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하리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래서 제가 얘를 똥강아지라고 부른다니까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대체 누가 지나가던 개에게 마음을 준다는 소리를 해요? 당연히 동족이니까 마음이 가겠죠.”한열은 순간 신사다운 매너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신하리와 싸우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신하리가 유유히 입을 열었다. “나 건드리기만 해 봐. 계약이 끝나는 동시에 데이트 폭력을 행사했다고 폭로할 거야. 안 좋은 소문이 퍼진 너를 대체 어떤 여자가 좋아할 수 있을지 지켜볼 거야.”눈을 부릅뜨고 신하리를 노려보는 한열은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달려들어 물어뜯고 싶었다. 신하리의 성질머리를 잘 알고 있는 강소희가 기회를 보다 입을 열었다. “그만해.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장난이 하고 싶어?”입을 삐죽이던 신하리가 드디어 입을 닫고 가만히 있었다. “다들 진정하고 대책부터 생각하죠. 일단 의심받지 않을만한 스토리를 짜야 해요.”이때, 차미주가 손을 들었다. “제가 스토리를 짜드려도 될까요?”하나둘 차미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옆에 있던 한현진이 차미주 대신 홍보하듯 말했다. “미주는 작가거든요. 전에 킹 엔터에서 제작했던 인기 드라마가 전부 미주 손에서 나온 거예요. 다만 그때는 그저 서브 작가였을 뿐이라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만요.”대본을 쓰는 작가는 당연히 스토리텔링에 강할 수밖에 없었다. 강소희도 전문적인 작가에게 이 일을 맡길까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다만 이 문제는 두 배우의 앞날이 걸린 일이라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았다. 외부인에게 맡겼다가 괜히 이익에 눈이 멀어 두 사람을 배신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강소희는 여전히 차미주의 실력에 의심을 거둘 수가 없었다. “정말 하실 수 있겠어요?”차미주가 말했다. “제가 일단 대충 스토리를 들려만 드릴게요. 들어보시고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수정하죠.”아무도 차미주의 제안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자기가 구상한 스토리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스토리를 대충
곧이어 강소희는 신하리와 한열에게 서로 각자의 취미를 공유하고 꼭 기억하고 있으라고 당부했다. 신하리가 휴대폰을 꺼내더니 한열에게 말했다. “번호 교환해.”그러나 한열은 그런 신하리를 무시했다. 신하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번호 교환 안 하고 어떻게 보내라고?”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열이 자기 취미를 적어 신하리에게 전송했다. 카톡 알림이 울리고 한열과의 대화창을 확인한 신하리가 멈칫했다. “내가 언제 너랑 번호 교환했어?”전에 한열은 줄곧 디엠으로 신하리에게 연락했었던 터라 그녀는 이제껏 전화번호를 교환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한열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똥멍청이.”“...”서로의 취미를 공유한 후 한열에게 다가가 생일을 물으려던 신하리는 그가 연락처에 저장해 놓은 자신의 이름을 보게 되었다. 미친 X. 입술을 파르르 떨던 신하리 역시 얼른 한열의 이름을 미친X으로 수정했다. 완성을 누르고 고개를 들자 한열이 어두운 얼굴로 자기 이름을 수정한 신하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 기분이 한결 좋아진 신하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친 X, 미친 X. 환상의 한 쌍이네.”한열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유치하긴.”10분 후, 두 사람은 나란히 페이스북을 업로드했다. 한열: 저의 또라이 여친을 소개합니다. @신하리. 신하리 역시 질 수 없다는 듯 한열의 피드를 리트윗하며 글을 올렸다. 제 또라이 남친을 소개합니다. @한열, 앞으로 돈 관리는 내가 할 거야. 그리고 곧 페이스북은 서버가 셧다운되어 버렸다. 대중들의 관심사는 이제 제작발표회에서 어떤 미친 여자가 한 말이 아닌 최연소 여자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한 신하리와 탑 아이돌인 한열이 사귄다는 것에 쏠렸다. 신하리를 욕하던 한열의 팬들은 이젠 한열의 페이스북에 미친 듯이 댓글을 남겼다. [미친 거 아냐?][우리가 힘들게 스밍 돌리고 있는데 연애하느라 바빴네?][차라리 신하리가 X스 파트너라고 했으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는 않았
