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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작가: 은별
last update 최신 업데이트: 2024-10-29 19:42:56
3년 뒤, 유시아는 다시 그곳에 나타났다. 익숙한 얼굴들 앞에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선 그녀는 너무 수치스러워서 고개를 푹 숙였다. 유시아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반대로 임재욱은 태연한 얼굴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뒤 그녀를 데리고 자리에 앉았다.

유시아의 출현에 잠깐이지만 룸 안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3년 전 사건이 워낙 충격적이었다 보니 정운시 상류층 사람들은 그녀의 얼굴을 거의 다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유시아는 예전보다 수척했고 머리도 짧게 잘랐으며 공들여 화장하지도 않았지만 다들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소현우의 시선이 유시아의 얼굴에 잠깐 멈췄다. 그러나 그는 이내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이때 룸 안의 분위기는 혼탁했다.

소파에 앉아있는 남녀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들을 제외하고도 멀지 않은 곳에서 짙은 화장을 한 여자 두 명이 무대 위에서 폴댄스를 추고 있어서기도 했다. 두 여자는 이따금 사람들을 향해 손 키스를 날려 웃음을 자아냈다.

한 뚱뚱한 남자가 폴댄스 때문에 흥이 났는지 무대 위로 올라가 여자들에게 사진을 찍자고 했다. 동시에 그는 유시아를 바라보며 특이한 억양으로 말했다.

“임 대표, 임 대표 파트너는 뭐 할 줄 알아? 폴댄스 출 줄 알아?”

클럽 안의 사람들은 대체로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후자에 속하는 유시아는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그녀는 몰래 임재욱을 살피며 그가 무슨 말이라고 해주길 바랐지만 그는 덤덤히 유시아를 바라보며 웃을 뿐이었다.

“춤출 줄 몰라요.”

“참나.”

뚱뚱한 남자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의 음흉한 눈빛은 마치 찬바람처럼 싸늘하게 유시아의 피부를 쭉 훑고 지나갔다.

“몸매가 저렇게 좋은데 아쉽네...”

임재욱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요, 주 회장님. 감옥에서는 그런 걸 안 가르쳐서...”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룸 안이 고요해졌다.

그래도 전처인데 저렇게나 인정사정없다니, 참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유시아가 지금 어떤 신분인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녀를 무시하며 장난스레 말했다.

“하긴, 뻣뻣해 보이긴 하네요. 오랫동안 세상이랑 단절돼서 살았을 텐데 오히려 잘 된 일일 수도 있죠. 백지 같으니까요.”

“감옥에 있었다고 나쁠 건 없죠. 남자랑 전혀 못 해봤을 테니까요.”

“어쩐지 임 대표님 안색이 좋으시더라.”

유시아의 얼굴이 점점 더 빨개졌다. 그녀는 다리 위에 내려놓은 두 손으로 자신의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고 있었는데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그녀는 빨간 입술을 살짝 말아 물었다.

‘나쁜 놈. 날 그렇게 실컷 모욕했으면서 그것도 부족해서 사람들 앞에 날 내세워서 비웃음당하게 해?’

임재욱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손을 뻗어 유시아의 경직된 등을 내리 쓸었다. 그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피식 웃었다.

“여기 아가씨들이랑 며칠 같이 지내면서 좀 배울래? 그렇지 않으면 할 줄 아는 게 없잖아. 기술이 없으면 어떡해?”

유시아는 미간을 구겼다. 그런데 이때 주 회장이라고 불렸던 동남아 사람이 말했다.

“폴댄스는 못해도 다른 춤은 출 수 있겠지? 어렵지도 않잖아. 그냥 허리만 흔들면 되는데...”

“주 회장님...”

