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진은 바로 병실로 달아갔다.문을 열자, 병실 안에는 강한서 혼자만 있을 뿐 경찰은 없었다.오히려 강한서는 문이 갑자기 열린 소리에 깜짝 놀라고는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왜 저렇게 덤벙대?”유현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물컵에 담겨있는 뜨거운 물을 식혔다.금방 받은 물은 뜨거웠다. 강한서는 워낙 까다로워 찬물과 뜨거운 물을 섞은 온수를 마시지 않고 오직 뜨거운 물을 식힌 온수만 마셨다.전에 유현진이 귀찮아서 찬물과 뜨거운 물이 섞인 온수를 강한서에게 주자 그는 한 모금만 마시고는 더는 물에 입을 대지 않았다.병원에는 쾌속 열 식히기 기능이 있는 정수기가 없어 이렇게 손으로 식혀줄 수밖에 없었다.강한서는 그녀를 보더니 갑자기 물었다.“아침에 어디 갔어?”“로또 사러 갔어.”강한서는 어이가 없었다.“로또는?”유현진이 컵을 내려놓고는 휴대폰을 꺼내 차미주가 보낸 두 사진을 강한서에게 보여줬다.“번호 엄청 오래 고민했어. 1등 할 것 같아.”강한서는 액정이 깨질 대로 깨진 유현진의 휴대폰을 힐끔 봤다.“로또를 산 사람마다 1등 당첨된다고 말하더라.”“꿈은 크게 꾸는 게 좋잖아.”“그건 꿈이 아니라 망상이야.”유현진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너 같이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은 당연히 로또가 가져다주는 행복을 모르겠지.”강한서가 대답했다.“로또 1등에 당첨되면 당첨금은 부부의 공동 재산으로 되는 거지? 나도 절반 챙길 수 있나? 이렇게 생각하면 로또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 같기도 하고.”유현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못돼먹은 놈. 내가 1등에 당첨되어도 당첨금은 이혼한 후에 수령해야지.’“약 먹어.”물이 미지근해지자 유현진은 컵을 강한서에게 건넸다.하지만 강한서는 물을 건네받고는 그저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기만 했다.유현진은 어리둥절했다.“왜 그래?”강한서가 괜히 심술을 부리며 말했다.“내가 약을 먹을 손이 어디 있어?”유현진은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테이블 위에 놓인 약을 강한서에게 먹여주었다.
“그리고 난 사람을 때린 게 아니라 정당방위야. 그리고 네 약물 검사도 경찰 쪽에 넘겼으니까 변호사가 알아서 잘 처리해 줄 거야.”그 사람들에게 칼이 있었다면 자신을 협박했을 때 왜 칼을 쓰지 않았는지 유현진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칼을 썼었더라면 그녀는 찍소리도 못했을 텐데 말이다.“이리 와.”강한서의 낮은 목소리에 유현진은 생각을 멈췄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물었다.“왜?”말은 그렇게 해도 유현진은 강한서의 침대 옆으로 갔다.강한서가 미간을 구미며 말했다.“머리 좀 숙이고 가까이 와.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하겠어?”유현진이 입술을 파르르 떨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고는 허리를 숙였다.“도대체 무슨...”말을 마치기도 입술에 차가운 느낌이 전해져 왔다.강한서가 검지로 그녀의 입술에 난 상처에 약을 발랐다.유현진이 의식을 잃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어 난 상처이다.연고는 차가웠지만 강한서의 손길은 부드럽고도 따뜻했다.어젯밤에 당한 일을 떠올리면 유현진은 억울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입술이 소시지처럼 부었는데도 몰랐어?”강한서는 역시 입이 방정이다, 그의 말을 들은 유현진의 억울한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그녀는 강한서의 손을 툭 치며 그를 째려봤다.“보기 안 좋으면 보지 말든가!”“더 못생긴 모습도 봤는데, 뭐. 이미 익숙해져서 괜찮아.”유현진은 입술을 씰룩거렸다.‘팔이 아니라 혀를 다쳤어야지.’“똑똑.”유상수가 문을 두드리며 과일 바구니를 들고 나타났다.유현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아빠, 먼저 가신 거 아니었어요?”유상수가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가려던 참에 1층 마트에 싱싱한 과일을 팔길래. 한서가 뭐 좋아하는지 몰라서 골고루 사 왔어. 너 좀 있다가 한서한테 과일이나 깎아줘.”유현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과일 바구니를 건네받았다.참 아이러니했다.유현진은 어렸을 때 몸이 아파 계란말이가 그렇게 먹고 싶었었다. 유상수가 다니는 회사 맞은편에 바로 계란말이를 파는 가게가 있었는데도 유상수는 그녀가 병이
