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진 정보들이 유시아의 머릿속에서 맴돌며 빠른 속도로 퍼즐을 맞췄다.한서준은 입꼬리를 추켜올리더니 조금 가벼운 말투로 쏘아붙였다.“왜? 내가 한서준처럼 안 생겼어?”유시아는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니요. 그런 뜻은 아닙니다.”한서준은 차 문을 열며 다시 유시아에게 말을 건넸다.“돌아가는 길에 집 앞에서 다시 저 사람들을 마주치기 싫으면 내 차에 타. 데려다줄게.”유시아는 조금 전 순식간에 발생했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떨려났는지라 빠른 속도로 고개를 숙이고 한서준의 차에 올라탔다. 자신의 집 주소를 말해준 뒤, 잊지 않고 감사 인사도 전했다.“정말 감사합니다, 대표님!”한서준의 차는 그렇게 넓은 도로 위에서 질주하며 약 40분이 지난 뒤에야 유시아의 거주지 밑에 도착했다.유시아는 차 문을 열고 내린 뒤 다시 차 안을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표님.”한서준도 유시아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어주었다.“그럼 다음에 또 봅시다, 유시아 씨.”차 문이 닫히고 유시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고는 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임재욱이 또 집에 찾아왔다. 유시아가 현관문을 열 때 그녀를 등지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유시아는 깊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는 임재욱이 시도 때도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자신을 괴롭히는 것에 익숙해진 모양이다.하여 유시아는 항상 이대로 가만히 놔두면 임재욱도 멋대로 굴다가 어느 날 질리면 알아서 나가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녀도 이제 완전히 임재욱으로부터 해방할 수 있다.이는 매우 소극적이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방법이다.가방을 내려놓고 몸 위에 걸쳐진 코트까지 벗은 뒤, 유시아는 구름이를 품에 안고 강아지에게 사료와 물을 먹였다. 제대로 사료를 먹이지 않은 것인지 요즘 구름이가 부쩍 살이 빠진 기분이었다. 심지어 유시아는 쉬는 날에 구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볼 계획이었다.임재욱은 먼 곳에 서서 그녀의 행동을 묵묵히 보고
유시아는 남자의 유치한 모습을 바라보며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임재욱 씨, 지금 너무 오지랖 부리고 있는 거라는 생각은 안 해요?”“맞아!" 임재욱은 유시아의 말에 전혀 부인하지 않았다.“그런데 유시아, 난 평생 네 인생에 관여할 거야.”“당신이 뭔데요?”“네가 전에는 내 소유였다는 것만으로도 난 자격이 있어.”임재욱이 다가가 유시아의 귓가에 입술을 포갰다.“예전에도, 앞으로도 쭉 넌 내 것이어야 해.”그 말을 들은 유시아는 얇은 입술을 꾹 깨물었고 그녀의 아름다운 미간도 함께 구겨졌다. 이윽고 유시아는 단번에 임재욱을 밀어내며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임재욱 씨, 저와 이혼했고 당신은 이미 새로운 여자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긴 해요? 대체 당신이 뭔데 지금 저한테 이딴 소리를 하는 거예요? 당신한테 무슨 자격이 있는데요?”임재욱은 유시아를 유흥 업소 아가씨를 대하듯 거칠게 다뤘고 이것도 모자라 그와 정유라 사이에 끌어들여 만인이 욕하는 내연녀로 만들어버렸다.대체 왜?임재욱이 정말 유시아를 사랑한다면 3년 전 그녀가 감옥에 들어갈 땐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건가?유시아를 하나의 카드로 여기고 한 무리의 남자들과 도박을 할 때는 또 무슨 생각이었던 건가?유시아는 임재욱 손안에 있는 인형이 아닌 살아 숨 쉬고 있는 사람이다.그녀의 마음과 감정은 틀기만 하면 미친 듯이 사랑해주며 감정을 쏟아붓고 다시 닫으면 철저히 임재욱의 존재를 마음에서 지우는 수도꼭지가 아니다.유시아는 임재욱을 사랑할 때 이미 모든 마음의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그녀가 가장 아름다운 꿈과 환상을 품고 임재욱에게 몸을 내던질 때 임재욱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지옥에 빠뜨렸다. 그리고 현재 유시아가 모든 가시덤불을 넘고 수많은 변화를 눈에 담으며 어느새 마음도 차게 식고 무감각해지자 임재욱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그녀를 향해 사랑을 외치고 있다.--대체 왜? 임재욱은 대체 무슨 근거로 그녀를 이렇게 괴롭힌단 말인가?유시아는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
