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석은 사여묵과 상의하는 척하며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다. 주변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하는지 듣지 못했고, 하녀와 호위병도 귀를 쫑긋 세웠지만 아무것도 들을 수 없어 초조해 보였다. 한참 후에야 사여묵이 고개를 끄덕였고, 송석석이 말했다. "좋소. 우리 함께 진성으로 가도록 하지." 그제야 하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감사하옵니다, 부인께서는 참으로 자비로우십니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송석석이 대뜸 물었다. 하녀는 몸을 낮추며 대답했다. "소녀의 이름은 향귀라 하옵니다." "호위병 너는?" 송석석이 다시 물었다. "저는 오동입니다." 건장한 체격일 가진 그는 성실해 보였으나, 겉모습과 내면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송석석도 알았다. 송석석은 몇 가지 더 물었지만, 별다른 정보를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애초에 이들로부터 많은 것을 듣고자 하는 의도는 없었다. 밤이 되어 야식을 마친 후, 단신의가 준비한 무색 무미한 작은 가루가 마부, 호위병 오동, 그리고 하녀 향귀를 모두 잠들게 만들었다. 방 안에서 고청란은 송석석과 사여묵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서 시만자가 그들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고개를 든 고청란이 애절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저의 계모는 저를 시켜 북명왕을 유혹해 왕비님과의 관계를 망치라고 하셨습니다. 왕께서 무예를 아는 여인을 좋아한다고 들었기에 저를 이용하려 하였지요. 그러나 저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설령 제가 그렇게 한다 해도, 제 어머니를 풀어주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와 쌍둥이 자매인 청무는 이미 승은백부에 들어가 임무를 완수했지만, 또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어머니는 끼니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며, 공주부의 지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두 분께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어머니를 구해주신다면, 저 고청란은 왕비님의 뜻대로 따를 것이며, 다음 생에라도 이 은혜를 꼭 갚을 것입니다." 송석석은 고청란을 바라보
고청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시만자와 송석석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갓 태어난 아기를 산 채로 바닥에 던져 죽이다니, 얼마나 잔혹하고 독해야 이런 짓을 할 수 있을까? 고청란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그런 끔찍한 일들이 공주부의 내당에서는 수도 없이 벌어졌습니다. 저에게도 원래 남동생이 있었고 어머니는 임신 중에 그 아이가 아들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녀는 아버지가 자신을 지켜주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고, 공주가 남아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기에 도망치려 했습니다. 남자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죽을 운명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공주는 사람을 보내어 어머니를 감시했습니다. 한 번 내당에 들어간 이상 다시 나올 방법은 오직 죽음뿐입니다." "아버지께서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고청란은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어머니는 아버지를 믿고, 탈출 기회를 만들어 줄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마침내 좋은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바로 계모가 연회에 참석하러 간 날이었지요. 그날은 매우 늦게 돌아올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탈출하지 못했군." 듣고 있던 시만자는 분노했다."탈출에 성공했지만, 도중에 붙잡혔습니다. 어머니는 마차에서 아이를 낳았고, 탯줄도 끊지 못한 채 공주부로 끌려갔습니다. 어머니와 남동생은 바닥에 끌려 다시 공주부의 춘향원으로 돌아왔고, 그때 제 동생은 이미 울음을 멈췄습니다. 피부가 찢어지고, 피와 살이 뒤엉켜 더는 숨을 쉬지 않았습니다." 전쟁터에서 수많은 참혹한 장면을 보았지만, 그건 두 나라의 싸움에서 목숨을 걸고 벌어지는 것이었기에 잔인함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왕실의 공주부에서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다니, 얼마나 사람의 마음이 비정하고 뒤틀려야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너무 소름이 끼쳤다.고청란은 송석석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왕비님께서 제 어머니나 다른 공주부의 첩들을 보신 적이 없으시니, 왜 계모가 그들을 그렇게 대했는지 이해하지 못하실 겁니다." 송석석은 갑자기 뭔가 떠올랐
