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진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병원이었다. 차미주가 침대 앞에서 졸고 있었다. 그녀가 일어나려고 보니 손에는 아직 주사바늘이 꽂혀 있었고, 머리 위에는 약액이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미주야......"입을 열자 목이 바짝 마르고 통증이 느껴진 그녀는 기침을 몇 번 했다. 그 소리에 벌떡 일어난 차미주는 다그쳤다."현진아, 너 어떻게 된 거야? 깜짝 놀랐잖아. 어떻게 쓰러진 거야?"차미주는 어젯밤 일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유현진은 설명 대신 급하게 물었다. "강한서는?""나 강한서를 못 봤는데. 어젯밤에 한씨 성을 가진 남자가 나한테 전화 와서 네가 쓰러져서 병원에 있으니 빨리 오라고 했어."한성우가 전화한 거야? 그럼 강한서는?유현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쓰러지기 전에 강한서를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났지만 기억은 거기에서 멈췄다. 분명 현장에 있었는데. 그럼 사람은?"미주야, 내 핸드폰은?""여기 있어."차미주는 휴대폰을 건넸다. "액정이 깨졌어. 난 전원을 켜보지 않았는데, 사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유현진이 건네 받은 휴대폰을 내려다 봤다. 액정이 깨져서 갈라졌다. 아마 어제 그 나쁜 놈이랑 충돌이 생기면서 떨어진 모양이다. 그녀는 전원을 켰다. 다행이 액정만 깨졌지 다른 건 정상이었다. 전원을 켜자 바로 메시지 하나가 떴다. 차이현이 보낸 문자였다. 그녀더러 오전 아홉시에 그의 작업실에서 와서 오디션을 보자는 내용이었다. 입술을 깨물던 유현진은 계속해서 아래로 문자를 확인했다. 모두 단톡방의 문자들이었고 강한서가 보낸 문자는 없었다. 실망이 밀려왔다. 그녀는 오랫동안 손가락을 강한서의 번호위에 올려놓고 있었지만 결국 통화 버튼을 클릭하지 않고 통화화면을 나와 버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차미주한테 물었다?"너 차 갖고 왔어?"차미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날 좀 데려다 줘."차미주가 깜짝 놀라면서 물었다."지금?""응."가는 길에 차미주는 유현진이 차이현의 요청으로 오디션을
그이가 누군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차미주는 알고 있었다. 감정에 냉담한 그로서는 사랑의 늪에 깊이 빠진 유현진의 생각이 가끔은 이해가 가지 않지만 둘도 없는 친구가 자신감을 되찾고 낙관적으로 변한 것에 대해서는 내심 기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지만 작업실의 외관을 보고 유현진은 자신이 잘못 찾아온 줄 알았다. 작업실이라는 곳에 글쎄 제대로 된 문 하나 없었다. 그나마 유리로 된 미닫이문이 있긴 했는데, 거기에 붙여놓은 '이'자는 'ㅇ'이 절반 찢어진 상태였다. 이를 본 차미주가 빈정댔다."차이현 사기당한 거야? 작업실이 이게 뭐야?"사실 환경을 보면 그다지 낙후한 건 아니었다. 그저 차이현의 명성에 비해 작업실이 지나치게 소박하다고나 할까?두 사람이 작업실에 들어서자 맞아주는 이 한 명 없었다. 엄청 큰 공간에 몇 사람밖에 보이지 않았다. 유현진은 지나가는 한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실례지만 차이현 감독님 지금 어디에 계세요?"한 손에 문서를 가득 안은 그 사람은 다른 한 손으로 안경다리를 받치고는 유현진을 아래위로 훑었다."없는데, 무슨 일로 온 거죠?""차 감독님이 아홉시 반에 오디션을 보겠다고 저더로 오라고 하셨어요?"그 사람은 눈썹을 찡그리면서 답했다. "오디션? 무슨 오디션이요? 전 들은 바 없는데."유현진이 답했다. "차 감독님이 어젯밤에 보낸 문자여서 아마 미처 말을 못했을 수 있어요.""그럼 어떤 작품에 어느 배역을 오디션 보러 온 거죠?""영롱전이요.""그럴 리 없는데!"그 사람은 바로 부인했다. "영롱전의 배역은 모두 정했어요. 뭘 또 오디션을 봐요. 보아하니 낯선 얼굴인데, 누가 찔러 넣은 거죠?""저는 신인이에요. 전에 제작진이 주도한 오디션을 본 적 있긴 한데, 아마 못 보셨을 거예요."유현진은 웬만하면 화를 잘 안 내는 유순한 성격을 가졌다."그럼 당시에 어느 배역을 오디션 본 거죠?""귀비역이요."이 말을 듣던 그 사람은 갑자기 놀란 기색을 보이면서 다시
