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잠시 멍해졌지만 여전히 채성휘가 자신한테 마음이 있다는 걸 믿지 않았다.어쨌든 약혼자도 있고 아이도 있다고 공개했는데, 머리가 어떻게 되지 않은 이상 이런 여자에게 마음을 줄 리 없지 않은가.“당신이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게 맞아요. 채 선생은 예의상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어요.”“...”여전히 믿지 않는 고다정을 바라보던 여준재는 문뜩 계속 쟁론하다가는 서로 감정만 상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하기로 했다.“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했나 봐요.”여준재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자 고다정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어쨌든 한쪽은 애인이고 한쪽은 스승님이 특별히 모셔 온 전문 연구원이니 두 사람이 충돌하면 그녀가 중간에서 곤란해질 것이다.여준재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그녀가 여전히 그의 말을 새겨듣지 않고 있다.채성휘가 본색을 드러내게 해야 할 것 같다.고다정은 여준재의 이런 속내를 모르고 있었다.잠시 후 식사가 끝나고, 여준재는 회사에 일이 있어서 들어가야 했다.가는 길에 그는 고다정을 연구소에 데려다주었다.그녀는 연구소에서 채성휘가 말한 이론에 정말 문제가 있는지 추론해 보려 했다.정말이라면 일찌감치 스승님과 상의해야 하니까.바삐 보내다 보니 어느새 반나절이 지나갔다.날이 어두워져서야 고다정은 마침내 추산을 멈췄다.그녀는 책상 위의 추산 결과를 보며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이 결과는 정말 채 선생님이 말한 대로 문제가 있잖아.”그녀가 스승님께 연락하려 할 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고, 흰색 가운을 입은 채성휘가 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채 선생님, 여긴 왜 오셨어요?”고다정이 의외라는 듯 걸어와 문을 열자, 채성휘가 웃으며 말했다.“한잠 자고 일어났는데, 아까 그 문제가 생각나서 추론해 보려고 연구소에 왔어요. 좀 더 확실히 해야 하니깐요. 그런데 밖에 있는 김창석 씨가 고 선생님도 계신다고 하더라고요. 아까 제가 말한 그 이론을 추산하고 있었나요?”“네,
사실 여준재는 진작에 채성휘가 연구소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그는 채성휘가 연구보다는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두 아이를 데리고 온 것이다.‘이놈이 스스로 포기하지 않으면 내가 포기하게 만들어야지. 어리석게 군다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고다정은 여준재의 이런 속내를 몰랐다.그녀는 여준재가 준이, 윤이를 데리고 왔다는 말에 매우 의아해했다.“애들은 왜 데려왔어요?”“당신이 바빠지기 전에 네 식구가 같이 외식하고 쇼핑하려고 그러죠. 이제 바빠지면 애들과 같이 보낼 시간이 많지 않을 것 같아서요.”여준재의 진심 어린 말에 고다정은 별생각 없이 믿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면 준이, 윤이를 데리고 올라와요. 결과가 나오면 그때 같이 식사하러 가요.”“알았어요. 그럼 먼저 일 봐요. 준이, 윤이랑 사무실에서 기다릴게요.”여준재는 고다정에게 일하라고 말한 후 자리를 떴다.채성휘는 고다정이 다시 실험실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동공이 살짝 흔들리더니 말했다.“여 대표님이 데리러 오셨는데 먼저 들어가세요. 저 혼자서 결과를 기다려도 돼요.”“괜찮아요. 어차피 결과를 기다리는 데 30분도 안 걸릴 텐데 기다려도 무방해요.”고다정이 웃으며 아까 하던 얘기를 계속 이어갔다.그러자 채성휘는 기분이 좋은 듯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 웃고 있던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다름이 아니라 무의식 간에 밖을 내다보다가 여준재가 두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뽀얀 피부를 가진 두 아이는 너무 귀여웠다.가장 중요한 것은, 두 아이가 딱 봐도 여준재와 고다정의 장점만 쏙 빼닮은 영락없는 두 사람의 아이였다.고다정도 이때 유리문 밖의 쌍둥이를 발견하고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쌍둥이도 활짝 웃으며 화답했다.네 식구가 서로 교류하는 광경을 지켜보는 채성휘는 마음이 매우 복잡했다.물론 그는 여준재가 일부러 두 아이를 데려왔다는 것을 눈치챘고, 그에게 경고를 주기 위한 목적이라는 것도 잘 알
