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다음 날들에 여준 재는 고다정의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증세가 걱정돼서 계속 그녀의 곁을 지켰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주일이 지났지만 고다정이 혼수상태에 빠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와 여준재 모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여준재는 매일 고다정의 곁을 지켰다. 덕분에 두 사람의 애정은 그동안 더욱 돈독해졌다.그중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게 바로 유라였다. 하루하루 고다정과 여준재의 사랑이 돈독해지는 걸 지켜봐야 했기 때문이었다.그는 자학이라도 하듯 자신이 보기 힘들 줄 알면서도 매일 두 사람 앞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또 이틀 지나자 유라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녀는 더 이상 이대로 지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반드시 방법을 생각해서 고다정과 여준재를 갈라놓으려고 했다.하늘이 그녀의 마음을 들었는지 어떻게 여준재가 혼자 있는 시간을 늘려야 할지 고민하던 참에 기회가 찾아왔다. 그날 저녁 유라가 침울한 표정으로 장원으로 돌아갔다. 여준재가 이 시간에 계속 고다정과 함께 있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찾아갔다. 유라는 입구에 서서 방문을 두 번 두드렸다. "준재, 나 왔어."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고다정과 여준재가 잇달아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근 그녀의 안색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먼저 물었다."안색이 안 좋네. 무슨 일 있어?"유라는 말을 들었지만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고다정을 힐끔 쳐다보았다. 이 일은 좀 까다로워서 고다정의 앞에서 말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얘기였다.여준재는 자연스럽게 그 뜻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려 고다정에게 말했다."금방 다녀올 테니 심심하면 아래층 정원으로 내려가 있어요. 몸이 불편하면 바로 저한테 말하거나 안젤로를 부르세요.""알겠어요. 빨리 가서 일 봐요."고다정이 빙그레 웃으며 가라고 재촉했다. 여준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유라를 데리고 방을 나갔다. 서재로 돌아오자 유라가 입을 열었다."공해 쪽에 일이 생겼어. 우리가 이번에 운송한 화물이 모두 압류됐대. 구진에서
의논이 끝나고 여준재와 유라는 각자 서재를 떠나갈 준비를 했다. 여준재가 방으로 돌아와 며칠 동안 자리를 비울 일을 고다 정에게 말했다. 세력적인 일은 언급하지 않았고 이웃나라와 유라 계열사의 합작에 문제가 생겼으니 가서 처리해야 한다고만 했다."그럼 조심히 잘 다녀오세요. 밥 잘 챙겨 먹고 약도 잘 챙겨 먹어요.”고다정이 몸이 좋아진 후 여준재의 몸에 있는 숨은 질병에 대해서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치료는 크게 3단계로 나뉜다. 첫 번째 단계는 약을 먹어 여준재의 몸에 있는 질병이 자동으로 약력을 흡수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여준재는 그녀가 걱정해주는 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남준이한테 말해서 당신 옆을 지키도록 할게요."두 사람이 알콩달콩 말을 주고받고 있을 때 유라가 찾아와 준비가 다 되었으니 출발해도 좋다고 말했다. 그렇게 일행은 정원의 깊숙한 곳, 드넓은 잔디밭으로 향했다. 풀밭에는 이미 헬리콥터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고다정이 애틋한 마음을 달래며 작별인사를 했다."꼭 자기를 잘 챙기세요.”유라가 옆에서 보고 있는데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그녀는 여준재가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다정 씨, 안심하세요. 제가 잘 돌볼게요.”유라의 눈에서 도발적인 표정이 보였다. 하지만 고다정은 화를 내지 않고 되려 능글맞게 대답했다."유라 씨 감사합니다. 준재 씨가 약 먹고 밥 먹는 것을 감시해 주세요. 이 사람은 한번 바빠지면 항상 밥 먹는 것을 잊어버려서 걱정이에요. 남준 씨가 없으면 혼자 출장 가는 게 걱정돼서요.”고다정은 센스있게 유라의 도발을 받아쳤다. 그녀는 유라를 구남준과 같은 비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유라는 이 말 속에 있는 뜻을 알고 이를 갈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여준재 앞에서 이질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그녀는 고다정의 말에 응하고 짐 검사를 핑계로 비행기에 올랐다.고다정은 그녀를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여준재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그의 표정을 보며 고다정은 화가 나
