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하는 유시아와 달리 용재휘는 대수롭지 않은 듯했다.“임재욱은 어떻게 됐어요?”지금 그에게 최대 관심사는 바로 이거였다.감옥을 가든 아니면 사형을 받는 그딴 거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고.만약 이번 차 사고로 임재욱이 목숨을 잃었거나 아니면 다리 하나라도 부러져서 평생 휠체어에 기댄 채 살아가야 한다면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앞서 이러한 선택을 했을 때부터 용재휘는 마땅한 죗값을 치를 준비를 했었다.어떠한 대가를 치르든 상관없이 유시아가 편하게 살았으면 하는 게 전부였다.유시아는 그런 그를 째려보며 입을 여는데.“그 사람이 죽으면 재휘 씨라고 살 수 있을 것 같아요?”임재욱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기게 된다면 임태훈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어쩌면 용재휘는 그의 손에 놀아나면서 평생을 생지옥에서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용씨 가문의 세력은 정운시가 아니라 해외에 있으니 어찌할 수도 없을 것이고.심씨 가문은 지난번의 일을 겪고 나서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기에 용재휘에게 그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할 것이고 그럴만한 힘도 없을 것이다.무엇보다도 가장 섬뜩한 부분은 어쩌면 심씨 가문까지 다칠 수도 있다.용재휘는 시종일관 너스레 뜨며 웃는데.“감옥에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그만 좀 해요!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요!”유시아는 그의 말을 바로 끊어버렸다.“재휘 씨 절대 감옥에 못 가게 내가 어떻게든 막을 거예요. 감옥은... 지낼 곳이 못 돼요...”그곳에서 자그마치 3년을 버티며 살아온 유시아이다.그 누구보다도 감옥이 얼마나 어둡고 더러운 곳인지를 뼈저리게 느낀 사람이다.일단 감옥에 들어가게 된다면 용재휘의 인생이 그로써 ‘끝’이 난다는 것을 의미한다.자유를 잃고 지금과는 정반대인 환경 속에서 아등바등 살아야 한다.예술을 그려내던 두 손으로 온갖 궂은 일을 다 하게 될 것이며 사람답게 살 수 없을 것이다.심지어 더욱더 어둡고 차마 입에 올리기도 수치스러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갖은 곤란을 겪고 온 유시아인
하물며 용재휘가 아니었어도 유시아는 임재욱의 곁을 떠날 수 없다....병원으로 돌아왔을 때 임재욱은 이미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유시아는 여러 명의 간호사에게 묻고 나서야 펜트하우스 VIP 병실에 있는 임재욱을 찾을 수 있었다.문은 반쯤 닫혀 있었고 유시아는 문 앞에서 서성거렸다.병실에는 강석호가 임재욱의 곁을 지키고 있는데 지금 한창 뭐라고 말하고 있는 모습이다.들어가는 것도 그대로 돌아서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한참을 머뭇거리고 있던 그 찰나 임재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시아야, 들어와.”그 소리에 유시아는 억지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재욱 씨...”유시아가 들어오자 가만히 있기 뻘쭘해진 강석호는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대표님, 유시아 씨,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편하게 얘기 나누세요.”병실 밖으로 걸어 나가면서 문까지 굳게 닫아 주었다.병실 안에 덩그러니 남게 된 두 사람, 유시아는 병상 침대 머리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재욱 씨, 괜찮아요? 의사는 뭐라고 하던가요? 괜찮은 거 맞죠?”“걱정하지 마.”임재욱은 입꼬리를 올리며 링거를 맞고 있지 않은 손으로 유시아의 손을 감쌌다.“죽을 리 없어. 평생 네 곁에 있을 거야.”“...”임재웃은 기분이 제법 좋아 보였다.달콤한 듯한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오니 유시아는 왠지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순간 뭐라고 대답할지 몰라 입만 벙긋거렸다.조금 전 강석호가 임재욱에게 알린 게 확실하다는 생각까지 들면서.용재휘를 보러 구치소로 간 것에 대해서 말이다.“괜찮으면 됐어요.”임재욱은 그녀의 손을 꼭 감싸며 걱정했다.“많이 놀랐어?”그 질문에 유시아에 진심 어린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무서웠다. 만약 임재욱에게 사달이라도 난다면 용재휘가 많이 난처해지니.두 남자 사이에 서 있는 유시아는 어느 한쪽으로 조금 더 다가가야 할지 몰랐다.그저 두 사람 모두 괜찮기만을 바라면서 다치지도 않고 감옥에 들어가는 일도 없었으면 하는 것뿐이다.병상에