줄곧 가만히 있던 소현우가 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까 다른 걸 해보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임 대표님도 왔는데 게임이라도 하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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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그랬었지...”그 일을 떠올린 주 회장은 잠깐이지만 유시아를 난처하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소현우, 임재욱, 그리고 정운시 재벌가 자제들도 잠깐 그녀를 잊었다.권세 드높은 남자들에게 잊힌 유시아는 천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임재욱 곁에 놓인 의자에 앉은 그녀는 자신이 차라리 투명 인간이 되길 간절히 바랐다.임재욱은 오늘 운이 좋아서 계속 이겼다.반대로 그의 맞은편에 앉은 주 회장은 계속 지다 보니 기분이 언짢아진 듯했다. 그는 게임을 하다가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옆으로 던지며 말했다.“에이, 안 해요, 안 해. 자꾸 지네. 이제 더 지면 빈털터리가 되겠어...”그 말에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렸다.임재욱은 그를 향해 손을 들었다.“주 회장님, 왜 가려고 그러세요? 이번에는 크게 한 판 하시죠.”그는 휴대전화를 꺼냈다.“이거 하실래요?”주 회장은 꼼짝하지 않았다. 그는 손을 뻗어 의자에 걸어두었던 겉옷을 챙겨서 떠나려 했다.“하나 더 걸까요?”임재욱은 유시아의 손을 끌어당겨 칩 더미 위에 놓으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주 회장님이 잃으셨던 거 다 걸고, 미인까지 걸겠어요. 주 회장님, 하실래요?”유시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자신을 향한 임재욱의 복수가 더 잔인해질 리는 없다고 생각할 때마다 그는 그녀의 예상을 깨고 그녀를 더욱더 궁지로 몰아넣었다.그리고 매번 참고 견디면서 이젠 끝났겠지 싶을 때마다 더욱 큰 굴욕이 그녀를 덮쳤다.유시아는 더 이상 참고 있을 수 없었다.그녀는 자신이 물건처럼 여겨지는 곳에서, 태연한 얼굴로 그들과 함께 앉아있을 수 없었다.유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임재욱의 손을 뿌리쳤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임재욱은 그녀가 갑자기 떠날 줄은 몰랐는지 본능적으로 그녀를 붙잡으려 했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옷자락을 스쳤고 그렇게 유시아는 떠나갔다. 그러나 문밖에 경호원들이 있다는 걸 아는 임재욱은 유시아가 도망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걱정하지 않았다.그러나 유시아의 반응이 오히려 주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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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이라는 죄로   제11화

    소현우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밑장을 다 들켰으니 진 것과 다름없네요.”말을 마친 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집어 들었다.“그럼, 오늘 밤 유시아 씨는 내 것이에요. 그 돈은 모두에게 밥 한 끼 산 거로 칠게요.”이 말을 한 뒤 소현우는 돌아서서 떠났다.임재욱은 멋지게 걸어가는 소현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몇 번이고 참았던 말을 뱉어냈다.“소 대표님, 하룻밤 즐기고 잊지 말고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내 앞에 데려와요.”소현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그건 오늘 밤이 지나 봐야 알겠죠.”그 말을 끝으로 소현우는 문을 열고 나갔다.룸안에는 주 대표가 아직도 미인을 놓친 것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아까까지 그들과 카드 게임을 하던 부잣집 도련님들은 이미 여자들에게 가서 즐기고 있었다. 혼자 테이블에 앉아 깊은 고민에 빠진 임재욱의 모습은 룸안의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소씨 집안은 정운시에서 수년 동안 활동해 왔으며 밑바닥부터 성장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항상 겸손한 것으로 유명했다.특히 소현우의 경력들이 전설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미디어 카메라로 포착하기 가장 어려운 부자였다.평소 주목 받는 것을 싫어하던 사람이 한 여자를 위해 갑자기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니, 임재욱은 이상함을 감지했다. 이 카드 게임으로 인해 임재욱은 소현우에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적의를 느끼게 되었다.프레지던트룸 안, 화려한 샹들리에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소현우는 침실의 문을 열고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여자의 피부는 눈꽃처럼 하얗고 귀밑까지 오는 단발머리에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이미 정신을 잃고 누워 있었다. 입고 있던 튜브톱 드레스는 경호원들과의 치열한 몸싸움으로 인해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그녀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녀의 순진하고 연약해 보이는 모습이 남자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그녀의 주위로 풍겨 나오는 묘한 분위기에 소현우는 한동안 진정이 되지 않았다.이 여자는 유병철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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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이라는 죄로   제12화

