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물론 화를 내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하지만... 왜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거야?’머리를 굴리던 강한서가 한참 만에야 대답했다. “아니면 성우네로 갈래요? 자기 집 고양이가 백 텀블링할 줄 안다고 그러던데.”한현진이 잠시 침묵했다. “그래. 애 데리고 구경이나 하러 가지, 뭐.” “...”운전기사는 곧 차를 돌려 클라우드 아파트로 향했다. 30분 후, 클라우드 아파트 902호. 문을 열고 빈손으로 찾아온 두 사람을 본 한성우가 쯧 혀를 찼다. 차미주가 집안에서 소리쳤다. “귀인이라도 온 거야?”한성우가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오긴 왔는데, 가난하신 손님인가 봐. 빈손으로 왔네?”“...”“...”차미주가 도도도 달려 나왔다. “현진이?”말하며 한성우를 밀어낸 차미주가 말했다. “서서 뭐 해? 얼른 차라도 내와.”한성우가 분노에 찬 눈빛으로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설 연휴에 우리 시간을 방해하다니.’“두 사람이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자리에 앉고 나서야 차미주가 두 사람에게 물었다. 한현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강한서가 너희 집 고양이가 백 텀블링을 한다고 해서. 애 데리고 구경 좀 하러 왔어.”강한서가 그만 사레에 들렸다. 그리고 할 말을 잃었던 차미주가 대답했다. “너희 태교도 독특하게 하네.”말하며 차미주가 숙희를 다그쳤다. “숙희야, 자. 한 번 보여줘.”고개를 들어 유치한 인간들을 슥 훑어본 숙희가 등을 돌리더니 몸을 동그랗게 말아 계속 잠을 청했다. “현진아, 이리 와 봐. 내가 새로 쓴 대본 보여줄게.”잠깐 앉아서 수다를 떨던 차미주는 그제야 새로 집필하고 있던 대본을 떠올렸다. 전에 한성우에게 보여줬었지만 워낙 입만 번지르르한 녀석이라 개똥을 보여줘도 꽃이라며 칭찬할 것이 분명했다. 차미주는 도무지 한성우의 안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차미주가 한현진을 서재로 데려가고 나서야 한성우가 입을 열었다. “아니면 너도 따라 들어가. 형수님 닳겠어.”강한서가 움찔하더니 한성
한현진의 질문에 강한서가 멈칫했다. 이건 강한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였다. 그는 임신 중이던 은서의 엄마를 본 적이 있었다. 임신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기와 산모가 무탈하게 건강하기만 하다면 딸이든 아들이든 상관없었다. 미혼이었던 20여 년 동안 강한서는 육아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리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 아니었고 아버지 역시 일찍 돌아가셨으니 강한서는 일반적인 가정의 아이는 어떻게 성장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무엇이든 빨리 배우는 강한서였지만 부모가 되는 일에서만큼은 그가 참고할 만한 성공적인 사례가 없었다. 그러니 아이를 낳아 키우는 문제는 그동안의 강한서가 고민할 법한 일이 아니었다. 한현진을 데리고 병원에 갔었던 제일 중요한 원인 역시 한현진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아이를 좋아한다는 것을 강한서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작은 생명은 강한서에게는 너무 갑자기 찾아온 선물이었다. 뭔가를 준비할 겨를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고 그와 한현진의 피가 섞인 작은 생명체가 한현진의 배 속에서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때의 기분은 그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행복, 흥분, 당혹, 두려움 그리고 고마움까지. 그에게 아이는 혈연으로 끈끈하게 이어진 사이인 동시에 한현진과의 사랑의 결실이기도 했다. 남자아이가 좋은지 여자아이가 좋은지는 강한서에겐 여전히 정답 없는 질문이었다. 강한서가 제일 좋아하는 건 한현진뿐이었다. 그는 그저 한현진과 함께 한 생명을 어른으로 키워내는 그 모든 과정이 기대되었다. 생명의 소중함, 부모로서의 책임감은 전부 한현진이 그에게 알려준 것이었다. 그런 생각에 강한서의 마음이 간질거렸다. “남자애가 좋은지 여자애가 좋은지 묻는데 대답이 왜 이렇게 오래 걸려?”한현진이 어이가 없다는 듯 강한서를 힐끔 쳐다보았다. ‘둔해 빠져서는.’시선을 내린 강한서가 한참 만에야 대답했다. “다 좋아요.”한현진
