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숙은 점점 이성의 끈을 놓기 시작했고 임재욱을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임재욱, 너 또한 같은 인간이야! 남의 가정 파탄 내는 빌어먹을 그 여자만큼 뻔뻔하다고!”임재욱의 아내로 정유라가 임씨 가문에 들어가기는 했으나 정씨 가문 사람들은 임재욱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왜냐하면 그의 형인 임진욱보다 훨씬 못났기 때문이다. 출신이며 살아온 경력이며.임진욱은 어릴 적부터 귀족 교육을 받아왔으므로 매사에 교양이 넘치고 여성을 대함에 있어서 늘 존중을 앞세웠으며 정유라에 대해서도 지극정성이었다.그와 반대로 임재욱은 그의 아버지가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가장 명확한 ‘증거’다.엄마라는 사람은 어느 술집 출신 여자로 천하기 그지없고.임재욱은 생후 3일 만에 달랑 편지 하나와 함께 몰래 보육원 앞으로 버려졌다.그 편지에는 그의 이름과 가장 기본적인 정보만 적혀 있었다.만약 임재욱 아빠와 형이 갑작스럽게 죽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평생 입에 풀칠할 정도로 살았을 것이다.임씨 가문의 재산을 물려받지도 못하고 금지옥엽으로 키운 자기 딸과도 절대 만날 리가 없었을 것이다.홧김에 뱉은 고미숙의 말 속의 ‘빌어먹을 그 여자’가 과연 임재욱의 생모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유시아를 가리키는 것인지 순간 가늠이 되지 않았다.임재욱은 차가운 눈빛으로 고미숙을 흘겨보더니 곧 정유라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설마 그쪽이 정말로 내 아내라고 착각한 건 아니죠?”이에 정유라는 사색이 되면서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미안해요. 재욱 씨.”아랫입술을 살포시 물더니 정유라는 잠시 생각하고서 입을 여는데.“아빠, 엄마, 우리 혼인 신고 하지 않았어요. 그냥 결혼식만 올린 거예요...”정유라는 자초지종을 있는 그대로 부모님께 말씀드렸다.모든 걸 알고 난 정유라의 부모님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아주 폼 나게 온갖 정성을 다해 시집을 보냈건만, 그 모든 게 연기란 말인가?“아이를 가졌을 때도 할아버님께서 일단 아이를 낳고 혼인 신고를 하라고 그러셨어요. 그럼, 그냥 지나
다 같은 임씨 가문의 핏줄이지만, 이 집안에서만큼은 신분에 귀천이 있다.그 말인즉슨, 대우 그룹 대표 자리에 임재욱이 앉았다고 한들 그 전제는 갑작스러운 사고를 임진욱이 세상을 떠나면서 임씨 가문에 더 이상 상속자가 없어서 하는 수없이 그를 앉힌 거란 말이다.만약 임진욱이 살아 있다면 임태훈은 절대 그 어떠한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혼외 자식인 임재욱을 임씨 가문으로 데리고 오지 않았을 것이다.임태훈이 자기에 대한 태도가 어떠한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임재욱은 입가에 헛웃음이 일었다.“할아버지, 증손자를 잃으셔서 슬프신 가 봐요? 근데 정유라 씨 배 속에 있던 아이가 꼭 임씨 가문 핏줄이라는 걸 어떻게 확신하시죠? 제 아이라고 또 어떻게 단언하실 수 있으시냐 말이에요.”“...”임태훈은 순간 말 문이 턱 막혔다.정건호 생일 그날에 정유라와 어울려 지면서 순리대로 아이를 품게 된 줄 알았다.그때 임태훈은 심지어 손주며느리인 정유라의 수단이 제법이라며 내심 ‘감탄’까지 했었다.그러나 이제 와서 임재욱이 다른 소리를 하고 있으니...정유라 부모님도 갑작스러운 그의 주장에 어리둥절해졌다.내내 흐느끼고 있던 정유라마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묻는다.핏기 하나 없는 얼굴에 눈물 자국이 선명한 채 무척이나 가녀린 모습으로.“재욱 씨, 지금 그게 무슨 뜻이에요? 제가 설마 바람이라도 폈다는 거예요? 재욱 씨 아이가 아니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죠?”정유라는 차갑게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전에 우리가 했던 약속 엎으려고 해도 상관없고 저 책임지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근데 그런 식으로 저 모욕하지 마세요. 저는 재욱 씨처럼 혼인에 배신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이랑 자지도 않았어요.”‘네 아이인지 아닌지 확인하기엔 이미 너무 늦었거든.’본래 아이가 아직 배 속에 있다면 이맘때쯤 양수로 DNA 검사를 할 수 있다.임재욱이 자기를 의심하면서 DNA 검사까지 하게 될까 봐 이 타이밍에 아이를 유산해 버린 것이다.더 이상 DN
그들이 의심한다고 하더라도 정유라는 아이의 DNA를 빼고는 모든 증거를 내세울 수 있었다.빈틈 하나 없는 계획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끝내는 임재욱의 손에 잡힐 줄은 몰랐다.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니.임태훈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기만이라는 것을 정유라는 잘 알고 있다.특히 그가 가장 중요시하는 증손자의 일로 속였으니, 앞으로 다시는 자기를 믿지 않으리라 생각이 들었다.“미친!”화가 치밀어 오른 임태훈은 지팡이로 바닥을 세게 치고는 두말하지 않고 뒤돌아서서 떠났다.그가 떠나고 병실에 남은 네 사람 중 지금 그나마 정신을 부여잡고 있는 사람은 정건호였다.임재욱의 손에서 복사물을 가져오며 가장 먼저 입을 여는데.“재욱아, 좋은 일도 아니고 네가 더는 입 밖으로 내지 않았으면 한다.”