유현진이 그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아빠 맞아요? 다른 사람의 말은 그렇게 잘 믿으면서 왜 친딸 얘기는 믿지 못해요? 제가 선물했다고 말했었잖아요. 신미정한테 당한 수모를 왜 저한테 푸시는 거예요?”유상수는 그녀의 말을 조금도 믿지 않았다.“선물을 받았으면 왜 못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겠어? 저번에 너보고 강한서한테 천주시 프로젝트에 대해 얘기해 보라고 했을 때도 여러 가지 핑계를 대더니. 너 이제 강한서가 뒤를 봐준다고 유씨 집안을 버릴 셈이야? 네 엄마 치료비만 1년에 몇억은 들었어. 돈이 그냥 생기는 줄 알아? 너한테 이런 일을 시킨 것도 결국 누구 때문인데? 우리 유씨 집안이 일어서지 못하면 강씨 집안에서 누가 너를 존중하겠어?”‘말만 잘하지, 나랑 엄마를 위해 헌신하는 척하긴. 그런 수단으로 부와 명예를 얻어낸다고 해도 강씨 집안에서 나를 더 좋게 봐줄 것도 아닌데 말이야.’“제가 말했죠, 트러플은 정말 선물했다고요. 정 못 믿으시겠으면 앞으로 저한테 이런 일 맡기지 마세요. 아부 떠는 건 제가 확실히 아빠를 못 따라가죠.”“너.”유상수는 분노가 끓어올랐다.마침 이때, 옥상으로 올라온 사람들이 있어 그는 결국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유현진은 바로 자리를 떴다....병실 안에서, 한성우는 방금 유현진이 사람을 잘못 알고 통곡하는 얘기를 하며 깔깔 웃어댔다.강한서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이제 그만하지.”한성우가 겨우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그래도 죽으면 울어주는 사람이 있잖아, 기분이 어때?”“괜찮네.”강한서가 그를 힐끔 보고는 말을 이어갔다.“네가 죽을 땐 울어주는 사람이 있을까?”그 말을 들은 한성우는 정색했다.울어주는 사람이 있기는커녕 저번에 몸이 아파서 주사를 맞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더니 전 여자친구들의 댓글로 도배되었다.“쌤통이야, 아주!”“경찰 쪽에는 무슨 소식이 없어?”강한서가 진지하게 물었다.“처음에는 부인하며 잡아떼더니 CCTV를 보여주자 두 사람 모두 솔직하게 털어버렸어. 어젯밤
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끝내 말을 더하지 않았다.‘그래, 내가 낸 아이디어니까 어쩔 수 없이 잘못을 인정해야지.’이때 유현진이 돌아왔다.한성우는 워낙 눈치가 빨랐기에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현진 씨, 저는 회사에 일이 생겨 가봐야 할 것 같네요. 한서 잘 챙겨주세요, 무슨 일 있으면 저한테 연락하시고요.”강한서가 그를 힐끔 보더니 말했다.“빈손으로 가면 어떻게 해? 과일 바구니 들고 가.”“내가 혼자도 아닌데 과일 바구니는 무슨...”한성우는 갑자기 강한서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는 한성우가 병문안을 빈손으로 왔다며 비아냥거리고 있었다.“과일 바구니는 여기 둘게요. 현진 씨, 이 카드 받으세요. 안에 1억 정도 있을 거예요. 전에 약속했던 사례금이에요. 한서가 다쳐서 일 못 한 거랑 형수님이 받으신 정신상의 고통까지 고려해 두둑이 넣었어요. 저 때문에 두 사람 이런 일을 당한 거잖아요.”유현진은 끝내 그 카드를 받지 않았다.“남편이 얼마나 돈을 잘 버는데요. 팔을 다쳐 한 주일은 쉬어야 할 텐데 말이에요. 맞지, 여보?”그 말인즉 돈이 부족하다는 뜻이었다.여보라는 소리에 강한서는 기분이 좋았다.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천연덕스럽게 말했다.“상처가 회복되는 거 봐야지. 회복하는 데에 적어도 일주일은 걸릴 테고 심각하면 보름 걸릴 수도 있어.”유현진은 어깨를 으쓱했는데, 마치 ‘나 거짓말한 거 아니야’ 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듯했다.한성우는 입술을 씰룩거렸다.‘누가 두 사람 부부 아니랄까 봐? 내 돈 떼먹을 때는 저렇게 마음이 잘 맞아. 괜히 한서를 도우려고 나섰네. 전혀 내가 도울 필요도 없는데 말이야. 둘이 화해하고 나부터 저격하는 것 좀 봐.’유현진은 일부러 한성우를 난처하게 만들려는 건 아니었다.하지만 한성우가 원망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어젯밤 강한서가 칼을 맞은 걸 눈 뜨고 보고만 있었으니.오늘 돈이라도 받아내지 못하면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강한서도 오늘 돈을 받아내지 못하면 나중에라도 배로 더 받아낼 기
“너 얼른 수표 챙겨, 내가 후회하기 전에.”강한서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말했다.“내 물음에 대답하면 수표는 네 거야.”“뭔데?”유현진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아버님이 뭐라고 하셨어?”유현진이 멈칫하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어머님이 트러플을 못 받았다고 하셨대. 네가 많이 바쁘면 그냥 거절했어도 됐는데.”‘굳이 나한테 전했다고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잖아.’강한서가 멈칫하더니 안색이 어두워졌다.“내가 일부러 안 전했다고 생각해?”“일부러든 아니든, 잊어먹었든 아니든 할 수 없는 일을 약속하는 거 아니야.”