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부 세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고 왕청여은 은전을 낼 필요가 없고 친정에서 대신 내준다고 하자 그녀는 잠시 고집을 부리다 결국 동의하였다. 최 씨도 그녀에게 직접 나서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이제는 전북망의 여인이니, 다만 편지를 쓰도록 하여 이를 방씨 가문에 전할 것이라 하였다. 왕청여는 결국 전씨 가문의 여인임을 뜻하는 '전왕씨'라는 서명으로 편지를 마무리했다. 이는 그녀가 전가의 여인이기에 위로금을 돌려주는 것이란 뜻이었다.다 쓴 편지를 최 씨에게 건네주던 왕청여는 못마땅해했다."사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제가 재가한 것이 잘못된 것처럼 말입니다." 최 씨는 담담히 말했다. “전북망에게 시집갈 아가씨는 평서백부의 여식이었으니 아무도 잘못된 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가씨가 다른 생각을 품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 말에 왕청여는 기가 차서 웃음을 터뜨렸다."제가 무슨 생각을 품겠습니까? 설마 제가 전북망과 이혼하고 다시 방시원을 붙잡을 거라 생각하신 겁니까? 도대체 저를 뭐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다행입니다. 하지만 아가씨가 어떤 분인지는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왕청여는 분을 참지 못하고 외쳤다. "형수님, 누구나 실수는 합니다. 형수님은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습니까? 제가 보지 못했을 뿐이겠지요. 이런 식으로 제 과거를 물고 늘어지진 말아 주세요. 제가 비록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남편은 저를 존중하고 사랑해 줍니다.저는 이혼할 생각도 없습니다. 게다가 이 혼사 자체가 형수님 때문에 시작된 것이고 목 씨 부인이 중매를 서준 것인데, 감사는 못 할 망정, 어찌 저를 이토록 원망하시는 겁니까? 이를 배은망덕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지만 최 씨는 편지를 접으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스스로를 과대포장은 하지 맙시다. 아가씨 은혜따위는 받을 생각 없습니다. 당시 목 씨 부인이 중매를 서준 것은 상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최 씨는 노부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당장은 이 일을 완전히 처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방시원이 돌아왔으니 방씨 가문에서도 그 위로금을 반드시 조정에 돌려줘야 했다. 나중에 황제가 다른 명목으로 은전을 내릴 수 있겠지만, 살아 있는 사람이 전사 위로금을 계속 갖고 있는 것은 옳지 않으며, 듣기에도 좋지 않았다. 최 씨는 남희와 함께 방씨 가문을 향했다. 오 씨는 너무 기뻤던 나머지 기절해 병상에서 요양 중이었다. 최 씨가 위로금과 가게를 은전으로 환산하여 돌려드리겠다고 하자, 그들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미처 이를 돌려받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최 씨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방시원이 살아 계시다니 저희도 매우 기쁩니다. 이제 돌아왔으니, 당연히 이 위로금은 조정에 돌려드려야 마땅합니다. 이 은전은 당초 방씨 가문의 인덕으로 주신 것이고 그녀는 이제 재가했으니, 더 이상 이를 가지고 있는 것도 부적절하지 않겠습니까? 이 또한 그녀 스스로의 뜻이고 직접 편지를 써서 안부를 전해드리라 했습니다." 최 씨는 편지를 꺼내 방 부인에게 건넸다. 방 부인이 이제 방씨 가문의 내정을 맡아 모든 일을 처리하고 있었기에, 이 편지는 그녀가 읽어보았다. 편지에는 기쁨의 인사가 담겨 있었고, 오 씨에게 마음 편히 요양하시라는 내용이었다. 편지의 끝에는 '전왕씨'라고 서명되어 있었다. 방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편지를 접고는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전 부인께서 참으로 세심하시구려. 또한 부인께서도 이렇게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최 씨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노부인께서도 방시원이 돌아오면 평안해지실 겁니다." "그렇지요. 그가 돌아오면 좋은 날이 올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것이 답답하군요.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을 뿐입니다." 오 씨는 이제 많이 차분해졌고 창백했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곧 돌아올 것이니 너무 초조해하지 마십시오. 마음을 편히