임재욱도 그렇게 생각했고 곧 실행에 옮겼다.유시아는 그의 몸 아래에서 절망적인 울음을 터뜨렸다. 왠지 모르게 그녀는 오늘따라 소현우가 자꾸 떠올라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러댔다.“현우 씨, 현우 씨...”만약 그 남자가 아직 살아있다면 절대 그 어떤 사람도 그녀를 괴롭히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다.곧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유시아는 처음으로 소현우가 뼈저리게 그리웠다.그때, 허리에 갑자기 통증이 전해지며 유시아를 과거의 그리움 속에서 끌어냈다.그녀는 조금 두려운 눈빛으로 시선을 들어 올려 블랙홀처럼 당장이라도 그녀의 영혼까지 끌어당길 듯한 남자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했다.“시아야, 나 임재욱이야...”남자는 유시아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부드럽고 자성이 있는 목소리는 마치 울고 있는 유시아를 달래주는 듯 했다.“시아야, 나 임재욱이야. 너 전에는 계속 나 재욱이라고 불러줬잖아. 재욱 오빠라고 한번 불러봐, 응? 재욱...”유시아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죽어도 임재욱의 이름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현우, 난 현우가 좋아...”유시아는 이 세상에 정말 영혼이 있기를, 그리고 소현우의 영혼이 달려와 그녀를 구해주기를 간절하게 빌었다.“부르지 마. 정말 소현우의 영혼을 네가 불러와도 지금 네 이 꼴을 보게 된다면 소현우도 널 싫어할 거야. 여자인 너는 남자의 마음을 몰라.”임재욱은 눈을 흘기며 유시아의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난 임재욱이야. 재욱이라고 불러. 유시아, 당장 재욱이라고 부르란 말이야!”그러나 유시아도 한사코 물러서지 않았고 계속하여 이를 꽉 악물었다.“현우 씨...”깊은 밤, 인적이 드물어 고요하기만 했다.유시아는 이미 기절해 잠들었고 눈물과 땀범벅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은 상당히 낭패하고 불쌍해 보였다.임재욱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손을 뻗어 마음 아픈 듯 축축이 젖어있는 유시아의 작은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소현우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던 유시아의 목소리가 떠나가질 않
유시아는 침대 머리맡에 앉아 멍하니 한쪽 무릎을 꿇고 한 손으로는 그녀의 가느다란 발목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슬리퍼를 신겨주는 임재욱의 모습을 쳐다보았다.슬리퍼는 매우 예뻤고 따뜻한 스웨이드 소재에 앞에는 예쁜 방울이 달려있었다.유시아는 소현우도 당시 같은 색깔에 같은 디자인인 비슷한 슬리퍼를 사준 기억이 났다.그리고 그녀를 부드럽게 대해주는 것도 소현우와 비슷했다.하지만 그의 얼굴이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임재욱은 소현우가 아니다. 임재욱은 그녀를 감옥에 보내고 사람 취급도 안 해줄 뿐만 아니라 한번, 또 한 번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녀를 괴롭히고 상처 주는 사람이다…그러자 유시아가 갑자기 발을 움츠렸다.“저한테 손대지 마세요!”“왜 그래?”임재욱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더니 이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혹시 이 슬리퍼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아니면 다른 슬리퍼 가져다줄까?”유시아는 임재욱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한 글자 한 마디 똑똑하게 내뱉었다.“전 집에 가고 싶어요. 전 이곳에 있는 게 싫어요!”임재욱은 담담히 웃으며 몸을 일으키더니 손을 뻗어 유시아의 앞머리를 슬쩍 어루만져주었다. 그러자 유시아가 경멸 어린 표정으로 그의 손길을 슬쩍 피했지만, 임재욱은 화내지 않았다. 들어 올린 손은 결국 가볍게 유시아의 머리에 안착했고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네 작은 집이 너무 추워서 오래 지내면 감기 걸려.”“하지만 이곳에서는 죽어버릴 거예요.”저번에도 유시아는 임재욱에 의해 별장에 갇혀 벗어날 방법이 없어 보이자 바로 손목을 그어버렸었다.그 흔적은 지금까지 손목에 남아 사라지지 않았는데 유시아가 어떻게 이 일을 잊는단 말인가?임재욱의 호흡이 순간 멈칫하더니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착하게 잘만 있으면 안 죽어.”만약 유시아가 임재욱의 말을 듣고 소현우와 결혼하겠다고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들 사이의 장애물은 지금보다 훨씬 적을 것이다.그러나 임재욱은 이제 과거의 일을 묻지 않았
