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석은 사여묵과 상의하는 척하며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다. 주변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하는지 듣지 못했고, 하녀와 호위병도 귀를 쫑긋 세웠지만 아무것도 들을 수 없어 초조해 보였다. 한참 후에야 사여묵이 고개를 끄덕였고, 송석석이 말했다. "좋소. 우리 함께 진성으로 가도록 하지." 그제야 하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감사하옵니다, 부인께서는 참으로 자비로우십니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송석석이 대뜸 물었다. 하녀는 몸을 낮추며 대답했다. "소녀의 이름은 향귀라 하옵니다." "호위병 너는?" 송석석이 다시 물었다. "저는 오동입니다." 건장한 체격일 가진 그는 성실해 보였으나, 겉모습과 내면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송석석도 알았다. 송석석은 몇 가지 더 물었지만, 별다른 정보를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애초에 이들로부터 많은 것을 듣고자 하는 의도는 없었다. 밤이 되어 야식을 마친 후, 단신의가 준비한 무색 무미한 작은 가루가 마부, 호위병 오동, 그리고 하녀 향귀를 모두 잠들게 만들었다. 방 안에서 고청란은 송석석과 사여묵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서 시만자가 그들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고개를 든 고청란이 애절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저의 계모는 저를 시켜 북명왕을 유혹해 왕비님과의 관계를 망치라고 하셨습니다. 왕께서 무예를 아는 여인을 좋아한다고 들었기에 저를 이용하려 하였지요. 그러나 저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설령 제가 그렇게 한다 해도, 제 어머니를 풀어주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와 쌍둥이 자매인 청무는 이미 승은백부에 들어가 임무를 완수했지만, 또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어머니는 끼니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며, 공주부의 지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두 분께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어머니를 구해주신다면, 저 고청란은 왕비님의 뜻대로 따를 것이며, 다음 생에라도 이 은혜를 꼭 갚을 것입니다." 송석석은 고청란을 바라보
고청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시만자와 송석석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갓 태어난 아기를 산 채로 바닥에 던져 죽이다니, 얼마나 잔혹하고 독해야 이런 짓을 할 수 있을까? 고청란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그런 끔찍한 일들이 공주부의 내당에서는 수도 없이 벌어졌습니다. 저에게도 원래 남동생이 있었고 어머니는 임신 중에 그 아이가 아들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녀는 아버지가 자신을 지켜주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고, 공주가 남아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기에 도망치려 했습니다. 남자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죽을 운명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공주는 사람을 보내어 어머니를 감시했습니다. 한 번 내당에 들어간 이상 다시 나올 방법은 오직 죽음뿐입니다." "아버지께서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고청란은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어머니는 아버지를 믿고, 탈출 기회를 만들어 줄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마침내 좋은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바로 계모가 연회에 참석하러 간 날이었지요. 그날은 매우 늦게 돌아올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탈출하지 못했군." 듣고 있던 시만자는 분노했다."탈출에 성공했지만, 도중에 붙잡혔습니다. 어머니는 마차에서 아이를 낳았고, 탯줄도 끊지 못한 채 공주부로 끌려갔습니다. 어머니와 남동생은 바닥에 끌려 다시 공주부의 춘향원으로 돌아왔고, 그때 제 동생은 이미 울음을 멈췄습니다. 피부가 찢어지고, 피와 살이 뒤엉켜 더는 숨을 쉬지 않았습니다." 전쟁터에서 수많은 참혹한 장면을 보았지만, 그건 두 나라의 싸움에서 목숨을 걸고 벌어지는 것이었기에 잔인함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왕실의 공주부에서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다니, 얼마나 사람의 마음이 비정하고 뒤틀려야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너무 소름이 끼쳤다.고청란은 송석석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왕비님께서 제 어머니나 다른 공주부의 첩들을 보신 적이 없으시니, 왜 계모가 그들을 그렇게 대했는지 이해하지 못하실 겁니다." 송석석은 갑자기 뭔가 떠올랐
