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 해외의 남부, 호화로운 개인 별장.침실 침대에 앉아 핸드폰을 잡고 남자의 전례 없는 부드러운 목소리를 듣고 있지만, 정유라의 초조함은 해소할 수 없었다.그때, 침실 문이 열리고 그들과 함께 해외로 온 임씨 집안 하인이 손에 전복죽을 한 그릇 들고 침대 옆 테이블에 놓아주었다.“사모님, 방금 끓인 전복죽입니다. 한 번 맛보시고...”하지만 정유라는 그를 무시하고 다시 임재욱에게 물었다.“재욱 씨, 도대체 언제 나 데리러 와요? 나 언제 귀국할 수 있어요?”당시 임재욱은 출장을 간다며 해외에 그녀를 데리고 왔었다. 심지어 한동안은 이곳에서 살 것이라며 말이다.정유라는 임신한 몸을 이끌고 그와 함께 휴양도 할 겸 해외로 왔다.해외에 도착한 후, 임재욱은 그녀를 이 별장에 데려왔고 보모와 운전기사 심지어 개인 의사까지 고용했다. 게다가 이쪽의 치안이 그다지 좋지 않아서 그녀에게 경호원까지 붙여주었다.정유라는 이 모든 것이 임재욱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그러나 임재욱은 해외에서 서너 일만 머물렀고 인사조차 하지 않은 채 그녀를 이곳에 버리고 혼자 정운시로 돌아갔다.현재의 별장 주위는 경호원이 엄격히 지키고 있고 정유라가 외출이라도 할 경우 그들은 항상 그녀를 따라다녔다.경호원이 아니라 그녀를 감시하러 온 사람처럼 보였다.어느새 배는 많이 커졌고 그와 함께 불안감도 많이 자랐다. 정유라는 어쩐지 자신이 임재욱에게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핸드폰 너머로 임재욱이 피식 웃었다.“왜요? 거기 좋지 않아요?”“전 재욱 씨가 보고 싶어요. 집에 가고 싶단 말이에요. 재욱 씨가 저 안 도와주면 직접 변호사 불러서 저 두 경호원 고소할 수밖에 없어요!”정유라는 말을 마치고 깊게 숨을 들이마신 다음 계속 말했다.“혹시 나한테 숨기는 일 있어요? 지금 재욱 씨 유시아 씨랑 있어요?”그렇다. 임재욱이 정유라를 해외에 남긴 이유는 바로 유시아와 함께 있기 위해서였다!이런 생각이 들자 정유라는 분노가
유시아는 케이크 상자를 힐끗 보고 “아.”라는 소리를 내었지만 고맙다는 인사는 하지 않았다.왜냐하면 임재욱이 사례의 의미로 이 케이크를 사준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젯밤 그녀가 임재욱의 손안에 있는 깨진 유리 조각을 잡아준 일에 관한 사례 말이다. 그 덕분에 임재욱은 큰 실수를 면하게 되지 않았는가!그녀는 손을 뻗어 상자를 열고 숟가락으로 케이크를 움푹 퍼 자신의 입에 넣었다.크림의 달콤함이 순식간에 입안에서 녹아 기분도 조금 좋아지는 것 같다.임재욱은 고개를 숙이고 크림이 남아있는 그녀의 입가에 가볍게 키스하며 웃는 듯 아닌 듯이 물었다.“달아?”유시아는 빙긋 웃었다.“당연하죠. 먹을래요?”임재욱은 고개를 저으며 또 물었다.“오후에 어디 어디 다녀왔어?”유시아는 눈을 깜빡거리더니 즉시 말했다.“백화점에서 옷 구경했어요. 봄옷도 두 벌 사서 위층 옷장에 뒀어요.”“유시아!”임재욱이 갑자기 성까지 붙여 이름을 부르는 바람에 그녀는 잔뜩 긴장했다.“네?”곧이어 그가 유시아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거짓말할 때 자꾸 눈 깜빡이지 마!”“...”‘그걸 알아챈 거야? 그렇게 티가 나나?’조금 긴장한 후,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저...”그러자 임재욱은 오히려 손을 뻗어 그녀를 밀었다.“됐어. 빨리 위층으로 올라가서 목욕물 받아줘!”“네.”유시아는 서둘러 그의 다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걸어 올라갔다.물이 콸콸 욕조 안으로 쏟아지고 유시아는 비로소 맞은편 거울을 보았다. 조금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그녀는 정말 거짓말에는 소질이 없는 사람이었다!...다음 날 저녁, 정유라가 탄 항공편이 정운국제공항에 착륙했다.봄이어도 여전히 조금 쌀쌀한지라 그녀는 깔끔한 버버리 트렌치코트를 입고 내츄럴한 스타일로 배를 가리고 같은 브랜드의 체크 스카프를 둘렀다. 그렇게 가정부와 경호원에 둘러싸여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그녀는 임씨 집안의 차를 향해 걸어갔다.차에 도착한 그녀는 강선만 있고 임재욱이 없다는 것을
“일 좀 미루면 어때요, 재욱 씨. 게다가 내일은 주말이잖아요. 가족들이 다 같이 모이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예요...”정유라는 이렇게 말하면서 손을 뻗어 자신의 배를 만졌다.“할아버지랑 아빠가 우리 아기한테 어떤 이름을 지어줄지 상의하고 싶어 하세요. 재욱 씨 아빠잖아요. 그러니 반드시 참석해야죠!”그 말을 들은 임재욱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냉소했다.“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이름 짓는 건 조금 이르지 않아요?”“이건 할아버지 마음이에요!”정유라는 임재욱의 말투에서 이상함을 알아채지 못하고 애교를 부렸다.“아이한테 줄 금반지도 고르고 싶어요. 그리고... 나 재욱 씨 조금 보고 싶어요!”그녀가 혼자 해외에 머무르는 동안, 임재욱은 국내에서 유시아와 지냈다. 그런데 정유라가 어찌 임재욱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오랜 세월이 흐르면 증오와 원망은 독이 되는 법이다.하지만 그 독으로 정유라는 자신을 죽일 리 없고 더욱이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를 죽일 리도 없다. 