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준은 낮게 웃었다.“유시아, 너는 나를 가끔 혼란스럽게 만들어. 너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야 할까, 아니면 너의 어리석음을 비웃어야 할까?”“그건 대표님이 알아서 할 일이죠!”유시아는 다시 자기 사직서를 들이밀었다.“사인 해주세요!”“지금 임 대표랑 내가 비즈니스 중인데 어떻게 너를 놓아주겠니?”말과 함께 한서준은 사직서를 들어 올려 두 손으로 찢어 버렸다.“며칠간 휴가를 줄 수 있어, 아니 몇 개월이라도 괜찮아. 그 기간 아이를 잘 보살피라고. 하지만 난 너의 대표야! 퇴사는 임재욱이 직접 나한테 얘기하라고 할게.”유시아는 어이가 없었다.“그럼 차라리 무기한으로 무단결근할게요!”유시아는 이 말과 함께 몸을 돌려 문밖으로 나갔다. 야생가는 낮에 손님이 많지 않아 노래를 부르러 오는 사람도 얼마 없어 복도는 꽤 한산했다.유시아가 복도를 지나며 뭘 먹을까 고민하던 그때, 옆방의 문이 열리며 웬 손이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 들어 억세게 그녀를 끌고 들어갔다.곧바로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은 닫혔다.룸 안의 불빛은 유시아의 창백해진 얼굴을 비추었다. 그녀는 자신 눈앞의 낯선 두 남자를 바라보며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당신들...누구야?”“아가씨, 이쁘게 생겼네. 좀만 놀다 가...”짙은 술 냄새가 풍기는 걸 보니 두 놈 다 술주정뱅이였다. 그들은 유시아의 격렬한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테이블로 끌고 가 그녀를 힘껏 눕혔다. 한 놈은 유시아의 두 손을 누르고 다른 한 놈은 옷고름을 풀어 헤쳤다.“이렇게 연약한 걸 보니 아직 처녀 같은데, 흐흐...”남자들의 소름 돋는 웃음소리에 놀라 정신이 혼미해진 유시아는 아직 움직임이 가능한 두 다리로 발버둥 쳤다.“이거 놔, 살려 주세...읍...”유시아의 말하는 입술은 그놈들의 손에 의해 막혔고 외투 또한 찢겼다. 술 냄내를 풍기며 얼굴에 칼자국을 새긴 남자는 성큼 걸어와 그녀에게 걸터앉아 있는 힘껏 들이밀었다.그곳은 시아의 아랫배였다. 유시아의 가슴은 찢겨나가는 듯했다!그녀의 얼굴은
아팠다, 그리고 어둡고 추웠다...임재욱의 어두운 얼굴, 신서연의 표독스러운 목소리에 소현우의 부드러운 얼굴까지, 불길한 느낌과 함께 눈앞에 자꾸 아른거리는 익숙한 얼굴들이 뒤섞여 유시아를 미치게 했다.병상에 누운 유시아는 마취 후 깊은 수면 상태에 빠졌음에도 식은땀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혔다.간호사는 유시아의 곁에서 섬세하게 식은땀을 닦아주었다. 병실을 왔다 갔다 하며 한서준은 전화 통화를 하기도 했다.한서준은 꿈에도 그녀가 자신의 곁에서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야생가는 본디 별별 사람들이 뒤섞여 있는 곳이다. 한서준의 야생가에 대한 관리는 매우 엄격했다. 그는 직원들에게 손님이 때리든 욕하든 아무런 반격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었다. 하지만 만약 그의 직원들이 도가 넘는 피해를 본다면 서준 또한 절대 가만히 놔두지 않고 안전요원들을 불러 그들을 내치기도 했다.그 때문에 오늘날까지 영업을 이어온 야생가에서 직원들이 받은 수모는 많았어도 이번 같은 일은 처음이었다!두 놈은 자신들이 사고를 저질렀음을 알아차린 뒤 도망쳤으나 그들이 찍힌 CCTV로 한서준은 사람을 풀어 두 놈을 잡으러 갔다.유시아는 오늘부로 야생가에서 일할 생각이 없었기에 유니폼이 아닌 자기 옷을 입었다.이렇게 생각하니 두 놈들이 매우 의심쩍었다.한서준은 룸 안의 CCTV를 여러 번 돌려본 후 그놈들이 유시아를 덮치려 한 것보다 이를 핑계 삼아 배 속의 아이를 없애려 한 것이 목적임을 확신했다.이런 일은 여우같은 정유라만이 할 수 있는 짓이었다!정유라와 임재욱 간의 사이로 볼 때 이런 일을 저지르는 것은 크게 비난할바가 못 된다. 다만 정유라가 자신의 계획을 망친 걸 받아들일 수 없는 한서준이었다.한서준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오늘 빚은 꼭 되갚아 줄게!’창가에 서서 휴대폰 속 임재욱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려던 그때, 병실 쪽에서 들려오는 여자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한서준은 이미 깬 유시아를 발견했다.유시아의 얼굴은 창백했으며 입술은 핏기가 없었다
“그러면 감사해야지!”한서준은 손을 뻗어 유시아의 이불을 정리해 주며 그녀의 휴대폰을 베개 옆에 놓아주었다.“나 먼저 갈게.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도 돼.”이 말을 남기고 한서준은 몸을 돌려 떠났다.밖에서는 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 내린 도시는 하얀 백지장 같았고 동화 세상인 것처럼 깨끗했다.눈길이라 조심스레 운전한 탓에 병원에서 가로수길까지 한서준은 40분이나 걸렸다.가로수길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칠성급 호텔에는 대문짝만한 현수막이 붙어있었다.[건대 그룹 정건호 회장님의 만수무강을 기원합니다!]한서준은 호텔 문앞에 잠깐 차를 멈췄다가 가벼운 웃음소리를 흘리고 떠났다.정건호의 생일은 정운의 각 계 각층의 유명 인사들이 모두 모일 만큼 스케일이 컸다. 그곳에는 내로라 하는 수많은 수재들과 아름다운 여인들로 가득 차 시끌벅적하기 그지없었다.정건호의 일남일녀 자녀중 올해 18세가 된 아들 정은석은 줄곧 미국에서 유학하다가 아버지를 축하하기 위해 특별히 귀국했다. 정유라는 정건호의 장녀였다.