한열의 말에 한현진이 멈칫하더니 이내 피로연 때를 떠올렸다. 신하리가 웃으며 말했다. “그거로 퉁 치면 네가 손해일 텐데.”한열이 상관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하리가 말했다. “그래도 방금 내가 한 말은 유효해. 필요한 게 생기면 언제든지 말해.”한열은 신하리의 말을 들은 건지 아닌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원래는 함께 밥을 먹으려고 했지만 한열의 상황이 이러하니 식사는 무리였다. 많은 기자가 열애설에 대해 물으려고 혈안이 되어 한열을 찾고 있을 테니 지금은 최대한 그들 앞에 얼굴을 비추지 않는 편이 상책이었다. 한현진을 데려다주려고 그녀에게 어디로 갈 건지 묻자 차미주가 클라우드 아파트로 갈 것을 제안했다. 저녁이 되면 한성우와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차에서 내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현진의 휴대폰이 울렸다. 송병천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그의 목소리는 다급하기 그지없었다. 호흡이 가쁜 듯 헐떡이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아, 얼른 집으로 돌아와. 네 오빠에게 사고가 생겼어.”순간, 한현진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빠. 그게...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왔다. 하지만 한현진은 최대한 냉정함을 유지하려 했다. 송병천이 얼굴을 쓸어내리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M 국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어. 네 오빠가 탄 비행기가 바다에 추락했다고. 구조대가 이미 그쪽으로 가고 있지만 아직 정확한 추락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대...”한현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오빠가 비행기에 탑승한 게 확실해요?”송병천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탑승하기 전에 나에게 전화했었어. 내일 아침에 도착한다면서.”한현진이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 역시 비행기에 탑승 하기 전 송민준의 연락을 받았다. ‘돌아와 할 말이 있다고도 했었는데. 갑자기 추락이라니?’‘설마 오빠가 진실을 알아내서 누군가 오빠를 죽이려고 한 거야?’그런 생각이 불쑥 머리를 스치자 한현진은 찬물을 끼얹은 듯 온몸에 소름이 끼
한현진의 말에 모두들 안색이 변해버렸다. 서해금이 나지막이 말했다. “현진아, 넌 왜 인위적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니? 민준이가 이번 출국, 설마 단순히 비즈니스 때문만은 아니었던 거야?”한현진이 덤덤하게 말했다. “가람 언니가 날씨 때문이라고 추측한 것처럼 저도 단지 그런 추측을 할 뿐이에요. 지금 구조대가 아직 아무것도 찾지 못했으니 저희가 먼저 막무가내로 날씨 때문에 추락한 거라고 속단 짓지 말죠. 그렇게 함부로 단정 짓는 건 너무 섣부른 것 같아요.”한현진이 말에 송가람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녀가 얼른 말했다. “전 단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얘기한 것뿐이에요. 제가 언제 함부로 단정 지었다고 그래요.”말하며 그녀는 또다시 눈물을 글썽였다.“오빠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머리가 하얘져서...”한현진이 목소리가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대사관에서는 그저 비행기가 추락했다고만 했어요. 아직 오빠가 비행기에 탑승했는지도 확인되지 않았고 생존자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에요. 왜 오빠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해요?”“전—”말문이 막힌 송가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비행기 추락 사고의 생존율은 거의 0%에 가깝다는 걸 몰라서 그래요? 지금 현진 씨는 오빠 생사가 중요해요, 아니면 제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게 중요한 거예요?”“당연히 오빠의 안위가 제일 중요하죠. 전 단지 아직 제대로 된 소식도 없는 상황에 곡이나 하는 꼴이 보기 싫었을 뿐이에요.”한현진이 송가람을 비꼬며 말을 이었다. “능력이 좋으셔서 강한서도 구해오신 분이 오빠를 구할 방법도 생각해 보는 게 어때요?”송가람의 표정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지금 이런 상황에 현진 씨는 아직도 저와 한서 오빠—”짝—점점 일그러지는 송병천의 얼굴을 보던 서해금이 갑자기 송가람의 뺨을 내리치며 서늘한 말투로 말을 뱉었다. “조용히 해. 지금이 싸울 때야? 네 오빠는 생사도 확인되지 않았는데 뭐가 중요한지도 모르고 말이야. 내가 너 그렇게 가르쳤어?”