나쁜 년! 방귀 뀐 놈이 성내도 유분수지.차미주가 막 입을 열려던 찰나, 유현진이 그를 잡아당겼다. "차 감독님, 방금 전에 이 언니가 감독님 안 오셨다길래 오늘 오디션을 까먹은 줄 알았어요."그러자 안색이 어두워진 여인은 급하게 핑계를 찾았다."감독님 언제 오셨어요?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오지 않았다고 해서 아직 안 나오신 줄 알았죠."차이현은 세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세 사람 모두 머뭇거리고 있자 그는 담담하게 한마디 했다. "다들 따라오세요."차이현은 세 사람을 데리고 사무실 같은 널직한 공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방금 전의 그 여인을 불러내고, 유현진과 차미주더러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 두 사람이 나가자 차미주는 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차미주가 인스타그램을 열심히 뒤지자 유현진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뭘 찾는 거야?"차미주가 말했다. "방금 전 저 여자 엄청 낯익은데 어디에서 봤던지 기억이 안나. 저 사람들이 올린 단체사진을 찾고 있어."차미주는 말이 끝나기 바쁘게 사진을 찾아냈다. "이 사람이군.""누구?""한세정."이름을 듣자 유현진이 눈썹을 찡그렸다. "이 이름 왜 이렇게 귀에 익지?""네가 녹음했던 인가? 영양가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드라마 있잖아. 그거 이 여자 찍은 거잖아. 자신이 바로 청춘 드라마 출신이면서 청춘 드라마를 폄하하고 있어. 진짜 웃겨!"차미주가 설명해주자 유현진도 기억이 떠올랐다. 한세정이라는 이름은 드라마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그런데 저 사람이 왜 차 감독 작업실에 있지?""그건 잘 모르겠는데, 듣는 데 의하면 한세정 남편이 엄청 대단하대. 한세정이 처음에는 쓰레기같은 드라마들만 찍었는데, 그래도 항상 자금줄이 끊기지 않았대. 그 후로 인터넷 드라마가 뜨면서 한세정은 탑 인기를 누리는 인터넷 소설의 저작권을 사서 한창 잘 나가고 있는 인기 배우들만 찾아다니면서 작품을 찍은 거지. 그리고 돈도 많이 벌고.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엄청 잘 나가고 있지. 나 저 여자랑 싸운
극 중 왕후는 임팩트가 강한 인물이다. 한편으로 치욕을 참아가면서 일을 도모해야 했고, 한편으로 남편의 사랑을 다른 여인들과 나눠야 하는 고통을 치뤄야 했으며, 또 한편으로 국모로서의 인자한 풍모를 갖춰야 했다. 설령 자식을 잃는 고통이 있더라도 왕의 면전에서는 고아한 자태를 유지해야 했다.그는 항상 국모로서의 본분으로 자신을 채찍질 해왔고, 왕실에서 사랑같은 감정을 가져서는 안되다고 수없이 곱씹으면서 살얼음판을 걷 듯 조심스럽게 한걸음씩 내디뎠다. 하지만 왕이 여주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여태껏 지켜왔던 모든 신념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배신으로 인한 미움이 밀물처럼 밀려와 왕후의 마음을 덮쳤다. 사랑하는데 가질 수 없는 그 안타까움이 미음으로 변한 것이 왕후역의 가장 큰 매력이다.유현진은 숨을 한번 깊이 들이쉬고는 바로 극 중 인물에 몰입했다.그의 목소리가 울리자 핸드폰만 보던 사람이 갑자기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유현진은 완전히 왕후배역에 몰입하여 아무런 도구의 도움이 없이도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대사가 또렷하게 들렸고, 감정이 과분하지도 부족하지 않았다. 특히 섬세한 연기가 포인트였다. 그가 왕자를 재우기 위해 달랠 때 보였던 그 웃음은 볼수록 소름이 끼쳤다.하지만 그가 악역이라는 것을 모르는 상황에서는 더없이 일상적인 웃음이었다.연기가 끝나자 현장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이때 차이현이 목을 가다듬더니 입을 열었다. "다들 자신의 생각들을 말해 봅시다."몇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기만 하면서 결국 조감독 한 명을 앞세웠다. 조감독은 목을 가다듬고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연기는 괜찮았는데, 너무 젊은 연기자라 기세가 부족할 수 있어요."차이현은 엄지로 턱을 받치고는 오랫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조감독의 의견은 현실적인 문제였다. 왕후의 역할은 서른이 넘은 여배우가 하기로 했었다. 그래야 분위기상 무거우면서도 일정한 인생 이력을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유현진은 얼굴이 너무 예쁘게
이 말에 유현진은 조금 놀랐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방윤아가 드라마 여주라고 했는데, 아닌가?차미주도 뭔가 수상했다. 방윤아가 여주라는 소식은 그가 동료들과의 단톡방에서 본 내용이다. 당시 여러 사람이 그 소식을 전송하고 난리였는데, 이제 와서 보니 다 거짓 정보였다. 이건 한세정의 짓임이 틀림없다.우선 분위기를 조성하여 팬들에게 기대를 주다가, 나중에 드라마에 출연하지 않으면 팬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으면서 화제거리가 되려는 타산이겠지. 수단 좋아! 한세정이 추천한 배우의 이름을 듣자 차이현이 입을 약간 오므렸다. "그 친구 작품을 보긴 했는데. "그러자 한세정이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어때요? 