    옆집은 새로 이사를 왔는지 낯선 사람이었다. 상대는 유시아를 알아보지 못했기에 이상하게 쳐다보지도 않고 흔쾌히 보조배터리를 빌려주었다.전원을 연결하자 도어락 전원이 켜졌고 유시아는 비밀번호 4자리 0416을 눌렀다.예전에 유시아가 직접 설정했던 비밀번호였다. 아는 점쟁이가 잡아준 결혼식 날짜였고 그녀도 이 숫자들을 행운의 숫자로 여기고 항상 마음속에 새겼다.문이 빠르게 열렸고 유시아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먼지가 날리며 부패한 냄새가 나는 것이 마치 천년도 더 된 폐가에 들어온 것 같았다.집안은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천장에는 먼지가 수북이 쌓인 붉은 장미와 바람 빠진 풍선들이 매달려 있었고, 커피 테이블 위에는 과일과 케이크가 완전히 썩어 벌레가 들끓었다. 바닥에는 사탕 포장지와 과일 껍질이 널려 있었다. 침실의 침대에는 그녀가 결혼했을 때 장만한 시트가 여전히 깔려 있었다.3년 전 4월 16일, 그녀가 3년 동안 좋아한 임재욱이 드디어 장미꽃을 손에 든 채 그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시아야, 나랑 결혼해 줘.”“나랑 함께 가자. 평생 죽을 때까지 널 사랑할게.”프러포즈하는 임재욱은 달콤하고 멋있었다. 그녀를 속여 구름 위로 둥둥 떠다니게 하고서는 지옥으로 끌어 내렸다.그날은 유시아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고 또 가장 슬픈 하루였다.임재욱은 단 한 순간도 그녀를 좋아한 적이 없었다.과거의 모든 달콤함과 사랑은 단지 그녀를 속이기 위한 사탕발림에 불과했다.유시아는 먼지가 뽀얗게 쌓인 흰 침대 시트를 보고 입가에 슬픈 미소를 지었다. 손을 뻗어 침대 시트를 끌어당겨 구겨 부엌 쓰레기통에 던졌다.심하게 몰려오는 피곤함에 유시아는 더는 과거의 일을 떠올리지 않고 침대에 누워 빠르게 잠에 들었다.자기 집이니 조금 더럽고 지저분해도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누군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임재욱은 약간의 결벽증을 가지고 있었기에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집은 더럽고 지저분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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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이라는 죄로   제13화

    자기 집 침대에 누워 자니 역시나 달콤한 잠을 잘 수 있었다.유시아가 일어났을 때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침실은 암막 커튼에 의해 빛이 전혀 들어오지 못했다.손을 뻗어도 손가락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에 유시아는 순간 감옥에서 독방에 갇혔던 때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임재욱이 그녀를 감옥에 넣었을 때 미리 감옥 안에 있는 죄수들에게 그녀를 잘 ‘보살피’ 라고 손을 써 두었다.그의 한마디 때문에 그녀가 겪은 고생들은 어마어마했다. 죄수들은 밥 먹을 때 그녀의 식판을 엎고, 손으로 종이봉투를 만들 때면 그녀가 잘라낸 종이들을 망가뜨려 놓고 모두 그녀의 잘못으로 돌렸다. 그러면서 여전히 감옥에 들어오기 전 삶을 잊지 못하고 일을 똑바로 하지 않는다고 그녀를 욕했다.여러 명의 공세에 그녀는 변명할 기회조차 없었고 결국 돌아오는 것은 교도관의 구타였다. 그녀는 공복 상태로 24시간 동안 습하고 차갑고 어두운 방에 갇혀 있었다. 밖으로 나오면 또 반성문을 써야 했다. 그러나 더 비참한 것은 3년을 겨우 버티고 버텨 감옥을 나왔지만, 임재욱의 복수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는 것이다.유시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손을 뻗어 침대 옆의 전등 스위치를 켜고 음식을 준비해 먹으려고 했다.하지만 등은 켜지지 않았다. 3년 동안 집을 버려두었으니, 관리비를 내지 못했고 물과 전기도 오래전에 끊어진 상태였다. 물조차 끓일 수 없었다.유시아는 어쩔 수 없이 어둠 속에서 더듬으며 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을 열었다. 밖에서 들어오는 달빛을 이용해서 옷장의 문을 열었다. 그녀가 입던 오래된 옷들 중에서 긴치마를 꺼내 입고 클럽 스타일의 치마를 벗었다.집에 현금이 조금 남아 있던 것이 생각나 밖에 나가서 먹을 것을 사 오려고 했다. 옷을 입고 있는데 거실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순간 유시아는 소름이 끼쳤다. 집은 크지 않았고 침실과 거실 사이에 벽만 있었다. 가죽구두로 바닥을 밟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는 것이 또렷하게 들려와 그녀는 문 앞에 잠시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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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이라는 죄로   제14화