만약 외부인들이 알게 된다면 정유라는 명성이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고 얼굴 들고 살날이 없을 것이다.고미숙 또한 바락바락 화내던 모습을 거둔 채 한껏 차분해졌다.오직 정유라만이 미동도 없이 병상에 앉아 있는데 모든 음모가 간파되면서 그녀는 악이 치밀어 올랐다.“재욱 씨...”정유라는 고개를 들어 임재욱을 바라보며 말했다.“이 순간을 위해 그동안 많은 준비를 하셨겠어요? 마침내 모든 게 드러나고 모든 게 끝났으니 인제 당당하게 저 버리고 그 여자한테 달려가서 오붓하게 살 수 있으니 아주 속이 후련하죠?”“그 누구도 정유라 씨 강박하지 않았어요. 처음부터 아주 폼나게 나갈 수 있게 제안했건만 싫다면서요. 그래서 굳이 이런 사달까지 낸 거 아니에요? 탓하라면 이 모든 걸 자초한 정유라 씨 자신을 탓하시죠.”임재욱은 복사물을 도로 가져와 갈기갈기 찢어버렸다.“3일 안팎으로 우리 이혼 소식 내보낼 거예요. 그리고 비서 통해 계좌로 위로금 들어갈 테니 확인하고요.”할 말을 다 하고서 임재욱 역시 임태훈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병실을 떠났다.정유라에 대해서 이미 두 손 두 발을 다 들어 버린 임재욱이다.그 어떠한 일로도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고 말조차
대우 그룹 내부에 대해서 임태훈은 이미 손을 뗀 지 오래되었다.나이가 많은 것도 있지만 임재욱에 대한 믿음이 컸기에 안심하고 노후를 즐기면서 회사 일에 관해 묻지도 않은 것이다.그러나 가끔 회사 큰 주주들이 집으로 찾아와 이런저런 얘기를 언급했었다.임태훈은 그제야 임재욱이 심씨 가문을 위해 적지 않게 힘써준 것을, 그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시대가 바뀌고 전성기를 다 보내는 부동산 사업은 전경이 그리 좋지는 않다.여러 해 동안 적자를 낸 심씨 가문의 통장을 메우려는 것도 결코 한 순간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임재욱은 심씨 가문을 위해 대출을 비롯한 여러 도움을 주었는데, 그중에서 황금 지역까지 내주면서 다시 일어서게끔 했다.이는 회사 주주들의 이익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면서 주주들의 불만을 자아낸 것이다.그렇게 끝내는 임태훈의 귀에까지 들어온 것이고.임씨 가문과 심씨 가문 사이에는 그동안 아무런 거래도 교류도 없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씨 가문에서 시원시원하게 도와주는 건 모두 유시아 때문이다.이런 애물단지가 임재욱 곁에 있으니 대우 그룹 전체가 손에 땀을 쥐고 있다.그러므로 정유라는 이 사건의 서론이자 낙타 등에 눌린 마지막 짚이기도 하다.임태훈은 의자에서 일어서서 임재욱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말했다.“놀아도 되는데 정도껏 해야지. 꽃뱀이나 다름없는 여자잖아. 그런 여자한테 그 많은 돈을 쏟아붓는 건 좀 아니라고 본다. 그럴 가치도 없거니와.”말을 마치고 임태훈은 바로 몸을 돌려 위층으로 향했다.그리고 정유라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는 더 이상 두 사람 일에 참견하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유시아에 관해서 절대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그 무슨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절대 유시아 한 명을 위해 대우 그룹 전체를 망치게 할 수는 없다면서.임재욱도 몸을 돌려 멀어져가는 임태훈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시아 저한테 돌려주지 않겠다는 말씀인가요? 네?”그 말을 듣기는 했으나 임태훈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계속 위층으로 향했다.그러다가
누구나 그러하듯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자기의 지위가 가장 높고 특별했으면 한다.어머니를 제외하고서 그 누구도 자기와 어깨를 나란히 할 생각을 하지 말라면서.한서준은 티슈 한 장을 뽑아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임청아의 입을 부드럽게 닦아 주었다.얼굴에 미소를 띠고 사랑이 듬뿍 담긴 눈빛으로.“100점 대답 들었으니, 이제 좋아?”임청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도도하면서도 어린아이처럼 기뻐해 마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마음이 단순한 여자는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이다.그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한서준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고 입꼬리도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가능하다면 그녀가 평생 이렇게 단순하게 지냈으면 한다.그 어떠한 고민도 걱정도 없이 세간의 고통도 모른 채로 말이다.밥을 다 먹고 나서 한서준은 임청아의 손을 잡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번화한 밤거리를 바라보며 임청아는 그의 어깨에 살포시 기대어 제안했다.“서준아, 우리 영화 보러 가자. 새로 나온 액션영화가 있다고 하던데 엄청 재밌다고 들었어. 같이 보러 가면 안 돼?”그 말에 한서준은 입가에 웃음이 일었다.“청아 너 같은 여자들은 보통 사랑 영화 같은 걸 보지 않아? 