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몇몇 여인들의 목소리에 임재욱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돌아서서 긴 뷔페 식탁 너머로 유시아가 하얗게 변한 낯빛으로 귀부인들 사이에 같이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런데 소현우 이 개자식은 어디 갔지?임재욱은 사방을 둘러보며 소현우의 행방을 찾았다.사람을 데려다 놓기만 하면 그만이야? 저렇게 모욕당하고 있도록 내버려둔다고?그는 또 날카로운 눈동자로 채경숙의 얼굴을 깊이 들여다보다,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그녀들을 향해 걸어갔다.그러나 막 두 걸음 내디뎠을 때, 다른 편에서 소현우가 그녀들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시아야...”임재욱은 조건반사처럼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그는 소현우가 유시아를 향해 걸어가 그 여자들에게 몇 마디 하고 나서 그녀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가는 걸 보았다.이번엔 뜻밖에도 소현우가 그보다 한발 앞서 유시아를 난처한 상황에서 데리고 나왔다.임재욱은 입가에 쓴웃음을 지으며 경매장 쪽으로 돌아섰다.뷔페 행사가 끝나면 경매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임재욱의 좌석은 첫 번째 줄에 배치되었는데, 이는 또한 주최 측이 대우그룹을 매우 중시한다는 뜻이기도 하다.그는 건성으로 피켓을 몇 번 들며 경매에 참여했지만, 차츰 피켓을 드는 것조차 귀찮아졌다.매년 그가 참석한 이러한 유형의 행사는 셀 수도 없이 많고, 행사 내용도 다 거기서 거기였다.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시간을 보며 그만 떠나려고 했다.그런데 이때, 한 유니폼을 입은 웨이터가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그한테 다가와 그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임 대표님, 유시아 씨가 화장실에서 기절했습니다.”임재욱은 순간 멍해졌다. 그리고 고민할 새도 없이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로 걸어갔다.반쯤 가서 그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방금 그 웨이터의 생김새를 보려고 했으나, 그 사람이 이미 자취를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의심이 들었지만 일단 화장실로 향했다. 어쨌든 어떤 상황인지 확인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여자 화장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문밖에서부터
그 시각, 경매장에는 열기가 한창이었다.마지막 몇 점의 경매품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장내에는 환호성이 일며 마지막 하이라이트를 장식했다.이채련은 유리 덮개 안에 놓인 비취 장식품 한 점을 가리키며 소현우에게 말했다.“저건 내가 경매에 내놓은 건데 네가 한 2억 주고 다시 가져와.”이런 자리에 기부금 2억이면 체면 세우기에는 충분했다.소현우는 뭔가 뒤숭숭하여 아무렇게나 대꾸하며 고개를 돌려 화장실 방향을 돌아보았다.유시아가 화장실에 들어간 지 10분 넘었는데 나오지 않고 있었다.원래는 같이 가려고 했는데, 이채련이 자신이 기증한 경매품이 곧 나올 차례라며 그를 남아서 경매에 참여하라고 했다. 유시아도 화장실에서 화장만 고치고 나오겠다며 같이 갈 필요 없다고 했다.근데 이제 10여 분이 지났으니 화장도 다 고치고 남을 시간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그의 안절부절못한 모습에 이채련은 불만스러운 듯 그를 쳐다보며 가볍게 나무랐다.“현우야, 방금 내 말 들었어?”소현우는 이채련을 향해 건성으로 웃고는 휴대전화를 꺼내어 몰래 유시아한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시아야, 화장 다 고쳤어? 우리 경매품이 이제 곧 나올거야, 얼른 돌아와.’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그는 앞을 바라봤다.비취 장식품은 이미 경매에 들어갔고, 소현우는 이채련의 말대로 피켓을 들고 경매에 참여했다. 그러다 그는 무심코 첫 번째 줄의 좌석에 시선이 갔고, 문득 임재욱도 자리에 없음을 발견했다.오늘 임재욱을 만나게 된 것부터 뭔가 불안했던 그는 머릿속에 갑자기 안 좋은 예감이 들어, 손에 들고 있던 피켓을 내려놓고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려 했다.그때 이채련은 급히 손을 뻗어 그를 붙잡았다.“아직 우리 물건이 경매 중인데 너 어디 가려고?”“시아 좀 보러 가볼게요...”이채련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얼른 뒤쫓아갔다.“현우야, 너 거기 서!”둘은 앞뒤로 밖으로 나갔고, 이채련은 두어 걸음 바싹 다가가 소현우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굳은 안색으로 말투
