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건호의 생일파티가 끝난 뒤로 임재욱은 쭉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집사람들도 이젠 다들 익숙해졌는지 그에게 연락 한통 하지 않았다. 마치 철저히 임재욱을 외면하듯이 말이다.설이 다가오자 정유라는 그제야 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어 곧 명절인데 할아버님과 시누이, 그리고 정유라의 부모와 동생한테 새해 선물을 준비 하겠다고 말했다.임재욱은 명절에 대해 별로 개념이 뚜렷하지는 않은 사람이거니와 명절을 싫어하는 사람중 한명 이였다. 명절엔 꼭 집으로 돌아가 임태훈과 임청아랑 밥을 먹어야 했으니까.하지만 정유라의 부탁에 마음이 약해진 임재욱은 어쩔수없이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다 사고 정유라를 집으로 데려다 주는 길에 눈치가 빠른 그녀는 임재욱에게 차에서 내려 함께 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재욱씨, 명절때 집으로 돌아가요. 가서 밥이라도 같이 먹고 오세요. 아니면 할아버님 많이 속상해 하실거예요. 연세도 높으신 분이 자꾸 화내시면 안좋잖아요.”가만히 듣고만 있던 임재욱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응.”정유라는 임재욱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홀로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크고 작은 짐들을 챙겨 저택으로 걸어갔다.임씨 저택 안팍은 모두 명절분위기로 한바탕 장식을 끝마친 후였다. 임태훈은 이러한 장식들을 몹시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그는 세개의 두둑한 세뱃돈까지 준비하였는데 하나는 손주며느리, 다른 두개는 각각 두 손녀의 몫이였다.임청아는 오늘 유난히 예쁘게 차려입은것 같았다. 빨간색 프라다 벨벳 겨울치마에 하얀 조끼, 그리고 정교한 화장까지 더해져 인형이 따로 없는 모습이였다.임청아는 임태훈이 준 두둑한 세뱃돈을 받고는 임태훈의 옆자리에 앉았다. “할아버지, 점심을 다 먹으면 저 좀 나갔다 올게요.”그녀의 말을 들은 임태훈은 순간 표정이 굳더니 불만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명절이라 모든 상가들 거의 다 문을 일찍 닫을텐데 밖에 나가 뭐하게?”“일이 좀 있어서요.”임청아는 그
그러던 임청아는 그녀의 아버지와 큰오빠 임진욱이 세상을 뜬 후로부터 중성적인 옷을 좋아하기 시작하더니 성격도 변해갔다. 마치 일부러 외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갑옷을 입은 것 같았다.하지만 최근 며칠사이 임청아의 옷차림은 다시 예전 그 사랑받던 시절 공주와 소녀 스타일로 바뀌었다.정유라의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하던 임태훈은 미간을 찌푸렸다.[음...청아에게 연인이 생긴 가능성이 매우 크겠구나.]그는 고개를 들어 맞은 편에 앉아있는 정유라와 임재욱을 보며 말했다.“너희들은 청아의 오빠이자 형수니 잘 알아보거라, 특히 남자의 집안과 인성 같은것 말이다. 절대 순진한 청아가 그 남자에게 속아 나서는 안된다.”정유라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임태훈의 말에 대답했다.“네, 할아버님 염려마세요. 저희가 잘 알아볼게요.”정유라는 몸을 일으키며 말을 이어갔다.“저 주방에 가서 점심준비는 거의 다 된 건지 보고 올게요.”말을 끝낸 정유라는 바로 주방으로 향했다.정유라마저 떠난 거실에는 임태훈과 임재욱 두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정유라의 모습이 멀어지자 임태훈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너도 유라한테 잘해, 좋은 여자인 것 같구나. 우리 임씨 집안에서 생활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거야, 너는 유라 남편인데 네가 유라한테 막 대하면 유라 마음은 점점 차갑게 식어 갈 테니 조심해.”임태훈의 말을 가만히 듣던 임재욱은 알겠다는 한마디만 하고 소파에 기대여 앉았다. 그는 임태훈의 말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듯 했다.할아버지가 정유라에 대해 말을 꺼낼 때 마다 무의식적으로 유시아 생각이 나는 임재욱이였다.오랜 시간 동안 그에게 아무런 소식도 전하지 않는 유시아는 마치 임재욱의 인생에 나타나지 않았던 사람처럼 조용했다.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있던 임재욱은 더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밤이 돼서 임태훈과 저녁을 먹고는 그가 잠들기만을 기다렸다가 차키를 들고 떠날 채비를 하였다.“재욱씨...”임재욱이 정원에 거의 도착할때쯤 정유라는 문앞에 서서 갑자기