고청란이 답했다. "공주부에 있을 때, 저희는 각자의 뜰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무술을 배우든, 언니처럼 진찰 가르침을 받든 모두 각자의 뜰에서만 이루어졌습니다. 서원에 대해서는 접촉할 기회가 없었지만, 하인들의 말에 따르면, 서원은 불상을 모시는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계모께서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그곳에서 향을 올리고 공양을 드린다고 했습니다." "불당이라고?" 송석석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곳이 단순한 불당일 리 없었다. 만약 불당이라면 장공주가 그렇게 긴장할 이유가 없었다. 어쨌든 그곳을 한 번 탐문해볼 필요는 있었다. "무술을 배웠다고?" 송석석이 다시 물었다."향귀는 제 사부였습니다. 몇 년간 우리 자매는 각자 한 가지씩은 배운 것이 있습니다. 우리를 키웠으니, 분명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헛되이 밥만 먹게 하지는 않았겠지요." 송석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장공주는 단순히 잔혹한 것이 아니라, 연왕과 결탁해 큰 일을 도모하고 있었기에 모든 자원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네 아비는 네 어미를 어떻게 대했느냐?" "아버지는 어머니를 각별히 아꼈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공주에게 약점을 잡혔지요." 고청란은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하루빨리 공주부를 벗어나기를 원했습니다. 아버지는 도울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는 돕지 않았지요. 어머니가 동생을 임신하고 나서야 아버지는 비로소 두려워졌고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어머니는 만삭이었기에 멀리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고청란의 목소리에는 고부진에 대한 원망이 가득했다. 장공주에 대한 원망에 못지않았다. 고청란은 말을 이었다. "지금 어머니는 지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우리 자매를 통제하기 위해서지요. 출발하기 전에 어머니를 한 번 보았는데, 어머니는 굶주린 상태라 사람의 모습이 아니였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버티지 못하고 목숨을 잃을까 두렵습니다." 고청란은 울먹이기 시작했다."이제 돌아가거라. 그 세 사람은 내가 잠들게
다음 날, 향귀와 호위병은 자신들이 전날 밤 중독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몸을 뒤진 흔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자기는 다시 묶여 있었지만, 워낙 신중한 사람들이라 한눈에 수색을 당한 것을 알아차렸다. 향귀의 눈에 서늘한 기운이 번졌다. "좋은 징조다.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려고 수색을 한 게 분명하니, 그다음 일은 순조롭게 풀릴 것이다." 그녀는 고청란을 바라보며 말했다. "길에서 휴식을 취할 때, 최대한 북명왕과 단둘이 있을 기회를 노리거라. 무공에 능한 자를 선호하니 자연스럽게 보여주거라." 고개를 끄덕이던 고청란이 갑자기 이마를 짚었다."왜 이렇게 머리가 어지러운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향귀는 담담했다."정상이다. 우리 모두 그들에게 중독된 것이니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것이다." 향귀는 다시 고청란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기회가 되면 북명왕에게 다가가는 것을 잊지 말거라. 그러고 보니 이번 작전은 실패한 것 같구나. 서녕으로 향하기 전에 북명왕비도 함께 있을 줄은 몰랐구나. 공주의 편지가 너무 늦게 도착한 탓이다." "북명왕비는 밤에 성을 나섰으니, 계모께서 모르신 것도 당연하지요." 팔짱을 낀 향귀는 마치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는 듯이 말했다. "그렇군. 북명왕비가 있으면 일이 좀 까다로워지겠지만, 상황이 변했다고 해서 계획을 바꿀 수는 없다. 어떻게든 그들 부부가 다투게 하고, 마음에 금이 가도록 해야 한다. 만약 북명왕부의 첩이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고청란은 물 한 모금을 마셨다.갓 진시를 지났을 뿐인데 더운 열기가 몰려왔다."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할 겁니다, 사부님." 향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말거라. 공주님은 한 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다. 네가 임무를 완수하면, 네 어미는 지하 감옥에서 풀려날 것이다. 만약 네가 첩이 된다면, 어머니의 대우도 훨씬 좋아질 거다." 고청란도 단호한 눈빛으로 답했다."알겠습니다. 공주 계모님을 만