강한서가 눈살을 찌푸리며 무슨 말을 더하려던 그때, 민경하가 문을 두드리더니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대표님, 사모님. 퇴원 수속은 마쳤습니다.”두 사람이 대답하지 않자 민경하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퇴원하시는 거 맞습니까?”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두 사람 모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민경하는 오히려 불편했다. 두 사람이 워낙 많이 다퉜었는데, 갑자기 조용해지니 왠지 모르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그는 몰래 백미러를 힐끔 봤다.강한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미간을 잔뜩 구겼다. 유현진도 차가운 얼굴로 창문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두 사람 왜 또 이런대?’“민경하 씨.”강한서가 갑자기 물었다.“지난번에 엄마한테 전하라던 트러플 말이에요, 엄마한테 전했어요?”유현진은 귀를 쫑긋했다.민경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엄마가 받았나요?”“아니요, 부인께서 집에 계시지 않아 가정부에게 전했어요.”“그럼 우리가 보낸 거라고 똑똑히 말했었나요?”“네, 분부하신 대로 말씀드렸습니다.”강한서는 미간을 구겼다.‘그런데 왜 못 받은 거지?’그는 신미정이 살고 있는 집에 전화를 걸었는데 전화는 바로 통했다.“저에요.”가정부는 바로 강한서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다.“도련님, 어쩐 일로 전화하셨어요? 부인과 아가씨는 안 계시는데요.”“알아요, 물어볼 게 있어서요.”“말씀하세요.”“저번에 민경하 씨한테 부탁해서
가정부는 워낙 오랫동안 강씨 집안에서 일해왔는데도 강한서는 전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빡빡하게 굴었다.유현진은 그에게 그만하라고 타이르고 싶었다. 어차피 뺨은 이미 맞았기에 이제 와서 더 따지는 건 의미가 없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가정부가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아, 아가씨예요... 아가씨가 물건을 던져서...”“누구랑 통화해요?”가정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로 신미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전화를 받은 사람은 곧 신미정으로 바뀌었다.“도련님이에요. 트러플에 대해 여쭤보셔서...”신미정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강한서에게 말했다.“트러플이 뭐가 그렇게 대단해서 집까지 전화해서 물어?”강한서는 입술을 얇게 오므렸다.“그저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내고 싶어서요.”신미정은 벌컥 역정을 냈다.“알아내면 뭐하게? 경찰에 신고해서 나 잡아가게? 잘난 것도 없으면서 일러바치는 건 1등이라니까. 내가 그 트러플을 봤다고 해도 절대 받지 않았을 거야. 나한테 전화할 시간에 네 마누라나 신경 써. 강씨 집안에 시집왔는데도 팔이 밖으로 굽으면 어떻게 해?”말을 마친 신미정은 전화를 끊어버렸다.강한서는 휴대폰을 꽉 잡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유현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래도 한서가 안 전해준 건 아니네.’유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됐어, 원래 선물하러 가기도 귀찮았는데 잘 됐지, 뭐.”강한서는 한참 있다가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많이 아파?”그 말을 들은 유현진은 잠깐 멈칫했다. 강한서가 계속 자신의 왼쪽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걸 발견하고서야 그의 뜻을 알아챘다.억울한 감정이 밀려오며 유현진은 눈시울을 붉혔다. 눈물을 흘릴까 봐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애써 눈물을 참았다. 그리고 괜찮은 척했다.“제 자식을 그렇게 세게 때릴 리가 있겠어?”사실 많이 아팠다. 유상수는 그녀의 뺨을 있는 힘껏 때렸기에 그녀의 뺨은 아직도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하지만 유현진은 자신의 기분을 강한서에
