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을 들은 여준재는 의아해하며 물었다.“왜요?”“은미가 임신했어요. 애를 지우겠대요. 내일 수술하러 가겠다는데,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어서요. 가서 곁에 있어 주고 싶어요.”고다정은 솔직하게 여준재한테 털어놓았다.이 일을 사실 얘기하면 그녀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임은미를 소개팅 파티에 나가라고 부추기지만 않았어도 채성휘와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전에 그녀는 다른 사람의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사에 자신이 끼어드는 게 적절하지 않다 생각하여 더는 둘의 일을 캐묻지 않았는데, 이런 일이 생기니 그녀도 일말의 죄책감이 생겨난 것이다.고다정의 생각을 샅샅이 들여다볼 수 없어 알지는 못하지만, 그녀가 자책하는 기색을 드러내자 여준재는 눈살이 찌푸려졌다.“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저도 구체적인 건 잘 몰라요, 은미가 알려주지 않아서. 그런데 채 선생님 아이인 건 알고 있어요. 그날 소개팅 파티에서 둘이 관계가 발생한 거 같아요.”고다정은 자기가 아는 것을 털어놓고는 자책하며 괴로워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나도 둘이 좀 이상하다는 건 눈치챘어요. 그런데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채 선생님이 은미가 맘에 있어서 저한테 은미 연락처를 달라고 하는 줄만 알았어요.”친구한테 미안해하는 고다정을 보고 여준재는 안쓰럽게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여 기분을 좀 풀어주려 했다.“너무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아요. 당신 책임이 아니에요. 은미 씨를 솔로 탈출시키려고 그랬던 거잖아요. 소개팅에서 뭐가 일어날지, 누가 알겠어요. 그리고 또 다 큰 어른들끼리 자기가 한 일은 자기가 책임져야죠. 그 정도 능력도 없을까 봐요? 오늘 은미 씨랑 얘기 많이 못 해봐서 잘 모르겠는데, 내 생각에 은미 씨는 그 일에 대해 너무 괴로워하는 거 같지 않아요. 오히려 당신이 너무 자책하고 그러면, 은미 씨한테 그날 일을 자꾸 떠올리게 해서 더 안 좋을 수도 있어요.”여준재는 임은미의 생각을 분석해 보며 고다정을 달래고 위로했다.그
둘은 병원에 금세 도착하였다.차에서 내린 후 임은미는 인도에서 걸음을 떼지 않고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고다정은 가서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작게 말했다.“결심이 안 서면 더 생각해 봐도 돼. 아직 시간 많아.”“아니야. 이대로 돌아가면 다음에는 다시 못 올 거 같아.”말을 마치고 임은미는 짧게 한숨을 내리 쉬더니 비장한 얼굴로 병원으로 향해 걸어갔다. 고다정도 한숨을 내쉬며 얼른 뒤따랐다.그러나 임은미를 따라잡기도 전에 그녀는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보게 되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멈춰 섰다.임은미도 너무 놀라 하며 속으로 어쩔 바를 몰라 했다.“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임은미는 경악에 가까운 표정으로 눈앞의 채성휘를 쳐다보며, 긴장하기도, 뭔가 찔리기도 하여 그한테 큰 소리로 질문하며 애써 마음을 감춰보려 하였다.그러다 갑자기 뭔가 생각 난 듯 그녀는 고개를 홱 돌리더니 고다정을 보며 물었다.“네가 알려줬어?”고다정은 임은미의 표정을 보고 친구가 크게 오해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빠른 걸음으로 임은미의 곁에 다가가 급히 해명했다. “아니야, 아니야, 난 아무 말도 안 했어.”그러고는 채성휘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채 선생님이 왜 여기 계세요?”“어젯밤에 실험하다가 실수로 몸에 좀 묻혔는데 피부에 알레르기가 생겨 여기 왔어요.”채성휘는 말하면서 손에 든 약봉지를 흔들어 보였다. 그도 좀 의아하여 두 여자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누가 아파요?”말하며 그는 시선을 임은미한테 고정시켰다.임은미는 그와 눈길을 마주치고는 자신이 방금 고다정을 오해했다는 걸 알고 후회와 당혹감에 얼굴이 굳어졌다. 사실은 찔리는 마음에 낯빛이 변한 것이 더 컸다.“누가 아프든 간에 뭔 상관이에요.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아.”이 말만 급하게 내던지고 임은미는 고다정의 손을 끌어 빠르게 병원으로 들어갔다.두 사람이 멀어져가는 모습을 보고 채성휘는 뭔가 석연치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왠지 임은미가 매우 당황한 기색을 하고 있어, 그녀가 방금
