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아는 아주 오랜만에 임재욱을 보는 것만 같았다.지난번 강석호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을 때도 용재휘에 대해서만 얘기했었다.용재휘가 떠나고 나서 화실을 맡게 되자마자 바삐 돌게 되었는데 그 뒤로 병원에 간 적이 없었다.가만히 생각해 보니 두 사람은 열흘이 훌쩍 넘보도록 보지 못했다.반가운 마음은커녕 임재욱이 전보다 더욱더 낯설고 무섭기만 했다.“그럭저럭 잘 지냈어요.”유시아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며 물었다.“재욱 씨는요?”덤덤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서 임재욱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창밖을 보고 있는 유시아의 모습에 임재욱은 입술을 사리 물었는데, 마음이 다른 데로 가 있는 듯한 그녀의 모습이 언짢았다.버스를 타고 있는 것처럼 모든 승객이 낯선 것처럼, 전혀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돌아오는 답이 없자 유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는데 자기를 주시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눈이 마주치고 그의 시선을 감당할 수 없어 유시아는 또다시 파르르 떨며 고개를 돌렸다.“뭘 그렇게 봐요?”임재욱은 손을 내밀어 약간 포악한 모습으로 유시아의 턱을 잡아 강제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자기와 눈이 마주치게끔.두 눈을 지그시 뜨고 유시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그제야 입을 열었다.“내 여자 보고 있었어. 무슨 문제라도 돼?”“...”보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중심 거리라 차가 막혀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임재욱은 그런 상황이 갑갑하여 거리에서 내려 유시아를 데리고 한식당으로 들어갔다.조용한 룸으로 들어오고 나서 임재욱은 두 사람 모두 즐겨 먹는 음식을 주문했다.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임재욱이 입을 여는데.“다음 달에 할아버지 칠순 잔치가 열릴 거야. 너도 같이 가자.”그 말을 듣고서 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행여나 잘못 들은 건 아닌지 거듭 의심까지 들기도 했는데.“네? 뭐라고요?”칠순 잔치에 함께 가자고 하는 임재욱의 말과 그러한 생각에
임재욱은 화를 참고 성큼성큼 다가가 잡지를 빼앗아버리고 드레스를 훅 던졌다.“입어봐.”유시아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드레스를 가지고 피팅룸으로 들어갔다.문을 여는 순간 누군가가 뒤에서 확 밀치는 느낌이 들었다.갑작스러운 힘에 유시아는 안으로 넘어지고 말았다.이윽고 문이 굳게 닫히는데, 뒤돌아보니 임재욱이었다.좁은 피팅룸은 사면이 거울로 되어 있다.음침한 얼굴을 하는 임재욱의 모습이 시야를 가득 채워 유시아는 이유 모를 압박감이 들었다.“왜... 왜 따라 들어온 거예요?”“지퍼가 뒤에 있잖아.”임재욱은 가슴 앞에 양팔을 감싸 안은 채 여유작작한 모습으로 문에 기대었다.“지퍼 올려주려고 따라 들어왔어.”순간 유시아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그럴 필요 없으니 나가세요.”임재욱 앞에서 옷을 벗기고 새로운 옷으로 입어보고 싶지 않았다.하물며 그가 여기서 무슨 파렴치한 짓을 할지도 모르고.임재욱은 피식 웃으며 물건을 훑어보듯 유시아를 바라보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순수한 척하는 거야? 네가 보지 못한 곳까지 본 사람이야. 내가.”“할아버지 칠순 잔치에 가고 싶지 않아요.”유시아는 입술을 깨물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가고 싶지 않다고요.”눈살을 찌푸리며 임재욱은 갑자기 그녀의 옷깃을 잡아 자기 품속으로 끌어당겼다.“유시아, 내가 바보 같아? 무덤덤한 모습으로 날 대하고 있는데 내가 모를 것 같아? 용재휘를 해외로 쫓아 버려서 그러는 거지? 이런 식으로 나한테 복수하겠다는 거야?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응?”임재욱을 바라보며 유시아는 실소가 터지고 말았다.“내가 뭐라도 되든 안 되든 그게 중요해요? 임 대표님은 전혀 상관없잖아요.”유시아는 자기 포지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임재욱을 3년 동안 사랑했고 3년 동안 미워했고 지금은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임재욱에게 있어서 자기는 그저 ‘파트너’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유시아가 누구든 뭐라도 되든 안 되든 그 자신도 개의치 않게 되었다.임재욱은