유현진이 그의 말을 들을 사람도 아니었기에 강한서는 일찍이 포기했다.유현진이 가까이 다가오자 강한서는 그녀에게서 술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의아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너 술 마셨어?”“아니.”유현진은 얼굴이 새빨갰다.하지만 거짓말을 해봤자 티가 날 것 같아 유현진은 솔직하게 말했다.“많이는 아니고, 조금 마셨어.”겨우 와인 반병뿐이었다. 그녀의 주량으로 와인 반병을 마셔도 전혀 취할 리 없었고 그저 도저히 맨정신으로 강한서를 씻겨줄 수 없을 것 같아 마신 거였다.강한서는 그녀를 한참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그녀에게 수건을 건네주며 덤덤하게 말했다.“먼저 한 번 닦아내는 게 좋겠어.”유현진은 한 번도 다른 사람을 씻겨본 적이 없었다.전에 두 사람은 욕실에서 사랑을 나눈 적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도 유현진이 강한서가 샤워하는 틈을 타 등을 밀어준다는 핑계를 대고 욕실로 들어온 거였다. 등을 밀기는커녕 결국 욕구에 못 이겨 그녀가 먼저 옷을 훌렁 벗어버리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스킨십이 끝나면 강한서는 그녀를 깨끗이 씻어주고 침대까지 안아가곤 했다.강한서는 그녀의 구애를 곧잘 받아줬었다.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침대에서만큼은 열정적이었다.하지만 작년부터 강한서의 열기가 점점 식은 것 같았다.두 사람은 아이의 일 때문에 싸움이 잦아졌고 이로 인해 강한서는 점점 그녀에게 흥미를 잃은 듯했다.‘내가 진작 질렸겠지, 뭐. 아이를 가지고 싶지 않은 건 그저 핑계일 뿐이야. 아니면 사랑하는 송민영이 마음에 걸려서 그랬나? 개자식. 나랑 질리도록 자고 나서는 이제 와서 사랑하는 여자 생각하는 거야?’이때, 강한서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정신을 차려보니 강한서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뭐 하는 거야?”유현진이 이런저런 생각을 할 때 손이 점점 아래쪽으로 내려간 것이었다.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는 다급하게 손을 움츠렸는데 강한서가 갑자기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유현진은 중심을
전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주강운이었다.강한서는 정색하더니 입술을 얇게 오므리며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주강운은 잠깐 주춤했다.“한서야?”강한서는 그제야 ‘응’ 하고 대답했다.주강운이 물었다.“왜 전화를 안 받아?”“배터리가 없어서.”강한서가 멈칫하더니 그에게 물었다.“현진이를 찾아?”주강운은 웃으면서 대답했다.“너 찾으려고 전화한 거야. 그런데 전화를 받아야 말이지, 할 수 없이 현진 씨한테 전화했어.”‘현진 씨?’강한서는 입술을 씰룩거렸다.“무슨 일인데?”주강운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요즘 너무 바빠서 네가 다친 것도 몰랐잖아. 민서랑 얘기하다가 알게 되었어, 네가 다쳤다는걸. 그리고 성우한테 연락해서 사건의 자초지종을 들었지. 몸은 좀 어때? 괜찮아졌어?”강한서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괜찮아.”“성우가 그러던데 범죄자가 잡혔다며? 내 도움이 필요해?”주강운은 충분히 두 사람이 최고 형량을 받을 수 있게 만들 수 있었다.“필요하면 연락할게.”강한서가 말을 마치자 유현진이 겨우 눈을 뜨며 물었다.“누구야? 왜 이렇게 오래 얘기해?”잠에서 금방 깨어나서 그런지 그녀의 목소리는 한껏 잠겼다.주강운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더니 흠칫했다.강한서가 그녀를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강운이야.”그러더니 또 그녀에게 물었다.“강운이랑 얘기할 거 있어?”유현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설마 소송할 일을 얘기한 건 아니겠지?”그녀는 바로 몸을 일으켜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강한서를 등진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강운 씨,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강한서는 입술을 씰룩거리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주강운이 대답했다.“한서가 전화를 안 받아서요. 성우한테서 들었는데 두 사람 사고를 당했다면서요? 안 다쳤어요?”유현진은 그제야 한시름을 놓았다.‘소송 때문에 전화한 줄 알고 깜짝 놀랐네.’“괜찮아요. 한서가 좀 다치긴 했는데 너무 심각한 건 아니에요.”강한서는 말문이 막혔
주현의 생각은 성월과 달랐다. 송가람은 사랑에 눈이 멀어 남자의 사랑을 바랐지만 주현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를 애초부터 매우 명확했다. 주현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신분과 지위를 노렸다. 그건 20년, 30년을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주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 눈앞에 놓였는데 그 기회를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주현은 성월의 성격을 잘 알았다. 성월은 반평생을 야심으로 가득 찬 서해금 곁을 지키며 진작 서해금의 충직한 개가 되었다. 