마지막 한 마디를, 송병천은 가볍게 툭 던지듯 얘기했다. 그러나 한현진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저 욕심에 불과한 바람이었다. 그들 모두 송민준이 비행기에 탑승하지 않았기를 감히 바랐다. 서해금이 눈시울을 붉히며 대답했다. “그럼 조심해서 가요. 도착하면 바로 연락해 줘요.”알겠다고 대답한 송병천이 한현진과 함께 집을 나섰다. 공항으로 가는 길, 한현진이 강한서에게 전화했다. 연말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던 강한서는 한현진의 전화에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한현진의 다급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강한서 씨, 지금 집이에요? 제 여권 좀 가져다줄 수 있어요?”그 말에 강한서가 잠시 멈칫 몸을 굳혔다. “어디 가려고요?”“M 국이요. 오빠가 탄 비행기가 추락했어요.”한현진은 담담하게 말을 내뱉었지만 그 말은 강한서의 마음속에 거센 파도를 일으켰다. 그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정확한 소식이에요?”강한서의 목소리에 한현진은 목 놓아 울고 싶어졌다. 하지만 송병천도 차에 있었던 터라 아빠 앞에서 그녀는 차마 울 수 없었다. 자신이 무너지면 송병천 역시 견디지 못할 것만 같았다. 한현진이 힘껏 코를 훌쩍이며 울음을 삼키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대사관에서 이미 구조대를 보냈다고 했어요. 비행기 잔해 일부는 발견했지만 오빠와 블랙박스는 아직 찾지 못했어요. 저 지금 아빠와 그쪽으로 가서 대사관 직원을 만나 수색을 돕거나... 인계받아야죠.”강한서가 휴대폰을 쥔 손에 꾹 힘을 실었다. “지금 어디예요?”“공항으로 가는 길이예요. 전 아름드리와는 거리가 좀 있어서요. 강한서 씨가 집에 있으면 저에게 여권을 가져다주는 게 더 빠르거든요. 1시간 30분 뒤 항공편이에요. 지금 집이에요?”시간을 확인하던 강한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기다려요. 지금 갈게요.”말하며 전화를 끊은 강한서가 회의실로 돌아가 얘기할 새도 없이 다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차에 올라타 민경하에게 전화해 급한 일이
한현진이 끝내 찾지 못했던 여권은 어느 날 대청소를 하던 중 도우미 아주머니가 침대 시트 아래에서 발견했다. 그날 이후 강한서는 두 번 다시 한현진에게 여권을 맡기지 않았다. 두 사람이 이혼 후 한현진은 자주 사용하는 신분증 같은 증명서는 전부 챙겼지만 유독 여권은 자주 사용하지 않는 탓에 깜빡 잊고 아름드리에 두고 나왔었다. 강한서가 건네는 여권을 받아 든 한현진이 입술을 짓이기며 나지막이 말했다. “강한서 씨는 지금 저와 결혼한 사이도 아니잖아요. 굳이 갈 필요 없어요.”그 말에 강한서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전 어렸을 때부터 민준이와 함께 자랐어요. 전에 제가 사고 났을 때도 민준이도 최선을 다해 절 찾았잖아요. 민준이에게 사고가 난 지금, 제가 어떻게 가만히 지켜만 보겠어요.”한현진은 아무 말 없이 강한서의 두 눈에서 뭔가를 뭐라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강한서의 눈빛은 늘 그렇듯, 전과 다를 바 없이 덤덤할 뿐이었다. 송병천이 한현진을 불렀다. “현진아, 출국 심사해야 해.”그제야 한현진은 강한서에게 향했던 시선을 돌려 송병천에게 대답했다. 가족이 해외에서 사고를 당한 데다 송병천은 공항의 VVIP이기도 했다. 대사관 측에서 상황 설명까지 해 준 덕에 세 사람은 빠르게 출국 심사를 마치고 라운지에서 비행기가 이륙하기를 기다렸다. 잔뜩 긴장한 송병천은 말할 기력도 없는 것 같았다. 물론 한현진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오늘 밤 강한서의 이상한 행동에 많은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니었다. “오늘부터 연휴잖아요. 회사 일은 마무리했어요? 강한서 씨가 없어도 괜찮은 거예요?”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녀는 강단한이 아직 회사에서 조용히 숨죽인 채 강한서를 끌어내릴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얘기하면, 지금 이 타이밍에 강한서가 회사를 비우는 건 그리 이성적인 선택은 아니었다. 강한서가 시선을 내린 채 대답했다. “회사엔 민 실장이 있어요. 지금 중요한 건 민준이에요.