갑자기 웬 액션 영화? 그건 남자들이 보는 거 아니야?” “영화 보는데 남자 여자가 어디 있어. 재밌으면 그냥 보는 거지. 난 액션 영화가 좋단 말이야.”임청아는 그의 손목을 붙잡고 덧붙였다.“어릴 적부터 액션 영화 좋아했어. 우리 할아버지가 난 응당 남자로 태어났어야 했다고 그러셨어.”그때는 임태훈의 말이 듣기 거북하지 않았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니 차라리 그랬으면 했다.그럼, 적어도 성차별을 받지 않아도 될 것이고 홀로 대우 그룹을 도맡을 수 있을 건데 말이다.허구한 날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아버지의 혼외 자식인 임재욱을 보지 않아도 되고.정서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성격이라 그 일을 떠올리더니 임청아는 순간 얼굴이 어두워졌다.하지만 한서준은 그녀가 지금 무슨 일로 갑자기 표
한서준이 내려가자, VIP 상영관에는 임청아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그녀는 소파에 기댄 채 팝콘을 먹으면서 여유로운 모습으로 영화를 즐겼다.바로 그때 외투에서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핸드폰을 꺼내 들어 보니 발신자 번호에 임재욱이라고 적혀 있었다.이름 석 자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으나 수신 버튼을 눌렀다.“무슨 일이야?”“너 지금 히트 영화관이야? 한서준이 누구하고 싸우던데? 지하 주차장에서.”그 말에 임청아는 당황해 마지 못했다.“뭐라고? 서준이가 싸우고 있다고?”확답을 듣고서 임청아는 바로 전화를 끊고 외투와 가방을 챙겨 달려 나갔다.걸음을 재촉하면서 한서준에게 전화를 계속 걸었다.하지만 받는 이가 없었다. 지하 주차장에 워낙 신호가 없으니깐.임청아는 별다른 의심 없이 전화를 끊어버리고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지하 2층에 이르러 엘리베이터에서 나서자마자 자기를 기다리고 있던 임재욱과 마주치게 되었다.“서준이는?”임청아는 다소 다급한 모습으로 여기저기 둘러보았다.“어디 있어? 어디 있냐고? 어... 웁...”바로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젖은 수건으로 임청아의 입과 코를 막아 버렸다.수건에서 이상한 향기가 났고 임청아는 그 향기를 계속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순간 머리가 빙빙 돌면서 차갑게 웃고 있는 임재욱의 웃음소리마저도 희미해졌다.모든 걸 해결하고 다시 상영관으로 돌아온 한서준은 그대로 굳어버렸다.임청아도 이미 사라진 채 아무것도 없었으니...다음 날 아침, 임태훈이 위층에서 내려오자, 집사는 그를 보자마자 공손하게 아침 인사를 드렸다.“안녕히 잘 주무셨나요?”이에 임태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나이가 들면 잠도 줄어드는지 그는 늘 아침 일찍 일어나곤 한다.이른 아침부터 하인들은 자기 위치에서 청소하고 음식 준비를 하며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임태훈은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다가 물었다.“청아는? 들어오지 않았어?”집사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어제 점심에 나간 뒤로 지금껏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기가 살아 있을 때는 어떻게든 임청아를 지켜줄 수 있지만, 일단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임청아는 어찌 될지 모른다고.대우 그룹에서 얼마나 나눠 가질 수 있는지도 그때가 되면 임재욱의 손에 달려있게 된다고.따라서 시무에 맞게 똑똑하게 움직여야 한다고 입이 닳도록 말했었다.이때 핸드폰에 떠오른 전화번호를 보고 임재욱은 수신 버튼을 눌렀다.그러고는 핸드폰을 임청아의 귓가에 놓았는데.“할아버지야 전화야. 받아.”전화기 너머 임태훈의 자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청아야, 너 어제 또 외박했어? 지금 어디야? 당장 사람 보낼게.”임청아는 이미 놀라서 자지러질 뻔했으나 임태훈의 소리를 듣자마자 울컥했다.“할아버지, 저 좀 살려주세요. 임재욱이 절 죽이려고 해요.”순간 임태훈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임재욱? 청아야, 너 지금 어디야? 임재욱은? 걔한테 전화 좀 받으라고 해.”옥상의 바람 소리가 무척이나 크게 들려왔다.백화점 아래서 많은 이들이 옥상 위의 상황을 목격하게 되었고 경비원들은 부랴부랴 움직이기 시작했다.경찰에 신고하며 기자에게 연락하며...옥상으로 향하는 문을 임재욱이 꼭 닫아 버렸기에 지금 이곳은 두 사람만의 ‘무인도’가 되어 버렸다.임재욱은 핸드폰을 도로 가져와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텔레비전을 보시든가 아니면 온라인으로 ‘히트 백화점’검색해 보시든가 하세요. 그럼, 귀하신 손녀분께서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아시게 될 거예요.”임태훈이 직접 움직일 것도 없이 집사가 태블릿으로 시민이 찍은 동영상을 보여드렸다.“이거 좀 보세요. 아가씨께서...”임태훈은 간신히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임재욱, 청아는 네 동생이자 우리 임씨 가문의 일원이야...”“임씨 가문의 일원이라는 거 저도 물론 잘 알고 있어요. 할아버지께서 제 숨통을 조이시니 저도 도무지 어찌할 바를 몰라 이러고 있는 중이에요.”임재욱의 입가에 차가운 웃음이 일었다.“할아버지, 거래 하나 하실래요? 저한테 시아 돌려주시면 저도 손녀분 돌려드릴게요. 털
