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간 뒤, 고다정은 따끈따끈한 계약서를 가지고 기분 좋게 HS 그룹에서 걸어 나왔다.그녀는 차에 탄 뒤 손에 문서를 보며 연신 감탄했다.“저는 우리가 어느 정도 왕래가 있어야 이번 협력이 성사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쉽게 성사될 줄은 몰랐어요. ”“쉽게 성사되면 좋잖아요? 그래야 다정 씨도 여유시간에 주변도 돌아볼 수 있고요.”여준재가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자, 고다정은 응석부리며 답했다.“당연히 좋죠. 그냥 감탄해 본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빨리 성사될 수 있는 거도 다 준재 씨 덕분인 거 잘 알고요.”그녀도 현 대표님이 그녀 뒷배경인 여 씨 집안 체면을 봐서 이렇게 흔쾌히 계약을 성사했다는 거 또한 잘 알고 있다.그 모습에 여준재는 더 이상 답하지 않고 웃으며 대화 주제를 돌렸다.“시간도 아직 이른데 주변 좀 돌아볼래요?”“좋아요. 때마침 아이들 선물도 고를 겸요.”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들이 현 씨 그룹에서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뜻밖의 여성이 현 씨 그룹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그 둘은 모르고 있었다.안내 데스크의 직원은 그녀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얼른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 사모님.”“지금 현진우 씨 사무실에 있어요?”핸드백을 든 여성이 차갑게 묻자, 안내 직원은 머리를 끄덕이며 답했다.“네, 있습니다. 대표님더러 내려오라고 할까요?”“됐어요.”그녀는 짧게 한마디를 남긴 뒤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그렇게 2분도 채 안 되어 그녀는 현진우 사무실 문 앞에 도착했다. 그러고는 바로 문을 열고 사무실로 들어갔다.그 인기척 소리에, 사무실에 있던 있던 현진우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바라보니, 한 아름다운 여인이 사무실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현진우의 눈빛은 순식간이 온화해졌다.“연이 씨, 여긴 웬일이에요? 오기 전에 전화라도 하지. 그러면 내가 데리러 갈 텐데.”“내가 길을 찾지 못하는 거도 아닌데 왜 데리러 오는 거죠?”그녀가 차갑게 답했다.그렇다, 그녀는 다름이
현진우의 애정 넘치는 눈빛을 본 임초연은 빨간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리더니 차마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얼른 가요.”그녀는 재촉하며 현진우를 끌고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현진우는 회피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그윽하게 바라봤으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몇 분 뒤, 두 사람은 레스토랑에 도착해 자리를 잡았다.음식을 주문까지 마치고 그 둘은 서로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현진우는 맞은 편에서 젓가락을 만지작거리는 그녀를 보더니 살짝 웃어 보이며 먼저 입을 열었다.“초연 씨 나한테 할말 없는 거예요?”“아…듣자 하니 오늘 진우 씨 회사에, 운산에서 온 귀한 손님이 있었다면서요? 어떤 사람들이었어요?”임초연은 잡담이나 나누려고 그에게 말을 건네는 듯 보였지만, 사실 이미 마음속으로 답을 알고 있었다.현진우 또한 바로 답해주지 않았고 웃을 듯 말 듯 한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동문서답했다.“그러고 보니 초연 씨도 운산에서 왔죠? 이미 여기 온 지도 반년이나 흘렀는데 가끔 운산에서 살았을 때가 생각나고 그러지 않아요?”그 말을 들은 임초연은 왠지 모르게 힘듦을 느꼈다.게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진우라는 사람은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까지 들곤 했다.분명 그녀가 먼저 질문을 한 건데도, 마지막에는 현진우가 그녀에게 질문을 하고 있었다.그럼에도 그녀는 마음속의 답답함과 분노를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눈앞의 이 남자가 임 씨네 집안의 재기 가능성을 결정할 수 있으니 말이다.“생각 안 난다면 거짓말이죠. 어쨌든 저도 전에는 고귀한 임씨 가문의 장녀였으니까요.”임초연은 거짓 반 진심 반으로 답했다.그녀는 이렇게 해야만 그의 믿음을 살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역시나 현진우는 그녀의 말을 굳게 믿고 있었다. 왠지 눈앞에 그녀가 자신에게 진짜 속마음을 얘기한 것 같아 그는 참을 수 없는 듯 웃어 보였다.“그렇군요. 초연 씨가 다시 그때 신분으로 돌아가게 해주려면, 제가 앞으로 많이 노력