그러던 어느 날, 길옆 작은 숲에서 잠시 쉬던 중, 약 1리 떨어진 곳에 맑고 투명한 냇가가 보였다. 더운 날씨 탓에 모두가 그곳으로 뛰어갔다. 고청란 역시 냇가에서 손을 씻고 있었지만, 남자들처럼 물속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남자들이 신나게 노는 것을 보고 그녀는 나뭇가지를 집어 들어 춤을 추듯 무술 동작을 선보였다. 큰 살상력을 지니지는 않았지만, 아름다웠다. 발끝으로 뛰어올라 회전하며 나뭇가지를 휘두르는 모습은 마치 춤과 무술을 결합한 것처럼 매우 매력적이었다. 이 광경에 남자들도 물에서 나왔고 함께 주먹을 휘두르며 즐기기 시작했다. 향귀는 멀리서 사여묵을 바라보았다. 사여묵은 고청란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눈빛에는 놀라움과 감탄이 서려 있었다.향귀는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호위병 오동과 보았다. 역시나 북명왕은 무술을 아는 여인에게 특별히 관심을 보였다. 한참 후, 사여묵은 고개를 돌려, 옆에서 시만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송석석을 살짝 보며 마음속으로 안도했다. 그러고는 그들 쪽으로 다가갔다. 은근히 편치 않은 눈빛을 보낸 남자의 행동을 향귀는 놓치지 않았다. 비록 북명왕비가 함께 있어 계획이 순조롭지 않았으나, 사여묵이 그 함정에 빠진 것이 분명했다. 사여묵은 송석석 옆에 앉자 시만자가 자리를 비우며 고청란에게 다가갔다."검 춤을 잘 추는구나." 고청란은 조금 부끄러운 듯 말했다. "그저 겉모습만 그럴듯할 뿐이니 진성까지 보호 부탁드립니다." 시만자는 밝은 얼굴로 말했다. "나도 무술을 아는 사람이다. 진성에 가면 한 번 겨뤄보자꾸나." 그러자 고청란은 살짝 향귀의 눈치를 살폈다."그야 뭐…" 기쁜 마음으로 다가온 향귀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아가씨를 좋아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 아가씨가 꼭 댁을 방문해 예를 다하겠습니다. 댁은 어디 신지요?" 시만자는 눈살을 찌푸렸다."너는 하녀에 불과한데, 너무 말이 많구나." 향귀는 급히 몸을 낮췄다."송구하옵니다. 소녀가
송석석은 얼굴을 돌리고 웃었다.‘당연히 단신의를 찾아 조사를 받아봐야지. 이 세상의 남자들은 자기애가 많지 않다니까.’사여묵은 이를 갈며 물었다.“너 설마 내가 그런 병에 걸렸다고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줄곧 전쟁터에 있었는데 정말 날 의심하는 거야?”송석석은 시만자의 손을 잡고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향귀는 사여묵이 화를 내고 송석석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이 싸울 줄 알았다. 하지만 진성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진성에 돌아오자 벌써 8월이 다 되어갔다.예부는 이미 그들이 언제 도착할 지 듣고 이 기쁜 소식을 온 진성에 퍼뜨렸다.백성들의 감정은 가장 순박해서 영웅이 돌아오자 모든 사람들이 골목에서 나와 축하를 건넸다. 송석석은 입성하기 전에 고청란에게 말을 건네며 다음에 다시 찾아오라고 했다. 그러자 고청란은 몸을 낮추어 인사를 올렸다. “낭자 댁은 어디에 있습니까?”그러자 송석석이 대답했다.“북명황실이오.”그러자 고청란은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북명황실? 그럼 당신이 북명왕비입니까?”그녀가 서둘러 향귀와 무릎을 꿇고 인사를 하려 하자 송석석이 말했다.“예의를 차릴 필요 없소. 내일 와서 말을 돌려주면 되오.”송석석은 말을 마치고 사여묵에게 손을 내밀었다. 사여묵은 고청란의 얼굴을 보더니 송석석의 손을 잡고 힘껏 잡아당기더니 두 사람이 한 말에 올라탔다.향귀는 사여묵의 눈빛을 유심히 보더니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가장 어려운 것은 황실에 들어가려면 먼저 북명왕비를 공략해서 그녀의 신임을 얻어야 했다.다시 말해 길을 좀 돌아서 가야 했던 것이었다.하지만 북명왕비가 그녀를 친구로 여긴다면 친구와 부군의 이중 배신으로 북명왕비에겐 더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그래서 그들이 입성한 후 향귀는 고청란에게 말했다.“내일 말을 돌려주러 갈 때 선물을 준비해서 북명왕비에게 잘 보이거라.”고청란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네.” 입성을 준비하던
전북망은 오늘 당직이어서 경위와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이 그의 곁으로 한 명씩 지나갈 때 그는 모든 사람을 자세히 보았다. 방시원을 보았을 때 그가 예전처럼 풍채가 넘치지 않은 모습을 보고 마음이 복잡해지고 부끄러워졌다. ‘영웅.. 나도 한때는 영웅이었는데. 성릉관에서 돌아왔을 때도 백성들이 이렇게 환호성을 질렀었지.’ 지위가 가장 낮은 경위로 전락하여 더 이상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하고 더 이상 중임을 부여받을 수 없게 된 전북망은 그들을 보며 뼛속까지 비천하다는 것을 느꼈다. 전북망은 이제 왕청여의 오빠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더 이상 재기할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다. 