식사가 끝나고 네 식구는 근처 보행자거리에서 쇼핑한 후 집으로 돌아갔다.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고다정은 너무 피곤했는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어느새 잠들어버렸다.이를 본 여준재는 쌍둥이에게 목소리를 낮추라고 손짓한 후,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이를 지켜보던 쌍둥이가 입을 가리고 킬킬 웃었다.그러다가 하준이가 무슨 생각이 난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마침 그 순간을 목격한 여준재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왜 미간을 찌푸려?”이 말을 들은 꼬맹이는 여준재를 쳐다보며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등하며 망설였다.그는 연구소에서 나올 때 성휘 아저씨가 엄마를 바라보던 눈빛이 생각나자 결국 말하기로 했다.그는 아빠와 엄마가 간신히 맺어졌기에 둘의 애정 전선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다.“아빠, 가까이 와봐요. 조용히 말해줄게요.”꼬맹이가 여준재를 오라고 손짓했다.여준재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그렇게 비밀 얘기야?”그는 말하면서 하준이한테 가까이 다가갔다.옆에서 지켜보던 하윤이가 씨무룩해서 입을 삐죽거리며 방해했다.“나도 들을래. 나도 들을래.”“윤아, 조용히 해. 시끄러워서 엄마가 깨겠다.”하준이가 급히 쉿 하더니 동생을 달랬다.“집에 도착하면 알려줄 테니까 넌 얌전히 있어. 지금 먼저 아빠한테 얘기할 거야.”하윤이는 내키지 않았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준이는 여준재의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아빠, 성휘 아저씨가 엄마를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아까 뒤로 돌아볼 때 발견했는데 아저씨가 엄마를 보는 눈빛이 아빠가 엄마를 보는 눈빛과 같았어요.”이 말을 들은 여준재는 깜짝 놀랐다.그는 이 녀석이 이 사실을 눈치챌 정도로 예민하리라 생각지 못했다.그는 꼬맹이의 알고 싶어 하는 눈빛과 마주치자 결국에는 숨기지 않았다.“네 말이 맞아. 그 사람이 아빠한테서 엄마를 빼앗으려 해. 그러니까 너 앞으로 아빠를 도와줘야 해. 알았지?”“정말 빼앗으려 했네!”하준이는 자신의 추측이 사실일
성인인 채성휘가 고다정의 발그레한 얼굴과 약간 부은 입술을 보고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를 리 없다.그는 눈빛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졌지만 표정을 유지하며 온화하게 인사했다.“고 선생님, 안녕하세요.”“아, 채 선생님, 안녕하세요.”고다정은 여전히 쑥스러웠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인사했다.그러면서 차 안에 있는 여준재를 슬며시 노려보았다.‘이 남자가 기어코 끌어당기지 않았더라면, 조금 전 광경을 누군가에게 들켜 이렇게 민망해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여준재는 물론 고다정의 시선을 느끼고 빙그레 웃었다.그는 고다정에게 멀리서 채성휘가 오는 것을 보고 일부러 그랬다고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다정 씨, 나 먼저 회사에 갔다가 저녁에 데리러 올게요.”이어서 여준재는 채성휘에게 인사하고 구남준에게 출발하라고 지시했다.고다정은 차가 멀리 가버린 후에야 시선을 돌렸다.이때 그녀의 귓가에 채성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 선생님과 여 대표님은 금슬이 참 좋네요. 너무 부러워요.”이 말을 들은 고다정은 무심코 채성휘를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에 부러움 외의 다른 것은 없는 것을 보고 여준재가 했던 말들이 더욱 터무니없이 느껴졌다.‘채 선생님이 정말 나에게 무슨 마음이 있었다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거야.’이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이게 뭐가 부러워요? 채 선생님도 언젠가는 뜻이 맞고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날 거예요. 그때 되면 저와 준재 씨보다 더 끈끈할지도 몰라요.”“그랬으면 좋겠네요.”기분이 엉망인 채성휘는 입꼬리가 축 처진 채 대답했다.그는 고다정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고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어젯밤에 물류센터에서 전화가 왔는데, 우리가 택배로 보낸 약재가 도착했어요. 지금 창고에 입고됐을 건데 지금 확인하러 가실래요?”“약재가 도착했어요? 그럼 이따가 회의가 끝난 후 확인하러 갈게요.”고다정도 일 얘기가 나오자 진지해졌다.그렇게 두 사람은 얘기를 나누면서 사무실로 향했다.30분 후 고다정은 연구소의 모든