정유라는 하늘색 롱 캐시미어 원피스를 입었다. 뚜렷한 이목구미에 적절한 메이크업까지 더해져 그녀의 미모는 아름다운 바비인형을 연상케 했다.정유라는 한 손엔 와인잔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임재욱의 팔짱을 끼고 화사한 웃음으로 손님들을 맞이했다.이번은 아마도 정유라와 임재욱이 결혼한 지 1년 만에 처음으로 부부의 모습으로 나타난 행사일 것이다. 이런 등장은 둘의 불화설을 말끔히 잠재울 수 있었기에 정유라는 그들의 관계가 화목하게 보이게끔 임재욱의 팔짱을 더욱 단단히 꼈다.생일파티의 손님이 많아 어쩔 수 없이 그들과 독한 술도 마시게 된 재욱은 얼마 지나지 않아 피로감을 느꼈다.“재욱씨...”정유라는 살뜰하게 임재욱을 부축했다.“당신, 어디 아파요? 너무 힘들었죠? 내가 나빴어요, 당신이 바쁜 걸 알면서도 아빠의 생일파티에 데리고 온 내 잘못이에요.”임재욱은 정유라를 향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괜찮아요!”“그치만 당신 얼굴빛이 안 좋아요, 올라가
병실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하고, 잔잔한 숨소리만 들렸다.입맛이 없는 듯 얼마 먹지도 않은 밥이 한쪽에 그대로 놓여 있다.유시아는 침대에 눈을 반쯤 감고 멍해서 창밖의 바람 소리를 듣고 있다.올해 겨울은 그녀가 감옥에서 보냈던 겨울보다도 더욱 춥게 느껴졌다.마취가 풀리자, 그녀의 아랫배는 생리통보다 더 아프게 욱신거렸다.‘작은 생명을 잃는 게 이런 느낌인가보다.’유시아도 이렇게 아픈데,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짓눌려 피범벅이 될 때 느꼈을 고통을 그녀는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그녀는 첫사랑도 놓치고, 배 속의 아이까지 지키지 못한 자신이 너무나 쓸모없게 느껴졌다.‘그래서 다들 날 떠난 거야, 난 정말 그들에게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야.’유시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모든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옥에서 보냈던 시간도 지금보다는 나은 것 같았다.그녀는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는 낙관적인 생각으로 살아왔지만, 현실은 그런 그녀를 비웃기라도 한 듯 점점 더 나쁘게 흘러갔고 이제는 감당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때마침, 머리맡에 놓인 휴대폰에서 알림 소리가 울렸지만, 유시아는 광고 메시지라는 생각에 보지 않았다.아랫배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자 무료한 시간을 보내려고 휴대폰을 본 순간, 임재욱에게서 보내온 사진이 보였다. 사진 속에는 그와 정유라가 함께 있었다.한 장은 정유라가 키스 마크가 찍힌 하얀 어깨를 드러낸 채 수줍은 듯 임재욱의 목덜미에 파묻혀 있는 거였다.다른 한 장은 임재욱이 머리가 헝클어진 채 정유라와 격렬한 키스하는 거였다.유시아는 임재욱이 보내온 사진을 보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이 너무 한심했다. 그건 바로 임재욱은 자기가 임신하고 유산까지 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그래, 이렇게 된바 평생 모르는 게 좋겠어!’유시아는 사진을 지우고 나서, 행복하게 잘 살아라는 메시지를 보냈다.그러고 나서는 임재욱의 연락처를 차단해 버렸다.정유라는 임재욱의 품에 안겨 그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유시아에게서 온 메시지를 보고 만족한
“유라 씨가 왜 여기 있어요?”임재욱이 차가운 표정과 경계심 가득한 눈빛을 하면서 말했다.“유라 씨,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설명 좀 해줘요!”어젯밤 임재욱은 인사불성이 되어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정신이 멀쩡했던 정유라가 이 상황을 모를 리 없었다.“뭔 설명이 필요한 거죠?”정유라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재욱 씨,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요?”임재욱이 되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재욱 씨가 어제 술에 취해서.”정유라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자조적인 태도로 말했다. “재욱 씨가 어젯밤 그 여자의 이름을 부르면서 날 침대로 끌어당겼어요. 내가 다른 사람의 대체품이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너무 비참하네요!”정유라가 말하는 그녀가 누구인지 임재욱도 알아챘다.임재욱에게 있어서 유시아는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사람 같았다.임재욱이 유시아를 그리워도 하고, 심지어 그녀가 다시 자기 품으로 돌아와 주길 바랐던 적도 있지만, 어떻게 술에 취해 정유라를 그녀로 착각해 흔들리는 마음을 달래려고 한 건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정신 멀쩡한 상태에서의 임재욱은 이런 실수를 할 사람이 아니었지만, 술에 취한 그는 자신조차도 믿을 수가 없었다.“미안해요, 재욱 씨.”정유라는 처량함과 자책감으로 뒤덮인 창백한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제가 어제 재욱 씨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필사적으로 밀어냈어야 했어요.”