임주란은 임재욱을 아래 위로 쭉 훑어보더니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유시아랑은 어떤 사이시죠?”“전 유시아 친구입니다. 유시아가 안보이네요?”“아, 친구시구나.”임재욱의 대답을 듣던 임주란은 살짝 웃으며 하려던 말을 계속 했다.“유시아에 관해서는 한 대표님이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저희는 잘 몰라요.”유시아는 야생가 직원들 중 가장 미스테리한 존재였다, 어느날 갑자기 유생가로 들어와 소리 소문 없이 떠난 사람이니 말이다. 그런 유시아가 한서준과도 관련돼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직원들은 더더욱 유시아에 관한 말을 꺼내기 꺼려하는 눈치였다.잠시 멍해있던 임재욱은 한적하고 구석진 곳으로 가 한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야생가에 있습니다, 근데 유시아가 안 보이네요?”5분후, 어느 한 넓고 호화로운 사무실안에서 임재욱의 목소리가 들렸다.“유시아는 어디로 간 거죠?”한서준에게 따지듯 묻는 임재욱의 낯빛은 많이 어두워보였다.“저 대신 유시아를 잘 지켜주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왜 지금 유시아가 안보이냐는 말입니다.”초조해 보이는 임재욱과는 달리 한서준은 몹시 평온한 모습이였다.그는 사무실 의자에 기대앉아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왜요? 유시아가 찾아가지 않았나보죠?”“말 좀 똑똑히 하세요.”임재욱은 한서준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임재욱의 대답을 들은 한서준은 더 이상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손을 뻗어 서랍 안에서 서류봉투를 꺼내 임재욱 앞에 내밀었다.“이것부터 보시죠.”그에 말에 임재욱은 고개를 숙여 봉투를 바라보았다. 봉투 위에 크게 적혀져있는 [정안시 산부인과] 일곱 글자를 보자 그의 가슴은 순간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하더니 두 손도 떨려왔다.[석 선생님이 분명 유시아는 임신이 불가능한 몸이라고 하셨는데... 설마?]생각하면 할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진 임재욱은 가까스로 봉투를 찢어 확인하려는 순간 두 손에 힘이 풀려 쥐고 있던 봉투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허리를 숙여 주으려고 하는 임재욱의 눈
“생각 치 못한 변수 일뿐입니다.”한서준은 대답하며 고개를 들어 임재욱을 향해 씩 웃었다.“그리고 전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겁니다. 만약 24시간동안 꼭 붙어 보호한다면 재욱씨가 질투할게 뻔하잖아요.”한서준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사무실 문이 누군가에 의해 열렸다. 그리고 어떤 여자의 애교 섞인 목소리도 함께 들려왔다.“서준씨, 옥상에서 만나기로 약속해놓고 왜 안와요? 뭐해요? 한참 기다렸는데...”두 남자는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봤다.목소리의 주인공은 임청아였다. 그녀는 문 앞에 서서 안에 있던 두 남자를 보고 얼굴이 단번에 빨개졌다.“오빠...”임재욱은 임청아의 이런 모습을 보자 아까 낮에 정유라가 임태훈에게 슬쩍 했던 말이 떠올랐다.[역시 여자는 여자가 안다 더니 정확하구만.]“청아야, 네 오빠가 나한테 볼 일이 좀 있다네? 그래서 얘기중 이였어.”한서준은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당당히 임청아한테로 가더니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사무실 안으로 들여온 다음 자신의 두 손을 임청아의 얼굴에 갖다댔다.“미안해, 일이 조금 많아서 시간이 이렇게 흐르는 줄도 몰랐어. 많이 추웠지? 내가 따뜻하게 해줄게.”한서준이 아까와는 달리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임청아는 곧장 한서준의 손을 자신의 얼굴에서 떼 낸 다음 멍한 표정으로 임재욱을 바라보았다.임재욱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진단서들과 USB영상을 챙겨 나갈 채비를 하였다.“임청아, 너 따라 나와.”한서준은 고개를 돌려 임재욱을 쳐다 봤고 그와 동시에 임청아도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바라보다가 임재욱의 뒤를 따라나섰다. 한서준은 따라나서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물었다.“청아야, 너 말을 원래 이렇게 잘 들었나?”“오빠가 할아버지한테 이를가봐요.”임청아는 한서준의 손을 뿌리치며 대답했다.“잠간만 기다려줘요. 제가 알아서 잘 얘기하고 돌아올게요. 오래 안 걸려요.”임청아는 말을 끝내자마자 임재욱
임청아의 말에 한서준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아니지.”예쁘장하고 귀여운 임청아의 얼굴에 한서준은 자기도 모르게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임청아는 안 믿긴다는 듯 한서준의 옷자락을 꽉 쥐고 다시 물었다.“마지막 기회예요. 제대로 대답해줘요.”한서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몸을 임청아쪽으로 가까이 댔고 그러는 바람에 임청아는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임청아의 등이 벽에 닿자 한서준은 그제야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감쌌다. 임청아의 머리가 벽에 부딪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런 보잘 것 없는 사소한 행동에도 임청아는 또 가슴이 두근대며 설렜다.임청아는 벽과 한서준 중간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가까이 붙어있는 한서준의 몸에서는 좋은 냄새가 풍겨와 임청아의 가슴을 더욱더 뛰게 하였다.“말... 말해 봐요.”말을 하는 임청아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서준씨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요?”한서준은 자신의 얼굴을 그녀의 얼굴에 가까이 갖다 대고 이미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청아야, 남자가 나쁘게 굴지 않으면 여자들이 별로 호감이 안 간대. 