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됐어.”송병천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규정은 온도가 없어. 그렇다고 인간에게도 온도가 없는 거야? 우리가 처음 해외로 갔을 때, 네가 주차장에서 강도를 만났었지. 그때 세은이가 발견하고 사람을 부르지 않았다면 네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을 것 같아?”“지금 세은이 아빠가 사고를 당했어. 그저 인턴으로 출근할 기회를 주자는 건데 지금 넌 그 제안을 반대하며 회사 규정을 들먹이고 있어. 정말 회사 규정대로라면 넌 깔린느에게 이력서를 넣을 자격조차 없어.”송가람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송병천과 서해금이 재혼 후 송병천은 늘 송가람을 끔찍이 아꼈었다.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이렇게 심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내가 자격이 없으면, 한현진은 자격이 있어?’제일 먼저 인턴 얘기를 꺼냈던 강한서가 덤덤히 목소리를 냈다. “아저씨, 화 푸세요. 가람 씨도 아람 아주머니가 겪으셨던 일이 또다시 반복될까 봐 걱정돼서 그러는 거예요.”한현진이 눈썹을 실룩였다. ‘송가람 환심을 살 타이밍 하나는 잘 보네.’역시, 강한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송가람이 눈시울을 붉혔다. 강한서를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에 억울함이 잔뜩 묻어있었다. ‘쯧.’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은 그래도 강한서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한 한현진은 탁 소리 나게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강 대표님, 제 기억이 맞다면 강 대표님 회사에서도 인턴이 대형 사고를 친 이력이 있죠? 그래서 강 대표님께서도 줄곧 인턴을 채용하지 않으시고선 저희에겐 그런 제안을 하시더니 이젠 또 가람 언니 편을 드는 거예요?”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인턴 채용은 깔린느의 일이니 당연히 제가 끼어들 자격은 없어요. 전 그저 가람 씨도 생각이 있어서 반대하는 것 같아서 그래요. 아무래도 특혜를 받아 입사한 사람이니 만약 사고가 생기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건가요?”“제가요.”한현진이 서해금을 보며 말했다. “아주머니, 실수가 반복되는 게
하지만 만약 한현진이 내건 조건이라면 서해금은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역시나 한현진의 말에 서해금이 표정이 조금 흔들렸다. 그녀가 입술을 짓이기며 말했다. “현진아, 아주머니도 세은이가 인턴으로 들어오는 걸 반대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이렇게 큰 회사에 너와 아버지의 한마디로 모든 걸 결정할 순 없어. 나도 다른 부서들과 얘기도 해봐야 하고 직원들의 마음도 신경 써야 해. 예전에도 딸을 인턴으로 써달라는 임원이 있었지만 회사 측에서 모두 거절했어. 안 된다고 단호하게 얘기해 놓고는 자기 일에는 이렇게 입장을 번복한다면 어떻게 기강을 세울 수 있겠니?”“세은이 아빠 일은 나도 안됐다고 생각해. 내 마음도 너희들과 다르지 않아. 네 아빠는 사람 간의 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잖니. 너도 그렇고. 그러니 이렇게까지 얘기가 나온 이상 내가 계속 반대한다면 너무 인정머리 없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현진아, 난 최악의 상황을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어. 인턴을 채용한 후 문제가 생기는 날엔 네가 그에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할 거야. 혹시 나중에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아줌마가 인정이 없다고 원망하지 마.”듣기엔 꾸밈없는 솔직하게 내뱉은 말 같았다. 마치 서해금에겐 아무런 사심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송병천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뭔가 얘기를 꺼내려고 하자 송민준이 송병천의 발을 꾹 디뎌 입을 닫게 했다. 한현진이 웃으며 말했다. “아주머니께서 회사 일은 신중하게 고민하시는 것도 제 어머니의 노력이 헛되게 하지 않으려고 그러시는 건데 저도 당연히 이해하죠.”말문이 막힌 서해금이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이해하면 됐어.”송병천에게 혼난 송가람은 밥 먹을 때가 되었지만 방으로 들어가 나오려 하지 않았다. 마지막엔 서해금이 달래러 올라가서야 얼굴을 비췄다. 서해금의 표정은 굳어있었고 송가람은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마도 방에서 서해금에게 혼난 모양이었다. 송가람은 늘 금이야 옥이야 하며 가족들의 손에 떠받들려 살았다. 부
