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향귀와 호위병은 자신들이 전날 밤 중독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몸을 뒤진 흔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자기는 다시 묶여 있었지만, 워낙 신중한 사람들이라 한눈에 수색을 당한 것을 알아차렸다. 향귀의 눈에 서늘한 기운이 번졌다. "좋은 징조다.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려고 수색을 한 게 분명하니, 그다음 일은 순조롭게 풀릴 것이다." 그녀는 고청란을 바라보며 말했다. "길에서 휴식을 취할 때, 최대한 북명왕과 단둘이 있을 기회를 노리거라. 무공에 능한 자를 선호하니 자연스럽게 보여주거라." 고개를 끄덕이던 고청란이 갑자기 이마를 짚었다."왜 이렇게 머리가 어지러운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향귀는 담담했다."정상이다. 우리 모두 그들에게 중독된 것이니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것이다." 향귀는 다시 고청란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기회가 되면 북명왕에게 다가가는 것을 잊지 말거라. 그러고 보니 이번 작전은 실패한 것 같구나. 서녕으로 향하기 전에 북명왕비도 함께 있을 줄은 몰랐구나. 공주의 편지가 너무 늦게 도착한 탓이다." "북명왕비는 밤에 성을 나섰으니, 계모께서 모르신 것도 당연하지요." 팔짱을 낀 향귀는 마치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는 듯이 말했다. "그렇군. 북명왕비가 있으면 일이 좀 까다로워지겠지만, 상황이 변했다고 해서 계획을 바꿀 수는 없다. 어떻게든 그들 부부가 다투게 하고, 마음에 금이 가도록 해야 한다. 만약 북명왕부의 첩이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고청란은 물 한 모금을 마셨다.갓 진시를 지났을 뿐인데 더운 열기가 몰려왔다."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할 겁니다, 사부님." 향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말거라. 공주님은 한 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다. 네가 임무를 완수하면, 네 어미는 지하 감옥에서 풀려날 것이다. 만약 네가 첩이 된다면, 어머니의 대우도 훨씬 좋아질 거다." 고청란도 단호한 눈빛으로 답했다."알겠습니다. 공주 계모님을 만
그러던 어느 날, 길옆 작은 숲에서 잠시 쉬던 중, 약 1리 떨어진 곳에 맑고 투명한 냇가가 보였다. 더운 날씨 탓에 모두가 그곳으로 뛰어갔다. 고청란 역시 냇가에서 손을 씻고 있었지만, 남자들처럼 물속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남자들이 신나게 노는 것을 보고 그녀는 나뭇가지를 집어 들어 춤을 추듯 무술 동작을 선보였다. 큰 살상력을 지니지는 않았지만, 아름다웠다. 발끝으로 뛰어올라 회전하며 나뭇가지를 휘두르는 모습은 마치 춤과 무술을 결합한 것처럼 매우 매력적이었다. 이 광경에 남자들도 물에서 나왔고 함께 주먹을 휘두르며 즐기기 시작했다. 향귀는 멀리서 사여묵을 바라보았다. 사여묵은 고청란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눈빛에는 놀라움과 감탄이 서려 있었다.향귀는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호위병 오동과 보았다. 역시나 북명왕은 무술을 아는 여인에게 특별히 관심을 보였다. 한참 후, 사여묵은 고개를 돌려, 옆에서 시만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송석석을 살짝 보며 마음속으로 안도했다. 그러고는 그들 쪽으로 다가갔다. 은근히 편치 않은 눈빛을 보낸 남자의 행동을 향귀는 놓치지 않았다. 비록 북명왕비가 함께 있어 계획이 순조롭지 않았으나, 사여묵이 그 함정에 빠진 것이 분명했다. 사여묵은 송석석 옆에 앉자 시만자가 자리를 비우며 고청란에게 다가갔다."검 춤을 잘 추는구나." 고청란은 조금 부끄러운 듯 말했다. "그저 겉모습만 그럴듯할 뿐이니 진성까지 보호 부탁드립니다." 시만자는 밝은 얼굴로 말했다. "나도 무술을 아는 사람이다. 진성에 가면 한 번 겨뤄보자꾸나." 그러자 고청란은 살짝 향귀의 눈치를 살폈다."그야 뭐…" 기쁜 마음으로 다가온 향귀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아가씨를 좋아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 아가씨가 꼭 댁을 방문해 예를 다하겠습니다. 댁은 어디 신지요?" 시만자는 눈살을 찌푸렸다."너는 하녀에 불과한데, 너무 말이 많구나." 향귀는 급히 몸을 낮췄다."송구하옵니다. 소녀가