“집에 가고 싶어요!”임재욱의 말에 유시아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저 출근도 해야 해요.”그러자 임재욱은 싱긋 웃으며 팔을 뻗어 그녀의 두 손을 꼭 잡고 끌어당겨 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타일렀다.“네 손이 얼마나 소중한데. 술 나르는 일은 됐어, 하지 마.”게다가 손을 들어 올려 벽에 걸려있는 그림을 가리켜보았다.“봐, 저 그림이 딱 좋잖아. 나도 좋아서 액자에 넣어 침실에 걸어뒀는데…”유시아가 임재욱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저도 모르게 멈칫하고 말았다.그건 그녀와 소현우가 결혼하기 전, 홍콩에서 그와 여행하며 그린 그림이다.당시의 유시아는 아직도 대학 시절의 겉은 멋지지만 속은 순진하기 그지없는 남학생을 그리워하고 있었다.하지만 곧바로 현타가 오며 몰려오는 수치심에 꾸겨 버렸던 것인데 이걸 다시 주워올 줄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주워온 것도 모자라 정성스레 포장하여 벽에 걸어놓기까지 한 것이다.그 그림은 마치 반짝이는 서치라이트처럼 그녀의 모든 내면을 한눈에 비추어 버렸다.모든 마음을 들켜버렸다는 생각에 수치심이 엄습해왔고 골치 아픈 듯 손을 움츠렸다.“임재욱, 난 평생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아요. 다시는 붓을 들지 않을 거라고요…”“그래, 싫으면 그리지 말자.”임재욱이 인내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따뜻하게 말해주었다.“그럼 뭘 갖고 싶어? 가방 하나 사주거나 밥 한 끼 제대로 먹는 건 어때?”임재욱이 부드럽게 행동할수록 유시아는 점점 초조해져 갔다. 유시아는 자신의 마음이 조금씩 무너지고 함락되고 있음을 예견할 수 있었다.그건 유시아가 존엄을 잃고 또다시 임재욱의 손에 떠밀려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매우 끔찍한 일이다.그러자 유시아가 통제 불능이 된 듯 힘껏 걷어찼다.“싫어요!”임재욱은 가볍게 그녀의 발목을 쥐어 잡고는 여전히 화 한번 내지 않고 무한히 넘치는듯한 인내심으로 입을 열었다.“그럼 뭘 원하는데? 응? 한정판 립스틱은 어때?”유시아는 화가 치밀어 올라 몸이 부들부들 떨려났다.
유시아의 몸 상태는 줄곧 임재욱 마음속의 걱정거리였다.게다가 유시아는 아마 지금까지도 그녀의 몸 상태가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생리 기간의 복통 정도로 간단한 일이 아니라 임재욱은 아이를 낳는 일도 항상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다.하여 그는 더이상 이대로 미룰 수 없다고 결정했다. 이번만큼은 정말 밧줄로 묶어서라도 반드시 홍콩에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할 예정이였다.임재욱은 죽 그릇 앞에 놓인 두유 컵을 유시아에게 밀어주며 입을 열었다.“원한다면 나도 그쪽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학교를 알아봐 줄 수 있는데 공부도 하면서 몸조리도 하고 일거양득 아니겠어?”유시아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 임재욱에게 눈길을 주었다.“남 인생을 멋대로 전부 안배해 놓는 건 당신에게 취미와 같은 건가요?”“만약 네가 정말 네 인생을 잘 살 수 있다면 내가 나서겠어?”말을 마치고 임재욱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설마 지금 야생가 같은 곳에서 웨이터나 하고 있는 게 괜찮은 인생이라고 말할 생각은 아니겠지?”유시아는 입을 달싹이며 갑자기 임재욱과 말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당시 임재욱의 손에 떠밀려 감옥에 갔든 출소 후 인형처럼 옆에 갇혀 있었든, 아니면 지금의 다정다감한 모습이든...유시아에게는 임재욱의 좋고 나쁨, 그의 무관심, 그리고 그의 부드러움을 거절할 권리가 없었다.단 한 번의 정으로 평생 그의 곁에서 도망칠 수 없게 되었다.유시아는 마치 새장 속의 새처럼 사랑, 원망, 기쁨, 분노 등 감정을 가질 수가 없었다.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유시아는 한숨을 푹 내쉬며 손안에 쥐어진 숟가락을 내려놓고는 몸을 돌려 위층으로 올라갔다.임재욱은 고개를 들어 유시아의 가냘프고 쓸쓸한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손안에 있던 우유컵을 힘껏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강제로 유시아를 끌고 와 꼬치꼬치 캐묻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냈다.위층의 침실은 매우 조용했고 유시아는 무릎을 껴안고 침대