정유라는 침대 옆 카펫 위에 있는 겉옷을 주워서 몸에 걸치고 맨발로 화장실을 갔다.드리워진 이불 속 흰 침대 시트에는 빨간 핏자국이 선명하게 보였다.임재욱은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어젯밤 술에 취해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욕실 안에서는 금세 쏴- 하는 물소리가 울려 퍼졌다.임재욱은 이 상황이 골치 아픈 듯 미간을 손으로 눌렀다. 혼인신고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일이 생기자, 그는 많이 난감해했다.임재욱은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정유라를 대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몇 분 뒤, 정유라는 욕실
방에서 나와 텅 빈 복도를 바라본 정유라는 그제야 숨을 돌렸다.이윽고 그녀는 자신의 생각들을 정리하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계단을 내려가려는데 마침 임재욱의 할아버지인 임태훈과 마주쳤다.임태훈은 고개를 들어 정유라를 바라보며 물었다.“유라야, 재욱이는? 꽤나 오랫동안 걔를 못본것 같아서 말이야.”장인어른의 생일파티에 임재욱이 어찌 모습을 보이지 않을수 있단 말인가.“좀 지쳐보여서 제가 방에 올라가 좀 쉬라고 했어요.”정유라는 대답하는 동시에 임태훈의 발걸음을 급히 따라갔다. 그리고는 임태훈의 팔짱을 껴 부축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요즘 재욱씨 매일 야근해요, 업무 스트레스도 상당한데 그 와중에 없는 시간 쪼개서 저랑 같이 우리 아빠 생일파티까지 참석하려니 많이 힘이 드나봐요. 할아버님, 오빠 조용히 쉬고 있는데 우리 그냥 내려갈가요?”임태훈은 손자인 임재욱한테 불만이 있었지만 쾌활하고 너그러운 손자며느리를 봐서라도 더 이상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조용히 정유라를 따라 발걸음을 돌렸다. 정건호의 생일파티는 오후가 되어서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만 임재욱은 아직까지 코빼기도 비추지 않고 있었다. 정유라는 임태훈에게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 곁에 있고 싶다는 뜻을 내비추자 임태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임태훈이 떠난 뒤 정유라는 호텔의 손님들을 다 배웅한뒤 운전대를 잡아 집이 아닌 병원으로 향했다.-유시아는 의사가 말한 퇴원날을 채 기다리지 못하고 침대에서 내려와 걷기가 가능할 때 바로 조용히 짐을 싸 병원을 떠나버렸다.한서준은 그녀를 자신의 도구로 삼으려 하였고, 임재욱은 와이프 곁에 있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그녀는 이 기회에 멀리 달아나 두남자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이 제일 좋다고 생각했다.정운시는 갑자기 며칠간 내린 눈 때문에 교통까지 불편해졌다.밤이 되면 조명과 하얀 눈이 겹쳐져서 정운시로 하여금 더욱 반짝이게 하였다. 도로 양쪽에 있는 가게들도 하나둘 영업을 시작해 이 도시
유시아가 문앞에서 서성이자 결국 낯익은 보안대장이 안에서 나와 말했다.“들여보내세요, 그녀는 이 별장주인 안사람되는 분입니다.”보안대장은 아직까지도 유시아를 기억하고 있었다. 결혼당일 신랑이 차사고로 사망하고 그녀 혼자 외로운 생활을 하는 불쌍한 사람이라는것을.유시아는 보안대장을 향해 미소지으며 한손으론 트렁크를, 다른 한손으론 구름이를 안고 별장안으로 걸어 들어갔다.항상 집 관리비를 제때에 납부한 유시아였기에, 집안에 수도와 전기는 끊기지 않아 모든건 유시아가 떠나기전과 다름이 없었다. 하나 있다면 장시간 사람이 없어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다는 것이였다.구름이도 이 곳을 기억하고 있는것 같았다. 애완동물 외출가방에서 꺼내자마자 바로 윗층에 있는 구름이의 집으로 달려나갔다.동시에 유시아는 뜨거운 물 한 대야와 그 물에 깔끔히 씻은 걸레를 들고 집 구석구석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윗층에 있는 소현우의 서재로 올라갔고 곧이어 그곳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유시아는 미술을 전공하였기에, 소현우가 살아있을 때 그녀를 위해 관련 방면의 그림책과 서적들을 사주었다. 덕분에 서재 한켠에 놓여져있는 다양한 책들은 유시아만을 위한 작은 도서관이 되여 언제든 그녀가 맘편히 독서를 즐길수있게 관리해왔다.그때 소현우의 가장 큰 로망은 바로 큰 눈이 펑펑 내리는 날에 소현우는 서재에서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유시아는 옆에 조용히 앉아 독서를 하는것이였다.그렇게 되면 그녀 몸에서 풍기는 책 냄새가 소현우한테서 나는 냄새를 씻어주고, 소현우의 경제력으로 그녀를 보호할수도 있기 때문이다.이러한 가정의 분위기속에서 태여난 아기는 그 어떠한것도 부족함이 없을것이다.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유시아는 손에 들고 있는 책들을 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역시 너무 아름다운 물건과 훌륭한 사람은 항상 오래 붙잡고 있기가 힘든가보다.반월별장으로 돌아간 다음날, 용재휘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시아야, 요즘 어때? 괜찮니?”유시아는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익숙한 남자 목소리
