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남준을 보더니 진현준은 씩 웃었다.“그 집 도련님은 깨셨나?”“네. 일어나셨습니다.”구남준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며 현준이 병실에 들어오게 한편으로 비켜섰다. 그리고는 문밖으로 나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병실안에서 진현준은 여준재 침상 옆으로 다가가서 여기저기 살피더니 물었다.“오늘 컨디션은 어때?”“괜찮아졌어.”여준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잇달아 그는 옆에 누워있는 고다정을 향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였다.“다정 씨는 언제 깰 수 있어?”“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가능하게 하루, 아니면 이틀 될 수도 있고. 요즘 많이 힘들었을 거야. 아픈 몸으로 네 병시중도 해야 하고. 하루 이틀 동안 자는 것도 정상이야.”진현준이 설명했다. 그리고 흥미로운 듯 그 둘을 엇갈아 보고서는 놀림조로 말했다.“너 이 자식, 언제 결혼을 한 거야? 나한테 알리지도 않고. 네 비서가 널 여기로 데리고 오지 않았으면 너한테 그렇게 큰 애가 있는지도 몰랐잖아!”여준재는 현준을 힐끗 보더니 한없이 부드럽고 따사한 눈빛으로 옆 병상을 향했다.“나중에 결혼하게 되면 꼭 알려줄게.”“알겠어. 그럼 좋은 소식 기다릴게.”이 친구가 끝내 임자를 만났구나, 하는 생각에 진현준은 내심 놀랍기도 기쁘기도 하였지만,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갑자기 그는 자기가 병실로 찾아온 목적이 생각나 부끄러운 기색으로 손바닥을 슬슬 비비며 말했다.“저기, 준재야. 오랜 친구 사이에 부탁 하나 하고 싶은데, 들어줄 거지?”“무슨 부탁?”여준재는 바로 응하지 않고 무슨 일인지 확인부터 했다.“나 혹시 네 여자 친구한테서 침술을 좀 전수받을수 있을까? 너 그거 알아? 네 여자 친구가 침놓는 기술이 얼마나 대단한지? 널 치료할 때 말이야, 마취도 안 하고 흘러나오는 피를 금방 멎게 하더라니까? 그것뿐만이 아니야. 나도 속수무책인 네 몸 안에 독을 침술로 빼냈어. 어때, 넌 듣기만 해도 신기하지?”진현준이 사실대로 얘기를 털어놓는데, 막바지에 그는 아이같이 흥분되어 어쩔 줄 몰라 하
이러한 생각 끝에 여준재는 지시했다.“그럴 필요 없어. 사람 시켜서 그 여자 귀국시켜.”“네. 알겠습니다.”경호원은 명을 받고 나갔다.한편. 임초연은 별장으로 금방 돌아오자마자 현관에 있는 자신의 짐 캐리어를 발견하고 낯빛이 변해버렸다.이때, 장 집사도 임초연을 보고 얼른 다가왔다.“돌아오셨네요, 임초연 아가씨. 우리 도련님이 방금 전화하셔서 임초연 아가씨를 귀국시키라고 하셨습니다. 차량과 항공편은 이미 준비해 놓았습니다, 지금 바로 공항으로 출발하시면 됩니다.”“귀국이라고요?”임초연은 갑자기 들은 귀국 소리에 어리둥절했으나, 이내 얼굴을 내리깔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저는 돌아가겠다 한 적 없어요.”장 집사는 사무적인 태도로 그녀에게 말했다.“도련님 뜻이니, 초연 아가씨께서 저를 난처하게 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강초연의 안색은 더 시퍼레졌다. 입술을 오므리고 잠시 생각한 후 그녀는 여준재에게 전화하겠다고 하고는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곧 연결되었다.“준재 씨, 장 집사가 그러는데 준재 씨가 절 귀국시키라고 했다면서요? 왜요?”“임초연 씨는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제 집에서 지낸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임초연 씨나 저한테나 안 좋지 않겠어요?”여준재의 냉담하고 거리를 두는 차가운 목소리가 전화기 저쪽 편에서 흘러나왔다.고다정도 미혼인데, 그 여자는 여기 살아도 괜찮고?임초연은 이 말을 듣고 비웃음이 저절로 났지만 참고 말하지 않았다. 여준재한테서 자신은 고다정과는 완전히 차별된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을 분명 알기 때문에 괜한 말로 이 남자의 싫증을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그럼, 호텔에 가 있을게요. 돌려보내지만 마요. 준재 씨가 아직 채 낫지도 않았는데, 이대로 돌아가면 걱정된단 말이에요.”임초연은 점점 애교가 섞인 말투로 애원하며 여준재의 마음을 녹이려고 애썼다.아쉽게도 이 남자는 고다정을 제외한 다른 여자한테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저의 몸 상태는 임초연 씨랑 아무 상관 없습니다. 내 이름 걸고 아
