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 고다정은 짐을 싼 후 성시원의 친구에게 연락했다.“안녕하세요. 채성휘 씨 맞으시죠?”“맞는데요. 누구시죠?”채성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들려오자, 고다정은 전화에 대고 자기소개를 했다.“아, 저는 성시원 스승님 소개로 한의학과 서양의학의 접목 문제에 도움을 주기로 한 사람인데요. 고다정이라고 합니다.”“고다정 씨였군요. 알고 있습니다. 벌써 오신 건가요?”채성휘가 반가워하며 묻자 고다정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아니요. 내일 출발하려고요. 시간을 확정하려고 연락드렸습니다.”“그렇군요. 괜찮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리시면 저한테 연락 주세요. 제가 픽업해서 직접 연구소로 가면 됩니다.”채성휘가 이튿날 일정을 말하자 고다정은 별문제 없다고 생각되어 도착 시간을 대충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휴대폰을 내려놓자 여준재가 다가와 그녀를 껴안으며 물었다.“뭐래요?”“내일 비행기에서 내린 후 전화 연락하기로 했어요.”고다정이 통화 내용을 알려주었다.여준재는 마음 놓이지 않아 당부했다.“비행기에서 내리면 잊지 말고 나한테 전화해요.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하고. 알았죠?”고다정은 자신이 무슨 일이라도 당할까 봐 걱정하는 남자의 모습이 좀 웃겼지만 마음속은 달콤했다. 그녀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다음 날 아침 식사 후 고다정은 쌍둥이랑 외할머니와 작별 인사를 했다.“엄마, 잘 다녀오세요. 엄마 보고 싶을 거예요.”쌍둥이가 고다정을 향해 고사리손을 흔들었다.고다정은 하나하나 안아준 후 여준재를 따라 차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헤어져야 하는 시각이 되자 여준재는 떨어지기 싫어하며 고다정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그러자 고다정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그만해요. 이러다 비행기를 놓치겠어요.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요.”“매일 전화하는 걸 잊지 말고.”또 한 번 당부하는 여준재, 그런 그에게 고다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빨리 손을 놓으라고 재촉했다.하지만 여준재는 전혀 급하지 않은 듯 고다정을 뚫어지게 바라보
고다정은 채성휘의 말을 듣고 의외의 사실에 매우 기뻤다.스승님은 그녀에게 약초 식별과 의술을 가르쳐주면서도 그녀를 제자로 인정한 적은 없었다.스승님이라고 부르게 된 것도 그녀가 잔꾀를 부려 쌍둥이를 이용해 얻어낸 것이다.스승님이 밖에서 그녀를 제자라고 말하고 다녔다니 너무 뜻밖이다.“그렇군요. 지금 연구 관련 자료는 가지고 있나요? 아니면 구두로 저한테 상황을 얘기해주실래요?”고다정이 본론으로 화제를 이끌었다.이 말에 채성휘도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진지하게 말했다.“연구 자료는 연구소에서 가지고 나올 수 없으니 현재 상황을 구두로 말씀드릴게요.”“그래도 돼요.”고다정이 채성휘에게 계속하라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그러자 채성휘가 자신이 직면한 어려움을 얘기했다.“아까 제가 대학교 다닐 때 성시원 선생님을 만났다고 얘기했잖아요. 사실 그때도 이 과제를 연구하고 있었는데,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미숙하게나마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겼었죠. 그러다 졸업 후 연구소를 세우고 나서야 그때 그 아이디어를 다시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저의 예상대로라면, 이것의 존재는 간암의 병변을 억제할 수 있고 심지어 암세포를 죽이는 능력도 어느 정도 있어요. 하지만 현재 약성 상극의 문제에 직면했고, 수많은 방법을 시도했지만 이 두 가지 약성을 중화할 수 없습니다. 결국 방법이 없어서 선생님께 도움을 청했더니 선생님은 일이 있어서 못 오신다며 고다정 씨를 추천했습니다.”기대에 찬 남자의 눈빛을 보며 고다정은 부담을 백배로 느꼈다.그녀는 이 사람이 자기한테 아주 큰 기대를 걸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채 선생님, 저는 스승님 곁에서 그리 오래 배우지 못했어요. 기껏해야 약품 제조에 재능이 좀 있는 것뿐이니 당신에게 꼭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어요.”“괜찮아요. 먼저 보시고 해결할 수 없으면 그때는 스승님께 여쭤보시면 되죠.”채성휘는 고다정이 이렇게 말할 것이라 예상한 듯 개의치 않으며 손을 내저었다.고다정은 울지도 웃지도 못할 상황이 됐지만 거절하지는 않았