“...”말문이 막혀 버린 임재욱.생리통이 심한 유시아의 고통을 모르듯이 유시아 또한 지금 임재욱이 느끼고 있는 고통을 모른다.무릎을 위로 올렸을 뿐인데 그게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유시아는 모를 것이다.한참 지나서 임재욱은 고개를 들어 유시아를 바라보며 그녀의 팔을 꼭 잡았다.이를 갈면서 그녀의 이름을 뱉어내는데.“유시아...”당장이라도 자기를 잡아먹을 것 같아서 유시아는 두려움에 또다시 발버둥을 치며 벗어나려고 했다.임재욱은 손을 내밀어 그녀를 다시 잡으려고 했으나 유시아가 이기고 만다.단숨에 피팅룸에서 도망쳐 나온 유시아는 의문이 가득한 직원들의 시선을 마주하며 황급히 백화점에서 나왔다.도망이라도 치는 듯이 한숨도 돌리지도 않고 택시에 올랐다.“기사님! 일단 출발해 주세요!”운전기사는 바로 시동을 걸었다.“손님, 어디로 모실까요?”‘어디로 가야 할까?’유시아에게는 답이 없는 물음이었다. 그녀마저도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디로 갈 수 있는지 모르기에.잠시 생각하더니 유시아는 입을 열었다.“그냥 가주세요. 요금은 제대로 지급해 드릴게요.”“네, 손님.”택시는 가다가 멈추고 멈추다가 다시 달렸다.시원한 밤바람이 창문을 타고 들어와 유시아의 머리를 휘날렸다.유시아는 파르르 떨더니 창문을 굳게 닫아 버렸다.그러다가 가방에서 핸드폰 벨 소리가 들려왔는데, 임재욱이었다.발신자 번호를 보고서 유시아는 망설이다가 바로 끊어버렸다.이윽고 그녀는 한참 밖을 내다보면서 생각에 빠지게 되었다.중시 거리라 차는 계속 막히고 있지만 유시아는 차에서 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운전기사는 도시 외곽으로 달렸는데, 그곳은 차도 얼마 없고 막힘도 없었다.어느 한 별장 구역을 지나자, 유시아는 갑자기 차를 멈춰 세웠다.“멈춰주세요.”택시비를 내고서 유시아는 차에서 내려 불빛이 아른거리는 별장 구역을 바라보았다.그곳은 반월 별장으로 소현우와 함께 지냈던 집이다.소현우가 없어도 이곳은 유시아에게 피난처와 같은 곳이다.기분이 나쁘거나 괴롭힘을
조금 전에 인사를 나누었던 경비원이었다.“아가씨를 찾는 분이 계십니다. 임재욱이라고 하는데 들여보내도 되겟습니까?”“...”‘이렇게 빨리 찾아온 거야?’임재욱은 유시아가 갈 곳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무조건 소현우와 지냈던 별장으로 갔겠다고 단정했다.유시아는 아랫입술을 깨물다가 입을 열었다.“아니요. 제가 나갈게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바로 별장 밖으로 향했다.불을 끄고 별장 문을 닫는 순간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별장 안을 거듭 들여다보았다.조명 하나 없이 어두컴컴하기만 했지만, 무척이나 아쉬웠다.이곳에 연연하고 이곳에 남아 있는 기운에 발목이 잡혔다.그리고 왠지 모르게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다는 좋지 않은 예감도 들었다.한참 지나서 유시아는 문을 별장 대문을 닫고 빠르게 걸어 나왔다.별장 구역 밖에 마이바흐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임재욱은 뒷좌석에 앉아 있었는데 유시아가 오는 것을 보고 직접 문을 열어주며 비아냥거렸다.“시아쌤답지 않게 왜 사고 치고 도망가는 거예요?” 유시아는 그의 곁에 앉아서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임재욱은 바로 고개를 돌려 강석호에게 말했다.“출발하세요.”시동이 걸리면서 임재욱은 또다시 조롱하기 시작했다.“여기가 유난히 마음에 드나 봐?”그 말에 유시아는 마침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하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덤덤하기 그지없었다.“그래서요?”임재욱은 한참을 침묵하더니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소현우가 남겨준 아파트 그리고 저 별장까지 나한테로 넘겨. 내가 가져야겠어.”그 말을 듣고서 유시아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조금 전 온몸을 습격했던 그 예감 때문에.식스 센스라는 것이 정말로 있는 듯 무서울 정도였다.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다는 생각만 들었지 정말로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놀라움과 괴로움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겨우 입을 여는데.“어떻게...”“네가 자꾸 도망가잖아.”임재욱은 그녀의 말을 끊어버리고 똑바로 바라보며 한 글자씩 뱉었다.“내가 그동안 너무 인
피비린내가 느껴지고 나서야 유시아는 천천히 멈추기 시작했다.임재욱은 바로 그녀의 턱을 잡아당겨 두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대답하라고!”“맞아요.”유시아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놓고 그에 대한 모든 한을 드러냈다.“미워요. 지금 당장 죽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정도로요. 가능하다면 평생 그쪽 얼굴 보고 싶지 않을 만큼으로 밉고 싫어요.”“그래.”임재욱은 아픈 말만 하는 유시아를 바라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어차피 넌 평생 날 사랑할 리도 없잖아. 그럼, 평생 날 미워해. 평생토록 날 미워하고 증오해.”유시아의 사랑이든 미움이든 그게 뭐든 받아들일 수 있었다.하지만 유독 자기를 무시하고 홀대하는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늦은 밤, 두 사람 모두 어두운 얼굴로 각자 별장으로 들어갔다.임재욱은 쇼핑백 두 개를 들고 들어와서 옷을 갈아입고 있는 유시아에게 말했다.“입어 봐. 사이즈 맞지 않으면 바꾸고.”유시아는 그의 손에서 드레스를 건네받았다.임재욱의 마음을 도통 알 수가 없으나 소현우가 남겨준 집까지 빼앗아 가는 것으로 자기에 대한 불만이 가득하다는 것만은 확인되었다.집까지 모두 넘겨주고 나면 유시아는 정말로 빈털터리가 된다.만약 그의 심기를 건드리게 된다면 그다음은 심씨 가문 차례가 될 것이다.