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관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이석은 그만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두 다리가 저리고 아파 힘마저 풀린 것이다. 완전히 기진맥진해진 그녀는 온갖 고통을 다 겪은 듯해 보였다.송석석이 그녀를 서둘러 일으키자, 이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서, 어서 저를 그에게 데려가 주세요." 그녀를 힘들게 한 것은 멀미가 아니었다. 마차의 흔들림도 아니었다. 장문수에 대한 걱정으로 그녀는 조금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송석석이 이석을 부축해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사여묵이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부부는 시선이 마주쳤고, 사여묵은 송석석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 끄덕임은 장문수가 아직 살아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송석석은 안도하며 그를 한 번 더 바라보았다. 그는 며칠 사이 더 야위어 있었다. 송석석이 이석을 부축해 계단을 올라 객실 문 앞에 이르자, 모두가 자연스럽게 길을 터 주었다. 문 앞에 다다른 이석은 침대에 누워 있는 이를 보았다. 그녀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곧이어 눈물이 그녀의 시야를 가리더니 볼을 타고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모두들 그녀가 계속 눈물을 흘릴것이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녀는 이내 감정을 추슬렀다. 눈물을 닦아낸 그녀는 애써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남편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침대 옆에 앉아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며칠간의 치료로 얼굴의 상처는 대부분 부기가 빠졌으나, 여전히 멍이 남아 있었다. 다행히 입가와 눈가의 상처는 이미 아문 상태였다.원래부터 피부색이 어두운 데다 빨간 약물을 여기저기 바르고 있었고 입술까지 시퍼렇게 변해버린 그의 얼굴은 보기 힘들 정도였다.마음이 통했던지, 계속해서 혼수 상태에 빠져 있던 장문수가 드디어 깨어났다. 눈을 뜬 그는 초점을 맞추지 못했다. 천천히 눈동자를 굴리던 그는 곧 무언가에 이끌린 듯 이석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박였고, 그녀의 손이 얼굴을 어루만졌을 때, 그녀가 진짜로 자신의
사여묵은 고개를 저으며 약간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치석은 한 사람이 아니고 방시원도 아니오. 그들은 열한 명이오… 헌데 저 사람은 대체 누구요?" 그는 밖에 있는 말이 계속 돌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말 위에 사람이 엎드려 있었고, 머리가 헝클어져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자 송석석이 화들짝 놀라며 급히 달려갔다. "아, 시만자! 오는 내내 아파했는데.. 제가 깜빡 잊었어요." 송석석은 조심스럽게 사만자를 부축해 말에서 내렸다. 시만자는 이석처럼 비틀거리며 거의 바닥에 쓰러질뻔하면서도 입으로는 불평을 쏟아냈다. "냉정한 자식, 내가 너와 함께 이 먼 길을 왔건만, 감히 나를 잊어? 내가 나으면 너부터 단단히 혼내줄 거야!" 기운이 다 빠져버린 그녀가 송석석의 어깨에 기대자 송석석은 급히 사과했다."내 잘못이야. 미안해.. 얼른 안으로 들어가 쉬어. 난 이석부인이 되도록 빨리 장문수를 보게 하려고 서두르다보니 그랬어." 그러자 시만자가 꾸짖을 겨를도 없이 물었다. "지금 어때? 괜찮아? 그 부부가 재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안 되겠어. 장군은 부상을 입었고 난 병이 난 몸이라 들어갈 수 없어." "상태는 좋지 않아. 그러나 단신의가 그를 살릴 것이라 믿어. 너는 어서 들어가 쉬어. 눈 좀 붙이면 좀 나아질 거야." 송석석은 다시 사여묵을 보며 말했다. "난이를 불러 주세요." 시만자는 빈방에 눕혀졌다. 그녀는 너무 지쳤기에 난이가 맥을 짚고 약을 처방하는 동안 이미 깊이 잠들어 버렸다. 오는 내내 그녀는 몹시 답답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은 튼튼해서 작은 병조차 없었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 몸이 말썽이었기 때문이다. 적염문 체면이 그야말로 말이 아니었다.약이 다 완성되어 송석석은 그녀를 깨워 약을 먹였다. 몸을 일으킨 시만자가 약을 꿀꺽꿀꺽 마시고는 물었다. "장문수 상태는 어때?" "단신의께 여쭤보니, 점점 나아지는 중이라고 했어. 특히 이석이 온 뒤로는 눈에 띄게 좋아졌대." 시만자는
