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태비는 슬쩍 송석석을 쳐다보았다. 평온한 얼굴에 살짝 번진 그 미소는 그야말로 매혹적이었다. 복숭아꽃보다도 더 화려하고, 매화보다도 더 청량한 모습이었다. 혜태비는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너는 장공주가 두렵지도 않더냐?”그러자 송석석이 되물었다. “그분이 무엇 때문에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됩니까?”“그녀는 장공주다. 황제의 고모이고 선제께서도 그녀에게는 굽히셨지. 또한 진성의 인맥을 절반 이상 장악하고 있으니, 그분 한마디면 너의 명성은 하루아침에 바닥을 치게 될 것이다.”하지만 송석석은 태연했다.“어머니께서도 저를 '죽은 돼지 끓는 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셨지요? 그러니 명성이 더럽혀지는 것이 두려울 리 있겠습니까? 만약 그분이 저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린다면, 그것은 남강을 회복한 공신에 대한 모독이 될 것이며 장공주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비난을 받을 것입니다.”하지만 혜태비는 그저 내뱉기에는 쉬운 일이라 생각했다. 장공주를 적으로 돌려 그녀가 혹시 보복이라도 한다면 대응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오늘 일을 되돌아보면 동주와 삼천 냥을 돌려받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송석석은 단 몇 마디로 그것을 해냈다. 송석석은 당연히 시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만약 알았더라면 몇 마디 말로는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이는 사여묵과의 혼례 때 무림의 사람들이 대거 참석했기 때문이다.장공주는 진성의 권세가들 부인들을 손아귀에 넣고 있으면서도 항상 무림의 사람들을 두려워했고 혹시라도 자신의 명성이 훼손될까 노심초사했다. 게다가 며느리의 예물을 훔치도록 부추긴 소문이 퍼지면, 그녀의 명성은 하루아침에 나락갈 것이다.바로 그때, 갑자기 송석석이 마차의 천막을 제치며 마부에게 명했다. “금루로 가자.”혜태비는 오래전부터 금루에 가고 싶어했다. 하지만 송석석과는 함께 가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송석석이 경기가 어려운 금루의 상황을 보게 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물론, 그날 이미 말했으니 송석석도
고씨 유모는 사람들 사이를 힘겹게 비집고 들어가 가까스로 점원에게 물었다.“여기 실금으로 장식된 보석 팔찌가 있는지요?”고씨 유모를 힐끗 보던 젊은 점원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 팔찌는 2층에서 파는 것인데, 지금은 재고가 없습니다. 올해 몇 차례나 만들어졌지만 모두 팔렸습니다. 구입을 원하시면 2층에서 예약하셔야 하고 내년 2월에나 입고될 것입니다.”‘예약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그것도 내년 2월이 되어서야 물건을 받을 수 있다니?’고씨 유모는 천천히 뒤로 물러나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은 1층보다 더 우아하게 꾸며져 있었고, 무려 여덟아홉 개의 전시대가 있었다. 전시대 앞에는 푹신한 방석이 깔린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그 쪽에서 일대일로 귀빈들을 응대하고 있었다. 다른 한켠에는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다과를 먹고 차를 마시며 난로에 몸을 녹이고 있었다.고급 비단을 입지 않는 것을 보니 권세가의 사람이 아닌 부유한 상인들이었다.고씨 유모가 방을 한 번 훑어보는데 한 손님이 몇 개의 금팔찌를 손목에 착용해 보고는 어울린다고 느꼈는지 포장해 달라고 했다. 디자인은 세련되었지만, 금경루와 비교하면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그때 한 점원이 다가와 그녀를 맞이했다. “실금으로 장식된 보석 팔찌가 있는지요?”점원이 아쉬운 듯 말했다. “막 다 팔렸습니다.. 혹시 예약해 두시는 것이 어떻사옵니까?”“여기 장사가 이렇게나 잘된단 말입니까?” 고씨 유모는 냉정하면서도 이성적이었다.“지난번에 왔을 때도 손님들로 가득하더니 인기 있는 디자인이 지금은 다 팔린 것 같군요.”“그러게나 말입니다. 우리 금루는 금경루를 제외하고는 진성에서 따라올 곳이 없습니다.” 점원은 한껏 들뜬 목소리도 대답하더니 고씨 유모의 옷차림과 위엄 있는 모습을 보고는 다시 물었다. “실금으로 장식된 보석 팔찌 말고 다른 팔찌는 어떠신지요? 금으로 만든 것도 있고, 옥으로 만든 것도 있습니다. 다만 거의 대부분이 품절된 상태라 내년에야 다시 채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고
