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저 마당 보여요? 우리가 나중에 늙으면 저기서 노후를 보내요, 앞뜰에는 꽃밭, 뒤뜰에는 약밭이 있어요. 꽃밭에는 내가 그네도 만들어놓으라고 했어요. 다정 씨가 그네를 타면 내가 뒤에서 밀어줄게요.”여준재는 그 숲속의 집을 가리키며 고다정과의 미래의 노후생활을 눈앞에 그리듯 얘기했다. 그 화면을 상상하고 난 고다정은 장난스러운 웃음기가 입가에 돌며 물었다.“나중에 날 밀수나 있겠어요? 준재 씨도 그때면 꼬부랑 할아버지가 돼 있을 텐데?”“밀 수 있어요. 내가 매일 열심히 운동할게요. 꼭 할 수 있을 거예요.”그녀를 품에 안으며 여준재는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두 사람이 한참 웃으며 장난이 오가는데 직원이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고 알렸다.아침 식사를 마치고 그들은 유람선에서 내려서 섬으로 향했다.배에서 내리자마자 고다정은 주변 공기가 한결 맑아져 머릿속이 뻥 뚫리는 거 같았다.바닷바람이 불자 도로 양쪽의 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푸른 잎사귀가 바스락바스락하는 소리를 냈다.고다정은 기분 좋게 주변을 보며 절로 감탄이 나왔다.“여기 진짜 노후에는 최고의 곳인 것 같아요!”이 말을 들은 여준재는 고개를 돌려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두 사람은 한가로이 오솔길을 거닐며 천천히 별장으로 걸어 들어갔다.입구에서는 집사가 이미 소식을 듣고 하인들을 데리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도련님, 작은 사모님.”“이분은 이 집사님의 셋째 형님이자 여기를 돌보는 집사예요. 이 집사님과 한날한시에 입사했는데, 우린 상현 집사님이라고 불러요.”여준재는 집사를 가리키며 소개했다.고다정은 예의 있게 인사를 하며 그분을 불렀다.“안녕하세요, 상현 집사님.”“네, 작은 사모님, 어서 안으로 드셔서 주변 세팅이 맘에 안 드시는 부분이 있으신지 확인해 보세요, 도련님이 시켜서 인테리어를 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비록 작은 사모님의 취향에 맞게 물건들을 장만했지만, 혹시 뭐가 누락되지 않았을까 걱정이 돼서요.”상현 집사는 반갑게 고다정을 맞으며 마당으로 안
한참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니 점심 먹을 시간이 다 되었다.여준재는 고다정의 손을 잡고 다이닝룸으로 와서, 신사답게 의자를 당겨주며 다정하게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고 좀 쉬어요. 오후에는 해변으로 데리고 가줄게요. 거기에 섬 원주민들도 있거든요.”“원주민이 있다고요?”고다정은 놀랍게 여준재를 쳐다봤다.그러자 여준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 섬은 처음 발견됐을 때부터 원시 부족들이 살고 있었대요. 나중에 정부에서 계속 사람을 보내 개화를 시키면서 나중에 이렇게 작은 마을이 형성됐어요.”그 말에 고다정은 매우 흥미진진하여 방그레 웃었다.“그럼 오후에 그리로 가요.”식사가 끝나고 둘은 정원에서 잠깐 휴식을 취했다가, 두 시간 후 일어나 간단히 짐을 꾸려 해변으로 출발했다.관광버스 위층에 올라타니 바람결이 살랑살랑 불어오며 얼굴을 시원하게 스쳐 갔다.이윽고 차는 목적지에 도착했고, 눈앞에는 온통 푸른 바다와 드넓은 황금빛 모래사장이었다.많은 사람들이 모래사장 위에 서 있거나 뛰어다니며 각각의 재미를 즐기고 있었다.여준재와 고다정도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갔다.두 사람의 출중한 외모와 남들과 다른 피부 빛이 뭇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섬에 새로 온 관광객인가 봐. 정말 예쁘다.”“저 언니 너무 맘에 들어. 우리랑 같이 놀자고 하면 놀아줄까?”“우리 저 언니 찾아가서 놀자고 해보자.”한 대담한 아이가 이런 제의를 꺼냈고, 곧 다른 아이들도 맞장구를 쳤다.고다정은 그런 걸 모르고 여준재의 곁에서 함께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그때 여준재가 먼저 아이들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걸 발견했다. 그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지만 막지는 않았다. 얼마 안 되는 사이에 아이들은 이미 두 사람 앞으로 달려갔고, 부끄러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애타게 고다정을 쳐다보기만 했다.고다정은 이때에야 비로소 그들을 발견하고 뭔 일인지 물었다.“무슨 일이에요?”