강민서의 표정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초대하지도 않은 결혼식에 가서 뭐 하게?”한현진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돈 벌러 가지 왜 가겠어. 우리 가게에서 액세서리를 주문했어. 아직 잔금도 안 줬다고.”“결혼식에 넌 돈 벌러 가다니, 미친 거 아냐?”한현진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설마 내가 결혼식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돈을 받아야 한다는 거야? 만약 결혼식 끝나고 환불이라도 하겠다고 하면 어쩔 건데?”강민서가 욱 화를 내며 말했다. “네 머리엔 돈밖에 없어? 네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뚝, 말을 멈추던 강민서가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 “넌 이젠 송씨 가문의 딸이야. 네가 뭐가 부족해서 돈, 돈거리는 거야?”한현진은 평소와는 너무 다른 강민서를 훑어보며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그 말에 말문이 막힌 강민서가 이를 악물었다. “아무튼 난 분명히 얘기했어. 무슨 일 생기면 울지나 마.”한현진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녀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멈칫하던 강민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야.”말을 마친 강민서가 방으로 올라갔다. 한현진은 그런 강민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양시은 딸의 결혼식은 밸런타인데이였다. 예비 신랑은 모 부국장의 외동아들이었고 그 역시 공무원으로 삼대가 모두 공직에 종사하는 명망 높은 가문의 자제였다. 작년 연말 시장 비서로 승진한 양시은의 남편은 창창한 앞날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 이 결혼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권력을 위한 정략결혼이라고 볼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은 양시은을 보며 드디어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말했다. 남편의 출세와 함께 딸도 든든한 시댁을 둔 남편을 얻게 되었으니 이제 복을 누리기만 하면 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약혼 후 지금까지, 한현진은 한 번도 양시은이 사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점이 오히려 한현진의 호기심을
전태평이 무슨 속셈인지, 한성우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탄식을 터뜨렸을 따름이었다. 승진하기 전 전태평은 한성우 같은 사업가들과 업무 교류가 많은 부서에서 일했었다. 자연히 한성우와도 식사 자리를 여러 번 가진 적이 있었기에 한성우는 그가 어떤 인간인지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장준은 쓰레기 같은 놈이었지만 장씨 가문은 정치력 세력이 있는 명문가였다. 가다가 장준은 외동아들이었으니 만약 전태평이 딸이 제 노릇을 제대로 해 장씨 가문의 대를 이어주기만 한다면 전태평은 장씨 가문을 등에 업고 더 훨훨 날아오를 수 있었다. 잠시 말을 멈춘 한성우가 슬그머니 강한서를 훑어보더니 헛기침하며 말을 이었다. “어떤 사모님께서 이번 혼사를 주선하셨다고 들었어요.”한현진이 그런 한성우의 미세한 행동을 알아차리고는 멈칫 몸을 굳혔다. 조금 무딘 차미주가 얼른 말했다. “대체 어느 몰인정한 인간이 이런 결혼을 주선한 거야.”한성우가 말했다. “누군진 나야 모르지. 양시은 사모님과 가까운 사이라고 들었어.”“이건 그냥 사람 인생 하나 망치는 거잖아. 가까운 사이에 이럴 수 있어? 만약 누가 내 딸에게 이런 사람을 소개해 준다면 난 그 인간 사돈에 팔촌까지 다 불러서 욕할 거야.”한성우가 차미주에게 다가갔다. “내가 같이 욕해줄게. 그래서 우리 딸은 언제 낳아?”“낳긴 뭘 낳아.”두 사람은 결혼식장으로 가는 내내 입씨름을 쉬지 않았고 그 덕에 차 안의 분위기는 한껏 유쾌해졌다. 목적지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자 차미주가 갑자기 한현진을 끌어당기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현진아, 너 엉덩이가 왜 이렇게 커진 거야? 힙 운동이라도 한 거야?”“...”그 말에 한현진이 손을 뻗어 엉덩이를 만졌다. “그렇게 티나?”차미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임신하고도 엉덩이 운동이라니, 미쳤어?”“운동하긴 뭘 해.”한현진이 차미주의 손을 자기 엉덩이에 가져갔다. 그러자 차미주는 자연스레 한현진의 엉덩이를 꽉 움켜쥐었고 곧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전고윤은 올해 곧 졸업을 앞둔 대학교 4학년생이었다. 강민서보다는 2살이 어렸지만 훨씬 차분해 보였다. 말투나 일 처리 방식 모두 양시은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고 예절도 바른 아이였다. 축의금을 내고 식장으로 향하는 한현진을 전고윤이 불렀다. “현진 이모.”이모라는 호칭에 한현진이 그만 침에 사레가 들렸다. “절 뭐라고 부른 거예요?”전고윤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현진 이모가 엄마를 언니라고 부른다면서 호칭을 잘못 부르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그게 몇 년 전 일인데, 뒤끝이 길어도 너무 길잖아.’전고윤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는 지금 신부대기실에 계세요. 모셔 오라고 하셨거든요.”강한서는 한현진의 손을 꼭 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한현진이 그런 강한서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시은 언니가 신부를 위해 액세서리를 주문했어. 