한현진의 말에 번뜩 정신을 차린 송가람이 뻗었던 손을 거두었다. 송가람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처음부터 바로 조건을 얘기할 수도 있었는데 왜 굳이 제 얘기를 꺼낸 거예요? 아빠가 절 미워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거예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어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한현진은 일어서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송가람은 서 있고 한현진은 앉아 있었으니 송가람이 한현진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서늘한 한현진의 눈빛에 송가람은 어쩐지 오히려 한현진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언니가 착각하셨네요. 제가 무슨 재간이 있어서 언니가 할 말을 예측할 수 있겠어요. 아빠가 언니를 싫어하시는 건 본인에게서 문제점을 찾으셔야죠. 아빠가 언니를 아껴주고 사랑해 주며 인간의 도리를 가르쳤지만 언니는 오히려 주 기장님 죽음이 우리와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했어요. 그러니 아빠가 어떻게 화나지 않을 수 있겠어요?”그 말에 송가람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건 그냥 사고였어요. 현진 씨는 그저 그 일을 이용해 아빠 앞에서 좋은 이미지를 세우려는 것뿐이잖아요.”한현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은혜에 보답하는 건 인간의 제일 기본적인 도리 아닌가요? 가람 언니에게 그런 건 그저 좋은 이미지를 위한 연기에 불과한 거였군요. 그럼 언니가 강한서를 구해준 것도 그런 이유라고 생각해도 될까요?”송가람이 움찔 몸을 굳혔다. “헛소리하지 마. 한현진, 내가 한서 오빠를 구한 이유로 오빠가 나에게 마음을 주니까 이렇게 쪼잔하게 구는 거잖아. 내가 뭘 해도 마음에 안 들고 날 적대시하는 거잖아. 하지만 네가 아무리 그래도 오빠는 여전히 널 기억도 하지 못해. 오빠 마음속에 넌 그리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고.”한현진은 차분하게 미쳐 날뛰는 송가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의 송가람은 한 번도 이렇게 한현진 앞에서 난리를 피운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송병천에게 혼나고 서해금에게 꾸지람까지 듣고 분노를 이기지 못한 탓인지 드디어 한현진에게 폭언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기며 손톱이 손바닥에 박히도록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고 나서야 그는 겨우 한현진에게 악담을 퍼부을 수 있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걸 보니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하네요. 가람 씨가 절 해하려 했다면 왜 또 굳이 절 구했겠어요?”한현진이 실망 가득한 눈으로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송가람은 믿고 내 말은 못 믿는다는 거야?”차가운 강한서의 목소리가 울렸다. “전 그저 제가 본 것만 믿어요.”한현진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녀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강한서, 난 차라리 네가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어.”그 말에 찌릿, 강한서의 심장이 저렸다. 주먹을 꼭 쥔 강한서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송가람이 미간을 찌푸렸다. “현진 씨, 그 말은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꺼져.”한현진이 냉담한 얼굴로 강한서를 밀어내고 곧장 자리를 벗어났다. 그의 가슴팍에 아직 밀어내던 한현진의 손길이 느껴졌다. 강한서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표정을 숨긴 강한서의 얼굴에선 그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송가람이 나지막이 말했다. “한서 오빠, 괜찮아요? 현진 씨도 그래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저주를 퍼부으면 안되죠.”입술을 짓이기며 송가람의 말에 대꾸하지 않던 강한서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얼굴은 좀 어때요? 아직도 아파요?”송가람이 눈시울을 붉히며 대답했다. “전 괜찮아요, 오빠. 현진 씨 너무 탓하지 말아요. 현진 씨는 계속 제가 오빠를 구한 게 마음에 걸려서 저에게 적대감을 보이는 거예요. 오빠에게 그러는 게 아니라.”강한서가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진 씨 편 들 거 없어요. 한현진 씨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지내면서 이미 알고 있어요.”시선을 내린 송가람이 생각했다. ‘이 정도면 뺨 맞은 것도 나쁘진 않네.’잠시 생각하던 송가람이 조심스레 물었다. “오빠, 현진 씨가 아름드리에서 지내는 게 어차피 오빠 기억이 돌아오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데 왜 내보내지 않는