오늘 아침 6시 폭파 철거!임재욱은 고개를 숙여 시간을 한 번 보았는데, 딱 마침 6시였다.‘늦었어.’순간 우렁찬 소리가 귓가에 희미하게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시아 죽이려고 했어... 처음부터 우리 시아 죽이려고 했어...’유시아를 ZH빌라로 보낸 걸로 모든 것이 드러났다.위험 주택인 ZH빌라를 폭파하면서 유시아까지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설령 나중에 누군가가 그때 그 건물 속에 사람이 있었다고 이의를 제기하더라도 임태훈은 자신의 인맥으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심지어 유시아 혼자서 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고 할 수도 있다.거렁뱅이가 지붕이 있는 곳으로 찾아 들어가는 것처럼.폭파 소리일지도 모르는 그 희미한 소리는 임재욱의 고막을 찌른 동시에 가슴까지 확 치고 들어왔다.순간 폭풍우처럼 밀려드는 슬픔에 숨이 턱턱 막혔고 유시아와 헤어졌던 마지막 그 순간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뭉치한테 제발 좀 잘해 달라고 부탁했던 그 순간.그렇게 하겠다며 약속을 받아냈던 그 순간.차가 멀어질 때까지 그린레이크 앞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그 순간. 그 모든 순간이 전례없이 또렷하게 확대되었다.시간을 좀 더 뒤로하여 하나씩 떠올렸는데...유시아는 단 한 번도 진심으로 행복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유시아가 편히 살 수 없게끔 임재욱은 최선을 다해 그녀를 괴롭혔었다.그녀가 좋아하지도 않은 고양이를 억지로 선물했고 소현우한테서 받았던 다이아몬드 반지를 버렸고 심지어 구름이까지 데리고 갔다.그렇게 모질게 대했었는데 살짝 고개를 숙이고 뭉치한테 잘 해달라고 하니 유시아는 또 시원시원하게 승낙까지 했었다.‘내 말이라면 그게 뭐든 듣는 사람이잖아... 그러니 시아야, 절대 죽지 마! 나 너 보고 죽어도 된다고 한 적 없어...’임재욱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의외로 침착한 모습으로 전화를 끊었다.바로 경찰에 신고하고 응급차까지 불렀다.모든 걸 마치고 난 뒤 그는 액셀을 끝까지 밟고 신호등 따위를 무시한 채 미친 듯이 달려갔다.ZH빌라에 도착했을 때 눈에
늦은 밤, 유시아의 카카오톡을 받았을 때 임재욱은 병원에 있었다.신시연은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진료실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고 그동안에 임재욱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늦은 밤의 사립 병원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당직을 서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외에 거의 사람이 없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임재욱은 복도를 한참이나 누비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유시아를 병원으로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길에 신시연의 전화를 받고서 오게 된 것이다.배가 아프다고.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아프다고.신시연은 며칠 전에 병원에서 여러 번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해외에서 그러한 몹쓸 짓을 당하며 우울증과 부인병이 있는 외에 다른 수치들은 정상 범위 안에 있었다.그 말인즉슨,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재욱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신시연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임재욱 하나뿐이니 어찌 됐든 그녀를 잘 지켜야 하는 마음뿐이었다.그 누구에게도 다시는 상처를 받지 않게끔.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여 임재욱은 그녀를 직접 병원까지 데리고 오고 의사 선생님 입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확답을 듣고 나야만 마음이 놓일 수 있다.애타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렸다.유시아가 보낸 카카오톡인데,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보고 싶어요.]임재욱은 고개를 숙인 채 카톡 내용을 거듭 곱씹으며 유시아 사진으로 되어 있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자꾸 올라갔다.‘내가 보고 싶어? 별거한 지 하루 만에 벌써 내가 보고 싶은 거야?’‘우리 시아 이제 제법 솔직하네.’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어떻게 답장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응급실 문이 열렸다.도우미 김향화가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신시연을 부축하고 걸어 나왔다.신시연은 디자인이 아주 심플한 데님 스커트를 입었고 윤기가 별로 없어 보이는 머리를 돌돌 말아 묶어 올렸다.무척이나 초췌해 보이는 것이 가여운 느낌도 물씬 풍기고 있어 기고만장했던 그
