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에 고다정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차갑게 원경하를 바라보며 물었다.“원경하 씨, 저한테 뭐 볼일이라도 있을까요?”“아니요, 그냥 와봤어요. 아, 근데 다정 언니는 여기 왜 있어요?”원경하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그러고는 고다정의 대답하기도 전에 뭔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내 정신 좀 봐요. 준재 오빠 때문에 다정 언니도 여기 있겠네요. 그러고 보니 저 요 며칠 준재 오빠 자주 만났었는데. 매번 제가 가는 곳마다 준재 오빠가 있더라고요. 그때 봤을 때 언니는 없어서 저는 준재 오빠가 언니는 데리고 안 나오는 줄 알았어요.”그 말에는 누가 봐도 다른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고다정은 비꼬는 듯한 표정으로 입가를 살짝 올렸다.고다정은 전까지 여준재가 왜 그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하지만 오늘에야 알게 되었다. 여준재가 오늘 굳이 자신을 여기에 데리고 오려 했던 이유 말이다.“원경하 씨는 인연이라는 뜻을 보통사람들과 살짝 다르게 알고 있는 것 같은데요?”고다정은 그녀의 말을 맞받아쳤다.“서로 기대하면서 만나는 걸 인연이라 해요. 얽히고 매달리는 건 악연이라고 하고요!”원경하는 고다정의 갑작스러운 얼굴 변화에 놀란 듯 주눅이 든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다정 언니,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저는 진짜 우연히 준재 오빠와 만나게 된 거라고요.”“원경하 씨, 더 이상 연기 그만하시죠?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고다정은 원경하가 분명히 여준재를 꼬시려고 온갖 궁리를 하는 게 보이는데, 여기서 무고한 척하며 친한 척하는 게 정말 역겨웠다.그 말을 들은 원경하는 잠시 얼굴이 굳어졌다.하지만 곧, 그녀는 정상으로 돌아왔고, 계속해서 억울한 듯 말했다.“다정 언니, 저는 언니가 뭔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원경하는 일부러 약간 큰 소리로 말해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눈치챈 고다정은 눈살을 찌푸리며 원경하를 바라보았다.그녀는 방금 원경하가
“난 여대표가 한 여자한테 저렇게 부드럽게 대하는 거 처음 보네.”“나도 여대표의 저런 온화한 모습은 처음 봤어. 전에 우리랑 말씀하실 때는 차가운 데다 심지어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었는데 말이야. 진짜 이런 날이 올 줄 생각지도 못했어.”“근데 고다정 씨가 어느 가문 출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투나 행동이 단아한 걸 보면 부잣집 가문 출신임이 틀림없어.”고다정의 신분에 대한 모든 사람의 추측은 끊임이 없었다.많은 사람 사이에서 고다정에 대한 칭찬을 듣고 있던 원경하는 얼굴이 일그러졌다.‘고다정이 뭔 부잣집 가문이야. 집에서도 쫓겨난 주제에.’…그다음 이틀 동안도 고다정은 원경하 때문에 매일 여준재와 함께 출근하고 식사 자리도 참석했다.그렇게 점차 운산시 상업계에서는 여준재에게 엄청 사랑하는 약혼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원경하도 자연스레 그 소식을 접하게 됐고, 속으로 다급해지기 시작했다.이렇게 가다가는 그녀가 실행하려고 하는 계획이 점점 더 어려워질 게 뻔하니 말이다.여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마음속으로 계획을 하나 세웠다.그날 저녁, 원경하는 고다정이 사는 곳에 찾아갔지만, 경비원에 의해 제지당했다.“죄송합니다. 사모님한테서 아무런 연락도 받은 적이 없는지라 들여보낼 수 없습니다. 만약 사모님과 친구 사이라면, 사모님께 전화라도 해주세요.”“…”그 말에 원경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왜냐하면, 그녀는 고다정에게 전화를 할 생각이 없으니 말이다.그녀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달려왔다.그 차는 평소 고다정과 여준재가 두 아이를 데리러 갈 때 쓰는 전용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하여 그녀는 생각지도 않고 바로 길가로 달려갔고,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차가 멈춰 섰다. 경호원과 운전기사는 모두 어리둥절했다.그들은 원경하가 갑자기 뛰어들 줄은 전혀 몰랐으니 말이다.원경하는 차가 멈추는 것을 보고 뒷좌석으로 달려가 창문을 두드렸다.곧 차창이 내려지며 두 아이의 정교한 얼굴이 드러났다.“아