방시원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접한 전북망도 왕청여가 방시원의 위로금과 가게를 돌려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만, 평서백부가 그녀 대신 갚아준 것은 알지 못했다. 암살 사건이 있고 왕청여가 전북망에게 자신을 사랑하는지에 대해 물은 뒤로,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방시원이 살아 있다는 소식에 오랫동안 고민하던 전북망은 결국 문희거로 향했다. 왕청여는 의자에 앉아 멍을 때리고 있었다. 그러다 역광을 받으며 들어오는 이를 보고 하마터면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를 뻔했다.계속 머릿속에서 떠오르던 이름이었다. 전북망임을 확인한 그녀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저는 당신이 문희거를 잊을 줄 알았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오시는 군요." 전북망은 하인들에게 물러가라 명했다."방시원의 일은 들었소." 그러자 왕청여가 차갑게 대답했다. "그래서요?" “당신이 나에게 실망했고 장군부에도 불만이 많은 것을 알고 있소. 이제 방시원이 돌아왔으니, 만약 그가 당신이 이미 재가한 것을 개의치 않고, 그에게 돌아가길 원한다면, 나는 당신들을 축복할 것이오." 화가 난 왕청여는 찻잔을 던져버렸다. "전북망, 당신은 정말 못됐습니다! 당신은 대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 겁니까? 제가 그리도 변덕스러워 보입니까?" 전북망은 피하지 않았다. 찻잔이 몸에 부딪히자, 그는 당황한 듯했다."그런 뜻이 아니었소. 그저 장군부가 당신을 제대로 대우하지 못했다고 생각했소. 당신이 아직 방시원에 정이 남아 있다면, 나는 축복해 주고자 했을 뿐이오." 왕청여는 급기야 격노했다. "축복이요? 당신은 저를 아내로 여기지 않았군요. 저를 조금이라도 진심으로 대했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왕청여의 분노는 전북망만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만약 그녀가 위로금과 가게를 정리하기 전이었다면, 전북망이 축복해 줄 거란 말에 기뻤을지도 모른다. 최근 방시원과의 추억이 자꾸 떠올랐고, 전북망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게다가, 장군부는
그날 밤, 전북망은 문희거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연이어 몇 날 밤을 왕청여의 처소에서 보냈다. 이방은 자신의 뜰을 재정비하지 시작했다. 궁에서는 은전을 내리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자신의 은전으로 장식을 하고 있었다. 문과 창문은 모두 가장 견고한 목재를 사용했고, 철목은 쉽게 구할 수 없으니 목상에게 부탁하여 찾게 했다. 얻을 수만 있다면 고가라도 구매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뜰의 이름도 '길상거'로 바꾸었다. 평안과 길상의 의미였다. 그녀는 이미 군을 떠났고, 더 이상 전투복과 갑옷을 입지 않았으므로, 사람을 시켜 은밀히 호심경을 제작하게 하고, 주야로 착용하며 또다시 자객이 들이닥칠지 모를 상황을 대비했다. 부쩍 가까워진 전북망과 왕청여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변심한 남자는 관심이 없었다.그녀가 말했듯이 절대 내실의 다툼에 얽매이지 않을 것이며,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모습으로 살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전북망이 정말로 왕청여를 사랑할까?그녀는 절대 믿지 않았다. 전북망이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애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는 연기조차 어설펐다. 쉽게 들통날 것인데 오직 왕청여만 어리석었다.아니면, 왕청여도 이 정도 상황에선 어쩔 수 없는 것일 수도 있었다. 비록 가짜 사랑일지라도, 연결된 것이 나았을 것이다. 이방은 그들의 일을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집에서 그녀의 먹거리와 옷가지가 끊길 리는 없었고, 자신의 앞길에 딱히 다른 대안도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기다릴 수 있었다. 그녀는 누가 자신을 해치려 하는지 궁금했다. 사실 그 주범이 송석석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그 책임을 송석석에게 떠넘길 수 있었다면 전북망이 그녀에게 더 이상 마음을 두지 않을 것이다.결국 그녀도 미련이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겉으로만 달달한 둘 사이에 끼어들지 않을 것이다. 전북망은 여전히 왕씨 가문의 힘을 빌려 장군부를 지켜야 했으니 말이다. 한편 서녕에서 장문수는 단신의 치료와 이석의 보살핌