임재욱이 물으며 손을 뻗어 열어보니 안에 들어있는 것은 신서현이 살아있을 때 낸 음반이었다. 예전에 신서현이 가장 좋아하던 것은 노래였고 그녀의 음색도 감미로웠다. 하지만 음반 시장이 점점 어려워지면서 신서현은 매니저의 안배하에 연극을 하며 돈을 벌어야 했다. 그 시절 임재욱은 그가 대우 그룹을 물려받으면 신서현이 음반을 낼 수 있도록 지원하여 그녀를 가장 인기 있는 가수로 추켜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아쉽게도 신서현은 기다리지 못했다.임재욱은 탄식하며 고개를 숙이고 표지의 여자를 살살 어루만지며 물었다. "너 어디서 이런 물건을 가져온 거야?" 신서현이 임재욱에게 줬던 이 음반은 아직 개봉하지 않은 새것이다. 게다가 한정판으로 판매되고 신서현의 친필 사인이 들어있다. 임재욱은 예전에 사람을 시켜 음반을 한참을 찾았고 팬에게서 고가로 구매를 시도했지만 끝내 얻지 못했다.유시아의 손에 이것이 있다니, 임재욱은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현우 씨한테서 가져왔어요." 유시아는 임재욱의 노심초사하는 표정을 보더니 말했다."예전에 현우 씨가 서현 씨의 매니저와 함께 접대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한정판의 음반을 선물 받았어요."유시아는 이 음반을 가져온 지 이렇게 오래 되였지만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몰랐다.방금 물건을 찾다가 마침 이것을 뒤져서 임재욱에게 주었다. 어쨌든 신서현의 유물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임재욱은 그 음반을 손에 꼭 쥐고 있다가 한참 만에야 고맙다고 말했다. 유시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갔다. 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 모두가 답답했다. 유시아는 신서현의 일에 관련되면 이 남자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유시아는 조수석에 앉아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바깥 거리 풍경을 바라보며 묵묵히 자신의 걱정거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차는 이미 멈춰 섰다. 그러자 그녀는 놀라서 물었다."뭐 하는 거예요?" "뭐 좀 먹으러 나가자." 임재욱은 손을 뻗어
1년 가까이 못 보던 사이에 이채련도 아들을 잃은 슬픔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듯했다.이채련은 은회색 긴 가을 스커트에 옅은 갈색 모피 코트를 매치해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 외에는 여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소현우가 사망하고 세현 그룹도 해체되었지만 소현우가 남긴 막대한 재산은 여전히 그녀가 먹고살기에 충분했다.오늘 이채련은 몇 명의 친구들과 오후에 차를 마시기로 약속했지만 문에 들어서자마자 생각지 못하게 유시아가 여기서 밥 먹는 것을 보았다.그리고 유시아의 맞은편에는 자기 아들을 죽인 살인자, 임재욱이 앉아 있었다.이채련은 눈썹을 찌푸리고 입술을 살짝 오므린 채 두 사람을 무시하고 자신의 친구들을 따라 창가 자리에 앉았다. 유시아의 마음은 이미 음식 위에 있지 않았다. 유시아는 이채련을 보기만 하면 과거의 많은 일을 떠올리게 되고 하나하나가 모두 소현우와 관련이 있었다.이채련은 처음부터 유시아가 소현우와 함께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소현우가 줄곧 끈질기게 노력했기에 유시아가 그에게 시집갈 수 있게 되었다. 결국, 결혼식 날은 소현우의 기일이 되었다! 유시아는 자신에게 이채련을 잘 돌봐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감히 이채련의 곁에 다가가지 못했다.전에 유시아는 혼자 낯선 집에서 열 달 동안 숨어 살았는데, 첫째는 임재욱을 보기 싫었고 소송에 휘말릴까 봐 두려웠다. 둘째는 이채련을 볼 면목이 없다고 생각했다.특히 오늘 유시아는 임재욱과 함께 앉아서 밥을 먹다가 이채련을 다시 만났을 때 몸 둘 바를 몰랐다.유시아는 소현우에게 면목이 없었고 소 씨 가문에게는 더욱 면목이 없었다.임재욱은 유시아의 이런 감정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심지어 그는 힐끔힐끔 이쪽을 바라보는 이채련의 곱지 않은 시선마저도 의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임재욱은 그냥 지나칠 수 있었다. 그는 곧바로 유시아의 앞 접시에 튀김 빵 하나를 더 놓았다. "많이 먹어." 유시아는 이미 입맛이 다 떨어져 한 입 베어 물고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배불러!