몇몇 아이들은 서로서로 눈치를 보며 수줍어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 뒤로 며칠, 고다정은 여준재와 섬 곳곳을 돌아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에 함께 배구를 쳤던 에바 등 아이들이 몇 차례 더 찾아와 그들과 같이 놀았다. 그 때문에 여준재가 계획했던 둘만의 세계는 초반부터 일그러졌다.닷새째 되던 날,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애들이 혹여나 나중에 또 찾아올까 봐 그들한테 가서 미리 알렸다.아이들은 두 사람이 떠난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아쉬워하며 각자 선물을 가지고 와 두 사람을 배웅했다.“예쁜 언니, 나중에 또 올 거예요?”에바는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다정을 바라봤다. 다른 아이들도 엄청 아쉬워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이구동성으로 물었다.“예쁜 언니, 안 가면 안 돼요?”“응, 그건 안돼. 언니가 집에 애들이 있는데 얼른 돌아가서 돌봐야 해. 직장도 다녀야 하고.”고다정도 맑고 순수한 이 아이들을 떠나는 게 아쉬워 그들한테 따뜻하게 설명을 해주었다.“그렇지만 나중에 시간 될 때마다 너희들 자주 보러 올게, 약속해.”그 말에 아이들은 실망했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이어서 가져온 선물을 고다정한테 건넸다.“예쁜 언니, 이 소라 언니 줄게요. 그리고 여기 있는 소라 두 개는 제가 동생들한테 주는 선물이에요.”“이 진주들도 언니한테 선물할게요. 우리 엄마가 말하는데, 진주는 되게 좋은 거래요.”“이 바닷물고기도 언니가 가져가서 드세요.”아이들의 넘치는 성의를 거절할 수 없어 고다정은 그 선물을 모두 받았다.유람선으로 돌아온 그녀는 아이들이 준 선물을 잘 챙기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여준재는 얼굴색이 별로였는데, 그런 그를 보며 고다정은 말했다.“다음에는 하준이와 하윤이랑 같이 오면 좋겠어요. 친구들이 많아 애들이 엄청 좋아할 거 같아요.”“걔들은 즐거울지 몰라도 난 별로예요.”여준재는 일부러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고다정은 그 모습을 보고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왜요, 아직도 화났어요?”어떻게 화를 안 낼 수 있겠어요!겨우 애들을 부모님께 맡
고다정은 두 아이를 품에 안고 물었다.“너희들 언제 돌아온 거야?”“얼마 안 됐어요. 엄마, 밖에서 재미있게 놀다 왔어요?”하준이가 뒤로 목을 젖히고 쳐다보며 호기심에 찬 얼굴로 물었다.고다정은 그들의 손을 잡고 소파 옆으로 가며 미소를 띠고 말했다.“어, 잘 놀고 왔어. 그것보다, 거기서 엄마가 너희들 대신해서 어린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거든. 다음에 너희들이랑 같이 가면 엄마가 소개해 줄게. 아, 맞다. 걔들이 너희들 주라고 선물도 줬는데, 봤어?”“봤어요. 돌아오자마자 아빠가 주셨어요.”두 아이는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고다정을 계속해 말을 이었다.“선물을 받았으니까, 다음에 만날 때는 너희들도 답례해야 하지 않겠니?”그 말에 두 아이는 눈길을 서로 주고받더니 앙증맞은 소리로 대답했다.“엄마 말이 맞아요. 우리도 선물을 준비해서 다음에 만날 때 그들한테 줄 거예요.”고다정은 듣고 흐뭇해서 고개를 끄덕였다.그다음 날은 역시 조용하고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갔다.낮에 출근하는 사람은 출근하고, 등교할 사람은 등교하고, 저녁이 되어서야 한 가족이 다시 모여 식사하고, 식사 후엔 게임을 즐겼다.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또 보름이 지나갔다.이날 고다정은 회사에서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녀의 스승님, 성시원한테서 전화가 왔다.“선생님, 돌아오신 거예요?”뜻밖의 전화를 받은 고다정은 매우 반갑게 물었다.“아니, 난 아직 돌아가지 않았어. 네가 좀 도와줘야 할 일이 있어서 너한테 연락 한 거야.”성시원은 미안해하며 말했다.“무슨 일인데요? 사양하지 말고 말씀하세요.”고다정은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성시원도 솔직히 얘기했다.“내가 지금 외국에 연구소 몇 개를 설립했는데 성과가 매우 좋아. 그래서 국내에도 하나 더 설립하고 싶구나.”“그거 괜찮네요, 그럼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고다정은 그의 사업에 매우 찬성하며 물었다.성시원은 시원스럽게 웃으며 말했다.“네가 날 도울 수 있는 건 아주 많지. 일단 내가 해외에서