그러한 상황이 펼쳐지게 되면 유시아가 했던 모든 희생이 물거품으로 되어 버린다.유시아는 쇼핑백을 들고서 옷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으려고 했다.그때 임재욱이 문을 가로막아 버리는데.“우리 사이에 그냥 갈아입지 그래?”유시아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임재욱은 한 걸음 더 다가와 웃는 듯 마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왜? 밀당이라도 하겠다는 거야?”그런 임재욱을 바라보면서 유시아는 피식 웃었다.“제가 어찌 감히... 보기 싶으시다면 보여 드려야죠.”말하면서 그녀는 드레스를 가지고 거울 앞으로 다가가 천천히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원피스, 이너, 스타킹... 양파 껍질을 벗기듯이 한층 씩.마지막 한 층이 되었
남은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 유시아, 그나마 쓸 수 있는 건 머리와 입뿐이다.아픈 말들로 임재욱의 몸에 상처만 낼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그런 그녀의 모습에 임재욱은 가볍게 웃기만 했다.고개를 바짝 들고 한 마디도 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귀엽다면서.고개만 숙이고 하자는 대로 비굴하게 모두 따라왔던 꼭두각시보다는 훨씬 났다.적어도 영혼이 살아 있고 생기가 넘치니 말이다.임재욱은 손을 들어 핏기가 거의 없는 그녀의 입술을 만지작거렸다.“난 그런 말만 골라서 하는 네 입술이 좋아.”유시아는 갑자기 두 손으로 그를 확 밀쳐내는데.“임재욱 씨, 그만해요!”사방이 막힌 기분이 들었다.아무런 내색도 없이 모든 것을 앗아가는 임재욱의 모습에 숨이 막혔다.울고 난리를 피우고 아픈 말들로 공격을 해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으니.유시아는 임재욱을 호되게 째려 보고서 밖으로 걸음을 재촉했다.옷방을 나서려는 그 순간 임재욱은 또다시 뒤에서 그녀를 확 끌어안았다.유시아는 단숨에 푸근하고 넓은 그의 품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그녀를 들어 안고서 임재욱은 두 사람만의 침대로 유시아를 던지고 바로 덮쳐왔다.운명을 받아들인 듯 유시아는 눈을 감았다. 항상 이랬으니.임재욱은 기분이 나빠지기만 하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유시아를 괴롭히고 아프게 했다.시작은 임재욱의 화로 끝은 유시아의 고통으로.주인이 애완견을 대하듯이 기분이 좋을 때는 애지중지 여기고 여기저기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고 이것저것 가득 사주고.그러나 만약 애완견의 애교 정도가 지나치다면 바로 그 자신만의 방식으로 누가 주인이고 누가 스폰서를 받고 있는지 똑똑히 알려 준다.전과 달리 임재욱은 난폭하게 그녀의 옷을 찢어 버리지 않고 아주 부드럽게 얼굴에 뽀뽀부터 했다.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한 듯 조심스러워하는 그의 모습과 뽀뽀에 유시아는 그만 간지러워 고개를 돌렸다.임재욱은 바로 그녀의 고개를 돌려왔다.“시아야, 너 그거 알아? 5년간의 네 기억을 지우기 위해 내가 얼마나 노
바램은 결국 바램일 뿐 이뤄지기 힘들다는 걸 임재욱은 똑똑히 알고 있다.왕관의 무게를 견디고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지만, 모든 세력을 손에 거머쥐고 있지만, 운명은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하고 싶어도 할 수없는 것,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것.예를 들면, 유시아가 바로 그러한 사례다.이는 하느님이 임재욱에게 주신 가장 혹독한 벌이다.유시아가 가지고 있는 아파트와 별장에 대해서 임재욱은 포기하지 않았다.다음날 변호사에게 관련 계약서를 작성하게 하였고 강석호더러 유시아의 사인을 받아 오라고 했다.유시아가 사인을 하고 나면 관련 부문으로 가서 남은 절차를 마치면 된다.그럼, 소현우와 함께했던 별장은 완전히 임재욱의 소유물이 되고 그는 별장을 매매하든 뭘 하든 모든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봄날의 푸근한 햇살을 맞으니 자기도 모르게 마음속까지 따뜻해지는 느낌이 든다.유시아는 창가 옆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는데, 별다른 선택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자 알고 있지만 계약서를 꼼꼼하게 들여다보았다.한참을 보고 나서야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강석호의 그녀의 손에서 계약서를 건네받고 입을 열었는데.“대표님께서 유시아 씨와 함께 점심을 먹으셨으면 합니다. 저와 함께 가시죠.”“아니요.”유시아는 거절했다.“화실에 가봐야 해서 시간이 급할 것 같아요.”강석호가 난처해하는 것을 보고 유시아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제가 직접 전화할게요. 그만 가보세요.”“네.”강석호는 계약서를 챙겨 들고 떠났다.그가 떠나자마자 유시아는 핸드폰을 들어 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늘 토요일이라 아이들이 일찍 올 거예요. 점심에 수업하기로 해서 일찍 가봐야 해요.”말하면서 그녀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빈털터리가 된 저에게 이 정도 자유도 사치인가요?”임재욱은 웃었다.“가. 좋다면 가야지.”멈칫거리다가 임재욱은 곧바로 덧붙였다.“시아야, 나 그렇게 나쁜 놈으로 생각하지 마.”유시아는 그 말을 듣고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그동안 저한테 해주신