그리고 한참 뒤, 장태가 물었다. "그럼 제 아내는 어찌 되었습니까?" 그와 군에 출정하여 결혼한 지 반년밖에 되지 않아 아내와 이별했다.시만자는 장씨 가문의 셋째에 대해 알고 있었기에, 안타까운 듯한 어조로 천천히 답했다. "재혼하였습니다." 장태는 실망을 감추지 못했지만,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결국 한마디 더 물었다. "잘 지내고 있습니까?" 시만자는 고개를 저었다."그건 모르겠습니다." 장태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맺혔다. "내가 그녀를 망쳤습니다. 그녀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 뿐입니다." 노홍도 슬픈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제 아내도 혹시.." 노홍의 아버지는 송회안 밑에 있던 장군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남강 전장에 참전했으나 아버지는 먼저 전사했고 그 뒤에 그는 포로로 잡혔다. 시만자는 노씨 가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홍시도 보고한 적 없었다.반면 송석석은 이에 대해 잘 알고 있어 말할 수 있었다. "그대 아내는 두 해 전에 큰 병에 걸렸었으나, 단신의가 치료하여 나았습니다. 그러나 그대 어머니께서는 남편과 아들을 잇달아 잃은 충격에 그만 정신이 흐려졌지요. 지금은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더 자세한 건 금이에게 물어보세요. 그녀가 치료하고 있습니다." 노홍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한참동안 깊은 슬픔에 잠겼다. 그러자 제방도 더는 묻지 않았다. 그는 형으로부터 이미 약혼녀가 과부로 남아 집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안심할 수 있었다. 왕두와 왕오는 수주 출신이었으므로, 그들 역시 가만히 있었다. 그들은 진성으로 함께 돌아간 뒤 수주로 향할 계획이었다. 노아금은 아직 혼인하지 않았기에 가족에 대해 물었고 시만자는 모두 무사하다고 답하자 마음이 한결 놓였다.그는 사촌 형, 방시원을 바라보았다. 방시원은 얼굴빛이 너무 어두워진 것을 눈치챈 그가 다가가 위로했다. "형, 형수가 재혼한 것은 어쩌면 잘된 일입니다. 우리가 가족에게 죄를 지은 것이니, 그들을 원망
혜태비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곧이어 숙청제도 도착하였다. 그가 무릎 꿇어 문안 인사를 올리자마자 태후가 그에게 편지를 건넸다. "석석이가 어젯밤 출성을 하였다. 그러면서 특별히 네 이모님께 궁으로 가서 보고드리라 부탁한 것 같구나." 숙청제가 편지를 한 번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가 한밤중에 성을 나섰다면 틀림없이 긴급한 일이 있겠지요. 모든 일을 굳이 저에게 알릴 필요는 없습니다." "여자는 그녀가 한밤중에 부지휘사 명패를 가지고 출경하였다. 그래서 너에게 알려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숙청제은 얼굴에 약간의 걱정이 담겨 있었다. "장문수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알고 보니 치석은 그였던 것이다! 선평후부는 군후세가로서, 지난 세월 동안 자손 중 많은 이들이 무를 버리고 문을 택해 벼슬길로 들어섰으나, 그래도 군후의 존엄과 강인함을 계승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를 바라보던 태후가 무언가 말을 하려 했으나, 결국 그 말을 삼켰다. 어떤 것은 오히려 아들의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한편, 왕표의 첫 번째 상소가 승상대에 도착했다. 그는 북명왕이 시몬에 도착한 후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보고했다. 목 승상은 이 상소를 눌러두었다. 그는 북명왕이 시몬에 간 이유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북명왕은 협상하러 간 것이 아니라 사람을 구하러 간 것이었다.며칠 뒤, 왕표는 또 하나의 상소를 올렸고, 목 승상이 그 상소를 들고 감격해하며 바로 숙청제를 찾아갔다. 상소를 읽던 숙청제도 감격에 겨운 듯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열한 명이라니! 열한 명이 모두 시몬으로 무사히 돌아왔구나!" 목 승상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렇사옵니다. 이는 전하의 덕분이옵니다. 그들이 드디어 모두 무사히 시몬으로 돌아왔사옵니다." "포상하라! 꼭 크게 포상하여라!" 숙청제는 기쁜 나머지 즉시 명을 내렸다. "오대반, 예부상서와 좌우시랑을 부르도록 하라. 영웅들을 거하게 환영하라.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진상서는 목 승상을 후당으로 모시고 와 직접 차를 대접하였다. 눈을 가늘게 뜨며 웃고 있는 목 승상에 진상서는 긴장이 조금 풀렸다. "승상께서는 어인 일로 이곳까지 오신 것입니까?" "축하 할 일이 있습니다." 목 승상은 차잔을 내려놓고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빨리 전해주는 것이 좋겠으나, 너무 큰 기쁨이었기에 진상서가 견딜 수 있을지 염려되었다.하여 그는 속도를 늦추기로 했다."축하말입니까? 저에게 축하할 일이 있나요?" 진상서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는 이미 예부상서를 맡고 있었기에 더 이상의 승진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감히 여쭙건대, 승상께서 말씀하시는 기쁨이란 무엇이옵니까?" 목 승상이 답했다."잃었던 것을 되찾은 것입니다." 하지만 진상서는 더욱 의아해했다."