그날 밤, 여준재는 회사로 고다정을 데리러 왔다. 집에 돌아가며 그는 물었다.“지선우한테 부지를 구해오라 했다면서요? 연구소 짓는다고.”“네, 맞아요.”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준재는 다그쳐 물었다.“왜 연구소 지을 생각을 했어요? 회사에 새로운 프로젝트가 생긴 거예요?”그제서야 고다정은 사실을 말했다.“회사 일이 아니고요, 오늘 선생님이 저한테 전화가 왔어요. 국내에 연구소를 설립하고 싶으신데 모든 일을 저한테 일임할 거라고요. 나중에 연구소 관리와 신약 개발하는 것까지 전부 다요.”“그렇군요. 저도 적당한 부지나 기성 연구소가 있는지 알아봐 줄게요.”여준재는 자진해서 돕겠다고 했고 고다정도 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여준재의 인맥이나 정보가 자신보다 훨씬 더 넓고 빠르니 말이다. 문득 그녀는 스승님이 배치해 주신 또 다른 연구개발원이 생각나, 잠깐 고민 끝에 말을 꺼냈다.“저, 그게...선생님께서 저 말고도 실험실에 조수 한 명이랑 연구개발원을 한 명 더 구해 주셨거든요.”그녀의 말을 들은 여준재는 마치 텔레파시라도 통한 것처럼 그녀의 말뜻을 단번에 알아챘다.“혹시 그 연구개발원이 저번 해주시 그 사람 맞나요?”“네, 맞아요. 절대 다른 생각 하면 안 돼요.”전에 해주시에서 돌아오고 나서 여준재한테 한바탕 괴롭힘을 당했던 생각이 떠올라, 고다정은 서둘러 해명하느라 바빴다. 누군가의 질투심이 불타올라 또 험하게 시달려 침실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일이 벌어질까 두려웠다.여준재는 자신한테 쌩긋쌩긋 웃으며 살살 비위를 맞추는 그녀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그건 다정 씨가 어떻게 하는지에 달렸죠.”“무조건 잘할게요.”고다정은 또다시 활짝 웃으며 그를 보았다.그 모습에 여준재는 웃으며 말머리를 돌려 물었다.“그 사람 언제 오는데요? 도착하면 제가 호스트로서 단단히 접대를 해드려야겠는데.”말은 그럴싸하게 해도 그가 무슨 꿍꿍인지 훤히 꿰뚫고 있는 고다정은 웃으며 눈을 가늘게 뜨고 여준재를 곁눈질했다.그
”날 믿어준 건 너무 고마운데, 이 연구소는 그래도 다정 씨가 직접 와 보는 게 좋겠어요.”여준재는 고다정이 꼭 현장에 가봐야 한다고 고집했다. 가서 둘러보는 것도 좋은 생각이겠다 싶어 고다정도 동의했고, 그리하여 십 분 뒤에 여준재는 고다정을 데리러 왔다.가는 길에 여준재는 그 연구소에 관해 설명했다.“그 연구소는 사실 박재경 명의로 되어 있는 건물이에요. 그 자식이 평소에는 좀 빈둥빈둥 놀러 다니기만 하는 것 같은데, 사실 계속 뭐라도 성과를 내고 싶어 했거든요. 근데 이상하게도, 태생이 마이너스의 손인지, 걔가 손대는 사업마다 말아먹거든요. 심지어 우리랑 같이 해도, 우린 돈을 벌었는데, 걘 이상하게 손해를 보더라고요.”말끝에 그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고다정도 듣고 매우 놀랐다.“그렇게나 신기해요?”“허허, 네. 재경이는 워낙에 이렇게 신기한 녀석이에요. 이번 연구소만 해도 그래요. 다른 사람들이 돈 버는 걸 보고 그 녀석도 하고 싶어 했는데, 그 녀석 집에서는 이미 걔 속성을 간파한 거죠. 그래서 어차피 말아먹을 돈, 주지 않았어요. 적은 액수도 아니었고요. 그러다 그 자식이 우릴 찾아온 거예요. 자기를 좀 도와 달라고요. 그래서 각자 자금을 내서, 협력하는 방식으로 이 연구소를 운영하기 시작했어요.”여준재는 이 연구소에 깃든 ‘역사’를 털어놓았다. 고다정은 다 듣고 눈을 깜박이며 의문이 풀리지 않아 물었다.“준재 씨랑 친구들이 투자했는데, 어떻게 돼서 이 연구소가 또 망해버렸죠?”“그건 뒷이야기인데, 연구소가 처음 지어졌을 때는 투자한 돈을 날려버리지 않기 위해 우리 셋이 주요 경영을 맡았고, 재경이가 곁에서 거들었어요. 그러다 나중에 연구소가 점점 정상궤도에 들어서고 성과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장기간 관계를 유지하는 거래처도 생겼거든요. 그래서 저희가 재경이를 단련시키려고 그 자식한테 맡기고 점점 손을 놓기 시작했는데, 결국...”결국 어떻게 됐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고다정은 충분히 이해했다. 결과가 잘 됐으면 그녀한테 연구
