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다정의 말을 들은 시리우스는 그 의미를 바로 알아차렸다.“아가씨 농담도 참. 아가씨께서 이 거대한 연구소의 경영을 맡겼으니 당연히 저는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죠. 게다가 전문가들도 귀한 인재들이니 아가씨를 위해서 이곳에 남겨두려면 더 잘 대해주는 게 당연한 거죠.”시리우스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정중한 자세로 그녀의 옆에 섰다.방금 전 그의 말은, 그가 하는 모든 일이 고다정을 위한 것임을 암시했다.고다정 역시 그 뜻을 알아듣고 입꼬리를 씩 올리며, 감정이 담겨있지 않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렇다면 아저씨가 하던 일을 멈추게 한 건 제 잘못이네요.”“아가씨,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저를 위해서 내린 결정이잖아요.”시리우스는 여전히 고다정과 기 싸움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고다정은 더 이상 그런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기에,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채 선생님께서 깨어나면 아저씨에게 제대로 설명드릴 거예요. 그러고 보니 내일이면 채 선생님이 깨어나실 때가 됐네요. 내일이 3일째인데 어젯밤 병원에서 아무도 소식이 없는 걸 보니 위험한 상황은 넘긴 것 같아요.”그녀는 말하며 시리우스의 표정을 살폈다.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시리우스는 위선에 익숙해진 것인지, 아니면 진짜로 아무것도 거리낄 게 없는지, 표정에서 어떤 의미심장한 변화도 찾아볼 수 없었다.역시 사부님의 곁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명성에 걸맞게, 동요하지 않는 침착함이 극에 달했다.두 눈을 깜빡이던 시리우스는 속으로 무슨 계산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겉으로는 고다정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채 선생님은 정말 좋은 분이니까 아무 일 없을 겁니다. 그냥 때가 되면 채 선생님께서 저를 위해 해명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아가씨도 제 휴가 없애지 말아 주세요. 간만에 쉬는데 이틀 푹 쉬고 싶네요.”“걱정 마세요. 때가 되어 내키지 않으면 시간 더 드릴게요. 그리고 아저씨도 제가 연구소를 너무 오래 방치했다는 걸 상기시켜 주셨잖아요. 게으름 부린 거니까, 사부님께서 꾸짖으시면 벌
고다정은 소민의 보고를 듣고 의자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소민 씨의 말을 듣고 보니 저 사람은 그저 길잡이인 것 같네요.” “길잡이라...” 소민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고다정의 뜻을 알 것만 같았다. “알겠습니다. 제가 계속 주시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다정은 머리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은미는 어디 다친 데 없대요?” “은미 씨는 병원에 있는 것이 아무래도 위험할 것 같아 제가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소민은 자신이 한 일을 숨기지 않고 사실대로 말했다. 평소 같지 않은 소민의 행동에 고다정은 조금 의아했다. 궁금한 나머지, 고다정이 물으려던 찰나 또 한 통의 전화가 들어왔다. “병원 쪽은 계속 소민 씨가 수고해 줘요. 준재 씨의 전화가 걸려 와 먼저 끊을게요.” 말을 마친 고다정은 소민과의 통화를 마치고 여준재의 전화를 받았다. “마무리 작전이 끝날 때까지 전화하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고다정은 배시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혹시 마무리 작전이 끝났나요?” 여준재는 그녀의 들떠 있는 목소리에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마무리 작전은 끝났지만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조금 남아서 당분간 여기에 조금 더 머물러 있어야 할 것 같아요.” “한동안 더 있어야 해요?” 실망감에 가득 찬 고다정의 목소리를 들은 여준재는 웃으며 물었다. “왜요? 혹시 제가 보고 싶나요?” “네, 엄청 보고 싶어요.” 지금의 고다정은 조신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자신의 마음을 한껏 표현하기에 바빴다. 고다정의 고백에 여준재는 웃으며 말했다. “나도 당신이 보고 싶어요. 내가 갈 때까지 기다려요.” “그럼 빨리 와야돼요. 준이랑 윤이가 아빠의 얼굴을 까먹을 지경이에요.” 고다정의 농담에 여준재는 허허 웃었다. 한참 농담을 주고받다가 고다정은 마무리 작전의 결과와 여준재의 안부를 묻지 않은 것이 떠 올랐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고다정의 다정한 목소리에 여준재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띠었다. “다친 곳은 없으니 걱정 말아요. 다정