집엔 침대도 없었고 송병천은 허리도 좋지 않았던 터라 아빠를 소파에서 주무시게 할 수는 없지 않냐고 한현진이 강한서에게 눈짓을 보냈다. 하지만 그땐 이미 강한서가 강민서를 내쫓은 뒤였다.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면 강민서를 속인 것이었다. 사실 송병천을 집으로 데려온 강한서를 보며 강민서가 그에게 침대도 없는 집에 아저씨를 어디서 주무시게 할 거냐고 물었었다. 강한서는 대답 대신 강민서에게 옷을 던져주며 말했다. “나가서 먹을 것 좀 사와.”강민서는 갑작스러운 심부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강한서를 무서워했던지라 그의 카리스마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강한서가 던져준 옷을 입으며 밖으로 향하던 강민서가 강한서에게 뭘 사 오면 되냐고 물었다. 강민서에게 쇼핑 리스트를 읊어주던 강한서가 그녀를 문밖으로 내보내더니 곧 문을 걸어 잠구고 태연하게 말했다. “다 사면 그대로 들고 가서 네가 먹어. 저녁엔 집에 돌아오지 말고.”강민서는 그제야 강한서가 자기를 쫓아내고 송병천에게 방을 내어줄 생각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욱 화가 치민 강민서가 쾅쾅 문을 두드렸다. 집으로 들어가겠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는 강민서에 강한서는 노이즈 캔슬링 시스템을 작동했고 집안엔 고요함이 찾아왔다. 창문을 통해 고함을 지르는 강민서의 모습이 보이긴 했지만 그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한참 동안 문을 두드리던 강민서는 집안에서 아무런 대꾸도 없자 욕을 지껄이며 발길을 돌렸다. 그 의외의 모습에 오히려 한현진이 당황했다. 강민서는 이렇게 말을 잘 듣는 캐릭터가 아니었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의아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빨리 얌전해졌다. 그녀가 아름드리를 나서자 강한서는 도우미에게 강민서의 방 침대 시트를 전부 교체해달라고 부탁한 후 송병천을 그녀가 지내던 게스트룸에서 쉴 수 있도록 했다. 송민준의 소식을 듣고 심신이 지쳐있던 송병천은 일찍 씻고 침대에 누웠다. 한현진 역시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송민준이 선물해 준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도무지 잠이 들지 않는
강한서가 한현진을 꼭 끌어안고 담담하게 말했다. “전 말한 대로 할 수 있어요.”한현진이 눈을 감고 화를 삭이며 더 이상 강한서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리곤 곧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물론 그다지 깊은 잠이 든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꿈에서 비행기에 탑승하는 송민준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비행기는 비행 도중 고장이 생겨 공중에서 분해가 되었다. 송민준은 비행기의 날개에 찢겨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한현진은 식은땀을 흘리며 악몽에서 깨어났다. 창밖은 어슴푸레 날이 밝기 시작했고 옆에 있던 강한서는 이미 자리를 비웠다.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니 아직 7시도 되지 않았다. 그녀는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내려와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고요한 집안에는 황씨 아주머니가 강민서의 방을 청소하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순간 한현지은 불안한 예감에 휩싸였다. 그녀는 얼른 휴대폰을 들어 강한서에게 전화했다. 하지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송병천에게 전화했지만 역시나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한현진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안방으로 돌아왔다. 협탁 위에 올려두었던 여권이 사라졌다. ‘개자식.’‘몰래 가면 갔지, 왜 여권까지 숨긴 거야.’한현진이 차가운 얼굴로 얼른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향했다. 강한서의 휴대폰은 꺼진 상태는 아니었지만 전화를 받지는 않았다. 아직 비행기에 탑승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었다. 한현진은 주차장에서 아무 차에나 올라타 쏜살같이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으로 가는 길, 한현진에게 스팸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 멋도 모르고 전화를 받은 한현진이 스팸 전화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바로 전화를 끊었지만 곧이어 휴대폰은 다시 울렸다. 안 그래도 짜증이 솟구치던 찰나 연달아 세 번이나 걸려 온 스팸 전화가 한현진의 성질을 건드렸다. 통화 버튼을 누른 한현진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누구야. 뭐 하는 놈인데. 내 개인 정보는 어떻게 안 거야? 누가 너희들한테 팔아 넘겼어? 스팸 전화가 왜 스팸 전화인 줄 알아? 난