오디션 보겠다고 하면 지금 바로 연락해서 오라고 할게요. "그런데 차이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친구 연기는 기교밖에 없어요. "한세정은 차이현의 평가를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차이현이 덧붙인 한마디는 그의 예상을 빗나갔다."감정이 없잖아요. 눈물을 그렇게 많이 흘리는데 눈이 빨개지지도 않고 멀쩡하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아무리 멍청하더라도 차이현의 조롱하는 어투를 못 알아들을 한세정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자 다른 한 조감독이 나서서 얼어붙은 분위기를 완화하려 했다. "워낙 청춘 드라마는 팬들한테 보여주는 거니까 자신의 실력을 다 발휘하지 않았을 수도 있죠. "그러자 차이현이 발끈했다. "팬들 덕에 먹고 살면서 그 따위 작품으로 팬들에게 보답을 한다고요? "조감독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차이현은 업계에서 독설로 유명하다. 하지만 작품이 좋기 때문에 그의 독설에도 불구하고 저마다 그의 파트너가 되기를 원했다. 차이현 세 글자는 퀄러티의 보장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감독한 드라마 중 뜨지 않은 게 없었다. 하지만 한세정은 달랐다. 그의 작품은 더 많이는 자본시장을 겨냥했다. 드라마 방송 기간에 대량의 자본을 마케팅에 투입하여 팬들로부터 어마어마한 돈을 거둬갔다.
다른 제작진들도 차이현과 얘기를 잠시 나누다 자리를 떴다.곧 회의실에는 유현진과 차미주, 차이현, 그리고 차이현의 비서만이 남아있었다.사실, 이 바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계약서와 별다를 게 없었다. 단지 을의 조항에 두 가지가 추가되었다.하나는 계약 기간 내에 드라마 홍보를 위해 인스타그램 계정을 다시 하나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홍보 기간 내에 절대 다른 일을 하면 안 되는 것이다.유현진의 전 직업을 염려해서 새로 만든 조항인 듯했다.그녀에게 ‘선셋 스타’는 비장의 카드와도 같은 존재였다. 너무 일찍이 선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유현진이 사인하려고 하자 차미주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현진아, 출연료가 너무 적은 거 아니야?”드라마 전체 출연료가 세전으로 4억이었다. 촬영 기간은 120일이었다.분량이 적은 배역은 아니었기에 출연료가 낮은 편이긴 했다.세금을 내야 하고 또 스태프를 따로 고용해야 할 뿐만 아니라 촬영장에서의 지출, 또 홍보할 때의 비용까지 덜어내면 유현진은 돈을 얼마 벌지 못할 것이다.유현진도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먼저 같은 배를 타야 하지 않겠어? 평생 이 돈만 버는 것도 아닐 테고. 만약 이 드라마가 대박을 터트리면 나를 스카우트하려는 작품도 많아지고 제작사들도 줄을 서겠지.”차이현이 차 한 모금을 마시며 유현진의 사인을 기다렸다.‘이 사람들이, 내가 귀먹은 줄 아나?’회의실에는 에코가 울렸기도 하고 네 사람밖에 없었기에 아무리 두 사람이 목소리를 낮춘다고 해도 그녀들의 대화를 못 들을 수가 없었다.차미주도 유현진의 말을 듣더니 일리가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사람은 역시 멀리 내다봐야 해.’유현진은 곧 사인을 하고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차이현에게 손을 내밀었다.“감독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차이현은 그녀와 악수를 하며 덤덤하게 말했다.“앞으로 같은 배를 타는 사이인데 날 그렇게 어려워하지 않아도 돼.”유현진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바로
유현진은 입술을 씰룩거렸다.“장난치지 말고 빨리 전화 받으라고 해요.”“현진 씨,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못 믿으시겠으면 한서한테 전화해 봐요. 사람이 혼수상태에 빠졌는데 어떻게 전화 받을 수 있겠어요? 어젯밤 그 두 X끼가 겁도 없이 칼을 들고 있었어요. 작정하고 달려들었는지 경찰이 아니었으면 한서는 죽을 뻔했다고요. 저 그렇게 많은 피는 처음 봤어요.”유현진은 가슴이 타들어 갔다. 어젯밤 그녀는 정신을 잃었기에 사건의 경과를 전혀 몰랐다. 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날 때, 옷자락에 피가 묻어있긴 한 것 같았다.‘커피인 줄 알았는데 설마 피었어?’“현진 씨, 얼른 오세요. 한서가 정말 깨어나지 못할까 봐 두렵네요.”그러고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유현진이 다시 전화를 걸어보니 전화는 통하지 않았다. 강한서의 휴대폰도 전원이 꺼진 상태였다.유현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차미주는 가게 안에서 그녀를 불렀다. 유현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돈을 물고는 차미주에게 말했다.“집에 일이 좀 있어서, 난 가봐야겠어. 