“너 그 얘기 그만해!”이채련은 그녀보다 20센티는 훌쩍 넘게 큰 아들을 노려보며 사나운 목소리로 꾸짖었다.“그 일은 원래 유병철의 개인적인 선택이야, 너랑 모든 사람이랑 아무 상관 없어! 그가 돈 때문에 자신을 팔아넘겼는데 누굴 탓해. 암만 불쌍한 딸내미 홀로 남겨놨다 해도 우리가 책임질 일은 아니야!”“그러니까 전에 우리가 만나는 걸 동의하신 것도, 시아가 졸업한 후에 약혼시켜 주겠다고 하신 것도 다 엄마가 기회 봐서 떼어놓으려고 쓴 임시방편인 거네요?”소현우는 고개를 숙여 양미간을 꼬집으며 분한 듯 주먹으로 아래쪽 벽을 내리쳤다.“네, 좋아요! 엄마랑 쓸데없는 말, 인제 그만할게요. 시아는 어떻게 됐어요? 임재욱이 데려가게 했어요? 그렇게 엄마가 다 꾸민 거예요?”이채련은 입술을 꼭 다물고 고개를 돌려 외면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소현우는 초조하게 그녀를 돌아서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현우야......”이채련은 기어코 뒤쫓아가서 그의 손목을 덥석 움켜쥐었다.“그만 좀 해, 너 아직도 보기 흉하다는 생각 안 들어서 그래?”그러나 소현우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시아를 임재욱이 데려가게 할 순 없어요...”“아!”뒤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이채련의 비명소리에 놀라, 소현우는 얼른 뒤돌아봤다.이채련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한 손으로 자기 발목을 누르며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현우, 너!”여자 하나 때문에 자신을 그렇게 거칠게 뿌리치다니!평소에 온화하고 예의 바른 성격이던 아들이 엄마한테 폭력을 행사하다니!이채련은 화가 치밀어 가슴이 답답할 지경이었다.“너 정말 날 너무 실망하게 하는구나!”“엄마, 엄마 미안해요...”소현우는 다급히 이채련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제가 병원에 모셔다드릴게요.”......주차장 안에서.임재욱이 유시아를 안고 계단을 내려올 때 강석호는 한창 운전석에 앉아 잠을 자고 있었다.그러다 차 밖에서 인기척이 나자, 그는 급히 차에서 뛰
이튿날 오전, 임재욱은 회사에 있었는데, 역시나 할아버지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너 어젯밤에 뭐 하러 갔니? 내가 기부한 한나라 와당을 왜 입찰 안 했어?”임태훈은 안타까움과 불쾌함이 잔뜩 들어있는 말투로 임재욱한테 따져 물었다.“그건 내가 미국 가서 어렵게 구한 건데, 다른 사람한테 입찰 당하면 어떡해!”어젯밤이라...어젯밤만 생각하면 임재욱은 기분이 상쾌하다 못해 황홀하기까지 하다...그는 서류를 뒤적이면서 한편으로는 실실 쪼개고 있었다.“그렇게 소중한데 왜 기부를 했어요? 손에 꽉 잡고 있을 것이지?”“그만큼 희귀하고 진귀한 물건을 내놔야 우리 임씨 집안 체면이 설 거 아니야?!”잠시 멈췄다가 임태훈은 차가운 목소리로 또다시 입을 열었다.“한데 그것보다, 네가 상관없는 사람들과 일 때문에 우리 집안 체면까지 잃어버렸다는 게 더 실망스럽구나!”한나라 기와 한 덩이가 그에게 그다지 중요하진 않았다. 비싼 값에 사들이면 그만이니까.하지만, 자그마치 대우그룹 대표라는 사람이 여자 때문에 경매장에서 뛰쳐나와서는 자신이 기부한 물건조차 입찰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가 더 참을 수 없는 이유였다.예로부터 예쁜 여자는 다 화근이라 했다.그리하여 임씨 집안 남자들은 가장 먼저 배워야 할 일이 바로 자아 억제다.자신을 억제해야만 모든 약점을 숨길 수 있고 비즈니스 판에서 상승장군이 될 수 있다!“그만해요.”임재욱은 그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 제지했지만, 자신의 태도에서 뭐라도 들키게 될까 봐 아무렇게나 대꾸를 덧붙였다.“그냥 낡은 기와장이잖아요, 나중에 한 장 구해드릴게요! 난 회의 있어서 이만 끊어요. 들어가세요.”말을 마치고 임재욱은 전화를 끊었다.가죽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는 그는 섬세하고 준수한 얼굴이지만 지금은 거기에 옅은 피로가 어려 있었다.잠깐 뒤, 책상 위에 놓인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하나 이번에는 집에 있는 도우미한테서 온 전화였다.......30분이 지나서, 임재욱은 차를 몰고 그린레이크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유시아의 창백했던 얼굴에 격한 분노가 일어 불그스름하게 변해갔다.“임재욱, 당신. 어쩜 그리 파렴치할 수가 있어?!”“파렴치한 건 내가 아니지. 그렇지만 미련하다 못해 구제 불능인 건 바로 너야!”임재욱은 가볍게 웃었다.“소현우 엄마가 진짜로 널 받아들인 거 같아? 널 소현우 여자친구로, 미래의 며느리 될 사람으로 인정한 거 같냐고? 꿈 깨. 어젯밤 너한테 약을 탄 게 바로 그 사람이야. 그래 놓고 사람을 시켜 나한테 알려줬지, 널 데려가라고!”그는 이미 어젯밤에 강석호를 시켜 그한테 소식을 알린 그 웨이터를 조사하라고 했는데, 확실히 이채련의 돈을 받고 한 것이 맞다고 실토했다.그 여자는 겉으로는 너그러운 척하며 유시아가 사람들 앞에서 비웃음을 당해도 노한 기색이 없더니, 사실은 그의 손을 빌려 유시아를 치워버리려는 심산이었다.그리고 소현우는 아마 지금쯤 병원에서 그녀를 돌보며 효자 노릇을 하고 있겠지.유시아의 동공은 놀라움에 움츠러들었다.“그럴 리가... 어떻게...”그러면서도 그녀는 자신이 어제저녁 연회장에서 입 안에 넣었던 것들을 차례차례 회상했다.웨이터가 건넨 주스, 뷔페에서 가져온 간식, 그리고 이채련이 건넨 브라우니 한 조각...그럼 그 브라우니에...임재욱은 그녀의 경악하고 놀란 안색을 보며 입술을 약간 오므리며 말했다.“시아야, 왜 너 자신을 아낄 줄 몰라? 널 싫어하는 사람한테 굳이 미천하게 얼굴을 들이밀어서 뭐 해. 그건 스스로 수모를 자초하는 일이잖아.”이채련이 소현우의 옆자리를 계속 비워둘지언정 유시아는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만약 그녀가 죽을 각오로 핍박하면, 소현우도 어쩔 도리가 없을 테니까.