예전의 자신이 모든 것을 너무 좋게 생각했던 것 같았다. ‘그렇게 쉬운 공이 어디 있겠어? 성릉관에서도 소장군이 칼을 막아주지 않았다면 벌써 죽었을 것이야.’ 남강 전장에서 성을 공격할 때도 산더미 같이 쌓인 시체와 피가 강이 되어 흐르는 광경을 보고 그는 비로소 전쟁터에서 무공을 세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을까? 방시원처럼 포로로 잡혀갔다가 다시 도망쳐 정보영을 꾸릴 수 있는 건 그들밖에 없을 것이었다. 포로를 생각하니 그는 발꿈치에서 머리끝까지 한기가 느껴졌다. 그는 성릉관의 일이 결국 어떻게 될지 몰랐다. 지금은 황제가 추궁하지 않았지만 사람을 보내 장군부를 주시하고 있었다. 적어도 확실한 건 서경에 변화가 생기면 장군부에도 변화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태자는 서경 황제만큼 자신의 체면을 신경 쓰지 않았다. 떠들썩한 영광은 남의 것이고, 거지 같은 생활은 결국 전북망의 몫이 되자 순간 끝없는 절망감을 느꼈다. 전북망은 순간 이방이 힘차게 단지 성공하고 싶을 뿐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는 그 사람들을 올려다보며 마치 예전의 자신과 이방을 보는 것 같았다. 인파가 붐벼서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모두가 열한 명의 영웅과 그들을 구출해 낸 북명왕만 바라보고 있었다. 북명왕 또
혜 태비는 눈물을 닦으며 하인이 외부의 상황을 보고하는 것을 듣고 자신이 평범한 백성이 아니라 밖에 나가 함께 즐기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요즘 설화 선생들이 하는 이야기를 하인들이 모두 아뢰었는데 그녀는 매우 감동했다. 다만 그녀가 지금 눈물을 흘리는 것은 바깥의 떠들썩한 분위기 때문이 아니라 송석석이 돌아온 후 자신을 방안에 가두고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혜 태비도 송석석이 왜 괴로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 생사의 재회에 그녀가 없었고 그녀의 부친과 오빠들이 모두 전장에서 희생했기 때문이었다. “이리 오너라.” 혜 태비는 무릎을 꿇고 인사하는 며느리를 보며 손짓했다. “이리 와서 내 옆에 앉거라.” 송석석은 몸을 일으켜 혜 태비에게 다가가려는데 갑자기 혜 태비에게 끌려 그녀의 품에 안겨 버렸다. 그렇게 그녀는 혜 태비에게 꽉 안겼는데, 갑자기 울먹이는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영원히 나를 어머니로 생각하고 가족으로 생각하거라. 나도 영원히 널 보호해 주마.” 송석석은 너무 꽉 안겨 숨이 쉬어지지 않아 고개를 들어 혜 태비와 거리를 두려고 했지만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먹먹하고, 코끝이 찡해오며 눈가가 촉촉해지더니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송석석은 태후의 보호를 받던 시어머니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혜 태비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던 걸로 알고 있었는데 이런 말을 하니 순간 울고 싶었다. 하지만 송석석은 40이 넘은 시어머니가 몸매가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다. 얼굴이 가슴에 묻혀 하마터면 질식할 뻔했다.사여묵은 이 장면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먼저 송석석을 안아주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그래서 괜히 어머니가 송석석에게 감동을 준 게 화가 났다. 고 씨 유모는 옆에서 눈물을 훔치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야. 태비마마께서 사람을 아낄 줄 알아서 다행이야.’ 포옹한 후 태비는 송석석을 놓고 모두 앉게 하고 분부했다. “여봐라, 차를 내오너라.” 그녀는
그날 밤, 연왕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게 되었다.솔직히 지금 상황은 연왕의 오랜 계획과 차질이 조금 있었다. 지방 지역에서 역모를 일으키고 심지어 진성에 준비된 게 아무것도 없이 무작정 진성까지 쳐들어간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연왕과 무상의 계획은 따로 있었다.일단 병사들을 일정한 수량까지 늘이고 아무도 모르게 서서히 진성 일대로 전이하여 병사들을 안치한 뒤 적절한 시기를 기다릴 생각이었다.그땐 사온이 진성에서 계략을 짜고 있을 것이고 많은 세가들의 지지도 받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예전에 고부진의 딸들을 세가에 시집 보냈기에 세가들은 지지할 수밖에 없다.그리고 나서 적절한 시기만 잘 고르면 반드시 성공한다. 진성에 전란이 일어나고 산적과 유랑민들이 판을 칠 때 연왕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성내로 쳐들어가 바로 궁 전체를 포위할 생각이었다.하지만 지금, 갑자기 대석촌에 일이 터져 버려 사청엽이 체포된 탓에 연왕은 급하게 병사들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승산이 너무 낮았기에 연왕도 망설였던 것이며 지방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난다고 해서 진성까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물론 백성들은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한동안 수군거리겠지만 대부분 백성들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반란과 격문을 그저 우습게 생각할 것이다.