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 노인이 방으로 들어왔을 때 고다정은 이미 진맥을 하고 있었다. 신수 노인은 방안으로 들어서며 물었다.“어떠냐? 뭐 좀 알아냈느냐?”Comment by 만든 이: 진단해내다어색한 표현말소리를 들은 원가 노인과 원진혁은 신수 노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고다정은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고 수심에 가득 찬 표정으로 노인의 맥박에만 신경을 쏟았다. 고다정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신수 노인도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Comment by 만든 이: 입을 닫았다더는 열지 않았다따페이 잘 맞춰주세요막 입을 떼려 하는 원가 노인에게도 조용히 하라고 사인을 보냈다.Comment by 만든 이: 에게도, 한테도 적절히 잘 섞어서 사용해야 합니다. 상황마다 어울리는 것으로요이렇게 세 사람은 숨을 죽이고 고다정의 진단 결과만을 기다렸다.불빛 아래 고다정의 얼굴은 수심으로 가득 찼다. 진중하고 깊은 생각에 잠긴 그녀에게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우라가 흐르는 듯싶었다.원진혁은 고다정의 옆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약간의 설렘이 그를 감쌌다. 3, 4분쯤 흘렀을 때 고다정은 진맥을 멈추고 원가 노인의 팔목에서 손을 뗐다.“어떠냐?”신수 노인이 급히 물었다.원가 노인과 원진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다급함이 표정에 다 드러났다.Comment by 만든 이: 어색한 문장. 수정했습니다고다정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Comment by 만든 이: 진맥을 마치고 처음 입을 연 거니까 ‘말을 이었다’는 적절하지 않습니다“오는 길에 말씀하셨던 것보다 더 심각하네요. 간의 염증이 이미 곪기 시작했고 벌써 폐까지 영향을 줘서 상황이 조금은 골치 아프게 됐어요.”Comment by 만든 이: 맞춤법Comment by 만든 이: 조사 누락“고칠 수는 있어요?”원진혁이 급히 물었다.고다정도 솔직히 대답했다.“고칠 수 있긴 하죠. 하지만 3일 내내 치료해야 해요. 침구와 한약 처방을 함께 진행해 어르신의 간에 있는 곪은 물을 체외로 배출해야
핸드폰을 받아 든 하윤이가 급히 물었다.“엄마, 분명히 하루만 지나면 온다고 해놓고 왜 갑자기 며칠이나 더 있어야 하는 거야? 하윤이가 엄마 보고 싶으면 어떡해?”“할아버지가 생각보다 더 아프셔서 며칠 더 있어야 해. 엄마가 보고 싶으면 영상통화하면 되지.”고다정의 자상한 목소리가 핸드폰에서 흘러나왔다.하윤이는 속상했지만 더 떼쓰지 않고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여준재는 고다정에게 할 말이 있었지만 하윤이가 너무 신나 하는 것 같아 조용히 기다렸다.하준이가 여준재의 표정을 보고는 뭔가 눈치챘는지 동생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어른스레 말했다.“됐어, 하윤아. 이미 얘기할 만큼 했잖아? 이제 아저씨 바꿔줘. 엄마는 아저씨가 보고 싶으실 거야.”“...”‘아니, 하나도 안 보고 싶어.’고다정이 속으로 부정했다.그러나 고다정은 여준재가 이미 핸드폰을 들고 있음을 눈치 챘다. 다만 두 사람 모두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침묵이 흘렀다.핸드폰 너머로 이따금 들려오는 숨소리가 아니었다면 전화가 끊겼다고 오해할 수도 있을 적막이었다.장시간 침묵을 유지하던 고다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저... 여 대표님, 별일 없으시면 이만 끊습니다.”“누가 별일 없대요?”여준재의 특유의 저음이 들려왔다.‘볼 일 있는 사람이 말도 안 하고... 이 사람 괜찮은 거 맞아?’“대표님, 무슨 일이실까요?”“몸 잘 챙겨요. 누가 다정 씨한테 해코지라도 하면 나한테 얘기하고요.”여준재가 짧게 당부했다.짧은 한마디였지만 심장이 울렁거렸다. 그녀는 어색한 말투로 우물거렸다.“내가 뭐 애도 아니고.”여준재는 대답을 듣고는 피식 웃었다.“뭐 아무튼 몸 잘 챙겨요. 집안일은 걱정하지 말고요. 애들이랑 할머니는 나한테 맡겨요.”“알겠어요.”부자연스럽게 대답한 고다정은 누가 찾는다며 거짓말을 하고는 급히 전화를 끊었다.핸드폰을 내려놓자마자 정말로 밖에서 고다정을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가의 하인이었다.“선생님, 도련님이 내려와서 식사하시