너 천천히 골라,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하얗게 질린 그녀의 얼굴을 보며 차미주가 다급하게 물었다.“무슨 일인데? 많이 급해? 내가 같이 가줄까?”유현진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러고는 문 앞에서 택시를 잡아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가는 길에 휴대폰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한성우인 줄 알았으니 발신자가 유상수인 걸 확인하고는 미간을 구겼다.머릿속이 이미 뒤죽박죽이었기에 유현진은 휴대폰을 무음 모드로 하고는 휴대폰이 진동하기를 내버려 뒀다.그녀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마침 신미정과 강민서와 마주쳤다. 그녀들 옆에는 유현진의 아버지인 유상수도 있었다.유현진은 그 세 사람이 왜 같이 병원에 나타났는지 알아내지도 못했는데 강민서가 그녀에게 달려들며 물었다.“오빠는? 우리 오빠 어떻게 됐어?”유현진이 입술을 꼭 다물며 말했다.“몰라, 나도 방금 도착했어.”그 말을 들은 강민서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방금
이때,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거기서 뭐해?”유현진이 흠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병실 문 앞에는 환자복을 입은 강한서가 팔을 깁스한 채 덤덤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한성우가 서 있었다.둘의 모습을 보더니 유현진은 어이가 없었다.“오빠!”강민서가 강한서에게 달려가며 말했다.“나 엄청 놀랐단 말이야!”사실 강한서가 원래 709호실에 있었던 건 맞다. 하지만 709호실에 햇빛이 잘 안 들어 강한서가 아침에 704호실로 바꿨다. 병원 시스템에 입력되지 않았는지 강한서의 병실이 아직 709호로 되어있었고 그 때문에 이 사달이 난 것이다.“팔은 왜 그래?”신미정은 겨우 감정을 추스르며 말했다.강한서가 말하기도 전에 한성우가 대답했다.“어젯밤 경찰을 도와 나쁜 놈을 잡다가 그놈들한테 당했어요.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일곱 바늘이나 꿰맸어요.”‘일곱 바늘 꿰맸다고?’유현진은 두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강한서가 덤덤하게 말했다.“크게 다치지 않아 알릴 생각이 없었는데 성우가 너무 호들갑을 떨어서.”한성우는 강한서가 잠든 틈을 타 친한 친구들이 있는 여러 단톡방에 보내려고 그가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사진을 찍었는데 그만 잘못 눌러 동창 단톡방에 보냈다. 마침 누군가가 그 사진을 캡처하고는 강민서가 있는 단톡방에 전달했다.신미정이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일곱 바늘이나 꿰맸는데 크게 다치지 않았다니!”언성이 높아질까 봐 한성우는 바로 상황을 수습했다.“먼저 병실로 돌아가서 천천히 얘기하는 건 어때요? 돌아가신 분은 존중해야 하지 않겠어요?”확실히 언성을 높이며 얘기하기 마땅한 곳은 아니었다.강한서가 유현진을 힐끔 봤다. 유현진이 가만히 있자 그는 입술을 얇게 오므리며 말했다.“언제까지 여기서 무릎 꿇을 생각인데?”유현진은 어이가 없었다.‘내가 무릎 꿇고 싶어서 꿇냐고? 지금도 무릎이 엄청 아프단 말이야.’강민서가 아니꼬운 얼굴로 말했다.“창피하게 이게 뭐야. 모르는 사
강한서의 말에 죄책감이 든 한현진이 말했다. [널 탓하는 게 아니야. 그냥 물어본 거야.]강한서: [물어보는 네 말투가 나에겐 너무 상처였어. 지금 그 문자를 봐도 마음이 아픈 것 같아.]한현진: [...]강한서는 지식만 빨리 습득하는게 아니었다. 그의 비꼬기 기술도 무서운 속도로 발전했다. 하지만 강한서는 자신의 상대가 누군지 잊은 모양이었다. 한현진이 미안함이 가득 담긴 말투로 문자를 작성했다. [그럼 어떡해? 이젠 메시지를 삭제해도 소용없는데. 아니면 네가 아예 날 삭제할래? 그럼 내가 보낸 문자도 볼 수 없고, 그렇게 괴로워할 필요가 없잖아.]강한서는 한참 동안 답장이 없었다. 아마 한현진의 제안에 충격을 받은 듯 했다. 한현진: [삭제했어?]강한서: [...]한현진: [오빠, 얼른 삭제해. 난 오빠가 슬픈 건 싫어.]한현진은 차례로 문자를 잔뜩 전송했다. 결국 한현진의 등살에 못 이긴 강한서가 체념하며 답장했다. [여보, 내가 잘못했어.]한현진이 배배 꼬인 말투로 말했다. [오빠는 그저 자랑이 하고 싶었을 뿐인데, 오빠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어? 잘못한 건 나야. 이렇게 사소한 일로 시시콜콜 따지기나 하고.]말이 없던 강한서는 잠시 후 한현진에게 가방 사진을 잔뜩 보냈다. [자기야, 하나 골라.]한현진은 버럭 화를 내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오빠, 이게 무슨 뜻이야? 지금 내가 가방 때문에 이러는 것 같아?]강한서: [다 사.]한현진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됐어. 농담이야. 사긴 뭘 사. 회사 조직개편에 성공하면 네 수입도 지금처럼 높지는 않을 거야. 우리 아이도 키워야 하는데 아껴야지. 돈 함부로 쓰지마.]강한서에게 한성 그룹이 유일한 수입원은 아니었다. 앞으로 한성 그룹의 수입이 줄어들더라도 그는 여전히 적지 않은 돈을 벌 수 있었다. 하지만 강한서는 이 가족을 위해 계산기를 두드리는 한현진의 모습이 귀엽기만 했다. [애들은 애들이고, 넌 너야. 아직 우리 와이프를 희생시켜야 할 정도는 아니라고
