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나라한 협박에 용재휘는 순간 언짢았다.아직 어린 나이라 임재욱과 맞설 능력은 되지 못한다.그렇다고 하여 고개를 숙이고 싶지는 않아 바로 치고받았다.“얼마 전에 이혼하셨다던데, 이혼하자마자 시아 씨 찾는 거예요? 시아 씨는 몇 번째인가요? 임 대표님 여자 중에서 한 5위안에는 드나요?”“저랑 시아 사이의 일이니, 간섭하지 마세요.”화를 억누르고 있는 듯했지만, 그런대로 말투는 꽤 평화로웠다.“그쪽에 없다고 하니 그만 끊을게요.”끊어진 전화를 보면서 용재휘는 가볍게 한숨을 내뱉었다.이윽고 몸을 돌려 다시 식탁으로 돌아가 밥을 먹으라고 했으나.고개를 돌리자마자 사색이 되어버린 유시아의 얼굴을 보게 되고 만다.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언제 나타났는지 모르겠지만, 조금 전 통화 내용을 들은 것 같은 눈치다.용재휘는 순간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시아 씨...”“그 사람이죠?”유시아는 가능한 한 평온하게 들리게끔 천천히 입을 열었다.“임재욱한테서 온 거 맞죠?”용재휘는 망설이다가 별거 아닌 것처럼 웃었다.“여기 있는 거 모를 거예요. 그냥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 온 것 같은데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편하게 쉬고 있어요. 설마 함부로 쳐들어오기까지 하겠어요.”그 말을 듣고서 마음이 평온해진 것이 아니라 더더욱 흔들리기 시작했다.충분히 쳐들어오고도 남을 사람이니.전에 홀로 밖에서 지내고 있을 때 임재욱은 수시로 찾아왔었다.갑자기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놀라게 했었다.그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돈이 있고 세력까지 있는 그에게 주어진다면 그토록 쉬운 일로 변해버린다.유시아는 아주 민감하게 촉이 왔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는 것.용재휘한테 피해만 줄 것이라고 단번에 확 느껴졌다.저녁, 유시아는 침실 침대에 누워 내내 불안해했다.머리가 아직 아프지만 며칠 전에 비하면 많이 좋아진 축이다.이젠 슬슬 용재휘의 곁을 떠나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정운시에서 유시아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고 지금껏 집에 머물도록 해
낮에는 거의 회사에 가지 않았고 어떻게든 유시아를 찾아내려고 매일 같이 애를 썼었다.홀로 운전대를 잡고 거리마다 찾아 나선 적도 있고.심지어 검은 지대에서 움직이고 있는 친구들에게 연락하여 정운시 전체를 발칵 뒤집어버릴 뻔했었다.회사에서 밀린 업무는 모두 밤으로 밀어 버리고 집에서 또는 늦은 시간까지 회사에서 처리했었다.제대로 자지 못한 관계로 컨디션도 엉망이 되어 버렸다.심지어 유시아의 일로 임태훈과 싸운 것도 소문이 자자해졌고.별장으로 들어서자마자 허씨 아주머니는 핸드폰부터 챙겨 들었다. 임재욱한테 알리려고.“대표님께서 아가씨 돌아오신 거 아시면 엄청 좋아하실 거예요.”유시아는 그런 그녀를 막지 않았다.“네. 올라가서 좀 자고 있을게요. 좀 피곤하네요.”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피로감이 느껴지는 건 뇌진탕으로 남겨진 후유증이다.하지만 의사는 별문제가 없으니, 휴식만 잘하면 그 증상들이 모두 사라진다고 했다.위층으로 올라가 침실 문을 열자, 바닥에 납작 엎드려있던 고양이가 금세 경계하며 고개를 들었다.초롱초롱한 두 눈으로 유시아를 지켜보더니 천천히 다가와 안아달라고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임재욱과 하인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아서인지 별장 안에 사람들은 모두 이 고양이를 좋아한다.유시아는 그런 모습에 저절로 웃음이 나와 몸을 쪼그리고 앉아 머리와 보슬보슬한 귀를 어루만져 주었다.동물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강아지도 좋아하고 고양이도 좋아하며 가끔 길냥이에게 먹이도 주곤 했었다.다만 이 고양이는 의미가 다르다. 임재욱의 못된 마음이 들어있기 때문에.임재욱은 이 고양이로 구름이와 소현우의 흔적을 덮으려고 했었다.그래서 좋아하고 싶어도 절대 좋아지지 않은 것이다.유시아는 고양이를 들어 안아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려 놓았다.침대로 뛰어오르지 않을 것 같다는 높이로 놓고서 그제야 옷방으로 들어가 깨끗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그리고 얼른 침대로 올라가 잠을 청했다....유난히 달콤했던 잠이었다. 깨어났을 때 시간은 이미 초저녁
