 같아 강한서는 얼른 한현진의 눈을 피하며 냉담하게 말했다. “마음대로 해요.”차가운 척 행동했지만 꿀꺽 침을 삼킨 강한서의 목젖은 그의 진실한 기분을 그대로 드러냈다. 강한
‘아니, 물론 화를 내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하지만... 왜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거야?’머리를 굴리던 강한서가 한참 만에야 대답했다. “아니면 성우네로 갈래요? 자기 집 고양이가 백 텀블링할 줄 안다고 그러던데.”한현진이 잠시 침묵했다. “그래. 애 데리고 구경이나 하러 가지, 뭐.” “...”운전기사는 곧 차를 돌려 클라우드 아파트로 향했다. 30분 후, 클라우드 아파트 902호. 문을 열고 빈손으로 찾아온 두 사람을 본 한성우가 쯧 혀를 찼다. 차미주가 집안에서 소리쳤다. “귀인이라도 온 거야?”한성우가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오긴 왔는데, 가난하신 손님인가 봐. 빈손으로 왔네?”“...”“...”차미주가 도도도 달려 나왔다. “현진이?”말하며 한성우를 밀어낸 차미주가 말했다. “서서 뭐 해? 얼른 차라도 내와.”한성우가 분노에 찬 눈빛으로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설 연휴에 우리 시간을 방해하다니.’“두 사람이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자리에 앉고 나서야 차미주가 두 사람에게 물었다. 한현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강한서가 너희 집 고양이가 백 텀블링을 한다고 해서. 애 데리고 구경 좀 하러 왔어.”강한서가 그만 사레에 들렸다. 그리고 할 말을 잃었던 차미주가 대답했다. “너희 태교도 독특하게 하네.”말하며 차미주가 숙희를 다그쳤다. “숙희야, 자. 한 번 보여줘.”고개를 들어 유치한 인간들을 슥 훑어본 숙희가 등을 돌리더니 몸을 동그랗게 말아 계속 잠을 청했다. “현진아, 이리 와 봐. 내가 새로 쓴 대본 보여줄게.”잠깐 앉아서 수다를 떨던 차미주는 그제야 새로 집필하고 있던 대본을 떠올렸다. 전에 한성우에게 보여줬었지만 워낙 입만 번지르르한 녀석이라 개똥을 보여줘도 꽃이라며 칭찬할 것이 분명했다. 차미주는 도무지 한성우의 안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차미주가 한현진을 서재로 데려가고 나서야 한성우가 입을 열었다. “아니면 너도 따라 들어가. 형수님 닳겠어.”강한서가 움찔하더니 한성
한현진의 질문에 강한서가 멈칫했다. 이건 강한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였다. 그는 임신 중이던 은서의 엄마를 본 적이 있었다. 임신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기와 산모가 무탈하게 건강하기만 하다면 딸이든 아들이든 상관없었다. 미혼이었던 20여 년 동안 강한서는 육아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리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 아니었고 아버지 역시 일찍 돌아가셨으니 강한서는 일반적인 가정의 아이는 어떻게 성장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무엇이든 빨리 배우는 강한서였지만 부모가 되는 일에서만큼은 그가 참고할 만한 성공적인 사례가 없었다. 그러니 아이를 낳아 키우는 문제는 그동안의 강한서가 고민할 법한 일이 아니었다. 한현진을 데리고 병원에 갔었던 제일 중요한 원인 역시 한현진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아이를 좋아한다는 것을 강한서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작은 생명은 강한서에게는 너무 갑자기 찾아온 선물이었다. 뭔가를 준비할 겨를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고 그와 한현진의 피가 섞인 작은 생명체가 한현진의 배 속에서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때의 기분은 그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행복, 흥분, 당혹, 두려움 그리고 고마움까지. 그에게 아이는 혈연으로 끈끈하게 이어진 사이인 동시에 한현진과의 사랑의 결실이기도 했다. 남자아이가 좋은지 여자아이가 좋은지는 강한서에겐 여전히 정답 없는 질문이었다. 강한서가 제일 좋아하는 건 한현진뿐이었다. 그는 그저 한현진과 함께 한 생명을 어른으로 키워내는 그 모든 과정이 기대되었다. 생명의 소중함, 부모로서의 책임감은 전부 한현진이 그에게 알려준 것이었다. 그런 생각에 강한서의 마음이 간질거렸다. “남자애가 좋은지 여자애가 좋은지 묻는데 대답이 왜 이렇게 오래 걸려?”한현진이 어이가 없다는 듯 강한서를 힐끔 쳐다보았다. ‘둔해 빠져서는.’시선을 내린 강한서가 한참 만에야 대답했다. “다 좋아요.”한현진
강민서의 표정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초대하지도 않은 결혼식에 가서 뭐 하게?”한현진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돈 벌러 가지 왜 가겠어. 우리 가게에서 액세서리를 주문했어. 아직 잔금도 안 줬다고.”“결혼식에 넌 돈 벌러 가다니, 미친 거 아냐?”한현진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설마 내가 결혼식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돈을 받아야 한다는 거야? 만약 결혼식 끝나고 환불이라도 하겠다고 하면 어쩔 건데?”강민서가 욱 화를 내며 말했다. “네 머리엔 돈밖에 없어? 네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뚝, 말을 멈추던 강민서가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 “넌 이젠 송씨 가문의 딸이야. 네가 뭐가 부족해서 돈, 돈거리는 거야?”한현진은 평소와는 너무 다른 강민서를 훑어보며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그 말에 말문이 막힌 강민서가 이를 악물었다. “아무튼 난 분명히 얘기했어. 무슨 일 생기면 울지나 마.”한현진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녀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멈칫하던 강민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야.”말을 마친 강민서가 방으로 올라갔다. 한현진은 그런 강민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양시은 딸의 결혼식은 밸런타인데이였다. 예비 신랑은 모 부국장의 외동아들이었고 그 역시 공무원으로 삼대가 모두 공직에 종사하는 명망 높은 가문의 자제였다. 작년 연말 시장 비서로 승진한 양시은의 남편은 창창한 앞날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 이 결혼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권력을 위한 정략결혼이라고 볼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은 양시은을 보며 드디어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말했다. 남편의 출세와 함께 딸도 든든한 시댁을 둔 남편을 얻게 되었으니 이제 복을 누리기만 하면 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약혼 후 지금까지, 한현진은 한 번도 양시은이 사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점이 오히려 한현진의 호기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