고청란이 답했다. "공주부에 있을 때, 저희는 각자의 뜰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무술을 배우든, 언니처럼 진찰 가르침을 받든 모두 각자의 뜰에서만 이루어졌습니다. 서원에 대해서는 접촉할 기회가 없었지만, 하인들의 말에 따르면, 서원은 불상을 모시는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계모께서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그곳에서 향을 올리고 공양을 드린다고 했습니다." "불당이라고?" 송석석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곳이 단순한 불당일 리 없었다. 만약 불당이라면 장공주가 그렇게 긴장할 이유가 없었다. 어쨌든 그곳을 한 번 탐문해볼 필요는 있었다. "무술을 배웠다고?" 송석석이 다시 물었다."향귀는 제 사부였습니다. 몇 년간 우리 자매는 각자 한 가지씩은 배운 것이 있습니다. 우리를 키웠으니, 분명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헛되이 밥만 먹게 하지는 않았겠지요." 송석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장공주는 단순히 잔혹한 것이 아니라, 연왕과 결탁해 큰 일을 도모하고 있었기에 모든 자원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네 아비는 네 어미를 어떻게 대했느냐?" "아버지는 어머니를 각별히 아꼈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공주에게 약점을 잡혔지요." 고청란은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하루빨리 공주부를 벗어나기를 원했습니다. 아버지는 도울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는 돕지 않았지요. 어머니가 동생을 임신하고 나서야 아버지는 비로소 두려워졌고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어머니는 만삭이었기에 멀리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고청란의 목소리에는 고부진에 대한 원망이 가득했다. 장공주에 대한 원망에 못지않았다. 고청란은 말을 이었다. "지금 어머니는 지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우리 자매를 통제하기 위해서지요. 출발하기 전에 어머니를 한 번 보았는데, 어머니는 굶주린 상태라 사람의 모습이 아니였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버티지 못하고 목숨을 잃을까 두렵습니다." 고청란은 울먹이기 시작했다."이제 돌아가거라. 그 세 사람은 내가 잠들게
다음 날, 향귀와 호위병은 자신들이 전날 밤 중독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몸을 뒤진 흔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자기는 다시 묶여 있었지만, 워낙 신중한 사람들이라 한눈에 수색을 당한 것을 알아차렸다. 향귀의 눈에 서늘한 기운이 번졌다. "좋은 징조다.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려고 수색을 한 게 분명하니, 그다음 일은 순조롭게 풀릴 것이다." 그녀는 고청란을 바라보며 말했다. "길에서 휴식을 취할 때, 최대한 북명왕과 단둘이 있을 기회를 노리거라. 무공에 능한 자를 선호하니 자연스럽게 보여주거라." 고개를 끄덕이던 고청란이 갑자기 이마를 짚었다."왜 이렇게 머리가 어지러운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향귀는 담담했다."정상이다. 우리 모두 그들에게 중독된 것이니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것이다." 향귀는 다시 고청란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기회가 되면 북명왕에게 다가가는 것을 잊지 말거라. 그러고 보니 이번 작전은 실패한 것 같구나. 서녕으로 향하기 전에 북명왕비도 함께 있을 줄은 몰랐구나. 공주의 편지가 너무 늦게 도착한 탓이다." "북명왕비는 밤에 성을 나섰으니, 계모께서 모르신 것도 당연하지요." 팔짱을 낀 향귀는 마치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는 듯이 말했다. "그렇군. 북명왕비가 있으면 일이 좀 까다로워지겠지만, 상황이 변했다고 해서 계획을 바꿀 수는 없다. 어떻게든 그들 부부가 다투게 하고, 마음에 금이 가도록 해야 한다. 만약 북명왕부의 첩이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고청란은 물 한 모금을 마셨다.갓 진시를 지났을 뿐인데 더운 열기가 몰려왔다."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할 겁니다, 사부님." 향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말거라. 공주님은 한 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다. 네가 임무를 완수하면, 네 어미는 지하 감옥에서 풀려날 것이다. 만약 네가 첩이 된다면, 어머니의 대우도 훨씬 좋아질 거다." 고청란도 단호한 눈빛으로 답했다."알겠습니다. 공주 계모님을 만
