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범준은 고다정의 얼굴이 평온해지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뒤이어 그는 위엄 있게 사람들을 훑어보며 그중 승복하지 않는 표정들도 놓치지 않았다.“모두 보셨다시피 우리 손자며느리는 누군가에게 조종당해 회사에 불리한 일을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 손자며느리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 두 번의 기밀 유출로 인해 입은 손실은 우리 여씨 가문에서 전부 책임지겠습니다. 하지만...”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그의 말투가 날카로워졌다.“하지만 누군가가 배후에서 우리 손자며느리를 모함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우리 여씨 가문에서는 그 사람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고다정은 자기편을 들어주는 여범준의 말을 듣고 마음이 따뜻해졌다.하지만 그녀는 자기가 어떻게 덫에 걸려 최면 당하고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가 더 걱정스럽고 불안했다.그리고 하동훈이 그녀가 한 일을 다 파악하고 있는 듯한데, 이 남자가 뭘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회의가 끝난 후, 고다정은 한가득 의혹을 안고 여범준과 여진성을 따라 나갔다.하동훈은 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오늘 이사회에서 그는 목적을 하나도 달성하지 못했다.그는 원래 가지고 있는 증거로 고다정을 처리한 후 다른 이사들을 선동해 여준재 대표이사 해임을 추진할 생각이었다. 아니 가능하다면 이사 자리까지 내놓게 하고 싶었다.그런데 여씨 가문의 그 늙다리가 모든 일을 떠안아서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게 될 줄이야.하동훈의 분노에 대해 고다정은 전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사무실에 돌아온 후, 여범준은 옆에서 침묵하는 두 사람, 특히 기분이 극도로 가라앉은 고다정을 바라보며 속으로 얼마나 자책하고 있을지 알았다.“진성아, 다정이가 회사에 두 번 손실을 입혔지만 너도 다정이 상황을 봤잖아. 누군가에게 당한 거야. 너...”여범준은 고다정을 달래려 하지 않았다.그는 이런 상황에서 옆 사람의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안다.여진성도 그의 뜻을 알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먼저
약방에 들어선 후 여범준은 신수 노인이 묻기도 전에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선생님, 오늘은 다정이 검사를 부탁하려고 찾아왔어요. 다정이가 최면을 당한 것 같아요.”“최면을 당했다고요?”신수 노인이 깜짝 놀라며 고다정을 쳐다보자, 그녀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어르신, 검사를 부탁드릴게요.”이 말을 들은 신수 노인은 표정이 굳어졌다.“최면에 걸렸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제가 아니라 할아버지가 먼저 발견했어요.”이에 대해 여전히 의문인 고다정은 사실대로 대답했다.그녀도 자기가 언제 최면에 걸렸는지 모르겠다.신수 노인은 멍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재차 입을 열었다.“사건 경과를 처음부터 끝까지 말해줄 수 있어?”“그건...”고다정은 망설이며 옆에 있는 여범준을 쳐다보았다.“괜찮아, 말해.”여범준의 허락이 떨어지자 고다정은 염려를 내려놓고 사건 경과를 대충 얘기했다.신수 노인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열심히 듣고 있었다.“그러니까 전화 한 통을 받은 후 의식을 잃은 거야?”“그렇게 말할 수 있죠. 하지만 그날 통화기록을 뒤져 보니 기록이 없더라고요. 물론 제가 삭제했을 가능성도 있죠. 그래서 최근 통화기록을 뽑아오라고 제 비서를 통신사에 보냈어요. 곧 가져올 거예요.”고다정이 후속 조치를 말하는 것을 듣고 여범준은 만족하는 기색을 보였다.그는 이런 상황에서 고다정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냉정하게 조사하고 있었다.하지만 신수 노인은 고다정의 말을 듣고 표정이 굳어졌다.“그러면 나와 함께 치료실로 들어가 간단한 검사를 해보자꾸나.”“부탁드릴게요.”고다정이 신수 노인을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여범준은 두 사람이 치료실에 들어간 후, 표정이 온화함에서 차가움으로 바뀌었다.그는 수행 비서에게 분부했다.“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나는 차에 가서 전화하고 올 테니.”이 말을 남기고 그는 약방을 떠났다.치료실에서 고다정은 신수 노인의 지시에 따라 의자에 앉았다.“다정아, 나는