그 독은 반드시 그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유시아를 향해야 할 것이다!임재욱은 정유라의 말을 듣는 것조차 귀찮아 아예 두루뭉술하게 말했다.“이제 다시 얘기해요!”그러고는 이내 전화를 끊어버렸다.저녁 무렵, 임재욱은 웬일로 제때 집에 돌아왔다.문에 들어올 때 그의 손에는 작은 반려동물 켄넬이 들려 있었다.켄넬 안에는 작은 주황색 고양이 한 마리가 졸고 있었는데 몸에는 수건 한 장을 두르고 있었다. 축 늘어진 모습이 참 귀여웠다. 허씨 아주머니도 매우 기뻐하며 얼른 받아들었다.“아이코, 정말 귀엽네요. 시아 씨한테 주는 거예요?”때마침 위층에서 내려오던 유시아는 허씨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네?”“대표님께서 고양이 한 마리를 시아 씨한테 선물하셨어요!”곧이어 허씨 아주머니는 그 고양이를 받아 안고는 유시아를 향해 걸어갔다.“이거 봐요, 새끼 고양이에요. 아주 귀엽죠?”유시아는 힐끗 들여다
그는 또 손을 뻗어 고양이의 머리를 만졌다.“시아야, 사실 만물에는 영혼이 있어. 모든 반려동물도 마찬가지이지. 오래 기르면 감정이 생길 거야.”그 말을 들은 유시아의 창백한 얼굴에 미소가 띠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찬성하지 않았다.그녀는 강아지를 좋아하고 소현우를 더 좋아한다. 그래서 소현우가 그녀에게 보낸 구름이를 유시아는 줄곧 보물로 여겼다.그런데 임재욱은 원래부터 좋아하지 않던 사람이 아닌가? 그런 그가 선물한 고양이를 유시아가 어떻게 좋아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감정이 생길 수 있겠는가?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유시아도 이 고양이의 존재에 대해 익숙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 감정은 익숙함에 불과할 뿐 좋아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그녀가 아무 말 하지 않자 임재욱이 또 물었다.“혹시 내가 예전에 남운대 다닐 때 보살폈던 주황색 고양이 기억나? 얘랑 아주 많이 닮은 것 같지, 안 그래?”“네, 기억해요!”하지만 유시아가 그 주황색 고양이에게 먹이를 조금 먹였기 때문에, 임재욱은 화가 나서 그 뒤로 더 이상 보살피지 않았다. 마치 유시아가 준 간식이 그의 고양이를 더럽힌 것처럼 말이다.그 후 유시아는 한 번도 그 고양이를 본 적이 없었고 굶어 죽었는지 새로운 주인을 찾았는지도 알 길이 없었다!여기까지 생각되자 유시아는 더욱 흥미가 없어져 손을 뻗어 이 새끼 고양이를 임재욱의 품에 놓아주었다.“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임재욱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이 새끼 고양이의 귀를 만졌다.보아하니 이 뭉치라는 녀석은 유시아에게서 영원히 구름이만한 대우를 받지 못할 모양이었다.예전에 유시아는 항상 구름이를 안고 있었고 심지어 개 목줄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뭉치에 대해서는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싫어하는 티를 내고 있었다.늦은 밤, 뭉치는 침실 창턱에 놓여졌다.고양이는 아직 너무 어린 탓에 감히 아래로 뛰지 못했고 유시아는 침대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샤워타월을 감싸고 나온 임재욱은 서로
‘당연히 모두 안 좋아하죠!’임재욱도, 이 고양이도 그녀는 모두 좋아하지 않았다!유시아는 지금이라도 당장 이곳을 떠나 멀리 가기를 원했다.구름이는 소현우가 키우던 강아지였다. 그는 유시아가 외로워할까 걱정되어 아무렇게나 핑계를 대고 그녀에게 구름이를 보냈다.그 뒤로 유시아는 소현우의 여자친구, 약혼녀가 되었고 구름이는 그들 두 사람이 함께 키우는 강아지가 되었다.구름이는 반려동물 이상으로 그들 두 사람의 사랑을 증명해주는 선물과 다름없었다. 그렇게 구름이는 유시아와 함께 수차례의 비바람을 겪었다.그러나 임재욱이 유시아에게 준 그 주황색 고양이는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구름이의 기억을 지우기 위함이었다.그래서 유시아는 그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 평생 좋아할 일도 없을 것이다!유시아는 임재욱에게 압박을 당하다 못해 절벽 끝까지 밀려난 기분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녀는 왠지 모르게 용기가 생겨 고개를 들더니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진심을 듣고 싶어요, 아니면 거짓말을 듣고 싶어요?”“진심!”임재욱이 계속해서 말했다.“어쨌든 네 진심은 다 싫어한다고 말할 게 뻔해!”유시아의 온화하고 평온하던 모습도 이미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그렇게 바닥까지 찍고 돌아온 그녀가 매섭게 입꼬리를 씩 올렸다.“어떨 때는 후회하기도 해요. 반월별장에 있었을 때 당신 심장에 그 과도를 꽂아 넣었어야 하는데 하고 말이죠. 정월 대보름날 당신을 막은 것도 후회해요. 그냥 도승우를 죽이게 놔뒀어야 했는데!”임재욱은 조용히 그녀를 한참 바라보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피식 웃었다.“하지만 만약 시간을 돌려 되돌아갈 수 있다면 넌 여전히 그렇게 할 거야. 맞지?”유시아는 고개를 돌렸다.“아니요! 절대 안 그럴 거예요!”“아니야, 시아야...”그는 손을 뻗어 유시아의 턱을 들어 올렸다.“너는 내가 너를 감옥에 보내서 미워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을 증오하지. 하지만 너는 여전히 내가 살아있기를 바래...”“그런 적 없어요