    어젯밤 일부러 그녀를 다른 남자 침대로 보내 놓고서는 지금은 그녀에게 숨 쉴 틈조차 주지 않을 작정일까?임재욱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핸드폰 플래시로 그녀를 비추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가 턱을 잡아 자신을 올려다보게 했다.두 사람 사이는 서로의 숨결이 얽힐 정도로 가까워졌고 긴 속눈썹으로 뒤덮인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오랜 시간이 흐른 뒤 임재욱이 부드럽게 말했다.“아침에 소현우를 떠나 왜 날 찾아오지 않은 거야? 누가 여기로 몰래 돌아와도 된다고 허락했어?”그녀는 분명 형을 마치고 풀려났지만, 임재욱이 핸드폰으로 플래시를 비추면 그녀는 여전히 죄수처럼 느껴졌고 그런 자기 자신이 부끄러웠다.사실 그녀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임재욱을 이해한 적이 없었다.특히 감옥에서 풀려난 후 지난 며칠간 계속해서 선을 넘는 임재욱의 행동으로 인해 그에 대한 두려움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버티다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난... 집이 그리워서 와 보고 싶었어요... 읍...”그녀의 말이 끝나기 전에 임재욱이 고개를 숙이고 살짝 벌어진 그녀의 입술에 강하게 키스했다.큰 덩치의 임재욱은 큰 손으로 그녀의 머리 뒤를 잡고 강제로 키스했고 다른 한 손은 이미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잡고 침대로 이끌었다.그와 그녀가 첫 키스를 한 것도 처음 잠자리를 갖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임재욱의 몸짓과 숨결에서 그녀에 대한 애정을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그녀를 단순히 욕구를 해소하는 도구로 여기는 듯했다.임재욱의 핸드폰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방 안에 있던 유일한 불빛이 사라졌다.어둠 속에서 주위는 그의 냄새로 가득 찼고 유시아는 머리가 울렸다. 유시아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어둠이 그녀에게 용기를 준 것인지 그녀는 홀린 듯 끊임없이 손을 뻗어 그를 밀어냈고 자기를 만지는 것을 거부했다.“만지지 마요, 임재욱 씨...”심지어 유시아는 어젯밤처럼 다른 남자 침대에 올라가더라도 이 침대에서 거친 그를 상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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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이라는 죄로   제15화

    하지만 결과는 어땠나?그는 여전히 한순간도 그녀에게 매력을 느낀 적이 없었고, 그의 눈에 그녀는 단지 떨쳐내기 힘든 얼굴 두꺼운 여자애였다.신서현이야말로 그의 영원히 잊지 못하는 첫사랑이었다.심지어 신서현의 죽음으로 인해 그는 잔인하게 유시아를 심연 속으로 밀어 넣었다.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랑은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그래서 임재욱은 신서현이 살아 있을 때는 유시아의 노력을 못 본 척하고 그녀에게 짜증을 냈었다.그리고 신서현이 죽은 뒤엔 유시아에게 단 한 번도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왜냐하면 그녀에게는 그럴 가치도,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유시아는 감옥에서의 3년 그리고 석방되고 며칠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자신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이 사실을 완전히 이해하고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받아들였다.그러나 가끔 신서현을 생각할 때면 유시아는 여전히 그녀가 부러웠고 심지어 질투도 느꼈다. 유시아는 임재욱이 아마도 죽을 때까지 신서현을 마음에 품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질투가 났다.만약 돌아갈 수만 있다면 17살의 유시아에게 절대로 임재욱을 사랑하지 말라고 꼭 말해주고 싶었다.하지만 17살의 고집 센 소녀는 믿지 않을 것이다.유시아는 입가에 슬픈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다음날 깨어보니 이미 해가 떠 있었다.낡은 집에는 유시아만이 남겨져 있었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다 몸 어딘가에서 전해져 오는 날카로운 통증이 아니었다면 어젯밤 임재욱의 모습이 꿈일 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난 그녀는 간단하게 정리하고 침대 옆 탁자에 올려 둔 지갑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가서 아침을 먹고 돈을 꺼내서 물세와 전기세를 내려고 했다. 그래야지 집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동네 정문으로 나오자, 랜드로버 한 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소현우는 밝은색 슈트를 입고 차 앞쪽에 기대어 여유롭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평범하지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 이런 평범한 동네 앞에 서 있는 것이 조금 어울리지 않았다.유시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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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희 일에 대해 걱정 안 하셔도 돼요.”유시아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게다가 저희 둘 사이의 일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요.”제일 중요한 것은 임재욱이 현재 임씨 그룹의 대표라는 점이다. 대우 그룹은 정운시에 뿌리내린 지 오래되었고 그 뿌리가 든든해서 심송학 삼촌조차 상대할 수 없었기에 더 이상 그녀의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런데 유시아가 어떻게 소현우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까?소씨 가문이 파산 위기를 겪은 후, 현재의 영광을 되찾은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유시아는 자기 일로 그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특히 소현우처럼 온화하고 친절한 사람을 힘들게 할 순 없었다.소현우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하지만...”“아무 일도 없어요. 클럽에서 절 위해 해주신 일만으로 아주 고맙습니다.”유시아는 그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바꾸었다.“더 이상 제 일에 간섭하지 마세요.”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재빨리 길 반대편으로 걸어갔다.그녀는 먼저 약국을 찾아 들어가 카운터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고 있었다. 약사가 무엇을 찾는지 묻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저... 사후 피임약을 사고 싶은데요.”이런 것을 직접 사지 않더라도 임재욱이 조만간 그녀에게 사다 줄 것이었다.그러나 그가 약을 가져다주길 기다리느니 직접 사서 먹고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그리고 임재욱에게도 알려주고 싶었다.지금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더 이상 그의 아이를 갖고 싶지 않다고.약사는 그녀를 잠시 쳐다보다가 머뭇거리며 유리 상자에서 약을 꺼냈지만 내려놓지 않고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저기 혹시 그... 유병철의 딸?”당시 유시아의 화려한 결혼은 모든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언론에서도 이를 보도했다.살인자의 딸이라도 당당하게 재벌 집에 시집가는 운 좋은 인생이었다.물론 결말은 비극적이었다.유시아는 잠시 놀랐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한 글자씩 뱉어냈다.“유병철 씨는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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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은 밤, 유시아의 카카오톡을 받았을 때 임재욱은 병원에 있었다.신시연은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진료실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고 그동안에 임재욱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늦은 밤의 사립 병원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당직을 서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외에 거의 사람이 없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임재욱은 복도를 한참이나 누비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유시아를 병원으로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길에 신시연의 전화를 받고서 오게 된 것이다.배가 아프다고.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아프다고.신시연은 며칠 전에 병원에서 여러 번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해외에서 그러한 몹쓸 짓을 당하며 우울증과 부인병이 있는 외에 다른 수치들은 정상 범위 안에 있었다.그 말인즉슨,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재욱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신시연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임재욱 하나뿐이니 어찌 됐든 그녀를 잘 지켜야 하는 마음뿐이었다.그 누구에게도 다시는 상처를 받지 않게끔.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여 임재욱은 그녀를 직접 병원까지 데리고 오고 의사 선생님 입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확답을 듣고 나야만 마음이 놓일 수 있다.애타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렸다.유시아가 보낸 카카오톡인데,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보고 싶어요.]임재욱은 고개를 숙인 채 카톡 내용을 거듭 곱씹으며 유시아 사진으로 되어 있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자꾸 올라갔다.‘내가 보고 싶어? 별거한 지 하루 만에 벌써 내가 보고 싶은 거야?’‘우리 시아 이제 제법 솔직하네.’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어떻게 답장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응급실 문이 열렸다.도우미 김향화가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신시연을 부축하고 걸어 나왔다.신시연은 디자인이 아주 심플한 데님 스커트를 입었고 윤기가 별로 없어 보이는 머리를 돌돌 말아 묶어 올렸다.무척이나 초췌해 보이는 것이 가여운 느낌도 물씬 풍기고 있어 기고만장했던 그