민경하는 어이가 없었다. “장난으로 하는 얘기 아니에요. 사모님 성격 몰라서 그러세요? 사모님께선 자그마한 일도 참고 넘어가는 법이 없는 분이세요. 게다가 지금은 임신까지 하셨잖아요. 다른 분 때문에 사모님께 욕을 하셨다니, 대표님께선 정말 아이가 사모님 발목이라도 잡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욕은 안 했어요...”무력한 기분에 강한서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어떻게 달래야 하는 건지 생각이나 좀 해줘요.”민경하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기억이 돌아왔다고 얘기하세요. 그러면 사모님이 기쁘셔서 그 일은 바로 잊으실 거예요.”“...”“그 방법은 제외하고요.”잠시 생각하던 민경하가 말했다. “강에 다시 빠지시던가요. 그러면 사모님께서 마음이 아프셔서 바로 잊으실 거예요.”강한서가 바득 이를 갈았다. “좀 정상적인 대책을 생각할 순 없어요?”민경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대표님, 저 공대 나왔어요. 저에게 연애 상담을 하시면 저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내가 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은 거야. 아가씨도 달래고 도련님도 도와야 하다니. 이까짓 연봉으로 이것저것 다 시키는 꼴이라니.’“아니면 취한 척하세요.”민경하가 나지막이 말했다. “사모님께서는 술에 취한 대표님께는 관대하신 편이시니까요.”강한서가 멈칫하더니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고맙다는 말도 없어?’전화를 끊고 고개를 돌리니 강민서의 총알이 또 다 떨어지고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다행히 총알 한 발이 과녁을 명중했다. 사격장 사장님이 계속 세 치 혀를 놀리며 강민서를 꼬드겼다. “제 말이 맞죠. 맞힐 수 있으시다니까요. 몇 라운드만 더 하시면 손에 익히실 수 있어요. 연속 20발을 명중시키시면 저 위에 있는 상품 중에서 아무거나 고르시면 돼요.”강민서가 통이 크게 또 비용을 지불했다. 그 모습에 민경하가 시간을 확인했다. ‘저 실력으론 아마 날이 밝기 전까진 이 사격장을 벗어날 수 없을 거야.’민경하가 앞으로 걸어가 강민서
강한서의 행동에 한현진이 어리둥절해졌다. “강한서, 너 뭐 하는 거야?”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깜짝 놀란 강한서가 움찔하며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사레까지 들려 캑캑 기침했다. 새하얗던 얼굴이 은은한 빨간빛으로 물들었다. 머뭇거리던 강한서가 애써 침착한 척 허리를 숙여 술병을 주우며 나지막이 말했다. “목이 말라서요.”한현진이 강한서 뒤에 있는 정수기를 힐끔 쳐다보더니 침묵했다. ‘술과 물도 구분 못 해?’“강한서, 우—”우리 집에 가자. 한현진이 아직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강한서가 관자놀이를 누르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머리 아파요.”“...”‘방금까지 닥치라던 기세는 어디 간 거야? 그 잠깐 사이에 이렇게 약한 척한다고?’강한서를 훑어보던 한현진의 머릿속에는 갑자기 기괴한 추측이 떠올랐다. ‘설마 취한 척 방금 있었던 일을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은 아니겠지?’‘말을 내뱉을 때는 기세등등하더니, 이제 와서 눈치를 보시겠다?’“그래.”짧게 대답한 한현진이 비꼬며 말했다. “머리 아프면 네 그 착한 가람 동생 불러줄까? 송가람에게 머리 마사지 좀 해달라고 할래?”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말 하지 마요.”한현진이 흥 콧방귀 뀌며 강한서 옆을 지나쳐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강한서가 그런 한현진을 불러세웠다. “오, 오늘 밤 어디로 갈 거예요?”한현진의 발걸음이 멈칫 멈춰 섰다. 그녀는 웃는 듯 웃지 않는 표정으로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왜, 내가 네 집에서 자면 네 가람 동생이 화낼 것 같아? 그래서 내가 아름드리로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미안한데, 난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줄 생각이 없어. 꼭 네 집에서 지내면서 네 가람 동생 열을 올릴 거야.”그 말에 강한서의 두 눈이 반짝였다. 눈빛에 가득 찬 생기가 감춰지지 않을 것 같아 강한서는 얼른 한현진의 눈을 피하며 냉담하게 말했다. “마음대로 해요.”차가운 척 행동했지만 꿀꺽 침을 삼킨 강한서의 목젖은 그의 진실한 기분을 그대로 드러냈다. 강한
