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난 사람을 때린 게 아니라 정당방위야. 그리고 네 약물 검사도 경찰 쪽에 넘겼으니까 변호사가 알아서 잘 처리해 줄 거야.”그 사람들에게 칼이 있었다면 자신을 협박했을 때 왜 칼을 쓰지 않았는지 유현진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칼을 썼었더라면 그녀는 찍소리도 못했을 텐데 말이다.“이리 와.”강한서의 낮은 목소리에 유현진은 생각을 멈췄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물었다.“왜?”말은 그렇게 해도 유현진은 강한서의 침대 옆으로 갔다.강한서가 미간을 구미며 말했다.“머리 좀 숙이고 가까이 와.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하겠어?”유현진이 입술을 파르르 떨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고는 허리를 숙였다.“도대체 무슨...”말을 마치기도 입술에 차가운 느낌이 전해져 왔다.강한서가 검지로 그녀의 입술에 난 상처에 약을 발랐다.유현진이 의식을 잃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어 난 상처이다.연고는 차가웠지만 강한서의 손길은 부드럽고도 따뜻했다.어젯밤에 당한 일을 떠올리면 유현진은 억울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입술이 소시지처럼 부었는데도 몰랐어?”강한서는 역시 입이 방정이다, 그의 말을 들은 유현진의 억울한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그녀는 강한서의 손을 툭 치며 그를 째려봤다.“보기 안 좋으면 보지 말든가!”“더 못생긴 모습도 봤는데, 뭐. 이미 익숙해져서 괜찮아.”유현진은 입술을 씰룩거렸다.‘팔이 아니라 혀를 다쳤어야지.’“똑똑.”유상수가 문을 두드리며 과일 바구니를 들고 나타났다.유현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아빠, 먼저 가신 거 아니었어요?”유상수가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가려던 참에 1층 마트에 싱싱한 과일을 팔길래. 한서가 뭐 좋아하는지 몰라서 골고루 사 왔어. 너 좀 있다가 한서한테 과일이나 깎아줘.”유현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과일 바구니를 건네받았다.참 아이러니했다.유현진은 어렸을 때 몸이 아파 계란말이가 그렇게 먹고 싶었었다. 유상수가 다니는 회사 맞은편에 바로 계란말이를 파는 가게가 있었는데도 유상수는 그녀가 병이
유현진이 그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아빠 맞아요? 다른 사람의 말은 그렇게 잘 믿으면서 왜 친딸 얘기는 믿지 못해요? 제가 선물했다고 말했었잖아요. 신미정한테 당한 수모를 왜 저한테 푸시는 거예요?”유상수는 그녀의 말을 조금도 믿지 않았다.“선물을 받았으면 왜 못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겠어? 저번에 너보고 강한서한테 천주시 프로젝트에 대해 얘기해 보라고 했을 때도 여러 가지 핑계를 대더니. 너 이제 강한서가 뒤를 봐준다고 유씨 집안을 버릴 셈이야? 네 엄마 치료비만 1년에 몇억은 들었어. 돈이 그냥 생기는 줄 알아? 너한테 이런 일을 시킨 것도 결국 누구 때문인데? 우리 유씨 집안이 일어서지 못하면 강씨 집안에서 누가 너를 존중하겠어?”‘말만 잘하지, 나랑 엄마를 위해 헌신하는 척하긴. 그런 수단으로 부와 명예를 얻어낸다고 해도 강씨 집안에서 나를 더 좋게 봐줄 것도 아닌데 말이야.’“제가 말했죠, 트러플은 정말 선물했다고요. 정 못 믿으시겠으면 앞으로 저한테 이런 일 맡기지 마세요. 아부 떠는 건 제가 확실히 아빠를 못 따라가죠.”“너.”유상수는 분노가 끓어올랐다.마침 이때, 옥상으로 올라온 사람들이 있어 그는 결국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유현진은 바로 자리를 떴다....병실 안에서, 한성우는 방금 유현진이 사람을 잘못 알고 통곡하는 얘기를 하며 깔깔 웃어댔다.강한서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이제 그만하지.”한성우가 겨우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그래도 죽으면 울어주는 사람이 있잖아, 기분이 어때?”“괜찮네.”강한서가 그를 힐끔 보고는 말을 이어갔다.“네가 죽을 땐 울어주는 사람이 있을까?”그 말을 들은 한성우는 정색했다.울어주는 사람이 있기는커녕 저번에 몸이 아파서 주사를 맞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더니 전 여자친구들의 댓글로 도배되었다.“쌤통이야, 아주!”“경찰 쪽에는 무슨 소식이 없어?”강한서가 진지하게 물었다.“처음에는 부인하며 잡아떼더니 CCTV를 보여주자 두 사람 모두 솔직하게 털어버렸어. 어젯밤