이제 막 차 사고를 겪고 응급실에서 실려 나온 임재욱이지만 손힘이 대단했다.그에게 꽉 잡힌 턱이 산산조각 날 것만 같았다. 이성을 잃을 정도로 아파 났는데.유시아는 아주 민감하게 그의 정서를 알아차렸다.화를 내는 것이 확실하며 진심으로 노발대발하고 있다고.‘내가 너무 급했어...’응급실에서 갓 나온 사람한테 용서니 뭐니, 용재휘를 위해 부탁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말이다.“말해!”얼굴이 당장 터질 것만 같은 유시아를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임재욱은 소리를 질렀다.괴로워하는 그녀의 모습을 훤히 보고 있음에도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말하라고 했잖아! 근데 왜 말을 안 해!”유시아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겨우 소리를 내었다.“부탁 좀 할 게요. 재휘 씨 한 번만 봐주세요. 절대 감옥으로 보내지 말아 주세요...”병상에 누워서 유시아를 괴롭히던 임재욱은 ‘용재휘’라는 이름을 듣고서 마침내 터지고 말았다.응급치료를 받고 나온 환자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단번에 유시아의 목을 잡고 침대로 눕혔으니. 꼼짝달싹 못 할 정도로.순간 링거 호스로 피가 거꾸로 흐르게 되었다.그게 마냥 거추장스러웠던 임재욱은 단번에 링거 호스를 뽑아 버렸는데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를 보였다.핏발이 가득 서린 두 눈으로 유시아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입을 여는데.“다정한 척, 관심하는 척, 부드러운 척... 온갖 척이라는 척은 다 하더니 이거였어?용재휘 그놈이 감옥에 들어갈까 봐 걱정돼서? 내가 그놈 봐줬으면 하지? 그렇지?”응급실에서 사신과 겨루고 있을 때 유시아는 단 1초도 밖에서 기다리지 않고 구치소로 달려갔다.용재휘를 위해 변호사를 선임하고 필요한 물건들까지 꼼꼼히 챙겨 가져다주었다.임재욱이 죽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았고 용재휘가 감옥에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장 애간장이 탔다.유시아에게 있어서 임재욱은 소현우보다 못하고 용재휘보다 못하며 심지어 예전에 키웠던 개만도 못했다.이러저러한 생각에 임재욱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순간 눈앞이 희미해지
말을 마치고 유시아는 바로 위층으로 올라갔다.풀이 잔뜩 죽은 듯한 유시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허씨 아주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그리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부엌으로 돌아갔다.침실로 돌아온 유시아는 힘없이 두 사람만의 침대로 뻗었다.임재욱의 손에 꼭 조였던 목은 아직도 따끔거렸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일을 망친 것만 같았고 임재욱에게 미움을 제대로 사면서 용재휘까지 심연으로 더 밀어버렸으니.너그러운 마음으로 봐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우스웠다.유시아는 옷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더듬어 심하윤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한참을 망설였지만 결국은 그럴 용기가 없어 용재휘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임재욱에게 사정을 하는 건 이로써 글러 먹은 것 같으니 다른 길을 찾아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변호사 측 역시 상황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대우 그룹 근처에서 용재휘가 임재욱을 들이박았고 목격자도 많고 곳곳에 CCTV가 있었다.인증, 물증까지 확보한 상황에서 용재휘한테 음주 운전 테스트까지 했는데 음성으로 나와 일은 더더욱 심각해진 것이다.실수가 아니라 계획 살인으로 성질이 달라졌기에.지금의 형세로 본다면 무기징역은 아니더라도 몇 년 정도는 선고받을 것 같다.유시아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다른 방법은 없나요? 감옥에만 들어가지 않게 해주세요. 배상금은 얼마든지...”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유시아는 자기가 내뱉은 말에 웃음이 터졌다.‘배상금? 임재욱한테 돈을 준다고?’임재욱에게 있어서 돈은 숫자에 불과한데.그깟 돈을 받으려고 합의해 주는 그런 사람이 절대 아니란 말이다.그렇게 많은 일을 겪고서도 유시아는 아직도 바보 같고 순진하다.그 뒤로 유시아는 집에 이틀 정도 있었다.임재욱과 대놓고 싸우기도 했으니 이제 와서 또 아첨을 떤다는 건 말도 안 되니 말이다.오히려 그와 반대로 임재욱의 심기를 건드리면서 역효과를 일으킬지도 모른다.3일째 되던 날 강석호가 왔다.임재욱의 지시로 자료를 가지러 왔는데
유시아도 더 이상 빙빙 돌려 말하고 싶지 않았다.임재욱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 보온 도시락통을 테이블 위에 놓고서 입을 여는데.“비아냥거리려고 부르신 거예요? 제가 보기엔 아닌 거 같은데.”임재욱은 그리 한가한 사람도 아니기와 그렇게 실없는 사람도 아니다.유시아를 부른 건 용재휘 사건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고 싶다는 의지가 깃들어 있다.다만 유시아는 그에 마땅한 대가를 좀 치러야 할 뿐이고.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유시아에게 두려운 것이 없고 감당할 수 없는 것도 없다.임재욱은 살짝 웃으며 손끝으로 안경테를 무심코 툭 밀었다.“점점 똑똑해지는데? 네가 그러면 그럴수록 내가 널 갖고 싶어지잖아.”임재욱은 노트북을 한쪽으로 밀고서 유시아의 손목을 확 당겨 잡았다.침대 머리에 그녀를 앉히고 어느새 새빨개진 그녀의 귀 망울을 서서히 간지럽혔다.“변호사한테 소송 취소하라고 할 수 있어. 그럼, 용재휘는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되겠지? 근데 너도 앞으로 걔랑 다시는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그 말을 듣고서 유시아는 경계가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게 무슨 뜻이에요?”