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철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안색이 안 좋아졌지만 그래도 안으로 들이라고 했다.물론 그녀는 고경영이 왜 왔는지도 잘 안다.심여진은 고경영이 혼수 상태로 있을 때 고경영에게 지분 양도 계약서는 물론 이혼 협의서까지 사인을 받아냈다.게다가 협의서에는 고경영 명의로 된 모든 자산을 심여진에게 넘긴다고 명확히 적혀 있었다.다시 말하면, 병원에서 깨어난 후 고경영은 주머니에 한푼도 없는 빈털터리가 돼버렸다.사실상 고경영의 상황은 고다정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안 좋았다.그는 고씨 집안의 모든 자산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건강 상태도 엉망이었다.특히 그는 며칠 전 퇴원한 후 진씨 저택에 가서 소동을 일으켰다가 진시목의 부하에게 맞아 원래 시원찮은 몸에 또 상처가 생겼다.고다정의 이름을 대지 않았다면 병원에서 치료해 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소파에 앉아 성공자 기세를 물씬 풍기는 고다정을 보며 고경영은 여태 느껴보지 못했던 후회의 감정을 느꼈다.‘그때는 무엇에 홀려 심여진 그년이 고다정을 마음대로 괴롭히게 둬서 이 돈줄을 잃었지?’이런 생각을 하며 그는 진심으로 고다정 앞에 털썩 무릎을 꿇고 통곡했다.“다정아, 아버지가 잘못했어. 잘못했어...”고경영이 이렇게 나올 줄 전혀 생각지 못한 고다정은 잠깐 멍해졌다가 즉시 일어나 옆으로 비켜섰다.어쨌든 고경영은 그녀의 아버지인데, 딸로서 이걸 받을 수는 없다.그리고 옆에 경찰도 있기에 사람들에게 가십거리를 제공하고 싶지 않았다.“고경영, 당신이 무슨 목적으로 여기 왔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식으로 나오면 우리 사이에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어요. 지금 당장 나가주세요.”고다정은 옆에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두 경찰을 향해 겸연쩍게 말했다.“부끄럽네요. 저의 집안일 때문에 공공자원을 점용해서 미안합니다. 앞으로 또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상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두 경찰이 눈을 마주치더니, 그중 나이가 좀 더 많은 경찰이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별말씀을요. 다른 문제가 없으면 저희는 이만 가
고다정은 눈앞의 남자를 빤히 쳐다보다가 갑자기 비꼬듯이 웃었다.“당신 말이 맞아요. 법적으로 확실히 당신을 부양할 의무가 있지.”그녀는 말하면서 옆에 있는 소파로 가더니 위에 놓여있던 휴대폰을 들고 뭔가 검색하는 듯했다.그녀가 뭐 하는지 모르는 고경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캐물었다.“너 뭐 하는 거야?”“현재 국내에서 부모에게 주는 평균 부양비가 얼마인지 알아보고 있어요.”고다정은 머리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이 대답을 들은 고경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잠시 후 고다정은 휴대폰을 내려놓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국가에서 발표한 수치를 봤는데, 최근 몇 년 노인들이 받은 부양비는 매달 40만 내지 60만이에요. 저는 매달 60만씩 줄게요.”“60만? 날 거지 취급하는 거야?”고경영은 고다정의 말을 듣고 화를 내며 펄쩍 뛰었다.그는 고다정이 이렇게 부자인데 매달 부양비로 수천만은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고다정이 싸늘하게 웃더니 비아냥거렸다.“가능하다면 정말 이 돈을 거지한테 주고 싶네요. 당신처럼 감사는커녕 적다고 나무라지는 않을 테니까.”이 말을 들은 고경영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했다.그가 입을 열기 전에 고다정이 말을 이었다.“60만이 적어서 받기 싫다면 저는 필요한 사람에게 기부할 거예요.”“누가 싫대? 이달 부양비를 줘.”고경영이 이 돈을 남에게 주게 할 사람인가.무일푼인 그에게 60만이 비록 적은 돈이지만 아껴 쓰면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을 것이다.고다정은 고경영을 아니꼽게 힐끗 보더니 바로 입금하지 않고 말했다.“이 돈을 줄 수는 있는데, 먼저 부양 협의서부터 작성해요. 앞으로 당신을 자주 보고 싶지 않으니까.”그녀는 고경영을 너무 잘 안다. 60만은 이 남자에게 한 끼 식사비로도 모자란 돈이다. 이 남자가 계속 물고 늘어지지 않게 하려면 협의서를 체결해야 한다.고경영은 그녀가 자기를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 방법도 없기에 분노를 억누르고 협의서를 체결한 후 60만을 받고 떠났다.산 아래에 도