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끝내 말을 더하지 않았다.‘그래, 내가 낸 아이디어니까 어쩔 수 없이 잘못을 인정해야지.’이때 유현진이 돌아왔다.한성우는 워낙 눈치가 빨랐기에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현진 씨, 저는 회사에 일이 생겨 가봐야 할 것 같네요. 한서 잘 챙겨주세요, 무슨 일 있으면 저한테 연락하시고요.”강한서가 그를 힐끔 보더니 말했다.“빈손으로 가면 어떻게 해? 과일 바구니 들고 가.”“내가 혼자도 아닌데 과일 바구니는 무슨...”한성우는 갑자기 강한서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는 한성우가 병문안을 빈손으로 왔다며 비아냥거리고 있었다.“과일 바구니는 여기 둘게요. 현진 씨, 이 카드 받으세요. 안에 1억 정도 있을 거예요. 전에 약속했던 사례금이에요. 한서가 다쳐서 일 못 한 거랑 형수님이 받으신 정신상의 고통까지 고려해 두둑이 넣었어요. 저 때문에 두 사람 이런 일을 당한 거잖아요.”유현진은 끝내 그 카드를 받지 않았다.“남편이 얼마나 돈을 잘 버는데요. 팔을 다쳐 한 주일은 쉬어야 할 텐데 말이에요. 맞지, 여보?”그 말인즉 돈이 부족하다는 뜻이었다.여보라는 소리에 강한서는 기분이 좋았다.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천연덕스럽게 말했다.“상처가 회복되는 거 봐야지. 회복하는 데에 적어도 일주일은 걸릴 테고 심각하면 보름 걸릴 수도 있어.”유현진은 어깨를 으쓱했는데, 마치 ‘나 거짓말한 거 아니야’ 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듯했다.한성우는 입술을 씰룩거렸다.‘누가 두 사람 부부 아니랄까 봐? 내 돈 떼먹을 때는 저렇게 마음이 잘 맞아. 괜히 한서를 도우려고 나섰네. 전혀 내가 도울 필요도 없는데 말이야. 둘이 화해하고 나부터 저격하는 것 좀 봐.’유현진은 일부러 한성우를 난처하게 만들려는 건 아니었다.하지만 한성우가 원망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어젯밤 강한서가 칼을 맞은 걸 눈 뜨고 보고만 있었으니.오늘 돈이라도 받아내지 못하면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강한서도 오늘 돈을 받아내지 못하면 나중에라도 배로 더 받아낼 기
“너 얼른 수표 챙겨, 내가 후회하기 전에.”강한서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말했다.“내 물음에 대답하면 수표는 네 거야.”“뭔데?”유현진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아버님이 뭐라고 하셨어?”유현진이 멈칫하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어머님이 트러플을 못 받았다고 하셨대. 네가 많이 바쁘면 그냥 거절했어도 됐는데.”‘굳이 나한테 전했다고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잖아.’강한서가 멈칫하더니 안색이 어두워졌다.“내가 일부러 안 전했다고 생각해?”“일부러든 아니든, 잊어먹었든 아니든 할 수 없는 일을 약속하는 거 아니야.”강한서가 눈살을 찌푸리며 무슨 말을 더하려던 그때, 민경하가 문을 두드리더니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대표님, 사모님. 퇴원 수속은 마쳤습니다.”두 사람이 대답하지 않자 민경하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퇴원하시는 거 맞습니까?”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두 사람 모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민경하는 오히려 불편했다. 두 사람이 워낙 많이 다퉜었는데, 갑자기 조용해지니 왠지 모르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그는 몰래 백미러를 힐끔 봤다.강한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미간을 잔뜩 구겼다. 유현진도 차가운 얼굴로 창문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두 사람 왜 또 이런대?’“민경하 씨.”강한서가 갑자기 물었다.“지난번에 엄마한테 전하라던 트러플 말이에요, 엄마한테 전했어요?”유현진은 귀를 쫑긋했다.민경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엄마가 받았나요?”“아니요, 부인께서 집에 계시지 않아 가정부에게 전했어요.”“그럼 우리가 보낸 거라고 똑똑히 말했었나요?”“네, 분부하신 대로 말씀드렸습니다.”강한서는 미간을 구겼다.‘그런데 왜 못 받은 거지?’그는 신미정이 살고 있는 집에 전화를 걸었는데 전화는 바로 통했다.“저에요.”가정부는 바로 강한서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다.“도련님, 어쩐 일로 전화하셨어요? 부인과 아가씨는 안 계시는데요.”“알아요, 물어볼 게 있어서요.”“말씀하세요.”“저번에 민경하 씨한테 부탁해서