신수 노인은 생각지도 못한 고다정의 말에 그만 물 마시다 사레 들릴 뻔했다.그는 무의식적으로 고다정 쪽을 보았는데 여전히 태연한 얼굴에 아직 본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원 씨 집안의 사람들도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 먼저 눈치챈 건 원 씨네 부부였는데 그들의 낯빛도 그리 밝지는 않았다.원경하가 참지 못하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표출하려는 순간 옆에 있던 원진혁이 눈빛으로 경고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참아야 했다.원진혁은 조금은 진정된 원경하의 모습에 고다정쪽으로 고개를 돌려 살짝 웃으며 말했다.“고다정 씨도 참, 유머가 넘치네요.”“아니에요.”고다정은 무심하게 대답했다.원진혁도 개의치 않고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부딪치는 시늉을 하며 다시 인사를 건넸다. “고다정 씨, 그럼 남은 며칠 동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다만 제가 치료해 드리는 동안만큼은 불필요한 사람들이 와서 저를 방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어차피 저도 성격이 만만치 않다는 걸 알고 계실 테니까요.”고다정은 어떤 기억이 떠오른 듯 그에게 말했다.원진혁도 그녀의 말뜻을 알아채고는 순간 뜨끔했는지 고개를 돌려 고다정을 빤히 보았다.그는 고다정이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사촌 여동생에 대한 불쾌함을 토로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다정은 여태껏 만나왔던 여자들과는 확실히 달랐다.오히려 이는 원진혁으로 하여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흥미를 더욱 돋게 했다.반대로 원경하는 이런 상황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하필 사촌오빠의 경고까지 받아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고다정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신수 노인은 고다정이 말로 전혀 지지 않는 모습에 그저 바라만 보다가 원 씨네 내외와 나누던 대화를 이어갔다.원 여사도 모르는 체 했다.그들이 보기에도 고다정은 가만히 있는데 계속 본인의 딸이 시비를 걸고 있었기 때문이다.이렇게 한 끼 식사 자리가 원만하게 끝났다.나이 많은 신수 노인은 하루 종일 차를 탄 데다가 중간에 사소한 일까지
고다정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원경하의 태도가 너무 어이가 없었다.왜냐하면 고다정은 여태껏 본인과 원경하는 아무런 원한도 없는 사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원 씨 집안에 들어오기 전부터 원경하와는 아예 안면조차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그런 원경하가 왜 자꾸 본인한테 시비를 걸어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어쩌면 고다정은 여자들간의 기싸움이 단지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본인보다 이쁘거나 모든 면에서 뛰어나도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원경하 씨가 오해했네요. 아침에 우연히 마주쳤을 뿐이에요.”고다정은 차분히 답했다. 곧 원 여사도 들으라고 한 말이기도 했다.원진혁도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어서 아까부터 이미 이 상황을 알아채고 원경하를 보면서 차갑게 말했다. “내가 먼저 같이 운동하자고 했어. 어제 급히 와서 주변이 익숙하지도 않을 것 같고. 할아버지께서도 고다정 씨를 잘 부탁한다고 했거든.”“그렇구나. 그럼 빨리 씻고 와. 곧 아침 먹을 시간이니까.”원 여사는 친절하게 말을 했으나 이미 원경하의 속임수에 본인이 넘어갔다는 걸 눈치챈 것 같았다.고다정과 원진혁이 위층으로 올라가자마자 원 여사의 미소가 점점 사라지더니 고개를 돌려 원경하를 쏘아보았다.“나는 왜 네가 이렇게까지 고다정 씨를 싫어하는지 모르겠어. 저 사람은 신수 노인이 직접 데리고 온 주치의잖아. 적당히 해, 여기서 더 화나게 하면 엄마가 오히려 너를 해칠 수 있으니까.”원경하는 그녀의 경고에 입을 악물고 끓어오르는 화를 참았다.원래 원경하는 본인의 이간질로 원 여사 고다정을 미워하도록 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도끼로 제 발등을 찍은 격이 되니 더욱 괘씸했다.한참 동안 아무 말도 못하는 딸을 보고 원 여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한번 물었다. “내가 방금 한 말 들었어?”“들었어요.”원경하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원 여사도 원경하를 슬쩍 한번 보고는 여전히 화가 나 있는 상태라는 걸 알고 있기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여기서 더 말해 봤자