남자의 무뚝뚝한 얼굴을 보며 고다빈은 그에게 따졌다."도대체 그동안 뭘 하고 있었어요? 그 사람이 도대체 당신에게 무슨 일을 시킨 거죠?”이 말을 들은 진시목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이런 일은 신경 쓰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네가 그 사람이랑 연락할 때도 나한테 말하지 않았잖아.”말을 마친 그는 고다빈의 안색이 아무리 안 좋아도 신경 쓰지 않고 몸을 돌려 욕실로 들어가 씻었다.고다빈은 욕실의 굳게 닫힌 방문을 바라보며 두 손을 꼭 쥐었다. 몇 분 뒤 진시목은 하반신에 목욕 수건을 두르고 나왔다. 그는 침대 위에 있는 고다빈을 쳐다보지도 않고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돌아서서 떠날 준비를 했다.고다빈은 상황을 보고 더욱 짜증이 났다. 묻지 않아도 그녀는 이 남자가 서재에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출국했다가 돌아온 후 진시목은 줄곧 서재에서 잤다. 그들 사이에 그 사람이 연루되지 않았다면 진시목이 귀국하고 할 첫 번째 일은 그녀와의 이혼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물론 그녀도 이 결혼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기간에 그녀는 진씨 가문의 이름을 빌려 복귀할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진시목과 이혼하고 돈이 없는 그녀를 고경영은 팔아버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고다정은 여기서 일어난 일을 몰랐다.이틀 동안 낮에는 의술을 연구하고 밤에는 여준재와 영상통화를 했고 때로는 아이들을 데려와 온 가족이 인터넷을 통해 웃고 떠들었다. 이렇게 한가한 나날은 나흘째가 되어 끝났다. 여준재 쪽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영상통화를 할 수 없다고 했다.하지만 그가 보낸 메시지를 보면서 고다정은 여전히 즐거웠다.그날 밤 고다정이 휴대전화를 껴안고 달콤한 잠을 자다 한밤중에 휴대전화 벨 소리에 깼다.그녀는 여준재의 전화인 줄 알고 보지도 않은 채 얼떨결에 받았다."준재 씨?”"고다정, 넌 일어나서 일해야 해.”휴대전화에서 흘러나오는 음산한 목소리는 마치 어떤 버튼이 켜지기라도 한 듯 고다정의 머릿속을 맴돌았다.몇 번을 반
여진성과 심해영도 부하 직원과 지인들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당황한 두 사람은 마침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내고 날이 밝기 전에 직원들을 회사로 소집했다.지금 그들은 두 가지 가장 중요한 임무를 처리해야 하는데 한가지는 인터넷에 노출된 프로젝트 문서를 철회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사람들에게 연락하여 YS그룹에 대한 핵심 자료를 가져오는 것이었다.첫 번째 임무는 처리하기 쉬웠지만 두 번째 임무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블랙 시장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욕심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여진성은 돈을 써서 자료를 회수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 사람들은 300억을 달라고 했다."300억을 가질 거면 차라리 뺏어가."은 화가 나서 휴대전화를 두드리며 전화하는 사람과 대치했다. 그러나 전화 속 사람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농담하시네요. 지금 이미 뺏고 있잖아요."말을 마친 후, 그는 잠시 멈추었다가 계속 말했다."하지만 여 회장님이 만약 이 자료들이 300억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다른 누군가가 분명히 더 비싼 가격에 사고 싶어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제가 더 팔면, 아마도 이 300억보다 더 많을 것입니다. 그때에 가서 제가 회장님의 체면을 살려주지 않았다고 하지 마세요. 지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연락서 핵심 자료를 사고 싶다고 표시했다는 걸 알고 있을 거라 믿어요.""지금 협박하는 거야?"사무실 한가운데 서서 눈을 부릅뜬 여진성의 눈동자에는 분노가 가득했다.전화 안의 사람은 볼 수 없었지만 그의 말투에서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그렇게 생각하셔도 됩니다. 좋아요. 여 회장님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습니다. 일주일의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300억은 적은 돈이 아니니까요. 준비하는데 시간이 걸리겠죠. 일주일 후에 여 회장님께서 돈을 쓰지 않겠다면 전 죄송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말이 끝나자마자 전화가 끊어졌다.여진성은 끊긴 전화를 보다가 화가 나서 휴대전화를 부숴 버리려고 했다. 다행히 결정적인 순간에 이