음식을 먹고 난 후 고다정은 몸이 한결 나아짐을 느꼈다. 한층 밝아진 모습을 본 여준재는 걱정이 묻은 목소리로 물었다.“지금은 좀 어때요?”“많이 괜찮아졌어요.”고다정은 말하면서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다정은 여준재 침대 위에 놓인 서류를 보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이렇게 늦었는데 아직도 서류를 보고 있었어요? 진선생님이 말하지 않았어요? 대표님 몸이 해독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휴식이 필요하다고요.”잔뜩 못마땅한 다정의 얼굴을 보자 순간 여준재의 마음은 햇살을 맞은 듯 따뜻해지고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져갔다. “급한 서류들은 다 처리했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제 몸은 제가 잘 챙기고 있어요.”그 말을 듣자, 고다정의 걱정 가득했던 얼굴이 살짝 풀어졌다. 이때 갑자기 여준재가 화제를 돌렸다. 그윽한 눈동자와 가라앉은 목소리가 여다정으로 하여금 꼼짝없이 이 남자의 다음에 흘러나올 목소리를 기다리게 했다. “당신이 나를 구했다고 들었는데.”“혼자 한 거 아니에요. 진선생님이 많이 도와줬어요.”고다정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 여준재의 짙은 눈동자가 부드럽게 반짝였다. “어쨌든 당신이 살린 건 맞으니까. 제가 어떻게 보답해 줬으면 좋겠어요?”생각지도 못한 말을 듣고 잠시 멈춰있던 고다정은 미련 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원래 보답받으려고 했던 일도 아니었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보답하실 필요 없어요.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잊었어요? 제가 당신 주치의잖아요. 그리고 저도 평소에 여대표님한테 도움 많이 받기도 했고요.”“그거랑 그거랑 같아요? 제가 도운 건 사소한 거지만 여선생님은 제 생명의 은인인데요.”고집스레 다정을 쳐다보는 여준재의 눈빛이 장난기가 섞여 반짝였지만, 고다정은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고다정의 머리에 설마 ‘내 몸은 당신 거야’ 뭐 이런 황당한 소리를 하는 건 아니겠지라는 생각이 들던 찰나 여준재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목숨을 살려준 생명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원준의 말에 임초연의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초연은 알고 있었다. 임씨 집안과 원씨 집안이 손을 잡거나 혹은 다른 어떤 집안이 더 모여서 같이 YS그룹을 대적한다 해도 결과는 같을 것이다. 이미 백 년 가까이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YS그룹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위치에 있었고 국내외 유명 인사들과의 인맥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동안 YS그룹을 넘본 사람은 많았지만 결국 그들 모두 지금은 이 바닥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원준아, 내가 보기에 너 취한 것 같아. 지금까지 넌 계속 여준재 손안에서 놀아났잖아. 너 따위가 여준재를 무너뜨리고 YS그룹을 망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꿈이나 깨.”임초연은 냉소한 웃음을 지으며 원준이 대답도 하기 전에 다음 말을 이어갔다. “죽고 싶으면 너 혼자 죽어, 나까지 끌어들이지 말고.”말을 마치고 임초연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잠시 생각하던 초연은 바로 여준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아쉽게 연결되지는 못했다. 더욱 화가 난 초연은 싱경질적으로 전화를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여준재, 너한테 난 이렇게나 싫은 존재인 거야?”사실은 원준과의 대화 내용을 여준재한테 알려줄 생각이었다. 그럼 준재가 자신한테 조금이라도 고마움을 느껴 자신을 한 번 더 바라봐줄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받지 않는 전화기를 내려다보며 마음을 고쳐먹었다. 여준재쪽의 상황이 어떻든 자신이 나서서 도와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한편 이런 사실을 모르는 여준재는 고다정과 진현준의 도움아래 점점 체력을 회복하여 이제 조금씩 침대에서 내려와 걸을 수있게 되였다. 심해영 마음속 돌덩이가 이제야 내려간 것 같았다. 병원에는 여준재를 보러온 쌍둥이들이 있었다. 옆에 서 있는 심해영에게 여준재가 말을 했다. “저 이제 괜찮아요. 내일 사람 불러 모셔다드릴게요.”“왜, 나 있는 게 불편하니?”심해영의 한올한올 정교하게 그려진 눈썹이 못마땅한 듯 꿈틀거렸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쌍둥이들이 할머니를 도와 말을 꺼