그러던 어느 날, 길옆 작은 숲에서 잠시 쉬던 중, 약 1리 떨어진 곳에 맑고 투명한 냇가가 보였다. 더운 날씨 탓에 모두가 그곳으로 뛰어갔다. 고청란 역시 냇가에서 손을 씻고 있었지만, 남자들처럼 물속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남자들이 신나게 노는 것을 보고 그녀는 나뭇가지를 집어 들어 춤을 추듯 무술 동작을 선보였다. 큰 살상력을 지니지는 않았지만, 아름다웠다. 발끝으로 뛰어올라 회전하며 나뭇가지를 휘두르는 모습은 마치 춤과 무술을 결합한 것처럼 매우 매력적이었다. 이 광경에 남자들도 물에서 나왔고 함께 주먹을 휘두르며 즐기기 시작했다. 향귀는 멀리서 사여묵을 바라보았다. 사여묵은 고청란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눈빛에는 놀라움과 감탄이 서려 있었다.향귀는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호위병 오동과 보았다. 역시나 북명왕은 무술을 아는 여인에게 특별히 관심을 보였다. 한참 후, 사여묵은 고개를 돌려, 옆에서 시만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송석석을 살짝 보며 마음속으로 안도했다. 그러고는 그들 쪽으로 다가갔다. 은근히 편치 않은 눈빛을 보낸 남자의 행동을 향귀는 놓치지 않았다. 비록 북명왕비가 함께 있어 계획이 순조롭지 않았으나, 사여묵이 그 함정에 빠진 것이 분명했다. 사여묵은 송석석 옆에 앉자 시만자가 자리를 비우며 고청란에게 다가갔다."검 춤을 잘 추는구나." 고청란은 조금 부끄러운 듯 말했다. "그저 겉모습만 그럴듯할 뿐이니 진성까지 보호 부탁드립니다." 시만자는 밝은 얼굴로 말했다. "나도 무술을 아는 사람이다. 진성에 가면 한 번 겨뤄보자꾸나." 그러자 고청란은 살짝 향귀의 눈치를 살폈다."그야 뭐…" 기쁜 마음으로 다가온 향귀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아가씨를 좋아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 아가씨가 꼭 댁을 방문해 예를 다하겠습니다. 댁은 어디 신지요?" 시만자는 눈살을 찌푸렸다."너는 하녀에 불과한데, 너무 말이 많구나." 향귀는 급히 몸을 낮췄다."송구하옵니다. 소녀가
송석석은 얼굴을 돌리고 웃었다.‘당연히 단신의를 찾아 조사를 받아봐야지. 이 세상의 남자들은 자기애가 많지 않다니까.’사여묵은 이를 갈며 물었다.“너 설마 내가 그런 병에 걸렸다고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줄곧 전쟁터에 있었는데 정말 날 의심하는 거야?”송석석은 시만자의 손을 잡고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향귀는 사여묵이 화를 내고 송석석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이 싸울 줄 알았다. 하지만 진성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진성에 돌아오자 벌써 8월이 다 되어갔다.예부는 이미 그들이 언제 도착할 지 듣고 이 기쁜 소식을 온 진성에 퍼뜨렸다.백성들의 감정은 가장 순박해서 영웅이 돌아오자 모든 사람들이 골목에서 나와 축하를 건넸다. 송석석은 입성하기 전에 고청란에게 말을 건네며 다음에 다시 찾아오라고 했다. 그러자 고청란은 몸을 낮추어 인사를 올렸다. “낭자 댁은 어디에 있습니까?”그러자 송석석이 대답했다.“북명황실이오.”그러자 고청란은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북명황실? 그럼 당신이 북명왕비입니까?”그녀가 서둘러 향귀와 무릎을 꿇고 인사를 하려 하자 송석석이 말했다.“예의를 차릴 필요 없소. 내일 와서 말을 돌려주면 되오.”송석석은 말을 마치고 사여묵에게 손을 내밀었다. 사여묵은 고청란의 얼굴을 보더니 송석석의 손을 잡고 힘껏 잡아당기더니 두 사람이 한 말에 올라탔다.향귀는 사여묵의 눈빛을 유심히 보더니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가장 어려운 것은 황실에 들어가려면 먼저 북명왕비를 공략해서 그녀의 신임을 얻어야 했다.다시 말해 길을 좀 돌아서 가야 했던 것이었다.하지만 북명왕비가 그녀를 친구로 여긴다면 친구와 부군의 이중 배신으로 북명왕비에겐 더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그래서 그들이 입성한 후 향귀는 고청란에게 말했다.“내일 말을 돌려주러 갈 때 선물을 준비해서 북명왕비에게 잘 보이거라.”고청란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네.” 입성을 준비하던
