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임은미의 요구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곁에 서있는 채성휘한테 눈길을 돌렸다.당연히 동의 할 리 없는 채성휘는 의사를 보며 말했다.“선생님, 죄송하지만 저희 아직 좀 더 상의해 봐야 할 것 같아요.”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임은미의 거센 몸부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목을 잡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고다정은 다급하게 뒤를 쫓아가며 물었다.“채 선생님, 지금 은미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예요?”고다정이 따라 나온 걸 보고 임은미는 그녀한테 구해달라 소리쳤다.“다정아, 나 좀 구해줘. 나 이 사람이랑 안 갈 거야.”임은미는 손목을 빼려고 아무리 비틀고 쥐어 당겨도 좀처럼 뺄 수가 없어 발을 동동 굴렀다.그러다 갑자기 채성휘가 멈춰서서 뒤돌아보며 말했다.“고 선생님, 저랑 임은미 씨가 할 얘기가 좀 있어요. 약속할게요. 털끝 하나 안 건드린다고.”“누가 당신이랑 할 얘기가 있다는 거야. 난 안 해. 다정아, 이 사람 말 듣지 마!. 빨리 어떻게 좀 해줘 봐 봐.”임은미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채성휘를 노려보며 외쳤다.그 때문에 난처해진 고다정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다가 서로 각자 양보하는 방안을 내놓았다.“아니면... 제가 같이 따라갈까요?”“고 선생님, 이건 저와 임은미 씨 둘만의 문제예요.”채성휘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뜻은 고다정이 참견하지 말라는 거였다.무척 난감한 고다정은 미안하다는 듯이 임은미를 쳐다보며 그녀를 달랬다.“은미야, 아니면 채 선생님과 좀 얘기를 나눠보는 건 어때? 네가 마음이 안 놓이면 내가 소담을 따라 보낼게.”“아니, 싫어.”임은미는 뾰로통한 얼굴로 고집을 부렸다.일이 이렇게 된 이상 고다정도 계속하여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성질부리지 말고, 채 선생님이랑 얘기 좀 해봐. 채 선생님이 그렇게 막무가내인 사람은 아니야. 네 생각을 잘 얘기해 봐. 너무 난처하게 굴진 않을 거야. 그러다 안되면 내가 있잖아.”이 말에 임은미는 여전히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결국 동의했다.두 사람을 보내고 고다정은 시름이
엄마가 내일 떠난다는 걸 듣고, 두 아이는 밤에 고다정한테 유난히도 매달렸다.가까스로 아이들을 재우고, 고다정은 살금살금 아이들 방에서 빠져나와 서재로 향했다.여준재한테 내일 별장에 가는 일을 얘기하려다 책상 위에서 검은 바탕에 금빛 테를 두른 심상치 않아 보이는 초대장 하나가 고다정의 눈길을 끌었다.“이건 뭐예요?”고다정은 초대장을 가리키며 물었다.여준재는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에 시선을 돌리더니 그녀한테 설명했다.“국제상인 연합회 연회 초대장이에요.”“국제상인 연합회요?”처음 듣는 단어에 고다정은 의문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그녀의 의혹을 알고 여준재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시답지 않다는 듯한 눈빛을 하며 계속해서 설명해 줬다.“이건 그냥 할 일이 없는 한가한 양반들이 자랑거리 늘어놓으려고 마련한 시시껄렁한 연회쯤으로 생각하면 돼요.”그의 말에 고다정은 어리둥절했다. 여준재가 무슨 일에 이러한 표정을 짓는 건 처음이었다. 그냥 한 연회뿐인데 그는 매우 귀찮고 거부감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었다.“싫으면 안 가면 되잖아요.”“다른 사람은 안 가도 되지만, 난 안 돼요. 내가 대표니까.”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좋지 않은 낯빛으로 얘기했다.이 안에 필시 무슨 일이 있겠다고 생각을 한 고다정은 궁금했지만 그의 기분에 영향 주고 싶지 않아, 더 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고다정은 내일의 일을 이야기하려고 입을 열었는데, 여준재가 또 이어서 말하는 것이었다.“그때 되면 다정 씨가 저랑 같이 가요, 여기.”여준재는 그저 이 연회 핑계로 고다정을 해외에 데리고 나가 스트레스를 풀게 할 생각이었다.한동안 실험실에만 틀어박혀 누가 자료를 훔쳐 가지 않을까 시시각각 신경을 곤두세워 노심초사하다 나니 밤에 잠도 잘 못 자고 악몽에 자꾸 시달리는 고다정을 그는 잠깐이라도 쉬게 하고 싶었다.고다정은 그의 생각을 모르고 갑자기 연회 얘기가 또 나오니 멍해졌다가 이윽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거절했다.“안 돼요, 나 안 갈 거예요. 내가 가면 실험실