네 생각도 그렇니?”말을 끝마친 한서준이 입을 맞출 듯 다가오자 임청아는 살며시 고개를 돌려 피했다.“장난치지 말아요. 화장 다 무너지겠네.”“내가 너 일년동안 쓸 화장품 다 사줄게.”한서준은 임청아의 말에 대답해주고는 바로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에 키스를 했다.-깊은 밤, 그린레이크 아파트.임재욱은 서재에 앉아 컴퓨터 화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가 보고 있는 화면 속 유시아는 어떤 남자 두 명에 의해 복도에서부터 방안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그 두 남자는 유시아를 향해 손찌검을 하려고 하였고 심지어는 그녀의 배에 올라타기도 했다.마우스를 잡고 있는 임재욱의 손은 급격히 떨려왔다. 화면 속 유시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두 남자에게 격렬히 반항만 할 뿐 어떠한 표정도 짓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임재욱은
유시아는 반월별장에서 생활한 며칠간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있는 페기 된 작은 공원을 발견하였다.[눈 내린 후의 공원은 더 아름다울 거야.]설 명절 첫날, 유시아는 구름이와 함께 공원으로 산책 나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녀는 강아지 목줄과 함께 구름이한테 딱 맞는 귀여운 옷도 만들어 입혔다. 그래서인지 산책을 나갈 때마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곤 했다.구름이는 이렇게 큰 눈을 마주한 것이 처음인지 제대로 걷기는커녕 눈밭을 구르기만 하고 있었다. 온 몸의 털과 옷에 눈이 잔뜩 묻은 구름이를 본 유시아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하지만 곧 구름이가 감기에 걸릴 가봐 노심초사하며 신나있는 구름이를 들어 안고는 별장 입구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그 시각 반월 별장 입구 앞, 임재욱은 수많은 외제차 가운데 자신의 차를 주차하고 유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차에 앉아 멀리서 입구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구름이와 유시아를 발견하였다.유시아는 여전히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입고 있던 검은색 패딩을 입고 있었는데 발에는 부츠를, 머리에는 검은색 털모자를 쓴 채 걸어오면서 수시로 고개를 숙여 구름이에게 무슨 말을 해댔다. -그런 유시아의 모습은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와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아기와 엄마...]단지 이 두 단어만 떠올렸을 뿐인데 임재욱은 또 다시 마음이 쓰라려 왔다.잠시 후, 임재욱은 차에서 내려 망설이다가 외쳤다.“유시아씨!”문 앞에 서있는 임재욱을 본 유시아는 살짝 놀라는 눈치였지만 곧이어 옅은 미소를 띠며 물었다.“여기는 갑자기 왜 오신 거죠?”왜 온 건지 가볍게 묻는 유시아를 보며 임재욱은 얼마 전 그녀의 뱃속에서 사라진 작은 생명이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오랜만 이예요.”임재욱은 손을 뻗어 차 문을 열어주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시아 씨, 먼저 타시죠. 우리 좋은 데로 가서 잘 얘기합시다.”유사아는 임재욱의 말에 응하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대답했다.“할 말이
사실 임재욱은 어젯밤부터 별장에 도착해 있었지만 문을 열어줄 카드가 없어 출입이 불가능했다.임재욱은 늦은 새벽에 유시아를 찾아가 이런 우울한 주제로 대화하고도 싶지 않았기에 곧바로 연락하지도 않았다. 유시아의 휴식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전에 석 선생님은 여자가 잠이 부족하거나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못한다면 몸이 빨리 상한다고 말씀하시면서 특히 유시아 같은 체질이 약한 여자들은 더욱 조심해야 한다고 당부하였다.임재욱은 이러한 이유들로 차에서 하룻밤을 지새웠다. 그러는 와중 드디어 유시아가 외출을 하는 것을 보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와 약속을 잡았던 것이다.유시아는 밥을 먹었다고는 하지만 임재욱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녀 혼자 살면서 무조건 제대로 된 끼니가 아닌 라면, 인스턴트 제품, 혹은 간단한 과자 정도로만 배를 채울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모든 음식들이 차례대로 올라온 뒤, 조용히 기다리던 임재욱은 그릇에 국을 담아 유시아에게 건네주고 또 고기 완자 하나를 그녀 앞에 집어주며 입을 열었다.“두 가지 다 이 가게 메인입니다. 한입만이라도 드셔보죠?”“입맛이 없어서요. 재욱씨 많이 드세요.”유시아는 그의 말에 대답하며 젓가락으로 상위에 있는 소시지 하나를 집어 구름이에게 먹여주었다.유시아의 무릎에 얌전히 앉아있던 구름이는 소시지가 맛있었는지 앞발 두 개를 다 상위에 걸쳐놓고는 더 달라는 듯 유시아를 바라보았다.그 모습을 본 유시아는 웃으며 구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속삭였다.“구름아, 적당히 먹어야지. 더 먹으면 옷도 안 들어가서 못 입는다?”[참... 사람 무안하게 하는 데는 일등이라니까.]유시아의 대답에 표정이 굳어있던 임재욱은 직원 한명을 부르더니 명령하듯 말을 했다.“여기 젓가락 하나만 더 가져다주세요.”“저 진짜 입맛이 없다니까요?”참다못한 유시아가 쏘아 붙이듯 말을 계속 이어갔다.“할 말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지금 하시죠?”바로 그때, 문이 열리더니 직원한명이 임재욱에게 새로
