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진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병원이었다. 차미주가 침대 앞에서 졸고 있었다. 그녀가 일어나려고 보니 손에는 아직 주사바늘이 꽂혀 있었고, 머리 위에는 약액이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미주야......"입을 열자 목이 바짝 마르고 통증이 느껴진 그녀는 기침을 몇 번 했다. 그 소리에 벌떡 일어난 차미주는 다그쳤다."현진아, 너 어떻게 된 거야? 깜짝 놀랐잖아. 어떻게 쓰러진 거야?"차미주는 어젯밤 일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유현진은 설명 대신 급하게 물었다. "강한서는?""나 강한서를 못 봤는데. 어젯밤에 한씨 성을 가진 남자가 나한테 전화 와서 네가 쓰러져서 병원에 있으니 빨리 오라고 했어."한성우가 전화한 거야? 그럼 강한서는?유현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쓰러지기 전에 강한서를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났지만 기억은 거기에서 멈췄다. 분명 현장에 있었는데. 그럼 사람은?"미주야, 내 핸드폰은?""여기 있어."차미주는 휴대폰을 건넸다. "액정이 깨졌어. 난 전원을 켜보지 않았는데, 사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유현진이 건네 받은 휴대폰을 내려다 봤다. 액정이 깨져서 갈라졌다. 아마 어제 그 나쁜 놈이랑 충돌이 생기면서 떨어진 모양이다. 그녀는 전원을 켰다. 다행이 액정만 깨졌지 다른 건 정상이었다. 전원을 켜자 바로 메시지 하나가 떴다. 차이현이 보낸 문자였다. 그녀더러 오전 아홉시에 그의 작업실에서 와서 오디션을 보자는 내용이었다. 입술을 깨물던 유현진은 계속해서 아래로 문자를 확인했다. 모두 단톡방의 문자들이었고 강한서가 보낸 문자는 없었다. 실망이 밀려왔다. 그녀는 오랫동안 손가락을 강한서의 번호위에 올려놓고 있었지만 결국 통화 버튼을 클릭하지 않고 통화화면을 나와 버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차미주한테 물었다?"너 차 갖고 왔어?"차미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날 좀 데려다 줘."차미주가 깜짝 놀라면서 물었다."지금?""응."가는 길에 차미주는 유현진이 차이현의 요청으로 오디션을
그이가 누군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차미주는 알고 있었다. 감정에 냉담한 그로서는 사랑의 늪에 깊이 빠진 유현진의 생각이 가끔은 이해가 가지 않지만 둘도 없는 친구가 자신감을 되찾고 낙관적으로 변한 것에 대해서는 내심 기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지만 작업실의 외관을 보고 유현진은 자신이 잘못 찾아온 줄 알았다. 작업실이라는 곳에 글쎄 제대로 된 문 하나 없었다. 그나마 유리로 된 미닫이문이 있긴 했는데, 거기에 붙여놓은 '이'자는 'ㅇ'이 절반 찢어진 상태였다. 이를 본 차미주가 빈정댔다."차이현 사기당한 거야? 작업실이 이게 뭐야?"사실 환경을 보면 그다지 낙후한 건 아니었다. 그저 차이현의 명성에 비해 작업실이 지나치게 소박하다고나 할까?두 사람이 작업실에 들어서자 맞아주는 이 한 명 없었다. 엄청 큰 공간에 몇 사람밖에 보이지 않았다. 유현진은 지나가는 한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실례지만 차이현 감독님 지금 어디에 계세요?"한 손에 문서를 가득 안은 그 사람은 다른 한 손으로 안경다리를 받치고는 유현진을 아래위로 훑었다."없는데, 무슨 일로 온 거죠?""차 감독님이 아홉시 반에 오디션을 보겠다고 저더로 오라고 하셨어요?"그 사람은 눈썹을 찡그리면서 답했다. "오디션? 무슨 오디션이요? 전 들은 바 없는데."유현진이 답했다. "차 감독님이 어젯밤에 보낸 문자여서 아마 미처 말을 못했을 수 있어요.""그럼 어떤 작품에 어느 배역을 오디션 보러 온 거죠?""영롱전이요.""그럴 리 없는데!"그 사람은 바로 부인했다. "영롱전의 배역은 모두 정했어요. 뭘 또 오디션을 봐요. 보아하니 낯선 얼굴인데, 누가 찔러 넣은 거죠?""저는 신인이에요. 전에 제작진이 주도한 오디션을 본 적 있긴 한데, 아마 못 보셨을 거예요."유현진은 웬만하면 화를 잘 안 내는 유순한 성격을 가졌다."그럼 당시에 어느 배역을 오디션 본 거죠?""귀비역이요."이 말을 듣던 그 사람은 갑자기 놀란 기색을 보이면서 다시