가정부는 워낙 오랫동안 강씨 집안에서 일해왔는데도 강한서는 전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빡빡하게 굴었다.유현진은 그에게 그만하라고 타이르고 싶었다. 어차피 뺨은 이미 맞았기에 이제 와서 더 따지는 건 의미가 없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가정부가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아, 아가씨예요... 아가씨가 물건을 던져서...”“누구랑 통화해요?”가정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로 신미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전화를 받은 사람은 곧 신미정으로 바뀌었다.“도련님이에요. 트러플에 대해 여쭤보셔서...”신미정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강한서에게 말했다.“트러플이 뭐가 그렇게 대단해서 집까지 전화해서 물어?”강한서는 입술을 얇게 오므렸다.“그저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내고 싶어서요.”신미정은 벌컥 역정을 냈다.“알아내면 뭐하게? 경찰에 신고해서 나 잡아가게? 잘난 것도 없으면서 일러바치는 건 1등이라니까. 내가 그 트러플을 봤다고 해도 절대 받지 않았을 거야. 나한테 전화할 시간에 네 마누라나 신경 써. 강씨 집안에 시집왔는데도 팔이 밖으로 굽으면 어떻게 해?”말을 마친 신미정은 전화를 끊어버렸다.강한서는 휴대폰을 꽉 잡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유현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래도 한서가 안 전해준 건 아니네.’유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됐어, 원래 선물하러 가기도 귀찮았는데 잘 됐지, 뭐.”강한서는 한참 있다가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많이 아파?”그 말을 들은 유현진은 잠깐 멈칫했다. 강한서가 계속 자신의 왼쪽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걸 발견하고서야 그의 뜻을 알아챘다.억울한 감정이 밀려오며 유현진은 눈시울을 붉혔다. 눈물을 흘릴까 봐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애써 눈물을 참았다. 그리고 괜찮은 척했다.“제 자식을 그렇게 세게 때릴 리가 있겠어?”사실 많이 아팠다. 유상수는 그녀의 뺨을 있는 힘껏 때렸기에 그녀의 뺨은 아직도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하지만 유현진은 자신의 기분을 강한서에
유현진이 그의 말을 들을 사람도 아니었기에 강한서는 일찍이 포기했다.유현진이 가까이 다가오자 강한서는 그녀에게서 술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의아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너 술 마셨어?”“아니.”유현진은 얼굴이 새빨갰다.하지만 거짓말을 해봤자 티가 날 것 같아 유현진은 솔직하게 말했다.“많이는 아니고, 조금 마셨어.”겨우 와인 반병뿐이었다. 그녀의 주량으로 와인 반병을 마셔도 전혀 취할 리 없었고 그저 도저히 맨정신으로 강한서를 씻겨줄 수 없을 것 같아 마신 거였다.강한서는 그녀를 한참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그녀에게 수건을 건네주며 덤덤하게 말했다.“먼저 한 번 닦아내는 게 좋겠어.”유현진은 한 번도 다른 사람을 씻겨본 적이 없었다.전에 두 사람은 욕실에서 사랑을 나눈 적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도 유현진이 강한서가 샤워하는 틈을 타 등을 밀어준다는 핑계를 대고 욕실로 들어온 거였다. 등을 밀기는커녕 결국 욕구에 못 이겨 그녀가 먼저 옷을 훌렁 벗어버리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스킨십이 끝나면 강한서는 그녀를 깨끗이 씻어주고 침대까지 안아가곤 했다.강한서는 그녀의 구애를 곧잘 받아줬었다.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침대에서만큼은 열정적이었다.하지만 작년부터 강한서의 열기가 점점 식은 것 같았다.두 사람은 아이의 일 때문에 싸움이 잦아졌고 이로 인해 강한서는 점점 그녀에게 흥미를 잃은 듯했다.‘내가 진작 질렸겠지, 뭐. 아이를 가지고 싶지 않은 건 그저 핑계일 뿐이야. 아니면 사랑하는 송민영이 마음에 걸려서 그랬나? 개자식. 나랑 질리도록 자고 나서는 이제 와서 사랑하는 여자 생각하는 거야?’이때, 강한서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정신을 차려보니 강한서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뭐 하는 거야?”유현진이 이런저런 생각을 할 때 손이 점점 아래쪽으로 내려간 것이었다.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는 다급하게 손을 움츠렸는데 강한서가 갑자기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유현진은 중심을