잃었던 것을 되찾았다니요? 저는 최근에 잃어버린 물건이 없었사옵니다." "전하께서 명을 내리셨습니다. 예부에서 남강 전쟁의 영웅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하였고 그 영웅들 중 두 명이 바로 그대 진씨 가문의 자손입니다." 그러자 진상서의 가슴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얼굴빛이 급변한 그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천천히 물었다. "그... 그럼, 제 두 자식의 유골을 찾았단 말씀입니까?" 목 승상이 그를 한 번 쳐다보더니 말했다. "유골이라니요? 그들은 살아 있습니다! 진씨 가문의 두 도련님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북명왕이 그들을 사국에서 구했습니다. 그들은 포로로 잡힌 후 탈출하여 치석이라는 정탐조를 조직하여 남강에 정보를 전했던 영웅들입니다." 가슴을 움켜잡고 고개를 젓고 있는 진상서는 눈에 눈물이 맺혔다. "아닙니다, 승상. 이런 농은 하지 마시옵소서. 그들은 이미 전사하였습니다. 그들을 잃은 아픔은 살을 도려낸 정도이니 다시는..." 자리에서 일어선 목 승상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더니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대단합니다! 저도 그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치석 정탐조 전체가 자랑스러운 영웅들
같은 시각, 평서백부 최씨는 왕표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를 읽고 난 그녀는 곧바로 자신의 어머니와 왕준 부부를 찾았다. 왕준은 왕표의 친동생으로, 공부에서 낭중으로 재직 중이었다. 나쁘지 않은 자리긴 하지만 낭중 자리에만 4년째 머무르며 승진은 하지 못했다.왕준의 아내 남희는 상인의 딸로, 높은 혼처에 시집온 셈이었다. 예전부터 왕청여는 이 둘째 올케 몸에 밴 상인의 냄새 때문에 그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편지를 읽고 난 평서백노부인의 얼굴빛이 급히 변했다. "사위가 아직 살아 있단 말이냐? 그것도 공을 세웠다고? 이게..." 최 씨가 말했다. "어머니, 이제는 사위라 부르시면 안 됩니다." 노부인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가 실수했구나. 그가 살아 돌아올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느냐?" 왕준도 편지를 보았다."어머니, 형수님, 이건 좋은 일입니다.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기뻐할 일이지요." 하지만 최 씨의 얼굴에는 측은한 빛이 어렸다. "시원이 전사했을 때, 어머님께서... 아, 저도 자꾸 말실수를 하는군요. 방씨 가문의 이 노부인께서는 자식을 잃은 슬픔으로 여러 번 기절하셨습니다. 이제 시원이가 살았으니 그 기쁨에 병도 다 나을 것 같군요." 노부인은 방시원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자신도 오 씨와 함께 오래동안 슬퍼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 누구와도 방시원을 비교한 적 없었다. 방시원은 강직했고, 모든 장모들에게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는 사위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으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최 씨가 다시 입을 열었다."제가 어머님께 이 소식을 알린 것은, 셋째 아가씨가 언젠가는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니, 차라리 날을 잡아 집으로 불러 말씀을 나누는 것이 좋을 듯 해서입니다." 최 씨는 이 시동생의 처지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혼수로 함께 간 시녀가 내막을 알고 있었던 터라 장군부의 사정을
실낱같은 비가 며칠째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마차에서 내려 멍하니 걸음을 옮기던 왕청여는 그만 웅덩이에 발이 빠져 비단 자수 신발이 흠뻑 젖고 말았다. “부인!” 얼마 전에 사들인 하녀 홍이가 외쳤다. 그녀는 아직 예의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상태였다. “송구하옵니다, 소녀가 잘 받쳐 드리지 못하였나이다.” 왕청여는 홍이의 손을 뿌리치며 호통을 쳤다. “그냥 따라오면 된다.” 홍이는 허둥지둥하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아직 가문에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예의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장군부에 비해 훨씬 화려한 평서백부에 홍이는 이곳저곳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왕청여는 홍아의 무례한 행동에 불쾌한 심기를 드러냈다. “바짝 따라오지 않고 무엇을 그렇게 두리번거리는 것이냐?” 그때, 노부인 곁의 유모가 미소를 띤 얼굴로 그들을 맞았다.“아씨, 하녀에 노여워 마시옵소서. 예는 천천히 가르치면 되는 것이니, 부디 기품을 잃지 마시옵소서.” 