  • 사랑이라는 죄로   제484화

    유리 구두를 품속에 꼭 안고 있는 유시아를 보고서 임재욱은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참으로 달래기 쉬운 여자라는 것을.특히 결혼하고 나서 아주 살짝만 잘해주어도 유시아는 아주 오랫동안 기뻐하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늘 임재욱 앞에만 서면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자기를 낮은 위치에 놓는 데 습관 되어 있다.임재욱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뽀뽀했다.“앞으로 매년 생일마다 예쁜 유리 구두 선물해 줄게. 어때?”“좋아요.”유시아는 말하면서 아주 유치하게 그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절대 어기지 않겠다고.”백화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일단 화실로 향했다.새로 구매한 공예품을 적당한 자리에 올려놓고 유시아의 제안으로 이채련의 병원까지 바래다주었다.유시아는 자기가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타입이라 이채련과 이미 약속했으니 꼭 지켜야 했다.하물며 자식도 없는 이체련에게 마지막 이 시간들이 더더욱 외로울 것이다.외부인들이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로 외롭다.임재욱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이채련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니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보내주었다.차는 곧 사립 병원 앞에 멈춰 섰고 임재욱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유시아는 차창에 대고 거듭 강조했다.“유리 구두랑 드레스들 옷방에 고이 모셔두도록 해요. 마구 놓지 말고요.”“알았어.”임재욱은 말하고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목을 확 잡고서 찐한 키스를 남기고 나서야 순순히 놓아 주었다.“얼른 가 봐.”“조심해서 가요.”임재욱은 조수석에 앉아 한결 가벼워진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서야 시선을 거두고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가는 길에 갑자기 신시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오빠, 배가 너무 아파요.”...병실로 돌아와 보니 이채련은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침대에 멍하니 누워 재미가 일도 없는 예능 프로를 보고 있었다.유시아가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채련은 놀라고도 기뻤다.“시아야,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유시아