늦은 밤, 유시아의 카카오톡을 받았을 때 임재욱은 병원에 있었다.신시연은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진료실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고 그동안에 임재욱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늦은 밤의 사립 병원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당직을 서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외에 거의 사람이 없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임재욱은 복도를 한참이나 누비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유시아를 병원으로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길에 신시연의 전화를 받고서 오게 된 것이다.배가 아프다고.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아프다고.신시연은 며칠 전에 병원에서 여러 번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해외에서 그러한 몹쓸 짓을 당하며 우울증과 부인병이 있는 외에 다른 수치들은 정상 범위 안에 있었다.그 말인즉슨,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재욱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신시연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임재욱 하나뿐이니 어찌 됐든 그녀를 잘 지켜야 하는 마음뿐이었다.그 누구에게도 다시는 상처를 받지 않게끔.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여 임재욱은 그녀를 직접 병원까지 데리고 오고 의사 선생님 입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확답을 듣고 나야만 마음이 놓일 수 있다.애타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렸다.유시아가 보낸 카카오톡인데,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보고 싶어요.]임재욱은 고개를 숙인 채 카톡 내용을 거듭 곱씹으며 유시아 사진으로 되어 있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자꾸 올라갔다.‘내가 보고 싶어? 별거한 지 하루 만에 벌써 내가 보고 싶은 거야?’‘우리 시아 이제 제법 솔직하네.’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어떻게 답장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응급실 문이 열렸다.도우미 김향화가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신시연을 부축하고 걸어 나왔다.신시연은 디자인이 아주 심플한 데님 스커트를 입었고 윤기가 별로 없어 보이는 머리를 돌돌 말아 묶어 올렸다.무척이나 초췌해 보이는 것이 가여운 느낌도 물씬 풍기고 있어 기고만장했던 그
유리 구두를 품속에 꼭 안고 있는 유시아를 보고서 임재욱은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참으로 달래기 쉬운 여자라는 것을.특히 결혼하고 나서 아주 살짝만 잘해주어도 유시아는 아주 오랫동안 기뻐하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늘 임재욱 앞에만 서면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자기를 낮은 위치에 놓는 데 습관 되어 있다.임재욱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뽀뽀했다.“앞으로 매년 생일마다 예쁜 유리 구두 선물해 줄게. 어때?”“좋아요.”유시아는 말하면서 아주 유치하게 그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절대 어기지 않겠다고.”백화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일단 화실로 향했다.새로 구매한 공예품을 적당한 자리에 올려놓고 유시아의 제안으로 이채련의 병원까지 바래다주었다.유시아는 자기가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타입이라 이채련과 이미 약속했으니 꼭 지켜야 했다.하물며 자식도 없는 이체련에게 마지막 이 시간들이 더더욱 외로울 것이다.외부인들이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로 외롭다.임재욱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이채련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니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보내주었다.차는 곧 사립 병원 앞에 멈춰 섰고 임재욱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유시아는 차창에 대고 거듭 강조했다.“유리 구두랑 드레스들 옷방에 고이 모셔두도록 해요. 마구 놓지 말고요.”“알았어.”임재욱은 말하고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목을 확 잡고서 찐한 키스를 남기고 나서야 순순히 놓아 주었다.“얼른 가 봐.”“조심해서 가요.”임재욱은 조수석에 앉아 한결 가벼워진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서야 시선을 거두고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가는 길에 갑자기 신시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오빠, 배가 너무 아파요.”...병실로 돌아와 보니 이채련은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침대에 멍하니 누워 재미가 일도 없는 예능 프로를 보고 있었다.유시아가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채련은 놀라고도 기뻤다.“시아야,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유시아