아직 전해주지 못해서 미주랑 같이 가서 피팅해보고 올게. 먼저 가 있어.”입술을 앙다물고 손을 놓은 강한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빨리 와요.”“알겠어.”신부대기실은 예식장과 같은 층에 있어 꽤 가까웠다. 전고윤은 한현진과 차미주를 데리고 곧 신부대기실 앞에 도착해 문을 열었다. 역시가 장씨 가문은 이번 결혼식에 심혈을 기울이는 듯했다. 신부대기실에서 신부의 메이크업과 드레스를 봐주는 사람만 해도 대여섯 명은 되는 것 같았다. 차미주가 화장대 위에 올려진 박스에 새겨진 로고를 힐끔 쳐다보았다. 재벌가에서도 유명한 샵의 로고였다. 메이크업 한 번에 몇천만 원을 든다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는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 제일 의외였던 것은 신부 대기실에 양시은 모녀뿐만 아니라 신미정도함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옆에 앉아 양시은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기실의 문이 열리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한현진을 보고는 혐오의 표정을 드러내던 신미정이 곧 눈을 반짝이며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넌 왜 왔어?”한현진이 태연하게 양
한현진과 양시은을 번갈아 보던 신미정이 입을 열었다. “한현진, 오늘은 시은 씨 따님이 혼사가 있는 날이니 괜히 여기서 재수 없게 하지 않는 게 좋겠어. 분명 네가 박스를 놓친 거잖아. 물건을 손님께 전달하기도 전에 망가졌으니 이건 너희 잘못이야. 돈 몇 푼 때문에 다른 사람 결혼식 망치지 마. 그 죗값은 네가 감당하기 어려울 테니까.”꾹 분노를 삭이고 있던 차미주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분통을 터뜨렸다. “헛소리 좀 그만하시죠. 아까 현진이가 박스를 건넬 때 분명 아줌마를 등지고 있었어요. 대체 어디에 눈이 붙어서 현진이가 떨어뜨리는 걸 봤다는 거예요? 돈 몇 푼이요? 저런 팔찌쯤이야 물론 아줌마한테는 푼돈이겠죠. 아줌마가 그동안 강한서에게서 뜯어낸 돈이야말로 큰돈이죠.”신미정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넌 뭐야? 뭔데 여기서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난—”내가 네 애비다. 차미주가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한현진이 먼저 입을 열어 그녀의 말을 끊었다. “편을 들고 싶으시면 돈이라도 대신 내주시면서 편 드시죠. 저희 가게 상품은 모두 직원들이 피땀 흘려 만든 거예요. 오늘 잔금을 결제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이 신부 대기실에서 못 나가요.”말하며 고개를 돌린 한현진이 차미주에게 말했다. “미주야, 물건을 가지고 돈을 지불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신고해. 경찰이 와서 처리하라고 하지 뭐.”양시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현진 씨, 미쳤어요? 우리 딸 결혼식에 신고라뇨?”한현진이 냉소 지었다.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죠? 전 그저 잔금을 받으러 왔을 뿐이에요. 잔금을 못 주신다고 하니 당연히 신고해야죠.”차미주가 얼른 휴대폰을 꺼내 신고 전화를 걸었다. 결혼식 당일 경찰이 들이닥쳐 창피한 상황이 펼쳐질까 두려웠던 것인지 바득 이를 간 양시은이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그만해요. 재수가 없어서 그런 셈 치죠. 얼마예요?”한현진이 태연하게 말했다. “8000만 원이요.”양시은이 굳은 얼굴로 한현진에게 계좌 이체를 하더니 비꼬며 입
차미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열었다. “세상에, 그건 인간도 아닌 거 아냐? 사모님이 예전에 자기한테 얼마나 잘했는데.”“전 의원님도 시은 언니께 잘 해줬어. 하지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실 사람 속은 모른다잖아.”“시은 언니는 남편과 딸들에게 모든 정력을 쏟아부었어. 신미정은 완벽했던 시은 언니의 결혼 생활에 스크래치를 냈어. 그러니 언니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걸 용서하지 못할 거야. 그러니까 절대 다시 신미정과 손잡을 일은 없어.”멈칫하던 한현진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리고 아까 들어갈 때 못 봤어?”차미주도 한현진을 따라 목소리를 낮췄다. “뭘?”“언니 따님 눈시울이 붉어 있었어. 아마 울었었던 것 같아. 언니도 그랬고. 이 결혼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 수도 있어. 하지만 신미정이 없어서 장씨 가문이 얼마나 명문가임을 말하고 있었지만 언니가 굳이 반박하지는 않았지.”차미주는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딸이 결혼하는데 안 우는 엄마가 어딨어? 장가가는 쪽이나 안 울지.”