  • 사랑이라는 죄로   제483화

    쇼핑은 늘 설레는 일이다.유시아는 자기 취향대로 화실 장식품으로 쓰일 공예품을 골랐다.이윽고 임재욱은 또 유시아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지난번에 두 사람은 함께 쇼핑하면서 많은 옷을 샀었지만, 신서현 부모님께 갑작스러운 상황이 일어나면서 유시아는 그 모든 옷을 모조리 청소 아주머니에게 줘 버렸다.그때의 아쉬움을 채워주기 위해 임재욱은 또다시 쇼핑하려고 한 것이다.게다가 다음 주면 대우 그룹 상장 20주년이다.정식적인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유시아를 자기 아내 신분으로 남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이브닝 파티에 어울릴만한 드레스와 신발을 살 예정이다.드레스는 그럭저럭 큰마음이 가지 않았는데, 유시아는 그 신발이 마음에 들었다.은백색의 하이힐로 예쁜 보석들로 가득 박혀 있어 매점 불빛 아래서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신데렐라 동화에 나올 법한 유리 구두 같았다.매점 직원은 유시아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고 바로 다가왔다.“손님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 이 제품은 저희 디자이너 선생님의 최신 디자인으로 지금 딱 한 켤레만 있습니다. 만약 이 신발을 신고 나가신다면...”임재욱은 갑자기 직원의 말을 끊어버렸다.“이미 결혼했고요. 이 사람은 제 아내예요.”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는데, 자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를 보고서 따라서 웃었다.“맞아요. 이 사람이 제 남편이에요.”매점 직원은 멍하니 있다가 바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베스트 쇼핑 가이드다운 실력을 드러냈다.“어머, 어쩐지 너무 어울리신다 했어요...”직원의 칭찬에 두 사람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이윽고 매점 직원은 분위기를 파악하며 유리 구두에 대해 더욱 디테일한 설명을 첨부하기 시작했다.“이 제품의 새끼 양가죽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착용감이 엄청 좋으실 거예요. 하루 종일 신고 걸으셔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게다가 우리 디자이너 선생님이 즉흥으로 만들어내신 작품이라 절대 똑같은 제품을 시중에서 보실 수 없을 거예요.”한 켤레일 뿐만 아니라 사이

  • 사랑이라는 죄로   제482화

    한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내가 뭐?”“한서준 씨는 당당해요?”유시아는 바로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었다.“임씨 가문에 접근한 그 의도를 다른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요? 할아버지, 재욱 씨 그리고 나까지 똑똑히 알고 있어요. 청아 씨만이 한서준 씨를 사랑해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요. 그렇게 쭉 모르는 척을 하며 모든 걸 감당하고 있었던 거라고요. 한서준 씨 역시 청아 씨를 이용한 게 아닌가요?”마지막 한 마디에 한서준은 침묵하고 말았다.그렇다. 임청아에게 접근한 이유는 유시아가 ‘스파이’로 움직여 주지 않겠다고 거절했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임씨 가문 천금을 노리게 된 것이다.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 변하게 되어 있다.임청아 대한 마음은 모략에서 시작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마음이 점점 사랑으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띠고 다가왔던 임청아가 어두운 자신의 삶을 밝게 비춰주는 것만 같았다.따라서 한서준은 임청아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차츰 생기게 된 것이다.임태훈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꼭 자기 곁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청아 씨 지금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에요.”“만약 청아 씨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말을 마치고 유시아는 차 문을 밀고 차에서 내려 병원 밖으로 걸어갔다.택시에 오른 유시아는 긴 망설임 끝에 끝내는 더 스케치 화실 주소를 운전 기사에게 알렸다.차는 화실 맞은 편에 세워졌고 유시아는 화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화실 안의 상황을 바로 체크할 수 있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최적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수많은 경호원들이 임태훈을 사이에 두고 화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임태훈은 벤틀리에 올라 강한 기운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유시아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고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바로 화실로 향해 달려갔다.화실 안과 밖은 겉은