임재욱은 괴로워서 축 처진 유시아를 바라보며 마음이 측은해져 그녀의 볼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말했다.“시아야, 소현우한테 더 이상 희망 갖지 마. 그 사람은 너한테 행복을 줄 수 없어. 왜 꼭 그 사람한테 가려고 해?”“현우 씨는 나한테 제일 잘해주는 사람이니까. 현우 씨처럼 날 대해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지만 소현우는 다르다.사랑받는 것은 언제나 누구를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다.불나방 같은 사랑은 일생에 한 번이면 충분하다.또다시 시도한다면 아마 그녀한테는 정말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게다가 그도 말했듯이 이번 일은 소현우의 어머니가 벌인 일이지, 소현우와는 관계가 없지 않은가!유시아가 여전히 상심한 모습을 하고 있자, 임재욱은 그녀가 자기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 줄 알고 다시 한번 말했다.“내 말은, 나도 소현우처럼 너한테 잘해줄 거라고. 그보다도 더 잘해주겠다고!”한 여자한테 잘해주는 게 별 대수라고.기껏해야, 좀 더 부드럽게 대해주고, 존중해 주고, 그녀의 흉터를 들추지 않고, 싫어하는 일을 강요하지 않고, 예쁜 옷과 치마를 사주는 등등...소현우가 그녀한테 했던 것처럼, 그도 얼마든지 할 수 있고, 더 잘할 수도 있다 생각했다.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남자한테 사랑받는 것과,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한테 사랑받는 것은 완전 다른 차원이다.임재욱은 그녀가 자신을 거절할 도리가 전혀 없다고 여겼다.“날, 사랑하잖아... 시아야...”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너 옛날에 나한테 시집오겠다고 큰소리쳤잖아? 그리고 너 대학교 2학년 때 침실에서 생일날 케이크에 촛불 불면서 빈 소원이 나랑 사귀는 거였잖아? 기억 안 나? 시아야, 소현우 그만 잊어, 이젠 나랑 같이 있자...”“싫어요!”유시아는 자신이 똑같은 사람한테서 두 번 넘어질 만큼 멍청하지 않다고 생각했다.그를 믿을 때마다 결과는 매우 비참했다.결혼하자고 속여서 감옥에 보내고, 기절했다고 속여 문을 열어준 대가는 자신을 괴롭히는 거였다.이 남자는 악마야.매번 그녀를 속여 독이 든 사탕을 먹게 했다. 다시는, 한마디도 믿지 않을 거야!유시아는 그를 사랑했던 예전, 그리고 미래의 자신을 전부 인정 못 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정신없이 가로 저었다.“아니에요. 난 당신 사랑하지 않아요. 다시는 당신 사랑하지 않을 거야... 놔줘요, 집에 갈래요
임재욱은 그녀의 뒷덜미를 감싸 쥐고, 그녀를 몸 밑에 가둬, 머리 숙여 그녀의 얼굴에 남아있는 눈물 자국에 입술을 맞췄다.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이.“시아야, 울지 말고, 이젠 소현우는 그만 잊어. 나랑 같이 있어, 내 곁에 와. 내가 약속할게, 너한테 잘할게, 다시는 너 안 속여...”임재욱은 소현우보다 더 잘해주겠다고만 약속했을 뿐, 끝내 그 세글자는 뱉지 않았다. 마치 그것이 그가 굳게 지키는 마지막 방어선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유시아는 그 방어선이 그가 가장 사랑하는 신서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싫어요, 재욱 씨, 제발 날 놔줘, 난 이제 다시는...”그녀의 낮고 억눌린 흐느낌 소리는 짧은 순간에 임재욱의 입속으로 삼켜졌다.그는 그녀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포개고, 손을 뻗어 그녀의 등 뒤로 가 천천히 드레스의 지퍼를 내렸다. 늘씬하고 힘센 두 다리도 그녀의 다리 사이로 한 치씩 비집고 들어갔다...날은 좀 흐렸고 제비도 낮게 날고 있었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와 밖에 있는 은행나무를 흔들어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내게 했다.유시아는 잠결에 발밑을 헛디디는 꿈을 꾸고 벌떡 눈을 떴다.여전히 그 침실, 그 침대였다. 침구에는 그 남자의 익숙한 내음이 남겨진 채... 그녀는 남자의 널따란 가운을 입고 있었고, 자신의 드레스는 온데간데없었다.손을 들어 자신의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다가 우연히 자기 왼손 약지가 텅 비어 있는 걸 보게 되었다.다이아몬드 반지가 없어졌다!소현우가 그녀에게 준 프러포즈 반지.임재욱과 싸울 때만 해도 있었는데, 갑자기 왜 사라졌지?유시아는 베개 밑과 협탁을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 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임재욱을 찾아가려고 침대에서 내려왔다.하나 남자의 가운이 너무 큰 탓에, 침대에서 내려올 때 가운 끝자락을 밟고 앞으로 털썩 무릎을 꿇으며 넘어졌다.무릎이 얼얼하게 아팠고, 그 때문에 유시아는 눈물이 찔끔 나올 거 같았다.“시아야!”임재욱은 문을 밀고 들어온 후 황급히 뛰어와 그녀를 안아 침대 위에 올려