의사는 임은미의 요구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곁에 서있는 채성휘한테 눈길을 돌렸다.당연히 동의 할 리 없는 채성휘는 의사를 보며 말했다.“선생님, 죄송하지만 저희 아직 좀 더 상의해 봐야 할 것 같아요.”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임은미의 거센 몸부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목을 잡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고다정은 다급하게 뒤를 쫓아가며 물었다.“채 선생님, 지금 은미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예요?”고다정이 따라 나온 걸 보고 임은미는 그녀한테 구해달라 소리쳤다.“다정아, 나 좀 구해줘. 나 이 사람이랑 안 갈 거야.”임은미는 손목을 빼려고 아무리 비틀고 쥐어 당겨도 좀처럼 뺄 수가 없어 발을 동동 굴렀다.그러다 갑자기 채성휘가 멈춰서서 뒤돌아보며 말했다.“고 선생님, 저랑 임은미 씨가 할 얘기가 좀 있어요. 약속할게요. 털끝 하나 안 건드린다고.”“누가 당신이랑 할 얘기가 있다는 거야. 난 안 해. 다정아, 이 사람 말 듣지 마!. 빨리 어떻게 좀 해줘 봐 봐.”임은미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채성휘를 노려보며 외쳤다.그 때문에 난처해진 고다정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다가 서로 각자 양보하는 방안을 내놓았다.“아니면... 제가 같이 따라갈까요?”“고 선생님, 이건 저와 임은미 씨 둘만의 문제예요.”채성휘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뜻은 고다정이 참견하지 말라는 거였다.무척 난감한 고다정은 미안하다는 듯이 임은미를 쳐다보며 그녀를 달랬다.“은미야, 아니면 채 선생님과 좀 얘기를 나눠보는 건 어때? 네가 마음이 안 놓이면 내가 소담을 따라 보낼게.”“아니, 싫어.”임은미는 뾰로통한 얼굴로 고집을 부렸다.일이 이렇게 된 이상 고다정도 계속하여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성질부리지 말고, 채 선생님이랑 얘기 좀 해봐. 채 선생님이 그렇게 막무가내인 사람은 아니야. 네 생각을 잘 얘기해 봐. 너무 난처하게 굴진 않을 거야. 그러다 안되면 내가 있잖아.”이 말에 임은미는 여전히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결국 동의했다.두 사람을 보내고 고다정은 시름이
엄마가 내일 떠난다는 걸 듣고, 두 아이는 밤에 고다정한테 유난히도 매달렸다.가까스로 아이들을 재우고, 고다정은 살금살금 아이들 방에서 빠져나와 서재로 향했다.여준재한테 내일 별장에 가는 일을 얘기하려다 책상 위에서 검은 바탕에 금빛 테를 두른 심상치 않아 보이는 초대장 하나가 고다정의 눈길을 끌었다.“이건 뭐예요?”고다정은 초대장을 가리키며 물었다.여준재는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에 시선을 돌리더니 그녀한테 설명했다.“국제상인 연합회 연회 초대장이에요.”“국제상인 연합회요?”처음 듣는 단어에 고다정은 의문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그녀의 의혹을 알고 여준재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시답지 않다는 듯한 눈빛을 하며 계속해서 설명해 줬다.“이건 그냥 할 일이 없는 한가한 양반들이 자랑거리 늘어놓으려고 마련한 시시껄렁한 연회쯤으로 생각하면 돼요.”그의 말에 고다정은 어리둥절했다. 여준재가 무슨 일에 이러한 표정을 짓는 건 처음이었다. 그냥 한 연회뿐인데 그는 매우 귀찮고 거부감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었다.“싫으면 안 가면 되잖아요.”“다른 사람은 안 가도 되지만, 난 안 돼요. 내가 대표니까.”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좋지 않은 낯빛으로 얘기했다.이 안에 필시 무슨 일이 있겠다고 생각을 한 고다정은 궁금했지만 그의 기분에 영향 주고 싶지 않아, 더 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고다정은 내일의 일을 이야기하려고 입을 열었는데, 여준재가 또 이어서 말하는 것이었다.“그때 되면 다정 씨가 저랑 같이 가요, 여기.”여준재는 그저 이 연회 핑계로 고다정을 해외에 데리고 나가 스트레스를 풀게 할 생각이었다.한동안 실험실에만 틀어박혀 누가 자료를 훔쳐 가지 않을까 시시각각 신경을 곤두세워 노심초사하다 나니 밤에 잠도 잘 못 자고 악몽에 자꾸 시달리는 고다정을 그는 잠깐이라도 쉬게 하고 싶었다.고다정은 그의 생각을 모르고 갑자기 연회 얘기가 또 나오니 멍해졌다가 이윽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거절했다.“안 돼요, 나 안 갈 거예요. 내가 가면 실험실