정건호의 생일파티가 끝난 뒤로 임재욱은 쭉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집사람들도 이젠 다들 익숙해졌는지 그에게 연락 한통 하지 않았다. 마치 철저히 임재욱을 외면하듯이 말이다.설이 다가오자 정유라는 그제야 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어 곧 명절인데 할아버님과 시누이, 그리고 정유라의 부모와 동생한테 새해 선물을 준비 하겠다고 말했다.임재욱은 명절에 대해 별로 개념이 뚜렷하지는 않은 사람이거니와 명절을 싫어하는 사람중 한명 이였다. 명절엔 꼭 집으로 돌아가 임태훈과 임청아랑 밥을 먹어야 했으니까.하지만 정유라의 부탁에 마음이 약해진 임재욱은 어쩔수없이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다 사고 정유라를 집으로 데려다 주는 길에 눈치가 빠른 그녀는 임재욱에게 차에서 내려 함께 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재욱씨, 명절때 집으로 돌아가요. 가서 밥이라도 같이 먹고 오세요. 아니면 할아버님 많이 속상해 하실거예요. 연세도 높으신 분이 자꾸 화내시면 안좋잖아요.”가만히 듣고만 있던 임재욱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응.”정유라는 임재욱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홀로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크고 작은 짐들을 챙겨 저택으로 걸어갔다.임씨 저택 안팍은 모두 명절분위기로 한바탕 장식을 끝마친 후였다. 임태훈은 이러한 장식들을 몹시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그는 세개의 두둑한 세뱃돈까지 준비하였는데 하나는 손주며느리, 다른 두개는 각각 두 손녀의 몫이였다.임청아는 오늘 유난히 예쁘게 차려입은것 같았다. 빨간색 프라다 벨벳 겨울치마에 하얀 조끼, 그리고 정교한 화장까지 더해져 인형이 따로 없는 모습이였다.임청아는 임태훈이 준 두둑한 세뱃돈을 받고는 임태훈의 옆자리에 앉았다. “할아버지, 점심을 다 먹으면 저 좀 나갔다 올게요.”그녀의 말을 들은 임태훈은 순간 표정이 굳더니 불만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명절이라 모든 상가들 거의 다 문을 일찍 닫을텐데 밖에 나가 뭐하게?”“일이 좀 있어서요.”임청아는 그
늦은 밤, 유시아의 카카오톡을 받았을 때 임재욱은 병원에 있었다.신시연은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진료실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고 그동안에 임재욱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늦은 밤의 사립 병원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당직을 서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외에 거의 사람이 없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임재욱은 복도를 한참이나 누비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유시아를 병원으로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길에 신시연의 전화를 받고서 오게 된 것이다.배가 아프다고.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아프다고.신시연은 며칠 전에 병원에서 여러 번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해외에서 그러한 몹쓸 짓을 당하며 우울증과 부인병이 있는 외에 다른 수치들은 정상 범위 안에 있었다.그 말인즉슨,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재욱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신시연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임재욱 하나뿐이니 어찌 됐든 그녀를 잘 지켜야 하는 마음뿐이었다.그 누구에게도 다시는 상처를 받지 않게끔.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여 임재욱은 그녀를 직접 병원까지 데리고 오고 의사 선생님 입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확답을 듣고 나야만 마음이 놓일 수 있다.애타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렸다.유시아가 보낸 카카오톡인데,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보고 싶어요.]임재욱은 고개를 숙인 채 카톡 내용을 거듭 곱씹으며 유시아 사진으로 되어 있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자꾸 올라갔다.‘내가 보고 싶어? 별거한 지 하루 만에 벌써 내가 보고 싶은 거야?’‘우리 시아 이제 제법 솔직하네.’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어떻게 답장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응급실 문이 열렸다.도우미 김향화가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신시연을 부축하고 걸어 나왔다.신시연은 디자인이 아주 심플한 데님 스커트를 입었고 윤기가 별로 없어 보이는 머리를 돌돌 말아 묶어 올렸다.무척이나 초췌해 보이는 것이 가여운 느낌도 물씬 풍기고 있어 기고만장했던 그