나쁜 년! 방귀 뀐 놈이 성내도 유분수지.차미주가 막 입을 열려던 찰나, 유현진이 그를 잡아당겼다. "차 감독님, 방금 전에 이 언니가 감독님 안 오셨다길래 오늘 오디션을 까먹은 줄 알았어요."그러자 안색이 어두워진 여인은 급하게 핑계를 찾았다."감독님 언제 오셨어요?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오지 않았다고 해서 아직 안 나오신 줄 알았죠."차이현은 세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세 사람 모두 머뭇거리고 있자 그는 담담하게 한마디 했다. "다들 따라오세요."차이현은 세 사람을 데리고 사무실 같은 널직한 공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방금 전의 그 여인을 불러내고, 유현진과 차미주더러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 두 사람이 나가자 차미주는 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차미주가 인스타그램을 열심히 뒤지자 유현진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뭘 찾는 거야?"차미주가 말했다. "방금 전 저 여자 엄청 낯익은데 어디에서 봤던지 기억이 안나. 저 사람들이 올린 단체사진을 찾고 있어."차미주는 말이 끝나기 바쁘게 사진을 찾아냈다. "이 사람이군.""누구?""한세정."이름을 듣자 유현진이 눈썹을 찡그렸다. "이 이름 왜 이렇게 귀에 익지?""네가 녹음했던 인가? 영양가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드라마 있잖아. 그거 이 여자 찍은 거잖아. 자신이 바로 청춘 드라마 출신이면서 청춘 드라마를 폄하하고 있어. 진짜 웃겨!"차미주가 설명해주자 유현진도 기억이 떠올랐다. 한세정이라는 이름은 드라마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그런데 저 사람이 왜 차 감독 작업실에 있지?""그건 잘 모르겠는데, 듣는 데 의하면 한세정 남편이 엄청 대단하대. 한세정이 처음에는 쓰레기같은 드라마들만 찍었는데, 그래도 항상 자금줄이 끊기지 않았대. 그 후로 인터넷 드라마가 뜨면서 한세정은 탑 인기를 누리는 인터넷 소설의 저작권을 사서 한창 잘 나가고 있는 인기 배우들만 찾아다니면서 작품을 찍은 거지. 그리고 돈도 많이 벌고.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엄청 잘 나가고 있지. 나 저 여자랑 싸운
극 중 왕후는 임팩트가 강한 인물이다. 한편으로 치욕을 참아가면서 일을 도모해야 했고, 한편으로 남편의 사랑을 다른 여인들과 나눠야 하는 고통을 치뤄야 했으며, 또 한편으로 국모로서의 인자한 풍모를 갖춰야 했다. 설령 자식을 잃는 고통이 있더라도 왕의 면전에서는 고아한 자태를 유지해야 했다.그는 항상 국모로서의 본분으로 자신을 채찍질 해왔고, 왕실에서 사랑같은 감정을 가져서는 안되다고 수없이 곱씹으면서 살얼음판을 걷 듯 조심스럽게 한걸음씩 내디뎠다. 하지만 왕이 여주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여태껏 지켜왔던 모든 신념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배신으로 인한 미움이 밀물처럼 밀려와 왕후의 마음을 덮쳤다. 사랑하는데 가질 수 없는 그 안타까움이 미음으로 변한 것이 왕후역의 가장 큰 매력이다.유현진은 숨을 한번 깊이 들이쉬고는 바로 극 중 인물에 몰입했다.그의 목소리가 울리자 핸드폰만 보던 사람이 갑자기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유현진은 완전히 왕후배역에 몰입하여 아무런 도구의 도움이 없이도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대사가 또렷하게 들렸고, 감정이 과분하지도 부족하지 않았다. 특히 섬세한 연기가 포인트였다. 그가 왕자를 재우기 위해 달랠 때 보였던 그 웃음은 볼수록 소름이 끼쳤다.하지만 그가 악역이라는 것을 모르는 상황에서는 더없이 일상적인 웃음이었다.연기가 끝나자 현장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이때 차이현이 목을 가다듬더니 입을 열었다. "다들 자신의 생각들을 말해 봅시다."몇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기만 하면서 결국 조감독 한 명을 앞세웠다. 조감독은 목을 가다듬고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연기는 괜찮았는데, 너무 젊은 연기자라 기세가 부족할 수 있어요."차이현은 엄지로 턱을 받치고는 오랫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조감독의 의견은 현실적인 문제였다. 왕후의 역할은 서른이 넘은 여배우가 하기로 했었다. 그래야 분위기상 무거우면서도 일정한 인생 이력을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유현진은 얼굴이 너무 예쁘게