유리 구두를 품속에 꼭 안고 있는 유시아를 보고서 임재욱은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참으로 달래기 쉬운 여자라는 것을.특히 결혼하고 나서 아주 살짝만 잘해주어도 유시아는 아주 오랫동안 기뻐하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늘 임재욱 앞에만 서면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자기를 낮은 위치에 놓는 데 습관 되어 있다.임재욱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뽀뽀했다.“앞으로 매년 생일마다 예쁜 유리 구두 선물해 줄게. 어때?”“좋아요.”유시아는 말하면서 아주 유치하게 그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절대 어기지 않겠다고.”백화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일단 화실로 향했다.새로 구매한 공예품을 적당한 자리에 올려놓고 유시아의 제안으로 이채련의 병원까지 바래다주었다.유시아는 자기가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타입이라 이채련과 이미 약속했으니 꼭 지켜야 했다.하물며 자식도 없는 이체련에게 마지막 이 시간들이 더더욱 외로울 것이다.외부인들이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로 외롭다.임재욱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이채련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니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보내주었다.차는 곧 사립 병원 앞에 멈춰 섰고 임재욱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유시아는 차창에 대고 거듭 강조했다.“유리 구두랑 드레스들 옷방에 고이 모셔두도록 해요. 마구 놓지 말고요.”“알았어.”임재욱은 말하고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목을 확 잡고서 찐한 키스를 남기고 나서야 순순히 놓아 주었다.“얼른 가 봐.”“조심해서 가요.”임재욱은 조수석에 앉아 한결 가벼워진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서야 시선을 거두고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가는 길에 갑자기 신시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오빠, 배가 너무 아파요.”...병실로 돌아와 보니 이채련은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침대에 멍하니 누워 재미가 일도 없는 예능 프로를 보고 있었다.유시아가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채련은 놀라고도 기뻤다.“시아야,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유시아
쇼핑은 늘 설레는 일이다.유시아는 자기 취향대로 화실 장식품으로 쓰일 공예품을 골랐다.이윽고 임재욱은 또 유시아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지난번에 두 사람은 함께 쇼핑하면서 많은 옷을 샀었지만, 신서현 부모님께 갑작스러운 상황이 일어나면서 유시아는 그 모든 옷을 모조리 청소 아주머니에게 줘 버렸다.그때의 아쉬움을 채워주기 위해 임재욱은 또다시 쇼핑하려고 한 것이다.게다가 다음 주면 대우 그룹 상장 20주년이다.정식적인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유시아를 자기 아내 신분으로 남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이브닝 파티에 어울릴만한 드레스와 신발을 살 예정이다.드레스는 그럭저럭 큰마음이 가지 않았는데, 유시아는 그 신발이 마음에 들었다.은백색의 하이힐로 예쁜 보석들로 가득 박혀 있어 매점 불빛 아래서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신데렐라 동화에 나올 법한 유리 구두 같았다.매점 직원은 유시아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고 바로 다가왔다.“손님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 이 제품은 저희 디자이너 선생님의 최신 디자인으로 지금 딱 한 켤레만 있습니다. 만약 이 신발을 신고 나가신다면...”임재욱은 갑자기 직원의 말을 끊어버렸다.“이미 결혼했고요. 이 사람은 제 아내예요.”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는데, 자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를 보고서 따라서 웃었다.“맞아요. 이 사람이 제 남편이에요.”매점 직원은 멍하니 있다가 바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베스트 쇼핑 가이드다운 실력을 드러냈다.“어머, 어쩐지 너무 어울리신다 했어요...”직원의 칭찬에 두 사람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이윽고 매점 직원은 분위기를 파악하며 유리 구두에 대해 더욱 디테일한 설명을 첨부하기 시작했다.“이 제품의 새끼 양가죽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착용감이 엄청 좋으실 거예요. 하루 종일 신고 걸으셔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게다가 우리 디자이너 선생님이 즉흥으로 만들어내신 작품이라 절대 똑같은 제품을 시중에서 보실 수 없을 거예요.”한 켤레일 뿐만 아니라 사이