채성휘는 임은미의 안색에는 별로 개의치 않아 하며 점잖게 걸어나가 손에 든 도시락 텀블러를 건넸다.“집에 아주머니한테 부탁해서 끓인 삼계탕 국물이에요. 담백하게 끓였으니까 아침 안 먹었으면 이거 마셔요. 아침밥 이미 먹은 거면 나중에 수술하고 마시든지요.”그의 따뜻한 말에 임은미는 난데없이 화를 냈다.“이런 걸로 내가 생각을 고쳐먹을 거 같아요? 안 마셔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고다정의 손을 잡아끌어 고다정의 차에 올라타서 기사한테 빨리 출발하라고 했다.기사는 눈빛으로 고다정의 의견을 물었다.고다정은 임은미의 말대로 하라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떠나간 고다정의 차 꽁무니를 쳐다보다 채성휘는 짧게 한숨을 내리 쉬고는 차를 몰고 뒤쫓아갔다.병원 가는 길에 짜증이 가득한 임은미를 보며 고다정은 이상해서 물었다.“왜 다 얘기가 됐다면서 계속 화를 내?”“몰라. 저 사람만 보면 화가 치미는 걸 어떡해.”임은미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고다정은 친구의 말이 너무 어이없다는 듯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가 무언가 생각나서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아까 네가 한 말, 그거 뭐야? 채 선생님이 이 아이 낳기를 원해?”고다정이 묻자마자 임은미는 기다렸다는 듯이 펄쩍 뛰었다.“그러게 말이야! 네가 몰라서 그렇지, 저 사람 되게 웃기는 사람이다. 결혼은 하기 싫은데, 집에서 재촉하니까 이 애를 낳았으면 한다는 거야. 그러면 집에서 더는 결혼하라는 말을 안 할 거라고, 대체 날 뭐로 본 거야?!”임은미는 말할수록 화가 나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고다정도 눈살을 찌푸리며 채성휘의 생각에 불만을 가졌다. 그녀는 임은미의 등을 다독였다.“네가 거절하는 게 맞아.”“당연히 그럴 순 없지!”너무 화가 났는지 임은미는 씩씩대며 뜨거운 콧김을 내뱉었다.고다정은 ‘그래, 맞아, 맞아’ 하며 계속해서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한참 지나자 임은미는 화가 좀 많이 누그러든 거 같았고, 차도 병원 앞에 도착했다접수와 각종 검사를 마치고 한 시간이 넘게 지나서야 수술을 할
임은미는 고다정이 하는 말을 듣고 얼굴이 굳어지더니, 답답해하는 어조로 고다정한테 물었다.“그러니까 넌 날 낳으라는 거야, 낳지 말라는 거야?”“... 네가 낳든 안 낳든, 난 널 항상 응원해.”눈만 끔벅끔벅하다가 임은미는 한숨을 내쉬었다.결국 다 자기 절로 알아서 해야 한다는 건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임은미는 무력감이 들며 짜증이 확 덮쳤다.미친 듯이 머리를 마구 긁어대더니, 일단 놓인 현실을 기피하려고 애썼다.“아야, 됐어. 난 이제 첫 달인데 3개월 되려면 아직 멀었어. 두 달 동안 잘 생각해 보지 뭐.”“은미야, 너무 오래 끌면 안 돼. 14주 내엔 다 가능하다지만, 일찍 하면 할수록 몸에 덜 해로워.”임은미가 갈팡질팡한다는 걸 잘 알지만, 고다정도 친구의 본분을 다해 그녀를 설득하는 수밖에 없었다.임은미도 그런 도리를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오므리고 몇 초 동안 생각하더니, 여전히 안 되겠는지 생각을 고집했다.“아무래도 다시 잘 생각해 봐야겠어. 너무 오래 끌진 않을 거야.”“네가 잘 알면 됐어.”너무 다그치기에는 고다정도 마음이 아픈지라 얘기를 그만두고 돌아가자 하였다.잠시 후, 차는 임은미가 사는 오피스텔 아래에 멈춰 섰고, 두 사람이 내리자 바로 쫓아온 채성휘를 보게 되었다.“은미 씨...”채성휘는 분명 뭔가 할말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임은미는 그쪽에 눈길도 주지 않고 고다정과 작별 인사를 한 후 돌아서서 오피스텔로 들어갔다.임은미의 뒷모습을 채성휘는 그윽하게 바라봤다.이때 고다정은 그의 앞에 다가가서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채 선생님, 얘기 좀 할까요?”“그래요.”채성휘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윽고 두 사람은 오피스텔 근처에 있는 커피숍에 와서 앉았다.고다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 오늘 은미가 일을 번복하긴 했지만, 결정을 내리기 전에 채 선생님이 자꾸 가서 다그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이는 결혼 도피용 도구가 아니에요. 어쨌거나 채 선생님과 은미는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며칠 후 난 여준재와 일주일 정도 출국할 거야. 채성휘 소장님한테 실험실 쪽과 연구소 쪽을 관리해 달라고 부탁했어. 