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은미가 고다정을 챙기고 있는 동안 다정의 집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다름이 아니라 강말숙이 오전에 다정과 전화한 것 외에는 오후 내내 손녀와 연락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녀는 계속해서 전화를 걸었지만 들려오는 건 연결이 되지 않다는 기계음뿐이었다.“얘가 왜 전화를 안 받지?”소파에 앉아 있는 강말숙은 휴대폰을 꽉 쥐고 불안한 듯 눈썹을 찌푸렸다.이때 하준과 하윤을 데리고 돌아온 여준재는 안 좋은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강말숙을 봤다.“할머니, 왜 그러세요?”두 아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달려왔고, 그중 한 아이가 강말숙을 껴안으며 물었다.준재도 다가와 강말숙을 걱정했다.“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그렇게 말하던 그는 뭔가 이상한 느낌에 주위를 둘러봤다.“고 선생님은 아직 안 오셨어요?”“다정이는 아침부터 나가더니 지금까지 연락이 안 돼요.”강말숙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는지 준재를 바라보며 부탁했다.“여 대표, 우리 다정이 좀 찾아주면 안 되나요? 걱정이 돼서 안 되겠어요.”준재는 이를 거절할 리 없었다. 그는 즉시 구남준에게 전화해 다정을 찾으라고 지시했다.두 아이는 엄마가 사라졌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아저씨, 우리 엄마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죠?”“걱정하지 마, 아저씨가 엄마한테 아무 일도 안 일어나게 할게.”준재는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들을 진정시켰지만, 속으로는 그 누구보다 걱정하고 있었다.그러나 지금, 그가 직접 다정을 찾으러 갈 순 없었다.준재는 강말숙과 두 아이의 논란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물론 그는 가만히 앉아서 남준의 연락을 기다리지 않았다.잠시 생각을 정리한 준재는 강말숙에게 물었다.“할머니, 은미 씨와 성준 씨처럼 고 선생님과 가깝게 지내는 분들에게 연락해 보셨어요?”“내가 그 생각을 못 했네…….”멍해진 강말숙은 후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이에 준재는 그녀를 토닥였다.“괜찮아요, 고 선생님이 그분들과 같이 있을 수도 있으니 연락해 보세요.”“바로 해볼게요.”
임은미의 의사에 상관없이 여준재는 질문에 대답한 후, 은미의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집 안 구석구석을 살펴보며 문 앞에 서 있는 은미에게 물었다.“다정 씨는 어디 있어요?”은미는 눈을 굴렸지만 앞장서서 그를 고다정이 있는 방으로 데려갔다.잠시 후, 준재는 침대에 누워 자고 있는 다정을 발견했다.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전혀 편안해 보이지 않았고, 인상을 짓고 있었다.“엄마……, 가지 마세요…….”잠꼬대하며 눈물을 흘리는 다정의 모습이 준재의 눈에 들어왔다.근처에서 다정의 눈물을 본 은미는 마음이 아팠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제가 여 대표님을 오해했나 봐요.”“…….”준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으로 다가가 몸을 굽혀 누워있는 다정의 눈물을 닦아줬다.그가 다정을 안아 올리려 할 때, 다정은 그의 손을 덥석 잡았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엄마, 날 두고 가지 마세요. 저 정말 그런 사람 아니에요. 제발 믿어주세요…….”“난 우리 엄마를 죽이지 않았어…….”“난 아니야…….”슬픔에 잠긴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이 말을 들은 은미는 마음이 아팠고, 친구가 너무 안타까웠다.그녀는 친구가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과거의 일을 마음에 두고 있을 거라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일은 친구의 가슴에 묻혀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상처가 되어 있었다.준재 역시 복잡한 감정에 머뭇거렸다.그 역시 5년 전 일어난 사건의 피해자였고, 다정의 불행에 간접적인 원인이기도 했다.그가 다정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다정은 두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른 채, 한동안 울다가 다시 잠들었다.품에 안긴 작은 여자가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잠든 모습을 보던 준재는 입술을 오므려 침대에서 그녀를 들어 안았다.은미는 서둘러 그를 불렀다.“여 대표님!”준재는 멈춰 서서 돌아봤다.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은 그의 마음을 표현하기에 충분했다.‘무슨 일이에요?’“우리 다정이 잘 부탁해요. 아무리 Y