차미주의 말에 한현진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그녀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말 하자면 길어. 아무튼 난 시은 언니가 오늘 이런 소란을 피운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만약 한현진이 눈꼴 사나웠던 거라면 이런 일을 꾸밀 필요는 없었다. 둘째 딸에게 자기를 공손히 모셔 오라고 시켜놓고 대기실에 도착하니 신미정 앞에서 그런 소란을 피웠다는 건 어쩐지 신미정에서 시그널을 보내는 것 같기도 했다. ‘시은 언니가 혹시 신미정의 속셈을 눈치챈 건가?’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한현진은 그저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 결혼식은 저녁 7시 10분에 시작되었다. 장씨 가문에서 일부로 용하다는 역술가를 찾아 받아온 시간이라고 했다. 지금은 이제 6시밖에 되지 않은 이른 시간이었다. 장준의 어머니는 모 그룹의 회장이었다. 아버지 쪽의 친척들은 대부분 공무원이었다. 뿌리가 깊고 인맥이 넓은 가문이라 청첩장을 돌린 손님들만 해도 88개의 테이블에 앉혀야
주강운의 말에 사람들이 시선이 강한서에게 쏠렸다. 양진환은 2년 전에야 양지원을 집으로 데려왔다. 강한서는 한현진을 만난 후의 모든 기억을 잃었으니 양지원이 누군지 모르는 것이 맞았다. 처음엔 미처 반응하지 못했던 사람들도 주강운의 말에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네. 강한서가 어떻게 양지원을 기억하는 거야?’강한서는 시선을 내린 채 말이 없었다. 마치 전혀 이상할 게 없다는 사람처럼 평온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옆에 있던 한현진이 오히려 컵을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미주를 기억하는 것까진 그렇다 쳐. 하지만 지원 씨도 기억하면서 나만 잊었다는 거야? 강한서, 너 지금 나랑 장난해?”한현진의 반응에 강한서가 멈칫했다. ‘이 반응...’‘현진이 성격이라면 뭔가 기억이 떠오른 거냐고 물어야 하는 거 아냐?’‘왜 갑자기 화를 내는 거지?’전에도 한현진은 그가 차미주를 기억한다는 건 언급하지 않았었다. 그러니 이렇게 뜬금없이 화를 내는 건 전혀 그녀다운 모습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현진의 고함에 사람들의 관심사는 금방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곧 입술을 짓이기며 말했다. “전 양지원 씨를 기억하지 못해요. 하지만 양 대표님과는 협업하고 있는 사이에요. 대표님께서 늘 따님 자랑을 아끼지 않으셔서 얘기를 많이 전해 들었어요. 그래서 양지원 씨에 대해서 조금 알고 있는게 전부예요.”한현진은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넌 내가 바보인줄 알아? 너 진작 나랑 헤어지고 싶었던 거지? 그래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기억 상실이라는 핑계를 대는 거지?”미간을 찌푸린 강한서가 귀찮다는 듯 말했다. “한현진 씨가 그런 거라면 그런 거로 하죠.”한현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태도야?”강한서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굳이 그렇게 생각하겠다면 저도 딱히 방법은 없죠.”‘개자식, 나쁜 남자가 할 법한 멘트는 빨리도 배웠네.’한현진이 눈시울을 붉히며
이틀 후 깔린느 정기 회의에서 서해금은 직원들의 건강검진을 언급하며 각 부서가 직원들의 시간을 조율하고 차례로 검진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말했다. 말을 마친 후 시간을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그럼 특별한 사항 없으면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잠깐만요.” 한현진이 서해금의 말을 가로막았다. 모두가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서해금도 눈을 들어 한현진을 응시하며 여유 있게 말했다. “현진 씨, 더 지시할 거라도 있어요?” 한현진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지시라뇨. 이 자리에 계신 분들 모두 제 선배님들이세요. 업무적인 부분은 앞으로도 많이 배우고 의지해야 할 분들입니다. 다만 서 대표님께서 직원 건강검진에 대해 언급하신 걸 듣고 마침 오늘 회사 고위층 분들도 다 계셔서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어서요.” “서 대표님, 괜찮으실까요?”모두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한현진이 아마도 회사 관리와 관련된 문제를 제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회사에 온 지 몇 달이 되었고 비록 진씨 가문 사모님 홍혜림을 중심으로 몇몇 고객을 끌어들였지만 서해금의 기반은 그렇게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실력 차이가 매우 컸고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 큰 진전이 없었으니 한현진은 분명히 조급할 것이다.서해금은 두 손을 가볍게 포개어 테이블에 놓고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정기 회의는 원래 경영진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어떤 의견이라도 편하게 말씀하세요. 