송석석은 시만자가 가문의 사랑을 받는 것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단순히 그 이유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씨 가문은 강남의 대가문이며, 황실 상인으로서 다른 여러 사업도 운영하고 있었다. 상국에서는 모르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그들은 상국 제일 부자였으며, 재산은 나라에 필적할 정도로 많았다. 하지만 번영 속에서도 위험은 도사리고 있다. 그들은 조정에 군마를 공급하고, 갑옷과 병기를 제작했기에 병부가 항상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황제의 관심도 시씨 가문에 향하고 있었다. 현재 시씨 가문의 가주는 시만자의 조부였지만, 실질적으로 가문을 다스리는 사람은 그녀의 부친이었다. 조부가 연로하여 많은 일을 맡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럼 혼사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있어?" 송석석이 묻자, 시만자은 느긋하게 답했다."생각해 본 적 없어. 높은 자리는 맞지 않고, 낮은 자리는 어울리지 않아. 그들이 말하는 자들은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아. 차라리 혼인하지 않는 것이 더 자유롭지 않아?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가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 더 좋아." 송석석은 그녀를 잘 알고 있었다. 자유로운 영혼의 대명사 시만자가 내실에서 가사를 돌보게 하는 것은 너무 잔혹하다고 생각했다. 시씨 가문은 대가족이었기에 상대도 그에 걸맞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복잡한 인간관계가 그녀를 정말 지치게 만들 것이다.시만자가 말을 이었다."우리 시씨 가문에 아직 결혼하지 않은 자도 여럿 있어. 어쩔 수 없지. 돈이 많으니 먹고 살 걱정은 없는 거야. 너도 알겠지만, 난 나중에 스승이 은퇴하면, 적염문을 이어받을 것이니 문파를 다스리는 것이 결혼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어?" 그녀의 당당한 모습에 송석석은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예전에는 혼사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두 사람 모두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하곤 했다. 시만자는 여전히 혼인을 거부하고 있었지만, 자신은 이미 두 번이나 했다. 옛 생각에 잠긴 시만자가 그 사실을 떠올렸는지 갑자기 경멸 어린 시선
그러나 이번 귀향길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사여묵과 송석석이 단둘이 시간을 보낼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 수많은 시커먼 얼굴들은 시도 때도 없이 사여묵을 찾아왔다. 덕분에 송석석과 그가 단둘이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밤이 되어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송석석은 시만자와 한방을 썼고, 사여묵은 장대성과 함께 방을 썼다. 사여묵은 이미 너무 지쳤다. 장대성의 코 고는 소리에 견딜 수 없었고 그의 침대를 발로 차보았지만, 장대성은 몸을 뒤척이며 계속 코를 골았다. 사여묵은 하루빨리 진성으로 돌아가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부대가 동주에 가까워졌을 때, 길 위에 마차 한 대가 나타났다. 옆으로 쓰러진 마차는 길 절반 이상을 막고 있었다. 기마병들은 통과할 수 있었지만, 장문수가 탄 마차는 지나갈 수 없었다. 장대성은 앞으로 나아가 보니 두 사람이 마차를 세우려고 애쓰고 있었다. 말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는데, 더위에 지친 듯했다.길 가장 안쪽에 한 여인이 서 있었고 그녀의 옆에 하녀로 보이는 이가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여인은 위모자를 쓰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복숭앗빛 분홍 저고리를 입고 있었고, 허리는 손으로 잡힐 만큼 가늘었다. 아마도 마차에서 굴러떨어진 듯 몸에 흙이 잔뜩 묻어 있었지만, 초라하기보다는 가련해보였다.장대성이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인가?" 그러자 덩치 큰 사내가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길을 막아버렸군요. 말이 더위를 먹고 기절하여 마차가 뒤집어졌습니다." 말에서 내린 장대성이 살펴보았다. 전장에 나섰던 사람답게, 그는 말을 아꼈다. 손을 뻗어 말을 확인하던 그가 말했다. "말은 죽었소.”“진성으로 가야 하는데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요?" 사내는 호위병이었다. 앞에 있는 말은 그가 타고 온 것이고, 다른 한 사람은 마부인 듯했다. "당신들은 누구요? 왜 진성으로 가려는 것이오?" 장대성이 묻자, 사내가 답했다."우리는 진성 사람이고 아가씨와