그뿐만 아니라 사국에서 남강을 공격한다고 해도 처음 있는 일이 아니고 사국에서 오래 전부터 호시탐탐 야망을 보였기에 황제가 나랏일에 관심이 없어서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그리고 아직 사국과의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았고 전패했다는 소식도 없기에 상국 무장이 무능하다는 비판을 하기에도 애매했다.나라가 평안하고 백성들이 태평한 상황에서 연주도 꽤 부유한 땅이었기에 괜히 문제를 만들고 싶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때문에 모두 그저 연왕이 언제 잡히는지, 언제 역모죄로 목이 잘릴지를 보고 싶어할 뿐이었다. 그리고 상국에는 사국 사람들을 물리친 북명왕이 있기에 다들 역적 따위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으며 되레 연왕이 왜 역모를 일으키
무상이 아니라는 말에 연왕은 회왕에게로 고개를 돌렸고 화들짝 놀란 회왕이 변명하려던 그때, 연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회왕일 리는 없어.”회왕은 의심조차 하지 않는 연왕의 태도에 기분이 조금 묘했다.한편, 연왕은 당연히 회왕을 의심할 리가 없었다. 회왕은 무일푼으로 연주로 왔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진성에서도 아무런 성과도 따내지 못했으며 사온의 비교 대상이 될 자격조차 없었다.회왕이 연주에 온 뒤로 연주 백성들은 회왕을 만나면 겉으로는 왕야라고 부르며 인사를 올리긴 하지만 뒤에서는 다들 그를 만만하게 여기고 아니꼽게 생각했다.때문에 회왕은 절대 마총우를 명령하지 못한다.조금씩 차분해진 연왕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말했다.“다들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마총우 그자가 귀순한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나를 무너트리고 싶어서 일부러 꾸민 짓인가?”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무상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마총우가 귀순한 건 절대 아닐 것입니다. 왕야께서 격문을 보낸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고 더군다나 저희 병력은 대여섯 군데에 분산되어 있습니다. 전의하는 데만 6개월 넘게 걸렸는데 조정에서 절대 쉽게 조사해낼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조정에서 마총우 그자를 찾아서 귀순 시킨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날 일부러 무너트리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네. 그럼 그자가 누구일 것 같은가?”연왕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연왕이 몇 년 동안 끌어 모은 사람들 중에 황제의 친인척과 세도가들도 있지만 친왕은 연왕과 회와 두 사람밖에 없었다.연왕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상대가 없었다. 연왕의 부하들 중에서 황제의 친인척들이 제일 무능하고 멍청했으며 파장을 일으킬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종합적으로 생각해보았을 때 가장 의심되는 상대는 여전히 무상이었다.하지만 역모의 마음을 품은 연왕이 무상을 끌어들이고 나서 지금까지 무상은 강한 충성심을 보였고 심지어 평소에 연왕에게 쓸만한 제안도 가장 많이 하고 계책
사청엽의 자백과 함께, 사온이 죽기 전에 남겼던 ‘오라버니를 도와 반역을 꾀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반성문으로 인해 연왕의 역모는 확실해졌다. 이에 숙청제는 명령을 내려 연왕에게 진성으로 돌아와 사죄하라고 지시했다.그리고 연주지부에 또 다른 명령을 내렸는데 바로 연주에서 연왕을 제압해서 진성으로 압송하라는 내용이었다. 이젠 연왕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까지 온 것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는데, 그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사람들 앞에서의 위엄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이때 함께 역모를 꾸민 자들은 모두 패기와 결단력을 갖춘 새로운 지도자가 나타나 연왕을 대신하기를 바랐다.아마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무상이 알려준 것이었다. 무상이 요즘 회왕과 비밀리에 돌아다닌 것도 이것 때문이었다. 연왕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전에 남강 부장이 사국인과 결탁하여 사국 사병을 남강으로 들여보내 전쟁이 발발할 것이라는 소문이 각지에서 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러 곳에서 산적과 도비들이 반란을 일으켜 산을 점령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조정에 대한 성토가 끊임없이 쏟아지자 연왕은 분노하며 반기를 들고 일어섰다. 