유시아는 가볍게 대답하고서 본론으로 들어갔다.“그냥 가고 싶었는데, 분명하게 말하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돌아왔어요.”임재욱은 살짝 의아해하며 물었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입술을 살포시 사리물고 유시아는 천천히 운을 떼기 시작했다.“아이에 대해서는...” 어젯밤까지 유시아는 오늘 몰래 용재휘를 떠나 정운시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아무런목적지도 없이.하지만 그녀는 자기 책임을 피하는 사람이 아니다.정유라와 임재욱 사이의 아이에 대해서도 똑똑히 밝히고 사과까지 해야만 할 것 같았다.임재욱이 자기를 세상 악독한 여자라고 보든 말든 그대로 순순히 받아들이면서.일이 어찌 됐든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면서, 정유라를 실수로 밀면서 아이를 잃은 건 사실이니 말이다.울음소리 하나 내보지 못하고 안타깝게 죽은 아이...“미안해요.”“그때 저도 살짝 이성을 잃었었어요. 임신 중이라는 거 깜빡하고 밀쳤는데...”이때 임재욱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살포시 막는데.“이미 지나간 일이야. 말하지 않아도 돼.”“하지만 그 일로 이혼한 거잖아요. 저...”“이혼한 것도 아이에 관해서도 너랑 아무런 관련이 없어.”임재욱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나지막이 말했다.“그 아이 내 아이도 아니야. 정유라 혼자 병원에서 이름 모를 사람 것으로 수술받은 거라고. 그리고 나한테 뒤집어씌우는 거야. 처음부터 아이를 낳을 생각도 없었고 네가 마침 나타나서 널 죄인으로 몰아세운 거야.”“네?”유시아는 멍하기만 했다.“아직도 모르겠어?”임재욱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그 아이는 일종의 도구였어. 결혼을 유지하는 도구, 그리고 널 물리세우는 도구.”임재욱은 손을 내밀어 유시아의 볼을 어루만지며 사람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덧붙였다.“바보야, 너도 속은 거야. 그동안 엄청 자책하면서 지냈었지? 근데 눈치 차리는 것도 이상해. 너뿐만 아니라 할아버지도 오랫동안 속았으니.”만약 임재욱이 제때 정유라의 진찰 기록에 대해 알아보지 않았더라면 그 역시 지금껏
심지어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괜히 언급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자기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있고 마음만 괜히 휘젓은 것 같았다.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일이다.늘 유시아 앞에서 거리낌이 없었던 그가 이토록 말을 조심히 하는 모습이.유시아는 그에게 정유라 아이에 대해서 말하고자 찾아온 것뿐이라 더 이상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며칠 만이라 서로가 ‘애틋’하지만, 그 또한 잠시였다.단 며칠 만에 그동안에 있었던 모든 불쾌함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완전히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유시아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임재욱,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부드러움이다.그렇게 한참을 보고 나서야 임재욱은 그녀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일어섰다.“샤워하러 가야겠어.”말을 마치고 그는 잠옷 가운을 챙겨 욕실로 향했다. 문도 안에서 잠그고.홀로 침대에 남겨진 유시아는 한참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임재욱으로부터 한꺼번에 너무 많은 걸 듣게 되면서 전부 다 소화해 낼 수 없었다.‘날 감옥에 보내지 않으려고 정유라와 결혼한 거라고?’‘그 아이가 재욱 씨 아이가 아니라고?’‘이미 지나간 일이라고?’유시아는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선택이 되지 않았다.실은 그가 말한 모든 것이 사실이었으면 하나 희망이 클 수록 실망도 큰 법이니 차마 그럴 수 없었다.감언이설과 다름없는 말들이었다면 그때 유시아는 단지 창피한 것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임재욱한테 그동안 하도 속고 당해서 이처럼 경계하고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다.임재욱은 아주 오랫동안 샤워를 했다.욕실에서 나왔을 때 유시아는 여전히 침대 머리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양손으로 무릎을 감싸 안고 조용히 생각하고 있었고 욕실에서 소리가 나도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임재욱은 그런 유시아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는데.“어제 할아버지께 말씀드렸어. 앞으로 너한테 다시는 그러지 못할 거야.”소중한 손녀 임청아를 잃고 싶지 않은 이상.“고마워요.”유시아는 낮고 부드러