송석석은 얼굴을 돌리고 웃었다.‘당연히 단신의를 찾아 조사를 받아봐야지. 이 세상의 남자들은 자기애가 많지 않다니까.’사여묵은 이를 갈며 물었다.“너 설마 내가 그런 병에 걸렸다고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줄곧 전쟁터에 있었는데 정말 날 의심하는 거야?”송석석은 시만자의 손을 잡고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향귀는 사여묵이 화를 내고 송석석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이 싸울 줄 알았다. 하지만 진성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진성에 돌아오자 벌써 8월이 다 되어갔다.예부는 이미 그들이 언제 도착할 지 듣고 이 기쁜 소식을 온 진성에 퍼뜨렸다.백성들의 감정은 가장 순박해서 영웅이 돌아오자 모든 사람들이 골목에서 나와 축하를 건넸다. 송석석은 입성하기 전에 고청란에게 말을 건네며 다음에 다시 찾아오라고 했다. 그러자 고청란은 몸을 낮추어 인사를 올렸다. “낭자 댁은 어디에 있습니까?”그러자 송석석이 대답했다.“북명황실이오.”그러자 고청란은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북명황실? 그럼 당신이 북명왕비입니까?”그녀가 서둘러 향귀와 무릎을 꿇고 인사를 하려 하자 송석석이 말했다.“예의를 차릴 필요 없소. 내일 와서 말을 돌려주면 되오.”송석석은 말을 마치고 사여묵에게 손을 내밀었다. 사여묵은 고청란의 얼굴을 보더니 송석석의 손을 잡고 힘껏 잡아당기더니 두 사람이 한 말에 올라탔다.향귀는 사여묵의 눈빛을 유심히 보더니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가장 어려운 것은 황실에 들어가려면 먼저 북명왕비를 공략해서 그녀의 신임을 얻어야 했다.다시 말해 길을 좀 돌아서 가야 했던 것이었다.하지만 북명왕비가 그녀를 친구로 여긴다면 친구와 부군의 이중 배신으로 북명왕비에겐 더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그래서 그들이 입성한 후 향귀는 고청란에게 말했다.“내일 말을 돌려주러 갈 때 선물을 준비해서 북명왕비에게 잘 보이거라.”고청란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네.” 입성을 준비하던
전북망은 오늘 당직이어서 경위와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이 그의 곁으로 한 명씩 지나갈 때 그는 모든 사람을 자세히 보았다. 방시원을 보았을 때 그가 예전처럼 풍채가 넘치지 않은 모습을 보고 마음이 복잡해지고 부끄러워졌다. ‘영웅.. 나도 한때는 영웅이었는데. 성릉관에서 돌아왔을 때도 백성들이 이렇게 환호성을 질렀었지.’ 지위가 가장 낮은 경위로 전락하여 더 이상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하고 더 이상 중임을 부여받을 수 없게 된 전북망은 그들을 보며 뼛속까지 비천하다는 것을 느꼈다. 전북망은 이제 왕청여의 오빠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더 이상 재기할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다. 예전의 자신이 모든 것을 너무 좋게 생각했던 것 같았다. ‘그렇게 쉬운 공이 어디 있겠어? 성릉관에서도 소장군이 칼을 막아주지 않았다면 벌써 죽었을 것이야.’ 남강 전장에서 성을 공격할 때도 산더미 같이 쌓인 시체와 피가 강이 되어 흐르는 광경을 보고 그는 비로소 전쟁터에서 무공을 세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을까? 방시원처럼 포로로 잡혀갔다가 다시 도망쳐 정보영을 꾸릴 수 있는 건 그들밖에 없을 것이었다. 포로를 생각하니 그는 발꿈치에서 머리끝까지 한기가 느껴졌다. 그는 성릉관의 일이 결국 어떻게 될지 몰랐다. 지금은 황제가 추궁하지 않았지만 사람을 보내 장군부를 주시하고 있었다. 적어도 확실한 건 서경에 변화가 생기면 장군부에도 변화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태자는 서경 황제만큼 자신의 체면을 신경 쓰지 않았다. 떠들썩한 영광은 남의 것이고, 거지 같은 생활은 결국 전북망의 몫이 되자 순간 끝없는 절망감을 느꼈다. 전북망은 순간 이방이 힘차게 단지 성공하고 싶을 뿐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는 그 사람들을 올려다보며 마치 예전의 자신과 이방을 보는 것 같았다. 인파가 붐벼서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모두가 열한 명의 영웅과 그들을 구출해 낸 북명왕만 바라보고 있었다. 북명왕 또