그는 황제가 어리석다고 비판하며, “무장은 무능하고 간신이 정권을 장악했으니, 내가 하늘을 대신하여 도를 행하고 정의를 바로잡겠다. 뜻을 함께하는 자들은 나를 따르라!”고 외쳤다.하지만 격문이 나가고 반기도 일으켰지만 몇 곳의 산적들만 반란을 일으켰고 그의 사병도 삼천 명 밖에 남지 않았다. 연주에 있는 오 백부병도 삼천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원래 옹현에서 이전한 사병은 약 35000명으로 마총우가 통솔하고 있었는데 전에 한 약속에 따르면 그가 격문을 보내 성토를 하면 마총우가 군사를 이끌고 소씨, 송씨, 가씨 세 저택을 점령하는 것이었다.왜냐하면 이 세 곳은 강남의 경비소에서 가장 멀기 때문에 3만 명의 병력이 세 곳을 점령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
이튿날, 두 사람은 정오가 돼서야 깨어났다. 눈동자가 마주치자 사여묵은 잠을 자고 나니 기운이 돌아온 것 같아 그녀를 끌어안고 입술로 그녀의 귀를 비볐다. 그러자 송석석이 말했다. “일어나야지요.” 보주는 밖에서 인기척을 듣고 그들이 다시 잠이 들까 봐 급히 말했다. “왕야님, 왕비님, 태비께서 사람을 세 번이나 보냈습니다.” 사여묵은 작은 산봉우리에 올려놓았던 손을 거두고 맹렬한 눈빛으로 포악하고 오만하게 말했다. “지금은 당신 말 듣고 밤에는 내 말 듣도록 하오.” 어젯밤엔 사여묵이 너무 늦게 돌아와서 태비마마에게 인사드리러 가지 않았다. 예전에 태비는 그가 어디로 가든지, 심지어 전쟁터에 나가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가 전쟁터의 위험을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태후께서는 항상 자신의 아들이 천하무적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저택 반 이상의 인원이 출동했고 모두들 긴장한 분위기를 조성해서 그녀도 긴장하기 시작했다. 어젯밤에 송석석이 돌아왔지만 사여묵이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궁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를 실제로 보기 전까지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을 보냈는데 몇 번이고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태비는 믿을 수가 없었다. 예전에 조화가 없을 때도 두 사람은 모두 진시에 일어났기에 태비는 그들이 그렇게 까지 게으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혜 태비는 근심걱정을 하는 게 무슨 느낌인지 이제야 알았다. 마침내 그들이 손을 잡고 나타난 것을 보니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두 사람은 광소매 옷을 입고 왔는데 남자는 위풍이 당당했고 여자는 늠름함이 느껴졌다. 혜태비는 그들이 예의 바르게 절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앉으라고 한 적은 처음이었다.이번엔 걱정을 너무 많이 해서 마음에 너무 큰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해서 그들의 절을 받아도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문안을 드린 후, 두 사람은 먼저 각각 대리사와 경위부로 돌아갔다. 오늘은 사청엽을 심문하는 날이었다. 사청엽은 말라서 온몸
숙청제는 사여묵이 고생한 것을 알면서도 그를 남겨놓고 병부상서와 시랑, 그리고 방시원을 궁으로 불러들여 의논을 했다. 왜냐하면 반드시 상황을 종합해서 여러 가지 상황을 추정한 뒤 기존 병력에 맞춰 배치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가 가장 걱정하는 건 여전히 남강이었지만 사여묵이 서경의 수란석을 언급했을 때 그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사국과 서경을 동시에 결탁할 능력은 없어.” 상국은 서경에게 끝까지 당당하지 못했다. 협상이 끝난 상태가 아니라 그들은 서경에게 설명을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가장 큰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면 대체 얼마나 잠복해 있었고 얼마나 오랫동안 계획을 세웠냐는 것이었다. 병부 이덕회는 눈이 휘둥그레졌고 각지의 지도를 반복해서 보았다. 그 지형들은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익숙해졌다. ‘젠장. 이런 곳에 도적이나 사병이 있다면 토벌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그는 사여묵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도적들에 대한 책략은 무엇입니까?” “발견하는 대로 정리하는 것이지.” 그러자 이덕회는 얼떨떨해져서 사여묵이 그런 수준 없는 말을 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누가 그걸 몰라? 문제는 절차가 있어야 하는 거잖아.’ “왕야님, 이게 다인가요? 다른 사병은 있습니까?”“있다. 옹현의 사병이 대체 어디로 이동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 내가 보기엔 일단 흩어져서 반란을 일으킬 때 다시 모일 계획일 것 같아. 그러니 찾을 필요가 없이 분란을 일으키면 사병은 자연스럽게 나타날 것이지.”병부의 관리들은 지도를 보고 병마의 분포에 대응했다. 남강과 성릉관의 병마는 움직일 수 없고 경외 주둔군들도 움직일 수 없으니 광신과 강남의 병마만 움직일 수 있었다.숙청제는 들으며 연왕이 반란을 일으킬 것은 걱정하지 않고 상릉관과 남강에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을 했다.그는 문득 자신이 사여묵을 경계하고 있는 동안 역적은 끊임없이 책략을 쌓고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