”안 먹겠다면 말고...”임재욱도 유시아를 따라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의자 등받이에 걸쳐진 외투를 집어들면서 말했다.“저랑 같이 병원 가서 검사 한번 받아보시죠.”“저 이미 퇴원했어요.” “하지만 의사가 퇴원해도 된다고 동의 할 때 까지 기다린 것이 아니라 몰래 뛰쳐나온 거 아닙니까?”임재욱은 손을 뻗어 그녀의 가녀린 손목을 잡아채며 말했다.“이럴 때는 너무 제멋대로 하지마시죠. 안 그럼 그 병 못 고칩니다”유시아는 그를 보며 씩 웃더니 입을 뗐다.“이 일, 재욱 씨랑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거 같은데요?”임재욱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시아씨는 전에 내 아이를 임신하기까지 했는데도 저랑 상관이 없다고요?”임재욱은 말을 마치고는 그녀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유시아를 강제로 차에 밀어 넣은 후 에야 비로소 차에 시동을 걸고 정운시에 한 유명한 사립병원으로 갔다.그는 오늘 그녀를 대신해 최고의 산부인과 의사를 예약했다. 사립병원의 검사는 유난히 세밀하여 하나 또 하나의 검사가 이어지면서 유시아는 점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임재욱은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그녀를 달래듯이 말했다.“조금만 더 기다려요, 금방 끝날 거니까. 시아 씨 몸이 제일 중요합니다. 멋대로 굴지마세요!”“진짜 제멋대로 구는 건 당신 인것 같은데요?”유시아는 뒤를 돌아 그를 차갑게 쳐다보며 말했다.“재욱 씨는 항상 제멋대로 여서 여태껏 재욱 씨가 하고 싶은 대로 했잖아요,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든 말든 전혀 상관하지도 않고.”임재욱은 그녀의 말에 정곡을 찔린 듯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저... 저는 시아 씨가 잘못 될 가봐 지금 이렇게 같이 병원에도 왔잖아요.” “신경 쓰지 마시라고요.”그는 개구리처럼 화가 나 볼이 빵빵한 유시아를 보며 웃음을 참을수가 없었다.“제가 신경 좀 쓰면 안 됩니까? 죽는 것도 아니잖아요.”유시아는 바로 대답했다.“죽는 것보다 더 싫어요.”이런 상황은 유시아로 하여금 자존심이 많이
늦은 밤, 유시아의 카카오톡을 받았을 때 임재욱은 병원에 있었다.신시연은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진료실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고 그동안에 임재욱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늦은 밤의 사립 병원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당직을 서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외에 거의 사람이 없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임재욱은 복도를 한참이나 누비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유시아를 병원으로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길에 신시연의 전화를 받고서 오게 된 것이다.배가 아프다고.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아프다고.신시연은 며칠 전에 병원에서 여러 번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해외에서 그러한 몹쓸 짓을 당하며 우울증과 부인병이 있는 외에 다른 수치들은 정상 범위 안에 있었다.그 말인즉슨,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재욱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신시연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임재욱 하나뿐이니 어찌 됐든 그녀를 잘 지켜야 하는 마음뿐이었다.그 누구에게도 다시는 상처를 받지 않게끔.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여 임재욱은 그녀를 직접 병원까지 데리고 오고 의사 선생님 입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확답을 듣고 나야만 마음이 놓일 수 있다.애타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렸다.유시아가 보낸 카카오톡인데,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보고 싶어요.]임재욱은 고개를 숙인 채 카톡 내용을 거듭 곱씹으며 유시아 사진으로 되어 있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자꾸 올라갔다.‘내가 보고 싶어? 별거한 지 하루 만에 벌써 내가 보고 싶은 거야?’‘우리 시아 이제 제법 솔직하네.’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어떻게 답장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응급실 문이 열렸다.도우미 김향화가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신시연을 부축하고 걸어 나왔다.신시연은 디자인이 아주 심플한 데님 스커트를 입었고 윤기가 별로 없어 보이는 머리를 돌돌 말아 묶어 올렸다.무척이나 초췌해 보이는 것이 가여운 느낌도 물씬 풍기고 있어 기고만장했던 그