채성휘는 임은미의 안색에는 별로 개의치 않아 하며 점잖게 걸어나가 손에 든 도시락 텀블러를 건넸다.“집에 아주머니한테 부탁해서 끓인 삼계탕 국물이에요. 담백하게 끓였으니까 아침 안 먹었으면 이거 마셔요. 아침밥 이미 먹은 거면 나중에 수술하고 마시든지요.”그의 따뜻한 말에 임은미는 난데없이 화를 냈다.“이런 걸로 내가 생각을 고쳐먹을 거 같아요? 안 마셔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고다정의 손을 잡아끌어 고다정의 차에 올라타서 기사한테 빨리 출발하라고 했다.기사는 눈빛으로 고다정의 의견을 물었다.고다정은 임은미의 말대로 하라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떠나간 고다정의 차 꽁무니를 쳐다보다 채성휘는 짧게 한숨을 내리 쉬고는 차를 몰고 뒤쫓아갔다.병원 가는 길에 짜증이 가득한 임은미를 보며 고다정은 이상해서 물었다.“왜 다 얘기가 됐다면서 계속 화를 내?”“몰라. 저 사람만 보면 화가 치미는 걸 어떡해.”임은미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고다정은 친구의 말이 너무 어이없다는 듯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가 무언가 생각나서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아까 네가 한 말, 그거 뭐야? 채 선생님이 이 아이 낳기를 원해?”고다정이 묻자마자 임은미는 기다렸다는 듯이 펄쩍 뛰었다.“그러게 말이야! 네가 몰라서 그렇지, 저 사람 되게 웃기는 사람이다. 결혼은 하기 싫은데, 집에서 재촉하니까 이 애를 낳았으면 한다는 거야. 그러면 집에서 더는 결혼하라는 말을 안 할 거라고, 대체 날 뭐로 본 거야?!”임은미는 말할수록 화가 나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고다정도 눈살을 찌푸리며 채성휘의 생각에 불만을 가졌다. 그녀는 임은미의 등을 다독였다.“네가 거절하는 게 맞아.”“당연히 그럴 순 없지!”너무 화가 났는지 임은미는 씩씩대며 뜨거운 콧김을 내뱉었다.고다정은 ‘그래, 맞아, 맞아’ 하며 계속해서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한참 지나자 임은미는 화가 좀 많이 누그러든 거 같았고, 차도 병원 앞에 도착했다접수와 각종 검사를 마치고 한 시간이 넘게 지나서야 수술을 할
임은미는 고다정이 하는 말을 듣고 얼굴이 굳어지더니, 답답해하는 어조로 고다정한테 물었다.“그러니까 넌 날 낳으라는 거야, 낳지 말라는 거야?”“... 네가 낳든 안 낳든, 난 널 항상 응원해.”눈만 끔벅끔벅하다가 임은미는 한숨을 내쉬었다.결국 다 자기 절로 알아서 해야 한다는 건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임은미는 무력감이 들며 짜증이 확 덮쳤다.미친 듯이 머리를 마구 긁어대더니, 일단 놓인 현실을 기피하려고 애썼다.“아야, 됐어. 난 이제 첫 달인데 3개월 되려면 아직 멀었어. 두 달 동안 잘 생각해 보지 뭐.”“은미야, 너무 오래 끌면 안 돼. 14주 내엔 다 가능하다지만, 일찍 하면 할수록 몸에 덜 해로워.”임은미가 갈팡질팡한다는 걸 잘 알지만, 고다정도 친구의 본분을 다해 그녀를 설득하는 수밖에 없었다.임은미도 그런 도리를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오므리고 몇 초 동안 생각하더니, 여전히 안 되겠는지 생각을 고집했다.“아무래도 다시 잘 생각해 봐야겠어. 너무 오래 끌진 않을 거야.”“네가 잘 알면 됐어.”너무 다그치기에는 고다정도 마음이 아픈지라 얘기를 그만두고 돌아가자 하였다.잠시 후, 차는 임은미가 사는 오피스텔 아래에 멈춰 섰고, 두 사람이 내리자 바로 쫓아온 채성휘를 보게 되었다.“은미 씨...”채성휘는 분명 뭔가 할말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임은미는 그쪽에 눈길도 주지 않고 고다정과 작별 인사를 한 후 돌아서서 오피스텔로 들어갔다.임은미의 뒷모습을 채성휘는 그윽하게 바라봤다.이때 고다정은 그의 앞에 다가가서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채 선생님, 얘기 좀 할까요?”“그래요.”채성휘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윽고 두 사람은 오피스텔 근처에 있는 커피숍에 와서 앉았다.고다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 오늘 은미가 일을 번복하긴 했지만, 결정을 내리기 전에 채 선생님이 자꾸 가서 다그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이는 결혼 도피용 도구가 아니에요. 