성월에게 신분은 뛰어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거였고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기회를 잡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해금 역시 자신의 두 손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송병천과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서민 출신에 남편을 잃고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 무슨 수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웃기지 말라 그래.’하지만 그 말을 주현은 감히 성월 앞에선 할 수 없었다. 주현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이모, 도와줘요. 신씨 가문으로 돌아가든 아니든 저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송가람 씨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일로 부탁해요. 활동이든 파티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자리로요. 그래야 신씨 가문에 호감을 살 수 있죠.”성월의 학창 시절, 그녀의 집안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주현의 부모님이 빌려주신 돈으로 급한 불을 끈 덕에 성월은 늘 주현의 집안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주현의 애교에 견디지 못한 성월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송가람 씨 비서로 전근 보내볼게. 너, 네 남자친구한테 기본적인 건 잘 가르쳐. 묻는 말에 아무 것도 대답 못하면 안 돼.”주현이 순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월에게 팔짱을 끼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모! 역시 이모가 날 제일 예뻐할 줄 알았어. 주말에 집에 와서 식사해요. 안 가신지 꽤 됐잖아요...”한편, 사무실로 돌아온 한현진의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어제 바로 세정제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냉정하다니, 한현진 답지 않아.”성월이 말했다. “사실 전 그렇게 냉담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오일을 깨뜨린 것도 주혁 씨였고 몰래 부업을 하다 한 대표님 얼굴에 먹칠한 것도 주혁 씨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거예요.”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인사팀에 잠깐 다녀와요. 일단 주혁을 가람이 운전기사로 전근시켜요.”성월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대표님, 가람 아가씨에게 운전기사를 붙일 생각이시면 제가 다른 기사님을 찾을게요. 회사에는 지금 마침 새로 입사한 젊은 신입사원들이 많아요. 어리고 건강하고 운전 경력도 전부 5년이 넘었어요. 주혁 씨는 한현진 곁에서 한동안 일을 하신 분인데, 가람 아가씨 운전기사로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요.”“전근시키라고 하면 시켜요. 제가 이렇게 하는 덴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 성 비서는 나서지 말아요.”성월이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성월이 사무실을 나서자 주현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모, 어떻게 됐어요? 대표님께 말씀 드렸어요?”성월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표님께서 이미 송가람 씨에게 다른 운전기사를 붙이셨어. 이미 결정된 일이야.”순간 주현은 조바심이 났다. “왜 갑자기 결정 난 거예요? 회사에서 요즘 새로 신입사원 모집했잖아요. 보안팀은 싫어할 거란 말이에요.”성월이 말했다. “대표님께서 주혁을 송가람 씨 운전기사로 전근시켰어. 지금 인사팀에 가서 그 일부터 처리해야 해.”그 말을 들은 주현이 투덜거렸다. “한현진 밑에 있던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본인 상사를 배신까지 했고요. 대표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사람을 딸 운전기사로 쓰시겠다는 거예요?”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린 성월이 주현을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성월은 주변을 확인하고 나서야 주혁의 팔을 내치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너 미쳤어? 여긴 회사야. 여기서 집인 줄 알고 그렇게 큰 소리로 대표님 뒷담화를 하는 거야?