‘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게 무슨 뜻이지? 재휘 씨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건가?’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유시아를 바라보며 임재욱은 피식 웃었다.“긴장할 필요 없어. 정운시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뜻이었어.”용재휘가 지냈던 해외로 돌아가서 계속 도련님 행세를 하면서 지내라는 것.정운시에서 감빵 생활이나 하면서 지내는 것보다 훨씬 낫다.사고를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느 쪽이 좋은지 판단을 내릴 수 있다.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한시름을 놓게 되었다.“알았어요. 해외로 떠나게 할게요. 다시는 정운시에 들어오지 못하게 제가 그렇게 만들게요.”“실은 좀 궁금해...”임재욱은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면서 입술을 살짝 사리물었다.“내가 화낼 수도 있는데 이렇게 또다시 찾아와서 사정하는 이유가 뭔지... 용재휘가많이 신경 쓰이나 봐? 그래?”쓴웃음을 지으며 까칠한 눈매로 계속 숨
남자 감옥은 여자 감옥보다 더더욱 험악할 것이다.용재휘처럼 어릴 적부터 명문 세가의 도련님으로 살아왔던 사람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만신창이가 된다.유시아는 자기 힘으로 지키고 싶은 사람들을 어떻게든 지키고 싶었다.그 힘이 아주 미약할지언정 그들을 위해 용기는 내고 결심을 내리면서....임재욱은 변호사에게 소송을 취소하라고 했고 용재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석방되었다.그 소식을 듣자마자 유시아는 바로 구치소 앞으로 달려가 그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기 시작했다.직접 용재휘를 마중하여 직접 용재휘를 해외로 보내려고.만약 정운시에서 계속 머물게 된다면 임재욱은 반드시 또다시 수를 써서 그를 괴롭힐 것이다.불과 며칠 만이지만 용재휘는 전보다 훨씬 수척해진 모습이었다.수염도 조금 나고 입고 있던 옷도 주글주글해지고 무척이나 퇴폐해 보였다.푸른색 츄르닝을 입고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유시아를 보고서 용재휘는 빠르게 달려왔다.“시아 씨.”“수고했어요.”유시아는 그를 향해 웃었다.“이제 다 괜찮아요.”웃고 있는 그녀와 달리 용재휘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졌다.“임재욱한테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죠? 이렇게 쉽게 풀어줄 사람이 아닌데.”“그런 거 아니에요. 재휘 씨...”유시아는 망설이다가 다시 천천히 덧붙였다.“재휘 씨가 지내던 해외로 그만 돌아가요. 그리고 다시는 여기로 돌아오지 말아요. 그렇게 해주면 안 될까요?”용재휘는 갑작스러운 말을 듣고서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에 잠겼다.“임재욱 뜻인가요?”“내 뜻이기도 해요.”유시아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엄숙하게 말했다.“여기에 있으면 내가 피곤해져서 그래요. 여기저기 사고만 치고 말이에요. 뺑소니 사고를 낸 것도 아직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았어요. 임재욱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시 재휘 씨를 법정에 세울 수 있다고요. 제발...”“시아 씨!”용재휘는 갑자기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목을 꼭 잡았다.“같이 가요. 같이 해외로 떠나서 우리 집으로 가요.”어차피 임재욱은 아직 병상에 누워있고 유
뼈마디만 남은 듯한 유시아의 손목이다.힘을 아주 살짝만 들여도 단번에 부러질 듯한 모습에 용재휘는 가슴이 미어졌다.“시아 씨는 물건이 아니잖아요... 그렇게 쉽게 팔아넘기지 말아요...”“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어요.”유시아는 그를 바라보며 피식 웃더니 힘껏 또다시 그의 손을 뿌리쳤다.이윽고 걸음을 재촉하며 구치소 문 앞에 있는 마이바흐 차로 다가갔다.뒷좌석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며 입을 열었다.“강 비서님, 출발하세요.”임재욱의 뜻이었다. 구치소 앞에서 용재휘를 마중하고 그에게 직접 해외로 떠나라고 하는 것.그래서 일부러 강석호에게 유시아를 데려다주라고 한 것이다.시동이 걸리고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백미러에 용재휘의 모습이 보였다.미친 듯이 뛰어오는 그의 모습. 어떻게든 달리고 있는 차를 멈춰 세우려고 하는 그의 모습...절로 가슴이 미어지는 순간이었다. 유시아는 차마 볼 수 없을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갈기갈기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안간힘을 써가며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꾸역꾸역 삼키면서.‘참아... 심씨 가문이 파산나는 것도 재휘 씨가 감옥에 들어가는 것도 절대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어...’‘내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인데... 참자...’같은 날 저녁 티켓이었다.용재휘는 비행기에 오르고 나서 유시아에게 사진 한 장을 보냈다.비행기 안에서 공항을 찍은 사진인데, 떠난다는 뜻이었다.유시아는 입술을 사리물고 끝끝내 아무런 답장도 하지 않았다.용재휘가 떠난 지 삼 일째 되던 날, 유시아는 택배 하나를 받았는데 보낸 이가 용재휘였다.속포 안에는 화실 키랑 화실과 계약서를 비롯한 화실과 관련되어 있는 여러 문서가 들어있었다.그 외에 쪽지 한 장이 있는데.[화실, 그리고 어린 친구들 모두 시아 씨한테 맡길게요.] 유시아는 그 키를 손에 꼭 쥐고서 깊은 사색에 잠겼는데 망설인 끝에 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었다.“뭐 좀 의논하고 싶어서 전화하는 길이에요. 재휘 씨는 이미 해외로 떠났는데 가면서 운영하고 있던 화실을