[두 여배우 모두 연기력이 그렇게 뛰어나면서, 대체 얼마나 보는 눈이 없어야 한열을 좋아할 수 있는 거지?][그건 좀 아니지 않나? 한열도 미남상이긴 하잖아. 이런 사람인 줄은 몰랐지만.][세 사람 같이 촬영했었잖아요. 한현진이 한열과 신하리가 사귀는 걸 몰랐을까요? 이건 뻔히 알면서도 만난 거잖아요.][살려줘! 나 한현진 정말 좋아한단 말이야. 전에 햇살 유치원 사건 때문에 엄청 호감이었는데. 봄의 연인의 중전마마 역도 완전 잘 소화했었다고. 대체 바람은 왜 핀 거야. 연예계에 사고 안 치는 연예인이 있긴 한 거야?] [두 여신을 동시에 만나다니. 한열, 능력도 좋아. 지까짓게 뭔데...] [한열은 신하리에게 빌붙으려는 목적이었던 거예요. 지금 소속사와 계약 해지를 준비 중이예요. 회사에서도 전혀 신경 안 쓰고 있고요. 신하리가 아니었으면 한열 주제에 어떻게 유명 감독에게 캐스팅 될 수 있었겠어요. 정말 어떻게든 여자 덕 좀 보겠다고 애쓰네.]아래의 댓글들은 더 이상 눈을 뜨고 볼 수도 없었다. 대부분은 그들을 욕하는 악플이었다. 한열과 신하리의 공개 연애에 대해 두 사람의 팬들은 자신의 배우가 아깝다며 강력한 불만을 토로했다. 두 사람이 열애를 인정한 후부터 양측의 팬들은 줄곧 다툼을 이어왔다. 두 사람의 커플 팬계정인 [이열치열]은 팬들의 감정 쓰레기통 같은 곳이 되어버려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한열은 열애 인정으로 회사와 갈등을 빚어 계약을 해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지금의 인지도와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한 채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회사 측은 말도 안 되는 루머를 퍼뜨렸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었던 터라 잠깐의 파장을 일으킨 후 곧 사그라들었다. 공개 연애 후 꽤 빠른 속도로 떨어지던 한열의 인기는 요즘 다시 천천히 오르고 있는 추세였다. 회사 측에서 밀어주던 신인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한열의 뒤를 이어받아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회사 측은 화가 치밀었다. 그러니 한열이 바람 폈다는 기사가
한현진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지금 예능부 기자 채용 문턱이 이 정도로 낮아진 거야? 두 눈이 멀어도 기자로 활동할 수 있나봐?”진윤: ...‘우리 여신님 사석에서는 이렇게 독설을 날리는 사람이었어?’휴대폰 너머에서 한참을 듣고 있던 차미주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 사진 너와 한열 아니야?”한현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건 나랑 오빠야.”“하지만 이 사진들은 정말 한열과 비슷해 보여. 게다가 네 오빠가 운전한 거 한열 차 아니야?”한현진은 그날 송민준이 운전한 차를 눈 여겨 본 적이 없었다. 만약 정말 한열의 차를 운전하고 온 거라면 파파라치가 착각했을 수도 있었다. 다시 페이스북을 다운로드 받고 인기 검색어를 확인한 한현진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연예 부문의 인기 검색어의 TOP 5는 전부 한열의 바람에 관한 이슈가 차지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새로운 꽃뱀, 이열 커플 사이에 끼어들다], [이열 커플, 결별 위기 스크린 밖에서도 삼각관계], [한열 살아있네], [찐사랑을 못 숨겨] 등이었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검색어들이 가득 했다. 한현진이 페이스북에 로그인하자 수백 개의 DM과 십만 개가 넘는 댓글이 쏟아졌다. 굳이 읽어보지 않아도 신하리와 한열 두 사람의 팬들의 남긴 수많은 욕이거나 일반 네티즌의 호기심에 가득한 댓글일 것이 분명했다. 인터넷이 얼마나 필터 없이 악랄한 글로 난무한 곳인지 잘 알고 있는 한현진은 아예 댓글을 확인하지도 않고 뉴스피드로 들어갔다. 한열과 한현진의 기사는 두 시간에 터졌다. 그러니 지금쯤이면 각 마케팅 계정에서는 이미 타임 라인까지 정리한 피드를 올리기 시작했다. 한현진은 관련 피드를 대충 훑었다. 마케팅 계정의 분석에 의하면 한열과 신하리는 [살의] 촬영 이전에 이미 사귀기 시작했고 송민영이 하차된 후 한열이 자신의 여자친구인 신하리를 여주인공으로 추천했으며 영화 홍보 현장에서의 친밀한 스킨십 사진이 폭로되어 어쩔 수 없이 공개 연애를 택한 것이었다. 그 계정
한현진은 반나절이 걸려서야 일의 자초지종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쩐지 지난번 홍혜림 씨 사건이 있었을 때 왜 진윤 씨가 갑자기 나타나 상황을 반전시키나 했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는 거잖아.’순간 한현진은 뻘쭘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방금 전화를 받고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입도 벙긋하지 말았어야 했다. 진윤의 말처럼 이건 정말 비열한 짓이었다. 유치한 강한서가 벌일 만한 일이 맞긴 한 것 같았다. 강한서 본인 역시 이번 일은 너무 얍삽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어쩌다 아이를 달래주었다. “내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탓이라고 해. [정상에서]에서 지금 자체 테스트 중인 스킨 한 세트 줄게. 어때?”진윤이 작게 울먹이며 말했다. “스킨 세 세트?“강한서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와중에 딜을 하는 걸 보니 그리 큰 상처를 받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세 세트 전부 줄게.”진윤이 곧바로 울음을 멈췄다. 절판되어 더는 살 수 없는 게임 스킨과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한 여신 중 아무리 바보라도 그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래요. 제가 오해한 거라고 하죠.”말하며 한현진을 쳐다보던 진윤은 여전히 아쉬워하며 말했다. “현진 누나, 왜 이렇게 빨리 결혼하셨어요. 남자 때문에 손에 넣었던 트로피도 놓칠 수가 있어요.”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결혼이 커리어 영향주지 않아. 이간질 하려고 하지 마.”“형님은 남자니까 당연히 영향을 안 받으시겠죠.”강한서에게 농락을 당한데다 하루아침에 구닥다리에게 여신을 뺐긴 진윤은 누구보다 빨리 흑화 했다. “결혼하면 아이도 낳아야 하잖아요. 어떤 유명한 감독이 임산부를 캐스팅하려고 하겠어요. 제일 예쁠 나이를 남편과 아이에게 바치면 나중에 아이가 클 때쯤엔 본인의 레전드 시절은 이미 지났다고요. 제가 다 아쉬워서 그래요. 너무 불공평해요.”비록 진윤은 그저 이간질을 하기 위해 꺼낸 말이었지만 그 말은 현실이기도 했다. 임신과 출산은 여자의 커리어엔 고난과 역경이