주말에는 평소보다 2, 3배 정도 수업 시간이 길어진다.나이가 어린 친구들로 수업이 구성된 만큼 시간이 흐름에 따라 수업 집중력은 점점 떨어지게 되어 있다.40분 정도 수업하고 유시아는 아이들이 다시 수업에 집중할 수 있게끔 잠시 자유 시간을 준다.근처 슈퍼로 가서 유시아는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사탕을 비롯한 여러 주전부리를 사 왔다.화실로 들어서자, 프런트 직원이 아이들과 소파에 쪼그리고 앉아 무엇을 사이에 두고 한바탕 싸우고 있는 모습이었다.“무슨 일이에요?”그들을 향해 다가가면서 유시아가 물었다.“무엇 때문에 싸우는 거예요?”“시아 언니...”프런트 직원은 다소 난감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운을 떼기 시작했다.“아이들이 어디서 강아지 한 마리를 주워 왔는데 도로 내보내려고 하지 않아요. 기어이 여기서 키우겠다고 하는데, 몸에 병이 있을지도 모르고 보다시피 엄청 더럽잖아요...”아이들은 순간 반박하기 바빴다.“아니에요! 절대 아무런 병도 없을 거예요...”“강아지는 우리 친구라고 그랬어요.”“저도 이 강아지 엄청 마음에 들어요. 강아지 보면서 그림 그리고 싶다고요...”유시아는 그제야 테이블 위에 납작 엎드려 있는 꼬질꼬질한 웰시 코기를 보게 되었다.한눈에 봐도 유기견이었다. 마르고 작은 것이 두려움에 잔뜩 상기된 모습이었으니.아이들은 강아지에게 음식을 주면서 테이블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렸다.유시아는 불쌍한 웰시코기를 보면서 순간 키웠었던 구름이 생각이 났다.임재욱의 손에 불행을 당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이 웰시코기처럼 마지못해 유기견이 되어 버렸는지 알 수도 없다.유시아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손에 들고 있던 주머니를 내려놓고 웰시코기의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여기 남아도 되는데 일단 동물 병원으로 데리고 가야겠어요. 만약 아픈 곳이 있다면 일단 서둘러 치료부터 받아야 하거든요. 심각해지기 전에.”웰시코기를 화실에 남겨도 된다는 말에 아이들은 기뻐서 방방 뛰었다.“와, 너무 좋아요. 우리한테도 친구가
늦은 밤, 유시아의 카카오톡을 받았을 때 임재욱은 병원에 있었다.신시연은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진료실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고 그동안에 임재욱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늦은 밤의 사립 병원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당직을 서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외에 거의 사람이 없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임재욱은 복도를 한참이나 누비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유시아를 병원으로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길에 신시연의 전화를 받고서 오게 된 것이다.배가 아프다고.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아프다고.신시연은 며칠 전에 병원에서 여러 번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해외에서 그러한 몹쓸 짓을 당하며 우울증과 부인병이 있는 외에 다른 수치들은 정상 범위 안에 있었다.그 말인즉슨,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재욱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신시연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임재욱 하나뿐이니 어찌 됐든 그녀를 잘 지켜야 하는 마음뿐이었다.그 누구에게도 다시는 상처를 받지 않게끔.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여 임재욱은 그녀를 직접 병원까지 데리고 오고 의사 선생님 입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확답을 듣고 나야만 마음이 놓일 수 있다.애타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렸다.유시아가 보낸 카카오톡인데,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보고 싶어요.]임재욱은 고개를 숙인 채 카톡 내용을 거듭 곱씹으며 유시아 사진으로 되어 있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자꾸 올라갔다.‘내가 보고 싶어? 별거한 지 하루 만에 벌써 내가 보고 싶은 거야?’‘우리 시아 이제 제법 솔직하네.’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어떻게 답장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응급실 문이 열렸다.도우미 김향화가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신시연을 부축하고 걸어 나왔다.신시연은 디자인이 아주 심플한 데님 스커트를 입었고 윤기가 별로 없어 보이는 머리를 돌돌 말아 묶어 올렸다.무척이나 초췌해 보이는 것이 가여운 느낌도 물씬 풍기고 있어 기고만장했던 그