전북망은 오늘 당직이어서 경위와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이 그의 곁으로 한 명씩 지나갈 때 그는 모든 사람을 자세히 보았다. 방시원을 보았을 때 그가 예전처럼 풍채가 넘치지 않은 모습을 보고 마음이 복잡해지고 부끄러워졌다. ‘영웅.. 나도 한때는 영웅이었는데. 성릉관에서 돌아왔을 때도 백성들이 이렇게 환호성을 질렀었지.’ 지위가 가장 낮은 경위로 전락하여 더 이상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하고 더 이상 중임을 부여받을 수 없게 된 전북망은 그들을 보며 뼛속까지 비천하다는 것을 느꼈다. 전북망은 이제 왕청여의 오빠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더 이상 재기할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다. 예전의 자신이 모든 것을 너무 좋게 생각했던 것 같았다. ‘그렇게 쉬운 공이 어디 있겠어? 성릉관에서도 소장군이 칼을 막아주지 않았다면 벌써 죽었을 것이야.’ 남강 전장에서 성을 공격할 때도 산더미 같이 쌓인 시체와 피가 강이 되어 흐르는 광경을 보고 그는 비로소 전쟁터에서 무공을 세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을까? 방시원처럼 포로로 잡혀갔다가 다시 도망쳐 정보영을 꾸릴 수 있는 건 그들밖에 없을 것이었다. 포로를 생각하니 그는 발꿈치에서 머리끝까지 한기가 느껴졌다. 그는 성릉관의 일이 결국 어떻게 될지 몰랐다. 지금은 황제가 추궁하지 않았지만 사람을 보내 장군부를 주시하고 있었다. 적어도 확실한 건 서경에 변화가 생기면 장군부에도 변화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태자는 서경 황제만큼 자신의 체면을 신경 쓰지 않았다. 떠들썩한 영광은 남의 것이고, 거지 같은 생활은 결국 전북망의 몫이 되자 순간 끝없는 절망감을 느꼈다. 전북망은 순간 이방이 힘차게 단지 성공하고 싶을 뿐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는 그 사람들을 올려다보며 마치 예전의 자신과 이방을 보는 것 같았다. 인파가 붐벼서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모두가 열한 명의 영웅과 그들을 구출해 낸 북명왕만 바라보고 있었다. 북명왕 또
혜 태비는 눈물을 닦으며 하인이 외부의 상황을 보고하는 것을 듣고 자신이 평범한 백성이 아니라 밖에 나가 함께 즐기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요즘 설화 선생들이 하는 이야기를 하인들이 모두 아뢰었는데 그녀는 매우 감동했다. 다만 그녀가 지금 눈물을 흘리는 것은 바깥의 떠들썩한 분위기 때문이 아니라 송석석이 돌아온 후 자신을 방안에 가두고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혜 태비도 송석석이 왜 괴로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 생사의 재회에 그녀가 없었고 그녀의 부친과 오빠들이 모두 전장에서 희생했기 때문이었다. “이리 오너라.” 혜 태비는 무릎을 꿇고 인사하는 며느리를 보며 손짓했다. “이리 와서 내 옆에 앉거라.” 송석석은 몸을 일으켜 혜 태비에게 다가가려는데 갑자기 혜 태비에게 끌려 그녀의 품에 안겨 버렸다. 그렇게 그녀는 혜 태비에게 꽉 안겼는데, 갑자기 울먹이는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영원히 나를 어머니로 생각하고 가족으로 생각하거라. 나도 영원히 널 보호해 주마.” 송석석은 너무 꽉 안겨 숨이 쉬어지지 않아 고개를 들어 혜 태비와 거리를 두려고 했지만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먹먹하고, 코끝이 찡해오며 눈가가 촉촉해지더니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송석석은 태후의 보호를 받던 시어머니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혜 태비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던 걸로 알고 있었는데 이런 말을 하니 순간 울고 싶었다. 하지만 송석석은 40이 넘은 시어머니가 몸매가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다. 얼굴이 가슴에 묻혀 하마터면 질식할 뻔했다.사여묵은 이 장면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먼저 송석석을 안아주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그래서 괜히 어머니가 송석석에게 감동을 준 게 화가 났다. 고 씨 유모는 옆에서 눈물을 훔치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야. 태비마마께서 사람을 아낄 줄 알아서 다행이야.’ 포옹한 후 태비는 송석석을 놓고 모두 앉게 하고 분부했다. “여봐라, 차를 내오너라.” 그녀는
시만자는 원래 그들의 몸에 더 많은 구멍을 뚫어줄까도 생각했으나 보주의 말을 듣고 멈추기로 했다. 몇 번 더 찌른다면 피가 너무 빨리 흘러 그들이 너무 쉽게 죽을수도 있어서였다.송석석은 조상 묘지 앞의 작은 사당에서 향을 가져와 불을 붙여 향로에 꽂았다. 그러고는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무릎을 꿇고 세 번 큰절을 올렸다. 그녀는 절을 올리면서 먼저 떠난 가족들이 저세상에서 이 장면을 보고 있을 것이라 믿었다.사여묵 역시 향을 피우고는 그녀 옆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잡았는데, 송석석이 이미 눈물범벅이 되어 있어 그는 더욱 마음이 아팠다. 사여묵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범인이 이미 처형되었으니 장모님도 저세상에서 이제는 편히 쉴 수 있을 것이오.”