좋은 제안이라면 우리는 반드시 적극적으로 채택할 겁니다.” 그녀는 매우 너그러운 태도로 민주적인 자세를 보여주었고 이것이 바로 서해금이 이렇게 확고한 위치를 유지하는 이유였다. 회의에서 나온 의견과 제안은 결코 당면에서 거절하지 않으며 오히려 지지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뒤에서는 다른 수단을 써서 상대를 밀어내는 법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다루는 데 그녀는 능숙했다.한현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서 대표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직설적을 말
송가람은 급히 말을 이었다. [지금 저도 정확히 알 수가 없어요.] 그녀는 강한서보다 더 초조해했다. 황 닥터는 금지된 물품을 소지하고 있던 이유로 출국 금지 명령을 받았고 당분간 국내로 돌아오지 못한다고 했다. 그가 오지 않으면 강한서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는 분명히 모든 것을 기억해 낼 것이다. 송가람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한서 오빠, 저랑 같이 외국에 가서 교수님한테 진료받으러 갈래요? 그쪽에서 꼭 잘 봐주실 거예요.] 송가람은 더 이상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강한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가람아, 평소 같았으면 바로 갔겠지만 지금은 안 될 것 같아. 너도 알잖아. 요즘 한주시 상황이 얼마나 복잡한지. 난 지금 이곳을 떠날 수 없어. 정말 어쩔 수 없으면 여기서 다른 의사를 찾아서 진료를 받는 방법을 찾아볼게.][그럴 수는 없어요!] 송가람이 목소리를 높였다. 강한서는 잠시 멈칫했다. [왜 안 되지?] 송가람은 자신이 너무 지나치게 행동했다는 걸 깨닫고 잠시 말을 더듬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 [교수님은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뇌과학 전문가 중 한 분이세요. 국내 의사들하고는 비교도 안 되죠.]의사를 바꾸면 강한서가 예전에 사용한 약에 대해 물어볼 것이었고 그렇다면 그녀는 그것을 말해야 하므로 폭로될 위험이 있었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었다. 강한서는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네.]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그 약은 효과가 좋았어. 매번 먹고 나면 머리가 맑아지고 잡생각들이 사라졌거든.] [그런데 지금은 그 약이 다 떨어져서 최근에 다시 두통이 찾아왔어. 그 약만 있으면 황 닥터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 텐데.]송가람의 눈이 번쩍였다. ‘맞다. 그 약이 있었지.’ 그녀는 속으로 들뜬 마음을 억누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서 오빠,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하지만 이 보험은 직원 개인에게만 해당되며 가족은 이 보험을 가입할 수 없다. 지금 강한서의 의도는 이 혜택을 직원의 가족에게까지 확장하려는 것이다. 주혁은 집에 두 명의 환자가 있고 약을 자주 복용해야 한다. 만약 그가 회사의 이 선의를 거절한다면 그의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 예전에 아들을 위해 인공 와우 이식 수술을 받을 돈을 마련하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직장을 잃었던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절대로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강한서의 개인적인 의도도 있었다. 이런 세심한 직원에 대한 배려는 점차 아래 직원들이 한현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위층은 작은 이익에 별로 신경 쓰지 않지만 일반 직원들에게는 다르다. 대부분 사람들이 열심히 돈을 버는 이유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다. 그들 대부분은 삼십대에서 마흔다섯 사이로 이 나이대의 사람들은 부모님을 부양하고 자식들을 키워야 한다. 회사가 약속한 성과급 같은 허황한 말보다는 이런 쉽게 보상받을 수 있는 실비보험이 직원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주기 때문에 더욱 마음을 얻을 수 있다. 한현진은 마치 뭔가 깨달은 듯 강한서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이렇게 사람 마음을 얻는 거구나.” 강한서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사실 처음엔 이런 생각까지는 못 했어. 할머니가 병원에 갈 때는 항상 진씨 아저씨랑 같이 가서 내가 직접 겪을 일이 거의 없었거든. 이런 일도 거의 없었고.” “그런데 한 번은 민 실장이랑 같이 출장 가는 길이였어. 그때 민 실장 어머니께서 비를 맞으면서 우리를 마중 나왔는데 길이 미끄러워서 자전거를 타다 넘어지셨어. 가벼운 사고가 나이었고 수술이 필요한 정도로 심했었지.”“그때 민 실장한테 병원에 남아서 어머니를 돌보라고 하고 혼자 고객을 만나러 갔어. 며칠 만에 일을 마치고 병원에 들렀더니 수술은 다행히 성공적이었어.” “그런데 입원부터 치료까지 전부 합쳐서 거의 천만 원 가까이 들었더라. 민 실장은 보험 청구를 했