유리 구두를 품속에 꼭 안고 있는 유시아를 보고서 임재욱은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참으로 달래기 쉬운 여자라는 것을.특히 결혼하고 나서 아주 살짝만 잘해주어도 유시아는 아주 오랫동안 기뻐하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늘 임재욱 앞에만 서면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자기를 낮은 위치에 놓는 데 습관 되어 있다.임재욱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뽀뽀했다.“앞으로 매년 생일마다 예쁜 유리 구두 선물해 줄게. 어때?”“좋아요.”유시아는 말하면서 아주 유치하게 그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절대 어기지 않겠다고.”백화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일단 화실로 향했다.새로 구매한 공예품을 적당한 자리에 올려놓고 유시아의 제안으로 이채련의 병원까지 바래다주었다.유시아는 자기가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타입이라 이채련과 이미 약속했으니 꼭 지켜야 했다.하물며 자식도 없는 이체련에게 마지막 이 시간들이 더더욱 외로울 것이다.외부인들이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로 외롭다.임재욱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이채련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니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보내주었다.차는 곧 사립 병원 앞에 멈춰 섰고 임재욱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유시아는 차창에 대고 거듭 강조했다.“유리 구두랑 드레스들 옷방에 고이 모셔두도록 해요. 마구 놓지 말고요.”“알았어.”임재욱은 말하고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목을 확 잡고서 찐한 키스를 남기고 나서야 순순히 놓아 주었다.“얼른 가 봐.”“조심해서 가요.”임재욱은 조수석에 앉아 한결 가벼워진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서야 시선을 거두고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가는 길에 갑자기 신시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오빠, 배가 너무 아파요.”...병실로 돌아와 보니 이채련은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침대에 멍하니 누워 재미가 일도 없는 예능 프로를 보고 있었다.유시아가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채련은 놀라고도 기뻤다.“시아야,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유시아
쇼핑은 늘 설레는 일이다.유시아는 자기 취향대로 화실 장식품으로 쓰일 공예품을 골랐다.이윽고 임재욱은 또 유시아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지난번에 두 사람은 함께 쇼핑하면서 많은 옷을 샀었지만, 신서현 부모님께 갑작스러운 상황이 일어나면서 유시아는 그 모든 옷을 모조리 청소 아주머니에게 줘 버렸다.그때의 아쉬움을 채워주기 위해 임재욱은 또다시 쇼핑하려고 한 것이다.게다가 다음 주면 대우 그룹 상장 20주년이다.정식적인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유시아를 자기 아내 신분으로 남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이브닝 파티에 어울릴만한 드레스와 신발을 살 예정이다.드레스는 그럭저럭 큰마음이 가지 않았는데, 유시아는 그 신발이 마음에 들었다.은백색의 하이힐로 예쁜 보석들로 가득 박혀 있어 매점 불빛 아래서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신데렐라 동화에 나올 법한 유리 구두 같았다.매점 직원은 유시아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고 바로 다가왔다.“손님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 이 제품은 저희 디자이너 선생님의 최신 디자인으로 지금 딱 한 켤레만 있습니다. 만약 이 신발을 신고 나가신다면...”임재욱은 갑자기 직원의 말을 끊어버렸다.“이미 결혼했고요. 이 사람은 제 아내예요.”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는데, 자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를 보고서 따라서 웃었다.“맞아요. 이 사람이 제 남편이에요.”매점 직원은 멍하니 있다가 바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베스트 쇼핑 가이드다운 실력을 드러냈다.“어머, 어쩐지 너무 어울리신다 했어요...”직원의 칭찬에 두 사람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이윽고 매점 직원은 분위기를 파악하며 유리 구두에 대해 더욱 디테일한 설명을 첨부하기 시작했다.“이 제품의 새끼 양가죽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착용감이 엄청 좋으실 거예요. 하루 종일 신고 걸으셔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게다가 우리 디자이너 선생님이 즉흥으로 만들어내신 작품이라 절대 똑같은 제품을 시중에서 보실 수 없을 거예요.”한 켤레일 뿐만 아니라 사이