”안돼요!” 여준재는 고민도 하지 않고 고다정의 제안을 거절했다. 왜냐하면 그곳은 너무 위험하기에 고다정이 다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다정은 여준재의 말을 무시한 채 엄숙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두 가지 제안을 할게요. 첫째, 내가 당신에게 가는 것. 둘째, 당신이 나에게 오는 것. 선택해요.” 고다정이 화가 난 것을 알았지만 여준재는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비록 마무리 작전이 끝이 났지만 이곳은 아직도 여준재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주 소부분의 사람들이 아직도 좋게 담판을 지으려 하지 않고 호시탐탐 습격을 할 기회만 엿보고 있기에 고다정이 여기로 오는 것을 반대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여준재의 모습을 본 고다정도 그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이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유라는 냉전 중인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더니 무슨 수가 생각이 났는지 교활한 눈빛으로 변했다. “두 분, 저한테 좋은 방법이 있는데 들어볼래요?” 그녀의 말에 두 사람의 시선은 그녀를 향했고 유라는 금방 삶은 닭을 들고 여준재의 곁으로다가가 웃으며 말했다. “준재는 다정 씨가 여기로 오는 것에 반대하고 다정 씨는 준재가 아픈 몸으로 혼자 여기에 있는 것이 걱정되니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떨까요? 다정 씨가 저를 믿으신다면 제가 매일 준재의 옆에서 치료를 잘 받고 있는지 감시할께요. 만약 준재가 치료받지 않는다면 바로 다정 씨한테 보고할게요.” 화면 속에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수작부리는 유라의 모습에 고다정은 어이가 없었고 이런 유라의 모습은 고다빈과 똑같았다. 하지만 고다정이 허락도 하기 전에 여준재는 마음대로 동의했다. “다정 씨, 이 방법이 좋을 것 같네요. 유라가 저를 감시하도록 하고 만약 제가 치료에 협조하지 않는다면 제가 돌아가면 그때 혼내요. 여긴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저는 다정 씨가 오는 것은 원치 않아요.” 여준재가 자신을 걱정하는 것을 고다정은 알지만 그래도 그녀는 방금전 유라의 제안에 동의한 그가 얄미웠다. 이
또 자신의 전화를 끊은 고다정의 행동에 여준재는 아주 당황했다. 여준재는 고다정의 화가 아직도 풀리지 않았을까 봐 구남준더러 내일 빌라로 선물을 보내라고 지시했다. 이 일을 알 턱이 없었던 고다정은 전화를 끊고는 후회했다. “고다정 이 바보! 거기서 화를 내면 어떡해, 유라 그 여자가 고의로 준재 씨와 나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걸 아는데 바보 같이...” 고다정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다시 여준재에게 전화를 하려고 했지만 이내 핸드폰을 내려놓고 남은 업무처리에 집중했다. 이 시각 시리우스의 아파트에서. 시리우스는 위성 전화를 받고 얼굴색이 변했다. “뭐? 여준재가 아무 일도 없다고?” “그뿐만 아니라 우리도 큰 손해를 입었어. 그놈이 글쎄 성씨 가문이랑 손잡고 우리 4가문을 골탕 먹였어. 그동안 당신이 열심히 한 것들이 있기에 알려주는 건데 당신의 위치가 노출됐을 거야, 그러니 멀리 도망쳐. 그러다 성시원이 돌아가면 넌 죽었어.” 수화기 너머의 그 사람은 자신이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마친 시리우스는 공포에 휩싸였다. “그놈의 계략이었다니, 제기랄. 이젠 모두 끝이야, 내가 힘들게 쌓아 올렸던 나의 명성은 이제 끝이야! 이대로는 안 돼, 성시원이 오기 전에 도망가야 해...” ... 이튿날, 고다정은 두 아이와 몇 명 어르신을 모시고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소민에게서 보고를 받았다. “사모님, 시리우스가 사라졌습니다.” “사라졌다고요?” 의외의 소식이었다. “이미 사람을 시켜 고속도로를 지키게 했습니다.” 소민의 보고를 들은 고다정이 말했다. “시리우스는 이미 도망쳤을 겁니다. 그러니 고속도로의 인원은 철수해요.” 고다정이 이렇게 말하는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어제저녁, 여준재가 마무리 작전을 끝마쳤다는 일이 생각났고 또 시리우스가 성시원의 옆에서 아무도 모르게 몇 년 동안 스파이로 있었던 것은 필시 그를 도와주는 막대한 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소민은 처음으로 작전에 실패한 탓에 기분이 별로 좋