별장 앞 잔디밭은 거의 농구장 절반 정도 크기로 매우 넓었고 정원사에 의해 정연하게 가꾸어졌다.다양한 계절의 꽃이 심겨 있는 것 외에도, 키 낮게 자란 관목숲이 우거져있었다. 여기서 작디작은 반지를 찾으려는 것은 바다에서 바늘을 찾는 격이었다.임재욱은 위층에 서서 청회색 옷을 입은 유시아가 파란 잔디밭에서 천천히 기어다니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꼭 마치 파충류 같았다.그녀는 처참한 모습으로 잔디밭에 꿇어앉아 있었다. 세심하게 한 포기의 풀마다 심지어 덤불 사이의 가지마저도 놓치지 않았다. 대개는 땅을 석 자 파려는 태도로 그 어느 구석도 놓치지 않고 찾았다.임재욱은 다소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천둥소리가 울리고 번개가 번쩍이더니 그 불빛에 어둑하던 하늘은 쫙 갈라졌다.오후부터 날씨는 계속 흐려있었다. 심한 폭우가 쏟아질 것 같았다.임재욱의 발걸음은 느려졌다. 그는 보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그런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내려다봤다.허 씨 아주머니는 이미 나가 있었다.“유 아가씨, 곧 폭우가 쏟아질 것 같습니다. 비가 그치면 다시 찾으세요.”유시아는 듣지 못한 듯 전혀 풀이 죽지 않았고 여전히 잔디밭에서 더듬으면서 찾고 있었다.그것은 현우가 선물해 준 프러포즈 반지다. 평생 기념으로 간직해야 할 정도였다.설령 그녀가 원하는 대로 소현우에게 시집가지 못할지라도, 그녀는 여전히 기억할 것이다.‘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미소를 가진 한 남자가 그녀를 부드럽게 대했었다는 것을, 아무리 그녀가 무뚝뚝하고, 감옥살이를 했었을지라도 전혀 싫어하지 않았었다는것을, 게다가 기회를 노려가며 그녀를 소유할 생각은 더더욱 하지 않았었다는것을, 그녀는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그는 처음이자 유일하게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한 남자였다.그녀는 그에게 미치도록 노력해 갔다. 비록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녀를 차버렸지만, 이 반지를 남기고 있다는 것은 그녀에게는 하나의 기념이 되고 위로가 되었다.또 천둥소리가 몇 번 울리더니 굵은 빗
늦은 밤, 유시아의 카카오톡을 받았을 때 임재욱은 병원에 있었다.신시연은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진료실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고 그동안에 임재욱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늦은 밤의 사립 병원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당직을 서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외에 거의 사람이 없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임재욱은 복도를 한참이나 누비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유시아를 병원으로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길에 신시연의 전화를 받고서 오게 된 것이다.배가 아프다고.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아프다고.신시연은 며칠 전에 병원에서 여러 번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해외에서 그러한 몹쓸 짓을 당하며 우울증과 부인병이 있는 외에 다른 수치들은 정상 범위 안에 있었다.그 말인즉슨,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재욱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신시연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임재욱 하나뿐이니 어찌 됐든 그녀를 잘 지켜야 하는 마음뿐이었다.그 누구에게도 다시는 상처를 받지 않게끔.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여 임재욱은 그녀를 직접 병원까지 데리고 오고 의사 선생님 입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확답을 듣고 나야만 마음이 놓일 수 있다.애타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렸다.유시아가 보낸 카카오톡인데,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보고 싶어요.]임재욱은 고개를 숙인 채 카톡 내용을 거듭 곱씹으며 유시아 사진으로 되어 있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자꾸 올라갔다.‘내가 보고 싶어? 별거한 지 하루 만에 벌써 내가 보고 싶은 거야?’‘우리 시아 이제 제법 솔직하네.’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어떻게 답장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응급실 문이 열렸다.도우미 김향화가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신시연을 부축하고 걸어 나왔다.신시연은 디자인이 아주 심플한 데님 스커트를 입었고 윤기가 별로 없어 보이는 머리를 돌돌 말아 묶어 올렸다.무척이나 초췌해 보이는 것이 가여운 느낌도 물씬 풍기고 있어 기고만장했던 그