유시아가 병원에 가기 싫어하는 것 같자, 허씨 아주머니는 몰아붙이지 않았다.우유를 따라주며 다시 입을 여는데.“직접 병원으로 가시지 않으셔도 돼요. 어차피 홈닥터가 정기적으로 오셔서 검사해 드릴 거예요. 설령 몸에 이상이 있다고 하더라도 일찍 발견해 낼 수 있고요. 대표님께서도 걱정하시는 마음에 그러신 것 같아요. 아가씨 몸은 아가씨가 가장 잘 알 텐데.”유시아는 그저 웃기만 했다.최근 들어 허씨 아주머니가 말이 많아진 것 같다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던 모습과 완전히 달라졌다면서 내심 감탄했다.아침을 먹고 나서 유시아는 태블릿을 들고 정원으로 향했다.소파에 기대어 SNS에 로그인했는데, 오르자마자 용재휘의 메시지가 연달아 튀어나왔다.[시아 씨가 남긴 쪽지 봤어요. 왜 또 거기로 돌아간 거예요?][제발 정신 좀 차려요. 임재욱은 그냥 나쁜 놈이에요. 시아 씨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그 사람은 절대 모를 거라고요. 평생 시아 씨 행복하게 해 줄 수도 없고 말이에요.][혹시 임재욱이 또 강요하던가요?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말고 나한테 말해요. 변호사도 찾아놓았으니 절대 그 사람한테 헛된 희망 가지지 말아요.]...메시지가 하도 많아서 유시아는 채 보지도 못했다.[나 괜찮아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그 많은 메시지에 유시아는 딱 이 한마디만 보냈다.하지만 이미 너무 늦은 답장이었으니...하루 종일 유시아는 정원에서 태블릿만 보고 있었다.마구 잘린 머리가 점점 신경 쓰이면서 유시아는 미용실을 찾아가서 좀 다듬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어떤 스타일로 자를지 고민하고 있을 때 별장 안에서 벨 소리가 들려왔다.허씨 아주머니가 전화를 받았고 몇 마디 주고받더니 정원에 있는 유시아를 불렀다.“아가씨 앞으로 전화가 왔어요. 젊은 여자인 것 같은데 심 씨라고 그랬어요.”‘심 씨? 심하윤?’유시아는 멍하니 있다가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 허씨 아주머니로부터 수화기를 건네받았다.“여보세요?”“시아야, 나 하윤 언니야.”애타는 심하윤의 목소리가 들
용재휘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초지종을 제대로 말하고 떠났더라면 적어도 오해는 하지 않았을 텐데.“유시아 씨.”마침내 유시아와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찾은 강석호이다.그는 유시아 쪽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유씨아 씨, 지금 상황으로 보고서는 아마 당분간 병원에서 좀 지내야 할 것 같습니다.”유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무엇인가 떠오른 듯 고개를 들어 강석호를 바라보며 물었다.“할아버님은 아시나요?”그때 유시아가 임재욱을 찔렀다는 소식을 듣고서 임태훈은 그녀를 감옥으로 보내려고 했었다.사실의 여부는 밝히기 힘들지만, 임태훈은 종래로 팔을 안으로 꺾는 사람이다.만약 자기 손자가 남의 차에 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임태훈이 이 사건에 끼어들면 일은 많이 번거로워진다.유시아에게 있어서 임태훈보다는 그래도 임재욱이 좀 더 상대하기 쉽기 때문이다.적어도 임재욱은 유시아에게 감정이 있으나 임태훈은 그 무엇도 없다.강석호는 고개를 저었으나 웃으며 대답했다.“속일 수 있을 것 같아요?”“...”용재휘가 대우 그룹 문 앞에서 차로 임재욱을 들이박은 건 이미 소문이 자자해졌을 것인데 임태훈이 모를 리가 없다.유시아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심하윤의 손을 잡았다.“재휘 씨 만나러 가요. 뭐가 많이 필요할지도 몰라요.”갑작스러운 상황에 심씨 가문 일가족은 행여나 임재욱에게 사달이 날까 봐 병원에만 있었다.그 누구도 용재휘를 만나러 갈 틈도 여유도 없었다.임재욱 쪽은 아직도 응급 치료 중이니 차라리 먼저 용재휘를 만나고 하루빨리 변호사를 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심하윤은 별다른 말 없이 유시아와 함께 밖으로 향했다.떠나가는 유시아를 보고서 강석호는 그만 참지 못하고 입을 여는데.“유시아 씨...”그 소리에 유시아는 발걸음을 멈추더니 뒤돌아서서 그를 보고 말했다.“꼭 돌아올게요.”그러고는 심하윤과 함께 걸음을 재촉했다.유시아의 뒷모습을 보고서 강석호는 한숨을 내쉬었다.‘어르신 안목이 맞으셨어.