송석석은 '고청란'이라는 이름을 듣고, 즉시 장공주의 서녀인 연유를 떠올렸다. 연유의 본명은 고청무였다.송석석은 빠르게 상황을 살폈다. 고청란의 하녀는 그녀에게 별로 공손하지 않았고, 오히려 상당한 무예를 익힌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게다가 호위병과 마부의 시선도 고청란을 주시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고청란이 그들에게 감시를 받고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송석석은 다시 고청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약간 긴장한 듯 손수건을 꽉 쥐고 있었고, 땀방울이 위모자 안에서 흘러내리자, 손수건을 넣어 땀을 닦았다.그녀의 몸이 갑자기 움찔하더니 고통을 삼키는 듯했다. 송석석은 그제야 하녀가 그녀의 뒤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나 등 뒤에 있기에 그 장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시만자와 송석석 모두 위모자를 쓰고 있었기에 밖에서는 그들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그들은 외부를 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마차를 보는 척하면서 고청란과 하녀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고청란과 하녀의 모습에서 하녀가 고청란을 압박해 말을 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 고청란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와 사여묵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고왔고 부끄러움도 살짝 묻어 있었다. "급히 진성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말이 죽어버렸습니다. 혹시 말 한 마리를 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례는 반드시 드리겠습니다." 사여묵이 대답하려던 찰나, 송석석이 먼저 답했다. "이거 참 마침 잘됐군요. 저와 시만자는 말 타는 것이 지겹던 차였습니다. 마차에 앉아 가고 싶었는데, 우리말로 그대들의 마차를 끌게 하지요." 왕비의 말에 무리 중 일부는 약간 당황했다. 이 상황에서 낯선 사람을 마차에 태우는 것은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앞으로 다가와 상황을 살펴보던 방시원이 손을 들어 동료들에게 말을 아끼라고 신호를 보냈다. "부인의 뜻을 따르도록 하자." 밖에서는 왕비라 부르면 안 되었기에 모두가 송석석을 부인이라 불렀다. 호위병과
바람이 불었지만, 햇볕이 강렬했다. 하지만 하녀는 이 뜨거운 날씨 속에서도 전혀 불편해하지 않았다. 그녀는 무척이나 고생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인 듯했다.보통 여인의 곁에 있는 시녀들은 무거운 일을 하지 않기에 유난히 연약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하녀는 달랐다. 방시원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시선을 거두었다.그들은 이미 위태로운 삶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이런 단순한 계책은 진작에 알아챌 수 있었다. 마차 안에서 위모자를 벗은 고청란은 연유와 매우 닮은 얼굴을 드러냈다. 그녀는 아름다웠으나 차가운 인상을 풍겼다. 하녀가 밖에 있었기에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왕비님, 제발 저의 어머니를 구해주십시오." 송석석도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들이 길을 막은 이유가 단지 그것만은 아니겠지요." "그렇습니다!" 고청란의 얼굴에 수치심이 스쳐 지나갔다. "저의 계모가 저더러 왕비님과 북명왕의 사이를 훼방 놓으라고 했습니다." 눈물을 머금은 그녀는 반쯤 엎드렸다. "왕비님, 제발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송석석은 그녀를 바라보았다."내가 왜 널 도와야 하지?" 고청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지만, 그 눈물은 슬픔이 아니라 음모나 계략의 도구일 수도 있었다. "거래입니다. 제가 아는 모든 것을..." 송석석은 갑자기 그녀를 일으켜 자신의 옆에 앉혔다. 놀란 고청란은 황급히 위모자를 다시 썼다. 그때 마차의 커튼이 살짝 열리며, 하녀가 머리를 내밀어 물었다. "아가씨, 아직도 불편하십니까?" 고청란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이제 많이 나아졌다." 하녀는 다시 커튼을 내렸다. 송석석과 시만자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고청란의 말이 사실인지 가늠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화만으로는 판단이 어려웠고, 진실이 무엇이든 그녀와 더 자세히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다. 저녁이 되어 여관에 묵게 되었다. 식사를 마친 후 송석석은 일부러 장대성에게 명령을 내렸다. "밖에 나가 말을 파는 곳이 있는지 알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