그 말을 들은 두 아이는 미안한 듯 혀를 내밀었다.그 둘은 엄마의 친구를 괜히 무시하고 지나친 것 같아 재빨리 보충했다.“집사 할아버지, 여기는 엄마 친구예요.”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원경하는 재빨리 미소지어 보이며 공손히 이 집사에게 인사했다.“안녕하세요. 저는 진성 원씨 가문에 원경하라고 합니다. 고다정 씨 찾으러 왔어요.”원경하는 내면의 악의를 잘 감추고 예의 바른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노련한 이 집사 앞에서 그녀의 이런 꼼수는 보잘것없었다.그리고 이 집사님을 가장 화나게 한 것은 원경하가 작은 도련님과 작은 아가씨를 이용해 빌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만약 진짜로 사모님의 친구라면, 오늘 사모님은 도련님을 따라 나갈 리가 없을 텐데. 지금 거짓말하고 있네?’하지만 이 집사는 그녀를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고, 원경하가 대체 뭔 짓을 하려는지 보고 싶었다.그는 이 여자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보려고 합니다.“그렇군요, 들어오세요. 원경하 씨.”이 집사는 들어오라는 손짓을 보이며 들어오게 했다.원경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신발을 바꿔 신고 뒤따라 들어갔다.두 아이는 위층에 올라가 책가방을 놓은 뒤, 아래층에 있는 이쁜 아줌마가 생각나 얼른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곧, 고다정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우리 아기들, 뭔 일이야?”“엄마, 웬 이쁜 아줌마가 엄마 찾아왔어. 지금 보러 올래?”하윤이가 귀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 말을 들은 고다정은 다소 의아했다.“어떤 예쁜 아줌마?”“진성 원 씨 집안의 원경하래요.”하준이가 옆에서 보충하며 말했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전화기 너머에서는 잠시 짧은 침묵이 흘렀고, 곧 고다정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알겠어. 엄마 지금 갈게. 엄마가 가기 전까지 그 사람이랑 단둘이 같이 있으면 안 돼. 알겠지?”그 이유는 원경하가 대체 자신의 집에 가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도 하고, 그 악랄한 수단으로 아이들에게 피해라도 끼칠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두 아이도 그제야
고다정은 두 아이의 말을 들은 뒤, 차가운 눈으로 원경하 쪽을 바라봤다.원경하도 자연스레 고다정의 시선을 느낀 건지 무해하게 웃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다정 언니 왔어요?”그 말을 들은 고다정은 바로 답하지 않고, 두 아이를 향해 낮은 소리로 말했다.“일단 올라가서 숙제해. 여기는 엄마가 알아서 할게.”“싫어요. 저희는 여기서 엄마 지킬래요.”하준이는 고다정의 다리를 잡으며 그녀의 말을 거부했다.그 옆에 하윤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귀여운 목소리로 말했다.“맞아, 우리는 엄마를 보호해야 해.”그 말을 들은 고다정은 순식간에 가슴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하지만 여전히 두 아이더러 위층으로 올라가라고 고집했다.왜냐하면, 이따가 원경하와 다투기라도 하면, 두 아이가 괜히 좋지 않은 소리를 들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결국, 두 아이는 하는 수 없이 이 집사님과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다.거실에는 고다정과 원경하 둘만 남았다.고다정은 원경하의 앞에 다가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오늘 여긴 뭐하러 온 거죠?”“뭐 하러 온 거 아니고 그냥 다정 언니 찾으러 왔는데요? 근데 언니랑 준재 오빠가 외출했을지 누가 알았겠어요.”원경하는 친한 언니 동생 사이인 척 웃으며 답했다.하지만 고다정은 그런 수법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게다가 그녀의 인내심은 원경하의 거듭된 매달림에 따라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여기 지금 우리 둘 빼고는 아무도 없어요. 원경하 씨 그 연기 계속하실 건가요?”그 말을 듣는 순간 원경하의 얼굴은 급격히 굳어졌다.그녀는 죽일 듯이 고다정을 쳐다보며 마음속으로는 억눌렀던 화가 활활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특히 그녀는 몇 번이나 고다정에게 접근했지만, 그녀에 의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간파당했다는 생각에 더는 마음속의 질투를 참을 수 없었다.“그래요, 말 잘했어요. 지금 우리 둘뿐이니까, 그쪽과 연기할 필요 없겠네요.”원경하는 그제야 자신의 본모습을 보이며 소파에서 일어나 한걸음 고다정에게 다