  • 사랑이라는 죄로   제481화

    전화를 마치고 유시아는 혼자 밖에 없는 휴게실을 보고서 깊은 번뇌에 잠겼다.남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임태훈처럼 막무가내로 어처구니가 없는 노인이 있다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태훈이 끔찍이 여기는 임청아를 유시아가 계단에서 밀어버린 것도 아닌데, 왜 애꿎은 자기 화실을 닫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집안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스스로 반성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데, 그게 무엇이든 일단 남한테서 문제를 찾고 있으니, 권력을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했다.유시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고 불안함도 점점 커졌다.지금 운영하고 있는 더 스케치 화실도 용재휘가 먼저 시작한 것인데, 그와 더불어 학생들까지 모두 함께 넘겨주었는데, 만약 이대로 화실을 망쳐버린다면 용재휘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임재욱과 임태훈이 어느 정도로 얘기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화실이 그들 싸움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용기가 없어 일단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그렇게 한참이나 심장을 조이고 있었지만, 걸려 오는 전화는 없었다.유시아는 일이 어느 정도 망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학생 채팅방에 오늘 갑자기 일이 있다며 수업을 뒤로 미룬다고 알렸다.언제 다시 수업을 시작할지는 소식을 기다리라며 덧붙이기까지 했다.톡을 보내고서 유시아는 더 이상 핸드폰을 보지 않고 바로 병원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병원 대문을 나오자마자 한서준이 정면에서 오고 있었다.“유시아.”유시아는 고개를 들었고 그를 보게 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 났다.직감이 알려주건대, 절대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화실의 생존 여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심기까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한서준은 쉽사리 유시아를 놓아 주지 않았고 손을 내밀어 유시아의 손목을 꼭 잡았다.“물어볼 일이 있어.”말하면서 근처에 있는 지프차를 가리켰다.“차에 타서 얘기 하자.”“그쪽이랑 할 말

  • 사랑이라는 죄로   제480화

    유시아는 그 말을 이어받지 않고 집사의 바람대로 타이르기 시작했다.“몸이 아직 많이 허약해요. 먹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좀 먹어야 하거든요. 일이 어찌 됐든 일단 건강부터 챙겨야 해요.”임청아 그 말을 듣고서 쓴웃음을 지었다.“건강 회복되면 할아버지한테 잡혀가서 집에 감금되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유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어찌 됐든 할아버지 마음은 한결같을 거예요. 청아 씨를 아끼고 사랑하는 거요. 서로 대화가 필요한 거 같아요. 서로 터놓고 얘기하고 나면 오해가 풀리고 마음도 풀리면서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임청아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아이 낳고 나면 할아버지도 서준이도 원한을 내려놓고 행복만 할 수 있다고요.”“근데 이렇게 몸도 아끼지 않고 점점 더 막무가내로 나가면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은 점점 더 짙어질 거예요.”유시아는 말하면서 도우미 손에서 보신탕을 가져와 천천히 불며 임청아의 입가로 가져갔다.임청아는 생각 밖으로 무척이나 순순하게 유시아의 말을 따랐고 그녀의 말에 이치가 있는 것 같아 조용히 보신탕을 받아 마셨다.도우미와 집사는 두 사람이 티키타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서서히 마음이 놓였다.임청아가 뭐라도 먹기 시작하여 자기도 모르게 한시름을 놓으며 자리까지 비켜주려고 했다.두 사람이 마음 편히 말할 수 없을까 봐 눈치껏 일어서려는 것이다.“작은 사모님, 아가씨와 천천히 얘기하고 계세요. 밖에 나가 있을 테니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시고요.”“네, 가보세요.”도우미 일행이 나오고 나서야 유시아는 본론으로 들어갔다.“한서준 씨는 알고 있어요?”임청아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그런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잖아요.”요즘 임태훈뿐만 아니라 한서준도 눈을 부라리고 임청아를 찾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자 아파트도 호텔도 들어갈 수 없었고 버려진 강아지처럼 유시아 화실에 몸을 숨기고 지낸 것

  • 사랑이라는 죄로   제479화

    임청아 이름 석 자가 임재욱의 입에서 나오자, 유시아는 순간 청천벽력을 맞는 것만 같았다.심지어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물었다.“청아 씨가 왜 병원에 있는 거죠?”임청아는 임신한 것을 알고 매사에 조심하며 걸음 하나도 천천히 옮겼었다.게다가 해외에 있는 친구와 연락하여 해외로 떠날 준비까지 마쳤다고 했었다.그런데 관건이 되는 순간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고?“할아버지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거 아니야?”임재욱은 말하면서 차갑게 웃었다.“네 화실에 청아 숨겨 놓았잖아. 할아버지께서 그걸 과연 모르고 있었을 것 같아? 오늘 화실로 청아 데리러 갔었는데, 가지 않겠다고 청아가 하도 우기는 바람에 억지로 묶어서라도 데리고 가겠다며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거야.”그렇다면 아이를 유산했을지도 모른다.임태훈의 습관에 따라 생각해 본다면 이 화살은 결국 유시아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임재욱이 그렇게 경고하였건만 유시아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약해지는 마음에 언젠가는 구렁이에 빠지게 될 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 일 줄은 몰랐다. 임재욱은 한숨을 내쉬며 꾸짖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병원 주소 보내줄 테니 얼른 가 봐.”말을 마치고 임재욱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고 운전 기사에게 새로운 목적지를 알려주었다.같은 시각, 병원 안에서.임청아는 이미 수술을 마쳤고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이미 가문의 집사와 간호인이 옆에 있었고 병실 문 앞에는 임태훈이 보낸 경호원도 있었다.다만 경호원이 경계해야 할 상대는 유시아가 아니라 한서준이다.따라서 유시아는 별다른 막힘없이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상에 누워 있는 임청아는 얼굴에 핏기 하나 없었고 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불과 하룻밤 사이에 모든 활력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집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주 공손하게 유시아에