혜 태비는 눈물을 닦으며 하인이 외부의 상황을 보고하는 것을 듣고 자신이 평범한 백성이 아니라 밖에 나가 함께 즐기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요즘 설화 선생들이 하는 이야기를 하인들이 모두 아뢰었는데 그녀는 매우 감동했다. 다만 그녀가 지금 눈물을 흘리는 것은 바깥의 떠들썩한 분위기 때문이 아니라 송석석이 돌아온 후 자신을 방안에 가두고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혜 태비도 송석석이 왜 괴로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 생사의 재회에 그녀가 없었고 그녀의 부친과 오빠들이 모두 전장에서 희생했기 때문이었다. “이리 오너라.” 혜 태비는 무릎을 꿇고 인사하는 며느리를 보며 손짓했다. “이리 와서 내 옆에 앉거라.” 송석석은 몸을 일으켜 혜 태비에게 다가가려는데 갑자기 혜 태비에게 끌려 그녀의 품에 안겨 버렸다. 그렇게 그녀는 혜 태비에게 꽉 안겼는데, 갑자기 울먹이는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영원히 나를 어머니로 생각하고 가족으로 생각하거라. 나도 영원히 널 보호해 주마.” 송석석은 너무 꽉 안겨 숨이 쉬어지지 않아 고개를 들어 혜 태비와 거리를 두려고 했지만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먹먹하고, 코끝이 찡해오며 눈가가 촉촉해지더니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송석석은 태후의 보호를 받던 시어머니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혜 태비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던 걸로 알고 있었는데 이런 말을 하니 순간 울고 싶었다. 하지만 송석석은 40이 넘은 시어머니가 몸매가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다. 얼굴이 가슴에 묻혀 하마터면 질식할 뻔했다.사여묵은 이 장면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먼저 송석석을 안아주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그래서 괜히 어머니가 송석석에게 감동을 준 게 화가 났다. 고 씨 유모는 옆에서 눈물을 훔치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야. 태비마마께서 사람을 아낄 줄 알아서 다행이야.’ 포옹한 후 태비는 송석석을 놓고 모두 앉게 하고 분부했다. “여봐라, 차를 내오너라.” 그녀는
한녕 공주부는 황성에서 가장 많은 귀족이 모여 있는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백성들이 이곳을 권귀가라고 불렀고 어길과 삼 사리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공주부와 북명황실도 매우 가까워 걸으면 향 한 대 피울 정도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태비마마는 그 마저도 걷기 싫어해 함께 가마를 타고 갔다. 공주부에는 이미 누군가가 들어와 있었는데 태후가 보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청소를 하고 정원관리를 해서 이미 심어진 꽃과 나무가 적지 않았다. 숙청제는 한녕에게 잘해주는 편이었다. 저택은 엄청 큰 데다 앞마당의 건물은 웅장하고 위엄이 있었으며 뒷마당의 방엔 모두 환하게 불빛이 켜져 있었다. 화원에는 인공 호수에 정자까지 있었으며 가산에 물이 졸졸 흘러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했다. 이곳은 진성의 건축처럼 차갑고 딱딱하지 않고 오히려 강남의 운치가 있었다. 한녕의 마당은 부풍원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 이름엔 부부가 상부상조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들어가 보니 안에는 가구, 병풍, 박달나무 침대, 귀비 금침대가 있었는데 모두 귀중한 목재로 만든 것이었다, 혜 태비는 잠시 둘러보더니 말했다. “혼수에도 가구가 많은데 가져오지 않아도 되겠어.” 그러자 송석석이 말했다. “책자에 적었으니 그대로 보내주십시오. 공주부가 이렇게 큰데 당연히 진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긴, 네가 애초에 좋은 재료로 장만한 가구라 한녕에게 주지 않으면 낭비긴 해.” 태비는 한 바퀴 돌더니 계속 말했다. “낭비가 아니지. 부마도 가끔만 여기서 밤을 보내고 자신의 저택이 있으니 그곳에 놓으면 되겠군.” 상국의 규칙에 따르면 부마는 공주와 함께 생활할 수 없었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공주가 총애해서 부마를 불러야지 사람을 파견해 부마를 데려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지금처럼 사랑한다면 결혼한 후 함께 생활할 수 있다. 따로 생활하더라도 모양새만 갖추며 말이다. 송석석이 말했다. “마당을 하나 마련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어머님께서 한녕이 보고