강한서가 가식적인 말투로 말했다. “부탁할게. 나중에 내가 너랑 여정 씨에게 크게 한 턱 쏠게.”강한서에게 등을 돌린 신우가 손을 들어 중지를 내밀었다. 한현진이 강한서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신우 씨가 널 꽤 귀찮아하는 것 같아. 전에 여정 씨에게 신우 씨는 욕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아닐 걸?”강한서가 헛소리를 지껄였다. “난 우리 사이가 좋다고 생각해. 봐봐, 지금 얼마나 열심히 우릴 도와주고 있어.”한현진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그래? 난 왜 신우 씨가 마지못해 하는 것 같지?’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이제 이런 일로 신우 씨 번거롭게 하지 말자. 우리 다른 방법 찾아보자. 언제까지 부탁할 순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도 계속 신우에게만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신우처럼 능력 있고 입도 무거운 사람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현진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언제까지 신우에게 부탁할 수는 없었다. 신우의 할아버지가 위독하시기 때문에 지금은 삼촌들의 후계자 싸움이 가장 치열한 시기였다. 수많은 눈이 서로의 약점을 노리고 있었기에 신우의 처지 역시 살얼음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그 어떤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 신씨 가문에서 요즘 경쟁이 제일 치열한 것이 바로 제일 많은 계약금이 걸린 프로젝트였다. 강한서는 이 기회를 빌려 신우에게 투자금을 보태 그동안 진 신세를 갚을 생각이었다. 그날 오후, 지문 대조 결과가 나왔다. 편지 봉투와 그림에는 한현진과 강한서의 지문을 제외한 세 사람의 지문이 있었다. 그 세 사람 중 한 명은 주혁의 아내였고 또 다른 사람은 주혁의 아들인 주지호였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지문 대조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또 다른 사람의 지문이었다. 그 결과에 한현진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이 정보를 따라 뭔가를 캐낼 수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이렇게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사 결과는 결국 시스템에조차 등록되어 있
시원하게 욕을 날린 신우는 의리 있게 강한서의 부탁을 들어줬다.10여 년 전 주혁이 경찰서에 남겼던 지문을 받은 강한서는 곧 생체 인식 실험실에 보내 두 지문을 대조하도록 했다. 2시간도 지나지 않아 결과가 나왔다. 한지와 편지봉투에서는 주혁의 지문을 찾을 수 없었다. 그 결과에 한현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뭔가 착오가 있는 거 아냐? 그때 직접 손으로 나에게 건네줬었어. 심지어 장갑도 하지 않았는데, 지문이 안 나왔다고?”신우가 말했다. “여긴 여정이와 여정이 사수가 함께 만든 실험실이에요. 게다가 형사들과 자주 협력하는 곳이기도 하고요. 지문 대조 시스템은 여길 따라올 곳이 없어요. 한 번도 틀린 적 없었어요.”신우의 말은 지문 대조 결과가 틀렸을 리가 없다는 얘기였다. 신우는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냈다. 이제 막 담배 한 대를 꺼내려던 그때, 손에 들린 담배가 강한서의 손에 내쳐져 툭, 쓰레기통으로 떨어졌다. 신우: ???머리가 복잡했던 한현진은 두 사람을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왜 없는 거지?”여전히 오리무중에 빠진 한현진과 달리 강한서는 이미 눈치 채고 있은 듯 말했다. “혹시... 지금 그 사람은 애초부터 주혁이 아니었던 거야. 그래서 경찰에게 지문이 남아있을까 봐 그런 방법의 자신의 모든 지문을 지워버린 거야. 자신의 진짜 신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강한서의 추측에 한현진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떻게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그건 너무 많이 앞서간 거 아냐? 기사님은 가족도 있고 아이도 있어. 만약 정말 사람이 바뀐 거라면 가족들은 눈치 채야 하는 거 아냐?”“데가 이 세상에는 그렇게 똑같이 생긴 사람은 없어. 아무리 닮은 쌍둥이라고 해도 가족들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잖아.”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어쩌면 가족들은 원래 그 사람이 돌아오길 바라지 않을 수도 있지.”한현진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얼른 강한서에게 물었다.
