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준재는 원씨네 부자 사이에 일어난 일을 모른 채 줄곧 고다정의 곁을 지켰다.밝은 불빛 아래 침대에 조용히 누워있는 고다정은 얼굴이 종잇장같이 창백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어두운 눈빛의 여준재는 그녀의 귓가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그렇게 꼬박 하룻밤을 새웠다.…이튿날 날이 희미하게 밝아오자 혼수상태였던 고다정이 천천히 깨어났다. 그녀는 머리 위의 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었다. 그때 그녀의 귓가에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깼어요? 어디 불편한 데 없어요?”여준재가 물으면서 가까이 다가와 관심을 표했다.정신이 든 고다정은 엉망인 그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준재 씨?”고다정이 놀랄 만도 한 게, 여준재의 몰골이 정말 너무 초라했다.그의 비싼 수제 고급 양복은 소금에 절인 채소처럼 구겨져 있었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던 머리카락도 아무렇게나 이마에 늘어져 있었다. 심지어 매끄럽던 아래턱에 수염도 가득 올라왔고 잘생긴 얼굴에서 감출 수 없는 피곤함이 느껴졌다.너무 기뻐서인지 여준재는 고다정의 이상한 눈길을 알아채지 못하고 그녀의 손을 잡으며 흥분해서 말했다.“나예요. 몸은 좀 어때요? 신수 어르신을 불러올까요?”“아니요, 저 괜찮아요.”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의사인 그녀는 검사하지 않아도 자기 몸 상태를 알 수 있었다.말하던 그녀가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자 여준재는 이내 걱정스레 물었다.“왜 그래요?”“목이 아파요.”고다정이 한 글자씩 겨우 말했다.그제야 여준재는 고다정의 목소리가 좀 잠겨있는 것을 발견하고 잠시 걱정에 잠겼다가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신수 어르신이 당신이 깨어났을 때 목이 아픈 게 정상이라고 했어요. 목에 상처가 나면서 성대를 다쳐서 그래요.”이 말을 들은 고다정은 어젯밤 일이 생각나서 고개를 살짝 끄덕였지만 안색은 어두워졌다.“원경하는요?”그녀는 어젯밤 2층에서 떨어진 후 의식이 불분명해져 그 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여준재는 그녀의 얼굴에서 무슨 생각을 하
몇 분 뒤, 신수 노인이 급히 달려왔다.문 앞에 서 있는 원진혁을 보고 신수 노인은 이미 마음속으로 이 사람이 뭐 하러 왔는지 짐작하였다. 그는 원진혁한테 눈길도 주지 않고, 좋은 안색은커녕 그냥 무시하며 방으로 들어갔다.들어가자마자 여준재가 고다정한테 한창 물리적 해열을 해주고 있는 걸 보고 어떤 상황인지 알아챘다.“다정이가 열이 난 지 얼마나 됐냐?”“새벽에 깨어날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었는데, 아마 그 후 잠이 들면서부터 열이 난 것 같아요. 한두 시간 정도 됐을 거예요.”여준재가 무거운 표정으로 답했다.신수 노인은 알겠다고 끄덕이고는 고다정의 맥을 짚어 보았다.얼마 후, 그는 손목을 놓으며 긴장을 풀었다.“걱정 하지 마. 다정이는 괜찮아. 너무 놀라서 열이 난 거니까 별 나쁜 일은 아니야. 내가 침 몇 대 놓으면 오후엔 나을 거야.”“그럼 어르신께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여준재는 너무 감격하여 말했다.신수 노인은 머리를 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을 놓기 시작했다.몇 분 지난 후, 열이 나 정신이 흐리멍덩하던 고다정이 다시 깨어났다. 목 안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너무 아프고 말랐다.“물……”그녀는 겨우 새어 나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여준재가 그걸 보고 얼른 물을 가져다 고다정을 부축해 일으키고 입 쪽에 물을 갖다댔다.물을 조금 마시니 정신이 차츰 돌아오기 시작한 고다정은 자신이 아프다는 걸 알고, 옆에 있는 신수 노인을 향해 감사를 드렸다.“고마워요, 어르신. 또 폐를 끼쳤네요.”“그런 말 마라. 내가 지금 한참 후회 중이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뭐라 해도 원빈 그 늙은이한테 병 봐준다고 오지 않았을 텐데.”신수 노인은 말하면서 분통이 터져 화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다정은 그저 듣기만 하고 가만히 있었는데, 귓가에 여준재의 걱정스러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몸은 좀 어때요?”“괜찮아요. 걱정하지 말아요.”목 상태가 좋지 않은 탓에 그녀의 원래 청아했던 목소리가 허스키해지고 말도 더듬더듬 겨우 뱉어냈다.