한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내가 뭐?”“한서준 씨는 당당해요?”유시아는 바로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었다.“임씨 가문에 접근한 그 의도를 다른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요? 할아버지, 재욱 씨 그리고 나까지 똑똑히 알고 있어요. 청아 씨만이 한서준 씨를 사랑해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요. 그렇게 쭉 모르는 척을 하며 모든 걸 감당하고 있었던 거라고요. 한서준 씨 역시 청아 씨를 이용한 게 아닌가요?”마지막 한 마디에 한서준은 침묵하고 말았다.그렇다. 임청아에게 접근한 이유는 유시아가 ‘스파이’로 움직여 주지 않겠다고 거절했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임씨 가문 천금을 노리게 된 것이다.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 변하게 되어 있다.임청아 대한 마음은 모략에서 시작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마음이 점점 사랑으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띠고 다가왔던 임청아가 어두운 자신의 삶을 밝게 비춰주는 것만 같았다.따라서 한서준은 임청아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차츰 생기게 된 것이다.임태훈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꼭 자기 곁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청아 씨 지금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에요.”“만약 청아 씨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말을 마치고 유시아는 차 문을 밀고 차에서 내려 병원 밖으로 걸어갔다.택시에 오른 유시아는 긴 망설임 끝에 끝내는 더 스케치 화실 주소를 운전 기사에게 알렸다.차는 화실 맞은 편에 세워졌고 유시아는 화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화실 안의 상황을 바로 체크할 수 있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최적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수많은 경호원들이 임태훈을 사이에 두고 화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임태훈은 벤틀리에 올라 강한 기운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유시아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고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바로 화실로 향해 달려갔다.화실 안과 밖은 겉은
전화를 마치고 유시아는 혼자 밖에 없는 휴게실을 보고서 깊은 번뇌에 잠겼다.남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임태훈처럼 막무가내로 어처구니가 없는 노인이 있다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태훈이 끔찍이 여기는 임청아를 유시아가 계단에서 밀어버린 것도 아닌데, 왜 애꿎은 자기 화실을 닫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집안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스스로 반성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데, 그게 무엇이든 일단 남한테서 문제를 찾고 있으니, 권력을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했다.유시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고 불안함도 점점 커졌다.지금 운영하고 있는 더 스케치 화실도 용재휘가 먼저 시작한 것인데, 그와 더불어 학생들까지 모두 함께 넘겨주었는데, 만약 이대로 화실을 망쳐버린다면 용재휘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임재욱과 임태훈이 어느 정도로 얘기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화실이 그들 싸움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용기가 없어 일단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그렇게 한참이나 심장을 조이고 있었지만, 걸려 오는 전화는 없었다.유시아는 일이 어느 정도 망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학생 채팅방에 오늘 갑자기 일이 있다며 수업을 뒤로 미룬다고 알렸다.언제 다시 수업을 시작할지는 소식을 기다리라며 덧붙이기까지 했다.톡을 보내고서 유시아는 더 이상 핸드폰을 보지 않고 바로 병원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병원 대문을 나오자마자 한서준이 정면에서 오고 있었다.“유시아.”유시아는 고개를 들었고 그를 보게 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 났다.직감이 알려주건대, 절대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화실의 생존 여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심기까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한서준은 쉽사리 유시아를 놓아 주지 않았고 손을 내밀어 유시아의 손목을 꼭 잡았다.“물어볼 일이 있어.”말하면서 근처에 있는 지프차를 가리켰다.“차에 타서 얘기 하자.”“그쪽이랑 할 말