그날 한밤중에 여준재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집에 돌아왔다.그는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잠옷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끄덕끄덕 졸고 있는 여인을 발견했다.불빛 아래서 고다정의 모습은 약간 초췌해 보였지만, 곳곳에 집에서만 느낄 수 있는 따뜻함이 묻어났다.여준재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다가갔다.그가 허리를 굽혀 안으려는데, 손이 몸에 닿는 순간 그녀가 놀라 깨어났다.“왔어요?”남자를 반기는 고다정, 그녀는 눈을 비비더니 허우적거리며 소파에서 일어섰다.그녀는 옆에 놓인 휴대폰을 들고 새벽 2시가 된 것을 확인하고는 가슴 아픈 듯 말했다.“왜 이렇게 늦었어요?”여준재는 약간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어쩌다 보니 우리들의 아버지랑 일 얘기에 빠져서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우리들의 아버지라니요?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고다정은 화난 듯 그를 흘겨보았다. 그녀는 이 남자가 곤란한 상황에서 빠져나가려고 말장난을 한다는 것을 안다.하지만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보고 그녀는 차마 심한 말을 하지 못했다.“한 번만 용서할게요. 다음에는 이러면 안 돼요. 당신 몸이 견뎌낼 수 있는지는 생각해 봤어요?”“알았어요. 다음에는 이러지 않을게요.”여준재는 잘 넘어가서 다행이라는 듯 고다정의 손을 잡고 거듭 맹세했다.고다정은 입을 오므리고 웃으며 손을 빼내고는 그의 등을 떠밀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알았으니 그만하고 올라가 씻어요. 야식 만들어 줄게요.”“그럼 수고해요, 여보.”정말로 배고팠던 여준재는 고개를 숙여 고다정의 얼굴에 살짝 뽀뽀한 후 서류 가방을 들고 위층에 올라갔다.잠시 후 그가 씻고 나오니 고다정의 야식이 이미 준비됐다. 색과 향, 맛이 모두 완벽한 칼국수였다.“맛있겠다. 해외에 있을 때 저녁이면 늘 당신이 만든 음식이 생각났어요.”여준재는 탁자 옆에 와 앉더니 꿀 발린 멘트를 날렸다.고다정도 이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았지만 얼마 안 가서 표정이 싸늘해졌다.여준재가 방금 한 말에서 그녀는 여준재와 아직 못다 한 중요한
그 후 이틀 동안 유라는 생명에 지장은 없었지만, 반복적인 고열에 시달리며 깨어나지 못했다.하여 고다정과 진현준은 서로 교대해가며 그녀를 간호했고, 성시원 또한 가끔은 그들을 도와주었지만, 더 많은 시간은 병원에서 채성휘를 치료하는 데에 쓰곤 했다.한편, 기밀이 노출되어 많은 프로젝트 경영 방식이 수정된 탓에 여준재는 매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이렇게 각각 한 주를 보낸 뒤에야 상황이 조금은 호전되었다.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고다정은 유라를 간호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웬 힘없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물…”미간을 찌푸린 채 힘없는 목소리로 유라가 중얼거렸다.만약 고다정이 그녀 가까이 붙어있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 소리를 들을 수조차도 없었을 것이다.“유라 씨 깨어났어요?!”고다정이 격동된 소리로 물었다.하지만 유라는 별다른 반응 없이 ‘물’이라는 똑같은 단어만 되뇌었다.그 모습에 고다정은 엄청 기뻐하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옆 탁자 위의 물잔에 면봉을 적신 뒤, 유라의 입술을 조금씩 적셔주었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고다정의 귓가에 다시금 힘없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게다가 이번에는 다소 놀라움까지 섞여 있는 말투였다.“고다정 씨, 왜 당신이 여기에?!”고다정을 제외하고 병실에 아무도 없는 걸 발견한 유라는 누가 봐도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물론 고다정도 그걸 눈치채긴 했지만, 그녀가 여준재를 살려준 걸 고려해 그녀에게 설명해주었다.“다른 사람들에게 노출되기에는 그쪽 신분이 너무 특별하잖아요.”“그럼 여준재는요? 나를 이렇게 혼자 내버려 두어도 걱정 안 된대요?”유라는 직설적으로 그녀에게 물었고, 자신의 옆에 여준재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 기분이 좋지 않은듯했다.그런 그녀의 속마음을 고다정 또한 모르는 건 아녔다. 고다정도 속으로는 불편하긴 했지만, 그래도 일단은 참을성 있게 그녀에게 말했다.“준재 씨는 회사에 갔죠. 남자가 이런 곳에 계속 남아 있다는 거도 말이 안 되잖아요? 그리고 내가 여기