유리 구두를 품속에 꼭 안고 있는 유시아를 보고서 임재욱은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참으로 달래기 쉬운 여자라는 것을.특히 결혼하고 나서 아주 살짝만 잘해주어도 유시아는 아주 오랫동안 기뻐하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늘 임재욱 앞에만 서면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자기를 낮은 위치에 놓는 데 습관 되어 있다.임재욱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뽀뽀했다.“앞으로 매년 생일마다 예쁜 유리 구두 선물해 줄게. 어때?”“좋아요.”유시아는 말하면서 아주 유치하게 그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절대 어기지 않겠다고.”백화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일단 화실로 향했다.새로 구매한 공예품을 적당한 자리에 올려놓고 유시아의 제안으로 이채련의 병원까지 바래다주었다.유시아는 자기가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타입이라 이채련과 이미 약속했으니 꼭 지켜야 했다.하물며 자식도 없는 이체련에게 마지막 이 시간들이 더더욱 외로울 것이다.외부인들이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로 외롭다.임재욱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이채련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니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보내주었다.차는 곧 사립 병원 앞에 멈춰 섰고 임재욱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유시아는 차창에 대고 거듭 강조했다.“유리 구두랑 드레스들 옷방에 고이 모셔두도록 해요. 마구 놓지 말고요.”“알았어.”임재욱은 말하고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목을 확 잡고서 찐한 키스를 남기고 나서야 순순히 놓아 주었다.“얼른 가 봐.”“조심해서 가요.”임재욱은 조수석에 앉아 한결 가벼워진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서야 시선을 거두고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가는 길에 갑자기 신시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오빠, 배가 너무 아파요.”...병실로 돌아와 보니 이채련은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침대에 멍하니 누워 재미가 일도 없는 예능 프로를 보고 있었다.유시아가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채련은 놀라고도 기뻤다.“시아야,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유시아
쇼핑은 늘 설레는 일이다.유시아는 자기 취향대로 화실 장식품으로 쓰일 공예품을 골랐다.이윽고 임재욱은 또 유시아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지난번에 두 사람은 함께 쇼핑하면서 많은 옷을 샀었지만, 신서현 부모님께 갑작스러운 상황이 일어나면서 유시아는 그 모든 옷을 모조리 청소 아주머니에게 줘 버렸다.그때의 아쉬움을 채워주기 위해 임재욱은 또다시 쇼핑하려고 한 것이다.게다가 다음 주면 대우 그룹 상장 20주년이다.정식적인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유시아를 자기 아내 신분으로 남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이브닝 파티에 어울릴만한 드레스와 신발을 살 예정이다.드레스는 그럭저럭 큰마음이 가지 않았는데, 유시아는 그 신발이 마음에 들었다.은백색의 하이힐로 예쁜 보석들로 가득 박혀 있어 매점 불빛 아래서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신데렐라 동화에 나올 법한 유리 구두 같았다.매점 직원은 유시아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고 바로 다가왔다.“손님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 이 제품은 저희 디자이너 선생님의 최신 디자인으로 지금 딱 한 켤레만 있습니다. 만약 이 신발을 신고 나가신다면...”임재욱은 갑자기 직원의 말을 끊어버렸다.“이미 결혼했고요. 이 사람은 제 아내예요.”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는데, 자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를 보고서 따라서 웃었다.“맞아요. 이 사람이 제 남편이에요.”매점 직원은 멍하니 있다가 바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베스트 쇼핑 가이드다운 실력을 드러냈다.“어머, 어쩐지 너무 어울리신다 했어요...”직원의 칭찬에 두 사람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이윽고 매점 직원은 분위기를 파악하며 유리 구두에 대해 더욱 디테일한 설명을 첨부하기 시작했다.“이 제품의 새끼 양가죽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착용감이 엄청 좋으실 거예요. 하루 종일 신고 걸으셔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게다가 우리 디자이너 선생님이 즉흥으로 만들어내신 작품이라 절대 똑같은 제품을 시중에서 보실 수 없을 거예요.”한 켤레일 뿐만 아니라 사이