문을 열고 들어오자 고다정을 본 진현준의 눈이 반짝였다. “형수님, 어제 저더러 돌아가서 혈 자리에 관한 책을 보라고 하셨잖아요. 제가 인터넷에서 혈 자리 관련 서적을 찾아보았는데 모르는 게 많더라고요. 죄송하지만 형수님이 저 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말은 정중하게 했지만 주머니에서 노트와 볼펜을 꺼내 질문을 시작하는 진현준의 행동에서 거절은 거절한다는 뉘앙스를 풍겨왔다. 고다정은 보면서 머리가 아파졌지만 학구열에 불타서 쳐다보는 진현준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영향혈과 공최혈 두 가지 혈 자리는 코피를 멈추게 하는 제일 좋은 혈 자리라고 하는데 공최혈은 코랑 거리가 그렇게 먼데 어떻게 코피에 관여할 수 있는 거죠? 과학적 근거가 뭐예요?”“그리고 이 극천혈은 진짜 나이트로글리세린을 복용했을 때와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나요?”“그리고 이 인영혈은 어떻게 급속도로 혈압을 낮춰주는 건가요?”순식간에 병실은 온통 진현준의 해괴한 질문들을 하는 소리만 가득했다. 고다정은 말을 잃고 진현준을 쳐다봤다. 분명 같은 의사인데 왜 일반인한테 설명하는 것만큼 힘이 드는지.양의사와 한의사의 분계가 이렇게나 심하다는 말인가 이제 반나절이 지났지만 고다정의 머리에는 진현준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 뭐냐, 이제 점심이니까 저는 그만 한약 지으러 가볼게요.”고다정은 구실을 찾아 벗어나려 했지만 눈치 없는 진현준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한약이요? 저도 갈래요. 마침 형수님도 도와줄 수 있고.”“아, 아니에요, 도와주실 필요 없어요. 진 선생님이 오시지 않는 게 제일 큰 도움이에요.”말을 끝내고 집에 불이라도 난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실을 나갔다. 그 모습을 본 진현준은 다급하게 쫓아가며 말했다.“형수님, 가지 마세요. 저 아직도 물어볼 게 많단말이에요.”두 사람이 떠나자 병실 안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쌍둥이들은 서로 쳐다보고 마침내 한숨을 내쉬었다. 하윤이는 코를 찡끗거리며 살며시 하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저 아저씨 말이 너무 많다. 엄마
30분이 지나서 고다정은 곰탕을 완성하였지만, 여준재에게 직접 가져가고 싶지 않았다. 병실에 까지 들어가면 진현준이 계속 귀찮게 하기 때문이다.“진 선생님, 이 곰탕을 여 대표님께 다져다 주세요.”말을 마친 고다정은 진현준이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바로 곰탕을 그의 손에 쥐어줬다.진현준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고 선생님은요?”“저는 여기 곰탕에 들어가는 약재가 떨어져서 사러 가야 해요.”말을 마치고 고다정은 바로 주방에서 나갔다.진현준이 병실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여준재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왜 네가 왔어? 고 선생님은?”“삼촌, 우리 엄마는요?”두 아이도 의문의 눈길을 보였다.진현준은 아직 문의 심각함을 느끼지 못한 채 웃으며 말했다.“너희들 엄마는 약재를 사러 갔어.”그리고 또 여준재한테 곰탕을 건네며 말했다.“어서 마셔. 나와 고 선생님이 같이 달인 거야.”여준재는 약을 건네받고 바로 마시지 않고 눈앞에 있는 친구한테 말했다.“앞으로 우리 고 선생 귀찮게 하지 마. 너를 제자로 받지 않을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야.”순간, 진현준의 눈빛이 심각해졌다.“왜 너마저 내가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너를 안 된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 하지만 한의학은 배우기 쉽지 않아. 게다가 고대 한의학은 더더욱 힘들어.”여준재는 인정사정없이 말했다.진현준은 그래도 불복하면서 뭐라고 말하려고 하는데 여준재가 먼저 경고했다.“너 매일 이렇게 한가하면 나 원장님을 찾아가서 너한테 일을 더 많이 주라고 할거야.”“...”진현준은 목구멍까지 나온 말을 삼키고 조용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자기 와이프밖에 모르는 나쁜 놈.”낮은 소리로 말했어도 여준재는 다 들었다. 하지만 사실이었기에 반박하지 않았다.오후 2시쯤에 고다정이 돌아왔는데 그녀가 병실에 왔을 때는 진현준은 없고 여준재와 두 아이가 자고 있었다. 그녀는 그제야 안도했다.여준재는 그런 그녀의 반응을 보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뭘 두려워하는
