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지금 이곳에서 윤명훈은 그저 외톨이 같은 신세였다. 제작발표회에서 있었던 일은 빠른 속도로 인터넷에 퍼져나갔다. 신하리와 한열의 팬들은 서로 싸우느라 여념이 없었고 양측 회사에서도 최대한 빨리 각 매니저에게 연락해 대책을 마련했다. 신하리네 회사는 좋아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한열 쪽은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소속사 대표는 윤명훈의 귀에서 피가 나도록 그를 욕했다. 스피커폰이 아니었음에도 차에 있던 모든 사람이 대표의 욕설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윤명훈은 어쩔 수 없이 실없는 웃음을 지으며 대표에게 굽신거려야 했다. 아무리 한열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이미 그가 제안을 받아들인 이상 윤명훈은 최대한 회사를 설득해야 했다. 하지만 소속사 대표는 언제나 이익이 최우선이었다. 갑작스러운 공개 연애는 그들을 당황스럽게 했고 이미 많은 브랜드 쪽에서 사실 확인 전화를 걸어왔다. 회사는 공개 연애로 인해 여론이 어떤 쪽으로 흘러가냐에 따라 한열과의 재계약이 결정할 것이었다. “전향? 전향은 개뿔. 아무리 전향이 목적이어도 이딴 식으로는 아니었어야지. 다들 배우님, 배우님 해주니까 정말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봐? 팬들이 정말 연기력이나 실력 때문에 자기를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홍보팀에서 밀어주지 않았으면 뜨기는 했을 것 같아? 내가 한열을 키우는 데 성공했다는 건 두 번째 한열도 충분히 만들 수 있다는 얘기야. 얼른 신하리와의 열애설 부인하는 해명글을 올리라고 해. 한열 설득 못 하면 너도 잘릴 각오해야 할 거야.”윤명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누르며 사람 좋게 말했다. “대표님, 이미 카메라에 전부 찍혀서 해명하긴 힘들어요. 팬들이 바보도 아니고, 대충 해명글로 무마하려면 믿지 않을 거예요. 지난번 회의에서 대표님과 안 이사님께서 열이를 배우로 전향시킬 사안에 관해서 얘기 꺼내셨었잖아요. 그때 대표님께서 열이가 연기에 재능이 있다고—”“넌 X발, 내가 애 달래느라 한 얘기도 믿는 거야? 내가 네
모든 탑 아이돌이 영원히 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젊은 탑 아이돌은 언제든 있었다. 인기 아이돌에게 한열 지금의 나이는 마침 돈을 최대한 끌어모을 수 있는 골든 타임이었다. 대충 춤이나 추고 노래를 불러도 팬들은 그들을 위해 통이 크게 지갑을 열었다. 형편없는 발연기로 드라마에 출연해도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시청률을 높여줬다. 연기력이 좋든 아니든, 돈만 벌어주면 그만이었다. 전대호나 안 이사는 말로는 배우로의 전향을 기획하고 있다고는 그들 중 그 누구도 하지만 손에 넣은 돈 벌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고, 외모가 더는 레전드급이 아니게 될 때면 또 다른 인기 아이돌이 나타나 세대교체가 이루어질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가 되면 전 세대의 인기 아이돌은 이미 한 평생은 먹고살고도 남을 재부를 축적했을 테지. 연예계에 발을 들이며 아무리 초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해도 자본 앞에 결국은 조금씩 자기를 잃어가며 서서히 자본주의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록 전대호가 내뱉은 말들은 전부 상당히 귀에 거슬리는 얘기들이었지만 맞는 말도 있었다. 한열이 사라져도 그를 대신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가 연예계에서 제일 특별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한열은 비로소 팬들이 만들어준 환상 속에서 완전히 깨어났다. 한열이 원한 것은 결코 한 순간 반짝이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그린 것은 신하리처럼 영화계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었다. 윤명훈은 여전히 한열을 설득했다. “열아, 넌 아직 젊어. 천천히, 한 발 한 발 나아가야 해. 아이돌이 배우로 전향하는 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한열이 윤명훈의 말을 잘랐다. “형, 저한테 여기가 네가 찍을 정상은 아니라고 했던 거 거짓말이었어요?”“당연히 아니지.”윤명훈이 미간을 찌푸렸다. “나 이래 봬도 이 바닥에선 프로야. 얼마나 많은 연예인을 키웠는데. 내 안목이 틀렸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그 말에 한열이 피식 웃었다.