고다정의 말을 들은 원경하는 깜짝 놀랐다.“아이가 준재 오빠 거라고? 말도 안 돼.”그녀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고다정을 바라보았다.고다정은 차갑게 웃어 보이며 답했다.“원경하, 모든 사람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 그리고 계속 연기할 거면 그냥 내 눈앞에서 꺼져. 당신 인성이나 가치관을 여준재 씨가 좋아하겠어? 그쪽이야말로 주제 파악 좀 하지?”그 말을 들은 원경하는 너무도 화가 난 나머지 얼굴이 일그러지며 극도로 무섭게 변했다.“이 년이 진짜. 나 오늘 널 죽여버릴 거야!”그녀는 미친 듯이 고다정을 향해갔다.고다정은 원경하가 감히 자신에게 손찌검할 줄은 전혀 몰랐고, 게다가 자신의 집이었기 때문에 무방비 상태로 있었다. 그녀는 머리카락이 잡힌 채 뺨을 몇 대 맞았다.주변의 도우미들은 모두 놀라 그 자리에 멍해졌다.2층에서도 그 광경을 목격한 이 집사는 깜짝 놀라서 도우미들을 향해 급히 호통을 쳤다.“다들 얼른 가서 사모님 돕지 않고 뭐해요?”그 말을 들은 뒤에야 도우미들은 정신을 차리고 원경하를 끌어내려 다가갔다.그러나 이미 미쳐있는 원경하는 끌어내기가 쉽지 않았고, 게다가 고다정도 신경 써야 했기 때문에 더욱 소심해졌다.고다정 또한 자신을 구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원경하가 머리를 단단히 잡고 있어 행동 또한 매우 제한적이었다.반면 원경하는 고다정이 자신의 손에 붙잡혀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았다.그녀는 고다정의 아름다운 이목구비를 원망스럽게 쳐다보더니 갑자기 옆 탁자 위에 놓인 과일들을 바라보며 악랄한 생각이 떠올랐다.“고다정, 한번 보자고. 네 얼굴이 망가져도 여준재가 과연 널 좋아할지!”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 테이블 위의 과도를 집어 들고 음침한 눈으로 고다정을 바라봤다.그 모습을 본 도우미들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고다정 또한 다소 겁을 먹었고 소리높여 그녀를 꾸짖었다.“원경하 씨, 당신 미쳤어요? 이렇게 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기는 해요?”“난 결과
고다정이 원경하의 동작을 봤을 때는 이미 피할 시간이 없었다. 그렇게 원경하에게 정면으로 걷어차인 그녀는 어딘가에 부딪힌 것 같더니 뒤통수에서 심한 통증이 전해지고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기절해 버렸다.아래층으로 뛰어 내려오다 이 광경을 목격한 쌍둥이는 대경실색하며 소리 질렀다.“엄마.”“나쁜 놈, 감히 우리 엄마를 때려? 물어 죽일 거야.”화난 하준이가 눈이 빨개져서 원경하한테 달려들더니 그녀의 손을 힘껏 깨물었다.원경하는 아파서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손을 흔들어 하준이를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아무리 힘을 써도 하준이는 그녀의 손목을 물고 놓지 않았다.“아비 없는 자식, 이거 놔!”너무 아파서 얼굴까지 일그러진 원경하는 하준이가 놓아주지 않자 화를 내며 다시 한번 발을 들어 하준이를 걷어찼다.귀가한 여준재가 이 광경을 보고 눈을 부릅뜨며 울부짖었다.“원경하, 네가 감히!”이 소리에 물린 자국을 살피던 원경하가 놀라서 흠칫했다.그녀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여준재가 빠른 걸음으로 하준이한테 다가가 품에 안는 것이 보였다.“어디 다치지 않았어?”여준재는 하준이가 어디 다친 데 없는지 이리저리 살폈고 하준이는 그를 보자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다.“아빠, 저 사람이 제 배를 찼어요. 배가 너무 아파요.”이때 하윤이도 달려오더니 엉엉 울었다.“아빠, 왜 이제야 돌아오세요? 저 나쁜 여자가 엄마를 괴롭혔어요. 엄마 얼굴을 긁어 상처를 내고 엄마를 발로 찼어요.”이 말을 들은 여준재의 몸에서 하늘을 찌를 듯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그는 하준이를 안고 주변을 살폈지만 고다정이 보이지 않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긴장하며 물었다.“엄마는?”“엄마는 저기 있어요.”하윤이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다 고다정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한 여준재는 동공이 순간적으로 움츠러들었다.“다정 씨!”여준재는 급히 뛰어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고다정을 껴안고 긴장하며 이름을 불렀다.그러나 고다정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아