용재휘처럼 유시아도 실력이 만만치 않으니 말이다.그리고 아이들을 상대로 유시아는 상대적으로 간단한 방식으로 가르치고 있다.정신을 몰두하여 사과 한 알을 그리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아이가 갑자기 정적을 깨뜨렸다.“시아 쌤, 저기 어떤 아저씨가 보고 있어요.”유시아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는데 유리문 밖에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임재욱이다. 오늘 퇴원하자마자 유시아를 보려고 일부러 찾아온 것이다.겸사겸사 용재휘가 남긴 흔적도 보고.그렇게 1층부터 훑으면서 올라왔는데 2층에 이르자마자 유시아의 모습에 시선이 쏠리게 된 것이다.필을 들고 몰두하고 있는 유시아의 모습이 아름답고 우아해 보였다.그림을 그리고 있으나 가장 아름다운 그림은 그림을 그리고 있는 유시아의 모습이었다. 임재욱의 눈에는.시선이 마주치자, 임재욱은 멋쩍은 듯 바로 몸을 돌려 1층으로 내려갔다.소파에 느긋하게 기대어 앉아 있는데 직원이 그에게 따뜻한 물 한 잔을 가져다주었다.그의 외모에 저절로 시선이 끌린 직원은 내심 속으로 감탄했다.‘누구 가장이지? 너무 잘생겼잖아.’“재욱 씨.”유시아가 아래층으로 내려왔다.“병원에서 막 나와도 되는 거예요?”“그럼, 안 돼? 내 집고 아닌데 평생 병원에서 살았으면 좋겠어?”임재욱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유시아를 흘겨보았다.이윽고 손목시계까지 보면서 다시 입을 여는데.“언제 퇴근해?”“6시 아니면 7시쯤에야 퇴근할 것 같은데요.”유시아는 살짝 머뭇거렸다.아이들은 거의 다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고 그림 그리기에 소질이 있어 자원으로 혹은 부모님의 등살에 여기로 온 것이다.초등학교 하교 시간은 4, 5시쯤이고 유시아는 한두 시간 정도 수업을 하곤 한다.6, 7시가 되어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갔을 때 유시아는 야식 먹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갔었다.매일을 그렇게 보냈는데 임재욱이 옴으로 하여 모든 패턴이 망가졌다.“일단 밥부터 먹으러 가세요.”“완쾌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몸부터 챙기셔야죠.”“저 기다렸다가
늦은 밤, 유시아의 카카오톡을 받았을 때 임재욱은 병원에 있었다.신시연은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진료실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고 그동안에 임재욱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늦은 밤의 사립 병원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당직을 서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외에 거의 사람이 없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임재욱은 복도를 한참이나 누비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유시아를 병원으로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길에 신시연의 전화를 받고서 오게 된 것이다.배가 아프다고.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아프다고.신시연은 며칠 전에 병원에서 여러 번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해외에서 그러한 몹쓸 짓을 당하며 우울증과 부인병이 있는 외에 다른 수치들은 정상 범위 안에 있었다.그 말인즉슨,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재욱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신시연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임재욱 하나뿐이니 어찌 됐든 그녀를 잘 지켜야 하는 마음뿐이었다.그 누구에게도 다시는 상처를 받지 않게끔.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여 임재욱은 그녀를 직접 병원까지 데리고 오고 의사 선생님 입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확답을 듣고 나야만 마음이 놓일 수 있다.애타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렸다.유시아가 보낸 카카오톡인데,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보고 싶어요.]임재욱은 고개를 숙인 채 카톡 내용을 거듭 곱씹으며 유시아 사진으로 되어 있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자꾸 올라갔다.‘내가 보고 싶어? 별거한 지 하루 만에 벌써 내가 보고 싶은 거야?’‘우리 시아 이제 제법 솔직하네.’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어떻게 답장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응급실 문이 열렸다.도우미 김향화가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신시연을 부축하고 걸어 나왔다.신시연은 디자인이 아주 심플한 데님 스커트를 입었고 윤기가 별로 없어 보이는 머리를 돌돌 말아 묶어 올렸다.무척이나 초췌해 보이는 것이 가여운 느낌도 물씬 풍기고 있어 기고만장했던 그