쇼핑은 늘 설레는 일이다.유시아는 자기 취향대로 화실 장식품으로 쓰일 공예품을 골랐다.이윽고 임재욱은 또 유시아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지난번에 두 사람은 함께 쇼핑하면서 많은 옷을 샀었지만, 신서현 부모님께 갑작스러운 상황이 일어나면서 유시아는 그 모든 옷을 모조리 청소 아주머니에게 줘 버렸다.그때의 아쉬움을 채워주기 위해 임재욱은 또다시 쇼핑하려고 한 것이다.게다가 다음 주면 대우 그룹 상장 20주년이다.정식적인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유시아를 자기 아내 신분으로 남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이브닝 파티에 어울릴만한 드레스와 신발을 살 예정이다.드레스는 그럭저럭 큰마음이 가지 않았는데, 유시아는 그 신발이 마음에 들었다.은백색의 하이힐로 예쁜 보석들로 가득 박혀 있어 매점 불빛 아래서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신데렐라 동화에 나올 법한 유리 구두 같았다.매점 직원은 유시아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고 바로 다가왔다.“손님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 이 제품은 저희 디자이너 선생님의 최신 디자인으로 지금 딱 한 켤레만 있습니다. 만약 이 신발을 신고 나가신다면...”임재욱은 갑자기 직원의 말을 끊어버렸다.“이미 결혼했고요. 이 사람은 제 아내예요.”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는데, 자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를 보고서 따라서 웃었다.“맞아요. 이 사람이 제 남편이에요.”매점 직원은 멍하니 있다가 바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베스트 쇼핑 가이드다운 실력을 드러냈다.“어머, 어쩐지 너무 어울리신다 했어요...”직원의 칭찬에 두 사람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이윽고 매점 직원은 분위기를 파악하며 유리 구두에 대해 더욱 디테일한 설명을 첨부하기 시작했다.“이 제품의 새끼 양가죽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착용감이 엄청 좋으실 거예요. 하루 종일 신고 걸으셔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게다가 우리 디자이너 선생님이 즉흥으로 만들어내신 작품이라 절대 똑같은 제품을 시중에서 보실 수 없을 거예요.”한 켤레일 뿐만 아니라 사이
한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내가 뭐?”“한서준 씨는 당당해요?”유시아는 바로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었다.“임씨 가문에 접근한 그 의도를 다른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요? 할아버지, 재욱 씨 그리고 나까지 똑똑히 알고 있어요. 청아 씨만이 한서준 씨를 사랑해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요. 그렇게 쭉 모르는 척을 하며 모든 걸 감당하고 있었던 거라고요. 한서준 씨 역시 청아 씨를 이용한 게 아닌가요?”마지막 한 마디에 한서준은 침묵하고 말았다.그렇다. 임청아에게 접근한 이유는 유시아가 ‘스파이’로 움직여 주지 않겠다고 거절했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임씨 가문 천금을 노리게 된 것이다.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 변하게 되어 있다.임청아 대한 마음은 모략에서 시작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마음이 점점 사랑으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띠고 다가왔던 임청아가 어두운 자신의 삶을 밝게 비춰주는 것만 같았다.따라서 한서준은 임청아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차츰 생기게 된 것이다.임태훈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꼭 자기 곁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청아 씨 지금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에요.”“만약 청아 씨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말을 마치고 유시아는 차 문을 밀고 차에서 내려 병원 밖으로 걸어갔다.택시에 오른 유시아는 긴 망설임 끝에 끝내는 더 스케치 화실 주소를 운전 기사에게 알렸다.차는 화실 맞은 편에 세워졌고 유시아는 화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화실 안의 상황을 바로 체크할 수 있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최적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수많은 경호원들이 임태훈을 사이에 두고 화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임태훈은 벤틀리에 올라 강한 기운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유시아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고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바로 화실로 향해 달려갔다.화실 안과 밖은 겉은