그의 마음을 다시 신서현에게서 가져올 수 있을까?하물며 임재욱이 하는 말을 유시아가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하지만 누군가가 너한테도 똑같이 대한다면, 나는 여전히 너를 위해 그렇게 할 거야!”임재욱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게다가 정월 대보름날, 난 너를 쫓아갈 생각까지 했었어...”그가 서둘러 클럽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경찰차가 와 있었기에 더 이상 유시아를 쫓아갈 방법이 없었다!다만 이제 와서 해명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유시아의 무관심한 표정을 보고 임재욱이 또 말했다.“앞으로 서현이보다 너한테 더 잘해줄게. 그러니까 너도 소현우 잊어, 응?”명령하는 것 같은 평소의 말투와는 달리 매우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마치 그녀와 잘 타협해보겠다는 듯이 말이다.하지만 그 말을 들은 유시아는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이제 신서현 씨를 잊을 수 있어요?”잠시 흠칫하는 임재욱을 보고 유시아는 그를 밀어낸 후 등을 돌려 옆으로 누웠다.임재욱이 잊을 수 없는지는 상관없다. 아무튼 유시아는 해내지 못할 테니 말이다. 그녀는 소현우에 관한 모든 것을 잊을 수 없다. 더욱이 자신이 감옥에서 보낸 3년의 세월을 잊을 수 없다!임재욱은 길고 탄탄한 팔을 뻗어 그녀를 허리를 감싸 안으며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이려 했다.유시아는 안기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결국 벗어날 수 없었다.“시아야...”임재욱은 유시아의 허리를 꼭 감싸고 그녀의 희고 매끈한 어깨에 키스했다.“시아 네가 나를 믿지 않는다는 거 알고 있어. 하지만 소현우는 믿어야지, 안 그래? 소현우가 죽기 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 아직 기억하고 있지?”유시아는 멈칫했다. 죽기 전 소현우가 했던 말을 그녀는 잊을 리 없었다.소현우는 죽기 전에 그녀를 임재욱에게 맡기며 그가 유시아를 잘 돌보도록 했다.사실 소현우가 죽은 이후부터 지금까지, 유시아는 왜 그가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임재욱에게 이런 부탁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그는 분명히 유시아에게 있어 가장 잔인하고 또한 그
“오늘 주말이잖아. 그래서 쉬는 거야.”말을 뱉고 난 뒤 임재욱은 그만 유시아에게 시선이 쏠리고 말았다.한 번쯤 시선이 머물 만큼 독보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유시아.연분홍색 파자마를 입고 머리를 대충 돌돌 말아 묶어 올린 그녀한테서 이유 모를 여유로움이 느껴졌다.메이크업이 지워진 상태에 방금 세안까지 하고 나온 유시아는 얼굴에 스킨로션만 발랐다.생얼인 그녀는 다소 초췌해 보였고 눈 밑 다크서클도 제법 짙어 보였다.어쩌면 밤마다 임재욱과 사랑을 탐구하는 게 버거웠을지도 모른다.여느 때와 달리 임재욱은 약간 긴장해 하면서 손까지 비비고 있다.한참을 망설인 끝에 끝끝내 입을 여는데.“밥 다 먹고 우리 나가자. 가고 싶은데, 있어?”나가자는 말에 유시아는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외출하는 게 귀찮기도 하고.그러나 집에 남게 되면 ‘뭉치’라고 불리는 고양이를 마주해야 하니 그게 더더욱 싫었다.차라리 밖으로 나가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며.“어디든 좋아요. 재욱 씨가 정해요.”질문을 했으나 도로 질문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임재욱은 순간 훅 들어오는 ‘질문’에 뭐라고 대답할지 몰랐다.평소에 오락 시간 따위가 극히 적은 그는 주말에도 늘 업무만 봐 왔던 스타일이다.아주 가끔 나가서 논다고 하더라도 그 또한 비즈니스의 일부분이었으니.어디로 가서 뭐 하고 놀아야 하는지, 여자는 어떤 데이트 코스를 원하는지에 대해 백지상태와 다름없다.유시아 혼자 내내 집에 있다가 행여나 우울증이라도 올까 봐 바깥 공기를 좀 쐬게 해주려는 던 것인데, 순간 갈 길을 잃고 말았다.하물며 지금 날씨도 풀리지 않는 상태라 춥고, 건조하기 그지없다.‘어디로 가면 될까?’한참 사색한 끝에 임재욱은 입을 열었다.“그림 전시회 보러 갈래? 다 보고 외식도 하고.”유시아는 고개를 끄떡였다.“좋아요.”비록 그림에서 손을 뗀 지 오래되었지만, 보는 건 좋았다.무엇보다도 집에서 뭉치와 단둘이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가장 솔깃했다.아침을 먹고 나서 두 사람은