"회장님,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많은 사람들이 여진성을 주시하며 즉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기를 바랬다. 여진성은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우리는 두 가지 준비를 해야 해요. 한편으로는 돈을 모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블랙 시장 손에 있는 핵심 자료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아내야 합니다. 또 유출된 프로젝트 문서는 모두 다시 해야 합니다. 이 기간 동안 모든 초과 근무 연봉은 3배로 계산하겠습니다. 직원들의 마음이 분산되면 안 됩니다. 둘째는 주식시장입니다. 주가가 폭락하지 않도록 반드시 안정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엎친 데 덮친 격이 될 것입니다."여진성이 하나씩 지령을 내렸다.참석자들은 여진성의 지령을 받으면서 당황했던 마음을 달랬다. 회의가 끝난 후 모두가 떠났다. 여진성이 마지막으로 회의실을 나서자 그와 친분이 있는 임원들이 문밖에 서 있었다."왜 가지 않았어요?"여진성이 주동적으로 입을 열어 물었다. 그가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회장님,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여진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솔직히 제 마음도 불안해요. 까놓고 보면 이건 YS그룹이 지금까지 직면했던 문제 중 가장 위중한 문제입니다."이 말을 들은 그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그러나 그가 묻고 싶어 하는 말은 이런 말이 아니었다."회장님, 방금 회의에서 대표님의 질문에 대해 답변을 피했는데 대표님에게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여진성은 침묵했다. 잠시 후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속일 수 없을 줄 알았어요. 어찌 된 일인지 연락이 안 돼요.""연락이 안 된다고요?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그는 당황하여 긴장된 얼굴로 바라보았다."아직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조사를 하고 있으니 나중에 소식이 있으면 알려드릴게요."여진성이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그래요. 저도 사람을 보내서 알아보라고 할게요. 유럽으로 가셨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그쪽에 인맥이 좀 있으니 알아보겠습니다."여진성은 거절하지 않았
만약 이 자리에 고다빈이 있었더라면, 아마 이 화난 남자가 전에 그녀와 연락했던 의문의 남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이때 방안에는 금발의 남자 말고도 남자 둘과 여자 한 명이 더 앉아 있었다.“자자, 지금은 화낼 때가 아니에요. 중요한 얘기부터 합시다.”이들 중 유일한 한 명의 여자가 입을 열었다.그 말을 들은 다른 사람들은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깟 조그마한 여씨 집안 때문에 골머리를 앓을 필요 없어요. 특효약만 손에 넣으면 그딴 집안은 망가뜨리면 그만이에요.”금발의 남자는 그들의 말에 화를 거뒀다. 그리고 몇 사람은 상의하기 시작했다.“지금 YS그룹도 난리가 났고, 여준재도 공해에서 변을 당했으니, 특효약을 손에 넣을 가장 좋은 시기에요. 시리우스한테 움직이라고 합시다.”“시리우스가 움직이는 건 별문제가 안 되는데, 저쪽에 성시원한테도 사람을 보내 잘 감시하고 있어야 해요. 그 영감탱이가 무슨 짓을 벌여 일을 망칠지 몰라요.”“특효약을 손에 넣으면 성시원은 우리한테 더 이상 쓸모도 없는데 그냥 죽여버립시다. 그 사람 재산은 우리가 똑같이 나눠 가져요.”모두가 그 제안에 찬성했다.물론 이런 일을 고다정은 알 리 없었고, 심지어 YS그룹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도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녀는 마음이 늘 불안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함이 커져만 갔다.그녀가 이 불안함의 출처를 밝혀내기도 전에 여진성한테서 먼저 전화가 왔다.“다정아, 너 혹시 준재랑 연락이 되니?”“무슨 일 있으세요?”굳어있는 여진성의 심상치 않은 어조로 그녀는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나 가슴이 꿈틀거렸다.여진성도 숨기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회사에 일이 생겼는데 준재가 연락이 안 되는구나. 너랑 연락이 혹시 닿게 되면 얼른 나한테 전화하라고 해. 내가 아주 중요하게 상의할 일이 있어.”“알겠어요. 제가 한번 연락해 보겠습니다.”고다정은 전화를 끊었다.한편, 여진성이 휴대전화를 내려놓자, 옆에 있던 심해영은 이내