전화를 마치고 유시아는 혼자 밖에 없는 휴게실을 보고서 깊은 번뇌에 잠겼다.남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임태훈처럼 막무가내로 어처구니가 없는 노인이 있다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태훈이 끔찍이 여기는 임청아를 유시아가 계단에서 밀어버린 것도 아닌데, 왜 애꿎은 자기 화실을 닫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집안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스스로 반성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데, 그게 무엇이든 일단 남한테서 문제를 찾고 있으니, 권력을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했다.유시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고 불안함도 점점 커졌다.지금 운영하고 있는 더 스케치 화실도 용재휘가 먼저 시작한 것인데, 그와 더불어 학생들까지 모두 함께 넘겨주었는데, 만약 이대로 화실을 망쳐버린다면 용재휘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임재욱과 임태훈이 어느 정도로 얘기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화실이 그들 싸움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용기가 없어 일단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그렇게 한참이나 심장을 조이고 있었지만, 걸려 오는 전화는 없었다.유시아는 일이 어느 정도 망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학생 채팅방에 오늘 갑자기 일이 있다며 수업을 뒤로 미룬다고 알렸다.언제 다시 수업을 시작할지는 소식을 기다리라며 덧붙이기까지 했다.톡을 보내고서 유시아는 더 이상 핸드폰을 보지 않고 바로 병원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병원 대문을 나오자마자 한서준이 정면에서 오고 있었다.“유시아.”유시아는 고개를 들었고 그를 보게 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 났다.직감이 알려주건대, 절대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화실의 생존 여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심기까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한서준은 쉽사리 유시아를 놓아 주지 않았고 손을 내밀어 유시아의 손목을 꼭 잡았다.“물어볼 일이 있어.”말하면서 근처에 있는 지프차를 가리켰다.“차에 타서 얘기 하자.”“그쪽이랑 할 말
유시아는 그 말을 이어받지 않고 집사의 바람대로 타이르기 시작했다.“몸이 아직 많이 허약해요. 먹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좀 먹어야 하거든요. 일이 어찌 됐든 일단 건강부터 챙겨야 해요.”임청아 그 말을 듣고서 쓴웃음을 지었다.“건강 회복되면 할아버지한테 잡혀가서 집에 감금되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유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어찌 됐든 할아버지 마음은 한결같을 거예요. 청아 씨를 아끼고 사랑하는 거요. 서로 대화가 필요한 거 같아요. 서로 터놓고 얘기하고 나면 오해가 풀리고 마음도 풀리면서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임청아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아이 낳고 나면 할아버지도 서준이도 원한을 내려놓고 행복만 할 수 있다고요.”“근데 이렇게 몸도 아끼지 않고 점점 더 막무가내로 나가면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은 점점 더 짙어질 거예요.”유시아는 말하면서 도우미 손에서 보신탕을 가져와 천천히 불며 임청아의 입가로 가져갔다.임청아는 생각 밖으로 무척이나 순순하게 유시아의 말을 따랐고 그녀의 말에 이치가 있는 것 같아 조용히 보신탕을 받아 마셨다.도우미와 집사는 두 사람이 티키타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서서히 마음이 놓였다.임청아가 뭐라도 먹기 시작하여 자기도 모르게 한시름을 놓으며 자리까지 비켜주려고 했다.두 사람이 마음 편히 말할 수 없을까 봐 눈치껏 일어서려는 것이다.“작은 사모님, 아가씨와 천천히 얘기하고 계세요. 밖에 나가 있을 테니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시고요.”“네, 가보세요.”도우미 일행이 나오고 나서야 유시아는 본론으로 들어갔다.“한서준 씨는 알고 있어요?”임청아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그런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잖아요.”요즘 임태훈뿐만 아니라 한서준도 눈을 부라리고 임청아를 찾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자 아파트도 호텔도 들어갈 수 없었고 버려진 강아지처럼 유시아 화실에 몸을 숨기고 지낸 것
임청아 이름 석 자가 임재욱의 입에서 나오자, 유시아는 순간 청천벽력을 맞는 것만 같았다.심지어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물었다.“청아 씨가 왜 병원에 있는 거죠?”임청아는 임신한 것을 알고 매사에 조심하며 걸음 하나도 천천히 옮겼었다.게다가 해외에 있는 친구와 연락하여 해외로 떠날 준비까지 마쳤다고 했었다.그런데 관건이 되는 순간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고?“할아버지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거 아니야?”임재욱은 말하면서 차갑게 웃었다.“네 화실에 청아 숨겨 놓았잖아. 할아버지께서 그걸 과연 모르고 있었을 것 같아? 오늘 화실로 청아 데리러 갔었는데, 가지 않겠다고 청아가 하도 우기는 바람에 억지로 묶어서라도 데리고 가겠다며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거야.”그렇다면 아이를 유산했을지도 모른다.임태훈의 습관에 따라 생각해 본다면 이 화살은 결국 유시아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임재욱이 그렇게 경고하였건만 유시아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약해지는 마음에 언젠가는 구렁이에 빠지게 될 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 일 줄은 몰랐다. 임재욱은 한숨을 내쉬며 꾸짖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병원 주소 보내줄 테니 얼른 가 봐.”말을 마치고 임재욱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고 운전 기사에게 새로운 목적지를 알려주었다.같은 시각, 병원 안에서.임청아는 이미 수술을 마쳤고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이미 가문의 집사와 간호인이 옆에 있었고 병실 문 앞에는 임태훈이 보낸 경호원도 있었다.다만 경호원이 경계해야 할 상대는 유시아가 아니라 한서준이다.따라서 유시아는 별다른 막힘없이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상에 누워 있는 임청아는 얼굴에 핏기 하나 없었고 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불과 하룻밤 사이에 모든 활력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집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주 공손하게 유시아에