한 바퀴 둘러본 일행은 연구소 사무실로 향했다.박재경은 여준재와 고다정을 자리에 앉히며 직접 차를 대접했다.“형수님, 여기가 마음에 드시나요?”“마음에 들긴 하는데, 가격은 얼마에요?”고다정은 사무적인 눈빛으로 박재경한테 물으며 문득 뭐가 더 생각이 났는지 한마디 덧붙였다.“이건 비즈니스니까 개인적인 친분은 내려놓고 얘기하는 게 어때요?”이 말에 멍한 얼굴로 바라보다 박재경은 여준재한테 눈길을 돌렸다. 그랬더니 여준재도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날 볼 거 없어. 난 관여하지 말라고 네 형수님이 그랬거든. 너희들이 얘기 나눠.”박재경은 시선을 거두고 마음속으로 고다정에 대한 호감도가 더 상승했다.“형수님 멋지십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성의를 표해야죠. 이 금액만 주세요.”그는 말하고 나서 손가락으로 16을 그렸다.고다정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넌지시 떠보았다.“160억이요?”“160억이라뇨, 여긴 그 정도 안 해요.”박재경은 고다정이 묻는 가격에 깜짝 놀라 얼른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16억이요, 16억. 그 안에 여기 있는 기구들 전부 포함해서요. 준재 형님이 말씀드렸죠? 이건 형수님이 직접 처리해야 한다고요.”“네, 그 얘기는 들었어요.”고다정은 고개를 끄덕이는 동시에 16억이라는 가격에 매우 만족했다. 물론 그녀도 이 가격이라면 박재경이 매우 큰 혜택을 준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성남구에 위치한한 부지가 얼마나 비싼지는 둘째 치고, 이 안에 들어있는 기구들만 해도 10억 이상은 할 것이다.여기까지 생각하자 고다정은 진지하게 말했다.“그 가격도 재경 씨가 이미 매우 손해를 본다는 걸 알아요. 이럽시다, 160억은 제가 내드릴 순 없겠지만, 20억은 가능해요. 이 가격은 어때요?”그녀의 말이 끝나자, 박재경과 여준재는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 고다정이 이렇게 나올 줄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박재경은 다시금 여준재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여준재가 웃으며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이 일은 네 형수 말대로 하
“여긴 왜 왔어요?”고다정은 생각지도 못한 여준재를 보게 되니 의아해하며 물었다.여준재는 손에 든 도시락 통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고다정이 아직 다 검토 못한 서류에 시선을 떨구며 눈살을 찌푸렸다.“아직도 안 끝났어요?”“네, 아직 조금 남았어요. 요즘 회사 기술팀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하려고 하는데, 내가 데이터 같은 건 잘 모르니 천천히 볼 수밖에요.”고다정은 기운 빠진 소리로 말했다.매번 이런 데이터를 검토할 때마다 너무 힘들어 자신이 대체 비즈니스에 적합하기나 한 건지 의문이 들곤 한다. 여준재는 도중에 그녀 회사 일을 넘겨받아도 척척 잘만 해내는데 자신은 늘 버벅대기만 하니깐 말이다. 가끔, 자신의 모든 재능이 오로지 약을 연구하는 데만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여준재는 그녀가 지금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는지 몰랐지만, 그녀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러고 나서 회사 일에 대해 다시 의논을 해보자고요.”그는 책상 위의 서류를 치우고 도시락 속의 음식을 꺼냈다.고다정 역시 배가 고팠고, 눈앞에 있는 자상한 남자에게 빙그레 웃더니 밥을 먹기 시작했다.여준재는 그녀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옆에 있는 서류에 떨어뜨리더니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왜 그래요?”고다정은 그가 뭘 하려는지 의문을 품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의혹에 찬 눈빛을 보며 여준재는 엷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별거 아니에요, 내가 좀 봐주려고요.”그 말에 고다정은 막아서지 않았다. 여준재가 그 서류들을 전부 소파로 가져가는 걸 보고 그녀는 식사 속도를 더 빨리했다.몇 분 안 되어 식사를 마친 그녀는 수저를 내려놓고, 일어나 사뿐사뿐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 여준재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런 것인데, 그녀가 다가가자마자 여준재는 그녀를 발견하고 하던 일을 멈춰 고개를 돌려 물었다.“밥 다 먹었어요?”고다정은 한편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길은 여준재가 결재하고 있는 서류를 주시하며 눈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