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탑 아이돌이 영원히 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젊은 탑 아이돌은 언제든 있었다. 인기 아이돌에게 한열 지금의 나이는 마침 돈을 최대한 끌어모을 수 있는 골든 타임이었다. 대충 춤이나 추고 노래를 불러도 팬들은 그들을 위해 통이 크게 지갑을 열었다. 형편없는 발연기로 드라마에 출연해도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시청률을 높여줬다. 연기력이 좋든 아니든, 돈만 벌어주면 그만이었다. 전대호나 안 이사는 말로는 배우로의 전향을 기획하고 있다고는 그들 중 그 누구도 하지만 손에 넣은 돈 벌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고, 외모가 더는 레전드급이 아니게 될 때면 또 다른 인기 아이돌이 나타나 세대교체가 이루어질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가 되면 전 세대의 인기 아이돌은 이미 한 평생은 먹고살고도 남을 재부를 축적했을 테지. 연예계에 발을 들이며 아무리 초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해도 자본 앞에 결국은 조금씩 자기를 잃어가며 서서히 자본주의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록 전대호가 내뱉은 말들은 전부 상당히 귀에 거슬리는 얘기들이었지만 맞는 말도 있었다. 한열이 사라져도 그를 대신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가 연예계에서 제일 특별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한열은 비로소 팬들이 만들어준 환상 속에서 완전히 깨어났다. 한열이 원한 것은 결코 한 순간 반짝이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그린 것은 신하리처럼 영화계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었다. 윤명훈은 여전히 한열을 설득했다. “열아, 넌 아직 젊어. 천천히, 한 발 한 발 나아가야 해. 아이돌이 배우로 전향하는 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한열이 윤명훈의 말을 잘랐다. “형, 저한테 여기가 네가 찍을 정상은 아니라고 했던 거 거짓말이었어요?”“당연히 아니지.”윤명훈이 미간을 찌푸렸다. “나 이래 봬도 이 바닥에선 프로야. 얼마나 많은 연예인을 키웠는데. 내 안목이 틀렸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그 말에 한열이 피식 웃었다.
신하리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래서 제가 얘를 똥강아지라고 부른다니까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대체 누가 지나가던 개에게 마음을 준다는 소리를 해요? 당연히 동족이니까 마음이 가겠죠.”한열은 순간 신사다운 매너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신하리와 싸우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신하리가 유유히 입을 열었다. “나 건드리기만 해 봐. 계약이 끝나는 동시에 데이트 폭력을 행사했다고 폭로할 거야. 안 좋은 소문이 퍼진 너를 대체 어떤 여자가 좋아할 수 있을지 지켜볼 거야.”눈을 부릅뜨고 신하리를 노려보는 한열은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달려들어 물어뜯고 싶었다. 신하리의 성질머리를 잘 알고 있는 강소희가 기회를 보다 입을 열었다. “그만해.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장난이 하고 싶어?”입을 삐죽이던 신하리가 드디어 입을 닫고 가만히 있었다. “다들 진정하고 대책부터 생각하죠. 일단 의심받지 않을만한 스토리를 짜야 해요.”이때, 차미주가 손을 들었다. “제가 스토리를 짜드려도 될까요?”하나둘 차미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옆에 있던 한현진이 차미주 대신 홍보하듯 말했다. “미주는 작가거든요. 전에 킹 엔터에서 제작했던 인기 드라마가 전부 미주 손에서 나온 거예요. 다만 그때는 그저 서브 작가였을 뿐이라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만요.”대본을 쓰는 작가는 당연히 스토리텔링에 강할 수밖에 없었다. 강소희도 전문적인 작가에게 이 일을 맡길까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다만 이 문제는 두 배우의 앞날이 걸린 일이라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았다. 외부인에게 맡겼다가 괜히 이익에 눈이 멀어 두 사람을 배신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강소희는 여전히 차미주의 실력에 의심을 거둘 수가 없었다. “정말 하실 수 있겠어요?”차미주가 말했다. “제가 일단 대충 스토리를 들려만 드릴게요. 들어보시고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수정하죠.”아무도 차미주의 제안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자기가 구상한 스토리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스토리를 대충