유리 구두를 품속에 꼭 안고 있는 유시아를 보고서 임재욱은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참으로 달래기 쉬운 여자라는 것을.특히 결혼하고 나서 아주 살짝만 잘해주어도 유시아는 아주 오랫동안 기뻐하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늘 임재욱 앞에만 서면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자기를 낮은 위치에 놓는 데 습관 되어 있다.임재욱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뽀뽀했다.“앞으로 매년 생일마다 예쁜 유리 구두 선물해 줄게. 어때?”“좋아요.”유시아는 말하면서 아주 유치하게 그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절대 어기지 않겠다고.”백화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일단 화실로 향했다.새로 구매한 공예품을 적당한 자리에 올려놓고 유시아의 제안으로 이채련의 병원까지 바래다주었다.유시아는 자기가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타입이라 이채련과 이미 약속했으니 꼭 지켜야 했다.하물며 자식도 없는 이체련에게 마지막 이 시간들이 더더욱 외로울 것이다.외부인들이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로 외롭다.임재욱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이채련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니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보내주었다.차는 곧 사립 병원 앞에 멈춰 섰고 임재욱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유시아는 차창에 대고 거듭 강조했다.“유리 구두랑 드레스들 옷방에 고이 모셔두도록 해요. 마구 놓지 말고요.”“알았어.”임재욱은 말하고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목을 확 잡고서 찐한 키스를 남기고 나서야 순순히 놓아 주었다.“얼른 가 봐.”“조심해서 가요.”임재욱은 조수석에 앉아 한결 가벼워진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서야 시선을 거두고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가는 길에 갑자기 신시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오빠, 배가 너무 아파요.”...병실로 돌아와 보니 이채련은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침대에 멍하니 누워 재미가 일도 없는 예능 프로를 보고 있었다.유시아가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채련은 놀라고도 기뻤다.“시아야,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유시아
쇼핑은 늘 설레는 일이다.유시아는 자기 취향대로 화실 장식품으로 쓰일 공예품을 골랐다.이윽고 임재욱은 또 유시아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지난번에 두 사람은 함께 쇼핑하면서 많은 옷을 샀었지만, 신서현 부모님께 갑작스러운 상황이 일어나면서 유시아는 그 모든 옷을 모조리 청소 아주머니에게 줘 버렸다.그때의 아쉬움을 채워주기 위해 임재욱은 또다시 쇼핑하려고 한 것이다.게다가 다음 주면 대우 그룹 상장 20주년이다.정식적인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유시아를 자기 아내 신분으로 남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이브닝 파티에 어울릴만한 드레스와 신발을 살 예정이다.드레스는 그럭저럭 큰마음이 가지 않았는데, 유시아는 그 신발이 마음에 들었다.은백색의 하이힐로 예쁜 보석들로 가득 박혀 있어 매점 불빛 아래서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신데렐라 동화에 나올 법한 유리 구두 같았다.매점 직원은 유시아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고 바로 다가왔다.“손님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 이 제품은 저희 디자이너 선생님의 최신 디자인으로 지금 딱 한 켤레만 있습니다. 만약 이 신발을 신고 나가신다면...”임재욱은 갑자기 직원의 말을 끊어버렸다.“이미 결혼했고요. 이 사람은 제 아내예요.”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는데, 자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를 보고서 따라서 웃었다.“맞아요. 이 사람이 제 남편이에요.”매점 직원은 멍하니 있다가 바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베스트 쇼핑 가이드다운 실력을 드러냈다.“어머, 어쩐지 너무 어울리신다 했어요...”직원의 칭찬에 두 사람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이윽고 매점 직원은 분위기를 파악하며 유리 구두에 대해 더욱 디테일한 설명을 첨부하기 시작했다.“이 제품의 새끼 양가죽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착용감이 엄청 좋으실 거예요. 하루 종일 신고 걸으셔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게다가 우리 디자이너 선생님이 즉흥으로 만들어내신 작품이라 절대 똑같은 제품을 시중에서 보실 수 없을 거예요.”한 켤레일 뿐만 아니라 사이