신하리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래서 제가 얘를 똥강아지라고 부른다니까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대체 누가 지나가던 개에게 마음을 준다는 소리를 해요? 당연히 동족이니까 마음이 가겠죠.”한열은 순간 신사다운 매너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신하리와 싸우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신하리가 유유히 입을 열었다. “나 건드리기만 해 봐. 계약이 끝나는 동시에 데이트 폭력을 행사했다고 폭로할 거야. 안 좋은 소문이 퍼진 너를 대체 어떤 여자가 좋아할 수 있을지 지켜볼 거야.”눈을 부릅뜨고 신하리를 노려보는 한열은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달려들어 물어뜯고 싶었다. 신하리의 성질머리를 잘 알고 있는 강소희가 기회를 보다 입을 열었다. “그만해.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장난이 하고 싶어?”입을 삐죽이던 신하리가 드디어 입을 닫고 가만히 있었다. “다들 진정하고 대책부터 생각하죠. 일단 의심받지 않을만한 스토리를 짜야 해요.”이때, 차미주가 손을 들었다. “제가 스토리를 짜드려도 될까요?”하나둘 차미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옆에 있던 한현진이 차미주 대신 홍보하듯 말했다. “미주는 작가거든요. 전에 킹 엔터에서 제작했던 인기 드라마가 전부 미주 손에서 나온 거예요. 다만 그때는 그저 서브 작가였을 뿐이라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만요.”대본을 쓰는 작가는 당연히 스토리텔링에 강할 수밖에 없었다. 강소희도 전문적인 작가에게 이 일을 맡길까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다만 이 문제는 두 배우의 앞날이 걸린 일이라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았다. 외부인에게 맡겼다가 괜히 이익에 눈이 멀어 두 사람을 배신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강소희는 여전히 차미주의 실력에 의심을 거둘 수가 없었다. “정말 하실 수 있겠어요?”차미주가 말했다. “제가 일단 대충 스토리를 들려만 드릴게요. 들어보시고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수정하죠.”아무도 차미주의 제안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자기가 구상한 스토리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스토리를 대충
곧이어 강소희는 신하리와 한열에게 서로 각자의 취미를 공유하고 꼭 기억하고 있으라고 당부했다. 신하리가 휴대폰을 꺼내더니 한열에게 말했다. “번호 교환해.”그러나 한열은 그런 신하리를 무시했다. 신하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번호 교환 안 하고 어떻게 보내라고?”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열이 자기 취미를 적어 신하리에게 전송했다. 카톡 알림이 울리고 한열과의 대화창을 확인한 신하리가 멈칫했다. “내가 언제 너랑 번호 교환했어?”전에 한열은 줄곧 디엠으로 신하리에게 연락했었던 터라 그녀는 이제껏 전화번호를 교환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한열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똥멍청이.”“...”서로의 취미를 공유한 후 한열에게 다가가 생일을 물으려던 신하리는 그가 연락처에 저장해 놓은 자신의 이름을 보게 되었다. 미친 X. 입술을 파르르 떨던 신하리 역시 얼른 한열의 이름을 미친X으로 수정했다. 완성을 누르고 고개를 들자 한열이 어두운 얼굴로 자기 이름을 수정한 신하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 기분이 한결 좋아진 신하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친 X, 미친 X. 환상의 한 쌍이네.”한열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유치하긴.”10분 후, 두 사람은 나란히 페이스북을 업로드했다. 한열: 저의 또라이 여친을 소개합니다. @신하리. 신하리 역시 질 수 없다는 듯 한열의 피드를 리트윗하며 글을 올렸다. 제 또라이 남친을 소개합니다. @한열, 앞으로 돈 관리는 내가 할 거야. 그리고 곧 페이스북은 서버가 셧다운되어 버렸다. 대중들의 관심사는 이제 제작발표회에서 어떤 미친 여자가 한 말이 아닌 최연소 여자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한 신하리와 탑 아이돌인 한열이 사귄다는 것에 쏠렸다. 신하리를 욕하던 한열의 팬들은 이젠 한열의 페이스북에 미친 듯이 댓글을 남겼다. [미친 거 아냐?][우리가 힘들게 스밍 돌리고 있는데 연애하느라 바빴네?][차라리 신하리가 X스 파트너라고 했으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는 않았