한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내가 뭐?”“한서준 씨는 당당해요?”유시아는 바로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었다.“임씨 가문에 접근한 그 의도를 다른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요? 할아버지, 재욱 씨 그리고 나까지 똑똑히 알고 있어요. 청아 씨만이 한서준 씨를 사랑해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요. 그렇게 쭉 모르는 척을 하며 모든 걸 감당하고 있었던 거라고요. 한서준 씨 역시 청아 씨를 이용한 게 아닌가요?”마지막 한 마디에 한서준은 침묵하고 말았다.그렇다. 임청아에게 접근한 이유는 유시아가 ‘스파이’로 움직여 주지 않겠다고 거절했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임씨 가문 천금을 노리게 된 것이다.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 변하게 되어 있다.임청아 대한 마음은 모략에서 시작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마음이 점점 사랑으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띠고 다가왔던 임청아가 어두운 자신의 삶을 밝게 비춰주는 것만 같았다.따라서 한서준은 임청아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차츰 생기게 된 것이다.임태훈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꼭 자기 곁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청아 씨 지금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에요.”“만약 청아 씨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말을 마치고 유시아는 차 문을 밀고 차에서 내려 병원 밖으로 걸어갔다.택시에 오른 유시아는 긴 망설임 끝에 끝내는 더 스케치 화실 주소를 운전 기사에게 알렸다.차는 화실 맞은 편에 세워졌고 유시아는 화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화실 안의 상황을 바로 체크할 수 있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최적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수많은 경호원들이 임태훈을 사이에 두고 화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임태훈은 벤틀리에 올라 강한 기운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유시아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고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바로 화실로 향해 달려갔다.화실 안과 밖은 겉은
전화를 마치고 유시아는 혼자 밖에 없는 휴게실을 보고서 깊은 번뇌에 잠겼다.남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임태훈처럼 막무가내로 어처구니가 없는 노인이 있다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태훈이 끔찍이 여기는 임청아를 유시아가 계단에서 밀어버린 것도 아닌데, 왜 애꿎은 자기 화실을 닫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집안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스스로 반성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데, 그게 무엇이든 일단 남한테서 문제를 찾고 있으니, 권력을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했다.유시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고 불안함도 점점 커졌다.지금 운영하고 있는 더 스케치 화실도 용재휘가 먼저 시작한 것인데, 그와 더불어 학생들까지 모두 함께 넘겨주었는데, 만약 이대로 화실을 망쳐버린다면 용재휘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임재욱과 임태훈이 어느 정도로 얘기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화실이 그들 싸움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용기가 없어 일단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그렇게 한참이나 심장을 조이고 있었지만, 걸려 오는 전화는 없었다.유시아는 일이 어느 정도 망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학생 채팅방에 오늘 갑자기 일이 있다며 수업을 뒤로 미룬다고 알렸다.언제 다시 수업을 시작할지는 소식을 기다리라며 덧붙이기까지 했다.톡을 보내고서 유시아는 더 이상 핸드폰을 보지 않고 바로 병원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병원 대문을 나오자마자 한서준이 정면에서 오고 있었다.“유시아.”유시아는 고개를 들었고 그를 보게 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 났다.직감이 알려주건대, 절대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화실의 생존 여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심기까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한서준은 쉽사리 유시아를 놓아 주지 않았고 손을 내밀어 유시아의 손목을 꼭 잡았다.“물어볼 일이 있어.”말하면서 근처에 있는 지프차를 가리켰다.“차에 타서 얘기 하자.”“그쪽이랑 할 말