한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내가 뭐?”“한서준 씨는 당당해요?”유시아는 바로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었다.“임씨 가문에 접근한 그 의도를 다른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요? 할아버지, 재욱 씨 그리고 나까지 똑똑히 알고 있어요. 청아 씨만이 한서준 씨를 사랑해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요. 그렇게 쭉 모르는 척을 하며 모든 걸 감당하고 있었던 거라고요. 한서준 씨 역시 청아 씨를 이용한 게 아닌가요?”마지막 한 마디에 한서준은 침묵하고 말았다.그렇다. 임청아에게 접근한 이유는 유시아가 ‘스파이’로 움직여 주지 않겠다고 거절했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임씨 가문 천금을 노리게 된 것이다.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 변하게 되어 있다.임청아 대한 마음은 모략에서 시작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마음이 점점 사랑으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띠고 다가왔던 임청아가 어두운 자신의 삶을 밝게 비춰주는 것만 같았다.따라서 한서준은 임청아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차츰 생기게 된 것이다.임태훈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꼭 자기 곁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청아 씨 지금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에요.”“만약 청아 씨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말을 마치고 유시아는 차 문을 밀고 차에서 내려 병원 밖으로 걸어갔다.택시에 오른 유시아는 긴 망설임 끝에 끝내는 더 스케치 화실 주소를 운전 기사에게 알렸다.차는 화실 맞은 편에 세워졌고 유시아는 화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화실 안의 상황을 바로 체크할 수 있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최적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수많은 경호원들이 임태훈을 사이에 두고 화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임태훈은 벤틀리에 올라 강한 기운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유시아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고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바로 화실로 향해 달려갔다.화실 안과 밖은 겉은
전화를 마치고 유시아는 혼자 밖에 없는 휴게실을 보고서 깊은 번뇌에 잠겼다.남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임태훈처럼 막무가내로 어처구니가 없는 노인이 있다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태훈이 끔찍이 여기는 임청아를 유시아가 계단에서 밀어버린 것도 아닌데, 왜 애꿎은 자기 화실을 닫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집안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스스로 반성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데, 그게 무엇이든 일단 남한테서 문제를 찾고 있으니, 권력을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했다.유시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고 불안함도 점점 커졌다.지금 운영하고 있는 더 스케치 화실도 용재휘가 먼저 시작한 것인데, 그와 더불어 학생들까지 모두 함께 넘겨주었는데, 만약 이대로 화실을 망쳐버린다면 용재휘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임재욱과 임태훈이 어느 정도로 얘기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화실이 그들 싸움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용기가 없어 일단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그렇게 한참이나 심장을 조이고 있었지만, 걸려 오는 전화는 없었다.유시아는 일이 어느 정도 망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학생 채팅방에 오늘 갑자기 일이 있다며 수업을 뒤로 미룬다고 알렸다.언제 다시 수업을 시작할지는 소식을 기다리라며 덧붙이기까지 했다.톡을 보내고서 유시아는 더 이상 핸드폰을 보지 않고 바로 병원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병원 대문을 나오자마자 한서준이 정면에서 오고 있었다.“유시아.”유시아는 고개를 들었고 그를 보게 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 났다.직감이 알려주건대, 절대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화실의 생존 여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심기까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한서준은 쉽사리 유시아를 놓아 주지 않았고 손을 내밀어 유시아의 손목을 꼭 잡았다.“물어볼 일이 있어.”말하면서 근처에 있는 지프차를 가리켰다.“차에 타서 얘기 하자.”“그쪽이랑 할 말