옆의 원경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 들을수록 거슬렸다.그녀는 일부러 비아냥댔다.“그러니까 오빠, 이렇게 급하게 감사드리려 하지 말라고요. 할아버지 아프 신지도 이렇게나 오래됐는데 아무도 고치질 못했어요. 그런데 고 아가씨가 오자마자 해결되다니, 전 못 믿어요. 들어가서 제 눈으로 직접 할아버질 봐야겠어요.”그녀는 말을 끝내기 무섭게 고다정을 힘껏 밀치고는 원 씨 내외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상황을 파악한 원진혁의 미간이 한껏 찌푸려졌다. 깊은 눈에는 짙은 불쾌함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는 멋쩍게 웃으며 고다정에게 연신 사과했다.“죄송해요, 제 사촌 동생이 어릴 적부터 오냐오냐 자라서 버릇이 없습니다.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괜찮습니다, 그쪽도 할아버질 보러 가세요.”고다정은 차분하게 답했다.원진혁은 가볍게 목례하고는 몸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가자 자극적인 악취가 코를 찔렀다.원 씨 내외는 침대머리에 서있었다. 사실 그들도 이 냄새를 맡았으나 어디서 나오는악취인지 알았기에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하지만 원경하는 방에 들어와 냄새를 맡은 뒤 참기 어려워했다.“이거 무슨 냄새야, 왜 이렇게 독해?”그녀는 급히 손으로 코를 틀어막으며 말을 툭 내뱉었다.원 씨 내외와 원진혁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원호열은 굳은 표정으로 나무랐다.“못 참겠으면 나가. 아무도 여기 있으라고 강요하지 않아.”제 부모와 사촌 오빠의 불만 가득한 얼굴을 힐끔거리던 원경하는 이 말을 듣자 곧바로 얌전해졌다. 그러나 전보다 더 쇠약해진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원 노인을 보자 꼬투리를 잡은 듯 몸을 홱 돌려 고다정을 질책하기 시작했다.“이봐, 당신이 말한 치료가 이런 거였어? 할아버지 상태가 전보다 더 나빠 보이는데, 우리가 의료 지식도 모르고 쉽게 속을 줄 알고 아무렇게나 치료한 거 아니야? 우리 할아버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당신 가만두지 않을 거야!”“...”고다정은 어이없게 원경하를 바라보았다. 이 여자의 머릿속
원경하는 이토록 엄숙한 모습의 부모를 본 적 없기에 조금 무서워졌다. 그녀는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꼿꼿이 서서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지만 본인의 잘못은 없다고 여겼기에 사과는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당연히 원 씨 부부도 그녀의 생각을 읽어냈다.원호열은 또다시 굳어진 표정으로 딸을 협박했다.“사과하지 않으면 사람을 시켜 널 가둬놓을 거야. 잘못을 인정해야 널 풀어줄 거다!”“마침 잘 됐다, 이 기회에 잘 반성하도록 해. 명문가 딸이 입에 욕을 달고 살다니, 나 참.”원 여사가 옆에서 장단을 맞췄다.이 말을 들은 원경하는 주먹을 꾹 쥐며 화를 삼켰다. 감금되고 싶진 않았기에 일단 숙이고 들어가야만 했다.“죄송해요. 방금은 할아버지께 신경이 쏠려있어서 말이 거칠게 나갔어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고다정은 내키지 않았지만 억지로 사과하는 여자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요 며칠 이런 말을 정말 많이 들었네요. 오늘 하신 말만큼은 아가씨가 꼭 지켜줬으면 좋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저도 가만있진 않을 거예요.”말을 마친 고다정은 더 이상 원경하를 상대하지 않고 원 씨 부부에게 원 노인의 상태를 설명했다.“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할아버님의 간에 고름이 차 있고, 염증도 심했어요. 치료를 통해 간의 고름을 폐로 옮겼고, 구토를 자극해 고름을 토해내시게 했습니다. 몸도 마음도 힘든 치료지만 나중에 회복하실 수 있으세요. 지금 할아버님 몸 상태가 안 좋아 보이지만, 오늘 고비만 넘기고 내일 검사에서 고름이 확인되지 않는다면 호전되신 겁니다.”“그렇군요. 그럼 앞으로도 저희 할아버지 잘 부탁드립니다.”원진혁은 고다정을 바라보며 옅게 웃었다.그 사이 고용인 한 명이 쟁반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쟁반 위에는 찻잔 세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고용인은 방 중앙으로 걸어와서는 공손하게 말했다.“도련님, 말씀하신 인삼차와 할아버님의 탕약을 가져왔습니다.”“인삼차는 고 아가씨와 신수 노인께 드리고, 할아버지의 탕약은 내게 줘. 내가 할아버질 보살필게.”원진