유리 구두를 품속에 꼭 안고 있는 유시아를 보고서 임재욱은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참으로 달래기 쉬운 여자라는 것을.특히 결혼하고 나서 아주 살짝만 잘해주어도 유시아는 아주 오랫동안 기뻐하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늘 임재욱 앞에만 서면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자기를 낮은 위치에 놓는 데 습관 되어 있다.임재욱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뽀뽀했다.“앞으로 매년 생일마다 예쁜 유리 구두 선물해 줄게. 어때?”“좋아요.”유시아는 말하면서 아주 유치하게 그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절대 어기지 않겠다고.”백화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일단 화실로 향했다.새로 구매한 공예품을 적당한 자리에 올려놓고 유시아의 제안으로 이채련의 병원까지 바래다주었다.유시아는 자기가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타입이라 이채련과 이미 약속했으니 꼭 지켜야 했다.하물며 자식도 없는 이체련에게 마지막 이 시간들이 더더욱 외로울 것이다.외부인들이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로 외롭다.임재욱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이채련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니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보내주었다.차는 곧 사립 병원 앞에 멈춰 섰고 임재욱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유시아는 차창에 대고 거듭 강조했다.“유리 구두랑 드레스들 옷방에 고이 모셔두도록 해요. 마구 놓지 말고요.”“알았어.”임재욱은 말하고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목을 확 잡고서 찐한 키스를 남기고 나서야 순순히 놓아 주었다.“얼른 가 봐.”“조심해서 가요.”임재욱은 조수석에 앉아 한결 가벼워진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서야 시선을 거두고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가는 길에 갑자기 신시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오빠, 배가 너무 아파요.”...병실로 돌아와 보니 이채련은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침대에 멍하니 누워 재미가 일도 없는 예능 프로를 보고 있었다.유시아가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채련은 놀라고도 기뻤다.“시아야,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유시아
쇼핑은 늘 설레는 일이다.유시아는 자기 취향대로 화실 장식품으로 쓰일 공예품을 골랐다.이윽고 임재욱은 또 유시아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지난번에 두 사람은 함께 쇼핑하면서 많은 옷을 샀었지만, 신서현 부모님께 갑작스러운 상황이 일어나면서 유시아는 그 모든 옷을 모조리 청소 아주머니에게 줘 버렸다.그때의 아쉬움을 채워주기 위해 임재욱은 또다시 쇼핑하려고 한 것이다.게다가 다음 주면 대우 그룹 상장 20주년이다.정식적인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유시아를 자기 아내 신분으로 남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이브닝 파티에 어울릴만한 드레스와 신발을 살 예정이다.드레스는 그럭저럭 큰마음이 가지 않았는데, 유시아는 그 신발이 마음에 들었다.은백색의 하이힐로 예쁜 보석들로 가득 박혀 있어 매점 불빛 아래서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신데렐라 동화에 나올 법한 유리 구두 같았다.매점 직원은 유시아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고 바로 다가왔다.“손님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 이 제품은 저희 디자이너 선생님의 최신 디자인으로 지금 딱 한 켤레만 있습니다. 만약 이 신발을 신고 나가신다면...”임재욱은 갑자기 직원의 말을 끊어버렸다.“이미 결혼했고요. 이 사람은 제 아내예요.”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는데, 자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를 보고서 따라서 웃었다.“맞아요. 이 사람이 제 남편이에요.”매점 직원은 멍하니 있다가 바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베스트 쇼핑 가이드다운 실력을 드러냈다.“어머, 어쩐지 너무 어울리신다 했어요...”직원의 칭찬에 두 사람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이윽고 매점 직원은 분위기를 파악하며 유리 구두에 대해 더욱 디테일한 설명을 첨부하기 시작했다.“이 제품의 새끼 양가죽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착용감이 엄청 좋으실 거예요. 하루 종일 신고 걸으셔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게다가 우리 디자이너 선생님이 즉흥으로 만들어내신 작품이라 절대 똑같은 제품을 시중에서 보실 수 없을 거예요.”한 켤레일 뿐만 아니라 사이