공교롭게도 다음 날 사여묵과 송석석이 회문할 준비를 할 때 가의 군주가 사람을 시켜 장부를 내왔다. 그는 바로 조천민이다.혜태비께서 왕부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에 조천민이 대신 온 것이고 만약 그녀가 궁에 있었다면 가의 군주가 직접 장부를 가져왔을 것이다.고씨 유모는 조천민이 혜태비의 얼굴을 읽히려고 온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는 나중에 혜태비가 금루에 갔을 때 쉽게 알아볼 수 있기 위함이었다.혜태비는 기쁜 마음으로 장부를 펼쳤다.하지만 기대와 달리 그 몇 장 안 되는 장부에 팔린 물건들은 모두 값싼 것들 뿐이었고, 고가의 장신구는 단 한 점도 팔리지 않았다. 마지막에 합산된 수익을 보니 적자였다.한 분기에 만 냥이 넘는 적자가 생겼다. 이는 전보다도 더 많은 금액이었다.혜태비는 급기야 분노하며 장부를 땅에 내던져 버렸다.“어찌하여 이렇게 많은 적자가 났단 말이냐? 네놈이 설명해보거라!”조천민은 땅에 엎드린 채 울상을 지으며 대답했다. “태비마마께서는 지금의 경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서 그러십니까.. 저희가 연말이 다가오기 전에 수익을 내기 위해 많은 물건을 준비했으나, 다수가 하자가 있는 것들이라 팔리지 않아 적자가 더 커졌습니다. 다른 상가들은 장사가 잘되는데 오직 우리 금루만 손님이 없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사옵니다.”그는 바닥을 기어 장부를 집어 들고 한 장 한 장 펼치며 말을 이었다.“전에 태비마마와 자의 군주께서 내놓으신 은전이 아니었더라면 더 큰 적자를 보았을 것이옵니다.”“헛소리 말거라!”화가 난 혜태비는 탁자를 내리치며 크게 분노했다. “금루에 손님이 없다니! 내가 매번 거기를 지나갈 때는 금루는 손님들로 붐볐단 말이다! 게다가 모두들 한가득씩 사서 돌아가 것을 보았는데 이게 대체 무슨 말인 것이냐!”조천민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혜태비께서 이미 다녀갔단 말인가? 언제 다녀가신 거지? 구체적으로 어느 날이지..?’그리고 그는 갑자기 어제 한 점원이 부잣집 유모가 금경루의 유명한 실금으로 장식된
노 집사는 즉시 시위 두 명을 불러 조천민을 관아로 압송하게 했다.그러자 놀란 조천민이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며 소리쳤다. “왕비마마, 소인을 살려주십시오! 이 모든 것은 소인의 뜻이 아니옵니다... 이는 가의 군주가 장부로 태비마마를 속이라고 명령한 것이옵니다.”“뭐라?” 화가 난 혜태비는 유리잔을 집어 던졋다.“나를 속이려고 가짜 장부를 만들었단 말이냐?”송석석은 침착하게 손을 들어 흥분한 혜태비를 제지했다.“이전 장부들이 모두 가짜라면 진짜 장부도 있겠지요?”시위들에게 붙잡힌 조천민은 팔이 끊어질 듯한 고통에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엄두도 내지 못했기에 그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솔직하게 답했다. “예, 있습니다.”오늘 회문해야 하는 송석석은 조천민과 낭비할 시간이 없었기에 그녀는 노 집사를 불러 들여 명하였다. “수고스럽겠지만 두 사람을 데리고 이 자와 함께 금루로 돌아가 그간의 장부를 모두 찾아내어 회계부에 확인을 맡기고 확실히 진짜 장부가 맞는지 현장에서 확인하시오. 만약 저 자가 또 다시 속임수를 쓰려 한다면 보고할 필요 없이 바로 경조부로 넘기시오.”“예, 알겠사옵니다!”그는 손을 들어 조천민을 끌어내도록 했다. 그리고 이미 준비된 마차에 올라타 급히 금루로 향했다.이 같은 상황을 처음 겪어보는 조천민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한편으론 속에서 쉼 없이 불평불만을 늘어 놓았다.‘가의 군주가 말하길 혜태비는 쉽게 다룰 수 있는 인물이라 하지 않았던가? 매년 이런 식으로 넘어가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째서 이번에는 통하지 않는 것이야?’ 게다가 북명왕비한테까지 발각되고 말았다니.북명왕비에 대해서는 조천민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단호하고 무자비한 장군이며, 경조 부윤이 그녀 조카의 외숙부였다. 만일하나 경조부에 끌려간다면 천운으로 목숨을 부지한다고 해도 큰 고초를 겪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혜태비는 그만 참지 못하고 화를 버럭버럭 냈다. “자의가 감히 나를 속이다니?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이냐?”송석석
사여묵은 선물 꾸러미를 챙기면서 만종문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이 송석석이라는 사실에 더없이 기뻤다. 하지만 이제 그녀의 곁에 자신이 있기에 그들이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오늘 꼭 사백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으니, 그것은 송석석더러 한 달에 두 번은 반드시 사문에 편지를 보내도록 약조하려는 것이었다. 기쁜 소식이든 슬플 일이든지 막론하고 모조리 알릴 것이어서 힘들게 발걸음할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마차 세대에 선물을 가득 싣고 나니 서우, 보주와 함께 나오는 송석석이 보였다. 차분하고 담담한 표정의 그녀는 보랏빛 원피스를 입어 피부가 더욱 하얗고 투명해 보였다. 머리에 작약 두 송이가 꽂혀 있었는데, 그 꽃보다 훨씬 아름답게 느껴졌다.사여묵은 갑자기 어젯밤을 떠올랐고 온몸의 피가 한 곳으로 몰려드는 것을 느꼈다. 