고다정은 듣자마다 바로 거절했다. 등을 밀어주는 다정한 스킨쉽은 어쩐지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구 비서님 불러올게요.”말을 마친 고다정이 다시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문 앞까지 다다랐을 때, 등 뒤로 다시 한번 여준재의 은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 비서 병원에 없어요. 제가 회사로 보냈거든요.”여준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다정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녀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준재는 비록 고다정의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여준재는 장난기 가득한 눈을 반짝였다. “난처하시면 안 하셔도 돼요. 제가 할 수 있어요. 상처를 건드릴지도 모르겠지만요.”말하며 여준재는 일부러 인기척을 내며 수건을 꺼내 몸을 닦았다. 여준재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고다정이 곧 결정을 내렸다.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몸을 돌려 여준재 앞에 다가갔다. 고다정은 여준재의 손에서 수건을 가로채 고개를 숙이고 수건을 씻으며 말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고개를 숙이고 수건을 씻는 작고 가녀린 고다정을 보며 여준재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 원하는 바를 이룬 만족의 미소였다. 고다정은 여준재 입에 걸린 그 웃음을 보지 못했다. 수건의 물을 꽉 짜고 고개를 든 고다정의 눈에 다부진 여준재의 상반신이 한눈에 들어왔다. 겨우 정상 온도로 돌아온 볼이 또다시 뜨거워졌다. “그, 저기. 돌아서요.”그러자 여준재는 장난을 그만두었다. 행여 고다정이 도망이라도 갈까, 그는 고분고분 등을 돌려 고다정이 등을 닦을 수 있도록 가만히 있었다. 부끄러웠던 탓인지, 고다정은 말이 없었다. 같은 시각 고다정의 머릿속은 그저 얼른 닦고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일은 늘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라, 사고는 늘 예상치 못하게 일어났다. 고다정이 다시 수건을 씻을 때, 바닥에 물이 묻었던 탓인지 바닥이 굉장히 미끄러웠다. 바닥을 제대로 보지 않았던 고다정은 그만 중심을
병실을 나온 고다정은 멀리 가지 않았다. 그녀는 복도 베란다에 서서 자신의 뜨거운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진정시키고 있었다. “방금 그건 사고야. 너무 생각하지 말고, 신경도 쓰지 마.”말은 그렇게 했지만, 고다정의 심장은 여전히 쿵쾅쿵쾅 뛰어댔다. 그녀는 한참 만에야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몸을 돌려 병실로 향했다. 이제 막 병실 앞에 도착한 고다정은 안에서 나오는 진현준을 보더니 순간 후회가 밀려왔다. 진현준이 올 줄 알았더라면, 조금 늦게 돌아올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다정은 이미 진현준에게 시달릴 마음의 준비를 끝냈다. 하지만 진현준은 스승으로 삼겠다는 얘기 대신 그녀에게 당부했다. “형수님, 마침 돌아오셨네요. 들어가셔서 준재에게 얘기 좀 잘해줘요. 지금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자꾸 씻으려고 하면 겨우 아문 상처가 또 벌어질 거라고요.”진현준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조금 마음에 찔렸다. 자신이 방금 넘어질 뻔한 것을 여준재가 잡아줬기 때문이었다. 당시 고다정은 여준재의 신음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그리고 입맞춤 때문에... 고다정은 그 일을 까먹고 만 것이다. “알겠어요. 제가 잘 지켜볼게요.”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진현준과 인사를 나눈 고다정이 병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병실에 들어서자, 침대에 누워있던 여준재와 두 아이가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왜 날 봐요?”그들의 시선이 조금 불편했던 고다정은 헛기침하며 물었다. 그러자 두 아이는 고다정에게 눈빛을 보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엄마, 방금 어디 갔었어요?”그들의 의도를 눈치챈 고다정이 아이들을 노려보았다. “어른들 일이야. 애들은 알려고 하지 마.”말하며 고다정은 여준재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방금 돌아오면서 진 선생님을 만났어요. 상처가 벌어졌다면서요. 괜찮아요?”아까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그녀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여준재는 당연히 고다정이 화제를 돌리고 있다는 것을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