고다정은 화가 났지만 더 이상 여준재한테 뭐라 하지 않았다. 고다정은 자신과 여준재사이의 감정을 믿고 있었고 또 매번 트러블이 생길 때마다 항상 여준재가 먼저 고다정을 달랬다. 고다정도 생각해 보니 유라때문에 여준재와 불필요한 싸움을 하는 것은 둘 사이의 감정만 상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고 그사이에 많은 일이 발생했다. 흔들렸던 YS그룹의 상황도 이젠 안정되었고 여범준도 이번 일로 다시 안락한 노후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연구소 쪽의 일도 고다정의 노력으로 해결되는 중이었는데 채성휘는 아직도 깨어나지 못했다. 이날, 고다정은 연구소의 일을 마치고 병원 앞 꽃집에서 꽃다발을 사 들고 병실로 찾아가 보니 채성휘는 이미 일주일 전에 중환자실로부터 일반병실로 옮겨졌다. 병실 안에서 채성휘를 정성껏 돌보는 임은미의 모습에 고다정은 마음이 아팠다. 똑똑똑... “은미야, 나왔어. 오늘 성휘 씨의 상태는 좀 어때?” 고다정은 들고 왔던 꽃다발을 병상 머리맡에 놓인 꽃병에 꽂았다. 임은미는 고다정이 꽃병에 꽃을 담는 모습을 보고 수심 가득 찬 얼굴로 말했다. “전이랑 똑같아. 의사 말로는 이번 주에도 깨어나지 못한다면 영영 깨어나지 못하거나 식물인간 상태가 될 거래.” 임은미의 말에 고다정은 몹시 자책했지만 채성휘의 치료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내가 의사 선생님께 가서 물어볼게, 다른 치료 방법이 없는지.” “안 가도 돼. 소용없어. 내가 다 물어봤거든.” 임은미는 머리를 절레며 말하고는 병사에 누워있는 채성휘 쪽으로 다가가 이어 말했다. “다정아, 난 다른 사람처럼 평범하게 연애할 수가 없나 봐. 내가 여태까지 성휘 씨를 짝사랑한지 십몇 년이나 됐지만 옆에서 다른 여자랑 만나는 것만 봐왔어. 이제야 용기를 내서 나의 마음을 표현하려 했지만 성휘 씨를 영원히 잃을 수도 있다는 통보를 받았네?” 고다정은 임은미의 말에 그녀를 꼭 안아주며 말했다. “바보 같은 생각하지 마, 성휘 씨가 그동안 너무 피곤해서 조금 더
그 시각 진 씨 저택에서. 점점 안정을 찾아가는 YS그룹을 보며 진시목은 점점 불안했다. 이번 일로 YS그룹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을 거라 믿었는데 결과가 생각대로 되지 않으니 익명의 브로커에게 사실의 경과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연락이 되지 않자 고다빈도 불안했다. 이번 계획으로 고다빈은 고다정과 YS그룹에게 피해를 줄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유독 여준재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녀는 기뻤다. 아직까지 여준재가 돌아오지 않으니 고다빈은 그가 살해당했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고 여준재가 없으면 고다정이 어떻게 자신 앞에서 큰 소리를 칠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하지만 고다빈이 고다정을 찾아가기도 전에 나쁜 소식이 들려왔다. 바로 진시목이 기다렸던익명의 브로커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익명의 브로커는 고다정과 YS그룹을 건들면 안된다고 며칠후면 여준재가 돌아올 것이라고고다빈에게 연락을 했다. “뭐? 당신들이 여준재를 처리한게 아니었어?” 고다빈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누가 그러던? 여준재를 처리했다고?” 익명의 브로커가 한 말에 고다빈은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가 창피했다. “하지만 내가 고다정을 건드리지 않아도 그들은 내가 당신의 계획대로 행동한 것을 이미 알고 있을 수도 있어.” “걱정 마, 그 일은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으니 너에게 찾아가지 않을 거야.” 익명의 브로커는 고다빈을 안심시키고는 경고했다. “하지만 당신이 나의 말을 듣지 않고 멋대로 행동 한다면 그 후과는 당신 스스로가 책임져.” 그 말에 고다빈은 당연히 멋대로 고다정을 찾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때 익명의 브로커는 이어 말했다. “진시목에게 전해, YS그룹의 주식도 10%나 가졌으니 YS그룹의 주주총회에 참석할 생각이나 해.” “YS그룹에 가는 건 너무 위험하잖아.” 고다빈은 진시목이 YS그룹에 가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었기에 반대했다. “내가 명령하는 일에 언제 너의 의견이 필요했어?” 말을 마친 익명의 브로커는 고다