유시아는 그 말을 이어받지 않고 집사의 바람대로 타이르기 시작했다.“몸이 아직 많이 허약해요. 먹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좀 먹어야 하거든요. 일이 어찌 됐든 일단 건강부터 챙겨야 해요.”임청아 그 말을 듣고서 쓴웃음을 지었다.“건강 회복되면 할아버지한테 잡혀가서 집에 감금되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유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어찌 됐든 할아버지 마음은 한결같을 거예요. 청아 씨를 아끼고 사랑하는 거요. 서로 대화가 필요한 거 같아요. 서로 터놓고 얘기하고 나면 오해가 풀리고 마음도 풀리면서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임청아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아이 낳고 나면 할아버지도 서준이도 원한을 내려놓고 행복만 할 수 있다고요.”“근데 이렇게 몸도 아끼지 않고 점점 더 막무가내로 나가면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은 점점 더 짙어질 거예요.”유시아는 말하면서 도우미 손에서 보신탕을 가져와 천천히 불며 임청아의 입가로 가져갔다.임청아는 생각 밖으로 무척이나 순순하게 유시아의 말을 따랐고 그녀의 말에 이치가 있는 것 같아 조용히 보신탕을 받아 마셨다.도우미와 집사는 두 사람이 티키타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서서히 마음이 놓였다.임청아가 뭐라도 먹기 시작하여 자기도 모르게 한시름을 놓으며 자리까지 비켜주려고 했다.두 사람이 마음 편히 말할 수 없을까 봐 눈치껏 일어서려는 것이다.“작은 사모님, 아가씨와 천천히 얘기하고 계세요. 밖에 나가 있을 테니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시고요.”“네, 가보세요.”도우미 일행이 나오고 나서야 유시아는 본론으로 들어갔다.“한서준 씨는 알고 있어요?”임청아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그런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잖아요.”요즘 임태훈뿐만 아니라 한서준도 눈을 부라리고 임청아를 찾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자 아파트도 호텔도 들어갈 수 없었고 버려진 강아지처럼 유시아 화실에 몸을 숨기고 지낸 것
임청아 이름 석 자가 임재욱의 입에서 나오자, 유시아는 순간 청천벽력을 맞는 것만 같았다.심지어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물었다.“청아 씨가 왜 병원에 있는 거죠?”임청아는 임신한 것을 알고 매사에 조심하며 걸음 하나도 천천히 옮겼었다.게다가 해외에 있는 친구와 연락하여 해외로 떠날 준비까지 마쳤다고 했었다.그런데 관건이 되는 순간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고?“할아버지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거 아니야?”임재욱은 말하면서 차갑게 웃었다.“네 화실에 청아 숨겨 놓았잖아. 할아버지께서 그걸 과연 모르고 있었을 것 같아? 오늘 화실로 청아 데리러 갔었는데, 가지 않겠다고 청아가 하도 우기는 바람에 억지로 묶어서라도 데리고 가겠다며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거야.”그렇다면 아이를 유산했을지도 모른다.임태훈의 습관에 따라 생각해 본다면 이 화살은 결국 유시아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임재욱이 그렇게 경고하였건만 유시아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약해지는 마음에 언젠가는 구렁이에 빠지게 될 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 일 줄은 몰랐다. 임재욱은 한숨을 내쉬며 꾸짖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병원 주소 보내줄 테니 얼른 가 봐.”말을 마치고 임재욱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고 운전 기사에게 새로운 목적지를 알려주었다.같은 시각, 병원 안에서.임청아는 이미 수술을 마쳤고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이미 가문의 집사와 간호인이 옆에 있었고 병실 문 앞에는 임태훈이 보낸 경호원도 있었다.다만 경호원이 경계해야 할 상대는 유시아가 아니라 한서준이다.따라서 유시아는 별다른 막힘없이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상에 누워 있는 임청아는 얼굴에 핏기 하나 없었고 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불과 하룻밤 사이에 모든 활력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집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주 공손하게 유시아에