유리 구두를 품속에 꼭 안고 있는 유시아를 보고서 임재욱은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참으로 달래기 쉬운 여자라는 것을.특히 결혼하고 나서 아주 살짝만 잘해주어도 유시아는 아주 오랫동안 기뻐하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늘 임재욱 앞에만 서면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자기를 낮은 위치에 놓는 데 습관 되어 있다.임재욱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뽀뽀했다.“앞으로 매년 생일마다 예쁜 유리 구두 선물해 줄게. 어때?”“좋아요.”유시아는 말하면서 아주 유치하게 그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절대 어기지 않겠다고.”백화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일단 화실로 향했다.새로 구매한 공예품을 적당한 자리에 올려놓고 유시아의 제안으로 이채련의 병원까지 바래다주었다.유시아는 자기가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타입이라 이채련과 이미 약속했으니 꼭 지켜야 했다.하물며 자식도 없는 이체련에게 마지막 이 시간들이 더더욱 외로울 것이다.외부인들이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로 외롭다.임재욱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이채련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니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보내주었다.차는 곧 사립 병원 앞에 멈춰 섰고 임재욱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유시아는 차창에 대고 거듭 강조했다.“유리 구두랑 드레스들 옷방에 고이 모셔두도록 해요. 마구 놓지 말고요.”“알았어.”임재욱은 말하고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목을 확 잡고서 찐한 키스를 남기고 나서야 순순히 놓아 주었다.“얼른 가 봐.”“조심해서 가요.”임재욱은 조수석에 앉아 한결 가벼워진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서야 시선을 거두고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가는 길에 갑자기 신시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오빠, 배가 너무 아파요.”...병실로 돌아와 보니 이채련은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침대에 멍하니 누워 재미가 일도 없는 예능 프로를 보고 있었다.유시아가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채련은 놀라고도 기뻤다.“시아야,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유시아
쇼핑은 늘 설레는 일이다.유시아는 자기 취향대로 화실 장식품으로 쓰일 공예품을 골랐다.이윽고 임재욱은 또 유시아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지난번에 두 사람은 함께 쇼핑하면서 많은 옷을 샀었지만, 신서현 부모님께 갑작스러운 상황이 일어나면서 유시아는 그 모든 옷을 모조리 청소 아주머니에게 줘 버렸다.그때의 아쉬움을 채워주기 위해 임재욱은 또다시 쇼핑하려고 한 것이다.게다가 다음 주면 대우 그룹 상장 20주년이다.정식적인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유시아를 자기 아내 신분으로 남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이브닝 파티에 어울릴만한 드레스와 신발을 살 예정이다.드레스는 그럭저럭 큰마음이 가지 않았는데, 유시아는 그 신발이 마음에 들었다.은백색의 하이힐로 예쁜 보석들로 가득 박혀 있어 매점 불빛 아래서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신데렐라 동화에 나올 법한 유리 구두 같았다.매점 직원은 유시아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고 바로 다가왔다.“손님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 이 제품은 저희 디자이너 선생님의 최신 디자인으로 지금 딱 한 켤레만 있습니다. 만약 이 신발을 신고 나가신다면...”임재욱은 갑자기 직원의 말을 끊어버렸다.“이미 결혼했고요. 이 사람은 제 아내예요.”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는데, 자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를 보고서 따라서 웃었다.“맞아요. 이 사람이 제 남편이에요.”매점 직원은 멍하니 있다가 바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베스트 쇼핑 가이드다운 실력을 드러냈다.“어머, 어쩐지 너무 어울리신다 했어요...”직원의 칭찬에 두 사람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이윽고 매점 직원은 분위기를 파악하며 유리 구두에 대해 더욱 디테일한 설명을 첨부하기 시작했다.“이 제품의 새끼 양가죽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착용감이 엄청 좋으실 거예요. 하루 종일 신고 걸으셔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게다가 우리 디자이너 선생님이 즉흥으로 만들어내신 작품이라 절대 똑같은 제품을 시중에서 보실 수 없을 거예요.”한 켤레일 뿐만 아니라 사이