한성 그룹의 신제품 발표회는 전례 없는 성공을 걷었다. 신제품은 전부 품절되었고 루나의 테스트 영상은 밤새 조회수 1억을 넘겼다. 강한서도 신제품 발표회 후 인지도가 급상승했다. 짧디 짧은 3일 사이, 강한서의 페이스북 팔로워는 2000만 명을 넘기고 있었다. 그의 댓글창에는 벌써 골수팬도 잔뜩 찾아볼 수 있었다. 슬쩍 훑어보기만 해도 [오빠]라며 부르짖는 댓글이 가득이었다. 남녀를 불문하고 말이다. 예약 판매를 앞당기라는 요청과 페이스북의 업로드를 바라는 요청이 난무했다. 시간이 지나도 강한서가 페이스북에 피드를 올리지 않자 네티즌들은 그의 지난 피드를 캐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결혼한 다이아몬드 수저 남편의 일상]이라는 계정을 발견했다. 오래 전부터 [결혼한 다이아몬드 수저 남편의 일상] 계정을 팔로워했고 요즘은 또 강한서에게 빠진 팬들은 순간 두 사람의 말투, 문장부호 사용 습관이 똑같다는 것을 발견했다. 심지어 두 계정이 동일한 휴대폰 기종을 사용하고 있고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피드를 올린 적이 있다는 것까지 전부 알아냈다. ‘이건 강한서 부계정이잖아!’비록 [결혼한 다이아몬드 수저 남편의 일상]은 친구만 볼 수 있게 설정이 되어 지금은 아무 것도 확인할 수 없었지만 오래된 팬들이 남긴 애정행각 캡쳐본은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곧 사람들은 천재는 아내 자랑도 남다르게 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행을 떠난 아내가 오랫동안 집을 비우자 강한서는 아내가 보고 싶었지만 그는 보고 싶다는 말 대신 이런 글을 남겼다. [꽃에 물을 준지 7일 째. 이미 한계야. 내일도 안 돌아오면, 시들든 말든 다신 상관 안 해. 난 말한대로 할 거야.]10일이 지나도 한현진이 돌아오지 않자 강한서는 말했다. [꽃은 죄가 없잖아. 죄가 있다면 기른다면서 물도 제대로 주지 않는 사람이겠지.]12일 째: [나한테 사진을 보냈어. 보고 싶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난 그저 저 꽃들에게 신경을 끄고 싶을 뿐이야.]18일 째: [돌아왔어. 물을 너무 많이
한현진의 말에 강한서가 조용해졌다. 그녀는 손을 뻗어 강한서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눈물이 손바닥을 가득 적셨다. 발표회가 무사히 마무리된 그날 밤, 가여운 두 영혼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안방 밖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강민서는 결국 그 방문을 열 용기를 내지 못했다. 강민서의 휴대폰은 끊임없이 진동이 울렸다. 신미정이 쉴새없이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민서야, 오빠에게 얘기했어?][엄마는 네 삼촌에게 속은 거야. 누가 더 중요한지 엄마가 모르겠니? 엄만 그저 외할아버지가 남긴 회사가 이렇게 무너지는 게 안타까워서 그럴 뿐이야.][엄만 한서와 모자의 인연을 끊을 생각이 없었다. 한서는 내 아들이야. 내가 설마 걔를 버리겠니? 한현진이 날 속여서 그 각서를 쓰게 한 거야. 난 그 각서는 법적 효력이 없다는 걸 알고 사인한 건데 그 X가 이런 식으로 날 X 먹일 줄 어떻게 알았겠니.][민서야, 인터넷에 떠도는 헛소리는 보지도 마. 한서도 내 아들이야. 내가 어떻게 한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다만 한서는 너무 오랫동안 네 할머니 곁에서 자랐잖니. 할머니는 날 좋아하지 않으시고. 그러니 나도 네 오빠가 날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서 가끔은 한서를 멀리했던 거야. 하지만 한서도 내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한서가 힘들면 당연히 엄마도 더 힘들지.]강민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강민서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신미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마 줄곧 휴대폰만 쳐다보고 있었던 듯, 신미정은 연결음이 들리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민서야, 우리 딸. 엄마가 부탁한 건 어떻게 됐어? 오빠한테 전부 얘기했어?”강민서가 갑자기 물었다. “엄마, 다음 주 수요일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신미정은 순간 강민서의 질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얘는, 갑자기 왜 그런 걸 묻고 그래. 엄마는 이제 나이도 많은데 그런 걸 어떻게 기억하겠니. 힌트라도 줘.”