걱정하는 유시아와 달리 용재휘는 대수롭지 않은 듯했다.“임재욱은 어떻게 됐어요?”지금 그에게 최대 관심사는 바로 이거였다.감옥을 가든 아니면 사형을 받는 그딴 거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고.만약 이번 차 사고로 임재욱이 목숨을 잃었거나 아니면 다리 하나라도 부러져서 평생 휠체어에 기댄 채 살아가야 한다면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앞서 이러한 선택을 했을 때부터 용재휘는 마땅한 죗값을 치를 준비를 했었다.어떠한 대가를 치르든 상관없이 유시아가 편하게 살았으면 하는 게 전부였다.유시아는 그런 그를 째려보며 입을 여는데.“그 사람이 죽으면 재휘 씨라고 살 수 있을 것 같아요?”임재욱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기게 된다면 임태훈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어쩌면 용재휘는 그의 손에 놀아나면서 평생을 생지옥에서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용씨 가문의 세력은 정운시가 아니라 해외에 있으니 어찌할 수도 없을 것이고.심씨 가문은 지난번의 일을 겪고 나서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기에 용재휘에게 그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할 것이고 그럴만한 힘도 없을 것이다.무엇보다도 가장 섬뜩한 부분은 어쩌면 심씨 가문까지 다칠 수도 있다.용재휘는 시종일관 너스레 뜨며 웃는데.“감옥에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그만 좀 해요!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요!”유시아는 그의 말을 바로 끊어버렸다.“재휘 씨 절대 감옥에 못 가게 내가 어떻게든 막을 거예요. 감옥은... 지낼 곳이 못 돼요...”그곳에서 자그마치 3년을 버티며 살아온 유시아이다.그 누구보다도 감옥이 얼마나 어둡고 더러운 곳인지를 뼈저리게 느낀 사람이다.일단 감옥에 들어가게 된다면 용재휘의 인생이 그로써 ‘끝’이 난다는 것을 의미한다.자유를 잃고 지금과는 정반대인 환경 속에서 아등바등 살아야 한다.예술을 그려내던 두 손으로 온갖 궂은 일을 다 하게 될 것이며 사람답게 살 수 없을 것이다.심지어 더욱더 어둡고 차마 입에 올리기도 수치스러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갖은 곤란을 겪고 온 유시아인
하물며 용재휘가 아니었어도 유시아는 임재욱의 곁을 떠날 수 없다....병원으로 돌아왔을 때 임재욱은 이미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유시아는 여러 명의 간호사에게 묻고 나서야 펜트하우스 VIP 병실에 있는 임재욱을 찾을 수 있었다.문은 반쯤 닫혀 있었고 유시아는 문 앞에서 서성거렸다.병실에는 강석호가 임재욱의 곁을 지키고 있는데 지금 한창 뭐라고 말하고 있는 모습이다.들어가는 것도 그대로 돌아서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한참을 머뭇거리고 있던 그 찰나 임재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시아야, 들어와.”그 소리에 유시아는 억지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재욱 씨...”유시아가 들어오자 가만히 있기 뻘쭘해진 강석호는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대표님, 유시아 씨,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편하게 얘기 나누세요.”병실 밖으로 걸어 나가면서 문까지 굳게 닫아 주었다.병실 안에 덩그러니 남게 된 두 사람, 유시아는 병상 침대 머리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재욱 씨, 괜찮아요? 의사는 뭐라고 하던가요? 괜찮은 거 맞죠?”“걱정하지 마.”임재욱은 입꼬리를 올리며 링거를 맞고 있지 않은 손으로 유시아의 손을 감쌌다.“죽을 리 없어. 평생 네 곁에 있을 거야.”“...”임재웃은 기분이 제법 좋아 보였다.달콤한 듯한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오니 유시아는 왠지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순간 뭐라고 대답할지 몰라 입만 벙긋거렸다.조금 전 강석호가 임재욱에게 알린 게 확실하다는 생각까지 들면서.용재휘를 보러 구치소로 간 것에 대해서 말이다.“괜찮으면 됐어요.”임재욱은 그녀의 손을 꼭 감싸며 걱정했다.“많이 놀랐어?”그 질문에 유시아에 진심 어린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무서웠다. 만약 임재욱에게 사달이라도 난다면 용재휘가 많이 난처해지니.두 남자 사이에 서 있는 유시아는 어느 한쪽으로 조금 더 다가가야 할지 몰랐다.그저 두 사람 모두 괜찮기만을 바라면서 다치지도 않고 감옥에 들어가는 일도 없었으면 하는 것뿐이다.병상에
늦은 밤, 유시아의 카카오톡을 받았을 때 임재욱은 병원에 있었다.신시연은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진료실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고 그동안에 임재욱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늦은 밤의 사립 병원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당직을 서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외에 거의 사람이 없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임재욱은 복도를 한참이나 누비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유시아를 병원으로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길에 신시연의 전화를 받고서 오게 된 것이다.배가 아프다고.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아프다고.