여씨 가문을 옹호하는 고다정의 모습과 한 가지 일에 대한 그녀의 침착과 여유로운 태도에 여범준은 흐뭇하기 그지 없었다.그리고 그제야 고다정을 인생 파트너로 확정 지은 여준재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다정아, 우리 여씨 가문에는 그 돈 없어도 상관없단다. 그러니 그렇게 자책할 필요 없다.”여범준은 고다정을 타일러 주고 난 뒤, 신수 노인을 바라보며 물었다.“우리 손주며느리가 정신적 유도에 휘말린 건 이로써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혹시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으십니까?”“죄송하지만 심리학에 대해서 저도 깊이 연구한 적이 없어 모두가 알고 있는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방면에 있어서 훌륭한 전문의를 알고 있으니 괜찮다면 추천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신수 노인은 미안한 모습이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며 답했다.돌아온 답이 겨우 이뿐임에도 불구하고 여범준과 고다정은 고마울 따름이었다.신수 노인이 직접 나서준 덕분에 고다정은 불과 30분 만에 심리학 전문의 진찰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전문의는 이미 신수 노인으로부터 고다정의 상황을 들은 바가 있어 그녀를 보자마자 각종 검사를 받으라며 일일이 안배해 주었다.전반 과정은 약 30분 정도 남짓했다. 검사를 모두 마치고 나서 두 사람은 선두로 치료실에서 걸어 나왔다.표정이 굳어진 전문의의 진지한 모습을 보게 되는 순간 여범준은 마음속으로 나쁜 예감이 떠올랐다.“선생님, 우리 손주며느리 괜찮습니까?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어르신, 죄송합니다만 사모님 상황은 저로서도 힘들 것 같습니다.”전문의 또한 미안한 마음이 가득한 얼굴로 여범준을 바라보며 고대를 가로 저었다.이에 여범준은 안색이 어두워지면서 눈살을 찌푸렸다.“말도 안 됩니다. 신수 어르신께 이미 들은 바가 있습니다. 최면과 정신적 유도에 대해서 높은 견문을 지니고 계신다고 제가 분명히 들었습니다.”“그건 신수 어르신께서 저를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습니다. 모두 한낱 거품에 불과하지 않는 칭찬들뿐입니다. 저보다 훌륭한 전문의는 많고도
고다정의 말을 다 듣고 나서 전문의는 과연 생각했던 그대로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제 생각이 맞는다면 아마 그때 최면에 걸리신 거 같습니다. 그리고 주입된 약물은 최면을 거는 데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정신에 관한 약물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니 알아내시지 못하는 겁니다.”“그럼, 그 뒤로 자꾸 졸리고 자는 건 어찌 된 일인가요?”고다정은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전문의를 바라보았는데, 여범준도 덩달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바라보았다.그는 외국에서 두 사람에게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을 모르고 있었다.고다정의 질문에 전문의는 잠시 사색하더니 되물었다.“요즘도 자주 졸리십니까?”“아니요.”고개를 저으며 고다정은 대답을 했으나 마음속으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공해로 가서 여준재를 만난 후로부터 졸림에 빠져드는 상황이 없었으니 말이다.이에 전문의는 고개를 살짝 들고 말했다.“만약 요즘에 졸음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전까지 정신적 보조 약물을 사모님도 모르는 사이에 복용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효능을 강화하는 약으로 배후자가 사모님에 대한 정신적 컨트롤을 더욱 강화했을 것으로 보입니다.”“효능 강화요?”고다정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되물으며 이윽고 안색도 한껏 복잡해졌다.전문의가 아니었다면 고다정은 줄곧 자기가 무슨 이상한 독에 중독되어 내내 졸음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착각했을 것이다.하지만 인제 와 보니 고다정의 생각이 그릇된 것이다.여기까지 생각하자 고다정은 무서움이 밀물처럼 미친 듯이 밀려왔다.이 정도로 강한 세력이 그들을 암살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식은 죽 먹기 일 것이다. 그럼, 여준재 쪽도 자연스레 위험해진다.의사 사무실에서 나오는 고다정의 얼굴을 보고 여범준은 안색이 여러 번 변했지만,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다정아, 준재하고는 내가 연락했다. 준재 쪽은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다정이 너 스스로를 잘 지키는 것이다. 너만 괜찮고 남에게 조종당하지 않는다면 준재 쪽의