곧이어 강소희는 신하리와 한열에게 서로 각자의 취미를 공유하고 꼭 기억하고 있으라고 당부했다. 신하리가 휴대폰을 꺼내더니 한열에게 말했다. “번호 교환해.”그러나 한열은 그런 신하리를 무시했다. 신하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번호 교환 안 하고 어떻게 보내라고?”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열이 자기 취미를 적어 신하리에게 전송했다. 카톡 알림이 울리고 한열과의 대화창을 확인한 신하리가 멈칫했다. “내가 언제 너랑 번호 교환했어?”전에 한열은 줄곧 디엠으로 신하리에게 연락했었던 터라 그녀는 이제껏 전화번호를 교환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한열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똥멍청이.”“...”서로의 취미를 공유한 후 한열에게 다가가 생일을 물으려던 신하리는 그가 연락처에 저장해 놓은 자신의 이름을 보게 되었다. 미친 X. 입술을 파르르 떨던 신하리 역시 얼른 한열의 이름을 미친X으로 수정했다. 완성을 누르고 고개를 들자 한열이 어두운 얼굴로 자기 이름을 수정한 신하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 기분이 한결 좋아진 신하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친 X, 미친 X. 환상의 한 쌍이네.”한열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유치하긴.”10분 후, 두 사람은 나란히 페이스북을 업로드했다. 한열: 저의 또라이 여친을 소개합니다. @신하리. 신하리 역시 질 수 없다는 듯 한열의 피드를 리트윗하며 글을 올렸다. 제 또라이 남친을 소개합니다. @한열, 앞으로 돈 관리는 내가 할 거야. 그리고 곧 페이스북은 서버가 셧다운되어 버렸다. 대중들의 관심사는 이제 제작발표회에서 어떤 미친 여자가 한 말이 아닌 최연소 여자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한 신하리와 탑 아이돌인 한열이 사귄다는 것에 쏠렸다. 신하리를 욕하던 한열의 팬들은 이젠 한열의 페이스북에 미친 듯이 댓글을 남겼다. [미친 거 아냐?][우리가 힘들게 스밍 돌리고 있는데 연애하느라 바빴네?][차라리 신하리가 X스 파트너라고 했으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는 않았
한열의 말에 한현진이 멈칫하더니 이내 피로연 때를 떠올렸다. 신하리가 웃으며 말했다. “그거로 퉁 치면 네가 손해일 텐데.”한열이 상관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하리가 말했다. “그래도 방금 내가 한 말은 유효해. 필요한 게 생기면 언제든지 말해.”한열은 신하리의 말을 들은 건지 아닌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원래는 함께 밥을 먹으려고 했지만 한열의 상황이 이러하니 식사는 무리였다. 많은 기자가 열애설에 대해 물으려고 혈안이 되어 한열을 찾고 있을 테니 지금은 최대한 그들 앞에 얼굴을 비추지 않는 편이 상책이었다. 한현진을 데려다주려고 그녀에게 어디로 갈 건지 묻자 차미주가 클라우드 아파트로 갈 것을 제안했다. 저녁이 되면 한성우와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차에서 내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현진의 휴대폰이 울렸다. 송병천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그의 목소리는 다급하기 그지없었다. 호흡이 가쁜 듯 헐떡이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아, 얼른 집으로 돌아와. 네 오빠에게 사고가 생겼어.”순간, 한현진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빠. 그게...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왔다. 하지만 한현진은 최대한 냉정함을 유지하려 했다. 송병천이 얼굴을 쓸어내리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M 국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어. 네 오빠가 탄 비행기가 바다에 추락했다고. 구조대가 이미 그쪽으로 가고 있지만 아직 정확한 추락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대...”한현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오빠가 비행기에 탑승한 게 확실해요?”송병천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탑승하기 전에 나에게 전화했었어. 내일 아침에 도착한다면서.”한현진이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 역시 비행기에 탑승 하기 전 송민준의 연락을 받았다. ‘돌아와 할 말이 있다고도 했었는데. 갑자기 추락이라니?’‘설마 오빠가 진실을 알아내서 누군가 오빠를 죽이려고 한 거야?’그런 생각이 불쑥 머리를 스치자 한현진은 찬물을 끼얹은 듯 온몸에 소름이 끼