신시연은 며칠 전에 병원에서 여러 번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해외에서 그러한 몹쓸 짓을 당하며 우울증과 부인병이 있는 외에 다른 수치들은 정상 범위 안에 있었다.그 말인즉슨,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재욱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신시연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임재욱 하나뿐이니 어찌 됐든 그녀를 잘 지켜야 하는 마음뿐이었다.그 누구에게도 다시는 상처를 받지 않게끔.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여 임재욱은 그녀를 직접 병원까지 데리고 오고 의사 선생님 입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확답을 듣고 나야만 마음이 놓일 수 있다.애타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렸다.유시아가 보낸 카카오톡인데,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보고 싶어요.]임재욱은 고개를 숙인 채 카톡 내용을 거듭 곱씹으며 유시아 사진으로 되어 있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자꾸 올라갔다.‘내가 보고 싶어? 별거한 지 하루 만에 벌써 내가 보고 싶은 거야?’‘우리 시아 이제 제법 솔직하네.’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어떻게 답장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응급실 문이 열렸다.도우미 김향화가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신시연을 부축하고 걸어 나왔다.신시연은 디자인이 아주 심플한 데님 스커트를 입었고 윤기가 별로 없어 보이는 머리를 돌돌 말아 묶어 올렸다.무척이나 초췌해 보이는 것이 가여운 느낌도 물씬 풍기고 있어 기고만장했던 그
유리 구두를 품속에 꼭 안고 있는 유시아를 보고서 임재욱은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참으로 달래기 쉬운 여자라는 것을.특히 결혼하고 나서 아주 살짝만 잘해주어도 유시아는 아주 오랫동안 기뻐하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늘 임재욱 앞에만 서면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자기를 낮은 위치에 놓는 데 습관 되어 있다.임재욱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뽀뽀했다.“앞으로 매년 생일마다 예쁜 유리 구두 선물해 줄게. 어때?”“좋아요.”유시아는 말하면서 아주 유치하게 그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절대 어기지 않겠다고.”백화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일단 화실로 향했다.새로 구매한 공예품을 적당한 자리에 올려놓고 유시아의 제안으로 이채련의 병원까지 바래다주었다.유시아는 자기가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타입이라 이채련과 이미 약속했으니 꼭 지켜야 했다.하물며 자식도 없는 이체련에게 마지막 이 시간들이 더더욱 외로울 것이다.외부인들이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로 외롭다.임재욱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이채련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니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보내주었다.차는 곧 사립 병원 앞에 멈춰 섰고 임재욱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유시아는 차창에 대고 거듭 강조했다.“유리 구두랑 드레스들 옷방에 고이 모셔두도록 해요. 마구 놓지 말고요.”“알았어.”임재욱은 말하고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목을 확 잡고서 찐한 키스를 남기고 나서야 순순히 놓아 주었다.“얼른 가 봐.”“조심해서 가요.”임재욱은 조수석에 앉아 한결 가벼워진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서야 시선을 거두고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가는 길에 갑자기 신시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오빠, 배가 너무 아파요.”...병실로 돌아와 보니 이채련은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침대에 멍하니 누워 재미가 일도 없는 예능 프로를 보고 있었다.유시아가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채련은 놀라고도 기뻤다.“시아야,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유시아
쇼핑은 늘 설레는 일이다.유시아는 자기 취향대로 화실 장식품으로 쓰일 공예품을 골랐다.이윽고 임재욱은 또 유시아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지난번에 두 사람은 함께 쇼핑하면서 많은 옷을 샀었지만, 신서현 부모님께 갑작스러운 상황이 일어나면서 유시아는 그 모든 옷을 모조리 청소 아주머니에게 줘 버렸다.그때의 아쉬움을 채워주기 위해 임재욱은 또다시 쇼핑하려고 한 것이다.게다가 다음 주면 대우 그룹 상장 20주년이다.정식적인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유시아를 자기 아내 신분으로 남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이브닝 파티에 어울릴만한 드레스와 신발을 살 예정이다.드레스는 그럭저럭 큰마음이 가지 않았는데, 유시아는 그 신발이 마음에 들었다.은백색의 하이힐로 예쁜 보석들로 가득 박혀 있어 매점 불빛 아래서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신데렐라 동화에 나올 법한 유리 구두 같았다.