한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내가 뭐?”“한서준 씨는 당당해요?”유시아는 바로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었다.“임씨 가문에 접근한 그 의도를 다른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요? 할아버지, 재욱 씨 그리고 나까지 똑똑히 알고 있어요. 청아 씨만이 한서준 씨를 사랑해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요. 그렇게 쭉 모르는 척을 하며 모든 걸 감당하고 있었던 거라고요. 한서준 씨 역시 청아 씨를 이용한 게 아닌가요?”마지막 한 마디에 한서준은 침묵하고 말았다.그렇다. 임청아에게 접근한 이유는 유시아가 ‘스파이’로 움직여 주지 않겠다고 거절했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임씨 가문 천금을 노리게 된 것이다.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 변하게 되어 있다.임청아 대한 마음은 모략에서 시작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마음이 점점 사랑으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띠고 다가왔던 임청아가 어두운 자신의 삶을 밝게 비춰주는 것만 같았다.따라서 한서준은 임청아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차츰 생기게 된 것이다.임태훈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꼭 자기 곁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청아 씨 지금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에요.”“만약 청아 씨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말을 마치고 유시아는 차 문을 밀고 차에서 내려 병원 밖으로 걸어갔다.택시에 오른 유시아는 긴 망설임 끝에 끝내는 더 스케치 화실 주소를 운전 기사에게 알렸다.차는 화실 맞은 편에 세워졌고 유시아는 화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화실 안의 상황을 바로 체크할 수 있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최적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수많은 경호원들이 임태훈을 사이에 두고 화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임태훈은 벤틀리에 올라 강한 기운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유시아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고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바로 화실로 향해 달려갔다.화실 안과 밖은 겉은
전화를 마치고 유시아는 혼자 밖에 없는 휴게실을 보고서 깊은 번뇌에 잠겼다.남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임태훈처럼 막무가내로 어처구니가 없는 노인이 있다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태훈이 끔찍이 여기는 임청아를 유시아가 계단에서 밀어버린 것도 아닌데, 왜 애꿎은 자기 화실을 닫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집안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스스로 반성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데, 그게 무엇이든 일단 남한테서 문제를 찾고 있으니, 권력을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했다.유시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고 불안함도 점점 커졌다.지금 운영하고 있는 더 스케치 화실도 용재휘가 먼저 시작한 것인데, 그와 더불어 학생들까지 모두 함께 넘겨주었는데, 만약 이대로 화실을 망쳐버린다면 용재휘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임재욱과 임태훈이 어느 정도로 얘기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화실이 그들 싸움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용기가 없어 일단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그렇게 한참이나 심장을 조이고 있었지만, 걸려 오는 전화는 없었다.유시아는 일이 어느 정도 망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학생 채팅방에 오늘 갑자기 일이 있다며 수업을 뒤로 미룬다고 알렸다.언제 다시 수업을 시작할지는 소식을 기다리라며 덧붙이기까지 했다.톡을 보내고서 유시아는 더 이상 핸드폰을 보지 않고 바로 병원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병원 대문을 나오자마자 한서준이 정면에서 오고 있었다.“유시아.”유시아는 고개를 들었고 그를 보게 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 났다.직감이 알려주건대, 절대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화실의 생존 여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심기까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한서준은 쉽사리 유시아를 놓아 주지 않았고 손을 내밀어 유시아의 손목을 꼭 잡았다.“물어볼 일이 있어.”말하면서 근처에 있는 지프차를 가리켰다.“차에 타서 얘기 하자.”“그쪽이랑 할 말