송석석은 그들이 정말로 안식을 얻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비록 복수는 했지만 마음속 고통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강해지고 행복해져야만 그들에게 진정한 위로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서경의 두 정탐꾼은 아직 죽지 않았으나 과다 출혈로 의식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들은 서경 말로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송석석과 시만자 등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고 오직 사여묵만이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바로 “송구하다”라는 말이었다.그들 역시 자신의 잘못을 알지만 단지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었는데, 이제 죽음을 앞두고 있으니 그동안 저지른 일들이 하나하나 떠오르는듯 했다. 송구하다는 말이야말로 그들이 이 묘지 앞에서 비로소 할 말이었다.사여묵이 송석석과 보주에게 전했다. “이자들이 송구스럽다고 말하는구나.”보주는 여태 애써 눈물을 참고 있었는데, 사여묵의 말을 듣자마자 결국 눈물을 터뜨리며 시만자의 품에 와락 안겼다.“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송구스럽다고 해서 이 모든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보주는 목이 찢어질 듯한 울음을 터뜨리며 외쳤다. 단지 송구하다는 말로 모든 죄
일행은 이상서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고 송석석은 내내 보주의 손을 놓지 않았다.그리고 곧 두 명의 서경 정탐이 끌려 나왔는데 그들의 옷은 이미 너덜너덜해지고 피가 묻어있었으며, 얼굴은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부어 있었다. 그들은 땅에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몸이 앞쪽으로 쏠려 거의 넘어져 엎어질 지경이었다.보주는 눈에 핏대를 세운 채 그런 그들을 노려보았다.그녀와 송석석은 단 하루도 진북후부의 멸문에 대한 복수를 잊은 적이 없었다.이제 대세는 정해졌고 그녀도 마침내 가족과 송 부인 등에게 복수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그녀의 가슴 속에 있던 슬픔과 분노는 산을 무너뜨릴 듯한 기세로 솟구쳐 나왔다.보주는 당장 달려가 주먹과 발길질을 퍼붓고 싶었으나 이상서 앞에서 무례하게 굴어 왕야와 아씨의 얼굴을 깎아내릴 수 없었다.이대인이 말했다. “이 두 정탐은 형부에 보내졌을 때까지도 죽음을 각오한 듯 오만한 태도였습니다. 하관이 직접 고문을 한 것은 아니지만, 일부 사람들이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뺨을 몇 대 때렸습니다. 그들의 몸에 난 상처도 이미 잡혀 올 때부터 있었습니다.”그러자 사여묵은 평 사저의 말이 떠올랐다. 그들은 역시나 심하게 맞은 후 여기에 데려온 것이다.사여묵은 가볍게 허리를 굽히고는, 몽동이에게 그들을 데리고 송가의 조상 묘지에 가라고 지시했다.바람에 흔들리는 등불이 그림자를 드리워 날은 앞길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몽동이는 그들을 마차 앞에 묶고 말을 몰았다. 그러던중 송가의 멸문이 떠올릴 때면 그들에게 채찍을 휘둘렀다.송가 조상 묘지 앞에 도착하자, 몽동이는 발로 그들을 묘지 앞으로 걷어찼다.보주도 그들 앞으로 달려가 주먹과 발길질을 퍼부었다. 둥글게 말아 쥔 손바닥이 뺨에 연달아 떨어졌으나 마음속의 분노와 슬픔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모두 그녀를 막지 않았고 그녀가 분노를 표출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언제나 사랑스럽고 순진했던 그녀가 이토록 광기에 휩싸인 모습을 보이자 사람들은 마음 깊
서경 사절들이 경성을 떠난 후, 숙청제는 소 대장군과 전북망에게도 죄를 내렸다.소 대장군은 군 기강을 엄격히 다루지 못한 책임이 있었으나 장기간 성릉관을 지키며 노고가 많았던 점과, 전북망과 이방이 녹분성으로 출정했을 당시 그가 여전히 생사를 오가는 상황이었던 점을 감안해서 성릉관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도록 했다.또한 어명을 내려 소삼야를 성릉관 총병으로 임명하고 소팔야를 부총병으로 임명하였으며 국경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이상 성릉관에는 소씨 가문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천명하였다.소승은 마침내 소부에서 나와 입궐하여 숙청제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그의 가족들은 모두 성릉관에 있었기에 파직을 당한 후에도 당연히 성릉관으로 돌아가야 했다. 총지휘관의 자리는 내려놓았으나 그동안의 공로는 영예를 받지 못했음에도 그는 후회가 없었다. 애초에 그가 추구한 것도 이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전북망 역시 동일한 죄에 처할 뻔했으나 서경에서의 협상 중 중요한 제보를 한 공로를 인정받아 현철군 부사령관으로 강등되었고 3년간 녹동이 삭감하게 했으며, 오월을 정사령관으로 승진시켰다. 더불어 숙청제는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 북명황실이 서경의 두 정탐조 모두 사적으로 처단할 수 있도록 했다.사여묵은 송석석의 의견을 묻기 위해 돌아갔다. 그녀가 직접 처리할지 아니면 형부에 맡길지를 결정하기 위해서였다.송석석은 보주를 불러 의견을 물었다. 이방은 송가를 멸문시킨 주범이었지만 그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것은 서경의 정탐조들이기 때문이었다.보주는 한 번도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어 사여묵과 송석석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이를 악물며 말했다. “소인은 그들이 죽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습니다. 송가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그러자 송석석은 심장이 찔리듯 아파왔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좋다, 널 데려가겠다!”그녀도 한때는 망설였었다. 직접 그들을 죽이기도 싫었고 심지어 그들을 보는 것조차 싫었다. 그들을 보면, 미친 듯이 본가로 달려갔던 날 목격한