이 그림은 바로 용재휘의 작품이다.두 사람의 처음 만남이 바로 유채구가 뿌려진 흰 셔츠로부터 시작되었다.용재휘는 망가진 옷임에도 불구하고 버리지도 않고 심지어 입고 다니기까지 했었다.그러던 그가 이 셔츠를 작품으로 만들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해 넋이 나간 것이다.한쪽에 있던 해설원은 용재휘의 작품을 보고 넋이 나간 유시아를 발견하게 되는데.해설원은 옆으로 바짝 다가와 먼저 입을 열었다.“안녕하세요. 이 작품은 청년 작가 용재휘 님의 작품이에요. 혹시 이 작품이 고객님 마음에 드셨나요?”유시아는 바로 고개를 저으며 입가에 미소를 일었다.“아니요. 그냥 보고 있던 중이었어요.”‘나한테는 과분한 사람이야.’죽지 못해 살고 있는 비관적인 유시아와 달리 용재휘는 봄날의 햇살과 같은 존재이다.그런 그의 삶에 그 어떠한 ‘흐림’도 가져다줘서는 안 된다.바로 이때 뒤에서 임재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마음에 들면 그냥 사.”말하면서 임재욱은 유시아의 곁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넋 놓고 한참이나 보던데?”사인은 본디 알아보기 어렵게 디자인하는 편이다.미대생의 사인은 더더욱 그러하여 인장 위에 새겨진 이름을 알아볼 수 없었다.게다가 오른쪽 가장 하단에 자그맣게 찍혀 있어 임재욱은 누구의 작품인지 순간 알아차리지 못했다.“아니에요. 사고 싶은 만큼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었어요.”말을 마치고 유시아는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이 상황이 뜬금없기만 한 임재욱은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어리둥절했다.‘왜 갑자기 화를 내는 거지? 내가 너무 귀찮게 굴렀나?’멀어져 가는 유시아의 뒷모습을 보고 임재욱은 의문을 품은 채 일단 쫓아갔다.전시회에서 나오니 마침 점심시간이 다 되었다.임재욱은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는 레스토랑으로 유시아를 데리고 들어갔다.창가 위치에 앉은 두 사람 앞으로 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지고 다가왔다.종업원은 주저 없이 여성분인 유시아에게 먼저 건네주었다.메뉴판을 받으려고 하던 찰나 유시아의 외투에서
늦은 밤, 유시아의 카카오톡을 받았을 때 임재욱은 병원에 있었다.신시연은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진료실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고 그동안에 임재욱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늦은 밤의 사립 병원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당직을 서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외에 거의 사람이 없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임재욱은 복도를 한참이나 누비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유시아를 병원으로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길에 신시연의 전화를 받고서 오게 된 것이다.배가 아프다고.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아프다고.신시연은 며칠 전에 병원에서 여러 번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해외에서 그러한 몹쓸 짓을 당하며 우울증과 부인병이 있는 외에 다른 수치들은 정상 범위 안에 있었다.그 말인즉슨,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재욱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신시연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임재욱 하나뿐이니 어찌 됐든 그녀를 잘 지켜야 하는 마음뿐이었다.그 누구에게도 다시는 상처를 받지 않게끔.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여 임재욱은 그녀를 직접 병원까지 데리고 오고 의사 선생님 입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확답을 듣고 나야만 마음이 놓일 수 있다.애타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렸다.유시아가 보낸 카카오톡인데,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보고 싶어요.]임재욱은 고개를 숙인 채 카톡 내용을 거듭 곱씹으며 유시아 사진으로 되어 있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자꾸 올라갔다.‘내가 보고 싶어? 별거한 지 하루 만에 벌써 내가 보고 싶은 거야?’‘우리 시아 이제 제법 솔직하네.’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어떻게 답장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응급실 문이 열렸다.도우미 김향화가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신시연을 부축하고 걸어 나왔다.신시연은 디자인이 아주 심플한 데님 스커트를 입었고 윤기가 별로 없어 보이는 머리를 돌돌 말아 묶어 올렸다.무척이나 초췌해 보이는 것이 가여운 느낌도 물씬 풍기고 있어 기고만장했던 그