전화를 끊자마자 등 뒤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이어 고다정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남준 씨.”“아... 작은 사모님. 어쩐 일이세요?”갑자기 들이닥친 고다정때문에 구남준은 잔뜩 긴장했다.그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자 고다정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의 손에 쥐어진 휴대전화에 쏠렸다. 평소 그가 한 번도 쓰는 걸 못 봤던 낯선 휴대전화였다. 그녀의 눈매가 가늘게 변했다.“남준 씨한테 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요. 혹시 지금 바빠요?”왠지 모르게 고다정의 눈빛이 자신을 꿰뚫고 있다는 착각이 들어 구남준은 당혹감이 더 크게 번져 말까지 더듬거렸다.“아, 아. 아닙니다. 무, 무슨 일 물어보시려는 건지...”궁금한 게 있다더니 오히려 그녀는 말하지 않고 뜸을 들이며 의미심장한 눈으로 빤히 쳐다보기만 하였다. 한참 후, 그녀는 입을 열었다.“남준 씨 손에 쥔 휴대전화 말이에요. 처음 보는 건데, 언제 그 전화로 바꿨어요?”“아... 이, 이거요? 예전부터 쓰던 건데 일할 때만 사용해서 아마 작은 사모님이 못 보셨을 겁니다.”그는 손에 쥔 휴대전화를 무의식적으로 감추려 했다. 그의 등 뒤에는 땀이 나기 시작했다. 고다정이 뭘 알고 묻는 건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자 찔리는 마음에 더 어찌할 바를 몰랐다.그의 이리저리 흔들리는 눈빛과 불안한 손동작은 고다정의 눈을 피해 가지 못했다.여준재가 진짜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고다정의 낯빛은 삽시에 어두워졌다.그녀는 급히 확인하고 싶었다. 머릿속의 추측이 맞는지 아닌지.그리하여 휴대전화를 꺼내 들어 여준재의 새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고다정이 전화를 걸자 구남준은 심장이 요동을 쳤다. 불안한 마음에 손끝이 저렸다.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그가 호주머니에 넣은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일부터 특이하게 설정해 놓은 벨소리가 지금은 귀에 거슬리기만 했다.그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고다정은 전화를 끊지 않고 그 벨소리를 들으며 계
구남준의 설득이 전혀 귀에 와닿지 않는 고다정은 낮게 부르짖으며 구남준을 매섭게 쳐다봤다.그녀는 언제부턴가 눈가에 눈물이 맺혔고, 조급했지만 가능한 한 진정하려고 애쓰는 얼굴이었다. 구남준은 그런 그녀를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사실대로 말하게 되었다.“대표님이 사고 난 건... 닷새 전입니다.”“닷새 전?”믿을 수 없다는 듯 구남준을 쳐다보다 고다정은 몸이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엄청난 충격에 몸과 마음이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것이다.그걸 본 구남준은 재빨리 손을 내밀어 그녀의 가라앉는 몸을 부축하고는 그녀를 불렀다.“작은 사모님!”그가 부르는 외침에도 고다정은 깨어나지 못하고 눈을 꼭 감고 있었다.구남준은 황급히 그녀를 들어서 안고 문밖으로 향해 뛰쳐나가며 소리쳤다.“거기 누가 없어? 얼른 여기로 와 봐!”잠시 후, 안젤로는 고다정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받고 팀원들을 데리고 부랴부랴 달려왔다.또 영문 모를 혼수상태에 빠지는 증상이 나타난 줄 알았는데, 검사해 보니 그게 아니어서 그는 한시름 놓았다.“고다정 씨는 제가 예상했던 그런 혼수상태는 아니고 그저 일시적인 충격으로 실신한 겁니다. 좀 있으면 곧 깨어날 겁니다.”안젤로는 고다정이 대체 어떤 충격을 받아 쓰러지기까지 했는지 궁금했지만, 자신의 신분을 잊지 않고 물어보지 않았다. 그들한테는 알지 말아야 할 일은 모르는 게 원칙이었다.검사를 마치자 안젤로는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방을 나갔다.그러자 방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구남준은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한 고다정을 살펴보고는 휴대전화를 들고 소파에 가서 앉아 메시지 한 통을 보냈다.‘작은 사모님이 대표님 실종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쪽 상황은 좀 어떻습니까? 대표님을 찾았나요?’‘들킨 거야?!’간결한 네 글자로 답장이 왔다.그리고 구남준이 다시 답장을 보내기도 전에 조급한 벨소리가 울렸다.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저편에서는 불쾌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예요? 보스가 분명 이 일을 함구하라 했잖아요.”“처음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