이 말에 유현진은 조금 놀랐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방윤아가 드라마 여주라고 했는데, 아닌가?차미주도 뭔가 수상했다. 방윤아가 여주라는 소식은 그가 동료들과의 단톡방에서 본 내용이다. 당시 여러 사람이 그 소식을 전송하고 난리였는데, 이제 와서 보니 다 거짓 정보였다. 이건 한세정의 짓임이 틀림없다.우선 분위기를 조성하여 팬들에게 기대를 주다가, 나중에 드라마에 출연하지 않으면 팬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으면서 화제거리가 되려는 타산이겠지. 수단 좋아! 한세정이 추천한 배우의 이름을 듣자 차이현이 입을 약간 오므렸다. "그 친구 작품을 보긴 했는데. "그러자 한세정이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어때요? 오디션 보겠다고 하면 지금 바로 연락해서 오라고 할게요. "그런데 차이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친구 연기는 기교밖에 없어요. "한세정은 차이현의 평가를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차이현이 덧붙인 한마디는 그의 예상을 빗나갔다."감정이 없잖아요. 눈물을 그렇게 많이 흘리는데 눈이 빨개지지도 않고 멀쩡하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아무리 멍청하더라도 차이현의 조롱하는 어투를 못 알아들을 한세정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자 다른 한 조감독이 나서서 얼어붙은 분위기를 완화하려 했다. "워낙 청춘 드라마는 팬들한테 보여주는 거니까 자신의 실력을 다 발휘하지 않았을 수도 있죠. "그러자 차이현이 발끈했다. "팬들 덕에 먹고 살면서 그 따위 작품으로 팬들에게 보답을 한다고요? "조감독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차이현은 업계에서 독설로 유명하다. 하지만 작품이 좋기 때문에 그의 독설에도 불구하고 저마다 그의 파트너가 되기를 원했다. 차이현 세 글자는 퀄러티의 보장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감독한 드라마 중 뜨지 않은 게 없었다. 하지만 한세정은 달랐다. 그의 작품은 더 많이는 자본시장을 겨냥했다. 드라마 방송 기간에 대량의 자본을 마케팅에 투입하여 팬들로부터 어마어마한 돈을 거둬갔다.
다른 제작진들도 차이현과 얘기를 잠시 나누다 자리를 떴다.곧 회의실에는 유현진과 차미주, 차이현, 그리고 차이현의 비서만이 남아있었다.사실, 이 바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계약서와 별다를 게 없었다. 단지 을의 조항에 두 가지가 추가되었다.하나는 계약 기간 내에 드라마 홍보를 위해 인스타그램 계정을 다시 하나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홍보 기간 내에 절대 다른 일을 하면 안 되는 것이다.유현진의 전 직업을 염려해서 새로 만든 조항인 듯했다.그녀에게 ‘선셋 스타’는 비장의 카드와도 같은 존재였다. 너무 일찍이 선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유현진이 사인하려고 하자 차미주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현진아, 출연료가 너무 적은 거 아니야?”드라마 전체 출연료가 세전으로 4억이었다. 촬영 기간은 120일이었다.분량이 적은 배역은 아니었기에 출연료가 낮은 편이긴 했다.세금을 내야 하고 또 스태프를 따로 고용해야 할 뿐만 아니라 촬영장에서의 지출, 또 홍보할 때의 비용까지 덜어내면 유현진은 돈을 얼마 벌지 못할 것이다.유현진도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먼저 같은 배를 타야 하지 않겠어? 평생 이 돈만 버는 것도 아닐 테고. 만약 이 드라마가 대박을 터트리면 나를 스카우트하려는 작품도 많아지고 제작사들도 줄을 서겠지.”차이현이 차 한 모금을 마시며 유현진의 사인을 기다렸다.‘이 사람들이, 내가 귀먹은 줄 아나?’회의실에는 에코가 울렸기도 하고 네 사람밖에 없었기에 아무리 두 사람이 목소리를 낮춘다고 해도 그녀들의 대화를 못 들을 수가 없었다.차미주도 유현진의 말을 듣더니 일리가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사람은 역시 멀리 내다봐야 해.’유현진은 곧 사인을 하고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차이현에게 손을 내밀었다.“감독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차이현은 그녀와 악수를 하며 덤덤하게 말했다.“앞으로 같은 배를 타는 사이인데 날 그렇게 어려워하지 않아도 돼.”유현진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바로