그 말에 살짝 머리를 정돈하는 왕청여는 그것이 성급하게 굴지 말라는 충고임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녀를 교양 없는 사람으로 오해할까 봐 우려했던 것이다.그러나 장군부에서는 기품만으로는 살아남기 힘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왜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지 알 수 없었다. 체면을 잃고도 자각하지 못한 채, 매일 미칠 듯한 상태로 지내고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어디에 계신가?” “존선당에 계십니다. 노비를 안내하겠습니다.” “존선당?” 왕청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곳은 형수가 글을 쓰며 마음을 가다듬던 곳이었다. 지난번 은을 받은 이후로 형수와 더는 사적으로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께서 나를 부르시지 않았느냐?” “그렇사옵니다. 노부인께서는 존선당에 계십니다.” “어머니도 함께 계신가?” “그렇사옵니다. 노부인과 부인, 그리고 이 부인도 함께 계십니다.” 왕청여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 “남희도 함께 있단 말이냐? 도대체 무슨 일이냐?” “백작께서
모녀의 대화를 잠시 듣고 있던 최 씨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아가씨를 부른 것은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방시원이 전사했을 때, 방씨 가문에서 이혼서를 주었고 아가씨가 친정으로 돌아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요. 둘 사이에 자식도 없었으니, 방씨 가문에서도 아가씨를 평생 붙잡아 두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친정으로 돌아오기 전 아가씨는 이생에 절대 재혼이란 없을 거라고 했지요. 그래서 방씨 가문에서 방시원의 위로금과 두 가게를 너에게 내어준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아가씨께서는 이미 재혼하셨으니, 제가 생각건대, 우리도 그 위로금을 돌려주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두 가게도 은전으로 환산하여 돌려주어야 합니다. 아가씨 생각은 어떤지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그녀는 형수의 말에 무심결에 고개를 저었다."왜 돌려주어야 합니까? 전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 아직 살아있다면 왜 소식을 전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제가 비록 친정으로 돌아갔지만 몇 년이나 홀몸이었고 그러던 중 재가한 것이옵니다." "은전은 아가씨께서 낼 필요 없습니다. 어머니와 제가 아가씨를 대신해 보탤 것입니다." 최 씨는 목소리를 높이며 덧붙였다. "하지만 아가씨도 성의를 보여야 합니따. 이 일은 나와 어머니만 나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제가 뭘 어떻게 하란 말씀입니까? 저는 이미 전씨 가문의 여인이 되었고. 게다가 저는 그를 수년 동안 지켰습니다..." 그러자 최 씨가 얼굴을 굳혔다."됐습니다. 이런 말은 더 이상 하지 마세요. 그를 위해 수년을 지켰다고요? 그가 죽고 한 달도 되지 않아 친정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면서도 방시원을 위해 지켰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까? 그동안 남자들을 만났지만, 마음에 드는 정혼자를 찾지 못한 거겠지요. 혼사를 서두르는 것을 남들은 모를지 몰라도, 우리는 알고 있는 일입니다." 왕청여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그러면 제가 평생 그를 지켜야 한다는 말입니까? 남자는 아내를 잃으면 재혼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남자
시만자는 원래 그들의 몸에 더 많은 구멍을 뚫어줄까도 생각했으나 보주의 말을 듣고 멈추기로 했다. 몇 번 더 찌른다면 피가 너무 빨리 흘러 그들이 너무 쉽게 죽을수도 있어서였다.송석석은 조상 묘지 앞의 작은 사당에서 향을 가져와 불을 붙여 향로에 꽂았다. 그러고는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무릎을 꿇고 세 번 큰절을 올렸다. 그녀는 절을 올리면서 먼저 떠난 가족들이 저세상에서 이 장면을 보고 있을 것이라 믿었다.사여묵 역시 향을 피우고는 그녀 옆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잡았는데, 송석석이 이미 눈물범벅이 되어 있어 그는 더욱 마음이 아팠다. 사여묵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범인이 이미 처형되었으니 장모님도 저세상에서 이제는 편히 쉴 수 있을 것이오.”송석석은 그들이 정말로 안식을 얻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비록 복수는 했지만 마음속 고통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강해지고 행복해져야만 그들에게 진정한 위로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서경의 두 정탐꾼은 아직 죽지 않았으나 과다 출혈로 의식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들은 서경 말로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송석석과 시만자 등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고 오직 사여묵만이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바로 “송구하다”라는 말이었다.