유시아는 그 말을 이어받지 않고 집사의 바람대로 타이르기 시작했다.“몸이 아직 많이 허약해요. 먹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좀 먹어야 하거든요. 일이 어찌 됐든 일단 건강부터 챙겨야 해요.”임청아 그 말을 듣고서 쓴웃음을 지었다.“건강 회복되면 할아버지한테 잡혀가서 집에 감금되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유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어찌 됐든 할아버지 마음은 한결같을 거예요. 청아 씨를 아끼고 사랑하는 거요. 서로 대화가 필요한 거 같아요. 서로 터놓고 얘기하고 나면 오해가 풀리고 마음도 풀리면서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임청아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아이 낳고 나면 할아버지도 서준이도 원한을 내려놓고 행복만 할 수 있다고요.”“근데 이렇게 몸도 아끼지 않고 점점 더 막무가내로 나가면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은 점점 더 짙어질 거예요.”유시아는 말하면서 도우미 손에서 보신탕을 가져와 천천히 불며 임청아의 입가로 가져갔다.임청아는 생각 밖으로 무척이나 순순하게 유시아의 말을 따랐고 그녀의 말에 이치가 있는 것 같아 조용히 보신탕을 받아 마셨다.도우미와 집사는 두 사람이 티키타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서서히 마음이 놓였다.임청아가 뭐라도 먹기 시작하여 자기도 모르게 한시름을 놓으며 자리까지 비켜주려고 했다.두 사람이 마음 편히 말할 수 없을까 봐 눈치껏 일어서려는 것이다.“작은 사모님, 아가씨와 천천히 얘기하고 계세요. 밖에 나가 있을 테니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시고요.”“네, 가보세요.”도우미 일행이 나오고 나서야 유시아는 본론으로 들어갔다.“한서준 씨는 알고 있어요?”임청아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그런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잖아요.”요즘 임태훈뿐만 아니라 한서준도 눈을 부라리고 임청아를 찾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자 아파트도 호텔도 들어갈 수 없었고 버려진 강아지처럼 유시아 화실에 몸을 숨기고 지낸 것
임청아 이름 석 자가 임재욱의 입에서 나오자, 유시아는 순간 청천벽력을 맞는 것만 같았다.심지어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물었다.“청아 씨가 왜 병원에 있는 거죠?”임청아는 임신한 것을 알고 매사에 조심하며 걸음 하나도 천천히 옮겼었다.게다가 해외에 있는 친구와 연락하여 해외로 떠날 준비까지 마쳤다고 했었다.그런데 관건이 되는 순간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고?“할아버지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거 아니야?”임재욱은 말하면서 차갑게 웃었다.“네 화실에 청아 숨겨 놓았잖아. 할아버지께서 그걸 과연 모르고 있었을 것 같아? 오늘 화실로 청아 데리러 갔었는데, 가지 않겠다고 청아가 하도 우기는 바람에 억지로 묶어서라도 데리고 가겠다며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거야.”그렇다면 아이를 유산했을지도 모른다.임태훈의 습관에 따라 생각해 본다면 이 화살은 결국 유시아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임재욱이 그렇게 경고하였건만 유시아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약해지는 마음에 언젠가는 구렁이에 빠지게 될 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 일 줄은 몰랐다. 임재욱은 한숨을 내쉬며 꾸짖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병원 주소 보내줄 테니 얼른 가 봐.”말을 마치고 임재욱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고 운전 기사에게 새로운 목적지를 알려주었다.같은 시각, 병원 안에서.임청아는 이미 수술을 마쳤고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이미 가문의 집사와 간호인이 옆에 있었고 병실 문 앞에는 임태훈이 보낸 경호원도 있었다.다만 경호원이 경계해야 할 상대는 유시아가 아니라 한서준이다.따라서 유시아는 별다른 막힘없이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상에 누워 있는 임청아는 얼굴에 핏기 하나 없었고 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불과 하룻밤 사이에 모든 활력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집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주 공손하게 유시아에