한현진: ?강한서가 들고 있던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것은 차미주의 목소리였다. “현진아! 너 내연녀가 되어버렸어. 게다가 그 상대가 네 사촌 동생이래.”강한서: ?강한서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그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전여친, 현여친이 뭐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게다가 이 목소리, 왜 이렇게 귀에 익은 거지?’“저... 저기 혹시 전화 잘못 하신 거 아녜요?”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곳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 현진 누나?”한현진이 멍해졌다. ‘날 알아?’“네. 제가 한현진이예요. 누구세요?”상대방은 말이 없었다. 그에게서는 그저 조금 흥분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무슨 일이야?”진윤이 이를 악물었다. “방금 전화 받은 사람 누구예요!”강한서가 말했다. “내 와이프.”“그럴 리가 없어!”진윤이 바득 이를 갈았다. “이 사생팬 같은 아저씨가! 혹시 일부러 날 속이려고 옆에 성대모사하는 분이라고 모셔놓은 거 아녜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너처럼 유치한 인간인 줄 알아? 그리고 현진이는 아무도 대체할 수 없어.”진윤은 강한서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거짓말 좀 그만 해요. 현진 누나는 지금 그 티베탄 마스티프와 데이트하는 중이라고요. 만약 누나가 정말 형님 와이프라면 형님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누나가 딴 남자와 데이트하는 걸 지켜볼 수 있어요?”더 이상 진윤을 대꾸하기 귀찮았던 강한서가 그에게 영상통화를 보냈다. 몇뿐 후, 휴대폰 화면으로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여신과 딱 붙어 앉아있는 전남편 형님을 확인한 진윤은 순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한현진은 휴대폰에 비춰진 진윤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진윤 씨가 강한서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야?’진윤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어댔다. “거짓말쟁이! 뻔뻔한 인간! 전
유난히 예쁘게 잘 나온 사진을 보며 한 현지는 신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멍청하게 나온 것 같다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강한서는 굳이 자신이 찍겠다면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한현진이 눈을 실룩거렸다. “네가 사진을 찍겠다고? 168cm인 나를 138cm로 만들어 버리는 네가? 강 대표님 본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강한서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 실력이 그렇게 별로야?”한현진이 말했다. “쌀을 뿌린 휴대폰을 닭이 부리로 쪼아도 내가 찍은 것 보단 낫다고 할 수 있어.”왠지 수치를 당한 것 같은 기분에 강한서가 이를 악 물면 말했다. “그럼 난 왜 우리가 데이트했을 때 내가 찍어준 사진을 밤새도록 보고 있었던 거야?”강한서가 괜히 그 얘기를 꺼낸 탓에 잊혀 가던 한현진의 기억이 문득 돌아왔다.“사진을 보면서 넌 그저 사진을 찍을 줄 모르는 것뿐이라고 날 설득 하지 않는다면 호텔 앞에서 바로 너와 싸우 버릴 것 같았거든. 내 외모에, 감독님께서도 나에게 각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 하셨는데 넌 대체 어떻게 날 사실 눈으로 찍을 수 있었던 거야?”강한서: ...“사시눈... 처럼 나왔어?”한현진이 일을 악물었다. “내가 뛰어다니는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니까 유체 이탈한 것처럼 찍어줬잖아! 내가 피드를 업로드할 때 실수로 그 사진까지 넣었더니 애들이 나한테 대체 어디서 이런 심령사진을 찍었냐고 물었었어.”“...”활활 타오르던 강한서의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어쩌다 가끔... 몇 십 장뿐이었잖아.”한현진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하.”뭔가를 말하려던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자 무릎 정도까지 오는 어린 아이가 옆에 쭈그려 앉아 불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아직 더 놀 거예요? 저희 잠깐 놀게 해주시면 안 돼요?”강한서가 고개를 돌리자 뒤에는 어린 라이 대여섯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한현진: ...창피함에 고개