고다정은 여준재를 집으로 초대하는 데에 극도의 거부감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할머니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고, 울며 겨자 먹기로 준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여 대표님, 저희 할머니께서 어제 너무 고마웠다고, 저녁을 대접하고 싶으시대요.]준재는 회의 중에 이 문자를 받았다.휴대폰 화면에 다정의 이름이 뜨자, 차갑고 어두웠던 그의 얼굴이 점차 밝아지더니 이내 입꼬리를 올렸다.이를 본 현장 임원들은 모두 숨을 돌릴 수 있었다.누가 보냈는지는 몰라도 대표님을 한층 기분 좋게 만들어 준 그 사람에게 고마울 뿐이었다.그날 밤, 준재는 하준과 하윤에게 줄 선물을 가지고 다정의 집으로 향했다.준재가 도착했을 때, 다정은 주방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그는 인사를 건네고, 아이들과 함께 거실에서 놀았다.주방에 있던 다정은 종종 그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그 웃음소리는 다정을 더욱 복잡하게 했으며, 이내 요리에 집중하기 어려웠다.다정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몰라 더욱 심란해졌다.다른 생각에 잠겨있던 순간, 칼날에 손이 베였다.“아!”그녀는 괴로움에 비명을 질렀고, 손에 쥐고 있던 식칼을 이내 우당탕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준재는 다정의 소리를 듣고 걱정되는 마음에 곧바로 주방으로 향했다.주방에 들어선 그는 피가 철철 나는 다정의 손가락을 보고 인상을 지으며 말했다.“손이 베였잖아요.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요?”그는 말과 함께 다정의 손목을 잡고 그녀의 손가락에 입을 가져다 대며 지혈했다.갑자기 느껴지는 따뜻함과 부드러운 그의 입술에 다정은 깜짝 놀라 당황스러운 눈으로 준재를 바라봤다.그녀는 준재가 이렇게까지 행동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다행히 다정은 곧바로 정신을 차렸고, 손을 빼고 싶었지만 뺄 수 없었다.“저, 전 괜찮아요.”다정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입을 열었다.그녀의 말은 이제 그만해도 된다는 뜻이었다.준재는 자연스레 다정의 뜻을 이해하고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다행히 그녀의 손에서는 더 이상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대표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실 텐데요? 왜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세요? 도대체 왜요!”고다정은 이를 악물고 화를 내며 있는 힘껏 여준재를 밀어냈다.준재는 예상치 못한 그녀의 행동에 중심을 잃어 비틀거리다 벽에 부딪혔다.그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다정을 바라봤다.준재를 쳐다보던 다정의 눈에 눈물이 맺히더니 버럭 화를 냈다.“이미 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저한테 말하지 않았어요? 아이들의 아빠를 찾아달라는 부탁에 아직 찾지 못했다고 말하셨잖아요. 저를 속이니 재밌으셨어요? 저 혼자 애쓰는 모습이 그렇게 재밌던가요?!”그제야 준재는 다정이 자신을 계속 피했던 이유를 알게 됐다.“임초연이 말했죠?”그는 나지막이 말했다.임초연 말고는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없었다.결국 요 며칠 동안 다정과 만난 사람은 그 여자뿐이었다.다정은 부인하지 않고 말했다.“네, 맞아요. 그 사람이 말했어요. 임초연 씨가 아니었다면 전 아직도 당신에게 속고 있었겠죠!”이를 본 준재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그도 자연히 다정이 눈치챈 건 아닌지 생각하곤 했다. 그게 현실이 된 지금, 더 이상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막연한 안도감과 함께 불안해졌다.“숨길 생각은 없었어요. 단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얘기를 못 했을 뿐이에요.”준재는 마음을 숨김없이 말했다.그는 다정을 진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저도 다정 씨가 지난 5년 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고 있어요. 비록 다정 씨는 아이들을 위해 친아빠를 찾고 싶다고 했지만, 저는 아이들 때문에 급하게 일을 처리하고 싶지 않았어요. 저는 단지 제 신분이 아닌, 아이들과 다정 씨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절 받아주길 바랐어요. 정말 모든 걸 다 보상하고 싶었다고요!”하지만 다정의 귀에는 그 어떤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속았다는 분노와 지울 수 없는 과거의 상처로 인해 다정은 자신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누가 보상해 달래요? 그런 말은 필요 없어요. 당신이 정말 보상하길