한열의 말에 한현진이 멈칫하더니 이내 피로연 때를 떠올렸다. 신하리가 웃으며 말했다. “그거로 퉁 치면 네가 손해일 텐데.”한열이 상관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하리가 말했다. “그래도 방금 내가 한 말은 유효해. 필요한 게 생기면 언제든지 말해.”한열은 신하리의 말을 들은 건지 아닌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원래는 함께 밥을 먹으려고 했지만 한열의 상황이 이러하니 식사는 무리였다. 많은 기자가 열애설에 대해 물으려고 혈안이 되어 한열을 찾고 있을 테니 지금은 최대한 그들 앞에 얼굴을 비추지 않는 편이 상책이었다. 한현진을 데려다주려고 그녀에게 어디로 갈 건지 묻자 차미주가 클라우드 아파트로 갈 것을 제안했다. 저녁이 되면 한성우와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차에서 내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현진의 휴대폰이 울렸다. 송병천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그의 목소리는 다급하기 그지없었다. 호흡이 가쁜 듯 헐떡이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아, 얼른 집으로 돌아와. 네 오빠에게 사고가 생겼어.”순간, 한현진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빠. 그게...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왔다. 하지만 한현진은 최대한 냉정함을 유지하려 했다. 송병천이 얼굴을 쓸어내리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M 국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어. 네 오빠가 탄 비행기가 바다에 추락했다고. 구조대가 이미 그쪽으로 가고 있지만 아직 정확한 추락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대...”한현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오빠가 비행기에 탑승한 게 확실해요?”송병천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탑승하기 전에 나에게 전화했었어. 내일 아침에 도착한다면서.”한현진이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 역시 비행기에 탑승 하기 전 송민준의 연락을 받았다. ‘돌아와 할 말이 있다고도 했었는데. 갑자기 추락이라니?’‘설마 오빠가 진실을 알아내서 누군가 오빠를 죽이려고 한 거야?’그런 생각이 불쑥 머리를 스치자 한현진은 찬물을 끼얹은 듯 온몸에 소름이 끼
한현진의 말에 모두들 안색이 변해버렸다. 서해금이 나지막이 말했다. “현진아, 넌 왜 인위적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니? 민준이가 이번 출국, 설마 단순히 비즈니스 때문만은 아니었던 거야?”한현진이 덤덤하게 말했다. “가람 언니가 날씨 때문이라고 추측한 것처럼 저도 단지 그런 추측을 할 뿐이에요. 지금 구조대가 아직 아무것도 찾지 못했으니 저희가 먼저 막무가내로 날씨 때문에 추락한 거라고 속단 짓지 말죠. 그렇게 함부로 단정 짓는 건 너무 섣부른 것 같아요.”한현진이 말에 송가람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녀가 얼른 말했다. “전 단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얘기한 것뿐이에요. 제가 언제 함부로 단정 지었다고 그래요.”말하며 그녀는 또다시 눈물을 글썽였다.“오빠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머리가 하얘져서...”한현진이 목소리가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대사관에서는 그저 비행기가 추락했다고만 했어요. 아직 오빠가 비행기에 탑승했는지도 확인되지 않았고 생존자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에요. 왜 오빠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해요?”“전—”말문이 막힌 송가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비행기 추락 사고의 생존율은 거의 0%에 가깝다는 걸 몰라서 그래요? 지금 현진 씨는 오빠 생사가 중요해요, 아니면 제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게 중요한 거예요?”“당연히 오빠의 안위가 제일 중요하죠. 전 단지 아직 제대로 된 소식도 없는 상황에 곡이나 하는 꼴이 보기 싫었을 뿐이에요.”한현진이 송가람을 비꼬며 말을 이었다. “능력이 좋으셔서 강한서도 구해오신 분이 오빠를 구할 방법도 생각해 보는 게 어때요?”송가람의 표정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지금 이런 상황에 현진 씨는 아직도 저와 한서 오빠—”짝—점점 일그러지는 송병천의 얼굴을 보던 서해금이 갑자기 송가람의 뺨을 내리치며 서늘한 말투로 말을 뱉었다. “조용히 해. 지금이 싸울 때야? 네 오빠는 생사도 확인되지 않았는데 뭐가 중요한지도 모르고 말이야. 내가 너 그렇게 가르쳤어?”