한현진의 말에 모두들 안색이 변해버렸다. 서해금이 나지막이 말했다. “현진아, 넌 왜 인위적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니? 민준이가 이번 출국, 설마 단순히 비즈니스 때문만은 아니었던 거야?”한현진이 덤덤하게 말했다. “가람 언니가 날씨 때문이라고 추측한 것처럼 저도 단지 그런 추측을 할 뿐이에요. 지금 구조대가 아직 아무것도 찾지 못했으니 저희가 먼저 막무가내로 날씨 때문에 추락한 거라고 속단 짓지 말죠. 그렇게 함부로 단정 짓는 건 너무 섣부른 것 같아요.”한현진이 말에 송가람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녀가 얼른 말했다. “전 단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얘기한 것뿐이에요. 제가 언제 함부로 단정 지었다고 그래요.”말하며 그녀는 또다시 눈물을 글썽였다.“오빠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머리가 하얘져서...”한현진이 목소리가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대사관에서는 그저 비행기가 추락했다고만 했어요. 아직 오빠가 비행기에 탑승했는지도 확인되지 않았고 생존자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에요. 왜 오빠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해요?”“전—”말문이 막힌 송가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비행기 추락 사고의 생존율은 거의 0%에 가깝다는 걸 몰라서 그래요? 지금 현진 씨는 오빠 생사가 중요해요, 아니면 제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게 중요한 거예요?”“당연히 오빠의 안위가 제일 중요하죠. 전 단지 아직 제대로 된 소식도 없는 상황에 곡이나 하는 꼴이 보기 싫었을 뿐이에요.”한현진이 송가람을 비꼬며 말을 이었다. “능력이 좋으셔서 강한서도 구해오신 분이 오빠를 구할 방법도 생각해 보는 게 어때요?”송가람의 표정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지금 이런 상황에 현진 씨는 아직도 저와 한서 오빠—”짝—점점 일그러지는 송병천의 얼굴을 보던 서해금이 갑자기 송가람의 뺨을 내리치며 서늘한 말투로 말을 뱉었다. “조용히 해. 지금이 싸울 때야? 네 오빠는 생사도 확인되지 않았는데 뭐가 중요한지도 모르고 말이야. 내가 너 그렇게 가르쳤어?”
마지막 한 마디를, 송병천은 가볍게 툭 던지듯 얘기했다. 그러나 한현진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저 욕심에 불과한 바람이었다. 그들 모두 송민준이 비행기에 탑승하지 않았기를 감히 바랐다. 서해금이 눈시울을 붉히며 대답했다. “그럼 조심해서 가요. 도착하면 바로 연락해 줘요.”알겠다고 대답한 송병천이 한현진과 함께 집을 나섰다. 공항으로 가는 길, 한현진이 강한서에게 전화했다. 연말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던 강한서는 한현진의 전화에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한현진의 다급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강한서 씨, 지금 집이에요? 제 여권 좀 가져다줄 수 있어요?”그 말에 강한서가 잠시 멈칫 몸을 굳혔다. “어디 가려고요?”“M 국이요. 오빠가 탄 비행기가 추락했어요.”한현진은 담담하게 말을 내뱉었지만 그 말은 강한서의 마음속에 거센 파도를 일으켰다. 그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정확한 소식이에요?”강한서의 목소리에 한현진은 목 놓아 울고 싶어졌다. 하지만 송병천도 차에 있었던 터라 아빠 앞에서 그녀는 차마 울 수 없었다. 자신이 무너지면 송병천 역시 견디지 못할 것만 같았다. 한현진이 힘껏 코를 훌쩍이며 울음을 삼키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대사관에서 이미 구조대를 보냈다고 했어요. 비행기 잔해 일부는 발견했지만 오빠와 블랙박스는 아직 찾지 못했어요. 저 지금 아빠와 그쪽으로 가서 대사관 직원을 만나 수색을 돕거나... 인계받아야죠.”강한서가 휴대폰을 쥔 손에 꾹 힘을 실었다. “지금 어디예요?”“공항으로 가는 길이예요. 전 아름드리와는 거리가 좀 있어서요. 강한서 씨가 집에 있으면 저에게 여권을 가져다주는 게 더 빠르거든요. 1시간 30분 뒤 항공편이에요. 지금 집이에요?”시간을 확인하던 강한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기다려요. 지금 갈게요.”말하며 전화를 끊은 강한서가 회의실로 돌아가 얘기할 새도 없이 다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차에 올라타 민경하에게 전화해 급한 일이