깊어진 그의 눈빛에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고개를 든 송석석이 그와 눈이 마주쳤다.이 눈빛!이틀 밤 동안 바라봤던 눈빛이라 단번에 알 수 있었다.그는 마치 아기가 처음 우유를 맛본 후 멈출 수 없는 상태에 빠진 것처럼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혔었다.어느새 얼굴이 붉어진 송석석은 그의 시선을 마주할 수 없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그의 시선만으로도 단숨에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사여묵은 그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가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선물은 모두 준비되었소.”“네..”고개를 숙인 송석석은 고분고분했다. 방금 전까지의 침착함과 담담함은 어디가고 순식간에 수줍음으로 바뀌었다. 비록 이미 혼인을 해 가까운 사이가 되었지만 그가 손을 꼭 잡을 때면 그녀는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그 모습에 서우가 고개를 들고 보주에게 물었다. “고모부가 고모 손을 잡았는데 왜 고모가 얼굴이 빨개지는 겁니까?”고개를 든 보주가 송석석을 한 번 바라보았는데 얼굴이 정말로 복숭아꽃보다도 더 붉게 물들어 있었다. 보주는
잠시 멈칫하던 사여묵은 이내 기뻐하며 말했다. “내가 사부님께 벌받을까 봐 걱정하는 거요? 당신이 나를 걱정하는 게 진짜 맞소?”“당연히 걱정하지요. 혹시 사숙의 철권을 맞아본 적 있습니까?” 송석석은 봉황 같은 눈을 치켜올렸다.“맞아본 적은 없었던 것 같소.” 사여묵은 사문에서의 날들을 떠올렸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을 거기에서 보냈고 이는 존엄과 관련된 일이기에 맞았어도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늘 선하였습니까?” 송석석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대사형마저도 벌을 받았는데 그런 대사형보다도 더 말썽을 피우지 않았단 말인가?고개를 옆으로 돌린 사여묵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내가 만종문에 갔을 때 그들은 나와 어울리려 하지 않았소. 수련하는 데에만 힘쓸 수밖에 없었으니 사부께서 아주 만족해하셨소.”그의 말을 들은 송석석은 경외심에 가득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모두 사숙에게 벌을 받았는데 그중 그만이 유일하게 벌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무공은 역시 뛰어난 이유가 있었다.만종문에서 사숙의 매를 맛보지 못한 이는 그녀가 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난 자들이었다.그녀의 경외 가득한 눈빛에 사여묵은 턱을 치켜올리며 한껏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말이다. 간혹 두어 번 벌 받은 것은 아예 말을 꺼내지 않은 것이 좋다 생각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국공부에 도착했다. 진복은 황마마와 부중 하인들을 이끌고 문 앞에서 맞이하고 있었고, 시만자도 만두, 신신, 몽동이와 함께 달려 나왔다.시만자는 웃으며 송석석의 팔장을 꼈다.“드디어 왔구나. 네가 빨리 몽동이에게 한마디 해. 혼수였으면서 그날 밤 우리와 함께 몰래 도망쳐 왔으니 말이야!”몽동이는 시만자에게 왜 그 말을 지금 꺼내느냐는 눈빛을 보냈다.송석석은 웃으며 몽동이를 한 번 쳐다보고는 말했다. “그건 농담이었어. 몽동이가 어떻게 내 혼수가 될 수 있겠어?”“안될 것도 없지? 사부님에게 내쳐졌으니 말이야.” 말
사여묵과 송석석은 예를 갖추어 사부와 사숙, 그리고 여러 사형 사제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사숙은 실눈을 뜨고 있었다. 도무지 눈을 감았는지 뜬 건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송석석은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사숙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상태라는 것을 말이다. 그는 지금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히 감시하고 있었다.그래서 송석석은 성심껏 절을 올렸고 힘도 조절해야 했다. ‘쾅쾅’소리가 들리고 약간의 메아리까지 있어야 합격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송석석은 이전에 사숙에게 절하는 법을 훈련받은 받으며 호되게 혼난적이 있었다.사부님께 너무 건방지고 성의없이 절을 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그녀는 걷지도 못할 정도로 절을 올려서 결국 이사제가 그녀를 업어 방으로 돌아갔었다.벌을 받은 그날 밤엔 계속 머리가 어지러웠고 심지어는 이마에 피까지 흘렀다.지난 일을 떠올리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한창 절을 올리고 있던 송석석은 사부와 사숙에게 고작 손을 모아 인사만 하고, 사숙에게만 절을 한 번 올리고 있는 사여묵을 발견했다. 