유시아는 그 말을 이어받지 않고 집사의 바람대로 타이르기 시작했다.“몸이 아직 많이 허약해요. 먹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좀 먹어야 하거든요. 일이 어찌 됐든 일단 건강부터 챙겨야 해요.”임청아 그 말을 듣고서 쓴웃음을 지었다.“건강 회복되면 할아버지한테 잡혀가서 집에 감금되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유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어찌 됐든 할아버지 마음은 한결같을 거예요. 청아 씨를 아끼고 사랑하는 거요. 서로 대화가 필요한 거 같아요. 서로 터놓고 얘기하고 나면 오해가 풀리고 마음도 풀리면서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임청아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아이 낳고 나면 할아버지도 서준이도 원한을 내려놓고 행복만 할 수 있다고요.”“근데 이렇게 몸도 아끼지 않고 점점 더 막무가내로 나가면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은 점점 더 짙어질 거예요.”유시아는 말하면서 도우미 손에서 보신탕을 가져와 천천히 불며 임청아의 입가로 가져갔다.임청아는 생각 밖으로 무척이나 순순하게 유시아의 말을 따랐고 그녀의 말에 이치가 있는 것 같아 조용히 보신탕을 받아 마셨다.도우미와 집사는 두 사람이 티키타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서서히 마음이 놓였다.임청아가 뭐라도 먹기 시작하여 자기도 모르게 한시름을 놓으며 자리까지 비켜주려고 했다.두 사람이 마음 편히 말할 수 없을까 봐 눈치껏 일어서려는 것이다.“작은 사모님, 아가씨와 천천히 얘기하고 계세요. 밖에 나가 있을 테니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시고요.”“네, 가보세요.”도우미 일행이 나오고 나서야 유시아는 본론으로 들어갔다.“한서준 씨는 알고 있어요?”임청아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그런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잖아요.”요즘 임태훈뿐만 아니라 한서준도 눈을 부라리고 임청아를 찾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자 아파트도 호텔도 들어갈 수 없었고 버려진 강아지처럼 유시아 화실에 몸을 숨기고 지낸 것
임청아 이름 석 자가 임재욱의 입에서 나오자, 유시아는 순간 청천벽력을 맞는 것만 같았다.심지어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물었다.“청아 씨가 왜 병원에 있는 거죠?”임청아는 임신한 것을 알고 매사에 조심하며 걸음 하나도 천천히 옮겼었다.게다가 해외에 있는 친구와 연락하여 해외로 떠날 준비까지 마쳤다고 했었다.그런데 관건이 되는 순간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고?“할아버지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거 아니야?”임재욱은 말하면서 차갑게 웃었다.“네 화실에 청아 숨겨 놓았잖아. 할아버지께서 그걸 과연 모르고 있었을 것 같아? 오늘 화실로 청아 데리러 갔었는데, 가지 않겠다고 청아가 하도 우기는 바람에 억지로 묶어서라도 데리고 가겠다며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거야.”그렇다면 아이를 유산했을지도 모른다.임태훈의 습관에 따라 생각해 본다면 이 화살은 결국 유시아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임재욱이 그렇게 경고하였건만 유시아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약해지는 마음에 언젠가는 구렁이에 빠지게 될 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 일 줄은 몰랐다. 임재욱은 한숨을 내쉬며 꾸짖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병원 주소 보내줄 테니 얼른 가 봐.”말을 마치고 임재욱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고 운전 기사에게 새로운 목적지를 알려주었다.같은 시각, 병원 안에서.임청아는 이미 수술을 마쳤고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이미 가문의 집사와 간호인이 옆에 있었고 병실 문 앞에는 임태훈이 보낸 경호원도 있었다.다만 경호원이 경계해야 할 상대는 유시아가 아니라 한서준이다.따라서 유시아는 별다른 막힘없이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상에 누워 있는 임청아는 얼굴에 핏기 하나 없었고 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불과 하룻밤 사이에 모든 활력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집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주 공손하게 유시아에