임초연 쪽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을 고다정은 자연스레 모르고 있다.협력 계약서를 체결한 후 두 사람은 남양에서 이틀은 더 머무른 뒤에야 다시 운산으로 돌아갔다.돌아가는 그날은 주말이라 때마침 별장에 두 아이도 있었고, 임은미도 함께 있었다.고다정이 떠나기 전 집에 늙은 할머니와 두 어린아이만 두고 가기에 시름이 놓이지 않은지라, 특별히 친구를 불러 그들과 함께 있어달라고 부탁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라 생기면 가장 먼저 그녀에게 연락도 해줄 수 있고 말이다.두 아이는 엄마와 아빠가 집에 돌아온 걸 보고 신나서 달려 나갔다.“아빠, 엄마! 왔어요?”“그래, 왔어. 너희들 집에서 얌전히 있었어?”고다정은 허리를 숙이며 가장 먼저 달려 나온 하윤이를 끌어안았다.뒤따라 달려 나온 하준이도 여준재의 품에 안긴 채 아주 기뻐하는 모습이었다.하준이는 기대에 찬 눈으로 여준재를 바라봤다.여준재도 당연히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채고는 그의 코를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말했다.“걱정하지 마, 너희들 선물도 사 왔으니까. 뒤에 구남준 삼촌한테 있어.”“고마워요, 아빠. 난 선물 보러 갈래요.”말을 마친 뒤 하준이는 여준재의 품에서 나와 선물 보러 가려 했고, 하윤이도 다급히 따라갈 준비를 하였다.고다정도 할 수 없이 하윤이를 내려놓아야만 했다.나란히 서로 손을 맞잡고 방금 들어온 구남준을 둘러싸는 아이들을 향해 고다정은 애정이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녀가 시선을 거두자마자, 갑자기 그녀의 앞에 가녀린 흰 손이 나타났다. 그건 바로 장난기 가득한 표정인 임은미였다.“두 아이 선물은 있으면서 수고스레 너희 집에서 집사 노릇을 한 내 선물은 없는 거야?”임은미는 그녀가 선물을 주지 않으면 이대로 쉽게 넘어가지 않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그 모습에 고다정은 웃으며 답했다.“어떻게 네 선물을 빼먹을 수 있겠어. 네 선물도 구 비서님한테 있어.”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아이는 몇 개의 브랜드 쇼핑백을 들고 깡충깡충 뛰어왔다.하윤이는
방에 돌아가 보니, 두 아이는 얌전히 침대에 앉아있었고, 욕실에서는 샤워 소리가 들려왔다.두 아이도 여준재가 들어온 걸 보고는 귀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아빠.”여준재는 고개를 끄덕인 뒤 욕실 쪽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두 아이에게 물었다.“너희들 솔직히 말해. 아빠랑 엄마가 없는 동안, 은미 이모랑 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었던 거야?”“아빠 그게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하윤이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두 눈을 깜빡이였고, 하준이도 그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모습으로 멍하니 있었다.그 모습을 본 여준재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일부러 그 둘에게 겁을 주며 말했다.“너희들 진짜 이럴 거지? 그러면 뒤에 가서 엄마한테 들켜도 아빠는 몰라? 너희들 편들어주지 않을 거야.”그 말을 들은 두 아이는 서로 눈을 마주하더니 솔직하게말하기로 한듯했다..“아빠, 사실 은미 이모와 뭘 꾸민 거 없어요. 그냥 엄마와 엄마를 뺏고 싶어 하는 아저씨가 매일 같이 있는 게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이모가 우리한테 방법을 생각해 준 거예요. 우리더러 매일 아빠의 이름으로 주방 도우미더러 사랑의 점심, 저녁, 야식을 가져다주라고 했어요.”“그렇게 전체 연구소에서 아빠와 엄마 사이가 좋다는 걸 알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아저씨도 다시는 엄마를 쫓아다니지 않을 거고요. 아니면 세컨드라는 소리와 함께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을 수도 있고요.”두 아이는 거의 이구동성으로 입을 열었다.그 말을 들은 여준재는 지금까지 그래도 두 아이를 이뻐한 보람이 있다고 생각했다.그는 손을 들어 두 아이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웃어 보였다.“그 방법 괜찮네. 아빠 지위를 지켜준 보상으로 너희들이 좋아하는 최신 장난감 사줄게.”“와, 진짜? 사랑해 아빠.”하윤이는 자신이 최신 인형을 갖게 될 것이라는 말에 흥분되어 여준재를 끌어안았다.하준이는 비록 하윤이만큼 과장되게 표현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입가에 그 미소는 숨길 수가 없었다.그렇게 세 부자가 한창 웃고 떠들 때