메아리도 전혀 없어 확실하게 불합격이었다.‘큰일 났네…’송석석은 황급히 사숙의 눈치를 살폈다.‘어라? 사숙이 화를 내지 않으신다고?’사숙은 화를 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여묵에게 미소를 지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이렇게 멋진 가정을 이루었으니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구나.”사숙이 웃으셨다.“사부님께서 염려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사여묵은 언제든지 훈계를 들을 준비가 된 착한 모양새였다.무소위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리에 앉거라.”곧장 송석석을 부축한 평무종은 그녀의 이마를 문지르며 조용히 물었다. “아프지 않느냐? 어지럽느냐? 토할 것 같으냐?”“괜찮습니다.”송석석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자 평무종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송석석은 절로 벌을 받을 당시 방으로 업혀 가던 도중에 구토를 하며 어지러움을 호소한 적이 있었다. 사부님을 모셔 와 침을 맞고 며칠 동안 약을 먹고서야
임양운은 송석석이 얌전히 대답하는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손짓하여 그녀를 불렀다.“사부에게로 오너라.”송석석이 조용히 다가가자 사부의 손가락이 그녀의 코끝에 톡하고 튕겼다.그러자 송석석이 아야 하고 외쳤다. “사부님, 아픕니다.”“벌이다!” 임양운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그러니 누가 혼자 끙끙거리라고 했느냐! 이 벌은 가벼운 편이니라.”코끝이 아직 조금 아렸지만 송석석은 괜찮은 척을 했다.“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않겠사옵니다.”그러나 그녀의 표정을 한시도 놓치지 않았던 임양운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막내가 겪은 일들은 아직도 그를 괴롭게 했다.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자신의 곁에 앉혔다. “사여묵의 그 인성과 덕성은 전북망보다 훨씬 뛰어나니, 사부는 그가 너를 저버리거나 홀대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세상은 쉽게 변하고, 사람의 마음도 간사한 법이니라. 예전에는 그가 너를 연모하였고, 얻지 못하니 너를 더욱 그리워하였으나, 이제 너와 혼인하였으니 싫증이 나서 변심할지도 모를 일이다. 사내는 하나도 믿을 수 없는 법이라, 너를 연모하더라도 전적으로 마음을 주지 말아야 하느니라. 알겠느냐?”그러자 오사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맞다, 사내는 믿을 것이 못 된다. 보기 만해도 역겨울 따름이니 전적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 또 다시 배신자가 나오면 안 되지..”“닥쳐라!” 대사형, 심청화가 그의 이마를 한 대 때렸다. 사부께서 하신 말씀은 송석석이 겁먹을 수 있어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였으나 웃어른이라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오사제가 사부의 말에 동의하다니 참으로 뜻밖이었다.그때 듣고 있던 시만자가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같은 사내인데, 어찌하여 역겹다고 하십니까?”오사형은 성이 왕씨고, 이름은 이장이다. 그는 악기를 잘 다루었고, 악기로 사람을 죽이는 데 더 뛰어났다. 만종문에서 다섯 번째로 행하였기에 모두가 그를 오사형이라고 불렀다.시만자를 바라보는 왕이장의 얼굴에 냉랭한 기색이 가득했다. “역
송석석은 차분하게 질서를 잘 정돈한 뒤, 학생들과 부모님들을 저택으로 돌려보냈고 비밀을 지켜달라는 얘기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일은 언젠가 소문이 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그러고는 홍현에게 청작과 경조부의 사람을 불러오라고 했다.이 범인은 약을 먹은 게 확실하기에 반드시 매달아서 심문해야 하며 청작을 통해 무슨 약을 먹었는지 확실하게 알아내야 한다.한편, 도망친 범인들도 오진에게 전부 잡혀왔고 그들은 묶여 있는 중년 남성보다 정신이 훨씬 멀쩡해 보였지만 송석석과 홍현을 쳐다보는 눈빛은 여전히 야릇하고 이글거렸다.송석석은 안여옥을 살포시 안아주었고, 이제서야 평정심을 되찾은 안여옥이 되레 송석석을 위로했다.“괜찮아요. 저 괜찮습니다.”“왜 그런 말을 했어요? 선생님은 지금 자신을 망가트린 거라고요.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요?”국태 부인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얼굴이 창백한 안여옥은 가까스로 미소를 지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국태 부인께서 제 걱정을 이리 하시니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 애초부터 혼인할 생각이 없었고 저에게 있어서 명성은 그저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이제 그 짐을 벗어 던졌으니 차라리 잘 된 일이지요.”