이러한 결과는 두 나라 모두에게 이익이었다. 장공주는 돌아가면 많은 일을 준비해야 했기에 국경 문제에서는 절대 물러설 수 없었다. 만약 물러선다면 그녀가 하려는 일은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고 백성들의 지지도 얻지 못할 것이다.조약 서명 다음 날, 서경 사절들이 황제에게 작별 인사를 올리러 궁에 들어왔다. 숙청제는 그들에게 송별연을 베풀 생각이었으나, 장공주는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즉시 출발 의사를 밝혔고 그도 이를 받아들였다.형부는 이미 이방을 죄수 수레에 태워 회동관으로 보냈는데, 소승이 보이지 않자 서서히 불안에 휩싸여 크게 소리쳤다. “왜 나 혼자인 것이냐! 소승은? 소승도 책임을 져야하지 않겠느냐?” 감랑중은 서둘러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수란석과 함께 인계했다.서경 사절들은 진성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이방을 보게 되었는데 그들의 눈에는 분노의 불길이 가득해 당장이라도 이방을 태워버릴 듯했다.이방은 수레 안에서 몸부림치며 전북망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회동관 밖에는 길게 늘어선 행렬과 경위대, 그리고 송석석과 사여묵도 있었으나 전북망은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소리칠 수도 몸부림칠 수도 없었고 수레 안에서 머리조차 제대로 내밀 수 없었다. 앉아도 서기도 불편한 이 죄수 수레는 마치 옛날에 그녀가 경역을 쇠창살에 가둬놓고 활로 괴롭히던 때 같았다. 그 당시는 통쾌했지만 이제는 두려움만이 가득차 버렸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송석석은 오늘 일부러 보주를 데리고 왔다. 두 여인은 죄수 수레에서 다섯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이방의 두려움과 혼란을 똑똑히 바라보았다. 보주는 이방을 국공부로 끌고 가서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이방은 이제 서경의 죄인이었기에 그녀가 직접 복수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눈에는 그저 이방을 향한 증오와 피 같은 눈물만이 맺혀 있었다.“아씨, 저 계집을 한 대 때려도 되겠습니까? 저는 힘이 약해서 심하게 때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냉옥 장공주께 말씀 좀 전해주실 수 있겠습니까?”송석석은 보주가 이 한 대
송석석은 단 백부의 말에는 뭔가 의미심장한 뜻이 담긴 듯해 잠시 당황했다. 장공주가 그녀를 바라보자 송석석은 담담한 표정으로 장공주의 눈을 마주 보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평온하게 행동했다.단 백부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었기에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장공주의 속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일 것이다. 단신의가 약을 남기고 떠나려 하자 장공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예를 갖춰 인사했다.“신의님께 감사드립니다. 상국에 다시 오실 기회가 있으면 반드시 성의를 다해 보답하겠습니다.”왠지 모르게 장공주는 그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송석석은 단신의를 부축하고 청작은 약상자를 메고 각자 갈 길을 갔다. 장공주는 자리에 앉아 금태의가 약병을 열어 검토하는 것을 바라보았으나 시선은 이미 흐려진 상태였다. ‘의사는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치유하는 사람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단신의는 그녀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었다. 여인이 큰 뜻을 품는 것을 남성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 여기지 않고 평등한 관점에서 바라본 듯했다. 그것은 장공주가 오랫동안 추구해 온 바였다.모든 남성이 그녀의 뜻을 반대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에 장공주는 깊이 감동했다. 갓 생겨난 이 생각에 대한 지지와 인정은 그녀에게는 마음을 어루만지는 약과도 같았다.송석석은 단신의를 약왕당에 직접 모셔다 드리기로 했다. 마차 안에서 단신의는 한참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경이 변화하면 더 나아질 것이야.”송석석은 그의 숨겨진 뜻을 이해해 장공주의 길이 험난할 것임을 짐작하고 조용히 마음속으로 그녀를 응원했다. 만약 그녀가 황제가 된다면 상국과의 문제도 평화로운 협상을 통해 해결할 수 있어 전쟁도 일어나지 않기에 양국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오후가 되자 협상이 다시 시작되었다. 사전 통보를 받은 사여묵은 곧바로 홍려사로 향했고 이후 궁으로 들어가 상국에 대한 서경의 보상안을 황제로부터 허락받아 협상장으로 돌아갔다. 서경 측에서는 수란석과