유시아는 그 말을 이어받지 않고 집사의 바람대로 타이르기 시작했다.“몸이 아직 많이 허약해요. 먹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좀 먹어야 하거든요. 일이 어찌 됐든 일단 건강부터 챙겨야 해요.”임청아 그 말을 듣고서 쓴웃음을 지었다.“건강 회복되면 할아버지한테 잡혀가서 집에 감금되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유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어찌 됐든 할아버지 마음은 한결같을 거예요. 청아 씨를 아끼고 사랑하는 거요. 서로 대화가 필요한 거 같아요. 서로 터놓고 얘기하고 나면 오해가 풀리고 마음도 풀리면서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임청아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아이 낳고 나면 할아버지도 서준이도 원한을 내려놓고 행복만 할 수 있다고요.”“근데 이렇게 몸도 아끼지 않고 점점 더 막무가내로 나가면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은 점점 더 짙어질 거예요.”유시아는 말하면서 도우미 손에서 보신탕을 가져와 천천히 불며 임청아의 입가로 가져갔다.임청아는 생각 밖으로 무척이나 순순하게 유시아의 말을 따랐고 그녀의 말에 이치가 있는 것 같아 조용히 보신탕을 받아 마셨다.도우미와 집사는 두 사람이 티키타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서서히 마음이 놓였다.임청아가 뭐라도 먹기 시작하여 자기도 모르게 한시름을 놓으며 자리까지 비켜주려고 했다.두 사람이 마음 편히 말할 수 없을까 봐 눈치껏 일어서려는 것이다.“작은 사모님, 아가씨와 천천히 얘기하고 계세요. 밖에 나가 있을 테니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시고요.”“네, 가보세요.”도우미 일행이 나오고 나서야 유시아는 본론으로 들어갔다.“한서준 씨는 알고 있어요?”임청아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그런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잖아요.”요즘 임태훈뿐만 아니라 한서준도 눈을 부라리고 임청아를 찾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자 아파트도 호텔도 들어갈 수 없었고 버려진 강아지처럼 유시아 화실에 몸을 숨기고 지낸 것
임청아 이름 석 자가 임재욱의 입에서 나오자, 유시아는 순간 청천벽력을 맞는 것만 같았다.심지어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물었다.“청아 씨가 왜 병원에 있는 거죠?”임청아는 임신한 것을 알고 매사에 조심하며 걸음 하나도 천천히 옮겼었다.게다가 해외에 있는 친구와 연락하여 해외로 떠날 준비까지 마쳤다고 했었다.그런데 관건이 되는 순간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고?“할아버지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거 아니야?”임재욱은 말하면서 차갑게 웃었다.“네 화실에 청아 숨겨 놓았잖아. 할아버지께서 그걸 과연 모르고 있었을 것 같아? 오늘 화실로 청아 데리러 갔었는데, 가지 않겠다고 청아가 하도 우기는 바람에 억지로 묶어서라도 데리고 가겠다며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거야.”그렇다면 아이를 유산했을지도 모른다.임태훈의 습관에 따라 생각해 본다면 이 화살은 결국 유시아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임재욱이 그렇게 경고하였건만 유시아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약해지는 마음에 언젠가는 구렁이에 빠지게 될 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 일 줄은 몰랐다. 임재욱은 한숨을 내쉬며 꾸짖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병원 주소 보내줄 테니 얼른 가 봐.”말을 마치고 임재욱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고 운전 기사에게 새로운 목적지를 알려주었다.같은 시각, 병원 안에서.임청아는 이미 수술을 마쳤고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이미 가문의 집사와 간호인이 옆에 있었고 병실 문 앞에는 임태훈이 보낸 경호원도 있었다.다만 경호원이 경계해야 할 상대는 유시아가 아니라 한서준이다.따라서 유시아는 별다른 막힘없이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상에 누워 있는 임청아는 얼굴에 핏기 하나 없었고 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불과 하룻밤 사이에 모든 활력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집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주 공손하게 유시아에