“그렇지만 모든 화를 혼자서 떠안겠다고 하시니… 사람들이 선생님을 어찌 얘기하고 다닐지 걱정됩니다. 선생님 조부께도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국태 부인은 안씨 어르신과 오랜 인연을 이어왔다. 이번에 안여옥을 여학 선생으로 데리고 올 때에도 안여옥을 잘 보살피겠다고 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안 그래도 몸이 허약하신 안씨 어르신이 이 얘기를 들으면 충격에 쓰러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다들 안여옥을 위로하기 바빴고 안여옥은 많은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쳤다는 생각에 얼른 웃으면서 말했다.“전 정말 괜찮습니다. 그리 큰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이 살면서 더한 일도 경험하게 될 텐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안여옥은 연신 괜찮다고 했지만 사람
이때, 송석석이 서원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조금 전 밖에 있을 때부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었다.송석석이 나타나자 부인들은 우르르 몰려가 송석석에게 이제 어떻게 해야 하냐고 닥달했다. 감히 대놓고 따져 묻지는 못했지만 송석석에게 합리적인 설명을 내놓으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었다.송석석은 겉으로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분통이 터졌다. 여학 마지막 날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오늘 서원 대문이 열려 있었던 이유는 학생들과 데리러 온 가문 사람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나올 때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인데 범인들이 이 틈을 노리고 학교 안으로 들이닥칠 줄은 몰랐다.이 일은 분명 여학을 겨냥해서 벌인 일이었다.“이 일은 제가 확실하게 처리하겠습니다.”송석석의 말에 부모들이 너도나도 한 마디씩 보탰다.“왕비님,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그러게요.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였고 쳐다보는 눈이 이렇게 많은데 이 많은 입들을 다 단속할 수 있습니까? 소문이 이상하게 퍼지면 없는 사실도 있는 일처럼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여학에 호위병을 좀 많이 세워둬야 하는 거 아닙니까?”한편, 안여옥은 송석석이 궁지로 몰리자 얼른 눈물을 닦은 뒤, 벌떡 일어나 큰소리로 말했다.“여러분, 걱정하시 마십시오. 한 명도 다친 학생이 없습니다. 저 범인은 그저 저를 잠깐 껴안았을 뿐이지 다른 학생을 해치지 못했습니다.”안여옥의 말에 현장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고 다들 안여옥이 이 일을 이렇게 대놓고 얘기할 줄은 몰랐다.범인이 안여옥을 껴안은 게 사실이라고 해도 이를 숨겨야 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얘기한단 말인가?그러다가 소문이라도 나면 안여옥은 평생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살게 될 수도 있다.이때, 정신을 번쩍 차린 국태 부인이 다급하게 부인했다.“선생님은 범인에게 당하지 않았습니다. 함부로 그런 얘기하지 마세요. 범인은 선생님에게 손을 댈 기회가 없었습니다.”하지만 안여옥은 국태 부인의 말을 따르지 않았
서원에 비명소리가 점점 더 커졌고 홍현은 왕지아를 달랜 뒤 바로 서원으로 뛰어갔다.“함부로 돌아다니지 말고 잘 숨어있으렴.”한편, 서원 안에서 너무 놀란 국태 부인과 정 부인은 재빨리 딸들을 등 뒤로 숨겼고 안여옥과 무씨 아가씨는 손에 긴 몽둥이를 들고 덜덜 떨면서 들이닥친 남자들을 향해 휘둘렀다.두 선생님은 혹시라도 뒤에 있는 여학생들이 다칠까 봐 최선을 다해 막았지만 힘이 부족했다.이때, 한 남자가 주창우를 향해 덮쳤고 화들짝 놀란 주창우가 비명소리를 지르자 안여옥은 몽둥이로 남자를 내리쳤다. 하지만 남자는 겁을 먹긴 커녕, 되레 사악하게 웃으며 안여옥을 향해 달려갔다.홍현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안여옥은 남자에게 강제로 안겨 있었고, 그 남자는 심지어 입을 맞추려고 했다. 겁에 질린 안여옥은 미친 듯이 발버둥쳤지만 힘으로는 이길 수 없어, 결국 손톱으로 남자의 얼굴을 할퀴었다.미간을 확 찌푸린 홍현은 바로 달려가 한 손으로 남자의 등을 확 잡더니 그를 바닥에 내리꽂았고 발로 남자의 배를 힘껏 짓밟았다.극심한 고통에 남자는 바닥을 굴러다녔고 홍현은 무씨 아가씨 손에서 몽둥이를 낚아채더니 남자들을 향해 무섭게 공격했다.