여태 고다정도 증오하던 마음이 사라졌기에 아이들의 아빠를 찾는 데에 힘을 썼다.이를 생각하며 그녀는 고개를 들어 다정한 여준재를 바라봤다.준재도 몸을 돌려 다정을 바라봤다.그의 표정은 분명 다정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었다.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지독한 적막만이 감쌌다.결국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건 준재였다.“무슨 생각을 하고 계세요?”“…….”다정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애꿎은 입술만 깨물었다.그녀도 마음이 너무 혼란스러워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준재는 서두르지 않고 자신의 품에 안겨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다정을 기다렸다.오랜 시간이 흐른 뒤, 다정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지금은 아무 말도 못 하겠어요. 생각할 시간을 좀 주세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요.” “네, 충분히 생각하신 다음에 말씀해 주세요. 하지만 아이들을 만나러 오는 건 이해해 줘요.”준재는 다정을 이해하고 조건을 제시했다.다정은 분명하게 거절하지 않고 말했다.“너무 많이 집을 비웠어요. 들어가요.”그렇게 말하며 다정은 다시 준재의 품에서 벗어나려 애썼다.준재는 잡지 않았고 순순히 놓아줬다.떠나려는 여자를 바라보며 준재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아이들한테는 비밀로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두 아이가 절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제가 말할게요.”다정은 이렇게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준재가 이해되지 않아 잠시 머뭇거렸다.‘아이들은 이미 여 대표님을 엄청나게 좋아하잖아. 받아들이지 않을 리 없어.’하지만 다정은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황급히 복도에서 사라졌다.준재는 그 모습에 씁쓸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지만, 마음은 홀가분했다.‘이제 다정 씨를 속이지 않아도 돼.’이를 생각하며 준재는 아파트를 빠져나왔다.한편, 다정은 문밖에 서서 마음을 진정시킨 후, 집으로 들어갔다.강말숙과 하준, 하윤은 그녀 혼자만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궁금증을 숨기지 못했다.“다정아, 여 대표는?”“엄마, 아저씨는 돌아가셨어요?”모
그 후, 며칠 동안 여준재는 치료를 받지 않더라도 매일 하준과 하윤을 보러 오곤 했다.오늘 아이들에게 줄 레고를 들고 오지 않았기에 내일 가장 유행하는 장난감 로봇을 가져오기로 했다.요즘 들어 준재는 아이들에게 더 잘하려 노력하고 있었고, 하루 종일 고다정의 집에 머무르지 못한다는 사실에 한스러웠다.물론 다정은 그런 그의 행동에 감동하였지만, 준재에게 티 내지는 않았다.다정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생각지도 못한 채, 준재가 여진성 부부에게 두 아이를 몰래 접촉할 수 있도록 한 일이 마음에 걸렸다.그래서 준재가 집에 올 때면 다정은 방 밖을 나가지 않았다.강말숙과 아이들은 두 사람 사이가 계속 신경 쓰였다.이날 아이들은 참지 못하고 준재를 방으로 데려가 물었다.“아저씨, 그날 엄마랑 어떻게 됐어요? 아직 화해하지 않으셨어요?”“아저씨가 엄마를 달래는 건 어때요? 인터넷에서 봤는데, 화난 여자는 선물을 사서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면 달랠 수 있대요.”준재는 그의 두 아이가 자신에게 대안을 알려주는 걸 보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물론, 그는 두 아이가 자신과 다정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준재는 입꼬리를 올리고 아이들의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아저씨는 다 생각이 있어.”이 말을 들은 하준과 하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오므렸다.하준은 반감을 드러내며 말했다.“아저씨가 계획이 있으셨으면 이렇게 오랫동안 엄마랑 냉전 상태를 유지하지 않으셨겠죠.”“아휴, 아저씨는 사서 고생하시네요.”하윤도 한숨을 쉬었다.준재는 난감해 아무 말도 하기 어려웠다.저녁이 되자, 그는 어린 두 아이를 재우고 조용히 방에서 나왔다.준재가 막 집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그의 등 뒤에 있던 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다정이 잠옷 차림으로 문밖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목욕을 마친 그녀의 몸에서는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다정도 준재를 보고 놀라 아무것도 못 본 척 뒤돌아 부엌으로