전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주강운이었다.강한서는 정색하더니 입술을 얇게 오므리며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주강운은 잠깐 주춤했다.“한서야?”강한서는 그제야 ‘응’ 하고 대답했다.주강운이 물었다.“왜 전화를 안 받아?”“배터리가 없어서.”강한서가 멈칫하더니 그에게 물었다.“현진이를 찾아?”주강운은 웃으면서 대답했다.“너 찾으려고 전화한 거야. 그런데 전화를 받아야 말이지, 할 수 없이 현진 씨한테 전화했어.”‘현진 씨?’강한서는 입술을 씰룩거렸다.“무슨 일인데?”주강운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요즘 너무 바빠서 네가 다친 것도 몰랐잖아. 민서랑 얘기하다가 알게 되었어, 네가 다쳤다는걸. 그리고 성우한테 연락해서 사건의 자초지종을 들었지. 몸은 좀 어때? 괜찮아졌어?”강한서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괜찮아.”“성우가 그러던데 범죄자가 잡혔다며? 내 도움이 필요해?”주강운은 충분히 두 사람이 최고 형량을 받을 수 있게 만들 수 있었다.“필요하면 연락할게.”강한서가 말을 마치자 유현진이 겨우 눈을 뜨며 물었다.“누구야? 왜 이렇게 오래 얘기해?”잠에서 금방 깨어나서 그런지 그녀의 목소리는 한껏 잠겼다.주강운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더니 흠칫했다.강한서가 그녀를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강운이야.”그러더니 또 그녀에게 물었다.“강운이랑 얘기할 거 있어?”유현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설마 소송할 일을 얘기한 건 아니겠지?”그녀는 바로 몸을 일으켜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강한서를 등진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강운 씨,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강한서는 입술을 씰룩거리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주강운이 대답했다.“한서가 전화를 안 받아서요. 성우한테서 들었는데 두 사람 사고를 당했다면서요? 안 다쳤어요?”유현진은 그제야 한시름을 놓았다.‘소송 때문에 전화한 줄 알고 깜짝 놀랐네.’“괜찮아요. 한서가 좀 다치긴 했는데 너무 심각한 건 아니에요.”강한서는 말문이 막혔
강한서가 어젯밤 일을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유현진은 고민하고 있었다.‘그냥 사고였다고, 다 큰 성인이 그럴 수도 있다고 덤덤하게 말하면 될까?’하지만 강한서는 어젯밤 일에 대해 물어볼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유현진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하지만 무턱대고 화를 낼 수는 없었다. 그러면 어젯밤 일을 마음에 두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이다.‘그래, 강한서가 먼저 시작했으니 난 그냥 즐겼을 뿐이라고.’그 생각에 유현진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별생각 없이 그냥.”유현진은 강한서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리가 없었다. 100억은 이혼 소송을 도와주는 주강운에게 줄 변호사 비용이었으니.물론 유현진은 주강운에게 이혼 소송을 도와달라고 부탁한 적은 없었다. 주강운은 강한서의 친구이니 소송을 도와준다고 해도 자신이 아닌 강한서를 도울 것으로 생각했다.그러니 ‘주강운을 별생각 없이 100억으로 저장했다’라는 유현진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하지만 강한서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렇다고 더 캐묻지도 않았다.“그럼 나는 뭐로 저장했는데?”유현진은 잠깐 멈칫하더니 말했다.“당연히 이름으로 저장했지, 뭐로 저장했겠어?”하지만 강한서는 바로 유현진의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눈치채고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봤다.강한서의 시선에 유현진은 등골이 오싹했다. 왠지 모르게 그가 휴대폰을 가져가서 확인할 것만 같았다.하지만 강한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를 한참 쳐다보더니 이불을 거두고는 침대에서 일어섰다.그는 맨발로 카펫을 밟으며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잠옷을 몸에 걸쳤다.유현진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강한서의 몸을 뚫어지게 쳐다봤다.강한서는 몸이 얄팍했지만 근육 라인이 굉장히 예뻤다. 복근이 있을 뿐만 아니라 등 근육까지 탄탄했다. 운동하는 사람이면 알 것이다, 등 근육을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매일 회사 일로 바쁘면서도 시간을 짜내 운동하니 자기 관리가 철저했다.“남자라면 다 그런 눈으로 봐?”강한서가 바지를 다 입고는