한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내가 뭐?”“한서준 씨는 당당해요?”유시아는 바로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었다.“임씨 가문에 접근한 그 의도를 다른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요? 할아버지, 재욱 씨 그리고 나까지 똑똑히 알고 있어요. 청아 씨만이 한서준 씨를 사랑해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요. 그렇게 쭉 모르는 척을 하며 모든 걸 감당하고 있었던 거라고요. 한서준 씨 역시 청아 씨를 이용한 게 아닌가요?”마지막 한 마디에 한서준은 침묵하고 말았다.그렇다. 임청아에게 접근한 이유는 유시아가 ‘스파이’로 움직여 주지 않겠다고 거절했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임씨 가문 천금을 노리게 된 것이다.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 변하게 되어 있다.임청아 대한 마음은 모략에서 시작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마음이 점점 사랑으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띠고 다가왔던 임청아가 어두운 자신의 삶을 밝게 비춰주는 것만 같았다.따라서 한서준은 임청아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차츰 생기게 된 것이다.임태훈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꼭 자기 곁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청아 씨 지금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에요.”“만약 청아 씨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말을 마치고 유시아는 차 문을 밀고 차에서 내려 병원 밖으로 걸어갔다.택시에 오른 유시아는 긴 망설임 끝에 끝내는 더 스케치 화실 주소를 운전 기사에게 알렸다.차는 화실 맞은 편에 세워졌고 유시아는 화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화실 안의 상황을 바로 체크할 수 있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최적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수많은 경호원들이 임태훈을 사이에 두고 화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임태훈은 벤틀리에 올라 강한 기운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유시아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고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바로 화실로 향해 달려갔다.화실 안과 밖은 겉은
전화를 마치고 유시아는 혼자 밖에 없는 휴게실을 보고서 깊은 번뇌에 잠겼다.남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임태훈처럼 막무가내로 어처구니가 없는 노인이 있다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태훈이 끔찍이 여기는 임청아를 유시아가 계단에서 밀어버린 것도 아닌데, 왜 애꿎은 자기 화실을 닫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집안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스스로 반성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데, 그게 무엇이든 일단 남한테서 문제를 찾고 있으니, 권력을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했다.유시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고 불안함도 점점 커졌다.지금 운영하고 있는 더 스케치 화실도 용재휘가 먼저 시작한 것인데, 그와 더불어 학생들까지 모두 함께 넘겨주었는데, 만약 이대로 화실을 망쳐버린다면 용재휘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임재욱과 임태훈이 어느 정도로 얘기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화실이 그들 싸움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용기가 없어 일단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그렇게 한참이나 심장을 조이고 있었지만, 걸려 오는 전화는 없었다.유시아는 일이 어느 정도 망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학생 채팅방에 오늘 갑자기 일이 있다며 수업을 뒤로 미룬다고 알렸다.언제 다시 수업을 시작할지는 소식을 기다리라며 덧붙이기까지 했다.톡을 보내고서 유시아는 더 이상 핸드폰을 보지 않고 바로 병원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병원 대문을 나오자마자 한서준이 정면에서 오고 있었다.“유시아.”유시아는 고개를 들었고 그를 보게 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 났다.직감이 알려주건대, 절대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화실의 생존 여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심기까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한서준은 쉽사리 유시아를 놓아 주지 않았고 손을 내밀어 유시아의 손목을 꼭 잡았다.“물어볼 일이 있어.”말하면서 근처에 있는 지프차를 가리켰다.“차에 타서 얘기 하자.”“그쪽이랑 할 말