유리 구두를 품속에 꼭 안고 있는 유시아를 보고서 임재욱은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참으로 달래기 쉬운 여자라는 것을.특히 결혼하고 나서 아주 살짝만 잘해주어도 유시아는 아주 오랫동안 기뻐하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늘 임재욱 앞에만 서면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자기를 낮은 위치에 놓는 데 습관 되어 있다.임재욱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뽀뽀했다.“앞으로 매년 생일마다 예쁜 유리 구두 선물해 줄게. 어때?”“좋아요.”유시아는 말하면서 아주 유치하게 그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절대 어기지 않겠다고.”백화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일단 화실로 향했다.새로 구매한 공예품을 적당한 자리에 올려놓고 유시아의 제안으로 이채련의 병원까지 바래다주었다.유시아는 자기가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타입이라 이채련과 이미 약속했으니 꼭 지켜야 했다.하물며 자식도 없는 이체련에게 마지막 이 시간들이 더더욱 외로울 것이다.외부인들이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로 외롭다.임재욱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이채련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니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보내주었다.차는 곧 사립 병원 앞에 멈춰 섰고 임재욱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유시아는 차창에 대고 거듭 강조했다.“유리 구두랑 드레스들 옷방에 고이 모셔두도록 해요. 마구 놓지 말고요.”“알았어.”임재욱은 말하고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목을 확 잡고서 찐한 키스를 남기고 나서야 순순히 놓아 주었다.“얼른 가 봐.”“조심해서 가요.”임재욱은 조수석에 앉아 한결 가벼워진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서야 시선을 거두고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가는 길에 갑자기 신시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오빠, 배가 너무 아파요.”...병실로 돌아와 보니 이채련은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침대에 멍하니 누워 재미가 일도 없는 예능 프로를 보고 있었다.유시아가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채련은 놀라고도 기뻤다.“시아야,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유시아
쇼핑은 늘 설레는 일이다.유시아는 자기 취향대로 화실 장식품으로 쓰일 공예품을 골랐다.이윽고 임재욱은 또 유시아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지난번에 두 사람은 함께 쇼핑하면서 많은 옷을 샀었지만, 신서현 부모님께 갑작스러운 상황이 일어나면서 유시아는 그 모든 옷을 모조리 청소 아주머니에게 줘 버렸다.그때의 아쉬움을 채워주기 위해 임재욱은 또다시 쇼핑하려고 한 것이다.게다가 다음 주면 대우 그룹 상장 20주년이다.정식적인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유시아를 자기 아내 신분으로 남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이브닝 파티에 어울릴만한 드레스와 신발을 살 예정이다.드레스는 그럭저럭 큰마음이 가지 않았는데, 유시아는 그 신발이 마음에 들었다.은백색의 하이힐로 예쁜 보석들로 가득 박혀 있어 매점 불빛 아래서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신데렐라 동화에 나올 법한 유리 구두 같았다.매점 직원은 유시아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고 바로 다가왔다.“손님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 이 제품은 저희 디자이너 선생님의 최신 디자인으로 지금 딱 한 켤레만 있습니다. 만약 이 신발을 신고 나가신다면...”임재욱은 갑자기 직원의 말을 끊어버렸다.“이미 결혼했고요. 이 사람은 제 아내예요.”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는데, 자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를 보고서 따라서 웃었다.“맞아요. 이 사람이 제 남편이에요.”매점 직원은 멍하니 있다가 바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베스트 쇼핑 가이드다운 실력을 드러냈다.“어머, 어쩐지 너무 어울리신다 했어요...”직원의 칭찬에 두 사람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이윽고 매점 직원은 분위기를 파악하며 유리 구두에 대해 더욱 디테일한 설명을 첨부하기 시작했다.“이 제품의 새끼 양가죽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착용감이 엄청 좋으실 거예요. 하루 종일 신고 걸으셔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게다가 우리 디자이너 선생님이 즉흥으로 만들어내신 작품이라 절대 똑같은 제품을 시중에서 보실 수 없을 거예요.”한 켤레일 뿐만 아니라 사이