고다정이 뭔가 말하려 할 때, 누군가 불쑥 그녀 앞에 손을 내밀었다.그녀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보니 서은진이 어느새 그녀 앞으로 다가와 조금 전의 공격적인 태도와는 달리 대범하게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 저는 서은진이라고 합니다. 성휘와는 동기이자 협력 파트너입니다. 선생님의 도움으로 성휘가 오랫동안 풀지 못했던 문제가 해결될 수 있길 바랍니다.”“최선을 다하겠습니다.”고다정은 서은진과 악수하며 자기소개를 했다.“저는 고다정이라고 합니다.”서은진이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빼려 할 때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고다정은 그녀를 힘껏 끌어당기더니 그녀의 귓가에 대고 둘만 들을 수 있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서은진 씨, 저를 적대시할 필요 없어요. 저는 약혼자가 있고 아이도 두 명 있어요. 단지 스승님의 부탁으로 도우러 온 것뿐이에요.”서은진에게 자기를 적대시할 필요 없다고 암시한 것이다.이 말을 들은 서은진은 어안이 벙벙해서 멍하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고다정이 그녀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녀를 향해 눈을 깜박거렸다.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서은진은 자신의 속마음을 들켰다는 것을 알고 약간 쑥스러웠지만 시원하게 웃으며 사과했다.“고다정 씨, 조금 전에는 제가 무례를 범했습니다.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그런 거 개의치 않으니 걱정하지 마세요.”고다정이 서은진을 향해 싱긋 웃었다.서은진은 그런 고다정에게 호감이 급상승했다.“개의치 않는다니 다행입니다. 저녁에 퇴근하면 제가 밥 살게요. 이 근처 구경도 시켜 드리고. 참, 이전에 해주시에 와본 적 있으세요?”“아니요, 처음 왔습니다.”고다정이 가볍게 고개를 흔들자 서은진이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문제가 해결되면 저랑 같이 해주시 관광명소를 돌아요.”고다정은 물론 이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날카롭게 맞서던 두 사람이 잠깐 사이에 친구처럼 가까워진 것을 보고 채성휘는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여자들의 우정은 다 이렇게 기묘한 것인가?의문스럽긴 하지만 채성휘는 이런 장면이 반가웠다.
서은진은 연구실에 고다정과 채성휘만 남은 것을 보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이내 펴고 웃으며 물었다.“일이 끝났나요? 아까 고 선생님에게 밥을 사주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키러 왔어요.”“아직 조금...”“저는 아직 못다 본 자료가 있는데, 한 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아니면 채 선생님과 서 선생님이 먼저 식사하러 가셔서 제 밥을 포장해 오실래요?”고다정은 채성휘의 말을 중간에서 가로채고는 서은진을 향해 눈을 깜박거렸다.고다정이 일부러 기회를 만들어주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서은진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죠. 성휘야, 우리 먼저 식사하러 가자. 그래야 고 선생님 밥도 빨리 포장해오지.”채성휘는 두 여자의 잔동작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서은진과 같이 식사하기 싫었다.그는 서은진이 자신에게 딴생각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같은 자기는 마음이 아니므로 서은진이 오해할 만한 행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조금 남은 자료는 내일 오전에 보셔도 돼요. 그러고 보니, 고 선생님이 오늘 오자마자 저를 따라 연구소에 오셔서 제대로 쉬지도 못했네요. 제가 이렇게 부려먹은 걸 스승님이 아시면 아마 저를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채 선생님, 웃기지 마세요. 스승님은 저를 그렇게 아끼지 않아요. 그리고 오늘 일은 오늘 끝내야죠. 하루빨리 채 선생님을 도와 이 난제를 해결하고 싶어요. 그러면 채 선생님이 연구 개발하는 약품이 좀 더 빨리 세상에 나와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겠죠.”고다정이 또다시 완곡하게 거절했다.채성휘는 그녀의 말을 반박할 수 없어 결국 서은진을 따라나섰다.그들이 나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여준재에게서 영상통화가 왔다.“엄마, 뭐 하세요?”통화가 연결되자 쌍둥이가 카메라 앞에 가까이 다가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들여다보았다.“엄마는 자료를 보고 있어. 학교 다녀왔어?”“네. 아빠가 데리러 왔었어요.”쌍둥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다정 쪽의 상황을 물었다.“엄마, 거기서 잘 지내세요? 동료들은 잘해주나요?