마지막 한 마디를, 송병천은 가볍게 툭 던지듯 얘기했다. 그러나 한현진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저 욕심에 불과한 바람이었다. 그들 모두 송민준이 비행기에 탑승하지 않았기를 감히 바랐다. 서해금이 눈시울을 붉히며 대답했다. “그럼 조심해서 가요. 도착하면 바로 연락해 줘요.”알겠다고 대답한 송병천이 한현진과 함께 집을 나섰다. 공항으로 가는 길, 한현진이 강한서에게 전화했다. 연말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던 강한서는 한현진의 전화에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한현진의 다급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강한서 씨, 지금 집이에요? 제 여권 좀 가져다줄 수 있어요?”그 말에 강한서가 잠시 멈칫 몸을 굳혔다. “어디 가려고요?”“M 국이요. 오빠가 탄 비행기가 추락했어요.”한현진은 담담하게 말을 내뱉었지만 그 말은 강한서의 마음속에 거센 파도를 일으켰다. 그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정확한 소식이에요?”강한서의 목소리에 한현진은 목 놓아 울고 싶어졌다. 하지만 송병천도 차에 있었던 터라 아빠 앞에서 그녀는 차마 울 수 없었다. 자신이 무너지면 송병천 역시 견디지 못할 것만 같았다. 한현진이 힘껏 코를 훌쩍이며 울음을 삼키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대사관에서 이미 구조대를 보냈다고 했어요. 비행기 잔해 일부는 발견했지만 오빠와 블랙박스는 아직 찾지 못했어요. 저 지금 아빠와 그쪽으로 가서 대사관 직원을 만나 수색을 돕거나... 인계받아야죠.”강한서가 휴대폰을 쥔 손에 꾹 힘을 실었다. “지금 어디예요?”“공항으로 가는 길이예요. 전 아름드리와는 거리가 좀 있어서요. 강한서 씨가 집에 있으면 저에게 여권을 가져다주는 게 더 빠르거든요. 1시간 30분 뒤 항공편이에요. 지금 집이에요?”시간을 확인하던 강한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기다려요. 지금 갈게요.”말하며 전화를 끊은 강한서가 회의실로 돌아가 얘기할 새도 없이 다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차에 올라타 민경하에게 전화해 급한 일이
한현진이 끝내 찾지 못했던 여권은 어느 날 대청소를 하던 중 도우미 아주머니가 침대 시트 아래에서 발견했다. 그날 이후 강한서는 두 번 다시 한현진에게 여권을 맡기지 않았다. 두 사람이 이혼 후 한현진은 자주 사용하는 신분증 같은 증명서는 전부 챙겼지만 유독 여권은 자주 사용하지 않는 탓에 깜빡 잊고 아름드리에 두고 나왔었다. 강한서가 건네는 여권을 받아 든 한현진이 입술을 짓이기며 나지막이 말했다. “강한서 씨는 지금 저와 결혼한 사이도 아니잖아요. 굳이 갈 필요 없어요.”그 말에 강한서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전 어렸을 때부터 민준이와 함께 자랐어요. 전에 제가 사고 났을 때도 민준이도 최선을 다해 절 찾았잖아요. 민준이에게 사고가 난 지금, 제가 어떻게 가만히 지켜만 보겠어요.”한현진은 아무 말 없이 강한서의 두 눈에서 뭔가를 뭐라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강한서의 눈빛은 늘 그렇듯, 전과 다를 바 없이 덤덤할 뿐이었다. 송병천이 한현진을 불렀다. “현진아, 출국 심사해야 해.”그제야 한현진은 강한서에게 향했던 시선을 돌려 송병천에게 대답했다. 가족이 해외에서 사고를 당한 데다 송병천은 공항의 VVIP이기도 했다. 대사관 측에서 상황 설명까지 해 준 덕에 세 사람은 빠르게 출국 심사를 마치고 라운지에서 비행기가 이륙하기를 기다렸다. 잔뜩 긴장한 송병천은 말할 기력도 없는 것 같았다. 물론 한현진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오늘 밤 강한서의 이상한 행동에 많은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니었다. “오늘부터 연휴잖아요. 회사 일은 마무리했어요? 강한서 씨가 없어도 괜찮은 거예요?”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녀는 강단한이 아직 회사에서 조용히 숨죽인 채 강한서를 끌어내릴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얘기하면, 지금 이 타이밍에 강한서가 회사를 비우는 건 그리 이성적인 선택은 아니었다. 강한서가 시선을 내린 채 대답했다. “회사엔 민 실장이 있어요. 지금 중요한 건 민준이에요.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