유라가 운이 좋았던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인지 매번 그녀가 여준재의 방에 들어갈때마다 그녀는 항상 여준재와 여진성이 영상 통화하는 것을 볼수 있었다. 그렇게 유라는 자연스럽게 여진성과 대화를 할 수 있었고 두 남자는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중요한 것은 여진성과 여준재는 유라를 사업 파트너와 친구로만 생각할 뿐이였다. 한편 고다정은 성시원과 여준재가 오는 날만을 손 꼽아 기다리자 준이와 연이도 덩달아 아빠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여준재가 한 달만 늦었더라면 준이와 연이의 졸업식에도 참가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날도 고다정은 평소와 똑같게 연구소로 가는 길에 제일 상대하기 싫은 심여진에게서 전화가 왔다. 고다정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전화를 거절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심여진에게 전화가 왔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고다정은 그녀의 전화를 거절했다. 그러자 심여진은 그녀에게 짧은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 고다정이 메시지를 확인하려고 할 때, 소담의 핸드폰이 울렸고 전화를 받은 그녀는 무슨 말을 들었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문자를 받은 고다정 역시 소담과 같은 반응이었다. “얼른 차 세워요!” 그녀는 소리를 질렀다. 알고보니 심여진은 고다정에게 강말숙이 자기 집에 있다고 메시지를 보냈던 것이다. 소담도 전화를 끊고 고다정에게 말했다. “사모님, 외할머님께서 위험한 것 같습니다.” “네, 알아요.” “바로 별장으로 가죠.” 고다정은 화를 억누르며 말했고 분위기가 안 좋다는것을 눈치챈 기사도 고씨 저택으로 그들을 모셨다. 고씨 저택에 도착한 고다정은 소담과 함께 문앞에서 초인종을 누르니 문이 열렸다. 고다정은 심각한 얼굴로 별장 안으로 들어가보니 거실에는 심여진과 고경영만 있을 뿐이었다. “할머니는요?” “걱정 마, 네 할머니는 안전해.” 고경영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 같았지만 그의 속은 말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눈앞에 서 있는 고다정이 마치 여준재와 비슷한 기를 내뿜고 있어 낯설고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준
“여보, 다정이 아직 젊은데 과부로 사는 건 아깝지 않아요?”심여진의 갑작스러운 한마디가 거실의 정적을 깼다.고다정은 고개를 홱 돌려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방금 뭐라 하셨어요?”“왜? 내 말이 틀렸어? 여준재가 죽어서 이렇게 오랫동안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는 걸 지금 모르는 사람이 있어? 남편이 없는 여자가 제일 불쌍해.”심여진은 입으로는 불쌍하다고 했지만 얼굴은 깨고소한 듯했다.고다정은 이 말을 듣고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한동안 조용하던 고경영이 갑자기 튀어나와 말썽을 부린 것이 이런 오해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심여진은 그녀가 웃는 것을 보고 불쾌해하며 쏘아보았다.“왜 웃어?”“아니에요. 그래서요?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고다정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웃을랑 말랑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직감적으로 이 여자가 좋은 마음으로 자기를 불쌍해할 리 없음을 알았다.사실상 확실히 그렇다.아니나 다를까 심여진이 음흉한 속내를 드러냈다.“네가 여씨 가문을 위해 아이 둘을 낳았지만 어쨌든 여준재와 결혼하지 않았으니까 여씨 가문의 사람이라 할 수 없잖아. 그리고 여자는 옆에 남자가 없으면 물이 부족한 꽃처럼 천천히 시들고 떨어지게 돼. 그렇지 않아요? 여보.”그녀는 말하면서 옆에 있는 고경영을 향해 눈을 깜박거렸다.고경영은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심여진의 뜻을 깨닫고 두 눈을 반짝였다.“네 여진 이모 말이 맞아. 여자는 남자가 없으면 사는 게 고달파. 어쨌든 너는 내 딸인데, 아버지가 돼서 네가 고생하는 꼴을 어떻게 보겠니? 네가 후반생도 걱정 없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도록 좋은 배필을 찾아볼게.”이 말이 끝나자마자 노기를 띤 비웃음 소리가 입구에서 들려왔다.“당신들 고씨 가문은 진짜 주제 파악을 못 하는 군요. 언제부터 우리 여씨 가문의 일을 고씨 가문에서 결정했어요?”이 말과 함께 심해영이 화난 표정으로 거실 한복판에 나타났다.여진성이 따라 들어오며 위험한 눈빛으로 고씨 부부를 노려보았고 말투도 얼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