“저한테 옷을 주시면 채 선생님은 어떡해요?”고다정이 관심 어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남의 옷을 입고 그 사람이 추위에 시달리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고다정의 관심을 받아서인지 채성휘는 어둡던 눈빛이 한순간 반짝반짝 빛나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연구소 업무가 시작되면 이쪽에서 야근하는 일이 많을 것 같아서 갈아입을 옷을 가져왔어요. 다른 코트를 가져올 테니 잠깐만 여기서 기다리고 계셔요.”말하고 나서 그는 돌아서서 가버렸다.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다정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채성휘가 갈아입을 옷까지 가져올 줄은 생각지 못했다. 아예 연구소에서 살 생각인가. 참 각오가 남다르다.몇 분 후, 채성휘가 다른 코트를 입고 돌아왔고, 두 사람은 저온 창고로 들어갔다.한바탕 대조 확인한 후, 고다정은 이 진귀한 약재의 양이 이쪽 소모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줄곧 고다정의 표정을 살피고 있던 채성휘는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자 걱정스레 물었다.“왜 그래요? 이 약재들에 무슨 문제가 있나요?”“약재는 문제없는데 양이 모자랄 것 같아요.”고다정이 마음속 생각을 털어놓았다.채성휘는 이 말을 듣고 약간 난처해졌다.어쨌든 이 약재들은 그가 책임지고 사들인 것이므로 지금 양이 부족한 것도 그의 책임이다.“그러면 제가 약재상에 다시 연락해서 좀 더 보내라고 할게요. 제가 꼼꼼히 챙기지 못했네요.”“자책하실 필요 없어요. 저도 스승님이 주신 핵심 자료를 봐서 약재가 대략 얼마나 필요한지 아는 거예요. 채 선생님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렇게 많은 진귀한 약재들을 구해왔으니 정말 대단하세요.”고다정은 채성휘를 탓할 수 없다고 여기며 고개를 저었다.채성휘는 비록 성시원이 모셔 온 핵심 연구원이지만 연구 프로젝트의 핵심 자료는 스승님이 그녀에게만 주었다.채성휘도 이 사실을 알지만 고다정이 자신을 감싸 주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하지만 그는 이 약재들이 공급이 달리는 품종이라는 생각이 들자, 급히 흥분을 가라앉
이튿날 아침 고다정이 깨어 보니 자기 집 침대에 누워있었다.어젯밤에 여준재 품에서 잠든 후 여준재가 그녀를 안고 들어온 게 분명하다.주변을 둘러보니 방에는 그녀 혼자만 있었다. 그녀는 서운할 것도 없이 입가에 달콤한 미소를 머금고 일어났다.여준재는 항상 그녀보다 일찍 일어났으니까.간단히 씻은 후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여준재가 거실 소파에 앉아 쌍둥이와 놀고 있는 것이 보였다.“엄마, 일어났어요?”쌍둥이는 고다정을 발견하고 방글방글 웃으며 인사했다.고다정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아침 식사는 했어?”“저희는 먹지 않았고 외증조할머니는 일이 있어서 아침을 드시고 나갔어요.”하준이가 말랑말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여준재가 옆에서 덧붙였다.“외할머니가 노인회관에 가입하셨는데, 오늘 아침 회관 사람들과 등산 약속이 있다고, 저녁에 돌아오지 않아도 걱정하지 말라고 당신한테 전하라 하셨어요.”“외할머니가 언제 회관에 가입하셨죠? 저는 왜 모르죠?”고다정이 의아해하자 여준재가 웃음을 터뜨렸다.“당신이 요즘 바삐 보내니까 외할머니가 당신한테 말하지 말라 했어요. 근데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사람을 시켜 조사해 봤는데 다단계 사기, 그런 건 아니에요.”이 말을 들은 고다정은 마음속 걱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뒤이어 그녀는 이제 시간도 늦었으니 아침 식사하자고 여준재와 두 아이를 불렀다.식사가 끝난 후 여준재는 고다정을 연구소에 데려다주려 했지만 그녀에게 거절당했다.“연구소에 가기 전에 신수 어르신한테 들러야 해요.”고다정이 이유를 말하자 여준재가 무심코 한마디 물었다.“왜요?”고다정은 숨기지 않고 사실대로 말했다.“채 선생님이 가져온 약재가 부족해요. 신수 어르신이 좀 더 구해줄 수 있을지 해서요.”이 말을 들은 여준재는 고다정이 말하는 약재가 보통 약재가 아닐 것임을 직감하고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나도 사람을 보내 알아볼 테니 이따가 나한테 리스트를 줘요.”“그럴게요.”고다정은 거절하지 않았다.그녀는 자기가 구하려는