그들 역시 자신의 잘못을 알지만 단지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었는데, 이제 죽음을 앞두고 있으니 그동안 저지른 일들이 하나하나 떠오르는듯 했다. 송구하다는 말이야말로 그들이 이 묘지 앞에서 비로소 할 말이었다.사여묵이 송석석과 보주에게 전했다. “이자들이 송구스럽다고 말하는구나.”보주는 여태 애써 눈물을 참고 있었는데, 사여묵의 말을 듣자마자 결국 눈물을 터뜨리며 시만자의 품에 와락 안겼다.“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송구스럽다고 해서 이 모든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보주는 목이 찢어질 듯한 울음을 터뜨리며 외쳤다. 단지 송구하다는 말로 모든 죄
일행은 이상서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고 송석석은 내내 보주의 손을 놓지 않았다.그리고 곧 두 명의 서경 정탐이 끌려 나왔는데 그들의 옷은 이미 너덜너덜해지고 피가 묻어있었으며, 얼굴은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부어 있었다. 그들은 땅에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몸이 앞쪽으로 쏠려 거의 넘어져 엎어질 지경이었다.보주는 눈에 핏대를 세운 채 그런 그들을 노려보았다.그녀와 송석석은 단 하루도 진북후부의 멸문에 대한 복수를 잊은 적이 없었다.이제 대세는 정해졌고 그녀도 마침내 가족과 송 부인 등에게 복수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그녀의 가슴 속에 있던 슬픔과 분노는 산을 무너뜨릴 듯한 기세로 솟구쳐 나왔다.보주는 당장 달려가 주먹과 발길질을 퍼붓고 싶었으나 이상서 앞에서 무례하게 굴어 왕야와 아씨의 얼굴을 깎아내릴 수 없었다.이대인이 말했다. “이 두 정탐은 형부에 보내졌을 때까지도 죽음을 각오한 듯 오만한 태도였습니다. 하관이 직접 고문을 한 것은 아니지만, 일부 사람들이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뺨을 몇 대 때렸습니다. 그들의 몸에 난 상처도 이미 잡혀 올 때부터 있었습니다.”그러자 사여묵은 평 사저의 말이 떠올랐다. 그들은 역시나 심하게 맞은 후 여기에 데려온 것이다.사여묵은 가볍게 허리를 굽히고는, 몽동이에게 그들을 데리고 송가의 조상 묘지에 가라고 지시했다.바람에 흔들리는 등불이 그림자를 드리워 날은 앞길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몽동이는 그들을 마차 앞에 묶고 말을 몰았다. 그러던중 송가의 멸문이 떠올릴 때면 그들에게 채찍을 휘둘렀다.송가 조상 묘지 앞에 도착하자, 몽동이는 발로 그들을 묘지 앞으로 걷어찼다.보주도 그들 앞으로 달려가 주먹과 발길질을 퍼부었다. 둥글게 말아 쥔 손바닥이 뺨에 연달아 떨어졌으나 마음속의 분노와 슬픔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모두 그녀를 막지 않았고 그녀가 분노를 표출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언제나 사랑스럽고 순진했던 그녀가 이토록 광기에 휩싸인 모습을 보이자 사람들은 마음 깊
서경 사절들이 경성을 떠난 후, 숙청제는 소 대장군과 전북망에게도 죄를 내렸다.소 대장군은 군 기강을 엄격히 다루지 못한 책임이 있었으나 장기간 성릉관을 지키며 노고가 많았던 점과, 전북망과 이방이 녹분성으로 출정했을 당시 그가 여전히 생사를 오가는 상황이었던 점을 감안해서 성릉관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도록 했다.또한 어명을 내려 소삼야를 성릉관 총병으로 임명하고 소팔야를 부총병으로 임명하였으며 국경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이상 성릉관에는 소씨 가문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천명하였다.소승은 마침내 소부에서 나와 입궐하여 숙청제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그의 가족들은 모두 성릉관에 있었기에 파직을 당한 후에도 당연히 성릉관으로 돌아가야 했다. 총지휘관의 자리는 내려놓았으나 그동안의 공로는 영예를 받지 못했음에도 그는 후회가 없었다. 애초에 그가 추구한 것도 이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전북망 역시 동일한 죄에 처할 뻔했으나 서경에서의 협상 중 중요한 제보를 한 공로를 인정받아 현철군 부사령관으로 강등되었고 3년간 녹동이 삭감하게 했으며, 오월을 정사령관으로 승진시켰다. 더불어 숙청제는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 북명황실이 서경의 두 정탐조 모두 사적으로 처단할 수 있도록 했다.사여묵은 송석석의 의견을 묻기 위해 돌아갔다. 그녀가 직접 처리할지 아니면 형부에 맡길지를 결정하기 위해서였다.송석석은 보주를 불러 의견을 물었다. 이방은 송가를 멸문시킨 주범이었지만 그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것은 서경의 정탐조들이기 때문이었다.보주는 한 번도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어 사여묵과 송석석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이를 악물며 말했다. “소인은 그들이 죽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습니다. 송가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그러자 송석석은 심장이 찔리듯 아파왔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좋다, 널 데려가겠다!”그녀도 한때는 망설였었다. 직접 그들을 죽이기도 싫었고 심지어 그들을 보는 것조차 싫었다. 그들을 보면, 미친 듯이 본가로 달려갔던 날 목격한