“됐어요. 나 그만 겁줘요. 내 몸에 대해서 내가 모를까 봐요?”유라는 고다정의 말을 가로채며 그녀를 흘겨보았다.그 말에 고다정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유라가 이어서 캐물었다.“조금 전에 통화하는 거 들어보니 내 정황에 대해 어쩌고 하던데요? 그게 뭔 말이에요?”둘은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침대 쪽까지 걸어갔다.유라는 고다정의 힘으로 다시 침대에 누웠지만, 시선은 고다정에게 고정된 채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고다정은 비록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얼굴이 창백한 그녀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좋지만은 않았다.“그게…”그녀는 몇 초간 머뭇거리다가 결국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그 잔인한 진실에 대해 입을 열었다.“너무 심하게 다쳐서 자궁 전체가 큰 상처를 입었대요. 의사 선생님도 별다른 방법 없이 그걸 끄집어낼 수밖에 없었고요.”마지막 한마디까지 전부 내뱉고 나서야 고다정은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그녀는 제자리에 선 채 차마 유라의 표정을 쳐다볼 수 없었고,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유라가 화내기만 기다렸다.그렇게 몇 분을 기다렸지만, 유라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하여 너무도 궁금해 난 그녀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보니 유라가 넋이 나간 채 침대에 앉아있었다. 유라는 조금 전 그 소식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듯한 모습이었다. 자신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소식을 들으면 누구나 다 똑같은 반응일 것이다.이런저런 생각을 마친 고다정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이런 결과에 대해 저랑 준재 씨 모두 미안할 따름이에요. 유라 씨가 준재 씨를 구해준 거에 대해서도 엄청나게 감사하고요. 그래서 유라 씨가 어떤 조건을 제시하든, 저랑 준재 씨의 능력 안에서 책임지고 들어주려고요.”“책임이요? 어떻게 책임질건데요?”유라는 정신을 차리고 음울한 눈빛으로 고다정을 바라봤다.고다정 또한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지만, 그녀의 말투에서 갑자기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곧 그 좋지 않은 예감이 진짜가 되었다.유라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내뱉은 그 말은 듣는 사람으
여준재는 곧 올 거라고 했지만 시간은 이미 한 시간이나 지나갔다.여준재가 도착했을 때쯤, 유라는 병실 침대에 앉은 채 링거를 꽂고 있었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한편 고다정은 그 옆에서 조용히 앉아 의학책을 보고 있었다.그러다가 문 쪽의 인기척을 들은 그 둘은 바로 문 쪽을 쳐다보았다.“준재 씨, 왔어요?”“준재야, 왔어?”여준재를 보자마자 그 둘은 똑같은 말을 내뱉었지만, 그는 가장 먼저 부드러운 목소리로 고다정의 말에 답했다.“수고 많았어요.”“아니에요. 밥 먹었어요?”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그의 끼니를 걱정했다.그녀는 여준재가 바쁜 업무처리로 2시가 다 되어서까지 점심을 먹지 못했을까 봐 물은 것이었고, 여준재 또한 2시가 다 되어서까지 확실히 점심을 먹지 못했다.이윽고 여준재가 살짝 멋쩍어하며 답했다.“회의 끝나고 바로 왔어요.”그 말에 고다정은 그를 흘겨보며 그에게 한마디 하려고 했다.하지만 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에 갑자기 유라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고다정 씨, 준재 약혼녀라면서 여기서 멍하니 뭐해요? 아무것도 안 먹었다잖아요!”말을 마친 뒤 그녀는 고다정이 어떤 표정이든 아랑곳하지 않고 여준재를 향해 풀이 죽은 모습으로 말했다.“예전에 우리가 했던 농담이 아마 사실로 받아질 것 같네? 앞으로 나 진짜 너에게 의지해야 할 것 같아.”유라는 불쌍한 표정으로 여준 재를 바라봤다.고다정은 갑자기 확 변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표정을 숨기며 표정 관리를 했다.그리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고다정이 아무 말 없이 쿨하게 그 자리를 떠날 수 있었던 것 또한 여준재가 자신에 대한 마음이 진심이라는걸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한편, 여준재는 유라에게 했었던 말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예전에 그 둘은 약속을 한 적이 있었다. 만약 위험한 상황에서 둘 중 한 명에게 문제가 생기면 늙어서까지 보살펴주겠다고 말이다.게다가 지금의 유라는 여준