한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내가 뭐?”“한서준 씨는 당당해요?”유시아는 바로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었다.“임씨 가문에 접근한 그 의도를 다른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요? 할아버지, 재욱 씨 그리고 나까지 똑똑히 알고 있어요. 청아 씨만이 한서준 씨를 사랑해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요. 그렇게 쭉 모르는 척을 하며 모든 걸 감당하고 있었던 거라고요. 한서준 씨 역시 청아 씨를 이용한 게 아닌가요?”마지막 한 마디에 한서준은 침묵하고 말았다.그렇다. 임청아에게 접근한 이유는 유시아가 ‘스파이’로 움직여 주지 않겠다고 거절했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임씨 가문 천금을 노리게 된 것이다.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 변하게 되어 있다.임청아 대한 마음은 모략에서 시작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마음이 점점 사랑으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띠고 다가왔던 임청아가 어두운 자신의 삶을 밝게 비춰주는 것만 같았다.따라서 한서준은 임청아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차츰 생기게 된 것이다.임태훈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꼭 자기 곁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청아 씨 지금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에요.”“만약 청아 씨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말을 마치고 유시아는 차 문을 밀고 차에서 내려 병원 밖으로 걸어갔다.택시에 오른 유시아는 긴 망설임 끝에 끝내는 더 스케치 화실 주소를 운전 기사에게 알렸다.차는 화실 맞은 편에 세워졌고 유시아는 화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화실 안의 상황을 바로 체크할 수 있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최적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수많은 경호원들이 임태훈을 사이에 두고 화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임태훈은 벤틀리에 올라 강한 기운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유시아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고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바로 화실로 향해 달려갔다.화실 안과 밖은 겉은
전화를 마치고 유시아는 혼자 밖에 없는 휴게실을 보고서 깊은 번뇌에 잠겼다.남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임태훈처럼 막무가내로 어처구니가 없는 노인이 있다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태훈이 끔찍이 여기는 임청아를 유시아가 계단에서 밀어버린 것도 아닌데, 왜 애꿎은 자기 화실을 닫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집안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스스로 반성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데, 그게 무엇이든 일단 남한테서 문제를 찾고 있으니, 권력을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했다.유시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고 불안함도 점점 커졌다.지금 운영하고 있는 더 스케치 화실도 용재휘가 먼저 시작한 것인데, 그와 더불어 학생들까지 모두 함께 넘겨주었는데, 만약 이대로 화실을 망쳐버린다면 용재휘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임재욱과 임태훈이 어느 정도로 얘기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화실이 그들 싸움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용기가 없어 일단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그렇게 한참이나 심장을 조이고 있었지만, 걸려 오는 전화는 없었다.유시아는 일이 어느 정도 망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학생 채팅방에 오늘 갑자기 일이 있다며 수업을 뒤로 미룬다고 알렸다.언제 다시 수업을 시작할지는 소식을 기다리라며 덧붙이기까지 했다.톡을 보내고서 유시아는 더 이상 핸드폰을 보지 않고 바로 병원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병원 대문을 나오자마자 한서준이 정면에서 오고 있었다.“유시아.”유시아는 고개를 들었고 그를 보게 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 났다.직감이 알려주건대, 절대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화실의 생존 여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심기까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한서준은 쉽사리 유시아를 놓아 주지 않았고 손을 내밀어 유시아의 손목을 꼭 잡았다.“물어볼 일이 있어.”말하면서 근처에 있는 지프차를 가리켰다.“차에 타서 얘기 하자.”“그쪽이랑 할 말