유현진은 입술을 씰룩거렸다.“장난치지 말고 빨리 전화 받으라고 해요.”“현진 씨,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못 믿으시겠으면 한서한테 전화해 봐요. 사람이 혼수상태에 빠졌는데 어떻게 전화 받을 수 있겠어요? 어젯밤 그 두 X끼가 겁도 없이 칼을 들고 있었어요. 작정하고 달려들었는지 경찰이 아니었으면 한서는 죽을 뻔했다고요. 저 그렇게 많은 피는 처음 봤어요.”유현진은 가슴이 타들어 갔다. 어젯밤 그녀는 정신을 잃었기에 사건의 경과를 전혀 몰랐다. 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날 때, 옷자락에 피가 묻어있긴 한 것 같았다.‘커피인 줄 알았는데 설마 피었어?’“현진 씨, 얼른 오세요. 한서가 정말 깨어나지 못할까 봐 두렵네요.”그러고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유현진이 다시 전화를 걸어보니 전화는 통하지 않았다. 강한서의 휴대폰도 전원이 꺼진 상태였다.유현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차미주는 가게 안에서 그녀를 불렀다. 유현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돈을 물고는 차미주에게 말했다.“집에 일이 좀 있어서, 난 가봐야겠어. 너 천천히 골라,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하얗게 질린 그녀의 얼굴을 보며 차미주가 다급하게 물었다.“무슨 일인데? 많이 급해? 내가 같이 가줄까?”유현진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러고는 문 앞에서 택시를 잡아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가는 길에 휴대폰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한성우인 줄 알았으니 발신자가 유상수인 걸 확인하고는 미간을 구겼다.머릿속이 이미 뒤죽박죽이었기에 유현진은 휴대폰을 무음 모드로 하고는 휴대폰이 진동하기를 내버려 뒀다.그녀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마침 신미정과 강민서와 마주쳤다. 그녀들 옆에는 유현진의 아버지인 유상수도 있었다.유현진은 그 세 사람이 왜 같이 병원에 나타났는지 알아내지도 못했는데 강민서가 그녀에게 달려들며 물었다.“오빠는? 우리 오빠 어떻게 됐어?”유현진이 입술을 꼭 다물며 말했다.“몰라, 나도 방금 도착했어.”그 말을 들은 강민서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방금
이때,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거기서 뭐해?”유현진이 흠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병실 문 앞에는 환자복을 입은 강한서가 팔을 깁스한 채 덤덤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한성우가 서 있었다.둘의 모습을 보더니 유현진은 어이가 없었다.“오빠!”강민서가 강한서에게 달려가며 말했다.“나 엄청 놀랐단 말이야!”사실 강한서가 원래 709호실에 있었던 건 맞다. 하지만 709호실에 햇빛이 잘 안 들어 강한서가 아침에 704호실로 바꿨다. 병원 시스템에 입력되지 않았는지 강한서의 병실이 아직 709호로 되어있었고 그 때문에 이 사달이 난 것이다.“팔은 왜 그래?”신미정은 겨우 감정을 추스르며 말했다.강한서가 말하기도 전에 한성우가 대답했다.“어젯밤 경찰을 도와 나쁜 놈을 잡다가 그놈들한테 당했어요.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일곱 바늘이나 꿰맸어요.”‘일곱 바늘 꿰맸다고?’유현진은 두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강한서가 덤덤하게 말했다.“크게 다치지 않아 알릴 생각이 없었는데 성우가 너무 호들갑을 떨어서.”한성우는 강한서가 잠든 틈을 타 친한 친구들이 있는 여러 단톡방에 보내려고 그가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사진을 찍었는데 그만 잘못 눌러 동창 단톡방에 보냈다. 마침 누군가가 그 사진을 캡처하고는 강민서가 있는 단톡방에 전달했다.신미정이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일곱 바늘이나 꿰맸는데 크게 다치지 않았다니!”언성이 높아질까 봐 한성우는 바로 상황을 수습했다.“먼저 병실로 돌아가서 천천히 얘기하는 건 어때요? 돌아가신 분은 존중해야 하지 않겠어요?”확실히 언성을 높이며 얘기하기 마땅한 곳은 아니었다.강한서가 유현진을 힐끔 봤다. 유현진이 가만히 있자 그는 입술을 얇게 오므리며 말했다.“언제까지 여기서 무릎 꿇을 생각인데?”유현진은 어이가 없었다.‘내가 무릎 꿇고 싶어서 꿇냐고? 지금도 무릎이 엄청 아프단 말이야.’강민서가 아니꼬운 얼굴로 말했다.“창피하게 이게 뭐야. 모르는 사