매점 직원은 유시아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고 바로 다가왔다.“손님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 이 제품은 저희 디자이너 선생님의 최신 디자인으로 지금 딱 한 켤레만 있습니다. 만약 이 신발을 신고 나가신다면...”임재욱은 갑자기 직원의 말을 끊어버렸다.“이미 결혼했고요. 이 사람은 제 아내예요.”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는데, 자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를 보고서 따라서 웃었다.“맞아요. 이 사람이 제 남편이에요.”매점 직원은 멍하니 있다가 바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베스트 쇼핑 가이드다운 실력을 드러냈다.“어머, 어쩐지 너무 어울리신다 했어요...”직원의 칭찬에 두 사람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이윽고 매점 직원은 분위기를 파악하며 유리 구두에 대해 더욱 디테일한 설명을 첨부하기 시작했다.“이 제품의 새끼 양가죽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착용감이 엄청 좋으실 거예요. 하루 종일 신고 걸으셔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게다가 우리 디자이너 선생님이 즉흥으로 만들어내신 작품이라 절대 똑같은 제품을 시중에서 보실 수 없을 거예요.”한 켤레일 뿐만 아니라 사이
한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내가 뭐?”“한서준 씨는 당당해요?”유시아는 바로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었다.“임씨 가문에 접근한 그 의도를 다른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요? 할아버지, 재욱 씨 그리고 나까지 똑똑히 알고 있어요. 청아 씨만이 한서준 씨를 사랑해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요. 그렇게 쭉 모르는 척을 하며 모든 걸 감당하고 있었던 거라고요. 한서준 씨 역시 청아 씨를 이용한 게 아닌가요?”마지막 한 마디에 한서준은 침묵하고 말았다.그렇다. 임청아에게 접근한 이유는 유시아가 ‘스파이’로 움직여 주지 않겠다고 거절했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임씨 가문 천금을 노리게 된 것이다.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 변하게 되어 있다.임청아 대한 마음은 모략에서 시작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마음이 점점 사랑으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띠고 다가왔던 임청아가 어두운 자신의 삶을 밝게 비춰주는 것만 같았다.따라서 한서준은 임청아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차츰 생기게 된 것이다.임태훈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꼭 자기 곁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청아 씨 지금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에요.”“만약 청아 씨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말을 마치고 유시아는 차 문을 밀고 차에서 내려 병원 밖으로 걸어갔다.택시에 오른 유시아는 긴 망설임 끝에 끝내는 더 스케치 화실 주소를 운전 기사에게 알렸다.차는 화실 맞은 편에 세워졌고 유시아는 화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화실 안의 상황을 바로 체크할 수 있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최적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수많은 경호원들이 임태훈을 사이에 두고 화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임태훈은 벤틀리에 올라 강한 기운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유시아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고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바로 화실로 향해 달려갔다.화실 안과 밖은 겉은
전화를 마치고 유시아는 혼자 밖에 없는 휴게실을 보고서 깊은 번뇌에 잠겼다.남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임태훈처럼 막무가내로 어처구니가 없는 노인이 있다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태훈이 끔찍이 여기는 임청아를 유시아가 계단에서 밀어버린 것도 아닌데, 왜 애꿎은 자기 화실을 닫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집안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스스로 반성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데, 그게 무엇이든 일단 남한테서 문제를 찾고 있으니, 권력을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했다.유시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고 불안함도 점점 커졌다.지금 운영하고 있는 더 스케치 화실도 용재휘가 먼저 시작한 것인데, 그와 더불어 학생들까지 모두 함께 넘겨주었는데, 만약 이대로 화실을 망쳐버린다면 용재휘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임재욱과 임태훈이 어느 정도로 얘기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화실이 그들 싸움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용기가 없어 일단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그렇게 한참이나 심장을 조이고 있었지만, 걸려 오는 전화는 없었다.