안여옥을 침범하려고 했던 남자는 홍현이 휘두른 몽둥이에 다리뼈가 부러졌고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바로 이때, 딸을 데리러 온 가문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어떻게 된 거예요? 왜 학교 안에 남자들이 들이닥친 겁니까?”서원 안으로 몰려든 사람들은 바닥에 누워 비명을 지르는 남자를 쳐다보았고 여학생들은 너무 큰 충격에 다들 넋이 나간 상태였다.그러다가 부모님을 발견한 여학생들은 엉엉 울면서 각자 가족의 품으로 달려갔다.“어머니, 아버지, 너무 무서워요! 저 남자들이 갑자기 서원으로 뛰어들어와서 안 선생님을 강제로 안았어요.”사람들은 이내 안여옥에게 고개를 돌렸다. 머리가 헝클어진 안여옥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무씨 아가씨 품에서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경험이 많은 국태 부
송석석은 이 사실을 염 선생에게 알리자, 염 선생은 흠칫하다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사국 사람들이 어떻게 진성에 진입하게 된 거죠? 심지어 이곳에서 살고 있다니.”송석석이 대답했다.“그래서 나머지 남풍관도 확실하게 조사해봐야 할 것 같아. 그리고 남풍관 주인장도 만나봐야지. 주인이 사국 사람들을 거둬서 남풍관에서 장사를 하는 거니까 아무것도 모르지는 않을 거야.”사국 사람들이 언제 진성에 왔고 누가 데리고 왔으며 무슨 목적으로 온 건지 확실하게 알아내야 했다. 송석석은 나머지 남풍관을 직접 방문해서 조사할 생각이었고, 시만자와 왕이장도 함께 했다.그렇게 며칠 동안 송석석은 남풍관 다섯 군데를 돌아다녔다. 그중 세 군데에 사국 사람들이 있었고 총 열다섯 명이었다.호흡 방식이나 걸음걸이로 보면 열다섯 명 전부 무술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확실히 사국 사람들 외모는 아니었으며 보통 몸매의 남강 사람들 같았다.보아하니 신경 써서 고른 듯했다.불빛이 어두운 환경에서는 사국 사람들을 알아보기 어려웠으며 더군다나 그들은 상국 말을 유창하게 쓰고 있었기에 아무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그리고 세 가게의 주인은 동일인이었으며 그자가 바로 광릉후의 향봉천이다.상의 끝에 송석석 일행은 섣불리 움직이는 대신 사람들을 시켜 몰래 남풍관 가게들을 지켜보라고 했으며 그들의 진정한 목적을 알아내려 했다.그리고 염 선생은 광릉후를 다시 한번 제대로 조사하기 시작했다.광릉후의 향봉천은 남색을 즐기는 자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자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평범한 사내들과 똑같이 혼인하여 아이도 낳고 첩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향회옥이 바로 향봉천의 막내딸이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사실에 조금 놀란 눈치였다. 평소에 광릉후 사람들의 행실이 조용하고 눈에 잘 띄지도 않았으며 향회옥이 가끔 제자예와 함께 여학에서 문제를 일으킨 것 외에는 그 어떤 추문도 없었다.하지만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해 보이는 광릉후에서 남풍관을 세 군데나 운영하고 있는 것도 모자
송석석은 시만자를 의자에 앉히며 대답했다.“오사형이 아주 고맙게 생각하겠네. 하지만 난 맞추고 싶지 않아. 그래서 누굴 봤는데?”“빅토르! 그래, 맞아! 빅토르를 봤어!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의 빅토르를 봤지!”시만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고 송석석은 이마를 꾹꾹 누르며 다시 물었다.“여러 명의 빅토르를 본 거야 아니면 빅토르를 닮은 사람이 여러 명 있었던 거야? 너 대체 술을 얼마나 마셨길래 이렇게 취한 거야?”“빅토르… 아니야. 빅토르보다 젊었어.”시만자가 머리를 휘청거리며 대답했고 송석석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빅토르를 닮았다는 거지? 그럼 사국 사람들이네?”사국과 상국은 아직 길이 통하지 않았기에 사국 사람들이 상국에 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사국 사람들이 진성에 나타난 것도 모자라 진성에서 살고 있다니.이때, 시만자가 꼬인 혀로 힘겹게 대답했다.“맞… 맞아. 사국 사람들이야. 그런데 어떻게 진성에 사국 사람들이 살고 있는 거지? 남풍관에 숨어 있었는데 왜 남풍관에 갔던 손님들은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았던 걸까? 내가 그 사람들을 봤다는 건 다른 손님들도 다 봤다는 뜻인데.”송석석은 조금 불안했다. 남풍관을 방문한 손님들은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남풍관에 갔었다고 얘기하지 않을텐데 말이다. 하지만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사국 사람들이 언제 진성에 몰래 들어왔냐는 것이다. 그들은 남풍관에 숨어 있었기에 아무도 그들을 발견하지 못했다.진성에 남풍관이 몇 개가 있지만 전부 비밀리에 운영되고 있었다. 선황제가 확실한 금지령을 내렸기에 엄격하게 조사했지만 숙청제가 황위에 오르고 나서 더 이상 이런 일에 신경을 크게 쓰지 않았다. 물론 엄하게 다루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권장하지도 않았다. 분위기는 선황제 때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지만 남색은 여전히 이 나라에서 용납되지 않기에 아무도 대놓고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다.언급하는 사람이 없어서 아무도 주의 깊게 지켜보지 않았다.한편, 시만자는 털썩 눕더니 바로 잠이