유시아는 그 말을 이어받지 않고 집사의 바람대로 타이르기 시작했다.“몸이 아직 많이 허약해요. 먹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좀 먹어야 하거든요. 일이 어찌 됐든 일단 건강부터 챙겨야 해요.”임청아 그 말을 듣고서 쓴웃음을 지었다.“건강 회복되면 할아버지한테 잡혀가서 집에 감금되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유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어찌 됐든 할아버지 마음은 한결같을 거예요. 청아 씨를 아끼고 사랑하는 거요. 서로 대화가 필요한 거 같아요. 서로 터놓고 얘기하고 나면 오해가 풀리고 마음도 풀리면서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임청아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아이 낳고 나면 할아버지도 서준이도 원한을 내려놓고 행복만 할 수 있다고요.”“근데 이렇게 몸도 아끼지 않고 점점 더 막무가내로 나가면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은 점점 더 짙어질 거예요.”유시아는 말하면서 도우미 손에서 보신탕을 가져와 천천히 불며 임청아의 입가로 가져갔다.임청아는 생각 밖으로 무척이나 순순하게 유시아의 말을 따랐고 그녀의 말에 이치가 있는 것 같아 조용히 보신탕을 받아 마셨다.도우미와 집사는 두 사람이 티키타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서서히 마음이 놓였다.임청아가 뭐라도 먹기 시작하여 자기도 모르게 한시름을 놓으며 자리까지 비켜주려고 했다.두 사람이 마음 편히 말할 수 없을까 봐 눈치껏 일어서려는 것이다.“작은 사모님, 아가씨와 천천히 얘기하고 계세요. 밖에 나가 있을 테니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시고요.”“네, 가보세요.”도우미 일행이 나오고 나서야 유시아는 본론으로 들어갔다.“한서준 씨는 알고 있어요?”임청아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그런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잖아요.”요즘 임태훈뿐만 아니라 한서준도 눈을 부라리고 임청아를 찾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자 아파트도 호텔도 들어갈 수 없었고 버려진 강아지처럼 유시아 화실에 몸을 숨기고 지낸 것
임청아 이름 석 자가 임재욱의 입에서 나오자, 유시아는 순간 청천벽력을 맞는 것만 같았다.심지어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물었다.“청아 씨가 왜 병원에 있는 거죠?”임청아는 임신한 것을 알고 매사에 조심하며 걸음 하나도 천천히 옮겼었다.게다가 해외에 있는 친구와 연락하여 해외로 떠날 준비까지 마쳤다고 했었다.그런데 관건이 되는 순간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고?“할아버지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거 아니야?”임재욱은 말하면서 차갑게 웃었다.“네 화실에 청아 숨겨 놓았잖아. 할아버지께서 그걸 과연 모르고 있었을 것 같아? 오늘 화실로 청아 데리러 갔었는데, 가지 않겠다고 청아가 하도 우기는 바람에 억지로 묶어서라도 데리고 가겠다며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거야.”그렇다면 아이를 유산했을지도 모른다.임태훈의 습관에 따라 생각해 본다면 이 화살은 결국 유시아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임재욱이 그렇게 경고하였건만 유시아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약해지는 마음에 언젠가는 구렁이에 빠지게 될 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 일 줄은 몰랐다. 임재욱은 한숨을 내쉬며 꾸짖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병원 주소 보내줄 테니 얼른 가 봐.”말을 마치고 임재욱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고 운전 기사에게 새로운 목적지를 알려주었다.같은 시각, 병원 안에서.임청아는 이미 수술을 마쳤고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이미 가문의 집사와 간호인이 옆에 있었고 병실 문 앞에는 임태훈이 보낸 경호원도 있었다.다만 경호원이 경계해야 할 상대는 유시아가 아니라 한서준이다.따라서 유시아는 별다른 막힘없이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상에 누워 있는 임청아는 얼굴에 핏기 하나 없었고 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불과 하룻밤 사이에 모든 활력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집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주 공손하게 유시아에