조금 전까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던 임재욱은 멈칫거리고 말았다.이윽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유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별거하자는 뜻이야?”“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유시아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머리가 아픈 듯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그 시간으로 시연이한테 집중해도 되잖아요. 나도 마침 어머님 곁에 좀 있어드리고... 서로에게 지금 이게 최우선인 것 같아요.”임재욱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서 낙담한 모습으로 말했다.“그래. 네가 좋다고 하면 그게 좋은 거겠지. 그렇게 하자.”말을 마치고 그는 계속 밥을 먹었다.유시아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서 아련하게 웃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이튿날 아침, 유시아는 임재욱이 출근하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일상복 몇 벌과 일상용품을 챙겨 작은 트렁크 안에 놓고 바로 이채련한테 가려고 했다.허씨 아주머니는 트렁크를 들고 내려오는 유시아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사모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설마... 가출하려는 건 아니죠?”유시아는 허씨 아주머니를 향해 웃었다.“아니에요. 친척분이 좀 위독하신데 제가 옆에서 좀 챙겨드리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얼마 걸리지 않을 거고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트렁크를 들고서 집을 나섰다.이채련이 지내고 있는 병실이 VIP 병실로 널찍한 객실까지 갖춰져 있다.유시아는 간호사에게 접이식 침대와 이불을 요구했고 간단히 정리하고 나니 잘 자리가 아늑하게 마련되었다.이채련은 더 이상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어 하루 24시간을 침대 위에서 보내고 있다.얼굴도 하도 여위어 본연의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그전에도 유시아는 이채련에게 이곳에서 며칠 동안 함께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지만 이채련은 행여나 자기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흠이 생기게 될까 봐 동의하지 않았었다.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갖은 풍
임재욱은 핸들을 꼭 움켜쥐고서 앞만 바라보았으나 두 눈에는 고통과 망연함이 가득했다.“시연이 해외에 있을 때, 몹쓸 짓을 당했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나.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게 된 거야.”유시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볼륨까지 높아졌다.“어머, 어떡해요!”평소에 신시연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기는 했다.여자에게 있어서 그런 몹쓸 짓을 당한다는 건 치명적인 타격과 치욕이 아닐 수가 없다.게다가 부모님의 일까지 더해지니 조금 전 식당에서 봤던 신시연의 모습이 이해되었다.임재욱은 말하면서 후회와 자책하는 빛을 드러냈다.“그렇게 가고 싶지 않다는 시연이를 내가 억지로 보낸 거야.”그때는 모든 걸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낯선 곳으로 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학업에만 집중하면 자연스레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삶을 그려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하지만 임재욱이 잊고 있었던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신시연이 이제 갓 20살을 넘은 꽃다운 여자아이라는 것이다.해외에는 불안정 요소도 많고 미처 생각지 못하는 위험도 많다.게다가 젊은 나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릇된 길로 들어서기도 아주 위험하고 말이다.신시연 곁에 사람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24시간 동안 찰싹 달라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유시아와 결혼하고 나서 신혼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신시연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지금 임재욱은 신서현에게 미안할 뿐이다. 하나뿐인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하지만 그가 말한 본의와 달리 듣고 있는 유시아는 또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유시아의 기억으로는 신시연이 해외로 보내진 이유는 이러하다.그때 신시연은 정운시 대학교 교내 사이트에 유시아를 먹칠하는 게시글을 올리면서 유시아로 하여금 학업을 이어갈 수도 수업을 들을 수도 없게 악한 상황을 만들었었다.마침 그 일을 소현우가 알게 되면서 유시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