원빈 노인은 미안해하며 고다정을 바라봤다.고다정은 그의 말을 듣고 눈길을 아래로 향해 원경하를 내려 보았다.고다정과 눈빛이 마주친 원경하는 입술을 꽉 깨문 채, 뻘겋게 부어오른 얼굴에는 알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보나 마나 원경하는 사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걸 알아차린 고다정은 개의치 않고 차갑게 말했다.“원빈 어르신,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다행히 제가 죽을 팔자는 아니라서 별일 안 생겼으니까요.”그녀의 비꼬는 말투에 원빈 노인은 체면에 금이 간 나머지 급기야 아들한테 화를 버럭 냈다.“네 잘난 딸이 뭘 했는지 좀 보거라!”말하는 동안에도 그는 성에 차지 않아 지팡이로 원호열을 세게 두드렸다.원호열은 두들겨 맞아 아프면서도 감히 피하지 못했다.원여사는 그런 남편이 안쓰러웠고, 딸이 아직도 눈치 없이 구는데 화가 나 원경하한테 호통쳤다.“너는 애가 왜 이렇게 철이 없니? 고 선생님이 널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런 짓까지 할 수 있어? 나랑 네 아버지가 너를 너무 오냐오냐하며 잘못 키웠구나. 네가 오늘 고 선생님께 사과를 안 하면, 이젠 널 멀리 보내버리고, 널 낳지 않은 셈 칠 거야!”“네 엄마 말이 맞다. 네가 잘못을 모르면 우리 집엔 더 이상 너같이 악랄한 사람을 용납 못해. 넌 감히 네 할아버지 약재에 장난질을 하고, 대놓고 고 선생님을 죽이려 했으니, 어느 날 나와 네 어머니가 널 기분 나쁘게 했다간 우리까지 죽이려 들 거 아니냐!”원호열도 곁에서 무거운 목소리로 말하였다.원경하는 이 말에 저절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에요, 제가 그럴 리 없어요.”그러나 그녀의 말을 원씨 집안사람들은 더 이상 믿지 않았다.원호열은 목소리에 더 무게를 가해 재차 다그쳤다.“마지막으로 묻겠다. 사과할 거냐 안 할 거냐?”원경하는 부친의 단호한 눈빛을 보면서 그가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그녀가 사과를 안 하면 그들은 정말 그녀를 보내버리고 다시는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결국, 그들의 압력에 못 이겨 원경하는
사실상, 신수 노인의 말대로 원경하는 사당에 끌려온 후 사방의 음산한 배치와 조상들의 신주를 보고 놀라서 미칠 것 같았다.그녀는 몸부림을 치며 문밖으로 뛰쳐나가려고 했으나, 밖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들이 그녀를 막아섰다.“아가씨, 어르신이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꿇어 계시라고요.”“난 여기 있기 싫어. 날 데리고 나가줘. 할아버지한테 갈 거야. 내가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다고.”원경하는 울며 애원했으나, 경호원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원경하는 사당에 갇혔지만, 그녀에 관한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원빈 노인은 원씨 부부를 따로 서재에 불러들였다.서재에서 원씨 부부는 공손한 표정과 함께 옅은 불안감을 안고 원빈 노인의 맞은편에 앉았다.그들의 표정은 빠짐없이 원빈 노인의 눈에 들어왔다.그는 눈꺼풀을 늘어뜨리고 그들한테 얘기했다.“너희들을 오라고 한 건, 경하에 대한 조치를 의논하고 싶어서다.”이 말을 듣자 원씨 내외는 얼굴이 굳어졌다. 그들은 일찌감치 아버지가 원경하를 쉽게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했다.원여사가 참지 못하고 먼저 물었다.“아버님 생각은 어떠신지요?”원빈 노인은 그녀를 힐끗 보았다. 그녀의 생각을 모를 리 없는 원빈 노인은 직설적으로 말을 꺼냈다.“그 아이는 이미 삐뚤어질 대로 삐뚤어졌어. 난 더는 그 애를 원씨 집안에 둘 생각이 없다!”“경하를 쫓아내시게요?”원씨 부부는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원빈 노인을 쳐다보았다.원빈 노인은 부인하지 않고 침울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내가 쫓는 게 아니라, 원씨 집안에서 더 이상 그 애를 용납할 수 없다는 거야. 너희들 보기에 내가 그 애를 사당에 가서 꿇게 했다고, 여대표가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갈 것 같으냐?”이 말이 나오자 부부는 침묵에 빠졌다.맞는 말이다. 사당에서 무릎 꿇는 정도 갖고는 고다정이 받은 상처와는 비교도 안 되니, 여준재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이때 원빈 노인은 또 입을 열었다.“그것뿐만 아니라, 너희들이 그때 방안에서 했던 얘기도 내가 곰