조금 전까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던 임재욱은 멈칫거리고 말았다.이윽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유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별거하자는 뜻이야?”“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유시아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머리가 아픈 듯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그 시간으로 시연이한테 집중해도 되잖아요. 나도 마침 어머님 곁에 좀 있어드리고... 서로에게 지금 이게 최우선인 것 같아요.”임재욱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서 낙담한 모습으로 말했다.“그래. 네가 좋다고 하면 그게 좋은 거겠지. 그렇게 하자.”말을 마치고 그는 계속 밥을 먹었다.유시아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서 아련하게 웃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이튿날 아침, 유시아는 임재욱이 출근하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일상복 몇 벌과 일상용품을 챙겨 작은 트렁크 안에 놓고 바로 이채련한테 가려고 했다.허씨 아주머니는 트렁크를 들고 내려오는 유시아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사모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설마... 가출하려는 건 아니죠?”유시아는 허씨 아주머니를 향해 웃었다.“아니에요. 친척분이 좀 위독하신데 제가 옆에서 좀 챙겨드리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얼마 걸리지 않을 거고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트렁크를 들고서 집을 나섰다.이채련이 지내고 있는 병실이 VIP 병실로 널찍한 객실까지 갖춰져 있다.유시아는 간호사에게 접이식 침대와 이불을 요구했고 간단히 정리하고 나니 잘 자리가 아늑하게 마련되었다.이채련은 더 이상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어 하루 24시간을 침대 위에서 보내고 있다.얼굴도 하도 여위어 본연의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그전에도 유시아는 이채련에게 이곳에서 며칠 동안 함께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지만 이채련은 행여나 자기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흠이 생기게 될까 봐 동의하지 않았었다.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갖은 풍
임재욱은 핸들을 꼭 움켜쥐고서 앞만 바라보았으나 두 눈에는 고통과 망연함이 가득했다.“시연이 해외에 있을 때, 몹쓸 짓을 당했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나.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게 된 거야.”유시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볼륨까지 높아졌다.“어머, 어떡해요!”평소에 신시연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기는 했다.여자에게 있어서 그런 몹쓸 짓을 당한다는 건 치명적인 타격과 치욕이 아닐 수가 없다.게다가 부모님의 일까지 더해지니 조금 전 식당에서 봤던 신시연의 모습이 이해되었다.임재욱은 말하면서 후회와 자책하는 빛을 드러냈다.“그렇게 가고 싶지 않다는 시연이를 내가 억지로 보낸 거야.”그때는 모든 걸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낯선 곳으로 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학업에만 집중하면 자연스레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삶을 그려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하지만 임재욱이 잊고 있었던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신시연이 이제 갓 20살을 넘은 꽃다운 여자아이라는 것이다.해외에는 불안정 요소도 많고 미처 생각지 못하는 위험도 많다.게다가 젊은 나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릇된 길로 들어서기도 아주 위험하고 말이다.신시연 곁에 사람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24시간 동안 찰싹 달라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유시아와 결혼하고 나서 신혼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신시연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지금 임재욱은 신서현에게 미안할 뿐이다. 하나뿐인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하지만 그가 말한 본의와 달리 듣고 있는 유시아는 또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유시아의 기억으로는 신시연이 해외로 보내진 이유는 이러하다.그때 신시연은 정운시 대학교 교내 사이트에 유시아를 먹칠하는 게시글을 올리면서 유시아로 하여금 학업을 이어갈 수도 수업을 들을 수도 없게 악한 상황을 만들었었다.마침 그 일을 소현우가 알게 되면서 유시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