염색은 한 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잘생긴 포즈로 거울 셀카를 찍은 진윤이 강한서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다시 시작.]강한서는 사진 속 검은 머리에 순해 보이는 젊은이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읽던 책을 내려놓은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왜?”강한서가 진윤의 셀카를 한현진에게 보여주었다. 한현진 역시 사진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금발에 눈썹도 살짝 밀어버리는 스타일을 고집하더라니. 눈썹 피어싱까지 빼니까 그냥 아기였네. 너무 귀엽게 생겼잖아. 훈이보다 어려 보여.”강한서도 한현진을 따라 웃었다. “선배도 그렇잖아. 50살도 넘은 분이 아직도 30대처럼 보이니까. 성우가 처음 선배를 봤을 때 형이라고 불렀다가 예의 없다고 혼났어. 그러다 다른 애들도 형이라고 하니까 말이 없더라고.”그 장면을 상상한 한현진은 웃음을 멈추질 못했다. “역시 동안이 좋아. 50대가 되어서도 얼굴 하나로 젊은이들의 마음을 살 수 있잖아. 난 왜 동안이 아닐까?”그 말에 멈칫한 강한서가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누구 마음을 사려고?”한현진이 눈웃음을 지었다. “강 대표님, 몇 십 년 후의 일도 미리 질투하실 거예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는 아냐.”한현진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정말?”강한서가 확신에 찬 말투로 대답했다. “안 해, 질투.”예상 밖의 대답에 호기심이 불타오른 한현진이 물었다. 몇 십 년 후엔 사랑보다 정으로 사는 거라 신경 쓰지 않는 거야?”강한서가 대답했다. “그건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어.”“뭔데?”강한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대들은 그저 첩에 불과해.”멍해졌던 한현진이 폭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강한서를 품에 안고 뽀뽀 세례를 날렸다. “진지한 얼굴로 실없는 농담을 던질 때 정말 귀여워 죽겠다니까.”강한서가 힐끔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이런 걸 바로 조강지처의 자신감이라고 하는 거야.”한
순간 불쾌한 기분에 빠진 진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아마추어 경기는 사석에서 주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전문적인 레이싱 경기도 아니었다. 오직 속도에서 주는 쾌락만을 추구하는 경기였다. 상금이 높은 만큼 위험부담도 컸다. 하지만 진윤이 경기에 참가한 것은 상금 때문이 아니었다. 돈 걱정 없이 산 진윤이 목숨 건 돈에 욕심낼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단지 경기의 주최 측에 F1 레전드 인물도 있다는 소식에 우승을 하면 그 사람과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참가한 것이었다. 진윤은 그의 팀원들 역시 레이싱에 대한 열정으로 함께 지금까지 뭉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신을 무시하는 친구의 말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진윤처럼 레이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프로 선수가 되길 꿈꾸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이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레이싱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지니고 있는 상금이라는 거대한 유혹일 수도 있었다. 팀원 중 위험한 내기 경기에 참석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진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경주마처럼 미친 듯이 산길을 휘저었다. 목숨을 내걸고 재벌들의 도박판에서 기꺼이 주사위가 되었다. 아차 하는 사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경기에서 이기면 그만큼 어마어마한 상금이 주어졌다. 불행히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고 해도 그의 가족들은 놀라운 액수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으니 위험을 감수하고 뛰어드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처음으로 팀원에게 그 얘기를 들었을 때의 진윤은 충격에 빠졌었다. 하지만 팀원들은 마치 일상적이 대화를 하듯 당연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의 진윤은 그저 그들이 비슷한 일을 너무 많이 들은 탓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들은 그렇게 위험 부담마저도 부러웠었던 같았다. 팀원 중 대부분의 사람에게 레이싱은 그저 짧은 시간 사이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도구에 불과했다. 뜬 눈으로 꿈을 꾸고 있는 진윤이야말로 그들에겐 이상한 인간