그래도 창석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이 두 곳을 주시해야 해.”“아가씨는 아가씨 일에만 집중하고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아가씨를 대신해서 이곳들을 잘 관리 할게요.”김창석은 고개를 숙이며 약속했다.그래서 고다정도 그의 이상함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몇 분이 지난 후 소담과 화영이 돌아왔다.고다정은 그들을 보면서 물었다.“검사해본 결과 어때요?”“아무런 문제도 없었어요.”화영이 공손하게 대답해 주었다.소담도 고다정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문제없었습니다.”“문제가 없다니 다행이네요. 수고들 했어요. 어서 앉아 쉬세요.”그녀는 말을 마친 뒤 창석 아저씨를 바라보며 칭찬을 하기 시작했다.“역시 창석 아저씨. 아저씨가 있어서 시름 놓고 외국에 갈 수 있을 것 같아요.”김창석은 허심하게 말했다.“아가씨, 과찬이에요.”이어서 두 사람은 또 잠깐 말을 했다. 그리고 고다정은 소담과 화영을 데리고 연구소를 떠났다.그 후 이틀, 고다정은 집에 남아 시어머니와 두 아이와 시간을 보내고 그사이에 틈 내어 임은미의 상황도 살피러 갔다.임은미는 요 며칠 엄마를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느꼈다.지난번 입덧을 한 후부터 그녀의 임신 초기 반응이 줄곧 심각해서 기름 냄새를 전혀 맡을 수 없었다.이 때문에 그녀는 이미 며칠 동안 밥 한 끼를 제대로 먹지 못했다.식당에 앉아서 눈살을 찌푸리며 죽을 먹는 친구를 보니 고다정은 그런 그녀가 걱정스럽기만 하였다.“내일 내가 간 후에, 네가 우리 집에 가든지 해. 우리 집에 요리사가 있는데, 네가 먹고 싶은 것은 언제든지 너에게 해 줄 수 있어. 게다가 너 삼촌과 아주머니한테 임신했다는 걸 알리지 못했잖아. 우리 시어머니도 곁에서 널 좀 돌봐 줄 수 있어. 그렇지 않으면 너가 이렇게 혼자 아파트에 계속 있으면 나는 조금도 안심할 수 없어.”“그래도 됐어. 시어머니도 내가 임신한 것을 모르잖아
여준재는 자신을 무시하는 작은 여인을 바라보더니 이내 긴 팔을 휘둘러 고다정을 품에 껴안았다.구남준은 조수석에 앉아 백미러로 그 광경을 보고는 곧바로 기사에게 눈치를 주었다.운전기사도 곧바로 그의 눈빛을 읽고 차 안의 칸막이를 내려놓았다.이에 대하여 여준재는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그는 품 안에서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아 잔뜩 토라진 여인을 꼭 끌어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알겠어요. 이제 화내지 말아요. 다음에는 절대 웃지 않을게요. 저도 다정 씨가 절 생각해주고 있다는 마음에 기분 좋아서 웃은 거잖아요.”그 말을 듣자 고다정도 화가 많이 풀렸다.어쨌든 여준재는 그녀의 태도에 대해 기뻐한 것이지만 그녀는 결코 다른 여자가 자신의 남자를 노리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준재 씨는 기분이 좋았겠지만 전 안 좋다고요.”고다정은 노발대발하며 여준재를 노려보았지만, 특히나 그의 잘생긴 이목구비는 좋으면서도 참 미웠다.결국, 고다정은 참지 못하고 마음의 소리를 중얼거렸다.“잘생긴 외모가 결국 불행을 초래한다더니.”비록 그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여준재의 품 안에 안겨 거리가 워낙 좁았던 터라 여준재는 아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칭찬 감사합니다, 약혼자님.”여준재는 고다정을 다시 힘껏 껴안으며 고다정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입을 작게 열었는데 조금 전 중얼거리던 고다정의 혼잣말에 회답한 셈이었다.그러자 고다정의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이 남자가 정말… 지금 자기를 칭찬하고 있다고 생각한 거야?고다정이 뭐라 반박하기도 전에 귓가에서 여준재의 웃음기가 가득한 사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 미안해요. 이번 일은 확실히 제가 잘못했으니 다음에 또 이런 상황이 생기면 꼭 가장 먼저 엄숙하게 거절할게요. 그리고 이미 결혼을 했고 아이 둘의 아버지라는 사실도 밝힐게요.”이 말까지 듣고 나니 고다정도 자연스레 더 화를 낼 수가 없었다.게다가 애초에 그녀는 정말 화가 난 것이 아니라 해외의 지나치게 개방적인 풍습에 적응하지 못한