강말숙을 타일러 주면서 고다정은 주위의 하인들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이상한 점도 발견하지 못했다.다행히도 고다정의 말을 들은 강말숙은 안색이 조금 좋아졌지만, 완전히 마음이 놓인 건 아니었다.“준재를 찾아내지 못했다면서 넌 왜 돌아온 것이냐?”“외국에서 도움이 일도 되지 못해서 회사나 대신 관리해 주려고 돌아온 것인데, 누군가가 제 몸에 손을 댈 줄을 몰랐어요.”뒷말이 나오자 고다정의 안색은 다소 일그러졌는데, 강말숙 또한 비슷했다.이윽고 강말숙은 갑자기 뭔가가 떠올랐는지, 갑자기 황당해하며 고다정의 손을 잡고 말했다.“혹시 너한테 손을 댄 것으로 목적에 달성하지 못했다면, 우리 준이, 윤이한테 손을 대는 건 아니겠지?”그 말에 고다정은 문득 깨어난 듯이 걱정한 기색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다행히도 이때 소담이 뒤에서 걸어 나오면서 소리를 냈다.“그 부분에 대해서는 안심하셔도 됩니다. 지난번 사모님께 사고가 있고 나서 작은 도련님과 아가씨께 제 동생을 보냈습니다. 제 동생이 두 분을 잘 보호 할 것이고 학교 측에도 이미 사람을 보냈습니다. 절대 그 어떠한 기회도 상대에게 노출되지 않게끔 배치했습니다.”소담의 말을 듣고 나서 고다정은 그제야 한시름 놓게 되었다.이제 막 입을 열어 여준재에게 어떤 계획이 있지 묻고 싶었으나 소담이 먼저 입을 열었다.“사모님, 조금 전에 구남준 씨한테서 연락이 왔었습니다. 사모님께서 도와주실 수 있는지, 보고 드릴 게 있다고 했습니다.”‘보고 드릴 일이 있다고?’‘혹시 준재 씨에 관한 일인가?’고다정은 잠시 침묵한 채로 생각하더니 지시를 내렸다.“시간 된다고 전해주세요.”말을 마치고 강말숙을 보고 덧붙였다.“외할머니, 일이 좀 생겨서 그러는데, 일 다 보고 올게요.”“그래. 어서 가서 일 보거라. 참, 뉴스에 나온 보도를 준이하고 윤이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잘 생각해 봐야 한다. 아직 어리지만, 일이 멀리 번진 만큼 저녁에 너하고 물을 것이다.”강말숙은 당부하며 말했다.이에 고다정
전에 여준재는 이미 고다정에게 메시지를 보내 둔세 가문을 대처할 준비를 하고 있다며 대략적인 계획을 말한 적이 있다.그러한 이유로 고다정은 자기에게 숨김이 있는 그에게 화를 내지 않은 것이다.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자기를 위한 여준재의 노력이기 때문이다.“이쪽의 배치는 어느 정도 끝을 달리고 있어요. 늦어서 일주일 뒤면 손을 쓸 것인데, 그때가 되면 전세계적으로 경제에 큰 파도가 일 거예요. 하지만 할아버지에게 준비해 놓으시라고 얘기는 했어요.”“참, 최면 당했다는 일은 할아버지한테서 들었어요. 아마 소리를 통해서 최면을 당한 것으로 보이는 데, 당분간 낯선 전화는 받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그리고 앞으로 일주일 동안 연락할 수 없을 거예요. 자주 연락하면 그 사람들에게 신호가 잡힐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 그러니 그동안 몸 잘 챙기고 어디로 가든 소담 씨 데리고 가요.”여준재는 고다정에게 거듭 신신당부하며 이를 듣고 있는 고다정은 걱정하는 마음에 안절부절못했다.그러나 결코 말릴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다.이미 당긴 화살인 만큼 다시 도로 거둘 수 없다. 아니면 마지노선이 없는 그들에게 평생 잡혀 살지도 모르는 노릇이다.그 후로 두 사람은 서로 당부하고 나서 마지못해 아쉬워하며 전화를 끊었다.이와 동시에 외국의 한 건물에서 옷차림이 범상치 않은 3남 1녀가 거실에 앉아 YS 그룹의 일에 관해 상의를 나누고 있다.“YS 그룹 쪽은 이제 어느 정도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슬슬 그물을 걷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김창석 쪽도 마찬가지입니다.”중간 자리에 앉은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는데, 그가 이 사람들의 두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남자는 옛 시절의 염소수염을 하고 있다.다른 세 사람의 이 남자의 말을 듣고 무척이나 호탕한 웃음소리를 냈다.그들은 이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고 드디어 YS 그룹과 성씨 가문을 손에 넣게 될 때가 왔다.… 그날 저녁 온라인에서 고다정에 관한 기사는 어느 정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모조리 삭제되