조금 전까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던 임재욱은 멈칫거리고 말았다.이윽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유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별거하자는 뜻이야?”“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유시아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머리가 아픈 듯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그 시간으로 시연이한테 집중해도 되잖아요. 나도 마침 어머님 곁에 좀 있어드리고... 서로에게 지금 이게 최우선인 것 같아요.”임재욱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서 낙담한 모습으로 말했다.“그래. 네가 좋다고 하면 그게 좋은 거겠지. 그렇게 하자.”말을 마치고 그는 계속 밥을 먹었다.유시아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서 아련하게 웃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이튿날 아침, 유시아는 임재욱이 출근하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일상복 몇 벌과 일상용품을 챙겨 작은 트렁크 안에 놓고 바로 이채련한테 가려고 했다.허씨 아주머니는 트렁크를 들고 내려오는 유시아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사모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설마... 가출하려는 건 아니죠?”유시아는 허씨 아주머니를 향해 웃었다.“아니에요. 친척분이 좀 위독하신데 제가 옆에서 좀 챙겨드리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얼마 걸리지 않을 거고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트렁크를 들고서 집을 나섰다.이채련이 지내고 있는 병실이 VIP 병실로 널찍한 객실까지 갖춰져 있다.유시아는 간호사에게 접이식 침대와 이불을 요구했고 간단히 정리하고 나니 잘 자리가 아늑하게 마련되었다.이채련은 더 이상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어 하루 24시간을 침대 위에서 보내고 있다.얼굴도 하도 여위어 본연의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그전에도 유시아는 이채련에게 이곳에서 며칠 동안 함께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지만 이채련은 행여나 자기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흠이 생기게 될까 봐 동의하지 않았었다.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갖은 풍
임재욱은 핸들을 꼭 움켜쥐고서 앞만 바라보았으나 두 눈에는 고통과 망연함이 가득했다.“시연이 해외에 있을 때, 몹쓸 짓을 당했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나.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게 된 거야.”유시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볼륨까지 높아졌다.“어머, 어떡해요!”평소에 신시연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기는 했다.여자에게 있어서 그런 몹쓸 짓을 당한다는 건 치명적인 타격과 치욕이 아닐 수가 없다.게다가 부모님의 일까지 더해지니 조금 전 식당에서 봤던 신시연의 모습이 이해되었다.임재욱은 말하면서 후회와 자책하는 빛을 드러냈다.“그렇게 가고 싶지 않다는 시연이를 내가 억지로 보낸 거야.”그때는 모든 걸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낯선 곳으로 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학업에만 집중하면 자연스레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삶을 그려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하지만 임재욱이 잊고 있었던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신시연이 이제 갓 20살을 넘은 꽃다운 여자아이라는 것이다.해외에는 불안정 요소도 많고 미처 생각지 못하는 위험도 많다.게다가 젊은 나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릇된 길로 들어서기도 아주 위험하고 말이다.신시연 곁에 사람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24시간 동안 찰싹 달라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유시아와 결혼하고 나서 신혼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신시연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지금 임재욱은 신서현에게 미안할 뿐이다. 하나뿐인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하지만 그가 말한 본의와 달리 듣고 있는 유시아는 또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유시아의 기억으로는 신시연이 해외로 보내진 이유는 이러하다.그때 신시연은 정운시 대학교 교내 사이트에 유시아를 먹칠하는 게시글을 올리면서 유시아로 하여금 학업을 이어갈 수도 수업을 들을 수도 없게 악한 상황을 만들었었다.마침 그 일을 소현우가 알게 되면서 유시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