“하하하.”한현진이 마른 웃음을 지었다.“오빠. 제가 티슈 없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강한서가 눈을 씰룩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핑계였다. 그는 입술을 달싹여 아내를 따라 염치 없이 말했다. “형님, 저도 없어요.”송민준이 가방과 티슈를 두 사람에게 던지며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겼다. 한현진: ...“오빠가 나한테 화 난 건 아니겠지?”강한서가 우울하게 말했다. “너보단 날 먼저 걱정해야 할 것 같아. 네 오빠가 아무리 너에게 화가 나도 결국은 나에게 그 화살이 돌아올 거야.”한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좀 놓이네.”강한서: ?한현진이 그의 손을 잡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차피 오빠가 널 탐탁지 않아 한게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오늘 이 일로 크게 달라지진않을 거야.”“...”‘행복은 본인이 누리고 잘못은 내가 뒤집어쓰고. 정말 좋은 아내네.’강한서는 한현진을 데리고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입덧이 끝난 이후로 한현진의 식욕은 줄곧 안정적이었다. 매 끼니마다 많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지만 배고픔도 빨리 찾아왔기에 하루에 몇 끼씩 먹어야 했다. 그 덕에 지금의 한현진은 송아지처럼 튼튼하기만 했다. 강한서는 임신한 한현진을 위해 오랫동안 공부했지만 한현진에게는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그의 주변엔 임산부가 많이 없었지만 많은 아내들이 임신 후 남편을 괴롭힌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현진에겐 모든 임신의 호르몬 변화가 거짓말처럼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의사는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큰 반응 없이 잘 먹고 잘 지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의사는 강한서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산책을 자주 다니며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면 된다고 했다. 한현진은 정서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조금 유치해지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한현진은 강한서의 팔을 끌며 굳이 아이들의 흔들 목마에게 타게 해달라며 떼를 썼다.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채영 언니.”문채영이 가방에서 포장한 선물 박스를 건넸다. “첫 만남이라 어떤 선물을 준비하면 좋을지 몰라 제가 직접 향낭을 만들었어요. 향 맡아봐요.”한현진이 조금 의외라는 듯 말했다. “언니도 조향하세요?”문채영이 미소 지었다. “제가 조향에 입문하게 된 것도 민준이 덕분이었어요. 전엔 이런 거 만드는 거 좋아했었거든요.”한현진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조향하는 송민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줄곧 송민준은 그쪽으론 취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민준은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불쾌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주문부터 해. 배고파.”멈칫하던 문채영이 시선을 내려 눈에 맴도는 서운함을 숨겼다. 한현진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언니, 오랜만에 오셨을 텐데 오늘은 한주 음식으로 드시는 게 어때요?”문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현진 씨가 먹고 싶은 거로 주문해요.”주문한 음식 서빙을 마치고 룸을 나서려는 종업원에게 송민준이 갑자기 말했다. “장어 국수도 주문할게요.”문채영이 힐끗 송민준을 쳐다보자 시선을 올린 그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지.”‘그래,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다고 하는 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하고 많은 국수 중에 왜 하필 장어 국수야?’‘오빠가 장어 국수라고 말할 때 언니 표정을 보면 설마 두 사람 사이에 장어 국수와 관련된 스토리가 있었던 건가?’호기심이 활활 불타오른 한현진이 몰래 테이블 아래로 강한서의 손을 꼬집었다. 그러자 강한서는 그녀에게 새우를 발라 주었다. 한현진: ...강한서과 문채영은 너무 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한현진은 문채영의 외할머니와 강한서의 할머니가 먼 친척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촌수가 먼 사이라 피가 거의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지낸지 한참 후에야 두 가문이 몇 세대 전에는 친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현진이 고개를 들자 옆에 서 있는 벤틀리가 보였다. 