어쨌거나 채 선생님과 은미는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며칠 후 난 여준재와 일주일 정도 출국할 거야. 채성휘 소장님한테 실험실 쪽과 연구소 쪽을 관리해 달라고 부탁했어. 그래도 창석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이 두 곳을 주시해야 해.”“아가씨는 아가씨 일에만 집중하고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아가씨를 대신해서 이곳들을 잘 관리 할게요.”김창석은 고개를 숙이며 약속했다.그래서 고다정도 그의 이상함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몇 분이 지난 후 소담과 화영이 돌아왔다.고다정은 그들을 보면서 물었다.“검사해본 결과 어때요?”“아무런 문제도 없었어요.”화영이 공손하게 대답해 주었다.소담도 고다정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문제없었습니다.”“문제가 없다니 다행이네요. 수고들 했어요. 어서 앉아 쉬세요.”그녀는 말을 마친 뒤 창석 아저씨를 바라보며 칭찬을 하기 시작했다.“역시 창석 아저씨. 아저씨가 있어서 시름 놓고 외국에 갈 수 있을 것 같아요.”김창석은 허심하게 말했다.“아가씨, 과찬이에요.”이어서 두 사람은 또 잠깐 말을 했다. 그리고 고다정은 소담과 화영을 데리고 연구소를 떠났다.그 후 이틀, 고다정은 집에 남아 시어머니와 두 아이와 시간을 보내고 그사이에 틈 내어 임은미의 상황도 살피러 갔다.임은미는 요 며칠 엄마를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느꼈다.지난번 입덧을 한 후부터 그녀의 임신 초기 반응이 줄곧 심각해서 기름 냄새를 전혀 맡을 수 없었다.이 때문에 그녀는 이미 며칠 동안 밥 한 끼를 제대로 먹지 못했다.식당에 앉아서 눈살을 찌푸리며 죽을 먹는 친구를 보니 고다정은 그런 그녀가 걱정스럽기만 하였다.“내일 내가 간 후에, 네가 우리 집에 가든지 해. 우리 집에 요리사가 있는데, 네가 먹고 싶은 것은 언제든지 너에게 해 줄 수 있어. 게다가 너 삼촌과 아주머니한테 임신했다는 걸 알리지 못했잖아. 우리 시어머니도 곁에서 널 좀 돌봐 줄 수 있어. 그렇지 않으면 너가 이렇게 혼자 아파트에 계속 있으면 나는 조금도 안심할 수 없어.”“그래도 됐어. 시어머니도 내가 임신한 것을 모르잖아
여준재는 자신을 무시하는 작은 여인을 바라보더니 이내 긴 팔을 휘둘러 고다정을 품에 껴안았다.구남준은 조수석에 앉아 백미러로 그 광경을 보고는 곧바로 기사에게 눈치를 주었다.운전기사도 곧바로 그의 눈빛을 읽고 차 안의 칸막이를 내려놓았다.이에 대하여 여준재는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그는 품 안에서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아 잔뜩 토라진 여인을 꼭 끌어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알겠어요. 이제 화내지 말아요. 다음에는 절대 웃지 않을게요. 저도 다정 씨가 절 생각해주고 있다는 마음에 기분 좋아서 웃은 거잖아요.”그 말을 듣자 고다정도 화가 많이 풀렸다.어쨌든 여준재는 그녀의 태도에 대해 기뻐한 것이지만 그녀는 결코 다른 여자가 자신의 남자를 노리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준재 씨는 기분이 좋았겠지만 전 안 좋다고요.”고다정은 노발대발하며 여준재를 노려보았지만, 특히나 그의 잘생긴 이목구비는 좋으면서도 참 미웠다.결국, 고다정은 참지 못하고 마음의 소리를 중얼거렸다.“잘생긴 외모가 결국 불행을 초래한다더니.”비록 그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여준재의 품 안에 안겨 거리가 워낙 좁았던 터라 여준재는 아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칭찬 감사합니다, 약혼자님.”여준재는 고다정을 다시 힘껏 껴안으며 고다정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입을 작게 열었는데 조금 전 중얼거리던 고다정의 혼잣말에 회답한 셈이었다.그러자 고다정의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이 남자가 정말… 지금 자기를 칭찬하고 있다고 생각한 거야?고다정이 뭐라 반박하기도 전에 귓가에서 여준재의 웃음기가 가득한 사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 미안해요. 이번 일은 확실히 제가 잘못했으니 다음에 또 이런 상황이 생기면 꼭 가장 먼저 엄숙하게 거절할게요. 그리고 이미 결혼을 했고 아이 둘의 아버지라는 사실도 밝힐게요.”이 말까지 듣고 나니 고다정도 자연스레 더 화를 낼 수가 없었다.게다가 애초에 그녀는 정말 화가 난 것이 아니라 해외의 지나치게 개방적인 풍습에 적응하지 못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