조금 전까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던 임재욱은 멈칫거리고 말았다.이윽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유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별거하자는 뜻이야?”“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유시아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머리가 아픈 듯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그 시간으로 시연이한테 집중해도 되잖아요. 나도 마침 어머님 곁에 좀 있어드리고... 서로에게 지금 이게 최우선인 것 같아요.”임재욱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서 낙담한 모습으로 말했다.“그래. 네가 좋다고 하면 그게 좋은 거겠지. 그렇게 하자.”말을 마치고 그는 계속 밥을 먹었다.유시아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서 아련하게 웃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이튿날 아침, 유시아는 임재욱이 출근하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일상복 몇 벌과 일상용품을 챙겨 작은 트렁크 안에 놓고 바로 이채련한테 가려고 했다.허씨 아주머니는 트렁크를 들고 내려오는 유시아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사모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설마... 가출하려는 건 아니죠?”유시아는 허씨 아주머니를 향해 웃었다.“아니에요. 친척분이 좀 위독하신데 제가 옆에서 좀 챙겨드리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얼마 걸리지 않을 거고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트렁크를 들고서 집을 나섰다.이채련이 지내고 있는 병실이 VIP 병실로 널찍한 객실까지 갖춰져 있다.유시아는 간호사에게 접이식 침대와 이불을 요구했고 간단히 정리하고 나니 잘 자리가 아늑하게 마련되었다.이채련은 더 이상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어 하루 24시간을 침대 위에서 보내고 있다.얼굴도 하도 여위어 본연의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그전에도 유시아는 이채련에게 이곳에서 며칠 동안 함께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지만 이채련은 행여나 자기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흠이 생기게 될까 봐 동의하지 않았었다.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갖은 풍
임재욱은 핸들을 꼭 움켜쥐고서 앞만 바라보았으나 두 눈에는 고통과 망연함이 가득했다.“시연이 해외에 있을 때, 몹쓸 짓을 당했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나.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게 된 거야.”유시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볼륨까지 높아졌다.“어머, 어떡해요!”평소에 신시연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기는 했다.여자에게 있어서 그런 몹쓸 짓을 당한다는 건 치명적인 타격과 치욕이 아닐 수가 없다.게다가 부모님의 일까지 더해지니 조금 전 식당에서 봤던 신시연의 모습이 이해되었다.임재욱은 말하면서 후회와 자책하는 빛을 드러냈다.“그렇게 가고 싶지 않다는 시연이를 내가 억지로 보낸 거야.”그때는 모든 걸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낯선 곳으로 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학업에만 집중하면 자연스레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삶을 그려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하지만 임재욱이 잊고 있었던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신시연이 이제 갓 20살을 넘은 꽃다운 여자아이라는 것이다.해외에는 불안정 요소도 많고 미처 생각지 못하는 위험도 많다.게다가 젊은 나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릇된 길로 들어서기도 아주 위험하고 말이다.신시연 곁에 사람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24시간 동안 찰싹 달라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유시아와 결혼하고 나서 신혼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신시연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지금 임재욱은 신서현에게 미안할 뿐이다. 하나뿐인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하지만 그가 말한 본의와 달리 듣고 있는 유시아는 또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유시아의 기억으로는 신시연이 해외로 보내진 이유는 이러하다.그때 신시연은 정운시 대학교 교내 사이트에 유시아를 먹칠하는 게시글을 올리면서 유시아로 하여금 학업을 이어갈 수도 수업을 들을 수도 없게 악한 상황을 만들었었다.마침 그 일을 소현우가 알게 되면서 유시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