이러한 결과는 두 나라 모두에게 이익이었다. 장공주는 돌아가면 많은 일을 준비해야 했기에 국경 문제에서는 절대 물러설 수 없었다. 만약 물러선다면 그녀가 하려는 일은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고 백성들의 지지도 얻지 못할 것이다.조약 서명 다음 날, 서경 사절들이 황제에게 작별 인사를 올리러 궁에 들어왔다. 숙청제는 그들에게 송별연을 베풀 생각이었으나, 장공주는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즉시 출발 의사를 밝혔고 그도 이를 받아들였다.형부는 이미 이방을 죄수 수레에 태워 회동관으로 보냈는데, 소승이 보이지 않자 서서히 불안에 휩싸여 크게 소리쳤다. “왜 나 혼자인 것이냐! 소승은? 소승도 책임을 져야하지 않겠느냐?” 감랑중은 서둘러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수란석과 함께 인계했다.서경 사절들은 진성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이방을 보게 되었는데 그들의 눈에는 분노의 불길이 가득해 당장이라도 이방을 태워버릴 듯했다.이방은 수레 안에서 몸부림치며 전북망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회동관 밖에는 길게 늘어선 행렬과 경위대, 그리고 송석석과 사여묵도 있었으나 전북망은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소리칠 수도 몸부림칠 수도 없었고 수레 안에서 머리조차 제대로 내밀 수 없었다. 앉아도 서기도 불편한 이 죄수 수레는 마치 옛날에 그녀가 경역을 쇠창살에 가둬놓고 활로 괴롭히던 때 같았다. 그 당시는 통쾌했지만 이제는 두려움만이 가득차 버렸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송석석은 오늘 일부러 보주를 데리고 왔다. 두 여인은 죄수 수레에서 다섯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이방의 두려움과 혼란을 똑똑히 바라보았다. 보주는 이방을 국공부로 끌고 가서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이방은 이제 서경의 죄인이었기에 그녀가 직접 복수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눈에는 그저 이방을 향한 증오와 피 같은 눈물만이 맺혀 있었다.“아씨, 저 계집을 한 대 때려도 되겠습니까? 저는 힘이 약해서 심하게 때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냉옥 장공주께 말씀 좀 전해주실 수 있겠습니까?”송석석은 보주가 이 한 대
송석석은 단 백부의 말에는 뭔가 의미심장한 뜻이 담긴 듯해 잠시 당황했다. 장공주가 그녀를 바라보자 송석석은 담담한 표정으로 장공주의 눈을 마주 보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평온하게 행동했다.단 백부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었기에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장공주의 속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일 것이다. 단신의가 약을 남기고 떠나려 하자 장공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예를 갖춰 인사했다.“신의님께 감사드립니다. 상국에 다시 오실 기회가 있으면 반드시 성의를 다해 보답하겠습니다.”왠지 모르게 장공주는 그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송석석은 단신의를 부축하고 청작은 약상자를 메고 각자 갈 길을 갔다. 장공주는 자리에 앉아 금태의가 약병을 열어 검토하는 것을 바라보았으나 시선은 이미 흐려진 상태였다. ‘의사는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치유하는 사람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단신의는 그녀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었다. 여인이 큰 뜻을 품는 것을 남성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 여기지 않고 평등한 관점에서 바라본 듯했다. 그것은 장공주가 오랫동안 추구해 온 바였다.모든 남성이 그녀의 뜻을 반대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에 장공주는 깊이 감동했다. 갓 생겨난 이 생각에 대한 지지와 인정은 그녀에게는 마음을 어루만지는 약과도 같았다.송석석은 단신의를 약왕당에 직접 모셔다 드리기로 했다. 마차 안에서 단신의는 한참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경이 변화하면 더 나아질 것이야.”송석석은 그의 숨겨진 뜻을 이해해 장공주의 길이 험난할 것임을 짐작하고 조용히 마음속으로 그녀를 응원했다. 만약 그녀가 황제가 된다면 상국과의 문제도 평화로운 협상을 통해 해결할 수 있어 전쟁도 일어나지 않기에 양국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오후가 되자 협상이 다시 시작되었다. 사전 통보를 받은 사여묵은 곧바로 홍려사로 향했고 이후 궁으로 들어가 상국에 대한 서경의 보상안을 황제로부터 허락받아 협상장으로 돌아갔다. 서경 측에서는 수란석과