염색은 한 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잘생긴 포즈로 거울 셀카를 찍은 진윤이 강한서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다시 시작.]강한서는 사진 속 검은 머리에 순해 보이는 젊은이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읽던 책을 내려놓은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왜?”강한서가 진윤의 셀카를 한현진에게 보여주었다. 한현진 역시 사진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금발에 눈썹도 살짝 밀어버리는 스타일을 고집하더라니. 눈썹 피어싱까지 빼니까 그냥 아기였네. 너무 귀엽게 생겼잖아. 훈이보다 어려 보여.”강한서도 한현진을 따라 웃었다. “선배도 그렇잖아. 50살도 넘은 분이 아직도 30대처럼 보이니까. 성우가 처음 선배를 봤을 때 형이라고 불렀다가 예의 없다고 혼났어. 그러다 다른 애들도 형이라고 하니까 말이 없더라고.”그 장면을 상상한 한현진은 웃음을 멈추질 못했다. “역시 동안이 좋아. 50대가 되어서도 얼굴 하나로 젊은이들의 마음을 살 수 있잖아. 난 왜 동안이 아닐까?”그 말에 멈칫한 강한서가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누구 마음을 사려고?”한현진이 눈웃음을 지었다. “강 대표님, 몇 십 년 후의 일도 미리 질투하실 거예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는 아냐.”한현진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정말?”강한서가 확신에 찬 말투로 대답했다. “안 해, 질투.”예상 밖의 대답에 호기심이 불타오른 한현진이 물었다. 몇 십 년 후엔 사랑보다 정으로 사는 거라 신경 쓰지 않는 거야?”강한서가 대답했다. “그건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어.”“뭔데?”강한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대들은 그저 첩에 불과해.”멍해졌던 한현진이 폭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강한서를 품에 안고 뽀뽀 세례를 날렸다. “진지한 얼굴로 실없는 농담을 던질 때 정말 귀여워 죽겠다니까.”강한서가 힐끔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이런 걸 바로 조강지처의 자신감이라고 하는 거야.”한
순간 불쾌한 기분에 빠진 진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아마추어 경기는 사석에서 주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전문적인 레이싱 경기도 아니었다. 오직 속도에서 주는 쾌락만을 추구하는 경기였다. 상금이 높은 만큼 위험부담도 컸다. 하지만 진윤이 경기에 참가한 것은 상금 때문이 아니었다. 돈 걱정 없이 산 진윤이 목숨 건 돈에 욕심낼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단지 경기의 주최 측에 F1 레전드 인물도 있다는 소식에 우승을 하면 그 사람과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참가한 것이었다. 진윤은 그의 팀원들 역시 레이싱에 대한 열정으로 함께 지금까지 뭉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신을 무시하는 친구의 말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진윤처럼 레이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프로 선수가 되길 꿈꾸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이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레이싱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지니고 있는 상금이라는 거대한 유혹일 수도 있었다. 팀원 중 위험한 내기 경기에 참석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진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경주마처럼 미친 듯이 산길을 휘저었다. 목숨을 내걸고 재벌들의 도박판에서 기꺼이 주사위가 되었다. 아차 하는 사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경기에서 이기면 그만큼 어마어마한 상금이 주어졌다. 불행히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고 해도 그의 가족들은 놀라운 액수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으니 위험을 감수하고 뛰어드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처음으로 팀원에게 그 얘기를 들었을 때의 진윤은 충격에 빠졌었다. 하지만 팀원들은 마치 일상적이 대화를 하듯 당연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의 진윤은 그저 그들이 비슷한 일을 너무 많이 들은 탓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들은 그렇게 위험 부담마저도 부러웠었던 같았다. 팀원 중 대부분의 사람에게 레이싱은 그저 짧은 시간 사이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도구에 불과했다. 뜬 눈으로 꿈을 꾸고 있는 진윤이야말로 그들에겐 이상한 인간