의사의 말을 들은 여준재는 가슴이 서늘해져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알겠습니다. 주의하겠습니다.”의사는 머리를 끄덕이더니 간호사에게 고다정을 병실로 옮기라고 지시했다.한편, 원빈 노인과 원진혁은 경찰의 연락을 받고 급히 경찰서에 갔다.“경찰관님, 저희는 원경하의 가족입니다. 제 사촌 여동생이 무슨 일로 체포됐는지 여쭤봐도 될까요?”원진혁은 원빈 노인의 지시에 따라 경찰관 한 명을 불러 문의했다.경찰은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당신 여동생은 상해죄를 저질렀습니다.”“상해죄라니요?”원진혁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원빈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안색이 어두워진 원빈 노인이 이쪽으로 다가왔다.하지만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옆자리에서 콧방귀를 뀌는 소리에 이어 비꼬는 소리가 들려왔다.“왜 그렇게 놀라요? 당신의 착한 여동생이 우리 작은 도련님과 아가씨를 속이고 우리 작은 사모님을 폭행했어요. 우리 작은 사모님은 아직도 병원에서 응급 처치 중이에요.”이집사는 말을 마치고 옆 의자에서 일어서더니 좋지 않은 시선으로 원빈 노인과 원진혁을 노려보았다.원빈 노인과 원진혁에게는 낯선 얼굴이었다.“누구신지?”원진혁이 공손하게 묻자 이집사는 차갑게 대답했다.“저는 YS그룹 저택에서 일하는 집사입니다.”이 말을 들은 원빈 노인과 원진혁은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지금 이 순간 뭘 더 물어볼 필요가 있겠는가?그들이 원경하가 온순해졌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원경하는 그들 몰래 또 밖에서 말썽을 피운 게 틀림없다.이집사도 그들의 기색이 변하는 것을 눈치챘지만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저희 도련님이 이번 일은 끝까지 추궁할 것이라고 두 분께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이 말을 남기고 이집사는 자리를 떴다.원빈 노인과 원진혁은 원경하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경하가 따라왔을 때 끝까지 고집해서 돌려보내야 했어.”원빈 노인이 후회하며 이렇게 말하자 원진혁은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면회실을 나온 원빈 노인은 대기실에서 원진혁을 찾아냈다. 경찰을 통해 이미 상황을 파악한 원진혁이 원빈 노인 곁으로 다가와 묻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보석은 불가능해요. 여씨 집안에서 끝까지 추궁하겠다고 했대요.”이 말을 들은 원빈 노인은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조금 뒤 분부했다.“고 선생이 어느 병원에 있는지 알아봐.”원경하가 말한 것처럼 그는 원씨 집안에서 수감자가 나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원씨 집안 명성에 큰 타격을 주는 것은 물론 회사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그래서 그는 염치 불고하고 여준재와 고다정을 찾아가 사정할 수밖에 없다.원진혁은 할아버지의 속마음을 대충 알아챘지만 여 대표가 사람을 놓아줄 가능성이 적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고 선생이 실질적 상해를 입지 않았던 지난번과 다르다.물론 그는 이 말을 입 밖에 내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서 담당자에게 연락했다.…병원 VIP 병실에서 고다정은 의식이 없는 채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있었고 그녀의 이마에는 흰색 붕대가 감겨 있고 얼굴에도 거즈가 붙어있었다.여준재는 안쓰러운 눈빛을 하고 곁을 지켰고 쌍둥이도 병상 양쪽에 엎드려 눈도 깜박하지 않고 엄마를 지켰다.“아빠, 엄마는 언제 깨어날까요?”“내일쯤 깨어날 거야.”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이렇게 대답하자 쌍둥이는 축 늘어졌다.이를 보던 여준재는 고다정을 신경 쓰느라 의사에게 하준이를 보이지 않은 것이 생각나서 급히 일어나 하준에게 다가갔다.“아빠?”갑자기 누군가에게 안긴 하준이는 무의식적으로 옆 사람을 껴안았고 자기를 안은 것이 아빠인 것을 발견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여준재는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아까 그 여자한테 배를 차였다고 했잖아. 아빠가 여태 너를 신경 쓰지 못했어. 지금 아빠랑 같이 의사 선생님한테 가보자.”“나도 갈래요.”하윤이도 오빠가 걱정돼 즉시 따라나섰고 여준재는 막지 않았다. 조금 뒤, 세 사람은 의사 사무실에 도착했다. 의사는 그들이 찾아온 이유를 듣고 나서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