넓은 연구실에서 고다정과 채성휘는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이어 나갔다.언제부터인지 두 사람은 상대방의 이론에 문제가 있다고 서로 핏대를 세우기 시작했다.“녹명엽은 한의학에서 확실히 신체 활력을 증진하는 효능이 있지만 이것을 세포 활성을 높이는 약과 융합한다고 변종이 되는 것은 아니죠. 한의학과 서양의학이라는 전혀 다른 두 가지 영역의 약재가 어떻게 융합되겠어요? 그러니 약성이 상극할 수밖에 없죠.”고다정은 마지막에 참지 못하고 투덜댔다.사실 그녀는 채성휘의 이 연구가 그야말로 말도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속으로만 생각하고 감히 입 밖에 내지는 못했다.이 남자가 그녀의 스승님에게서 깨우침을 얻어 이 연구를 시작했다고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그녀가 이 연구를 부정하면 스승님의 일부 관점도 부정하는 것인데, 스승님이 그걸 알게 되면 그녀는 끝장이다.채성휘는 그녀의 속마음을 모르지만 자기가 하는 연구를 좋지 않게 보자 안색이 한순간 안 좋았지만 이내 인상을 펴고 허허 웃었다.“믿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성시원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 저도 당신과 같은 생각이었어요. 한의학과 서양의학은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진 의학 분야라서 이 둘을 결합하는 것은 세기의 난제라고. 그러나 성시원 선생님을 만난 후 이전에 생각의 폭이 너무 좁았다고 느꼈어요.”이 말을 들은 고다정은 의외이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다.“채 선생님, 저의 스승님이 어떤 말씀을 해줘서 생각이 바뀌게 됐는지 말해주실 수 있을까요?”“그러죠.”채성휘는 숨김없이 자기가 들었던 내용을 다시 말해주었다.역시 생각이 확 트이게 하는 말들이었다. 심지어 고다정도 조금 전의 생각이 편협했다고 느꼈다. 그녀는 냉정한 눈빛으로 깊은 사색에 잠겼다.이를 본 채성휘는 그녀를 방해하지 않고 옆에서 공식을 계산했다.잠시 후, 끝내 제정신이 든 고다정이 채성휘에게 말했다.“대략적인 방향이 생겼는데, 오늘은 너무 늦어서 내일 검증해야겠어요.”“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바래다 드릴게요.”채성휘가 동의한다는
이튿날 이른 아침, 고다정은 알람 소리에 깼다.그녀가 알람을 끄고 보니 어제저녁의 영상통화가 계속되고 있었다.영상 속에서 준수한 얼굴의 남자가 달게 자고 있다.매일 보는 얼굴인데도 고다정은 넋을 잃고 들여다보았다.하지만 그녀는 연구소 일이 걱정되어 이내 정신을 차리고 영상 속의 여준재를 향해 낮은 소리로 인사했다.“좋은 아침.”그러고는 이쪽에서 움직이는 소리에 여준재가 깰까 봐 영상통화를 끊었다.세수와 양치를 끝낸 후, 호텔 레스토랑에 조식을 먹으러 가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채성휘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채 선생님, 안녕하세요.”“고 선생님, 안녕하세요. 일어나셨나요?”채성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들려왔다.고다정이 웃으며 말했다.“일어났어요. 지금 조식 먹으러 가려고 해요. 무슨 일이 있으세요?”이 말을 들은 채성휘는 잠깐 침묵하더니 싱긋 웃었다.“제가 어젯밤에 했던 말을 잊으셨나 봐요.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먼저 식사하세요. 제가 호텔 아래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고다정은 정말 잊고 있었던지라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음식을 포장해서 가면서 먹을게요.”그녀는 몇 마디 치렛말을 한 후 전화를 끊었다.몇 분 후, 포장한 조식을 들고 호텔 입구로 나온 고다정은 길옆에 서 있는 채성휘를 발견하고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듯 다가가서 깍듯이 인사했다.“채 선생님.”이때 채성휘도 고다정을 발견하고 젠틀하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고다정은 감사 인사를 하고 차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가는 길에 채성휘는 고다정이 심심할까 봐 그러는지 먼저 화제를 찾아 말을 걸었다.“고 선생님, 오늘은 어떻게 할 예정입니까?”“제가 어제 몇 가지 공식을 예상해 봤는데, 오늘 실행해 보려고요. 제 예상이 검증되면 두 가지 약재의 약성 융합에 70% 정도의 확신이 있습니다.”업무 얘기가 나오니 고다정도 진지해졌다.오히려 고다정이 이렇게 빨리 실마리를 찾을 것을 생각지 못한 채성휘가 약간 놀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이렇게 빨리 해