고다정의 말을 듣고 신수 노인은 그녀가 한 발짝 물러섰다는 것을 알면서도 찬물을 끼얹었다.“천천히 사들인다 해도 이 모든 걸 다 구하기는 힘들 것 같아.”신수 노인이 과장해서 말한 것이 아니다. 정말 다 구하지 못할 수도 있다.정말 진귀한 약재들이라 매년 성숙기가 되면 사람들이 지키고 있다가 싹쓸이할 정도다.고다정도 이 사실을 알기에 방금 그 말을 한 것이다.그녀는 한숨을 쉬더니 간곡하게 부탁했다.“어쨌든 있는 만큼 구입해 주세요. 마지막에 약재 한 톨도 못 받더라도 어르신을 탓하지는 않을 거예요.”“알았어. 네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도와줘야지. 이따가 문성 노인한테도 연락해 살피라고 할게.”신수 노인은 더 이상 찬물을 끼얹지 않고 정색하며 긍정적인 답을 주었다.고다정은 감격하며 연신 감사를 표시했다.그녀는 신수 노인과 한참 의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후 신의약방을 떠났다.그러고는 잠시도 쉬지 않고 연구소로 달려갔다.이때 연구소에서는 일이 착착 전개되고 있었고, 분망하지만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직원들은 고다정이 밖에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고 원장님.”“고 원장님, 좋은 아침입니다.”고다정은 공손하게 인사하는 사람들을 보며 감개무량함을 느꼈다.‘내가 원장이 되는 날이 오다니.”물론 이 모든 것은 스승님 덕분이다.이런 생각을 하며 고다정은 얼굴에 미소를 띤 채 직원들에게 자기 때문에 일을 지체하지 말고 하던 일을 계속하라고 당부했다.사무실에 들어선 후 그녀가 연구복으로 갈아입고 실험실에 가려 할 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고 선생님, 들어와도 될까요?”“들어오세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고다정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시간을 보면, 채성휘는 이 시간에 실험실에서 연구하고 있어야 한다.고다정은 속으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면서도 문을 밀고 들어오는 남자를 보며 마음을 가다듬고 표정 변화 없이 물었다.“채 선생님이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돌아오셨다고 해서 약재는 어떻게 됐는지
식사 후 고다정과 채성휘는 각자 실험실로 향했다.그렇게 바삐 보내다 보니 어느새 한밤중이 됐다.오후에 한 번 해봐서 그런지 실험은 매우 순조로웠고 결과도 나왔다.실험실을 대충 정리한 후 고다정은 실험 수치를 들고 나갔다.문을 나서자 채성휘가 종이 한 장을 들고 옆 실험실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채성휘도 고다정을 발견했다.그는 고다정이 손에 들고 있는 보고서를 힐끗 보더니 싱긋 웃으며 말했다.“우리 속도가 비슷하네요.”그는 말하면서 손에 있는 보고서를 흔들었다.고다정도 눈썹을 치켜올리며 방긋 웃었다.“그렇다면 우리 같이 결과를 보는 게 어때요?”“그러죠.”채성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두 사람은 3초간 침묵한 후 같은 시간에 수치를 말했다.그와 동시에 고다정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채성휘의 수치가 그녀의 수치보다 답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이럴 수가?”고다정은 자신의 이론이 왜 틀렸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채성휘는 그녀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고 선생님이 이론을 잘못 생각한 것은 정상적인 일이에요. 어쨌든 저처럼 체계적으로 제약 이론을 배운 적이 없으시니까요. 배우셨더라면 이 실험에 세 가지 이론을 적용할 수 있다는 걸 아셨을 거예요.”이 말을 들은 고다정은 이내 자신의 단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그녀는 가르침을 받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군요. 제가 간단하게 생각했어요.”상대방은 의학을 전공한 석사 졸업생이니 전문 이론에서는 당연히 그녀보다 강하고 아이디어도 많을 것이다.이런 생각을 하며 고다정은 약간 쑥스럽게 채성휘를 바라보았다.“채 선생님, 한 가지 부탁해도 될까요?”채성휘는 여인의 표정을 보고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챘다.“전문용어 이론 서적들을 정리해 달라는 거죠?”“정말 채 선생님을 속일 수 없네요.”고다정이 인정하자, 채성휘가 웃으며 말했다.“큰일도 아닌데요. 마침 제가 보던 책들을 아직 버리지 않았는데, 부쳐 보내라고 할게요. 책에 제 필기도 있어서 더 빨리 배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