“아들. 네가 공부가 하고 싶다면 복수 전공이 아니라 10개 전공을 배우겠다고 해도 엄마는 찬성이야. 엄마 지금 너무 기뻐. 만약 농담하는 거라면 지금 당장 거짓말이었다고 얘기해. 안 그럼 엄마는 진심으로 받아들일 거야.”진윤이 웃으며 홍혜림의 팔을 끌어안았다. “엄마. 저도 형처럼 엄마의 자랑이면 안 돼요?”홍혜림이 진윤의 금발을 어루만졌다. “너도 예전엔 엄마의 자랑이었지. 금발로 염색한 후로는 자랑이 아니게 되었지만.”진윤: ...“그럼 다시 염색할게요.”홍혜림이 얼른 헤어숍 VIP카드를 건네며 말했다. “얼른 가. 여긴 새벽 12시가 되어야 영업이 끝나는 곳이야. 지금 가면 아직 시간 있어.”진윤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홍혜림이 얼마나 진윤의 금발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네, 네, 네. 지금 갈게요.”외투를 챙겨주며 문앞까지 배웅 나온 홍혜림이 진윤에게 물었다. “아들. 조금 전에 누구한테 들은 말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잖아. 그 분 너희 교수님이셔?”“우리 교수님은 아녜요. 하지만 좋은 스승님이긴 해요.”‘사기꾼이기도 해. 하지만 꽤 능력 있는 사기꾼.’홍혜림이 호기심에 가득 찬 말투로 물었다. “그 분 한 마디에 바로 생각이 바뀐 거야? 내가 너한테 얼마나 많이 얘기했었는데, 그땐 들은 척도 안 하더니.”진윤이 말했다. “절 데리고 20km를 뛰었어요. 자길 이기면 날 뉴벨리 팀에 입단시켜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나보다 10살이나 많아서 나이 많은 어르신한테 지겠어? 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졌어요.”진윤이 창피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저보다 빨리 뛴 건 아니었어요. 제가 적을 만만하게 생각한 거죠. 하지만 무서운 사람이에요. 지독하게 강해서 무서운 사람. 그 사람은 못 해낼 일이 없는 것 같아요. 입단은 무슨, 그냥 그 기회를 벌어 저에게 설교를 하려던 것뿐이었어요.”“내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레이싱을 그만두게 하려고. 처음엔 엄마가 보낸 스파이인 줄 알았다니까요. 하지만
진윤에게 묻는 홍혜림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얘기해. 엄마 괜찮아. 파산이라도 하지, 뭐. 돈은 없으면 다시 벌 수 있어. 아빠가 안 된다고 하면 쫓아내면 돼.’처음으로 느끼는 죄책감에 진윤은 고개를 숙였다. 홍혜림이 비록 관리를 잘 하긴 했지만 귀밑머리는 이미 하얀 서리가 내려있었다. 큰형은 어려서부터 얌전하고 말을 잘 듣는 아이라 부모님의 속을 썩인 적이 없었다. 유독 진윤이 고집을 부리며 걸음마를 뗄 때부터 뒤에서 마음을 졸이게 했다. 진윤의 수능성적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 그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 전공은 전부 부모님이 수많은 돈을 들여 기획한 결과였다. 하지만 진윤은 본인이 좋아하지 않는 전공이라는 이유로 자포자기하며 지냈다. 부모님이 통제욕이 강하다는 것은 그저 진윤이 그들에게 씌워놓은 프레임에 불과했다. 정말 부모님의 통제 속에서 살아가는 친구들은 매일 모든 스케줄, 심지어 먹는 음식까지 전부 부모님에게 보고해야 했다. 그런 사람에 비하면 그의 부모님은 그저 애교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레이싱을 좋아하는 진윤이 못마땅했지만 그럼에도 그저 설득하는 것이 전부였다. 홍혜림은 단 한 번도 진윤의 레이싱 장비를 부순 적이 없었다. 매번 더는 새 장비를 사주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 다짐도 진윤의 애교 몇 번에 곧 무너지고 말았다. ‘언제까지 실망만 안겨드릴 순 없잖아. 나도 엄마의 자랑이 되어야지 않겠어?’“엄마. 저 복수 전공하고 싶어요. 전 레이싱이 좋아요. 도무지 포기가 안 돼요. 저 실력 그 정도 아닌 거 알아요. 하지만 자동차 관련한 전공을 배워보고 싶어요. 지금 전공은 절대, 두 번 다시는 F학점 받는 일 없을 거라 약속 드려요. 복수 전공하게 해주면 안 돼요?”홍혜림: ??“그거 말고 다른 건 없어?”진윤이 멍해졌다. “네?”홍혜림이 말했다. “네가 나에게 하려는 말이 그거야?”진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 그게 아니면요?”홍혜림: “사람을 치거나, 교통사고를 낸 게 아니고?”