한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내가 뭐?”“한서준 씨는 당당해요?”유시아는 바로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었다.“임씨 가문에 접근한 그 의도를 다른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요? 할아버지, 재욱 씨 그리고 나까지 똑똑히 알고 있어요. 청아 씨만이 한서준 씨를 사랑해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요. 그렇게 쭉 모르는 척을 하며 모든 걸 감당하고 있었던 거라고요. 한서준 씨 역시 청아 씨를 이용한 게 아닌가요?”마지막 한 마디에 한서준은 침묵하고 말았다.그렇다. 임청아에게 접근한 이유는 유시아가 ‘스파이’로 움직여 주지 않겠다고 거절했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임씨 가문 천금을 노리게 된 것이다.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 변하게 되어 있다.임청아 대한 마음은 모략에서 시작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마음이 점점 사랑으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띠고 다가왔던 임청아가 어두운 자신의 삶을 밝게 비춰주는 것만 같았다.따라서 한서준은 임청아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차츰 생기게 된 것이다.임태훈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꼭 자기 곁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청아 씨 지금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에요.”“만약 청아 씨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말을 마치고 유시아는 차 문을 밀고 차에서 내려 병원 밖으로 걸어갔다.택시에 오른 유시아는 긴 망설임 끝에 끝내는 더 스케치 화실 주소를 운전 기사에게 알렸다.차는 화실 맞은 편에 세워졌고 유시아는 화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화실 안의 상황을 바로 체크할 수 있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최적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수많은 경호원들이 임태훈을 사이에 두고 화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임태훈은 벤틀리에 올라 강한 기운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유시아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고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바로 화실로 향해 달려갔다.화실 안과 밖은 겉은
전화를 마치고 유시아는 혼자 밖에 없는 휴게실을 보고서 깊은 번뇌에 잠겼다.남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임태훈처럼 막무가내로 어처구니가 없는 노인이 있다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태훈이 끔찍이 여기는 임청아를 유시아가 계단에서 밀어버린 것도 아닌데, 왜 애꿎은 자기 화실을 닫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집안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스스로 반성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데, 그게 무엇이든 일단 남한테서 문제를 찾고 있으니, 권력을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했다.유시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고 불안함도 점점 커졌다.지금 운영하고 있는 더 스케치 화실도 용재휘가 먼저 시작한 것인데, 그와 더불어 학생들까지 모두 함께 넘겨주었는데, 만약 이대로 화실을 망쳐버린다면 용재휘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임재욱과 임태훈이 어느 정도로 얘기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화실이 그들 싸움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용기가 없어 일단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그렇게 한참이나 심장을 조이고 있었지만, 걸려 오는 전화는 없었다.유시아는 일이 어느 정도 망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학생 채팅방에 오늘 갑자기 일이 있다며 수업을 뒤로 미룬다고 알렸다.언제 다시 수업을 시작할지는 소식을 기다리라며 덧붙이기까지 했다.톡을 보내고서 유시아는 더 이상 핸드폰을 보지 않고 바로 병원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병원 대문을 나오자마자 한서준이 정면에서 오고 있었다.“유시아.”유시아는 고개를 들었고 그를 보게 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 났다.직감이 알려주건대, 절대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화실의 생존 여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심기까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한서준은 쉽사리 유시아를 놓아 주지 않았고 손을 내밀어 유시아의 손목을 꼭 잡았다.“물어볼 일이 있어.”말하면서 근처에 있는 지프차를 가리켰다.“차에 타서 얘기 하자.”“그쪽이랑 할 말