강민서가 말했다. “다음 주 수요일은 오빠 생일이잖아요, 엄마. 다른 댁 사모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송병천의 답장을 확인한 한현진은 다행이면서도 안타까운 감정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송병천의 답장에 마음이 놓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최소한 지금의 송병천은 비록 화가 나긴 했지만 아예 마음을 돌릴 수도 없는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주문 제작이야, 장인어른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해내야만 했다. 송병천에게 답장을 한 한현진은 고개를 돌려 침대에 누워있는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수트는 방금 민경하의 도움으로 벗길 수 있었다. 강한서 스스로 끌어내린 넥타이는 느슨하게 풀린 채 가슴 앞에 걸려있었다. 풀린 단추 사이로 붉게 물든 가슴이 보였다. 강한서의 안경은 여전히 그의 콧등에 걸려있었다. 날카로운 이목구비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상하리만치 부드러워 보였다. 한현진이 강한서의 옆에 누워 그의 몸에 기댄채 귓가에 속삭였다. “강한서, 강한서. 여보...”강한서는 조금 시끄러운 듯 머리에 힘을 실어 베개에 푹 파묻혔다. 위로 솟은 목 때문에 그의 목젖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강한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한현진을 유혹하고 있었다. 한현진이 손을 뻗어 강한서의 안경을 벗겼다. 그녀는 그의 이마를 살며시 쓸었다. “여보, 샤워하고 자. 나 너 못 일으켜.”강한서가 흐리멍텅한 눈빛으로 눈을 떴다. 그는 눈앞에 보이는 흐릿한 인영에 갑자기 손을 뻗어 한현진을 끌어안고는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현진아, 현진아...”강한서가 웅얼거리며 한현진의 이름을 불렀다. 한현진의 그의 부름이 일일이 대답하며 단추를 풀렀다. “나 여기 있어.”한현진의 이름을 부르던 강한서가 또 바보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평소의 진지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그저 한없이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강한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현진아, 내가 해냈어. 내가 해냈어, 현진아. 현진아...”십년이었다...강한서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한성을 지지하는 모든 고객에게 모두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내놓기까지 걸린 시간이.
송병천이 송민준을 재촉했다. 송민준은 제일 위에 있던 이모티콘을 삭제하곤 휴대폰을 송병천에게 돌려주었다. 이모티콘이 삭제된 것을 본 송병천이 순간 놀란 얼굴을 하며 물었다. “어떻게 사라진 거야?”송민준이 말했다. “인터넷 지연이 있었던 것 같아요.”송병천이 투덜거렸다. “업데이트를 하면 할수록 엉망이네.”송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송병천은 휴대폰을 들고 귀한 따님에게 답장을 보내며 송민준을 나무랐다. “너 이젠 나한테 이상한 이모티콘 보내지 마. 내가 실수로 이모티콘을 잘못 보내 네 동생이 보면 내 이미지가 깨지지 않겠어?”송민준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미지가 어떨진 모르겠지만 아빠 아이큐가 몇인지는 깨달았을 것 같네요.’송병천은 문자를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는 한참 동안 어떻게 답장을 보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는 결국 오다 주운 것 같은 아들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민준아, 내가 뭐라고 답장하면 현진이도 상처 안 받고 강한서에 대한 내 분노를 표현할 수 있을까?”송민준이 말했다. “엄마는 약을 주고, 아들은 술을 주네. 하나는 손자를 노리고 다른 하나는 아빠를 노리니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다 죽어야 끝나겠어, 라고 보내요.”송병천이 송민준을 걷어찼다. “X 놈의 자식!”송민준이 소파에 기대 앉아 웃음을 터뜨렸다. “대체 강한서를 사위로 받아들이시긴 할 거예요? 그럴 생각이 없으신 거면 대체 왜 강한서 체면 따위를 생각해주시는 거예요? 바로 현진이를 데려와서 평생 못 만나게 하면 그만이잖아요.”송병천이 송민준을 노려보았다.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뭐가 달라져? 네 동생이 좋다고 하잖아. 뱃속의 아이에게도 아빠는 필요해.”“그러지 마시라니까요. 아빠가 마음에 안 드시면 마지못해 사위로 받아들이셨다고 해도 결국 마음에 넘지 못한 산이 생길 거예요. 저라면 차라리 받아들이지 않겠어요. 현진이에게 다른 남자를 찾아주면 되죠. 현진이도 한서 외모에 반한 거잖아요. 우리 회사에 잘생긴 애