  • 사랑이라는 죄로   제478화

    조금 전까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던 임재욱은 멈칫거리고 말았다.이윽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유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별거하자는 뜻이야?”“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유시아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머리가 아픈 듯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그 시간으로 시연이한테 집중해도 되잖아요. 나도 마침 어머님 곁에 좀 있어드리고... 서로에게 지금 이게 최우선인 것 같아요.”임재욱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서 낙담한 모습으로 말했다.“그래. 네가 좋다고 하면 그게 좋은 거겠지. 그렇게 하자.”말을 마치고 그는 계속 밥을 먹었다.유시아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서 아련하게 웃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이튿날 아침, 유시아는 임재욱이 출근하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일상복 몇 벌과 일상용품을 챙겨 작은 트렁크 안에 놓고 바로 이채련한테 가려고 했다.허씨 아주머니는 트렁크를 들고 내려오는 유시아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사모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설마... 가출하려는 건 아니죠?”유시아는 허씨 아주머니를 향해 웃었다.“아니에요. 친척분이 좀 위독하신데 제가 옆에서 좀 챙겨드리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얼마 걸리지 않을 거고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트렁크를 들고서 집을 나섰다.이채련이 지내고 있는 병실이 VIP 병실로 널찍한 객실까지 갖춰져 있다.유시아는 간호사에게 접이식 침대와 이불을 요구했고 간단히 정리하고 나니 잘 자리가 아늑하게 마련되었다.이채련은 더 이상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어 하루 24시간을 침대 위에서 보내고 있다.얼굴도 하도 여위어 본연의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그전에도 유시아는 이채련에게 이곳에서 며칠 동안 함께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지만 이채련은 행여나 자기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흠이 생기게 될까 봐 동의하지 않았었다.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갖은 풍

  • 사랑이라는 죄로   제477화

    임재욱은 핸들을 꼭 움켜쥐고서 앞만 바라보았으나 두 눈에는 고통과 망연함이 가득했다.“시연이 해외에 있을 때, 몹쓸 짓을 당했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나.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게 된 거야.”유시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볼륨까지 높아졌다.“어머, 어떡해요!”평소에 신시연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기는 했다.여자에게 있어서 그런 몹쓸 짓을 당한다는 건 치명적인 타격과 치욕이 아닐 수가 없다.게다가 부모님의 일까지 더해지니 조금 전 식당에서 봤던 신시연의 모습이 이해되었다.임재욱은 말하면서 후회와 자책하는 빛을 드러냈다.“그렇게 가고 싶지 않다는 시연이를 내가 억지로 보낸 거야.”그때는 모든 걸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낯선 곳으로 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학업에만 집중하면 자연스레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삶을 그려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하지만 임재욱이 잊고 있었던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신시연이 이제 갓 20살을 넘은 꽃다운 여자아이라는 것이다.해외에는 불안정 요소도 많고 미처 생각지 못하는 위험도 많다.게다가 젊은 나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릇된 길로 들어서기도 아주 위험하고 말이다.신시연 곁에 사람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24시간 동안 찰싹 달라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유시아와 결혼하고 나서 신혼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신시연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지금 임재욱은 신서현에게 미안할 뿐이다. 하나뿐인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하지만 그가 말한 본의와 달리 듣고 있는 유시아는 또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유시아의 기억으로는 신시연이 해외로 보내진 이유는 이러하다.그때 신시연은 정운시 대학교 교내 사이트에 유시아를 먹칠하는 게시글을 올리면서 유시아로 하여금 학업을 이어갈 수도 수업을 들을 수도 없게 악한 상황을 만들었었다.마침 그 일을 소현우가 알게 되면서 유시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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