고다정이 기획서를 확인해 보니 두 개 팀으로 나뉘어져 있었다.그녀와 채성휘가 각각 따로 팀을 이끌어 약 성분을 배합해 새로운 레시피를 연구해 내는 것이다.팀을 두 팀으로 나뉘었기에 두 팀 간의 경쟁 구도도 끌어내 더욱 많은 새로운 레시피도 연구해 낼 수 있을 것이다.하여 이렇게 팀을 짠 게 싫은 건 또 아니다.하지만 좋다고 말하기도 애매했다. 왜냐하면 고다정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비록 자신의 부족한 점을 알지만, 아직 그걸 보완할 방법은 찾지 못했다. 하여 괜히 자신이 팀을 이끌어 새로운 레시피를 연구하다가 다른 사람들의 시간을 방해할까 봐 걱정되었다.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그녀는 기획서를 내려놓고 채성휘를 바라봤다.“기획서 괜찮네요. 우리 연구원들의 새로운 레시피에 대한 연구를 더 광범위하게 자극할 수 있을 건 같지만…”그녀는 갑자기 말을 돌렸다.“저를 2팀 팀장으로 둔 게 저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해서요. 저는 전문적으로 배운 게 아니라 그냥 어거지로 보고 배운 거라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많이 뒤떨어질 거예요. 심지어 연구팀에 누를 끼칠 수도 있고요.”그 말을 들은 채성휘는 깜짝 놀라 멍해졌다.고다정이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 말이다.“저는 고다정 씨가 바로 동의할 줄 알았는데. 혹시 전에 저랑 겨뤄서 진 것 때문에 그래요?”채성휘는 많은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그가 오해할 만도 하다. 고다정이 전에 사람들에게 주는 느낌은 일정한 이념만 있으면 그것을 실천하고, 그 실천으로 이념이 옳은지 아닌지를 시험하는 것으로 보였으니 말이다.그 질문에 고다정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런 거 아니에요. 조금 전에 말하다시피, 제 개인의 전문적이지 못한 지식으로 모든 사람의 연구 과정에 누를 끼칠가봐 걱정돼서 그래요.”“그러면 연구하면서 배울 수 있잖아요. 고다정 씨가 팀장이라고 해도, 문제가 있으면 저한테 와서 물어봐도 되고, 고다정 씨 팀의 다른 연구원들한테 물어봐도 되고요.”채성휘는 고다정을 설득하며 이어서 말했다.“
몇 분 뒤, 소담이 삼 층 도시락을 들고 사무실에 나타났다.그녀 또한 소파에 앉아있는 채성휘를 보았고, 바로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는 손에 있는 도시락통을 테이블에 올려 놓으며 고다정에게 말했다.“사모님, 식사하세요.”“네.”고다정은 그녀의 말에 응한 뒤 채성휘를 바라보며 예의상으로 한마디 건넸다.“채 선생님, 도시락 양도 많은 것 같은데, 아니면 같이 먹을래요?”이때 소담도 한마디 더 보탰다.“채 선생님도 남아서 같이 드실 수 있습니다. 저희 대표님이 사모님께서 주변 사람들과도 같이 드실 거라면서 삼 인분 요리를 준비해 주셨습니다.”저런 말 까지 나왔는데 어떻게 남아서 같이 먹을 수 있겠는가?특히 소담의 말끝마다 사모님 소리에 그는 더욱 불편해 났다.“저는 됐어요. 고다정 씨 일단 점심 드시고, 저녁쯤 택배가 도착하면 제가 가져다드릴게요.”말을 마친 뒤 그는 고다정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바로 자리를 떠났다.소담은 다급히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눈을 흘겼다.‘고작 이 정도 기량으로 감히 우리집 사모님을 넘보다니. 진짜 헛된 망상을 하고 있군.’하지만 고다정은 소담의 표정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오히려 도시락량에 시선을 뺏겼다.“뭔 반찬을 이렇게나 많이 가져왔어요?”그녀는 조금 전 소담이 일부러 그렇게 말하며 채성휘를 남긴 줄 알았다. 왜냐하면 여준재가 통 크게 채성휘까지 같이 먹을 수 있게 도시락을 사주지 않았을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예상외로 그녀의 생각과는 완전히 정반대였다..이윽고 소담이 답했다.“대표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채 선생님이 사모님이랑 밖에서 식사하기 좋아하신다고요. 그리고 사모님이 혼자서 재미없어하실까 봐 쉐프님더러 요리를 많이 준비하게 하신 겁니다. 그렇게 하면 사모님이 채 선생님과 같이 식사를 할 수 있게 되는 거고, 사모님도 덜 심심할 거고요.”“…”고다정은 다소 어이가 없었다.게다가 이런 말 또한 여준재만이 할 수 있는 소리이긴 하다.그와 동시에 그녀는 채성휘가 먼저 자리를 떠난 게