고다정의 변화에 대해서 모두가 잘 알고 있다.강말숙은 그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어주려고 몇 번이나 대화를 했으나, 그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강말숙에 대해 숨김이 있는 고다정이라 마음이 무척이나 무겁고 괴로울 따름이었다.하루가 멀다고 수척해지는 고다정의 모습에 두 아이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그러나 아무리 그 중의 이유를 물어보아도 고다정은 두 아이에게 실토하지 않았다.그날 밤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은 고하준은 고하윤이 잠든 틈을 타서 작은 이불과 작은 베개를 안고 고다정의 방문 앞으로 다가와 문을 두드렸다.문을 열자마자 이러한 모습을 보게 된 고다정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준아, 지금 뭐 하는 거야?”“엄마, 저 오늘 엄마하고 같이 자고 싶어요. 같이 자면서 얘기도 나누고 싶고요.”고하준은 말을 마치고 나서 고다정이 허락하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베개와 이불을 꼭 안고 문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방안으로 곧장 달려 들어갔다.넓은 침대로 바로 직행하여 재빠르게 자기가 잘 잠자리도 펼쳐 놓았다.작은 슬리퍼를 벗고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고 난 뒤, 고하준은 고다정이 아직 멍하니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비어있는 옆자리를 두드리며 애교를 부렸다.“엄마, 얼른 이리로 와요.”이에 고다정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문을 닫고 곧장 침대로 다가갔는데, 침대에 오르자마자 고하준이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엄마, 저한테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아빠한테 뭔 일 생겼죠? 아니면 외국에서 지금 엄청나게 위험한 일을 하고 있는 거죠?”“왜 갑자기 그렇게 묻는 거야?”고다정은 그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도려 물으며 고개를 숙였는데, 마침 고하준의 진진한 눈빛을 마주하게 되었다.그러자 고하준은 진지하게 분석하기 시작했다.“전에 엄마가 아빠한테 아무런 일도 없다며 외국에서 업무처리를 하고 계신다고 그랬잖아요. 하지만 여러 날이 지나도록 아빠와 엄마는 단 한 번도 통화를 하지 않았어요. 저도 몰래 아빠한테 연락한 적이 있는데, 연락
고다정의 말을 듣고 여진성은 몇 초 동안 침묵하고 나더니 그제야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했다.하지만 그는 가볍게 웃으며 고다정에게 위안을 해주었다.“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나도 우리 아버지도 이미 생각했던 부분이라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예요. 그러니 안심해도 좋아요.”“그럼, 마음 놓고 있어도 되겠어요.”고다정은 한시름이 놓인 듯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이에 여진성은 웃으며 이윽고 관심을 보였다.“고 선생님은 요즘 좀 어때요? 낯선 전화를 받거나 낯선 사람을 마주친 적이 있어요?”그의 질문에 고다정은 사실대로 대답했다.“아니요. 그런 일은 없었어요.”“없다니 참으로 다행이에요. 그럼, 아직 봐야 할 업무들이 있어 그만 끊을게요. 집에서 아이들 잘 챙기고 있어요. 행여나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우리한테 연락하고요. 준재가 옆에 없으니 우린 자연히 챙겨줄 의무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 너무 사양하지 말고 언제든지 연락해 줘요.”여진성은 마음이 놓지 않고 여러 마디 당부하고 나서야 전화를 끊었다.그러나 고다정이 전화를 미처 놓기도 전에 벨소리는 다시 급하게 울리기 시작했는데, 김창석이었다.“아가씨, 큰일났습니다. 웬 괴한들이 별장으로 들이닥쳐 특효약에 관한 연구와 자료를 모조리 빼앗아 갔습니다. 그리고 채 원장님은 특효약을 도로 빼앗아 오려다가 총에 7발이나 맞았습니다.”“네?”고다정은 대경실색하며 휴대 전화를 들고 있는 손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미친 듯이 밖으로 달려 나가면서 고다정은 재빠르게 명령을 내렸다.“지금 즉시 채 원장님을 병원으로 모시고 가세요. 저도 가능한 한 빨리 달려갈게요. 자세한 내용은 만나서 다시 나눠요.”말을 마치고 고다정은 즉시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 나서 거실에 있는 이상철에게 소리쳤다.“당장 차 좀 준비해 주세요. 지금 나가야겠어요.”다급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강말숙은 걱정한 기색이 역력했다.“다정아, 뭔 일 생긴 것이냐?”고다정은 자세한 내용을 말하기에 시간이 부족하여 휴대전화를 들고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