다음 날 아침이 밝자 안운여는 송석석을 찾아가 단신의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한편 고공은 홍려사로 향했고 협상은 오후에 다시 시작될 예정이었다. 단신의는 장공주가 자기를 초대하러 올 것을 예상하고 일찍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송석석이 도착했을 때 단신의는 이미 마차를 준비했고 송석석이 입을 열기도 전에 청작에게 약상자를 준비시키며 말했다. “회동관이라 했느냐?”송석석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백부님, 다 알고 계셨습니까?”“장공주의 두통이 심하니 내가 아니면 남은 협상도 무사히 마치기 어렵다. 돌아가서 필요한 일들을 처리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단신의는 자기 의술에 대해 여전히 확신을 갖고 있었다.송석석은 그와 함께 마차에 오르며 물었다. “장공주의 두통은 어찌 생긴 겁니까? 혹시 편두통입니까?”“편두통도 일부 원인이지. 맥을 짚어보면 장공주의 편두통은 오랫동안 지속된 것으로 아주 심각하더군. 또 오랫동안 책상에 엎드려 일하다 보니 목뼈가 변형되고 혈기가 머리로 공급되지 않아 혈액이 막혀 있는 상태이다. 어젯밤 금태의의 진단이 틀린 건 아니지만 그 향이 잠깐만 막힌 혈을 통하게 했을 뿐이기에 약효가 떨어지면 다시 두통이 시작될 것이다.”“금태의가 정말 이 문제를 몰랐을까요? 수년 동안 치료했는데도 크게 나아지지 않은 이유가 뭘까요?”“침술로는 증상이 호전될 수 있다. 금태의도 공을 들였겠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거지. 게다가 장공주는 무리한 일로 상태가 이미 악화됐으니,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목숨까지 위태로울 수 있다.”단신의는 약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 “일찍이 청작에게 1년 치 약을 준비해 오게 했다. 장공주가 나를 믿는다면 충분히 회복될 수 있다.”송석석은 고개를 끄덕이곤 현재 두 나라의 상황을 떠올렸다. 장공주가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다면 상국에도 절대 좋은 일이 아니었다.회동관에 도착하자 단신의와 청작은 안으로 들어갔고 송석석은 밖에서 대기하고, 곧 필명이 교대를 하러 올 것이기에 단신의가 진료를 마치면
서경은 이번에 조건을 낮춰서라도 협상을 조속히 성사시키려 할 것이며, 가장 가능성 높은 방안은 국경선 문제를 양보하거나 잠정적으로 논의에서 제외하는 것이라고 다들 의견을 모았다.염구진이 말했다. "연왕의 여러 차례 계략이 모두 실패한 걸 보면 지금 그가 아주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게 분명합니다. 아마 인맥 대부분도 이제는 사온이 장악하고 있을 테니 사온이 몰락하면 연왕은 정말로 진성에서 손발이 묶인 상황이 될 것입니다."연왕부는 지금 염구진의 말처럼 정말로 속수무책인 상황이었다. 무상은 여러 번이고 회왕과 숨겨둔 다른 인맥을 이용했지만 이제 거의 모두 뿌리째 뽑힌 상태였으며 또 다시 열 명 이상의 사사를 잃고 말았다.그들은 회동관의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단신의가 회동관에 들어간 사실만으로도 이미 계획이 실패했음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장공주가 혼수 상태에 빠졌을 때도 구혼선충의 모충은 장공주의 몸속 유충을 제어할 수 없으니 이제 계획이 성공하기는 어려울 것임을 알게 되었다.무상은 비록 실망했지만 냉옥 장공주의 강인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혼선충의 조종을 이겨내는 일은 매우 어려운데 무공이 뛰어나고 의지가 강한 사내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오직 한 사람만이 구혼선충의 조종을 버텨낼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비범한 신분과 남다른 강인함을 가진 인물이었다.무상은 이번 상대가 강력한 인물임을 깨닫고 본인의 패배를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냉옥 장공주가 있는 한 서경은 상국과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정원제가 즉위한 후 여러 계획을 세우며 여론을 조성했으나 결국 모두 역풍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그는 원래 황위에 관심이 없었고 그의 마음속에는 선황태자가 가장 중요합니다. 가문과 나라는 그 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여 우리와 동맹을 맺기를 원했지만 이 동맹은 그의 야망에 기반한 것이 아닌 허상에 불과합니다. 동맹이 무너진다면 우리도 연루될 가능성이 높으니 정원제에게 기대를 걸 수는 없습니