조금 전까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던 임재욱은 멈칫거리고 말았다.이윽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유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별거하자는 뜻이야?”“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유시아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머리가 아픈 듯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그 시간으로 시연이한테 집중해도 되잖아요. 나도 마침 어머님 곁에 좀 있어드리고... 서로에게 지금 이게 최우선인 것 같아요.”임재욱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서 낙담한 모습으로 말했다.“그래. 네가 좋다고 하면 그게 좋은 거겠지. 그렇게 하자.”말을 마치고 그는 계속 밥을 먹었다.유시아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서 아련하게 웃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이튿날 아침, 유시아는 임재욱이 출근하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일상복 몇 벌과 일상용품을 챙겨 작은 트렁크 안에 놓고 바로 이채련한테 가려고 했다.허씨 아주머니는 트렁크를 들고 내려오는 유시아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사모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설마... 가출하려는 건 아니죠?”유시아는 허씨 아주머니를 향해 웃었다.“아니에요. 친척분이 좀 위독하신데 제가 옆에서 좀 챙겨드리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얼마 걸리지 않을 거고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트렁크를 들고서 집을 나섰다.이채련이 지내고 있는 병실이 VIP 병실로 널찍한 객실까지 갖춰져 있다.유시아는 간호사에게 접이식 침대와 이불을 요구했고 간단히 정리하고 나니 잘 자리가 아늑하게 마련되었다.이채련은 더 이상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어 하루 24시간을 침대 위에서 보내고 있다.얼굴도 하도 여위어 본연의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그전에도 유시아는 이채련에게 이곳에서 며칠 동안 함께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지만 이채련은 행여나 자기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흠이 생기게 될까 봐 동의하지 않았었다.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갖은 풍
임재욱은 핸들을 꼭 움켜쥐고서 앞만 바라보았으나 두 눈에는 고통과 망연함이 가득했다.“시연이 해외에 있을 때, 몹쓸 짓을 당했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나.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게 된 거야.”유시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볼륨까지 높아졌다.“어머, 어떡해요!”평소에 신시연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기는 했다.여자에게 있어서 그런 몹쓸 짓을 당한다는 건 치명적인 타격과 치욕이 아닐 수가 없다.게다가 부모님의 일까지 더해지니 조금 전 식당에서 봤던 신시연의 모습이 이해되었다.임재욱은 말하면서 후회와 자책하는 빛을 드러냈다.“그렇게 가고 싶지 않다는 시연이를 내가 억지로 보낸 거야.”그때는 모든 걸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낯선 곳으로 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학업에만 집중하면 자연스레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삶을 그려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하지만 임재욱이 잊고 있었던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신시연이 이제 갓 20살을 넘은 꽃다운 여자아이라는 것이다.해외에는 불안정 요소도 많고 미처 생각지 못하는 위험도 많다.게다가 젊은 나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릇된 길로 들어서기도 아주 위험하고 말이다.신시연 곁에 사람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24시간 동안 찰싹 달라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유시아와 결혼하고 나서 신혼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신시연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지금 임재욱은 신서현에게 미안할 뿐이다. 하나뿐인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하지만 그가 말한 본의와 달리 듣고 있는 유시아는 또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유시아의 기억으로는 신시연이 해외로 보내진 이유는 이러하다.그때 신시연은 정운시 대학교 교내 사이트에 유시아를 먹칠하는 게시글을 올리면서 유시아로 하여금 학업을 이어갈 수도 수업을 들을 수도 없게 악한 상황을 만들었었다.마침 그 일을 소현우가 알게 되면서 유시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