“얼른 다시 가져와. 급히 쓸데가 있어.”강한서: ?“왜 그래?”한현진이 말했다. “전화로 얘기하긴 복잡한 일이야. 아무튼 얼른 전화해서 그림 다시 가져오라고 해. 만약 안 건드렸으면 못 건드리게ㅔ 하고 만약 꺼냈으면 얼른 다시 포장하라고 해. 내가 금방 갈게. 만나서 더 자세하게 얘기해 줄게.”강항서가 대답했다. “알겠어. 지금 당장 다시 가져올게.”한현진은 일찍 퇴근하고 집으로 향했다. 전화에서 한현진이 워낙 급하게 얘기한 탓에 강한서도 그녀가 걱정이라 손에 있던 일을 미리 마친 후 칼퇴근해 집으로 돌아왔다. 만나자마자 강한서를 본 한현진이 물었다. “기사님 아직 그림 안 넣었지?”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네가 너무 일찍 얘기해서 넣지도 못한 상황이야. 네가 그림을 가진 후로 우리 두 사람을 제외하면 아무도 그림을 본 적이 없어.”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랍에서 일회용 장갑을 꺼내 낀 후 그림과 평지를 함께 꺼내 일회용 봉투에 넣었다. 한현진의 행동을 본 강한서의 눈가가 파를 뛰었다. “증거 수집해?”한현진은 봉토를 밀봉하며 말했다. “정말 증거가 될 수도 있어. 일단 가직해 둬.”“대체 무슨 일이야?”한현진이 장갑을 벗고 나서야 강한서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과 본인의 의심과 의혹을 얘기했다. “이번 주에 기사님께서 뭔가 사고를 친게 틀림없어. 그래서 재판장에서 지문 인식하는 걸 거부하는 거겠지. 만약 기사님이 전과범이고 회사에서 그 사람을 그대로 둔다면 기사님이 영향을 끼치는 것 나뿐만이 아니야. 그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내가 생각해봤는데 일단 지문을 수집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일단 고여정 씨께 이 사람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아봐. 그래야 만일이 사태에 대비를 하지.”한현진의 말을 들은 강한서가 의문을 제기했다. “주혁 씨의 지문은 이미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어. 무슨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신상 조회를 하면 바로 나올 텐데 지문을 지우는 게 무슨 소용 있어?”한현진이 멈칫했다. “없을
주현의 생각은 성월과 달랐다. 송가람은 사랑에 눈이 멀어 남자의 사랑을 바랐지만 주현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를 애초부터 매우 명확했다. 주현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신분과 지위를 노렸다. 그건 20년, 30년을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주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 눈앞에 놓였는데 그 기회를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주현은 성월의 성격을 잘 알았다. 성월은 반평생을 야심으로 가득 찬 서해금 곁을 지키며 진작 서해금의 충직한 개가 되었다. 성월에게 신분은 뛰어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거였고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기회를 잡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해금 역시 자신의 두 손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송병천과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서민 출신에 남편을 잃고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 무슨 수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웃기지 말라 그래.’하지만 그 말을 주현은 감히 성월 앞에선 할 수 없었다. 주현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이모, 도와줘요. 신씨 가문으로 돌아가든 아니든 저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송가람 씨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일로 부탁해요. 활동이든 파티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자리로요. 그래야 신씨 가문에 호감을 살 수 있죠.”성월의 학창 시절, 그녀의 집안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주현의 부모님이 빌려주신 돈으로 급한 불을 끈 덕에 성월은 늘 주현의 집안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주현의 애교에 견디지 못한 성월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송가람 씨 비서로 전근 보내볼게. 너, 네 남자친구한테 기본적인 건 잘 가르쳐. 묻는 말에 아무 것도 대답 못하면 안 돼.”주현이 순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월에게 팔짱을 끼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모! 역시 이모가 날 제일 예뻐할 줄 알았어. 주말에 집에 와서 식사해요. 안 가신지 꽤 됐잖아요...”한편, 사무실로 돌아온 한현진의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어제 바로 세정제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냉정하다니, 한현진 답지 않아.”