향병의 행동에 장공주는 결심을 더욱 굳히고 그들을 불러 모았다. 그러고는 겉옷을 걸친 채로 의자에 앉아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내일 오후에 다시 협상을 재개할 것이니, 조건은 협상 가능하도록 하지요. 너무 고집부릴 필요는 없습니다.”수란석은 눈을 크게 뜨며 반발했다. “협상이라? 어떻게 협상한단 말이오? 설마 그들이 국경을 물러서라고 해도 그걸 가만히 받아들이란 말이오?”장공주는 이미 결심이 선 듯 단호하게 말했다. “국경 문제는 일단 보류할 것입니다. 내일이나 모레 협정을 체결하고 즉시 귀국하는 것이 목표지요.”“그건 안 되오…” 수란석이 강하게 반발하자 장공주는 그를 냉랭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의견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 결정이니 불만이 있어도 모두 삼가세요.”수란석은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는 소리쳤다. “이건 독단이오! 국경 문제를 보류하면 황제와 조정의 문무백관들, 그리고 백성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이오?”장공주는 위엄 있는 눈빛으로 그를 단숨에 제압했다. “설명은 내가 하면 되지 수 상서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녀는 조정을 오랜 시간 이끌어온 인물로서 항상 권위와 기세가 넘쳤다. “당장 나가서 초안을 다시 작성하고 상국에 더 많은 보상을 요구하는 대신 국경 문제는 제외하십시오. 그리고 2년 후에 이 문제로 다시 협상하는 것으로 하지요. 나는 협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습니다.”수란석은 이를 악물며 불만을 드러냈다. “나약하오, 정말 나약하오!” 그는 장공주가 서둘러 귀국하려는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속으로 향병을 원망했다. “난 동의할 수 없소. 국경 문제는 분명히 해야 하오.”장공주는 화가 나 향로를 내던지며 강하게 명령했다. “당장 나가서 다시 작성하십시오.”한편, 북명황실의 의논 자리에서는 새로운 국면이 펼쳐졌다. 단신의는 정좌에 앉았고 무소위조차도 그 옆에 앉아 있었다. 만종문의 구성원들은 세력을 등에 업고 몸을 꼿꼿이 세우며 잘난 척했다.그러자 단신의가 설명했다. “이번에 사용된
향병은 뺨을 맞은 얼굴을 가린채 억울함과 분노를 모두 토해냈다. “장공주님. 태자 전하께서 얼마나 비참하게 사망하셨는지 잊으셨습니까? 그건 우리 서경 백성들의 영원한 고통인데 어찌 원수를 갚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태자 전하는 장공주님의 친동생이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모진 선택을 할 수가 있습니까?” 장공주가 움켜쥔 손바닥은 젖어 있었고 불빛에 비친 그녀의 창백한 얼굴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너는 내가 그를 위해 복수를 하지 않으려고 전쟁을 반대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장공주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더니 눈빛에 노기로 가득 찼다. 그녀는 아직 허약하지만 손을 뻗어 향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향병, 다른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내 모든 계획과 절차를 너에게 말했고, 내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나를 가장 잘 알아야 하는 사람이 복수에 눈이 멀어 정세를 조금도 파악하지 않다니. 넌 경역에게 충성을 다했으니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거라. 그가 지금 상국과 전쟁이 일어나기를 바라겠느냐?” 그러자 향병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복수를 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저도 지금 내우외환의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식량 30만 석과 소성을 요구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승리할 수 있으니까요. 장공주님, 저희는 지금 승리로 하늘에 계신 태자를 위로해야 합니다.” 장공주는 오열하는 향병을 보며 말할 수 없는 분노와 침통함을 느꼈다.그녀는 안운여와 곽아정을 올려다보더니 말했다.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희도 향병의 말에 동의하느냐? 뒤에서 나를 모해할 생각 하지 말고 이 참에 다 말하거라.” 곽아정과 안운여는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장공주님, 동의할 수 없습니다.” 향병은 고개를 돌려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안운여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운여, 너도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이냐? 넌 전하의 보살핌을 잊었느냐? 복수할 생각이 전혀 없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