유시아는 일이 어느 정도 망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학생 채팅방에 오늘 갑자기 일이 있다며 수업을 뒤로 미룬다고 알렸다.언제 다시 수업을 시작할지는 소식을 기다리라며 덧붙이기까지 했다.톡을 보내고서 유시아는 더 이상 핸드폰을 보지 않고 바로 병원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병원 대문을 나오자마자 한서준이 정면에서 오고 있었다.“유시아.”유시아는 고개를 들었고 그를 보게 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 났다.직감이 알려주건대, 절대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화실의 생존 여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심기까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한서준은 쉽사리 유시아를 놓아 주지 않았고 손을 내밀어 유시아의 손목을 꼭 잡았다.“물어볼 일이 있어.”말하면서 근처에 있는 지프차를 가리켰다.“차에 타서 얘기 하자.”“그쪽이랑 할 말
유시아는 그 말을 이어받지 않고 집사의 바람대로 타이르기 시작했다.“몸이 아직 많이 허약해요. 먹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좀 먹어야 하거든요. 일이 어찌 됐든 일단 건강부터 챙겨야 해요.”임청아 그 말을 듣고서 쓴웃음을 지었다.“건강 회복되면 할아버지한테 잡혀가서 집에 감금되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유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어찌 됐든 할아버지 마음은 한결같을 거예요. 청아 씨를 아끼고 사랑하는 거요. 서로 대화가 필요한 거 같아요. 서로 터놓고 얘기하고 나면 오해가 풀리고 마음도 풀리면서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임청아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아이 낳고 나면 할아버지도 서준이도 원한을 내려놓고 행복만 할 수 있다고요.”“근데 이렇게 몸도 아끼지 않고 점점 더 막무가내로 나가면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은 점점 더 짙어질 거예요.”유시아는 말하면서 도우미 손에서 보신탕을 가져와 천천히 불며 임청아의 입가로 가져갔다.임청아는 생각 밖으로 무척이나 순순하게 유시아의 말을 따랐고 그녀의 말에 이치가 있는 것 같아 조용히 보신탕을 받아 마셨다.도우미와 집사는 두 사람이 티키타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서서히 마음이 놓였다.임청아가 뭐라도 먹기 시작하여 자기도 모르게 한시름을 놓으며 자리까지 비켜주려고 했다.두 사람이 마음 편히 말할 수 없을까 봐 눈치껏 일어서려는 것이다.“작은 사모님, 아가씨와 천천히 얘기하고 계세요. 밖에 나가 있을 테니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시고요.”“네, 가보세요.”도우미 일행이 나오고 나서야 유시아는 본론으로 들어갔다.“한서준 씨는 알고 있어요?”임청아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그런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잖아요.”요즘 임태훈뿐만 아니라 한서준도 눈을 부라리고 임청아를 찾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자 아파트도 호텔도 들어갈 수 없었고 버려진 강아지처럼 유시아 화실에 몸을 숨기고 지낸 것
임청아 이름 석 자가 임재욱의 입에서 나오자, 유시아는 순간 청천벽력을 맞는 것만 같았다.심지어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물었다.“청아 씨가 왜 병원에 있는 거죠?”임청아는 임신한 것을 알고 매사에 조심하며 걸음 하나도 천천히 옮겼었다.게다가 해외에 있는 친구와 연락하여 해외로 떠날 준비까지 마쳤다고 했었다.그런데 관건이 되는 순간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고?“할아버지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거 아니야?”임재욱은 말하면서 차갑게 웃었다.“네 화실에 청아 숨겨 놓았잖아. 할아버지께서 그걸 과연 모르고 있었을 것 같아? 오늘 화실로 청아 데리러 갔었는데, 가지 않겠다고 청아가 하도 우기는 바람에 억지로 묶어서라도 데리고 가겠다며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거야.”그렇다면 아이를 유산했을지도 모른다.임태훈의 습관에 따라 생각해 본다면 이 화살은 결국 유시아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임재욱이 그렇게 경고하였건만 유시아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약해지는 마음에 언젠가는 구렁이에 빠지게 될 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 일 줄은 몰랐다. 임재욱은 한숨을 내쉬며 꾸짖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병원 주소 보내줄 테니 얼른 가 봐.”말을 마치고 임재욱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고 운전 기사에게 새로운 목적지를 알려주었다.같은 시각, 병원 안에서.임청아는 이미 수술을 마쳤고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이미 가문의 집사와 간호인이 옆에 있었고 병실 문 앞에는 임태훈이 보낸 경호원도 있었다.다만 경호원이 경계해야 할 상대는 유시아가 아니라 한서준이다.따라서 유시아는 별다른 막힘없이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상에 누워 있는 임청아는 얼굴에 핏기 하나 없었고 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불과 하룻밤 사이에 모든 활력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집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주 공손하게 유시아에