한성우의 말에 한현진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이런 애정 표현을 안 하면 죽기라도 하는 거야?’한현진이 한성우의 말에 대답하려는데 강한서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운이 좋긴 하지. 만약 우리처럼 1000분의 5에 가까운 확률로 쌍둥이까지 임신한다면 더 좋겠지만 말이야.”“...”한현진은 입가에 맴돌던 면박을 주려던 말을 더는 할 면목이 없었다. 한성우가 입술을 씰룩였다. “강한서, 너 이 자식. 하루라도 자랑 안 하면 죽는 병이라도 걸렸어? 그런 거냐고!”강한서가 진지하게 말했다. “죽을 수 있어.”화가 난 한성우는 바득, 소리를 내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면서 그는 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 ‘꼭 딸을 낳아서 강한서 아들을 꼬셨다가 다시 차버리게 할 거야. 몇 번이고 차버리게 할 거라고! 꼭 저 개자식이 나이를 잔뜩 먹고도 손주도 못 안게 만들 거야. 그때도 이렇게 까불 수 있는지 한 번 지켜보자고.’자리를 비운 주강운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송가람은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탓에 오늘 발표회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송민준은 발표회가 끝난 후 바로 가버렸고 송병천은 아예 하루 종일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토라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한현진이 송병천에게 좋은 와인 사진을 몇 장 보냈다. [아빠, 강한서가 일부러 아빠를 위해 남겨둔 거예요.]송병천은 답장이 없었다. 하지만 한현진이 남긴 문자 옆의 1이 사라졌다. 한성우와 민경하가 술에 취한 강한서를 차까지 부축하고 나서야 송병천의 답장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한현진에게 하찮아 보이는 표정으로 읍하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그 이모티콘을 본 한현진은 어리둥절해졌다. 한현진이 그 이모티콘을 보낸 의미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송병천이 또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삭제된 메시지입니다.]한현진은 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송병천: [삭제된 메시지입니다.]1분 후.송병천: [삭제된 메시지입니다.]2분 후.송병천: [삭제된 메시
“빨리 뒷이야기를 마저 해봐요.”한현진이 다그치며 말했다. “뒷이야기는 더 막장이에요. 장준은 첫사랑도, 대타도 버릴 수 없었어요. 두 여자는 장준을 빼앗기 위해 피 터지도록 싸웠죠. 마지막엔 첫사랑이 대타가 마약을 했다고 신고를 했고 대타는 그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사라졌어요.”“대타가 사라지자 다들 장준은 이제 첫사랑만 볼 거라고 생각했어요. 전에 가족들과 그렇게 갈등을 빚은 것도 전부 첫사랑 때문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장준은 그저 조용하기만 했어요. 오히려 장씨 가문에서 장준의 첫사랑이 그의 집안에 발을 들이는 일은 없을 거라는 뜻으로 얘기했죠. 게다가 그 일이 있고 몇 개월 후 장씨 가문에서는 장준과 전고현의 선 자리를 마련했어요.”“장준이 몇 년 동안 죽도록 난리를 피운 덕에 집안에서는 장준에게 완전히 실망하고 진작 포기해버렸어요. 장준이 대를 이어 주면 그 아이를 후계자로 키울 생각이었지만 장준이 마약 때문에 몸을 완전히 망쳐버린 탓에 그럴 수도 없었죠. 병원에 가서 검사를 전부 생식 능력이 전혀 없었어요. 장준이 아이를 낳지 못하니 아버지라도 나서야 했던 거죠. 그러다 진씨 가문에 그런 일이 생기면 결국 그 혼사도 무산되었지만요.”“하지만 이젠 장준의 대타가 돌아왔어요. 타락했던 예전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는 걸 보면 대타에게 마음을 줬다는 소문이 사실이긴 한가 봐요. 만약 제가 그 첫사랑이었으면 아마 화가 나서 죽어버렸을지도 몰라요. 얼마나 오랜 시간을 들인 계획인데, 결국엔 내 손을 떠나 다른 사람 좋은 노릇만 했잖아요.”이야기를 들은 한현진과 강한서는 조금 멍해졌다. 한현진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성우 씨는 어떻게 이렇게 자세하게 알고 있는 거예요?”한현진은 비록 이 일엔 신경 쓰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그럼에도 사람을 시켜 장준의 일을 조사하도록 했다. 그러나 장준의 첫사랑에 관한 이런 막장 스토리는 전혀 전해들은 바가 없었다. “에이, 뭐 이런 것쯤이야.”말하는 한성우는 어쩐지 눈을 피하는 것 같았다. “예전에 술 마