성월이 말했다. “사실 전 그렇게 냉담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오일을 깨뜨린 것도 주혁 씨였고 몰래 부업을 하다 한 대표님 얼굴에 먹칠한 것도 주혁 씨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거예요.”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인사팀에 잠깐 다녀와요. 일단 주혁을 가람이 운전기사로 전근시켜요.”성월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대표님, 가람 아가씨에게 운전기사를 붙일 생각이시면 제가 다른 기사님을 찾을게요. 회사에는 지금 마침 새로 입사한 젊은 신입사원들이 많아요. 어리고 건강하고 운전 경력도 전부 5년이 넘었어요. 주혁 씨는 한현진 곁에서 한동안 일을 하신 분인데, 가람 아가씨 운전기사로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요.”“전근시키라고 하면 시켜요. 제가 이렇게 하는 덴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 성 비서는 나서지 말아요.”성월이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성월이 사무실을 나서자 주현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모, 어떻게 됐어요? 대표님께 말씀 드렸어요?”성월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표님께서 이미 송가람 씨에게 다른 운전기사를 붙이셨어. 이미 결정된 일이야.”순간 주현은 조바심이 났다. “왜 갑자기 결정 난 거예요? 회사에서 요즘 새로 신입사원 모집했잖아요. 보안팀은 싫어할 거란 말이에요.”성월이 말했다. “대표님께서 주혁을 송가람 씨 운전기사로 전근시켰어. 지금 인사팀에 가서 그 일부터 처리해야 해.”그 말을 들은 주현이 투덜거렸다. “한현진 밑에 있던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본인 상사를 배신까지 했고요. 대표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사람을 딸 운전기사로 쓰시겠다는 거예요?”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린 성월이 주현을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성월은 주변을 확인하고 나서야 주혁의 팔을 내치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너 미쳤어? 여긴 회사야. 여기서 집인 줄 알고 그렇게 큰 소리로 대표님 뒷담화를 하는 거야?
직원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떤 직원은 회사의 조치가 꽤 인간적이라며 칭찬했고 또 어떤 직원은 아무리 화장실 청소라도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세제를 쓰진 말았어야 했다며 안전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 회사의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청소 직원이 화상을 입은 것으로 그쳤지만 만약 누군가 범행을 저지르려고 한다면 부식성이 강한 세정제는 범죄자에게 칼을 준비해준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꼴이었다. 의문을 제기하던 직원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한현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제야 실언했다는 것을 인지한 직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표님, 전 회사에서 조치를 제대로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요. 단지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저도 모르게 제일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본 거예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위험 요소요?”그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못... 못 들으셨어요?”“죄송해요.”한현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친구 문자에 답장하느라 못 들었어요.”직원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직원이 얼른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 며칠 동안 청소하시는 직원분들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잖아요. 그 일 때문에 다들 마음이 뒤숭숭해요.”한현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직원이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대표님. 다치신 분 중에 대표님이 아는 사람도 있어요. 전에 대표님 운전 기사셨던 주혁 기사님이요. 그 분이 제일 심하게 다치셨어요.”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기사님이요? 확실해요? 어제 볼 일 보러 갔다가 기사님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언제 다치신 거예요?”한현진의 말에 직원이 멍해졌다.“그럴 리가요. 며칠 전에 이미 다치셨어요. 대표님과 비슷한 시기에 휴가를 내셨어요.”한현진이 곰곰이 생각했다. “그날 제가 급한 일 때문에 길게 얘기를 나누진 못했어요. 손에 붕대 같은 건 본 기억도 없고 기사님께서도 저한테 그런 얘기는 없으셨는데... 심하게 다치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