유시아는 그 말을 이어받지 않고 집사의 바람대로 타이르기 시작했다.“몸이 아직 많이 허약해요. 먹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좀 먹어야 하거든요. 일이 어찌 됐든 일단 건강부터 챙겨야 해요.”임청아 그 말을 듣고서 쓴웃음을 지었다.“건강 회복되면 할아버지한테 잡혀가서 집에 감금되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유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어찌 됐든 할아버지 마음은 한결같을 거예요. 청아 씨를 아끼고 사랑하는 거요. 서로 대화가 필요한 거 같아요. 서로 터놓고 얘기하고 나면 오해가 풀리고 마음도 풀리면서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임청아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아이 낳고 나면 할아버지도 서준이도 원한을 내려놓고 행복만 할 수 있다고요.”“근데 이렇게 몸도 아끼지 않고 점점 더 막무가내로 나가면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은 점점 더 짙어질 거예요.”유시아는 말하면서 도우미 손에서 보신탕을 가져와 천천히 불며 임청아의 입가로 가져갔다.임청아는 생각 밖으로 무척이나 순순하게 유시아의 말을 따랐고 그녀의 말에 이치가 있는 것 같아 조용히 보신탕을 받아 마셨다.도우미와 집사는 두 사람이 티키타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서서히 마음이 놓였다.임청아가 뭐라도 먹기 시작하여 자기도 모르게 한시름을 놓으며 자리까지 비켜주려고 했다.두 사람이 마음 편히 말할 수 없을까 봐 눈치껏 일어서려는 것이다.“작은 사모님, 아가씨와 천천히 얘기하고 계세요. 밖에 나가 있을 테니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시고요.”“네, 가보세요.”도우미 일행이 나오고 나서야 유시아는 본론으로 들어갔다.“한서준 씨는 알고 있어요?”임청아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그런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잖아요.”요즘 임태훈뿐만 아니라 한서준도 눈을 부라리고 임청아를 찾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자 아파트도 호텔도 들어갈 수 없었고 버려진 강아지처럼 유시아 화실에 몸을 숨기고 지낸 것
임청아 이름 석 자가 임재욱의 입에서 나오자, 유시아는 순간 청천벽력을 맞는 것만 같았다.심지어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물었다.“청아 씨가 왜 병원에 있는 거죠?”임청아는 임신한 것을 알고 매사에 조심하며 걸음 하나도 천천히 옮겼었다.게다가 해외에 있는 친구와 연락하여 해외로 떠날 준비까지 마쳤다고 했었다.그런데 관건이 되는 순간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고?“할아버지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거 아니야?”임재욱은 말하면서 차갑게 웃었다.“네 화실에 청아 숨겨 놓았잖아. 할아버지께서 그걸 과연 모르고 있었을 것 같아? 오늘 화실로 청아 데리러 갔었는데, 가지 않겠다고 청아가 하도 우기는 바람에 억지로 묶어서라도 데리고 가겠다며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거야.”그렇다면 아이를 유산했을지도 모른다.임태훈의 습관에 따라 생각해 본다면 이 화살은 결국 유시아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임재욱이 그렇게 경고하였건만 유시아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약해지는 마음에 언젠가는 구렁이에 빠지게 될 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 일 줄은 몰랐다. 임재욱은 한숨을 내쉬며 꾸짖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병원 주소 보내줄 테니 얼른 가 봐.”말을 마치고 임재욱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고 운전 기사에게 새로운 목적지를 알려주었다.같은 시각, 병원 안에서.임청아는 이미 수술을 마쳤고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이미 가문의 집사와 간호인이 옆에 있었고 병실 문 앞에는 임태훈이 보낸 경호원도 있었다.다만 경호원이 경계해야 할 상대는 유시아가 아니라 한서준이다.따라서 유시아는 별다른 막힘없이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상에 누워 있는 임청아는 얼굴에 핏기 하나 없었고 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불과 하룻밤 사이에 모든 활력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집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주 공손하게 유시아에