멈칫한 한현진과 강한서가 홱 고개를 돌려 뒤에서 중얼거리는 한성우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눈빛에 깜짝 놀란 한성우가 말했다. “왜 날 그렇게 노려봐?”한현진이 다급하게 물었다. “무슨 소문이요? 성우 씨는 뭘 알고 있는 거예요?”한성우가 눈을 깜빡였다. “소문에 장준이 첫사랑 대타와 사랑에 빠졌다고 하더라고요. 그 대타가 사라진 1년 동안 장준은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것처럼 지냈대요. 그리고 대타가 돌아오자 바로 활기가 넘쳐흐른다고 하더라고요. 그 모습에 빈정 상한 첫사랑이 매일 대타를 괴롭히고 있고.”한현진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강한서는 그런 한현진보다 더 놀란 눈치였다. 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장준은 술, 여자, 도박, 약 안 좋은 건 전부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 인간에게도 첫사랑이 있어요?”“형수님은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세요. 병신에게도 청춘은 있어요. 게다가 장씨 가문 정도면 명문가에서는 싫다고 할지 몰라도 조건이 조금 떨어진 집안마저도 거절하겠어요?”그리고 한성우는 두 사람에게 끝장판 막장 스토리를 들려주었다. 장준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첫사랑이 있었다. 그 여자는 장준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던 사람의 딸이었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며 감정을 쌓아왔다. 두 사람에게 사랑이 싹 트던 초창기, 장준의 가족들은 두 사람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단순히 장준이 그 여자를 가지고 놀다 질리면 그만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생각보다 꽤 수완이 좋았던 것인지 장준은 그 여자의 일이라면 죽자고 달려들었다. 그저 장난감에 불과한 여자였다. 곁에 두고 노는 건 상관없었지만 그 여자가 장준의 안방까지 차지하려고 한다면, 장씨 가문에서는 절대 가만히 놔둘 수는 없었다. 그러니 장씨 가문에서는 돈을 주고 수작을 부려 그 여자를 내쫓았다. 하지만 여자가 사라지자 장준은 미친X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그 여자가 떠나며 남긴 편지 때문이었다. [이번 생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아. 다
한현진은 조금 전 대화 내용은 간략하게 강한서에게 알려주었다. 강한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문샤론? 그런 생각은 어떻게 하는 거야?”이야기는 전부 한현진이 즉흥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하지만 전부 그럴 듯하게 짜임새가 있는 스토리였다. ‘역시 대단한 여자야.’한현진이 말했다. “간민혜 씨는 죽기 직전까지도 강운 씨에게 한 마디 말도 남기지 않았어. 대체 그 이유가 뭔지, 우린 모르지만 어쩌면 강운 씨라면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사실 난 줄곧 강운 씨 집안에서 누군가 이 일에—”강한서가 한현진의 손바닥을 꾹꾹 누르며 조용히 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멈칫하던 한현진은 강한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정설희, 아니. 정서희가 보였다. 그녀는 장준과 손을 잡고 피로연 현장에 나타났다. 지금의 정서희는 예전의 정설희와 같은 스타일의 메이크업을 하고 있었다. 눈웃음을 짓는 눈가엔 은근한 색기가 흘렀다. 아름다운 이목구비와 화려한 옷차림은 자심이 병원에서 만났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완전히 똑같은 사람인 것 같았다. 함께 등장한 정서희와 장준은 스킨십이 제법 자연스러웠고 꽤 친근한 모습이었다. “강 대표님, 발표회 무사히 마치신 거 축하드려요.”잔을 들고 다가온 장준이 웃으며 강한서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한현진은 순간 약쟁이였던 장준의 상태가 지난번 결혼식보다 너무 많이 나은 것을 발견했다. 광대뼈도 예전처럼 선명하게 튀어나오지 않았고 눈빛에도 생기가 돌았다. 여전히 삐쩍 마른 몸이었지만 정장을 입으니 제법 봐줄만 했다. 아무도 이런 모습의 장준을 보고 약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강한서가 손을 들어 장준과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 “고마워요.”장준의 시선이 한현진을 향했다. 깊은 눈매에는 나른한 기색이 묻어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정서희를 보며 물었다. “두 사람 동창이라고 하지 않았어? 현진 씨는 당신을 보고도 왜 이렇게 냉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