직원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떤 직원은 회사의 조치가 꽤 인간적이라며 칭찬했고 또 어떤 직원은 아무리 화장실 청소라도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세제를 쓰진 말았어야 했다며 안전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 회사의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청소 직원이 화상을 입은 것으로 그쳤지만 만약 누군가 범행을 저지르려고 한다면 부식성이 강한 세정제는 범죄자에게 칼을 준비해준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꼴이었다. 의문을 제기하던 직원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한현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제야 실언했다는 것을 인지한 직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표님, 전 회사에서 조치를 제대로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요. 단지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저도 모르게 제일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본 거예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위험 요소요?”그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못... 못 들으셨어요?”“죄송해요.”한현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친구 문자에 답장하느라 못 들었어요.”직원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직원이 얼른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 며칠 동안 청소하시는 직원분들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잖아요. 그 일 때문에 다들 마음이 뒤숭숭해요.”한현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직원이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대표님. 다치신 분 중에 대표님이 아는 사람도 있어요. 전에 대표님 운전 기사셨던 주혁 기사님이요. 그 분이 제일 심하게 다치셨어요.”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기사님이요? 확실해요? 어제 볼 일 보러 갔다가 기사님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언제 다치신 거예요?”한현진의 말에 직원이 멍해졌다.“그럴 리가요. 며칠 전에 이미 다치셨어요. 대표님과 비슷한 시기에 휴가를 내셨어요.”한현진이 곰곰이 생각했다. “그날 제가 급한 일 때문에 길게 얘기를 나누진 못했어요. 손에 붕대 같은 건 본 기억도 없고 기사님께서도 저한테 그런 얘기는 없으셨는데... 심하게 다치셨어
막 전화를 끊으려던 그 순간, 박안수가 다시 불렀다.“아, 그리고...”“뭔데?”“오늘 경찰서에서 한현진과 마주쳤어.”서해금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한현진이 경찰서엔 왜?”“나도 자세한 건 안 물어 봐서 잘 몰라. 하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 혼자가 아니라 6, 7살 쯤 되는 어린 아이와 함께 왔었어.”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서해금이 또 물었다. “한현진이랑 얘기했어? 무슨 얘기했는데?”“괜히 의심할까봐 내가 경찰서에 간 이유를 사실대로 얘기했어. 한현진도 더 묻지 않았고.”우물 쭈물거리며 숨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당당하게 대답하는 편이 오히려 의심을 덜 사는 방법이었다. “그게 다야?”“응.”생각의 잠겼던 해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한테 손에 상처는 뭐라고 얘기했는데?”“회사에서 청소하다가 부식성 제품에 다친 거라고 했어.”서해금이 원망하듯 말했다. “왜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어. 회사에서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을 쓸 리가 없잖아.”“그렇다고 내가 집에서 다친 거라고 할 순 없잖아. 집에는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는데. 조사 협조 요청을 나한테만 하는 게 아니잖아. 게다가 그 두 사람은 거짓말을 아예 못 해. 만약 경찰이 내 손에 관해 묻기라도 한다면 바로 들켜 버리는 거잖아.”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자는 미쳤고 애는 귀가 먹었는데, 그런 병X도 제대로 통제 못 해?”순간 얼굴을 찡그린 박안수가 말했다. “말 그렇게 하지 마. 두 사람 불쌍한 사람들이야.”“뭐가 불쌍해. 도박쟁이 가정폭력범을 성실하고 부지런한데다 박학다식한 남편으로 바꿔줬는데. 우리한테 고마워해도 모자라.”서해금의 말에 박안수는 왠지 마음이 불편해졌다.너는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았던 서해금이 당부하며 말했다. “이만 끊어. 가람이한테 당신을 기사로 쓰라고 얘기하러 갈 거야. 소식 기다려.”박안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그래.”전화를 끊은 서해금은 아무리 생