저녁 8시 반이 되자 레스토랑에는 정말 작은 밴드가 공연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노래를 부르는 그들의 감미로운 저음이 공중에서 맴돌며 손님들의 긴장을 풀어주었다.심지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일행을 초청하여 레스토랑 중앙에 있는 빈 공간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기분이 좋아지는 듯했다.그런데 그때, 그녀의 눈앞에 골격이 선명한 손 하나가 다가왔다.고다정이 엉겁결에 고개를 들자 어느새 일어선 것인지 여준재가 식탁 옆으로 걸어왔다.“저에게 그런 영광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저와 춤 한번 추시겠습니까?”“물론이죠.”고다정은 만면에 행복한 웃음을 머금고 덩달아 손을 내밀었다.여준재는 자신의 손 위에 포개진 부드러운 손 하나를 꼭 움켜쥐고 살며시 잡아당기더니 고다정을 품 안에 안은 채 무도회장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고다정은 원래 춤 기본기가 있는 데다 여준재가 그녀를 데리고 이끌어주어 두 사람의 무대는 더욱 합이 잘 맞았다.한눈에 봐도 그들이 무도장에서 가장 아름답고 뛰어났다.댄스 플로어에 있던 사람들도 차츰 멈춰 서서 두 사람을 감상하며 바라보았다.노래가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고다정과 여준재도 멈춰 섰다.이윽고 현장에는 박수갈채와 찬사가 쏟아졌다.“정말 완벽한 커플이에요.”“그러니까요. 전 순간 정력을 본 줄 알았다니까요”“저들을 보고 있자니 우리 젊었을 때가 생각나네요.”이 목소리들을 듣고 나서야 고다정은 댄스 플로어 전체에 그녀와 여준재만이 남아있을 뿐 다른 사람들은 전부 외곽에 서서 선한 미소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음을 눈치챘다.비록 조금 부끄러웠지만, 대중들이 보내준 선의에 대해서는 그녀도 아름다운 미소로 답해주었다.바로 그때, 하늘에서 굉음이 울리더니 오색영롱하고 가지각색의 불꽃이 하늘에서 활짝 피어올라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어냈다.고다정과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순식간에 불꽃놀이에 쏠렸다.그렇게 몇 분 뒤 불꽃놀이가 끝나서야 사람들은 저마다 시선을 거두었다.그때 계속
사진을 본 그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벌겋게 달아오른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계속 지켜보라고 해.”“네.”옆에 서 있던 경호원이 고개를 끄덕였다.여자는 손을 흔들어 경호원을 떠나보냈고, 멀어지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는 손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더니 곧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같은 시각, 여준재의 휴대폰이 울렸다.발신자 표시를 본 그는 미간을 약간 찌푸리더니 계속 전화를 받지 않았다.그 모습에 고다정이 물었다.“왜 그래요?”“별것 아니네요. 전화 좀 받을게요.”여준재는 말하면서 휴대폰을 귓가에 대고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무슨 일이야?”“너 E국으로 왔다며? 왔으면 옛 친구들을 불러 한번 만나야지, 내가 먼저 전화하게 만들어?”요염한 목소리가 휴대폰에서 흘러나왔지만 여준재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좀 바빠. 별다른 일 없다면 이만 끊을게.”말을 마친 그는 상대방에게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는 휴대폰을 접고는 다시 고다정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말했다.“이제 가요.”“좋아요.”고다정은 남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지만 눈 밑 깊은 곳에는 약간의 의심이 생겼다.그녀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준재가 방금 전화를 받은 태도가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별로 반가운 사람이 아니지만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 같았다.여기까지 생각한 고다정은 또 자신이 괜한 생각을 한 것 같았다.여준재의 신분과 성격으로 누가 감히 그를 강요할 수 있을까?곧 고다정은 잡생각을 뒤로하고 여준재와의 여행에 집중했다.이틀 동안 그들은 수도의 명소를 거의 다 돌아다녔다.사진도 많이 찍었고, 돌아가 두 아이와 외할머니에게 드릴 특산물도 잊지 않고 샀다....셋째 날, 고다정과 여준재가 밖에서 놀고 있을 때, 갑자기 여아린의 전화가 걸려왔다.“준재야, 너 다정이랑 E국에 왔다며?”“네, 국제상인 연합회 행사에 참여하러 왔어요.”여준재는 간단하게 설명했다.여아린은 이 행사가 3년에 한 번 열리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돈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