송석석은 사여묵에게 항상 안전에 조심하고, 스쳐가는 여인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말라며 신신당부했다.사여묵은 질투를 하는 듯한 송석석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서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내 절대 눈길도 안 줄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조금 뒤, 사여묵은 몽동이와 장대성을 데리고 길을 떠났고 혜 태비는 아들의 뒷모습을 몇 번 쳐다보고는 이내 돌아서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염 선생과 양 마마도 돌아갔고 송석석과 시만자만 문 앞에 서서 사여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마음이 허전해?”시만자가 송석석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고 송석석은 울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조금.”송석석과 사여묵은 혼사를 치르고 나서 계속 각자 일로 바빴지만 거의 매일 밤 함께 보냈기에 하루도 못 보는 날이 없었다.그런데 최소 두 달은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져 송석석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두 달이 참 길게 느껴지네.”“두 달이 길어? 2년도 아니고.”시만자가 송석석의 어깨를 팔로 감싸더니 말을 이어갔다.“내가 보기엔 넌 이 두 달 동안 자유를 만끽해야 돼. 서방이 곁에 없으니 하고 싶은 건 다 해봐야지. 나중에 널 데리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좋은 데도 같이 가야겠네! 내가 왕이장한테서 들었는데 진성에 꽤 괜찮은 주막들이 있대. 한 번쯤 가보고 싶었는데 전에는 북명왕이 있어서 널 부르기 조금 미안했지. 이제 됐네. 두 달 동안 자유이니까 마음껏 즐기자고.”“무슨 주막이길래 서방이 있을 땐 날 못 부른 것이냐? 왕경루 음식보다 맛있어?”의아한 듯 묻던 송석석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됐어. 나 지금 입맛이 없어서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그런 거 아니야! 남풍관이라고 남자들이 장사를 하는 곳이야. 그러니까 우리가 남장을 해서 들어가면…”시만자가 입꼬리를 씩 올리며 말하자 송석석이 걸음을 턱 멈추었다.“뭐야? 너 가봤어? 오사형이 널 데리고 간 거야? 오사형은 지금 어디 있어?”“그자가 날 데리고 가진 않았지. 그저
사여령이 대리사를 나올 땐 허리를 쫙 편 채 눈빛이 단호하고 당당한 모습이었다. 조금 전, 사여묵이 마지막에 그에게 했던 한 마디 덕분이었다.“네가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들었어. 조금만 더 노력하고 버티면 내가 승진을 시켜줄게.”그 순간, 사여령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금까지 어머니를 제외하고 아무도 그의 능력을 인정해준 적이 없었으며 그를 진심으로 칭찬해준 사람도 없었다.어머니가 사여령을 칭찬하긴 하지만 그건 대부분 위로였다. 어렸을 때부터 문무가 모두 약했던 사여령에게 어머니는 항상 칭찬으로 자신감을 북돋아주었고 나중에 크면 잘하게 될 거라고 위로했다.하지만 그건 그저 위로일 뿐, 인정은 아니었다.지금, 사여령은 진정한 인정을 받았고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으며 이 길을 계속 갈 수만 있다면 지금보다 더 노력할 자신이 있었다.사여령은 어렸을 때부터 부왕의 예쁨을 받지 못했고 통방이 낳은 자식이라며 늘 차별을 받았었다.그때 당시 부왕은 통방에게 회임하지 못하도록 약을 먹였는데 어찌된 일인지 결국 통방이 회임을 하게 되었고 부왕은 바로 통방에게 낙태약을 먹였지만 어머니의 노력으로 사여령의 친모는 결국 아이를 낳게 되었다.사여령의 어머니는 연왕이 체면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일부러 대놓고 갓난 사여령을 저택으로 데려왔고 연왕은 아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때부터 사여령의 어머니는 연왕에게 미운 털이 박히게 된 것이다.이런저런 생각에 사여령의 발걸음도 몹시 가벼워졌다. 비록 아버지를 배신했다고 하지만, 심리적으로 부담이 되지도 않았고 미안한 마음도 들지 않았다.사여령이 미안한 건 어머니가 청목암으로 보내졌을 때 따라가지 않았던 점이었다.아버지라는 사람은 아들에게만 몹쓸 짓을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에도 빨리 죽지 않는다고 욕설을 퍼부었다.한편, 북명황실 의사당 안의 불빛은 밤새 꺼지지 않았다.사여령한테서 들은 정보에 의하면 노주 한 곳만이 아니며 사여령의 정보도 부족한 부분이