‘아니, 물론 화를 내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하지만... 왜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거야?’머리를 굴리던 강한서가 한참 만에야 대답했다. “아니면 성우네로 갈래요? 자기 집 고양이가 백 텀블링할 줄 안다고 그러던데.”한현진이 잠시 침묵했다. “그래. 애 데리고 구경이나 하러 가지, 뭐.” “...”운전기사는 곧 차를 돌려 클라우드 아파트로 향했다. 30분 후, 클라우드 아파트 902호. 문을 열고 빈손으로 찾아온 두 사람을 본 한성우가 쯧 혀를 찼다. 차미주가 집안에서 소리쳤다. “귀인이라도 온 거야?”한성우가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오긴 왔는데, 가난하신 손님인가 봐. 빈손으로 왔네?”“...”“...”차미주가 도도도 달려 나왔다. “현진이?”말하며 한성우를 밀어낸 차미주가 말했다. “서서 뭐 해? 얼른 차라도 내와.”한성우가 분노에 찬 눈빛으로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설 연휴에 우리 시간을 방해하다니.’“두 사람이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자리에 앉고 나서야 차미주가 두 사람에게 물었다. 한현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강한서가 너희 집 고양이가 백 텀블링을 한다고 해서. 애 데리고 구경 좀 하러 왔어.”강한서가 그만 사레에 들렸다. 그리고 할 말을 잃었던 차미주가 대답했다. “너희 태교도 독특하게 하네.”말하며 차미주가 숙희를 다그쳤다. “숙희야, 자. 한 번 보여줘.”고개를 들어 유치한 인간들을 슥 훑어본 숙희가 등을 돌리더니 몸을 동그랗게 말아 계속 잠을 청했다. “현진아, 이리 와 봐. 내가 새로 쓴 대본 보여줄게.”잠깐 앉아서 수다를 떨던 차미주는 그제야 새로 집필하고 있던 대본을 떠올렸다. 전에 한성우에게 보여줬었지만 워낙 입만 번지르르한 녀석이라 개똥을 보여줘도 꽃이라며 칭찬할 것이 분명했다. 차미주는 도무지 한성우의 안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차미주가 한현진을 서재로 데려가고 나서야 한성우가 입을 열었다. “아니면 너도 따라 들어가. 형수님 닳겠어.”강한서가 움찔하더니 한성
한현진의 질문에 강한서가 멈칫했다. 이건 강한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였다. 그는 임신 중이던 은서의 엄마를 본 적이 있었다. 임신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기와 산모가 무탈하게 건강하기만 하다면 딸이든 아들이든 상관없었다. 미혼이었던 20여 년 동안 강한서는 육아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리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 아니었고 아버지 역시 일찍 돌아가셨으니 강한서는 일반적인 가정의 아이는 어떻게 성장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무엇이든 빨리 배우는 강한서였지만 부모가 되는 일에서만큼은 그가 참고할 만한 성공적인 사례가 없었다. 그러니 아이를 낳아 키우는 문제는 그동안의 강한서가 고민할 법한 일이 아니었다. 한현진을 데리고 병원에 갔었던 제일 중요한 원인 역시 한현진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아이를 좋아한다는 것을 강한서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작은 생명은 강한서에게는 너무 갑자기 찾아온 선물이었다. 뭔가를 준비할 겨를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고 그와 한현진의 피가 섞인 작은 생명체가 한현진의 배 속에서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때의 기분은 그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행복, 흥분, 당혹, 두려움 그리고 고마움까지. 그에게 아이는 혈연으로 끈끈하게 이어진 사이인 동시에 한현진과의 사랑의 결실이기도 했다. 남자아이가 좋은지 여자아이가 좋은지는 강한서에겐 여전히 정답 없는 질문이었다. 강한서가 제일 좋아하는 건 한현진뿐이었다. 그는 그저 한현진과 함께 한 생명을 어른으로 키워내는 그 모든 과정이 기대되었다. 생명의 소중함, 부모로서의 책임감은 전부 한현진이 그에게 알려준 것이었다. 그런 생각에 강한서의 마음이 간질거렸다. “남자애가 좋은지 여자애가 좋은지 묻는데 대답이 왜 이렇게 오래 걸려?”한현진이 어이가 없다는 듯 강한서를 힐끔 쳐다보았다. ‘둔해 빠져서는.’시선을 내린 강한서가 한참 만에야 대답했다. “다 좋아요.”한현진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