다음 날 아침이 밝자 안운여는 송석석을 찾아가 단신의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한편 고공은 홍려사로 향했고 협상은 오후에 다시 시작될 예정이었다. 단신의는 장공주가 자기를 초대하러 올 것을 예상하고 일찍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송석석이 도착했을 때 단신의는 이미 마차를 준비했고 송석석이 입을 열기도 전에 청작에게 약상자를 준비시키며 말했다. “회동관이라 했느냐?”송석석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백부님, 다 알고 계셨습니까?”“장공주의 두통이 심하니 내가 아니면 남은 협상도 무사히 마치기 어렵다. 돌아가서 필요한 일들을 처리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단신의는 자기 의술에 대해 여전히 확신을 갖고 있었다.송석석은 그와 함께 마차에 오르며 물었다. “장공주의 두통은 어찌 생긴 겁니까? 혹시 편두통입니까?”“편두통도 일부 원인이지. 맥을 짚어보면 장공주의 편두통은 오랫동안 지속된 것으로 아주 심각하더군. 또 오랫동안 책상에 엎드려 일하다 보니 목뼈가 변형되고 혈기가 머리로 공급되지 않아 혈액이 막혀 있는 상태이다. 어젯밤 금태의의 진단이 틀린 건 아니지만 그 향이 잠깐만 막힌 혈을 통하게 했을 뿐이기에 약효가 떨어지면 다시 두통이 시작될 것이다.”“금태의가 정말 이 문제를 몰랐을까요? 수년 동안 치료했는데도 크게 나아지지 않은 이유가 뭘까요?”“침술로는 증상이 호전될 수 있다. 금태의도 공을 들였겠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거지. 게다가 장공주는 무리한 일로 상태가 이미 악화됐으니,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목숨까지 위태로울 수 있다.”단신의는 약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 “일찍이 청작에게 1년 치 약을 준비해 오게 했다. 장공주가 나를 믿는다면 충분히 회복될 수 있다.”송석석은 고개를 끄덕이곤 현재 두 나라의 상황을 떠올렸다. 장공주가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다면 상국에도 절대 좋은 일이 아니었다.회동관에 도착하자 단신의와 청작은 안으로 들어갔고 송석석은 밖에서 대기하고, 곧 필명이 교대를 하러 올 것이기에 단신의가 진료를 마치면
서경은 이번에 조건을 낮춰서라도 협상을 조속히 성사시키려 할 것이며, 가장 가능성 높은 방안은 국경선 문제를 양보하거나 잠정적으로 논의에서 제외하는 것이라고 다들 의견을 모았다.염구진이 말했다. "연왕의 여러 차례 계략이 모두 실패한 걸 보면 지금 그가 아주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게 분명합니다. 아마 인맥 대부분도 이제는 사온이 장악하고 있을 테니 사온이 몰락하면 연왕은 정말로 진성에서 손발이 묶인 상황이 될 것입니다."연왕부는 지금 염구진의 말처럼 정말로 속수무책인 상황이었다. 무상은 여러 번이고 회왕과 숨겨둔 다른 인맥을 이용했지만 이제 거의 모두 뿌리째 뽑힌 상태였으며 또 다시 열 명 이상의 사사를 잃고 말았다.그들은 회동관의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단신의가 회동관에 들어간 사실만으로도 이미 계획이 실패했음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장공주가 혼수 상태에 빠졌을 때도 구혼선충의 모충은 장공주의 몸속 유충을 제어할 수 없으니 이제 계획이 성공하기는 어려울 것임을 알게 되었다.무상은 비록 실망했지만 냉옥 장공주의 강인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혼선충의 조종을 이겨내는 일은 매우 어려운데 무공이 뛰어나고 의지가 강한 사내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오직 한 사람만이 구혼선충의 조종을 버텨낼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비범한 신분과 남다른 강인함을 가진 인물이었다.무상은 이번 상대가 강력한 인물임을 깨닫고 본인의 패배를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냉옥 장공주가 있는 한 서경은 상국과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정원제가 즉위한 후 여러 계획을 세우며 여론을 조성했으나 결국 모두 역풍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그는 원래 황위에 관심이 없었고 그의 마음속에는 선황태자가 가장 중요합니다. 가문과 나라는 그 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여 우리와 동맹을 맺기를 원했지만 이 동맹은 그의 야망에 기반한 것이 아닌 허상에 불과합니다. 동맹이 무너진다면 우리도 연루될 가능성이 높으니 정원제에게 기대를 걸 수는 없습니