한현진이 끝내 찾지 못했던 여권은 어느 날 대청소를 하던 중 도우미 아주머니가 침대 시트 아래에서 발견했다. 그날 이후 강한서는 두 번 다시 한현진에게 여권을 맡기지 않았다. 두 사람이 이혼 후 한현진은 자주 사용하는 신분증 같은 증명서는 전부 챙겼지만 유독 여권은 자주 사용하지 않는 탓에 깜빡 잊고 아름드리에 두고 나왔었다. 강한서가 건네는 여권을 받아 든 한현진이 입술을 짓이기며 나지막이 말했다. “강한서 씨는 지금 저와 결혼한 사이도 아니잖아요. 굳이 갈 필요 없어요.”그 말에 강한서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전 어렸을 때부터 민준이와 함께 자랐어요. 전에 제가 사고 났을 때도 민준이도 최선을 다해 절 찾았잖아요. 민준이에게 사고가 난 지금, 제가 어떻게 가만히 지켜만 보겠어요.”한현진은 아무 말 없이 강한서의 두 눈에서 뭔가를 뭐라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강한서의 눈빛은 늘 그렇듯, 전과 다를 바 없이 덤덤할 뿐이었다. 송병천이 한현진을 불렀다. “현진아, 출국 심사해야 해.”그제야 한현진은 강한서에게 향했던 시선을 돌려 송병천에게 대답했다. 가족이 해외에서 사고를 당한 데다 송병천은 공항의 VVIP이기도 했다. 대사관 측에서 상황 설명까지 해 준 덕에 세 사람은 빠르게 출국 심사를 마치고 라운지에서 비행기가 이륙하기를 기다렸다. 잔뜩 긴장한 송병천은 말할 기력도 없는 것 같았다. 물론 한현진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오늘 밤 강한서의 이상한 행동에 많은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니었다. “오늘부터 연휴잖아요. 회사 일은 마무리했어요? 강한서 씨가 없어도 괜찮은 거예요?”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녀는 강단한이 아직 회사에서 조용히 숨죽인 채 강한서를 끌어내릴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얘기하면, 지금 이 타이밍에 강한서가 회사를 비우는 건 그리 이성적인 선택은 아니었다. 강한서가 시선을 내린 채 대답했다. “회사엔 민 실장이 있어요. 지금 중요한 건 민준이에요.
집엔 침대도 없었고 송병천은 허리도 좋지 않았던 터라 아빠를 소파에서 주무시게 할 수는 없지 않냐고 한현진이 강한서에게 눈짓을 보냈다. 하지만 그땐 이미 강한서가 강민서를 내쫓은 뒤였다.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면 강민서를 속인 것이었다. 사실 송병천을 집으로 데려온 강한서를 보며 강민서가 그에게 침대도 없는 집에 아저씨를 어디서 주무시게 할 거냐고 물었었다. 강한서는 대답 대신 강민서에게 옷을 던져주며 말했다. “나가서 먹을 것 좀 사와.”강민서는 갑작스러운 심부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강한서를 무서워했던지라 그의 카리스마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강한서가 던져준 옷을 입으며 밖으로 향하던 강민서가 강한서에게 뭘 사 오면 되냐고 물었다. 강민서에게 쇼핑 리스트를 읊어주던 강한서가 그녀를 문밖으로 내보내더니 곧 문을 걸어 잠구고 태연하게 말했다. “다 사면 그대로 들고 가서 네가 먹어. 저녁엔 집에 돌아오지 말고.”강민서는 그제야 강한서가 자기를 쫓아내고 송병천에게 방을 내어줄 생각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욱 화가 치민 강민서가 쾅쾅 문을 두드렸다. 집으로 들어가겠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는 강민서에 강한서는 노이즈 캔슬링 시스템을 작동했고 집안엔 고요함이 찾아왔다. 창문을 통해 고함을 지르는 강민서의 모습이 보이긴 했지만 그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한참 동안 문을 두드리던 강민서는 집안에서 아무런 대꾸도 없자 욕을 지껄이며 발길을 돌렸다. 그 의외의 모습에 오히려 한현진이 당황했다. 강민서는 이렇게 말을 잘 듣는 캐릭터가 아니었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의아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빨리 얌전해졌다. 그녀가 아름드리를 나서자 강한서는 도우미에게 강민서의 방 침대 시트를 전부 교체해달라고 부탁한 후 송병천을 그녀가 지내던 게스트룸에서 쉴 수 있도록 했다. 송민준의 소식을 듣고 심신이 지쳐있던 송병천은 일찍 씻고 침대에 누웠다. 한현진 역시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송민준이 선물해 준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도무지 잠이 들지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