성릉관에 도착한 전북망은 수부로 찾아가서 생신 선물을 드렸다. 그는 혼날 준비를 다 했는데 결국 소 씨 가문에서는 사람을 보내 선물만 받아가고 그들을 안치해서 며칠 쉬었다가 남강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의뢰로 아무도 그를 욕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를 혼내지 않았다. 그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피곤한 발걸음을 끌고 나갔다. “이 성릉관의 수부는 우리가 남강에 있을 때의 수부와 비교가 되지 안 되는군. 넓긴 하지만 너무 소박하고 누추해서 변변한 것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수부를 나서자 그와 함께 온 병사 양관이 말했다. 그러자 전북망은 한 마디만 했다. “왕 원수와 소대장군을 비교하지 마라.” 그리고 그는 마음속으로 한 마디 더 했다. ‘왕표는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 양관은 원수를 비난하지 말라고 하는 줄 알고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대영에 안치되어 대통포에 묵게 되었다. 물론 그들이 더 일찍 남강으로 돌아가는 것도 가능했다. 그들 넷은 아무도 남강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감히 말하지 못했다. 왕표는 그들에게 이곳에서 소 씨 가문의 연병술을 배워서 설 후에나 남강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무런 문서도 주지 않아 그들은 여전히 남강의 병사들이었다. 그러니 여기에 남아 있는다면 이곳의 장수들도 아마 그들을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었다.게다가 전북망은 자신의 명성이 성릉관에서 얼마나 구린지 알고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우선 머물면서 천천히 방법을 강구하여 내년 초봄까지 머물다가 남강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온 날은 3월 15일이라 청명이 지났다.매산 사람들은 이미 매산으로 돌아갔다. 무소위는 원래 진성에 가서 며칠 묵고 싶었지만 그들이 바쁘다는 것을 알았고 자신이 가면 그들이 불편할까 봐 가지 않았다.진성에 도착한 후 사여묵은 먼저 사청엽을 대리사에 가둔 후 입궁해서 복명하고, 송석석은 먼저 저택으로 돌아갔다.염 선생은 피로로 가득 찬 그들의 얼굴을 보고 급히 사람을 시켜 따뜻한
그가 대답하는 것을 듣고서야 고청우는 울음을 그쳤다. 하지만 손끝은 여전히 그의 옷을 움켜쥐고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얼굴엔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눈 밑에는 냉랭한 혐오감이 감돌았고 방금 전의 애처로움은 온데간데 사라졌다. 그녀는 눈앞의 늙은이를 미워했고 그녀의 미모와 몸을 이용하는 모든 사람들을 미워했다. 그녀는 바둑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진심을 얻은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길이 없었다. 장사꾼에게 시집을 가자니 그 고생은 못할 것 같고, 그러니 이용당하더라도 편히 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진성을 떠나 며칠 동안 정처 없이 돌아다닌 후, 그녀는 자신이 영원히 부귀영화를 떠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왕표가 그녀를 찾았을 때 그녀는 망설임 없이 승낙했던 것이었다. 그때의 그녀에게 있어서 그건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녀는 자신의 출신은 귀족에게 정식으로 시집가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량소가 평생 그녀만을 사랑하겠다고 말했지만 결국 그녀에게 살 길을 열어주지 못했고 결국 첩으로만 살았다. 오기도 없는 량소를 생각하자 그녀는 아직도 재수가 없는 것 같았다. 왕표의 본질은 량소와 같았다. 현모양처가 있는데도 잘 대해주지 않고 제대로 된 일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최 씨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고 오히려 최 씨가 자신 때문에 왕표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으니 자신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에서 나온 말은 민감하고 나약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의부님의 말씀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지만 만약에 사실이라면 우리 세 가족이 전화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조금 힘들어도 관인과 아들이 제 곁에 있다면 전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래, 당신 말 들으마.” 왕표는 더욱 마음이 아팠다. “만약 정말 전쟁이 일어난다면 내가 원수고 뭐고 다 버리고 당신을 데리고 이곳을 떠날 게. 하지만 걱정하지 마. 우리 손엔 은자가 조금 있으니 그렇게 힘들지