원진혁의 말을 듣고 나서 여준재의 안색은 좀 누그러들었다.그는 원진혁을 깊은 눈빛으로 쳐다보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원씨 집안에서 상황 판단이 너무 어리숙하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그렇게 벌하기로 했으면 저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겠지만, 만일 원씨 집안이 겉과 속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되는 날엔, 제가 직접 손 쓸 테니 그리 아세요.”말끝에 그는 예의를 차리지 않고 경고장을 날렸다..원진혁도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히 그래야죠.”그리고 그는 할아버지가 말한 기타 약속 사항을 그들에게 마저 전달하고 스스로 떠나갔다.그가 떠나자, 방안에는 고다정과 여준재만 남겨졌다.고다정은 감탄하며 말했다.“원래 병 치료만 해주려고 왔는데 이 많은 일이 벌어질 줄 몰랐어요. 시간도 많이 지체되고.”품속에서 근심 어린 표정을 한 그녀를 보고 여준재는 안쓰러운 듯 그녀의 코끝을 살짝 건드리고는 사랑에 겨운 말투로 그녀한테 말했다.“그러니까 이제부터 신수 어르신 따라서 아무 데나 다니면 안 돼요. 그 노인네가 제일 문제에요. 앞으로 병이 중한 환자도 가족들한테 보내오라고 해요. 다정 씨가 애들이랑 안 떨어지게.”“어르신을 그렇게 얘기했다가 나중에 알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요?”고다정은 여준재의 말에 웃음이 났고, 동시에 그가 방금 말한 데 대해서도 약간의 생각이 생겨났지만, 구체적인 건 돌아가서 신수 노인과 상의한 후에 결정하기로 했다.……눈 깜짝할 사이에 이틀이 지나고, 그동안 원경하가 없으니 원씨 집안은 그전보다 훨씬 조용하고 화목한 분위기였다.사흘째 되던 날, 고다정은 거울로 자신의 희미해진 목 자국을 보고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상처 자국이 너무 눈에 띄어 외할머니와 두 아이가 보고 걱정하는 것이 두렵지만 않았더라면, 그녀는 사고 다음 날부터 돌아가고 싶었다.이런 생각 하며 욕실 문을 밀고 나가자, 여준재가 이미 차려입고 창가 옆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하고 있는 걸 본 그녀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준
돌아가는 길에 신수 노인은 원빈 노인이 준 상자를 열었다. 그랬더니 며칠 전 그들이 서재에서 봤던 의서 몇 권이 안에 들어있었다.“원빈 그 늙은이가 꽤 사리가 밝구나, 이걸로 사죄를 하다니. 다정이 네가 가져가서 잘 연구해 봐. 모르는 게 있으면 나한테 가져와서 같이 연구해 보자.”그는 말하면서 나무상자를 고다정의 품에 안겨주었다.원빈 노인이 이렇게 귀중한 선물을 할 거라 생각 못한 고다정은 좀 의아했지만, 원씨 저택에서 있었던 일련의 일을 생각하고는 맘 편히 받기로 했다.“그럼 제가 가져가서 연구해 보고 모르는 게 있으면 어르신을 찾아가겠습니다.”그날 저녁, 일행은 운산으로 돌아왔다.고다정과 여준재는 신수 노인을 먼저 바래다 드리고, 산꼭대기에 있는 빌라로 돌아왔다.두 사람이 차에서 금방 내리자마자 두 줄기의 검은 그림자가 빠르게 다가와 그들 품속을 파고들었다.“엄마, 끝내 돌아오셨네요.”두 아이는 고다정과 여준재를 각각 껴안고 흥분하다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강 할머니는 곁에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며 웃음꽃이 잔뜩 핀 얼굴로 말했다.“돌아왔구나. 어서 집으로 들어가자.”고다정과 여준재는 고개를 끄덕이고 각자 아이 한 명씩 손을 잡고 거실로 들어갔다.구남준도 캐리어를 들고 그들의 뒤를 따라 거실로 들어가서, 한 가족처럼 화기애애한 광경을 보고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너무 잘됐어. 대표님의 사랑 씨앗이 드디어 결실을 보는구나.’“대표님, 캐리어는 대표님 방으로 가져갈까요, 아니면 작은 사모님 방으로 가져갈까요?"구남준이 여준재한테 묻는 말에, 고다정의 가족들은 모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두 아이는 어리둥절한 채 멍하니 물었다.“남준 아저씨, 삼촌 짐을 왜 엄마 방에 가져다 놓아요?”강 할머니도 의아한 눈길로 고다정을 쳐다보다가 그녀와 여준재 사이를 왔다 갔다 훑더니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혹시 너희 만나는 거야?”그랬더니 두 아이가 놀라서 소리 질렀다. “뭐라고요? 아저씨랑 엄마랑 만난다고요?”세 사람이 보