“아니.”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경찰에겐 뭐라고 했어?”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대로 얘기했어.”“박안수!”서해금은 참기 힘들 정도로 화가 끓어올랐다. “지금이 농담할 때야?”“농담 아냐.”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그럼 내가 뭐라고 말할까? 네가 준 신분이니 난 당연히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할 수밖에. 그럼 내가 난 박안수라고 얘기했어야 해? 죽은지 27년도 더 된 사람이야. 박안수가 어떻게 돌아와?”그의 목소리엔 고통과 원망으로 가득 했다. 그 순간, 서해금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날 탓하는 거야?”말이 없던 상대방은 잠시 후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적 없어.”“박안수, 지금 날 탓하는 거잖아.”서해금이 공격적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 빚을 진 사람도 당신이고,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당신이었어. 당신이 가람이를 키울 능력이 없었던 거고, 당신이 가람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살길 바랐고, 그래서 나한테 도와달라고 사정한게 당신이었어.”“내가 당신한테 돈 안 줬어? 지금껏 내가 당신한테 준 돈이 얼만데. 당신은 얼마든지 해외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었어. 굳이 한주에 남겠다고 한 건 당신이야. 내가 당신에게 그럴 듯한 신분을 만들어주지 않았으면 당신이 무슨 명분으로 가람이 앞에 나타날 건데? 당신이 이렇게 당당하게 가람이를 만날 수나 있었을 것 같아?”목이 메인 남자는 한참만에야 눈을 감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 탓한 거 아냐. 난 그저 이렇게 조마조마 마음 졸이는 생활에 지쳤을 뿐이야. 난 집에서도 감히 옷을 못 벗어. 잠도 깊게 잘 수가 없어. 길에서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 사람은 날 보면서 반갑게 인사하는데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 그러면서도 아는 척, 반가운 척 인사를 해야 해. 심지어 아무리 아파도 검사도 못 해. X발, 병원도 가질 못한다고!”남자가 깊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네, 볼 일 봐요. 회사로 복귀하면 다시 얘기하죠.”한현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차는 이미 회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은 곧바로 로비로 향했다. 회사의 프런트가 한현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짧게 인사를 받은 엘리베이터에 탄 한현진은 사무실이 아닌 2층을 눌렀다. 회사 건물은 2층부터 화장실이 있었기에 1층엔 화장실이 없었다. 한현진은 아예 2층부터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역시 공교롭게도 2층에 도착한 한현진은 마친 청소 중인 직원과 마주쳤다. 근무 시간이 화장실엔 사람이 없었다. 직원은 바닥을 닦고 있었고 세면대와 멀지 않은 곳에 청소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엔 청소 용품으로 가득 했다. 한현진은 고개를 숙여 청소 용품을 확인했다. 청소차엔 수많은 플라스틱 통과 병이 있었고 그 안엔 전부 액체가 담겨져 있었다. 굳이 뚜껑을 열지 않아도 소독제의 냄새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 제품들은 그 어떤 별다른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부식성이 그렇게 강한 용액을 플라스틱 병에 담진 않았을 거 아냐.’“누구세요?”청소차를 관찰하는 한현진의 등 뒤로 사투리 억양이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현진이 몸을 돌리니 청소 중이던 직원이 보였다. 그 직원은 아래층 청소를 도맡아 하는 분이라 한현진을 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한현진이 화장실을 사용하려는 것이라 생각한 직원이 말했다. “아직 소독제를 쓰지 않았으니까 볼 일 보려면 얼른 봐요.”한현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청소차의 물건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주머니, 여쭤볼게 있어요. 화장실 청소를 하실 때 어느 브랜드의 농도가 얼마인 세정제를 사용하세요?”직원이 말했다. “도매 시장에서 파는 회색통이요. 커다란 거. 엄청 싸요.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사려고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이 항상 깨끗해서요. 저도 집에서 써보려고요.”청소 직원이 얼른 한현진을 말렸다. “절대 사지 마요. 변기의 때는 우리가 항상 솔로 조금씩 닦
또 다른 경찰이 물었다. “그래서 지장은 찍을 수 있어요?”“손이 그 지경인데 지장을 어떻게 찍어? 손을 보니까 지장은 무리인 것 같아서 포기했지. 어차피 지문도 완전히 회복하긴 힘들 것 같았어. 그래서 애들한테 홍채와 성문을 따라고 했어.”말을 마친 키 큰 형사가 한현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중에 회사에 가셔서 얘기 좀 하세요.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은 얼른 교체하라고요. 만약 누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고 그 제품으로 가해라도 하면 회사에서도 책임지셔야 해요.”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그 말에 얼른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알려주셔서 고마워요.”경찰서에서 나온 한현진은 내내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은서가 본 것은 주혁의 태반이나 점이 아니라 청소 용액에 부식되어 생긴 상처였다. 어차피 납치 사건의 범인은 이미 잡혀 경찰서에 있는데,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해서 상처를 치료도 하지 않고 경찰서로 달려온 것일까?한현진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 더 있었다. 회사에선 그런 고농도의 부식성 제품을 구매했을 리가 없었다. 형사의 말처럼 그런 제품은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한현진은 이시연의 연락처를 찾아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결음이 거의 끝나가도록 이시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곧이어 강한서에게 연락했다. 몇 초 후 통화가 연결되었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강한서가 아닌 민경하였다. 강한서는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어 전화를 받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민경하가 그의 휴대폰을 갖고 있었다. “사모님, 저예요. 대표님께서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시라 전화를 받기 힘든 상황이에요. 급한 일이시면 저에게 얘기하셔도 돼요. 급한 일이 아니면 회의가 끝나면 바로 전화 드리라고 대표님께 말씀 드릴게요.”“급한 건 아녜요. 제가 지금 급히 회사에 가봐야 하는데 아직 은서랑 같이 있어서요. 제가 조금 이따가 회사로 가는 길에 은서를 먼저 한