‘넌 어떻게 하고 싶어?’할머니의 질문이 고다정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지만 그녀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어물쩍거렸다.다정은 고개를 숙이고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눈을 내리깔며 나지막이 말했다.“모르겠어요. 흘러가는 대로 놔두려고요.”그 말만 남겨두고 다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말도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할머니도 얼른 주무세요.”강말숙은 도망치듯 떠나는 손녀를 바라보며 힘없이 고개를 저었지만 애써 그녀를 잡지 않았다.……다음 날 다정은 하준, 하윤과 함께 아침을 먹은 후, 아이들을 등원시켰다.그녀가 차에서 내리려 할 때, 하윤은 그녀의 팔을 잡고 애어른처럼 말했다.“엄마, 아저씨가 먼저 사과하면 받아주세요. 아저씨가 잘못을 인정하는 방식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아저씨는 오랫동안 홀로 지내면서 여자를 달래는 방법을 모를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무리하게 요구하지 말아요. 전 아저씨랑 엄마가 잘 지내셨으면 좋겠어요.”이 말을 들은 다정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어디서 그런 말을 배웠어?”“아무도 하윤이를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전 그냥 인터넷으로 알게 된 거예요.”하윤이는 자랑스럽게 턱을 치켜올렸다.다정은 그런 딸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그녀는 손을 내밀어 어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자, 얘들아, 어른들 일은 신경 쓰지 말고 얼른 유치원 가야지. 좀 있으면 지각이야.”두 아이는 다정의 회피성 대답에 만족스럽지 않아 입을 삐죽거렸다.하지만 그들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다정은 차에서 아이들을 내렸다.이때 다정은 유치원 입구에 몰린 사람들 뒤에 숨어 있던 여진성 부부를 우연히 발견했다.그녀는 티 나지 않게 미간을 찌푸렸다가 못 본 척 시선을 거뒀다.그날 오후, 다정이 집에서 약을 짓고 있을 때, 육성준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오늘 밤에 시간 있어? 부탁할 게 있는데.]“또 여자친구인 척해달라는 부탁이면 미리 거절할게.”다정은 성준의 부탁을 듣기도 전에 거절했다.성준은 말문이 막혀 몇 초 동안 아
이를 본 고다정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탔다.“여 대표님,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시는 모습이 좋아 보이진 않네요. 당신과 전 독신일 뿐이에요. 여 대표님이 절 잡을 이유는 없잖아요.”여준재는 다정이 떠나간 자리를 바라보며 낯빛이 어두워졌고 기분이 더욱 안 좋아졌다.‘다정 씨가 괜찮아진 게 아니었구나.’이치대로라면, 다정과 준재가 대화를 나누었으니, 두 사람 사이가 서먹해졌을지언정 나쁜 사이는 아니었다.하지만 다정은 불편한 마음이 쉽사리 괜찮아지지 않았고, 준재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다정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누군가가 자신을 잡는 느낌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어느새 육성준이 도착해 있었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몇 번이나 전화했는데 받지도 않고.”성준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다정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침착하게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야. 가자.”이 말을 남겨두고 다정은 먼저 차에 올라탔다.이를 본 성준은 어깨를 들썩이고 운전석으로 가 차에 탔다.곧 검은색 자동차는 준재의 시선 아래, 유유히 사라졌다.하준과 하윤은 그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제안했다.“아저씨, 엄마를 따라가는 게 어때요?”이 말을 들은 준재는 고개를 숙여 애써 미소를 짓고는 옆에 있는 걱정 어린 두 아이를 바라봤다.“아니야, 방에 들어가자. 아저씨가 모르는 문제 있으면 가르쳐줄게.”그는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이전의 준재였다면, 성준과 다정의 사이를 몰라 긴장을 놓지 못했겠지만, 이제는 안심할 수 있었다.‘육성준 씨랑 다정 씨는 서로에게 아무런 이성적인 마음이 없어.’‘그리고 다정 씨는 지금 날 보기 껄끄러울 거야. 매일 아이들을 보러 오는 걸 허락해 준 것만으로 도 많이 봐준 거지. 만약 내가 또 선을 넘는다면, 정말 다정 씨를 화나게 할지 몰라.’잠시 후, 성준은 다정을 데리고 한 비즈니스 호텔에 도착했다.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