향병의 행동에 장공주는 결심을 더욱 굳히고 그들을 불러 모았다. 그러고는 겉옷을 걸친 채로 의자에 앉아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내일 오후에 다시 협상을 재개할 것이니, 조건은 협상 가능하도록 하지요. 너무 고집부릴 필요는 없습니다.”수란석은 눈을 크게 뜨며 반발했다. “협상이라? 어떻게 협상한단 말이오? 설마 그들이 국경을 물러서라고 해도 그걸 가만히 받아들이란 말이오?”장공주는 이미 결심이 선 듯 단호하게 말했다. “국경 문제는 일단 보류할 것입니다. 내일이나 모레 협정을 체결하고 즉시 귀국하는 것이 목표지요.”“그건 안 되오…” 수란석이 강하게 반발하자 장공주는 그를 냉랭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의견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 결정이니 불만이 있어도 모두 삼가세요.”수란석은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는 소리쳤다. “이건 독단이오! 국경 문제를 보류하면 황제와 조정의 문무백관들, 그리고 백성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이오?”장공주는 위엄 있는 눈빛으로 그를 단숨에 제압했다. “설명은 내가 하면 되지 수 상서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녀는 조정을 오랜 시간 이끌어온 인물로서 항상 권위와 기세가 넘쳤다. “당장 나가서 초안을 다시 작성하고 상국에 더 많은 보상을 요구하는 대신 국경 문제는 제외하십시오. 그리고 2년 후에 이 문제로 다시 협상하는 것으로 하지요. 나는 협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습니다.”수란석은 이를 악물며 불만을 드러냈다. “나약하오, 정말 나약하오!” 그는 장공주가 서둘러 귀국하려는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속으로 향병을 원망했다. “난 동의할 수 없소. 국경 문제는 분명히 해야 하오.”장공주는 화가 나 향로를 내던지며 강하게 명령했다. “당장 나가서 다시 작성하십시오.”한편, 북명황실의 의논 자리에서는 새로운 국면이 펼쳐졌다. 단신의는 정좌에 앉았고 무소위조차도 그 옆에 앉아 있었다. 만종문의 구성원들은 세력을 등에 업고 몸을 꼿꼿이 세우며 잘난 척했다.그러자 단신의가 설명했다. “이번에 사용된
향병은 뺨을 맞은 얼굴을 가린채 억울함과 분노를 모두 토해냈다. “장공주님. 태자 전하께서 얼마나 비참하게 사망하셨는지 잊으셨습니까? 그건 우리 서경 백성들의 영원한 고통인데 어찌 원수를 갚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태자 전하는 장공주님의 친동생이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모진 선택을 할 수가 있습니까?” 장공주가 움켜쥔 손바닥은 젖어 있었고 불빛에 비친 그녀의 창백한 얼굴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너는 내가 그를 위해 복수를 하지 않으려고 전쟁을 반대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장공주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더니 눈빛에 노기로 가득 찼다. 그녀는 아직 허약하지만 손을 뻗어 향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향병, 다른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내 모든 계획과 절차를 너에게 말했고, 내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나를 가장 잘 알아야 하는 사람이 복수에 눈이 멀어 정세를 조금도 파악하지 않다니. 넌 경역에게 충성을 다했으니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거라. 그가 지금 상국과 전쟁이 일어나기를 바라겠느냐?” 그러자 향병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복수를 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저도 지금 내우외환의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식량 30만 석과 소성을 요구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승리할 수 있으니까요. 장공주님, 저희는 지금 승리로 하늘에 계신 태자를 위로해야 합니다.” 장공주는 오열하는 향병을 보며 말할 수 없는 분노와 침통함을 느꼈다.그녀는 안운여와 곽아정을 올려다보더니 말했다.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희도 향병의 말에 동의하느냐? 뒤에서 나를 모해할 생각 하지 말고 이 참에 다 말하거라.” 곽아정과 안운여는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장공주님, 동의할 수 없습니다.” 향병은 고개를 돌려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안운여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운여, 너도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이냐? 넌 전하의 보살핌을 잊었느냐? 복수할 생각이 전혀 없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