조금 전까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던 임재욱은 멈칫거리고 말았다.이윽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유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별거하자는 뜻이야?”“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유시아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머리가 아픈 듯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그 시간으로 시연이한테 집중해도 되잖아요. 나도 마침 어머님 곁에 좀 있어드리고... 서로에게 지금 이게 최우선인 것 같아요.”임재욱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서 낙담한 모습으로 말했다.“그래. 네가 좋다고 하면 그게 좋은 거겠지. 그렇게 하자.”말을 마치고 그는 계속 밥을 먹었다.유시아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서 아련하게 웃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이튿날 아침, 유시아는 임재욱이 출근하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일상복 몇 벌과 일상용품을 챙겨 작은 트렁크 안에 놓고 바로 이채련한테 가려고 했다.허씨 아주머니는 트렁크를 들고 내려오는 유시아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사모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설마... 가출하려는 건 아니죠?”유시아는 허씨 아주머니를 향해 웃었다.“아니에요. 친척분이 좀 위독하신데 제가 옆에서 좀 챙겨드리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얼마 걸리지 않을 거고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트렁크를 들고서 집을 나섰다.이채련이 지내고 있는 병실이 VIP 병실로 널찍한 객실까지 갖춰져 있다.유시아는 간호사에게 접이식 침대와 이불을 요구했고 간단히 정리하고 나니 잘 자리가 아늑하게 마련되었다.이채련은 더 이상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어 하루 24시간을 침대 위에서 보내고 있다.얼굴도 하도 여위어 본연의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그전에도 유시아는 이채련에게 이곳에서 며칠 동안 함께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지만 이채련은 행여나 자기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흠이 생기게 될까 봐 동의하지 않았었다.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갖은 풍
임재욱은 핸들을 꼭 움켜쥐고서 앞만 바라보았으나 두 눈에는 고통과 망연함이 가득했다.“시연이 해외에 있을 때, 몹쓸 짓을 당했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나.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게 된 거야.”유시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볼륨까지 높아졌다.“어머, 어떡해요!”평소에 신시연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기는 했다.여자에게 있어서 그런 몹쓸 짓을 당한다는 건 치명적인 타격과 치욕이 아닐 수가 없다.게다가 부모님의 일까지 더해지니 조금 전 식당에서 봤던 신시연의 모습이 이해되었다.임재욱은 말하면서 후회와 자책하는 빛을 드러냈다.“그렇게 가고 싶지 않다는 시연이를 내가 억지로 보낸 거야.”그때는 모든 걸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낯선 곳으로 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학업에만 집중하면 자연스레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삶을 그려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하지만 임재욱이 잊고 있었던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신시연이 이제 갓 20살을 넘은 꽃다운 여자아이라는 것이다.해외에는 불안정 요소도 많고 미처 생각지 못하는 위험도 많다.게다가 젊은 나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릇된 길로 들어서기도 아주 위험하고 말이다.신시연 곁에 사람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24시간 동안 찰싹 달라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유시아와 결혼하고 나서 신혼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신시연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지금 임재욱은 신서현에게 미안할 뿐이다. 하나뿐인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하지만 그가 말한 본의와 달리 듣고 있는 유시아는 또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유시아의 기억으로는 신시연이 해외로 보내진 이유는 이러하다.그때 신시연은 정운시 대학교 교내 사이트에 유시아를 먹칠하는 게시글을 올리면서 유시아로 하여금 학업을 이어갈 수도 수업을 들을 수도 없게 악한 상황을 만들었었다.마침 그 일을 소현우가 알게 되면서 유시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