자기 약혼녀의 목소리를 들은 여준재는 자연스레 고다정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유라 맞은 켠 의자에 앉혔다. 그러고는 그제야 조금 전에 그들이 했던 대화 내용에 대해 알려주었다.“보상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어요.”“둘이서 얘기 잘됐어요?”고다정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물었다.여준재는 유라를 힐끗 보더니 조금 전 언급했던 조건을 다시 한번 말하며 그녀에게 물었다.“이 조건 어떤 것 같아요?”그 말을 들은 고다정은 그 자리에서 처음 들은 척 웃어 보이며 그에게 말했다.“좋은 것 같은데요.”말을 마친 뒤, 그녀는 유라 쪽을 한번 바라보며 진심 어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하준이와 하윤이는 모두 착한 아이들이고, 책임감도 있어요. 만약 유라 씨가 자기들 아빠 구한 거 알면 유라 씨를 엄청 존경할 거예요.”‘누가 그딴 아이들 존경 받고 싶대!’유라는 속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그러고는 억지로 입꼬리를 위로 올리며 말했다.“나 힘들어서 좀 쉬어야겠네.”“그럼 푹 쉬어. 만약 어디 불편하면 도우미더러 진현준 의사 선생님 부르라고 할게.”여준재는 유라의 상태가 좋지 않은 걸 보고 그녀에게 몇 마디 당부 후, 고다정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둘이 다정한 모습으로 병실 문을 나가는 모습을 본 유라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고, 마음속으로 억눌렀던 질투심이 이성을 지배하는듯한 느낌이었다.그녀는 몸의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고 뒤에 놓인 베개를 있는 힘껏 내리쳤다.‘왜, 왜? 내가 이렇게나 많은 걸 했는데도, 왜 나한테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거야! ‘“여준재, 넌 내꺼야. 내꺼라고! 난 절대로 너 포기 못 해!”그녀의 광기 어린 목소리가 병실 안에 울려 퍼졌다.하지만 이미 그 자리를 떠난 고다정과 여준재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한편, 그 둘은 아래층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식당으로 가는 길, 여준재는 고다정의 손을 잡은 채 미안해하며 말했다.“두 아이 일에 대해 제가 혼자 결정해서 기분 안
‘똑똑’——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유라는 자신의 용모를 다시 한번 체크 후 이번에는 머리와 옷도 한 번 더 확인하고 나서야 답했다.“들어오세요.”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여준재와 고다정이 문을 밀며 들어왔다.그리고 그들 뒤에는 심해영과 여진성 부부, 그리고 호기심으로 가득 찬 두 아이가 서 있었다.“유라야, 여기 우리 엄마와 아빠셔. 네가 날 구해준 거에 대해 엄청 고마워하면서 인사하러 왔어.”여준재는 자기의 부모님을 가리키며 그녀에게 소개해주었다.심해영과 여진성은 침대에 앉아있는 외국 여성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들은 밖에서 여준재와 호형호제할 수 있다고 하여 당연히 우람하게 생긴 남성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정교하게 생긴 여자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 말이다.“유라 씨, 우리 준재 구해줘서 고마워요. 이건 저희의 작은 마음이니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물론 준재를 구한 그 은혜는 이런 물질적인 거로 대체할 수 없다는 거 저희도 잘 알고 있고요.”심해영은 준비한 선물을 침대 옆에 올려놓으며 말했고, 두 아이도 고마운 듯 유라를 바라보며 귀엽게 입을 열었다.“아줌마, 저희 아빠 구해줘서 고마워요. 만약 아줌마가 없었다면 저와 제 동생 모두 아빠를 잃을뻔했어요.”“앞으로 아줌마는 우리의 엄마와 양엄마 외에도 하윤이가 가장 좋아하는 아줌마일 거예요.”하윤이도 그 옆에서 귀여운 목소리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하지만 두 아이의 말은 유라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미니 버전인 여준재와 고다정을 보며 유라의 입가 미소 또한 많이 옅어졌다.하지만 여준재와 그의 부모님 앞에서 두 아이를 싫어하는 티를 낼 수는 없었다.“너희들 마음 아줌마도 충분히 느꼈어. 그리고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준재를 구하는 건 아줌마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니까.”유라는 여준재가 두 아이의 아빠라는 걸 받아들이기 싫어 일부러 그와 관련된 호칭을 피해가며 이야기했다.거기에 대해 다른 사람은 전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고다정만 그 말에서 이상함을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