밤 11시가 돼가도록 노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부자 3인방을 보고 고다정은 잠자리에 들라 재촉했다.“자, 그만. 내일 학교 가야 돼. 자야지 이제?”“알겠어요.”쌍둥이는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이윽고 하윤이가 못 참고 물었다.“엄마, 오늘 밤 우리 엄마랑 아빠랑 같이 자면 안 돼요?”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잠깐 멈칫했다가 거절하지 않았다.원씨 저택에서도 여준재와 쭉 같이 한방에서 지냈는데 이제 와서 내외하는 척 구는 건 좀 우스워 보였다. 게다가 두 아이도 함께 있는데 설마 여준재가 뭔 짓을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그렇게 그들은 같이 방 안으로 들어가 간단히 씻고 잘 준비를 하였다.고다정은 두 아이를 중간에 눕히려고 하는데, 두 아이는 오히려 그녀와 여준재를 침대 중간으로 밀면서 말했다.“엄마랑 아빠가 만나는 사이면 같이 자야 해요.”고다정은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두 아이를 가볍게 꾸짖으며 여준재를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시선을 여기저기 피하며 어쩔 줄 몰라 하였다.“떠들지 말고 잠이나 자.”그녀가 부끄러워하는 것을 여준재는 다 알아채고, 웃으며 고다정을 품에 안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애들의 마음이니 그렇게 할까요,우리?”고다정은 그 말에 머릿속이 잠깐 정지된 것 같았다가, 금세 얼굴을 붉히고 수줍어서 몸을 비틀며 여준재를 나무랐다.“애들이 보는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엄마, 걱정하지 말아요. 우린 아무것도 못 봤어요.”두 아이는 고다정이 부끄러워하는 줄 알고 장난스럽게 눈을 가렸다.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지고, 여준재는 그런 그녀를 보고 저도 모르게 그녀의 볼에 뽀뽀하고는 미소를 지었다.“알았어요. 애들도 못봤다는데 그만 삐치고 자요.”고다정도 더는 고민하지 않고 잠자리에 누워 애들과 같이 포근한 밤잠을 이루었다.일어나보니 이미 이튿날이었다.아침을 먹은 후 고다정은 두 아이를 학교로 데려다주고 여준재는 회사로 출근했다.원씨 저택에 있을 때 짬짬이 시간 내서 회사 일을 처리했지만 그래도 밀린 업
전화를 끊은 후, 고다정의 얼굴은 여전히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다 친구와의 약속을 생각하고 서둘러 여준재한테 전화를 걸었다.“왜, 무슨 일이야?”여준재의 목소리가 핸드폰 저편에서 들려오는데 어찌나 부드러운지, 고다정은 귀가 살살 녹아드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남자의 목소리가 어떻게 이토록 듣기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친구와 통화했던 내용을 얘기했다.“은미가 우리 둘이 사귀는 걸 알게 됐어요. 걔랑 예전 대학 시절 때 약속한 게 있거든요, 남자친구가 생기면 서로한테 밥 사기로요. 혹시 저녁에 시간 돼요?”“그런 거면 시간 없어도 내야죠.”여준재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하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났는지 씽긋 웃었다.“다정 씨 친구분이 예전에 많이 도와줬는데, 밥을 무조건 사야겠네요.”이 말을 들은 고다정은 여준재가 한창 그전에 은미가 중간에서 다리를 놔준 일을 떠올리고 있다는 걸 알고 웃음이 나왔다.“은미와 같은 생각을 했네요. 걔가 준재 씨한테서 사례를 받아야겠대요.”고다정의 말에 여준재는 일리가 있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확실히 은미 씨한테 사례를 해야겠어요.”그것과 관련해 더 할 말을 못 찾은 고다정은 다른 얘기를 꺼냈다.“그럼 준재 씨 퇴근하면 제가 그리로 찾아갈게요.”“네. 그때 가면 구 비서를 픽업 보낼게요.”여준재도 머리를 끄덕이고 몇 마디 더 나누고는 전화를 끊었다.……그날 저녁, 고다정은 YS그룹 본사 빌딩에 도착했으나 들어가지 않고 입구 밖 차 안에서 기다렸다.몇 분 뒤, 여준재가 검은색 정장 차림으로 나오는 걸 보았는데, 기세가 당당하고 귀티가 촤르르 흘러넘치는 그를 보니 눈을 뗄 수 없었다.여준재는 곧 그녀한테 다가와 차 문을 열고 들어왔다.“오래 기다렸어요?”“아니요. 저도 온 지 얼마 안 됐어요.”고다정은 그를 향해 달콤한 미소를 날리며 말했다.“어서 가요. 은미랑 애들이 이미 우릴 기다리고 있어요.”여준재는 고개를 끄덕이고 기사한테 출발하라고 지시했다.얼마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