눈에 띄게 변한 진윤의 모습을 홍혜림은 믿을 수가 없었다.집 바로 앞이 학교라 진윤은 기숙사 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집에 자주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집에서 레이싱 게임을 할 때마다 부모님의 잔소리가 끊이질 않아 진윤은 큰형 아파트에 몰래 숨어있는 것을 좋아했다. 진윤의 큰형은 일 때문에 그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9살이나 더 많은 그의 형은 가끔 부모님보다 더 진윤을 아끼기도 했다. 심지어 가끔은 진윤의 편을 들어 그의 비밀을 지켜주기도 했다. 큰형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러니 제발 눈치껏 본가로 들어오라고 홍혜림은 몇 번이고 진윤에게 얘기했었다. 사실 예비 며느리는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진윤을 본가로 불러들이는 이유는 진윤이 곁에 없으니 도무지 관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윤은 그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매번 홍혜림이 같은 얘기를 꺼낼 때마다 그는 두 귀를 닫고 못 듣는 척 연기했다. 하지만 이번엔 홍혜림이 먼저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진윤 스스로 본가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진윤에 홍혜림은 혹시 형제가 싸우기라도 한 걸까 전화를 했지만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에 홍혜림은 생각했다. ‘이 자식 또 무슨 사고라도 치고 돌아와서 얌전한 척 연기하는 거 아냐?’‘교통사고라도 내서 배상해 줘야 하는 건가? 아니면 레이싱 카가 망가져서 새 차를 살 돈이 필요한 건가?’‘설마 사람을 친 건 아니겠지?’진윤이 집에서 열심히 공부할수록 홍혜림은 점점 더 사람을 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매일 밤 아무 일도 없는 척 진윤의 방 앞을 서성이며 생각했다. ‘먼저 잘못을 인정하면 요즘 얌전하게 지냈던 걸 정상참작해서 욕을 좀 덜해야겠어.’하지만 3일이 지나도록 진윤은 홍혜림을 부르지 않았다. ‘이상해.’‘너무 이상하잖아!’‘설마 사람을 친 것보다 더 큰 사고는 아니겠지?’‘대체 얼마를 배상해야 하는 거야?’1 주일이 지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홍혜림은 진윤의
진윤: ...강한서가 진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싫다면서 현 상황을 바꿔보려고 하지도 않은 거야?”진윤: ...‘왜 선생님께 혼나는 기분이 드는 거지? 진지하게 핵심만 꼬집고 있잖아.’입을 달싹이던 진윤은 변명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진윤은 그동안 어떻게 반항해야할지,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강한서가 말했다. “네 인생은 네 거야. 네가 열심히 살든, 대충 살든 네 하루하루는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어. 네 태도에 따라 싫었던 그 경험들이 사라지지 않아. 단지 네가 싫다는 이유로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않고 대충 흘려보냈을 뿐 그것들은 계속 존재해.”“대충 공부해서 대충 졸업하면 또 대충 취직이나 하겠지. 아니면 아예 너희 회사로 입사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다음에? 그렇게 평생을 대충 흘려보낼 거야? 그게 네가 원하는 인생이야?”멍하니 강한서를 쳐다보던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아뇨.”부모님이 선택해준 전공이 싫어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얼른 졸업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강한서의 말처럼 졸업 후엔? 전공에 맞는 직업을 찾아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갈까, 아니면 부모님 회사에 입사해 되는대로 살아갈까. 어떤 선택이든 그건 진윤이 원하는 인생은 아니었다. 4년이란 시간을 허무히 흘러 보내고 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전 이미 3학년이에요. 전과를 하기엔 늦었잖아요. 이젠 뭘 하려고 너무 늦은 것 같아요.”속상한 듯 대답하는 진윤의 말에 한현진이 말했다. “진윤 씨는 완전 MZ세대잖아요. 이제 갓 이십 대 초반인데 뭘 해도 늦지 않은 나이예요. 너무 빨리 본인의 가능성을 단정 짓지 말아요. 60세에 대학생이 됐다는 기사 못 봤어요?”“진윤 씨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도 늦었다고 생각 안 하는데, 진윤 씨가 왜 겁을 내요?”“전...”입술을 달싹이던 진윤이 한참이 지나서야 한숨을 내뱉었다. “두 사람 문제아 갱생
진윤은 6분 차이로 강한서에게 패배했다. 그가 결승점에 도착했을 때, 강한서는 이미 안정적인 호흡을 되찾고 있었다. 결승점을 통과한 진윤은 다리가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려 했다. 강한서가 다가가 그런 진윤을 일으켜 세웠다. “서서 쉬다가 나중에 앉아.”말하며 물뚜껑을 따 진윤에게 건넸다. “천천히 마셔.”진윤은 이 상황이 창피하기 그지없었다. 처음엔 강한서를 얕보고 경기에 진 자신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챙겨주는 강한서를 보며 자신이 너무 유치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숨을 몰아쉬며 강한서가 내민 물을 받은 진윤은 아무 말 없이 꿀꺽꿀꺽 물을 삼켰다. 한현진이 강한서에게 또 물을 한 병 가져다주며 나지막이 물었다. “넌 괜찮아?”강한서가 머리를 가로 저었다. “괜찮아.”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비록 꾸준히 러닝을 하고 있었지만 하프 마라톤을 뛴 건 오랜만이었다.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진윤을 쳐다보았다. 충격이 꽤 컸는지 입술을 삐죽이고 있는 아이는 풀이 죽은 얼굴로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기대했던 것만큼 큰 실망이 안겨왔다. 진윤은 심지어 주호를 앞에 두고도 대화를 나눌 의욕조차 찾지 못했다. “가자. 쉬다가 같이 밥이나 먹어.”진윤이 시선을 올렸다. “이겼다고 저랑 축하라도 하시게요?”강한서가 웃으며 대답했다. “조 회장님 소개해줄게.”멈칫한 진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제가 졌잖아요.”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졌으니까 팀에 입단할 수는 없지만 소개는 받을 수 있잖아.”강한서가 말을 이었다. “아니면 소개받고 싶지 않은 거야?”“아뇨!”다급하게 대답하던 진윤이 곧 쑥스러운 듯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 뭐야... 형님 그 나이에 체력이 아직도 좋으시네요. 제가 졌어요. 인정해요. 형님이 이기셨어요.”진윤의 말에 강한서가 멈칫했다. “그 나이라니?”곧 불혹의 나이라고 대답하려던 진윤은 강한서 뒤에서 눈짓을 보내는 한현진의 모습에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아부했다.