“아들. 네가 공부가 하고 싶다면 복수 전공이 아니라 10개 전공을 배우겠다고 해도 엄마는 찬성이야. 엄마 지금 너무 기뻐. 만약 농담하는 거라면 지금 당장 거짓말이었다고 얘기해. 안 그럼 엄마는 진심으로 받아들일 거야.”진윤이 웃으며 홍혜림의 팔을 끌어안았다. “엄마. 저도 형처럼 엄마의 자랑이면 안 돼요?”홍혜림이 진윤의 금발을 어루만졌다. “너도 예전엔 엄마의 자랑이었지. 금발로 염색한 후로는 자랑이 아니게 되었지만.”진윤: ...“그럼 다시 염색할게요.”홍혜림이 얼른 헤어숍 VIP카드를 건네며 말했다. “얼른 가. 여긴 새벽 12시가 되어야 영업이 끝나는 곳이야. 지금 가면 아직 시간 있어.”진윤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홍혜림이 얼마나 진윤의 금발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네, 네, 네. 지금 갈게요.”외투를 챙겨주며 문앞까지 배웅 나온 홍혜림이 진윤에게 물었다. “아들. 조금 전에 누구한테 들은 말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잖아. 그 분 너희 교수님이셔?”“우리 교수님은 아녜요. 하지만 좋은 스승님이긴 해요.”‘사기꾼이기도 해. 하지만 꽤 능력 있는 사기꾼.’홍혜림이 호기심에 가득 찬 말투로 물었다. “그 분 한 마디에 바로 생각이 바뀐 거야? 내가 너한테 얼마나 많이 얘기했었는데, 그땐 들은 척도 안 하더니.”진윤이 말했다. “절 데리고 20km를 뛰었어요. 자길 이기면 날 뉴벨리 팀에 입단시켜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나보다 10살이나 많아서 나이 많은 어르신한테 지겠어? 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졌어요.”진윤이 창피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저보다 빨리 뛴 건 아니었어요. 제가 적을 만만하게 생각한 거죠. 하지만 무서운 사람이에요. 지독하게 강해서 무서운 사람. 그 사람은 못 해낼 일이 없는 것 같아요. 입단은 무슨, 그냥 그 기회를 벌어 저에게 설교를 하려던 것뿐이었어요.”“내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레이싱을 그만두게 하려고. 처음엔 엄마가 보낸 스파이인 줄 알았다니까요. 하지만
진윤에게 묻는 홍혜림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얘기해. 엄마 괜찮아. 파산이라도 하지, 뭐. 돈은 없으면 다시 벌 수 있어. 아빠가 안 된다고 하면 쫓아내면 돼.’처음으로 느끼는 죄책감에 진윤은 고개를 숙였다. 홍혜림이 비록 관리를 잘 하긴 했지만 귀밑머리는 이미 하얀 서리가 내려있었다. 큰형은 어려서부터 얌전하고 말을 잘 듣는 아이라 부모님의 속을 썩인 적이 없었다. 유독 진윤이 고집을 부리며 걸음마를 뗄 때부터 뒤에서 마음을 졸이게 했다. 진윤의 수능성적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 그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 전공은 전부 부모님이 수많은 돈을 들여 기획한 결과였다. 하지만 진윤은 본인이 좋아하지 않는 전공이라는 이유로 자포자기하며 지냈다. 부모님이 통제욕이 강하다는 것은 그저 진윤이 그들에게 씌워놓은 프레임에 불과했다. 정말 부모님의 통제 속에서 살아가는 친구들은 매일 모든 스케줄, 심지어 먹는 음식까지 전부 부모님에게 보고해야 했다. 그런 사람에 비하면 그의 부모님은 그저 애교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레이싱을 좋아하는 진윤이 못마땅했지만 그럼에도 그저 설득하는 것이 전부였다. 홍혜림은 단 한 번도 진윤의 레이싱 장비를 부순 적이 없었다. 매번 더는 새 장비를 사주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 다짐도 진윤의 애교 몇 번에 곧 무너지고 말았다. ‘언제까지 실망만 안겨드릴 순 없잖아. 나도 엄마의 자랑이 되어야지 않겠어?’“엄마. 저 복수 전공하고 싶어요. 전 레이싱이 좋아요. 도무지 포기가 안 돼요. 저 실력 그 정도 아닌 거 알아요. 하지만 자동차 관련한 전공을 배워보고 싶어요. 지금 전공은 절대, 두 번 다시는 F학점 받는 일 없을 거라 약속 드려요. 복수 전공하게 해주면 안 돼요?”홍혜림: ??“그거 말고 다른 건 없어?”진윤이 멍해졌다. “네?”홍혜림이 말했다. “네가 나에게 하려는 말이 그거야?”진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 그게 아니면요?”홍혜림: “사람을 치거나, 교통사고를 낸 게 아니고?”