송민준이 운전석에 앉아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차창은 닫혀 있었으니 송민준은 당연히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강한서의 차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차를 세운지 한참이 지나도 두 사람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송민준은 강한서가 또 이상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송민준의 목소리를 들은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을 놓고 그녀의 옷을 정리하며 단정하게 자리에 앉았다. 민경하는 은연 중에 자신의 미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차에서 내린 송민준은 카키색의 캐주얼한 외투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평소 한열이 자주하던 헤어스타일과 비슷했고 선글라스를 콧등에 걸친 채 입술을 앙다물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넓은 어깨에 긴 다리의 그가 우뚝 서 있으니 카리스마와 매력이 흘러넘쳤다. 전엔 그가 한열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이런 차림에 선글라스까지 쓴 모습을 보니 만약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아마 그를 한열로 착각할 것도 같았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이 가방을 메고 송민준을 향해 걸어갔다. “오빠, 오늘 왜 이렇게 멋져요?”송민준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내가 언제 안 멋진 적이 있었어?”한현진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어떤 날이든 멋지긴 하죠. 그래서 언제 데뷔할 생각이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건네받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난 열이와 캐릭터가 너무 비슷해. 내가 데뷔하면 연예계에 걔 자리가 있긴 할 것 같아?”한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송민준은 손을 들어 검지로 콧등에 걸린 선글라스를 아래로 내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강한서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쟨 차에서 뭐하는 거야?”“업무 통화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한현진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가자. 우린 먼저 올라가는 게 좋겠어. 혼자 미적거리라고 해.”룸에 도착하자 송민준은 그제야 물었다. “너희 두 사람, 대체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이렇
한현진이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강한서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마음 약해질 줄 알았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한현진이 말했다. “처음엔 마음이 약해졌는데 조금 전 불쾌한 일이 있었거든.”한현진은 간단하게 주혁이 무릎 꿇은 일을 서술했다. “난 사실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건 아니었어. 하지만 꿇어앉아 있는 기사님 모습을 본 순간 화가 치밀더라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러니까 날 강박하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 기회를 빌려 바로 전근시켰어.”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오는 길에 계속 마음이 불편했어. 내가 너무 극단적으로 처리한 건 아닌가 싶었거든. 기사님은 지금 아들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돈이 부족한 상황이거든. 전근하면 월급은 당연히 전보다 줄어들 텐데.”강한서가 한현진의 손등을 토닥였다.“인공 달팽이관은 보청기와 비슷한 거야. 생명과 직결된 문제도 아니니 돈이 부족하다고 해도 당장 급할 건 없어. 하지만 굳이 너를 속여 가며 부업을 하려고 했어. 난 그 부분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멈칫한 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기사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모르지.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무릎을 꿇고 자존심 따위는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원하는 건 자신의 존엄보다 훨씬 더 소중한 걸 거야. 전근이 제일 좋은 선택이었어. 네가 그 사람을 곁에 두는 건 내가 불안해.”강한서는 한현진의 손을 잡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약해지지 마. 네가 마음 약해질 때마다 난 심장이 떨려.”“휴. 신세를 지기도 했고 기사님 집에는 장애인이 두 명이나 있잖아. 안타까워서 그러지. 내가 언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약해지는거 봤어? 난 아주 독한 사람이라고.”강한서는 곧바로 태클을 걸었다. “강운이에겐 마음 약하게 굴었잖아.”지나간 이야기를 꺼내려는 강한서의 태도에 한현진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불쌍해 보이는 주 변호사님 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