전북망의 본가, 문희거(文熙居). 창호지 너머로 은은한 불빛이 아른거리며 그림자를 흔들어놓았다. 송석석(宋惜惜)은 수수한 옷차림으로 의자에 앉아 두 손을 포갠 채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그는 결혼 후 곧바로 전장으로 떠나 일 년이나 보지 못했던 남편이었다. 전북망(战北望)은 전장에서 돌아온 복장 그대로 당당히 그녀를 마주보고 있었다.“폐하의 교지(旨意)까지 내려진 이상, 되돌릴 수 없소. 이방(易昉)은 이 집에 들어오게 될 것이오."송석석은 손깍지를 끼면서 어두운 눈빛으로 전북망에게 물었다."태후(太后)마마께서도 능력을 인정한, 그 이방 장군님이 첩이 되길 받아들이셨단 말씀입니까?"그 말을 들은 전북망의 눈빛에 살짝 노기가 서렸다."아니, 이방은 첩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오. 평처(平妻: 본처와 같은 지위를 가진 여인)라, 그대와 다를 것이 없소."송석석은 자세를 바꾸지 않고 말을 이었다."장군님도 아시다시피 평처라는 명칭은 듣기 좋을 뿐, 실제로는 첩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전북망이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첩이라니, 이방과 나는 전장에서 마음을 나누면서 서로 사랑하게 되었소. 그리고 이건 나와 이방이 군공(军功: 군사적 공로)으로 받은 교지이니, 사실상 그대의 동의는 필요 없소."송석석은 억누를 수 없는 비웃음을 입가에 띄우며 말했다."서로를 사랑하게 되었다라, 그럼 출정 전에 저에게 했던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일 년 전, 출정 명령이 떨어진 혼례 첫날밤에 전북망은 약속했었다. 평생 그 하나만을 바라보며 절대로 첩을 들이지 않겠다고. 송석석이 언급하자 그제야 약속을 떠올린 전북망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그 약속은 잊어버리시오. 그때 나는 진정한 사랑을 알지 못했소. 그저 그대를 아내로서 적합하다고 판단했을 뿐. 하지만 이방을 만나고 마음이 달라졌소."이방을 떠올린 그의 표정이 서서히 부드러워졌다. 그가 숨길 수 없는 깊은 감정이 느껴지는 눈빛으로 말을 이어갔다."이방은 내가 만난 그 어떤 여인과도 비교할 수 없소.
전북망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왜 어려운 길을 자처하시오? 이 혼인은 폐하의 어명이오. 더군다나 이방이 들어온다고 한들, 서로 다른 별채에 머물 텐데, 뭐가 걱정이오? 이방은 안살림에 관심이 없소. 또한 그대의 권한을 빼앗는 일도 없을 것이오. 그대가 중요시 여기는 것들, 이방에겐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걸 모르겠소?”“권한이요? 제가 겨우 그런 것 때문에 이러시는 줄 아십니까?”송석석이 반문했다. 장군부(將軍府: 장군의 집) 살림이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노부인한테 들어가는 약값만 해도 매달 수십 냥(两: 화폐 단위)이었고, 그 외 사람들한테 들어가는 생활비도 만만치 않았다. 만약 그녀가 들고 온 지참금이 아니었다면, 이 집안은 진작에 파산했을 것이다. 지난 1년 동안 헌신한 대가가 겨우 이거라니, 정말 황당했다.반면, 전북망도 점점 인내심을 잃어가고 있었다.“됐소. 더 말하지 않겠소. 본래 통보만 하면 되는 일이었고, 그대가 허락하든 하지 않든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오.”그 말을 끝으로 전북망은 소매를 털며 자리를 떠났다. 송석석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아가씨.”보주(寶珠)가 옆에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장군님도 참 너무하세요.”“됐어, 이렇게 된 이상 움직이자.”송석석이 차갑게 눈빛을 굳히며 보주를 쳐다보았다.“첫날밤도 치르지 못했는데,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다고 볼 수도 없지. 일단 가서 내가 이 집안에 들어올 때 들고 온 지참금 목록을 가지고 와 봐.”“지참금 목록은 왜요?”보주가 물었다. 그러자 송석석이 그녀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툭 치며 답했다.“바보야. 계속 이 집에 머물 거야?”그러자 보주가 이마를 감싸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이 혼사는 부인께서 아가씨를 위해 직접 예비하신 거잖아요. 어르신도 살아계실 때, 얼마나 아가씨가 잘 살길 바라셨는데요.”부모님의 얘기가 나오자 송석석의 눈가가 촉촉해졌다.송석석의 부모님은 참 금슬이 좋았다. 그녀를 포함해 자식이 여섯이나 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