눈에 띄게 변한 진윤의 모습을 홍혜림은 믿을 수가 없었다.집 바로 앞이 학교라 진윤은 기숙사 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집에 자주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집에서 레이싱 게임을 할 때마다 부모님의 잔소리가 끊이질 않아 진윤은 큰형 아파트에 몰래 숨어있는 것을 좋아했다. 진윤의 큰형은 일 때문에 그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9살이나 더 많은 그의 형은 가끔 부모님보다 더 진윤을 아끼기도 했다. 심지어 가끔은 진윤의 편을 들어 그의 비밀을 지켜주기도 했다. 큰형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러니 제발 눈치껏 본가로 들어오라고 홍혜림은 몇 번이고 진윤에게 얘기했었다. 사실 예비 며느리는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진윤을 본가로 불러들이는 이유는 진윤이 곁에 없으니 도무지 관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윤은 그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매번 홍혜림이 같은 얘기를 꺼낼 때마다 그는 두 귀를 닫고 못 듣는 척 연기했다. 하지만 이번엔 홍혜림이 먼저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진윤 스스로 본가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진윤에 홍혜림은 혹시 형제가 싸우기라도 한 걸까 전화를 했지만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에 홍혜림은 생각했다. ‘이 자식 또 무슨 사고라도 치고 돌아와서 얌전한 척 연기하는 거 아냐?’‘교통사고라도 내서 배상해 줘야 하는 건가? 아니면 레이싱 카가 망가져서 새 차를 살 돈이 필요한 건가?’‘설마 사람을 친 건 아니겠지?’진윤이 집에서 열심히 공부할수록 홍혜림은 점점 더 사람을 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매일 밤 아무 일도 없는 척 진윤의 방 앞을 서성이며 생각했다. ‘먼저 잘못을 인정하면 요즘 얌전하게 지냈던 걸 정상참작해서 욕을 좀 덜해야겠어.’하지만 3일이 지나도록 진윤은 홍혜림을 부르지 않았다. ‘이상해.’‘너무 이상하잖아!’‘설마 사람을 친 것보다 더 큰 사고는 아니겠지?’‘대체 얼마를 배상해야 하는 거야?’1 주일이 지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홍혜림은 진윤의
진윤: ...강한서가 진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싫다면서 현 상황을 바꿔보려고 하지도 않은 거야?”진윤: ...‘왜 선생님께 혼나는 기분이 드는 거지? 진지하게 핵심만 꼬집고 있잖아.’입을 달싹이던 진윤은 변명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진윤은 그동안 어떻게 반항해야할지,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강한서가 말했다. “네 인생은 네 거야. 네가 열심히 살든, 대충 살든 네 하루하루는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어. 네 태도에 따라 싫었던 그 경험들이 사라지지 않아. 단지 네가 싫다는 이유로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않고 대충 흘려보냈을 뿐 그것들은 계속 존재해.”“대충 공부해서 대충 졸업하면 또 대충 취직이나 하겠지. 아니면 아예 너희 회사로 입사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다음에? 그렇게 평생을 대충 흘려보낼 거야? 그게 네가 원하는 인생이야?”멍하니 강한서를 쳐다보던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아뇨.”부모님이 선택해준 전공이 싫어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얼른 졸업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강한서의 말처럼 졸업 후엔? 전공에 맞는 직업을 찾아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갈까, 아니면 부모님 회사에 입사해 되는대로 살아갈까. 어떤 선택이든 그건 진윤이 원하는 인생은 아니었다. 4년이란 시간을 허무히 흘러 보내고 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전 이미 3학년이에요. 전과를 하기엔 늦었잖아요. 이젠 뭘 하려고 너무 늦은 것 같아요.”속상한 듯 대답하는 진윤의 말에 한현진이 말했다. “진윤 씨는 완전 MZ세대잖아요. 이제 갓 이십 대 초반인데 뭘 해도 늦지 않은 나이예요. 너무 빨리 본인의 가능성을 단정 짓지 말아요. 60세에 대학생이 됐다는 기사 못 봤어요?”“진윤 씨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도 늦었다고 생각 안 하는데, 진윤 씨가 왜 겁을 내요?”“전...”입술을 달싹이던 진윤이 한참이 지나서야 한숨을 내뱉었다. “두 사람 문제아 갱생
진윤은 6분 차이로 강한서에게 패배했다. 그가 결승점에 도착했을 때, 강한서는 이미 안정적인 호흡을 되찾고 있었다. 결승점을 통과한 진윤은 다리가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려 했다. 강한서가 다가가 그런 진윤을 일으켜 세웠다. “서서 쉬다가 나중에 앉아.”말하며 물뚜껑을 따 진윤에게 건넸다. “천천히 마셔.”진윤은 이 상황이 창피하기 그지없었다. 처음엔 강한서를 얕보고 경기에 진 자신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챙겨주는 강한서를 보며 자신이 너무 유치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숨을 몰아쉬며 강한서가 내민 물을 받은 진윤은 아무 말 없이 꿀꺽꿀꺽 물을 삼켰다. 한현진이 강한서에게 또 물을 한 병 가져다주며 나지막이 물었다. “넌 괜찮아?”강한서가 머리를 가로 저었다. “괜찮아.”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비록 꾸준히 러닝을 하고 있었지만 하프 마라톤을 뛴 건 오랜만이었다.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진윤을 쳐다보았다. 충격이 꽤 컸는지 입술을 삐죽이고 있는 아이는 풀이 죽은 얼굴로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기대했던 것만큼 큰 실망이 안겨왔다. 진윤은 심지어 주호를 앞에 두고도 대화를 나눌 의욕조차 찾지 못했다. “가자. 쉬다가 같이 밥이나 먹어.”진윤이 시선을 올렸다. “이겼다고 저랑 축하라도 하시게요?”강한서가 웃으며 대답했다. “조 회장님 소개해줄게.”멈칫한 진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제가 졌잖아요.”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졌으니까 팀에 입단할 수는 없지만 소개는 받을 수 있잖아.”강한서가 말을 이었다. “아니면 소개받고 싶지 않은 거야?”“아뇨!”다급하게 대답하던 진윤이 곧 쑥스러운 듯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 뭐야... 형님 그 나이에 체력이 아직도 좋으시네요. 제가 졌어요. 인정해요. 형님이 이기셨어요.”진윤의 말에 강한서가 멈칫했다. “그 나이라니?”곧 불혹의 나이라고 대답하려던 진윤은 강한서 뒤에서 눈짓을 보내는 한현진의 모습에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아부했다.