주혁은 한현진보다 조금 더 먼저 경찰서에 도착한 것 같았다. 한현진이 도착했을 땐 주혁은 입구에서 통화 중이었다. 안색이 어두웠지만 그는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대화하고 있었다. 그를 먼저 발견한 한현진이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주혁이 곧 경계하듯 고개를 돌렸다. 한현진을 본 주혁이 멈칫하더니 곧 전화를 끊고 다가왔다. “대표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한현진이 말했다. “일이 좀 있어서요. 기사님도 일 보러 오셨어요?”짧게 대꾸한 주혁이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8년 전 제 아들을 납치한 마지막 용의자가 잡혔다고 해서요. 조사에 협조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왔어요.”한현진이 놀라운 듯 물었다. “아드님이 납치되었었어요?”주혁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8, 9년 전 일이죠. 납치된 동안 납치범에게 맞아 치료 시간을 놓쳐 청력도 잃게 된 거예요. 그 사건을 맡은 형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사건이 종결되면 배상금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요.”얘기하는 동안 주혁은 아래쪽에서 자신의 손을 지긋이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그는 입술을 짓이기며 조용히 손바닥을 다리에 대고 말을 이었다. “곧 아이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주혁의 이야기가 한현진의 호기심을 자극하긴 했지만 그녀는 예의상 더는 그 일에 관해 묻지 않았다. 한현진은 대화주제를 돌리며 주혁에게 물었다. “제가 전에 추천해준 의사 분께 가 보셨어요?”주혁이 멈칫하며 대답했다. “아직이요.”한현진에게는 꽤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녀는 주혁이 최대한 빨리 아이를 데리고 검사를 받으러 가 인공 달팽이관을 제작할 것이라 여겼다. 아무래도 주혁은 규정을 어기고 부업을 할 만큼 누구보다 간절하게 수술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현진이 그에게 일반 병원보다 더 싼 가격에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의사를 추천해주었음에도 지금까지 검사조차 받지 않았다고 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요즘 아내가 몸이 안 좋아서요. 전근된 곳이 전처럼
하온이는 적합한 골수를 기다리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에게는 골수를 의식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 처음으로 하은이에게 기회가 찾아 왔을 때는 골수 의식의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하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의 집안은 이미 빚더미에 앉은 상황이라 아무리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도 수술비를 모을 수 없었다. 그러니 하온의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독하게 먹고 수술을 포기한 채 아득바득 돈을 모으며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하지만 곧 있을 줄 알았던 두 번째 기회는 그리 빨리 오지 않았다. 너무 오랜 기다림을 견뎌냈지만 하온의 몸은 이미 수술을 진행 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해져 있었다. 하온은 하루하루 날이 다르게 시들어 가는 꽃 같았다. 은서는 낮엔 하온이와 놀다가도 저녁엔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렸다. 하온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 은서는 강한서 품에 안겨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은서가 말했다. “삼촌, 저도 죽어요?”“삼촌, 우린 왜 이런 병에 걸린 거예요?”“삼촌 부자잖아요. 하온이 오빠가 수술할 수 있게 돈 빌려주시면 안 돼요? 제가 커서 돈 벌면서 갚을게요. 하온이 오빠 죽는거 싫어요.”강한서는 은서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은서는 아직 너무 어려서, 인생은 가끔 이렇게 운명의 장난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목숨으로 돈을 맞바꾸기는 쉬운 일이었지만 돈으로 목숨을 살 수는 없었다. 강한서는 은서가 아직까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의 은서는 고작 5살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한현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세상에는 가여운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니 혼자의 힘으로는 고작 얼마의 힘이나 보탤 수 있을까. 그렇다고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 기대하는 아이의 기대를 깨트릴 수도 없었다. 한현진은 정중하게 물었다. “정말 이거 전부 기부할 거야? 기부하면 은서에겐 아무 것도 없는 거야.”고개를 끄덕이던 은서가 곧 찬란한 미소를 지었다. “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