서은진은 가슴이 꽉 막히며 안색이 변했다.그런데도 채성휘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고 선생님이 두 가지 약성을 융합하는 방법을 찾았어. 가서 보고 배우려고. 너도 시간 있으면 같이 가. 어쩌면 우리의 연구에 색다른 깨우침을 줄지도 몰라.”그는 말이 끝나기 바쁘게 서은진의 표정이야 어떻든 홱 돌아서 가버렸다.그 다급한 모습은 모르면 사람이 봤으면 애인을 만나러 가는 줄로 알 정도였다.서은진은 그런 그를 보며 가슴이 막히다 못해 아팠다.그녀는 입술을 깨물더니 결국 그를 뒤따라갔다.고다정의 능력은 그렇다 치고, 그녀는 고다정의 어떤 매력이 채성휘를 끌었는지 보고 싶었다.이런 걸 모르는 고다정은 실험실에 들어선 후 채성휘의 조수를 찾아가 실험대를 요구한 후 실험을 시작했다.그녀는 일단 한 가지 일을 시작하면 몸과 마음을 전부 거기에 쏟아붓는다.그래서 그녀는 채성휘와 서은진이 실험실에 들어온 것도, 그녀가 실험하는 모습을 진지하게 지켜보는 것도 몰랐다.고다정은 정신을 집중해 실험기구를 다루면서 두 가지 약재에서 약액을 추출한 후 시험관에 넣고 또 무슨 원료인지 모를 투명한 액체 몇 방울을 첨가했다.그 몇 방울의 액체가 들어간 후 원래 분리되어 있던 약액이 점차 융합되기 시작했다.이 광경을 본 채성휘는 놀라고 기쁜 표정을 지으며 간절한 눈빛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옆에서 이를 지켜보는 서은진도 마음속이 매우 복잡했다.고다정이 채성휘가 오랫동안 풀지 못한 문제를 하루 만에 해결할 정도로 연구 분야에서 대단한 능력을 갖추고 있으리라 생각지 못했다.그러니 채성휘가 고다정을 높이 평가할 만도 하다.그녀가 잡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옆에서 의문 가득한 말소리가 들려왔다.“왜 실패했지?”고다정이 미간을 찌푸린 채 시험관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이때 그녀의 귓가에 채성휘의 목소리가 들여왔다.“조금 전 조제한 그 투명 액체 비율이 낮아서 융합에 실패한 것이 아닐까요?”이 소리에 고다정은 그제야 채성휘와 서은진이 언제 왔는지 자기 옆에 있
“스승님, 제가 문제에 부딪혔는데 좀 이해가 되지 않아 스승님이랑 논의하고 싶어요.”고다정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전화한 이유를 밝혔다.성시원은 잠깐 침묵하더니 말했다.“나 시간이 별로 없어. 무슨 문제인지 간단히 말해봐.”“네.”고다정은 실험에서 부딪힌 문제를 털어놓았고, 마지막에는 말하면서 미간을 찌푸렸다.“사실 린분수가 잘못된 발상이 아닐까 해서 다른 액체로 바꿔봤는데 다 린분수보다 못했어요.”“린분수는 약성을 중화할 수 있지만 그 자체도 약성이 있기 때문에 린분수로 중화할 생각이면 그 약성은 억제하되 기능은 유지하는 방법을 찾아야 해.”성시원은 고다정의 의문을 풀어준 후 그녀가 캐묻기 전에 말을 이었다.“내가 이전에 너한테 준 수첩에 린분수 업그레이드 처리에 관한 정보가 기록돼 있을 거야. 그걸 참고해. 그럼 나 일 봐야 해서 전화 끊을게.”그러고 나서 정말 전화를 끊었다.고다정은 다소 어이없어하며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스승님이 알려준 정보를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났다.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힐까 봐 스승님의 수첩을 가져와서 다행이다.그 후 반나절 동안 고다정은 실험실에서 단위 환산을 하면서 스승님의 수첩만 연구했다.저녁 무렵 채성휘가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몰랐을 것이다.“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군요.”고다정이 손에 쥐고 있던 수첩을 내려놓고 민망해하며 채성휘를 쳐다보았다.그러고 보니 그녀는 오전에 일을 좀 한 후 오후에는 줄곧 책만 보았다.이는 마치 직원이 사장에게 업무 진도가 어떻게 됐냐고 채근받는 느낌이다.채성휘는 고다정의 속마음을 모른 채 책상 위에 놓인, 공식이 가득 적혀 있는 원고지에 시선을 집중하고 물었다.“연구는 어떻게 됐어요?”“새로운 방향이 생겼는데, 오늘은 너무 늦었고 내일 실험해 봐야 결과를 알 수 있어요.”고다정이 사실대로 진전 상황을 얘기했다.채성휘는 그녀가 이렇게 빨리 새로운 방향을 찾을 것을 생각지 못했는지 매우 기뻐했다.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