한현진은 한참을 멍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그녀는 강한서에게 그날의 일에 관해 물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강한서는 본인 덕에 한현진이 월급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얘기하지 않았다. 그러니 한현진은 줄곧 월급을 전부 돌려받을 수 있었던 건 주최 측에서 한현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밝혀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보니 꽤 단순한 생각이었다. 모터쇼라는 큰 활동에 주최 측에서 안내 요원까지 신경 쓸 리가 없었다. 알바의 잘못이든 아니든, 그건 그들의 관심 밖의 얘기였다. 문제가 생겼을 때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제일 간단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강한서였어... 강한서가...’“강한서 그 자식, 마음을 꼭꼭 숨기기도 했네. 이미 그때부터 눈 여겨 보고 있었던 거네요.”감탄하는 주한과 달리 한현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선배님, 강한서가 절 도와줬을 땐 아무런 사심도 없었을 거라고 전 생각해요. 그날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이 저든 아니든, 한서는 그렇게 했을 거예요.”당시 강한서는 한현진을 부르지도, 인사도 하지 않았었다. 심지어 시간이 흘러 한현진이 다시 그 얘기를 꺼냈지만 그는 여전히 솔직한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고 그 일을 핑계로 점수를 더 받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한현진은 확신할 수 있었다. 강한서가 한현진을 도운 건 절대 사심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조한이 웃으며 말했다. “사심이 있었든 아니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어쨌든 두 사람 인연은 삼심할 매가 쇠줄로 꽉 묶어놓은 것 같네요. 인연이 깊어도 너무 깊어.”한현진도 그 말에 깊이 공감하는 바였다. 만약 한현진이 죽은 그 태아와 바뀌지 않았다면 그녀와 강한서는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둘도 없는 사이였을 것이다. 바뀌었어도 결국은 돌고 돌아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하늘이 이어준 인연이 틀림없었다. 진윤은 빠른 속도로 첫 바퀴를 완주했다. 강한서는 진윤과 2km정도 뒤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바퀴부터 진윤의 속도는 점점 느려졌지만 강한서는 여전
조한이 선글라스를 벗자 지적인 이미지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입꼬리를 올려 씩 웃으며 말했다. “학교 다닐 땐 선배라고 부르더니 졸업하니까 회장님이야?”강한서가 한현진을 향해 설명했다. “대학원 선배님이셔. 같은 지도교수님이었거든.”한현진이 조한의 비위에 맞게 대답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역시, 제수씨가 한서보다 낫네.”한현진과 인사 몇 마디를 나눈 조한이 강한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넌 나이가 몇인데 어린애랑 따지고 그래?”강한서가 말했다. “선배보다는 어려요. 제 아내는 아직도 대학생 같다고 하던데요.”조한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제수씨가 아이 달래듯 잘 하나봐.”한현진: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진윤도 도착했다. 강한서가 승부를 인정하지 않을까 걱정된 그는 증인이 되어줄 친구 두 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기세등등하게 걸어오던 진윤은 한현진을 보더니 곧바로 우물쭈물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더니 조한을 발견하고는 말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진윤은 그제야 강한서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정말 날 뉴벨리 팀에 추천해줄 수 있나봐.’조한이 장난스러운 말투로 진윤을 응원했다. “청년, 저 자식을 쓰러뜨릴 수 있다면 내가 팀장 자리도 고민해볼게요.”한현진도 진윤을 향해 말했다. “파이팅! 결승점에서 기다릴게요.”두 사람의 응원에 후끈 달아오른 진윤은 마음속으로 각오를 다지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진윤에게 한현진과 조한은 그야말로 우주대스타였다. 그러니 그들의 응원은 그에게 흥분제와도 다를 바가 없었다. 이 경기에서 진다는 것은 자신의 우상 앞에서 망신을 당하는 일이었다. 준비 운동을 마치고 시작을 알리는 경보음이 울리자 진윤은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어린 나이라 그런지 폭발력이 대단했다. 그는 곧 강한서와 차이를 벌리며 앞서나갔다. 강한서는 진윤의 속도를 따라 빨리 달리지 않고 꾸준히 똑같은 페이스를 유지했다. 한현진은 망원경을 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