유시아는 그 말을 이어받지 않고 집사의 바람대로 타이르기 시작했다.“몸이 아직 많이 허약해요. 먹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좀 먹어야 하거든요. 일이 어찌 됐든 일단 건강부터 챙겨야 해요.”임청아 그 말을 듣고서 쓴웃음을 지었다.“건강 회복되면 할아버지한테 잡혀가서 집에 감금되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유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어찌 됐든 할아버지 마음은 한결같을 거예요. 청아 씨를 아끼고 사랑하는 거요. 서로 대화가 필요한 거 같아요. 서로 터놓고 얘기하고 나면 오해가 풀리고 마음도 풀리면서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임청아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아이 낳고 나면 할아버지도 서준이도 원한을 내려놓고 행복만 할 수 있다고요.”“근데 이렇게 몸도 아끼지 않고 점점 더 막무가내로 나가면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은 점점 더 짙어질 거예요.”유시아는 말하면서 도우미 손에서 보신탕을 가져와 천천히 불며 임청아의 입가로 가져갔다.임청아는 생각 밖으로 무척이나 순순하게 유시아의 말을 따랐고 그녀의 말에 이치가 있는 것 같아 조용히 보신탕을 받아 마셨다.도우미와 집사는 두 사람이 티키타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서서히 마음이 놓였다.임청아가 뭐라도 먹기 시작하여 자기도 모르게 한시름을 놓으며 자리까지 비켜주려고 했다.두 사람이 마음 편히 말할 수 없을까 봐 눈치껏 일어서려는 것이다.“작은 사모님, 아가씨와 천천히 얘기하고 계세요. 밖에 나가 있을 테니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시고요.”“네, 가보세요.”도우미 일행이 나오고 나서야 유시아는 본론으로 들어갔다.“한서준 씨는 알고 있어요?”임청아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그런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잖아요.”요즘 임태훈뿐만 아니라 한서준도 눈을 부라리고 임청아를 찾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자 아파트도 호텔도 들어갈 수 없었고 버려진 강아지처럼 유시아 화실에 몸을 숨기고 지낸 것
임청아 이름 석 자가 임재욱의 입에서 나오자, 유시아는 순간 청천벽력을 맞는 것만 같았다.심지어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물었다.“청아 씨가 왜 병원에 있는 거죠?”임청아는 임신한 것을 알고 매사에 조심하며 걸음 하나도 천천히 옮겼었다.게다가 해외에 있는 친구와 연락하여 해외로 떠날 준비까지 마쳤다고 했었다.그런데 관건이 되는 순간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고?“할아버지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거 아니야?”임재욱은 말하면서 차갑게 웃었다.“네 화실에 청아 숨겨 놓았잖아. 할아버지께서 그걸 과연 모르고 있었을 것 같아? 오늘 화실로 청아 데리러 갔었는데, 가지 않겠다고 청아가 하도 우기는 바람에 억지로 묶어서라도 데리고 가겠다며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거야.”그렇다면 아이를 유산했을지도 모른다.임태훈의 습관에 따라 생각해 본다면 이 화살은 결국 유시아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임재욱이 그렇게 경고하였건만 유시아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약해지는 마음에 언젠가는 구렁이에 빠지게 될 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 일 줄은 몰랐다. 임재욱은 한숨을 내쉬며 꾸짖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병원 주소 보내줄 테니 얼른 가 봐.”말을 마치고 임재욱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고 운전 기사에게 새로운 목적지를 알려주었다.같은 시각, 병원 안에서.임청아는 이미 수술을 마쳤고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이미 가문의 집사와 간호인이 옆에 있었고 병실 문 앞에는 임태훈이 보낸 경호원도 있었다.다만 경호원이 경계해야 할 상대는 유시아가 아니라 한서준이다.따라서 유시아는 별다른 막힘없이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상에 누워 있는 임청아는 얼굴에 핏기 하나 없었고 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불과 하룻밤 사이에 모든 활력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집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주 공손하게 유시아에