사여령은 한참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주먹만 꼭 쥐고 있었고 손바닥에는 어느새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사여령은 이제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대리사 감옥 관리자가 되고 나서 사여령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속으로 수천 수백 번을 생각했지만 확실한 답을 얻지 못했다.나중에 진소경이 사여령의 고민을 눈치채고 사여령에게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눈앞에 닥친 일만 잘 해내면 된다고 방법을 제시했기에 사여령은 그 뒤로부터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여태까지 답을 얻지 못했기에 갑작스러운 사여묵의 물음에 넋을 잃은 채 앉아있던 사여령은 위엄이 넘치는 사여묵 눈빛에 머릿속이 하얘졌다.덜컥 겁이 난 사여령은 본능적으로 대답했다.“노주에 병사가 정확하게 얼마나 많은지는 모릅니다.”“넌 그걸 어떻게 알았어?”사여묵이 물었고 사여령은 노주에 병사가 있다는 사실을 얘기한 뒤 오히려 마음이 많이 진정되었다.선택을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사여령이 솔직하게 대답했다.“연주의 왕부에 서재가 두 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 평소에 2층에서 책을 보는데 가끔 하루 종일 2층에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아래층에서 얘기하는 걸 들은 적이 몇 번 있습니다. 바로 아래층에서 얘기하고 있었지만 서재가 너무 큰 탓에 정확하게는 듣지 못했습니다. 노주에 대한 얘기가 몇 번 나왔고 노주 외에도 옹현, 간현, 부현 그리고 나현 등 지역도 언급된 적이 있습니다. 그 외에 다른 지역도 있는데 지역명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번에는 식량을 노주에 가져가야 한다는 말도 들었습니다.”사여묵은 미간을 찌푸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뭔가 이상한데? 연왕이 여러 지역에서 병사를 키우고 있다고? 그럼 세력이 대체 얼마나 큰 거지? 병사를 키운다는 게 점포를 여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닌데 식량과 무기 공급은 문제가 없는 건가?’사여묵이 사전에 조사한 정보에 따르면 연왕에게는 그럴 만한 세력과 재력이 없었다.옹현과 간현은 그럴 가능성
북명왕 저택에는 호위병 외에 따로 비밀 호위무사를 양성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밖에서 정보를 캐내는 무술 실력이 강한 부하들이 몇 명 있긴 했지만 다들 매우 바빴기에 거의 한 달에 한번 저택으로 돌아와 얻은 정보를 보고하곤 했다.물론 정탐조도 있지만 이들은 적의 동향을 살피는 자들이기에 사적인 일로 움직일 수 없었다.비밀 호위무사를 두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이유는 사여묵이 남강에 파견되기 전에 이미 큰 전공을 세웠고 현갑군도 거느리고 있었기에 선황제는 사여묵이 저택에 너무 많은 부병을 두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두 번째 이유는 사여묵이 남강 전쟁에 투입되고 나서 이런 부분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기에, 전쟁을 승리하고 돌아왔을 땐 황제의 의심과 경계 때문에 더더욱 비밀 호위무사를 키울 수 없었다.지금 만약 황제가 대외적으로 사여묵을 노주로 정찰을 보낸다고 발표한다면 현갑군에서 병사들을 보낼 수 있지만 아무도 모르게 가는 것이기에 저택에 있는 사람들만 데리고 갈 수 있었다.“제가 같이 갈까요?”송석석의 물음에 사여묵은 피식 웃으며 송석석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괜찮소. 위험한 건 아니오. 그저 정보만 수집하는 일이라 몸을 쓸 일은 없소. 몸을 써야 한다면 우리 몇 명만 가지도 않았을 것이오. 그리고 이제 연말이라 경위부도 사건 사고가 많을 테니 이곳을 지키는 게 좋겠소.”사여묵이 말한 것처럼 연말에 경위부와 순방영은 평소보다 훨씬 일이 많았기에 송석석이 간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하지만 몇 명만 보내기엔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다음날,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심청화는 10일 뒤면 서원도 수업이 끝나니 며칠 앞당겨서 사여묵과 함께 떠날 수 있다고 했다.심청화가 함께 간다고 하니 송석석은 훨씬 마음이 놓였지만 그래도 이 일은 국태 부인과 상의를 해야 한다.심청화가 국태 부인에게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다들 동의했으며 출발까지 아직 3일이나 남았으니 서원 시험만 보면 된다고 했다.심청화는 당연히 진짜 행방을 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