조금 전까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던 임재욱은 멈칫거리고 말았다.이윽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유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별거하자는 뜻이야?”“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유시아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머리가 아픈 듯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그 시간으로 시연이한테 집중해도 되잖아요. 나도 마침 어머님 곁에 좀 있어드리고... 서로에게 지금 이게 최우선인 것 같아요.”임재욱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서 낙담한 모습으로 말했다.“그래. 네가 좋다고 하면 그게 좋은 거겠지. 그렇게 하자.”말을 마치고 그는 계속 밥을 먹었다.유시아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서 아련하게 웃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이튿날 아침, 유시아는 임재욱이 출근하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일상복 몇 벌과 일상용품을 챙겨 작은 트렁크 안에 놓고 바로 이채련한테 가려고 했다.허씨 아주머니는 트렁크를 들고 내려오는 유시아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사모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설마... 가출하려는 건 아니죠?”유시아는 허씨 아주머니를 향해 웃었다.“아니에요. 친척분이 좀 위독하신데 제가 옆에서 좀 챙겨드리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얼마 걸리지 않을 거고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트렁크를 들고서 집을 나섰다.이채련이 지내고 있는 병실이 VIP 병실로 널찍한 객실까지 갖춰져 있다.유시아는 간호사에게 접이식 침대와 이불을 요구했고 간단히 정리하고 나니 잘 자리가 아늑하게 마련되었다.이채련은 더 이상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어 하루 24시간을 침대 위에서 보내고 있다.얼굴도 하도 여위어 본연의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그전에도 유시아는 이채련에게 이곳에서 며칠 동안 함께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지만 이채련은 행여나 자기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흠이 생기게 될까 봐 동의하지 않았었다.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갖은 풍
임재욱은 핸들을 꼭 움켜쥐고서 앞만 바라보았으나 두 눈에는 고통과 망연함이 가득했다.“시연이 해외에 있을 때, 몹쓸 짓을 당했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나.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게 된 거야.”유시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볼륨까지 높아졌다.“어머, 어떡해요!”평소에 신시연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기는 했다.여자에게 있어서 그런 몹쓸 짓을 당한다는 건 치명적인 타격과 치욕이 아닐 수가 없다.게다가 부모님의 일까지 더해지니 조금 전 식당에서 봤던 신시연의 모습이 이해되었다.임재욱은 말하면서 후회와 자책하는 빛을 드러냈다.“그렇게 가고 싶지 않다는 시연이를 내가 억지로 보낸 거야.”그때는 모든 걸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낯선 곳으로 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학업에만 집중하면 자연스레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삶을 그려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하지만 임재욱이 잊고 있었던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신시연이 이제 갓 20살을 넘은 꽃다운 여자아이라는 것이다.해외에는 불안정 요소도 많고 미처 생각지 못하는 위험도 많다.게다가 젊은 나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릇된 길로 들어서기도 아주 위험하고 말이다.신시연 곁에 사람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24시간 동안 찰싹 달라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유시아와 결혼하고 나서 신혼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신시연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지금 임재욱은 신서현에게 미안할 뿐이다. 하나뿐인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하지만 그가 말한 본의와 달리 듣고 있는 유시아는 또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유시아의 기억으로는 신시연이 해외로 보내진 이유는 이러하다.그때 신시연은 정운시 대학교 교내 사이트에 유시아를 먹칠하는 게시글을 올리면서 유시아로 하여금 학업을 이어갈 수도 수업을 들을 수도 없게 악한 상황을 만들었었다.마침 그 일을 소현우가 알게 되면서 유시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