“이건 엄마가 다른 사람한테 부탁한 학습 자료야.”고다정이 숨을 몰아쉬며 답했다.이때 여준재가 물 한 잔을 그녀에게 건네주며 부드럽게 말했다.“물 마시고 숨 좀 돌려요.”말을 마친 뒤 그는 바닥에 상자를 보더니 찬성하지 않는듯한 태도로 다시금 입을 열었다.“이렇게 무거운 거 있는데 왜 저 안 불렀어요?”그 말을 들은 고다정은 물을 마시다 말고 여준재를 향해 웃어 보였다.“까먹었어요.”그녀는 진짜로 까먹은 것이다. 전부터 그녀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혼자서 했고,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했다.그녀의 표정을 본 여준재는 그녀의 진심을 눈치채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답했다.“앞으로 잊지 마요.”“알겠어요.”고다정은 그에게 환심을 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두 아이는 엄마와 아빠의 애정행각이 기쁘기도 하고 또 걱정되기도 했다.하윤이는 고다정을 바라보며 물었다.“엄마, 이 학습자료 설마 나랑 오빠한테 주는 거 아니지?”“엄마, 우리는 이거 필요 없어요. 엄마도 알잖아요. 엄마의 반대만 아니면 저 지금 초등학교 4학년에서 공부할 수도 있다고요.”하준이도 옆에서 손으로 4학년을 가리키며 그 말에 가담했다.고다정은 두 아이의 속셈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이거 누가 너희들 거래. 이건 엄마 학습자료야.”비록 두 아이에게 장난하고 싶었지만, 전에 장난이 심해 두 아이가 난리를 피운 걸 생각하고는 그 마음을 접고 사실대로 답했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미 예상을 한 듯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하지만 두 아이는 놀라운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봤다.“이거 다 엄마가 공부해야 하는거야?”“엄마는 이미 어른인데 왜 공부하는 거지?”하윤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그 말을 들은 고다정은 웃으며 하윤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래, 엄마 어른 맞는데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거 잘 알아둬. 옛말에 늙어 죽을 때까지도 배운다는운다는 말 있잖니? 즉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거야. 알겠지?”말을 마친 뒤 그녀는 고개를 숙여 두 아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한 주가 지났다.비록 여준재가 매일 사랑의 도시락을 사주긴 하지만, 고다정은 매일 아침 일찍 나가 늦게 퇴근하며 바쁘게 지냈기에 전체적으로 살이 많이 빠진 상태였다.여준재는 야위어 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엄청 속상했다.그는 고다정에게 여러 번이나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그녀는 말뿐이지 얼마 지나지 않으면 잊어버리곤 했다.그날도 고다정은 연구소에서 저녁까지 일한 뒤에야 퇴근했다.시간도 이미 늦은지라 그녀는 여준재가 먼저 잘거라 생각하고,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하지만 그녀가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까맣던 방안이 순식간에 밝아질 줄 누가 알았으랴.게다가 이미 잠에 든 줄로만 알았던 여준재가 침대에 앉아서 엄숙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흐흐, 이렇게 늦었는데 아직도 안 잤어요?”고다정은 멋쩍게 여준재에게 인사를 건넸다.하지만 여준재는 무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고, 그 어둡고 깊은 눈동자를 보니 소름이 돋는 듯 했다.더 중요한 건 여준재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말없이 고다정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모습에 고다정은 더욱 불안해졌다.이윽고 그녀는 뭐가 생각난 듯 여준재 앞으로 걸어가 겸허하게 자기 잘못을 인정했다.“그렇게 무섭게 좀 보지 마요. 저도 잘못한 거 알았으니까, 앞으로 꼭 일찍이 집에 올게요. 다시는 늦지 않겠다고 이렇게 맹세할게요.”말을 마친 뒤 그녀는 맹세의 제스처도 취해 보였다.여준재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그녀를 바라보더니 그제야 차가운 말투로 답했다.“그래요? 그러면 그 일찍이라는게 몇 시인지 말해봐요. 10시나 11시나 다정 씨에게는 다 똑같은 거 아닌가요? 12시도 일찍하다고 느끼겠네요?”“아…”그 고다정은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멍해졌다.왜냐하면 그동안 여준재가 통금시간을 정했어도, 그녀는 그걸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점점 더 굳어가는 여준재의 표정을 보며 고다정은 얼른 그의 기분을 풀어주려 했다.“약속할게요. 앞으로는 10시… 아니 12시에는 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