조금 전까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던 임재욱은 멈칫거리고 말았다.이윽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유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별거하자는 뜻이야?”“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유시아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머리가 아픈 듯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그 시간으로 시연이한테 집중해도 되잖아요. 나도 마침 어머님 곁에 좀 있어드리고... 서로에게 지금 이게 최우선인 것 같아요.”임재욱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서 낙담한 모습으로 말했다.“그래. 네가 좋다고 하면 그게 좋은 거겠지. 그렇게 하자.”말을 마치고 그는 계속 밥을 먹었다.유시아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서 아련하게 웃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이튿날 아침, 유시아는 임재욱이 출근하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일상복 몇 벌과 일상용품을 챙겨 작은 트렁크 안에 놓고 바로 이채련한테 가려고 했다.허씨 아주머니는 트렁크를 들고 내려오는 유시아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사모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설마... 가출하려는 건 아니죠?”유시아는 허씨 아주머니를 향해 웃었다.“아니에요. 친척분이 좀 위독하신데 제가 옆에서 좀 챙겨드리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얼마 걸리지 않을 거고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트렁크를 들고서 집을 나섰다.이채련이 지내고 있는 병실이 VIP 병실로 널찍한 객실까지 갖춰져 있다.유시아는 간호사에게 접이식 침대와 이불을 요구했고 간단히 정리하고 나니 잘 자리가 아늑하게 마련되었다.이채련은 더 이상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어 하루 24시간을 침대 위에서 보내고 있다.얼굴도 하도 여위어 본연의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그전에도 유시아는 이채련에게 이곳에서 며칠 동안 함께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지만 이채련은 행여나 자기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흠이 생기게 될까 봐 동의하지 않았었다.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갖은 풍
임재욱은 핸들을 꼭 움켜쥐고서 앞만 바라보았으나 두 눈에는 고통과 망연함이 가득했다.“시연이 해외에 있을 때, 몹쓸 짓을 당했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나.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게 된 거야.”유시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볼륨까지 높아졌다.“어머, 어떡해요!”평소에 신시연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기는 했다.여자에게 있어서 그런 몹쓸 짓을 당한다는 건 치명적인 타격과 치욕이 아닐 수가 없다.게다가 부모님의 일까지 더해지니 조금 전 식당에서 봤던 신시연의 모습이 이해되었다.임재욱은 말하면서 후회와 자책하는 빛을 드러냈다.“그렇게 가고 싶지 않다는 시연이를 내가 억지로 보낸 거야.”그때는 모든 걸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낯선 곳으로 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학업에만 집중하면 자연스레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삶을 그려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하지만 임재욱이 잊고 있었던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신시연이 이제 갓 20살을 넘은 꽃다운 여자아이라는 것이다.해외에는 불안정 요소도 많고 미처 생각지 못하는 위험도 많다.게다가 젊은 나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릇된 길로 들어서기도 아주 위험하고 말이다.신시연 곁에 사람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24시간 동안 찰싹 달라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유시아와 결혼하고 나서 신혼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신시연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지금 임재욱은 신서현에게 미안할 뿐이다. 하나뿐인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하지만 그가 말한 본의와 달리 듣고 있는 유시아는 또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유시아의 기억으로는 신시연이 해외로 보내진 이유는 이러하다.그때 신시연은 정운시 대학교 교내 사이트에 유시아를 먹칠하는 게시글을 올리면서 유시아로 하여금 학업을 이어갈 수도 수업을 들을 수도 없게 악한 상황을 만들었었다.마침 그 일을 소현우가 알게 되면서 유시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