한현진은 한참을 멍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그녀는 강한서에게 그날의 일에 관해 물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강한서는 본인 덕에 한현진이 월급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얘기하지 않았다. 그러니 한현진은 줄곧 월급을 전부 돌려받을 수 있었던 건 주최 측에서 한현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밝혀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보니 꽤 단순한 생각이었다. 모터쇼라는 큰 활동에 주최 측에서 안내 요원까지 신경 쓸 리가 없었다. 알바의 잘못이든 아니든, 그건 그들의 관심 밖의 얘기였다. 문제가 생겼을 때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제일 간단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강한서였어... 강한서가...’“강한서 그 자식, 마음을 꼭꼭 숨기기도 했네. 이미 그때부터 눈 여겨 보고 있었던 거네요.”감탄하는 주한과 달리 한현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선배님, 강한서가 절 도와줬을 땐 아무런 사심도 없었을 거라고 전 생각해요. 그날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이 저든 아니든, 한서는 그렇게 했을 거예요.”당시 강한서는 한현진을 부르지도, 인사도 하지 않았었다. 심지어 시간이 흘러 한현진이 다시 그 얘기를 꺼냈지만 그는 여전히 솔직한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고 그 일을 핑계로 점수를 더 받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한현진은 확신할 수 있었다. 강한서가 한현진을 도운 건 절대 사심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조한이 웃으며 말했다. “사심이 있었든 아니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어쨌든 두 사람 인연은 삼심할 매가 쇠줄로 꽉 묶어놓은 것 같네요. 인연이 깊어도 너무 깊어.”한현진도 그 말에 깊이 공감하는 바였다. 만약 한현진이 죽은 그 태아와 바뀌지 않았다면 그녀와 강한서는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둘도 없는 사이였을 것이다. 바뀌었어도 결국은 돌고 돌아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하늘이 이어준 인연이 틀림없었다. 진윤은 빠른 속도로 첫 바퀴를 완주했다. 강한서는 진윤과 2km정도 뒤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바퀴부터 진윤의 속도는 점점 느려졌지만 강한서는 여전
조한이 선글라스를 벗자 지적인 이미지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입꼬리를 올려 씩 웃으며 말했다. “학교 다닐 땐 선배라고 부르더니 졸업하니까 회장님이야?”강한서가 한현진을 향해 설명했다. “대학원 선배님이셔. 같은 지도교수님이었거든.”한현진이 조한의 비위에 맞게 대답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역시, 제수씨가 한서보다 낫네.”한현진과 인사 몇 마디를 나눈 조한이 강한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넌 나이가 몇인데 어린애랑 따지고 그래?”강한서가 말했다. “선배보다는 어려요. 제 아내는 아직도 대학생 같다고 하던데요.”조한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제수씨가 아이 달래듯 잘 하나봐.”한현진: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진윤도 도착했다. 강한서가 승부를 인정하지 않을까 걱정된 그는 증인이 되어줄 친구 두 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기세등등하게 걸어오던 진윤은 한현진을 보더니 곧바로 우물쭈물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더니 조한을 발견하고는 말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진윤은 그제야 강한서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정말 날 뉴벨리 팀에 추천해줄 수 있나봐.’조한이 장난스러운 말투로 진윤을 응원했다. “청년, 저 자식을 쓰러뜨릴 수 있다면 내가 팀장 자리도 고민해볼게요.”한현진도 진윤을 향해 말했다. “파이팅! 결승점에서 기다릴게요.”두 사람의 응원에 후끈 달아오른 진윤은 마음속으로 각오를 다지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진윤에게 한현진과 조한은 그야말로 우주대스타였다. 그러니 그들의 응원은 그에게 흥분제와도 다를 바가 없었다. 이 경기에서 진다는 것은 자신의 우상 앞에서 망신을 당하는 일이었다. 준비 운동을 마치고 시작을 알리는 경보음이 울리자 진윤은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어린 나이라 그런지 폭발력이 대단했다. 그는 곧 강한서와 차이를 벌리며 앞서나갔다. 강한서는 진윤의 속도를 따라 빨리 달리지 않고 꾸준히 똑같은 페이스를 유지했다. 한현진은 망원경을 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