“괜찮아요. 오늘 처음으로 치료받은 거라 효과는 내일이 돼야 나타날 거예요.”고다정은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이쪽에 상황을 솔직하게 말했다.고다정이 말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여준재가 신수 노인에게 직접 물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이렇게 두 사람은 이것저것 한참 동안 담소를 나누었다.내내 불편했던 마음도 여준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한참 지나서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먼저 들려왔고 이따금 신수 노인의 목소리도 들려왔다.“다정아, 나 들어간다.”말하는 사이에 신수 노인은 이미 방문을 밀고 들어왔다.고다정은 들어오는 신수 노인의 모습을 보고 급하게 전화에 대고 말했다.“신수 어르신께서 오셨어요. 아마 할 얘기가 있을지도 몰라요, 저 먼저 끊을게요.”여준재가 미처 답을 하기도 전에 고다정은 말을 마치자마자 끊어버렸다.신수 노인은 고다정의 움직임을 보고 눈을 깜빡이며 웃었다.“준재 그놈이랑 통화한 것이냐?”고다정은 휴대 전화를 꼭 쥐고 입술을 오므린 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화제를 돌릴 겸 입을 열었다.“저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세요?”“별 건 아니고 나랑 같이 원빈 어르신 보러 갔으면 해서 왔다. 그리고 오후에 치료는 어떻게 할 거야?”신수 노인은 이곳으로 온 목적을 밝혔다.고다정은 그의 말을 듣고 찬성을 표시했다.“네, 마침 보러 갈 때도 됐어요. 그리고 치료는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몇 분 지나서 두 사람은 원빈 노인이 있는 방으로 왔다.방 안으로 들어와 보니 고다정은 원진혁을 보게 되었다.“의사 선생님, 신수 어르신, 두 분 오셨어요.”원진혁은 두 사람을 보고 다정하게 웃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나서 고다정은 곧 진찰에 들어갔다.원진혁은 진지한 고다정의 모습이 무척이나 매혹적이라 차마 눈을 뗄 수가 없었다.잠시 후, 고다정은 진찰을 마치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별다른 이상 없이 괜찮아요. 염증도 통제되고 간에 다른 이상도 생기지 않았어요. 저녁에 약 드시고
고다정의 차가운 모습을 보면서 원진혁은 갈수록 흥미가 짙어졌다.원진혁은 승낙이라도 하듯이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있는 한, 절대 다정 씨에게 무례하게 대하지 않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원진혁은 고다정을 위해 차 문을 열어주었다.고다정은 시종일관으로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렇게 세 사람은 차에 올라 진성시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로 달려갔다.갑작스럽게 나타난 원경하가 있어서인지 차 안의 분위기는 무겁기 짝이 없었다.다들 가는 내내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20여 분이 지나고 나서 한 비즈니스타운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리자마자 원경하는 지체없이 여성복 브랜드 매장으로 뛰어갔다.“안녕하세요, 고객님. 안 그래도 마침 이번 시즌 새로운 디자인이 도착해서 연락드리려고 했어요.”매장의 점원은 원경하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순간 웃음을 장착하고 열정적으로 마중을 나갔다.원경하는 이 매장의 단골인 것이 분명하다.반면, 고다정은 이런 옷들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였다.그래서 원경하의 곁을 따라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둘러보았다.원진혁은 이러한 모습을 보고 웃으며 물었다.“다정 씨도 한 번 골라보세요.”“아니요. 저는 필요 없어요.”고다정은 고개를 저으며 완곡하게 거절했다.바로 이때, 원경하는 실크 원피스 한 장을 들고 다가와 다정하게 입을 열었다.“다정 씨에게 어울릴 것 같아서 가져왔어요. 어디 한 번 입어보세요.”말하면서 원경하는 고다정의 의사도 듣지 않고 옷을 막무가내로 쑤셔 넣었다.고다정은 즉시 눈살을 찌푸리며 원경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또 무슨 꿍꿍이를 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원진혁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사촌 여동생의 행동이 너무 이상하므로 이러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하필이면 옆에 있던 점원은 세 사람 사이의 미묘한 심리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고다정의 외모와 옷 스타일을 위아래로 관찰하더니 알랑거리기 시작했다.“역시 고객님은 안목이 높아요. 이 드레스는 아마 손님 분위기에 딱 맞을 겁니다. 한 번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