시부인이 바로 그날의 고청우였다. 산후조리를 마친 그녀는 얼굴에 빛이 났고 몸집은 붓기가 하나도 없었으며 여전히 소녀처럼 아름다웠다. 남강에는 모래바람 때문에 겨울엔 아주 추웠지만 그녀의 피부는 기름을 바른 것처럼 부드러워 보였다. 저택의 좋은 물건은 모두 그녀가 사용했다. 매일 낙타젖으로 제비집을 삶고 양젖으로 목욕을 했는데 진성에서 돈이 들어오지 않아도 그녀는 조금도 절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보양을 하니 적어도 왕표의 눈에는 지극히 고귀한 존재로 보였고 그녀의 연약하고 부드러운 손을 잡으면 그의 마음도 나른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번 생에 국색천향의 미인, 매력이 있는 미인, 온유한 미인 등 많이 만나보았지만 그중에서도 하필이면 여우 같은 고청우가 그의 마음에 들었다. 방천허마저도 그녀의 신분이 의심스러우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왕표는 그런 말을 듣고 오히려 욕을 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고청우는 진작에 자신의 신분을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처음엔 이곳에 와서 살 길을 찾고 싶었을 뿐 그에게 몸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왕표에게 엄격한 부인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고청우가 왕표를 유혹한 게 아니라 왕표가 끝까지 쫓아가서 같이 살게 된 것이었다. 왕표는 그녀를 갖기 위해 많은 방법을 썼는데 처음엔 그녀를 수양딸로 삼겠다고까지 했었다. 그래서 나중에 그들이 부부가 된 후에도 고청우는 밤에 가끔씩 그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왕표는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찌릿한 것 같았다.그는 아들이 생긴 데다 아름다운 부인을 보면서 심지어 여생을 남강에서 보내는 것도 행복한 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결코 최 씨에게 부당하게 대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요 몇 년 동안 그녀가 중책을 맡아 집안의 재산을 처리하도록 내버려두었고, 그가 밖에서 군사를 이끌 기에 백작 부인인 그녀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앞으로
사여묵은 원래 누군가가 연왕의 배후에서 조종을 한다고 여겼지만 목종욱이 함부로 추측할까 봐 말을 하지 않았다. “처음엔 실증도 없었으니 연왕을 죽였다면 황제는 황숙을 이유 없이 죽인 혼군이라는 말을 들을 것이 아닌가? 그럼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 구실이 하나 더 생기는 것이지. 반란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니 그의 세력이 이 정도까지 확장되었으니 누군가 깃발을 들것이다. 그를 연주로 보낸 이유는 그가 애초에 사온이 접촉했던 인맥과 다시 연루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야.” 그러자 목종욱이 말했다. “그런 것이군요.” “내 추측이 맞다면 그들이 거사를 일으키려 한다면 분명 각지에서 트집을 찾아 봉기를 일으킬 것이니 조심해야 하네. 특히 강남은 우리 상국의 공창과 상회의 땅이니 그곳을 빼앗긴다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사여묵이 재차 당부하자 목종욱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목숨을 걸고라도 그들이 강남을 차지하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모두 인계한 후 사여묵도 진성으로 떠나는 길에 올랐다. 그는 지금 조금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사청엽이 진성으로 압송되었다. 그는 평생 체면에 신경을 썼는데 이젠 호위가 앞뒤 좌우에서 호송하는 건 흔치 않으니 이번 생에 소원을 이룬 셈이었다. 중간에 휴식할 때 송석석은 강철 바늘을 팔찌에 넣었다. 사병을 소탕할 때 팔찌의 강철 바늘을 다 썼는데 정말 사용하기 편리하다고 생각했다.특히 이런 산악전에서는 적이 분산되어 있어서 일단 발견하면 강철 바늘이 멀리까지 쏠 수 있어서 경공을 펼치지 않아도 되었다. 다만 그녀가 산에서 몇 번 넘어져서 팔찌가 약간 변형해서 사여묵이 역관에게 공구를 빌려 수리해 주었다. 복구하지 않으면 각도에 문제가 생겨 정확하게 발사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들이 진성으로 돌아갈 때 남강에 있던 전북망도 마침내 성릉관에 도착했다. 왕표가 특별히 그들 몇 명을 성릉관으로 보내 소대장군에게 생신 선물을 주겠다고 했다. 전북망을 따라갔던 세 사람은 모두 전북망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