조금 전까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던 임재욱은 멈칫거리고 말았다.이윽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유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별거하자는 뜻이야?”“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유시아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머리가 아픈 듯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그 시간으로 시연이한테 집중해도 되잖아요. 나도 마침 어머님 곁에 좀 있어드리고... 서로에게 지금 이게 최우선인 것 같아요.”임재욱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서 낙담한 모습으로 말했다.“그래. 네가 좋다고 하면 그게 좋은 거겠지. 그렇게 하자.”말을 마치고 그는 계속 밥을 먹었다.유시아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서 아련하게 웃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이튿날 아침, 유시아는 임재욱이 출근하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일상복 몇 벌과 일상용품을 챙겨 작은 트렁크 안에 놓고 바로 이채련한테 가려고 했다.허씨 아주머니는 트렁크를 들고 내려오는 유시아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사모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설마... 가출하려는 건 아니죠?”유시아는 허씨 아주머니를 향해 웃었다.“아니에요. 친척분이 좀 위독하신데 제가 옆에서 좀 챙겨드리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얼마 걸리지 않을 거고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트렁크를 들고서 집을 나섰다.이채련이 지내고 있는 병실이 VIP 병실로 널찍한 객실까지 갖춰져 있다.유시아는 간호사에게 접이식 침대와 이불을 요구했고 간단히 정리하고 나니 잘 자리가 아늑하게 마련되었다.이채련은 더 이상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어 하루 24시간을 침대 위에서 보내고 있다.얼굴도 하도 여위어 본연의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그전에도 유시아는 이채련에게 이곳에서 며칠 동안 함께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지만 이채련은 행여나 자기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흠이 생기게 될까 봐 동의하지 않았었다.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갖은 풍
임재욱은 핸들을 꼭 움켜쥐고서 앞만 바라보았으나 두 눈에는 고통과 망연함이 가득했다.“시연이 해외에 있을 때, 몹쓸 짓을 당했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나.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게 된 거야.”유시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볼륨까지 높아졌다.“어머, 어떡해요!”평소에 신시연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기는 했다.여자에게 있어서 그런 몹쓸 짓을 당한다는 건 치명적인 타격과 치욕이 아닐 수가 없다.게다가 부모님의 일까지 더해지니 조금 전 식당에서 봤던 신시연의 모습이 이해되었다.임재욱은 말하면서 후회와 자책하는 빛을 드러냈다.“그렇게 가고 싶지 않다는 시연이를 내가 억지로 보낸 거야.”그때는 모든 걸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낯선 곳으로 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학업에만 집중하면 자연스레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삶을 그려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하지만 임재욱이 잊고 있었던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신시연이 이제 갓 20살을 넘은 꽃다운 여자아이라는 것이다.해외에는 불안정 요소도 많고 미처 생각지 못하는 위험도 많다.게다가 젊은 나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릇된 길로 들어서기도 아주 위험하고 말이다.신시연 곁에 사람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24시간 동안 찰싹 달라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유시아와 결혼하고 나서 신혼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신시연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지금 임재욱은 신서현에게 미안할 뿐이다. 하나뿐인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하지만 그가 말한 본의와 달리 듣고 있는 유시아는 또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유시아의 기억으로는 신시연이 해외로 보내진 이유는 이러하다.그때 신시연은 정운시 대학교 교내 사이트에 유시아를 먹칠하는 게시글을 올리면서 유시아로 하여금 학업을 이어갈 수도 수업을 들을 수도 없게 악한 상황을 만들었었다.마침 그 일을 소현우가 알게 되면서 유시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