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정원에서 증조할머니랑 약재를 정리하고 있어요.”하준과 하윤은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이 말을 들은 여준재는 웃음기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그럼 우리 엄마한테 가서 점심 먹으러 오라고 할까?”“좋아요!”두 꼬맹이는 당연히 이를 거절하지 않았다.그대로 한 성인 남성과 두 아이가 웃고 떠들며 거실을 떠났다.심해영은 매우 당황한 표정으로 그들의 떠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고다정에게 설명할 수 없는 질투심이 더욱 솟구쳤다.아직 가족이 되지도 않았는데 자기 아들과 손자들 모두 그 여자를 에워싸고 있었다.‘만약 우리가 미래에 가족이 된다면 내가 여기서 말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까?’비록 불만은 많았지만 심해영은 손주들과 아들 앞에서 티 내거나 기분 나쁠 말은 하지 않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정은 심해영의 적대심을 눈치채고, 마음속이 혼란스러웠다.그러나 다정도 그것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심해영은 그녀에 대한 반감을 표한 적이 있었다.앞서 보여준 호의에 대해 말하자면, 다정은 단지 심해영의 성격이 오락가락한다는 것으로 간주할 뿐이었다.식사를 마친 후, 준재는 서둘러 떠나지 않았다.그는 집사에게 두 개의 방을 청소하라고 지시한 후, 다정과 강말숙 그리고 두 아이가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했다.곧 거실에는 심해영과 준재만이 남았다.심해영은 준재에게 자신의 마음을 말하려 했다.그녀는 두 손자를 받아들였지만 그들의 엄마인 다정은 인정하지 않았다.그러나 심해영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준재가 입을 열었다.“오랜만에 별장에 오셨네요. 어머니도 피곤하실 텐데, 돌아가서 좀 쉬세요.”“난 갈 생각이 없단다. 우리 소중한 손주들과 같이 있을 거야.”심해영은 준재가 자신을 보내려 할 줄은 몰랐기에 별로 좋지 않은 표정으로 거절했다.준재는 쉽게 어머니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오전 내내 함께 있으셨잖아요. 계속 여기 계시면 다정 씨 가족들에게 의심을 불러일으킬 거예요. 어머니도 하준이랑 하윤이를 오래도록 보고 싶으시
가까스로 아버지를 돌려보낸 임초연은 마음속의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고다정, 죽여버릴 거야!”초연은 틀림없이 다정이 여준재에게 말해 준재가 그토록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다.물론, 그녀를 가장 화나게 한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준재와 다정이 여전히 함께 있다는 것이다!‘여준재의 부모조차 두 사람을 갈라놓을 수 없는 거야?’이 생각에 초연은 참지 못하고 신해선에게 전화했다.“엄마, 엄마가 말한 방법이 먹히긴 먹히는 거예요? 왜 아직도 여준재랑 고다정이 헤어지지 않고, 절 괴롭히는 거예요?”[뭐라고? 무슨 일이 생긴 거니?]신해선은 분노 섞인 딸의 말에 재빨리 걱정스럽게 물었다.초연은 준재가 사람을 시켜 회사로 찾아와 배상금을 요구한 일을 설명했다.당연히 이 말을 들은 신해선의 얼굴도 굳어졌다.‘분명 우리 임 씨 집안을 무시한 행동이야.’이 생각에 신해선은 낮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알겠어. 내가 심해영 이모를 만나볼 게.]그 말을 한 후, 심해영은 집사에게 차를 대기해 놓으라고 지시했다.그럼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던 초연은 비서에게 심해영의 최근 근황을 조사하라고 명령했다.……잠시 후, 신해선은 YS그룹의 대저택에 도착했다.대문을 들어선 그녀는 대저택의 변화를 발견했다.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심해영이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정원이었다.정원 속에 있는 꽃과 나무는 모두 그녀가 직접 심은 것으로 희귀한 식물들이었다.하지만 지금은 정원이 잔디밭으로 바뀌었고, 장난감으로 가득한 작은 놀이터가 되어 있었다.이를 본 신해선은 불안이 엄습했다.그리고 그녀의 추측은 심해영과 대화를 나눈 후, 확신이 되었다.“오랜만에 왔더니, 집이 많이 바뀌었네요. 식물들은 왜 없애셨어요?”신해선은 은근슬쩍 그녀를 떠봤다.심해영이 웃으며 대답했다.“꽃은 뒷마당으로 다 옮겼어요.”이어 신해선은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물었다.“정원이 작은 놀이터로 바뀌었더라고요. 집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사실 그녀가 묻고 싶은 건, 준재 다음으
여준재는 직접 운전해 고다정과 하준, 하윤이를 집으로 데려다줬다.가는 길 차 안에서 잠이 깬 두 아이는 준재와 웃고 떠들었다.하지만 다정과 강말숙은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한 탓에 아무리 낮잠을 잤다 하더라도 여전히 피곤했다.두 사람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자기도 모르는 새에 잠이 들었다.준재는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중간중간 다정을 확인했다.창문을 열어두고 고개를 떨군 채 잠이든 그녀를 본 준재는 혹여나 깰까 속도를 줄이고 차를 더 부드럽게 몰았다.동시에 준재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며 조용히 말했다.“엄마랑 할머니께서 주무시니까 우리 조용히 이야기할까?”이 말을 들은 두 아이는 고개를 돌려 잠이 든 엄마를 바라보았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잠시 후, 차는 다정의 아파트 입구에서 멈춰 섰다.나이가 지긋한 강말숙은 몸을 뒤척이다 잠에서 깼다.강말숙은 차창 밖의 익숙한 풍경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벌써 도착했구나.”“네, 외증조할머니께서 딱 맞춰서 일어나셨어요!”두 아이는 미소를 지으며 외증조할머니를 바라봤다.강말숙은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아직 자고있는 다정을 바라보며 말했다.“먼저 차에서 내리렴. 내가 너희 엄마를 깨워서 갈게.”이 말을 들은 준재는 강말숙을 막았다.“깨우실 필요 없어요, 할머님. 하준이랑 하윤이를 데리고 먼저 들어가세요. 제가 다정 씨를 업고 갈게요.”“알겠어요. 그럼 먼저 올라갈게요.”강말숙은 하루 종일 고생한 다정이 안쓰러워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한편, 임초연은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왔다.그녀는 거실에 앉아 있는 엄마를 보고 재빨리 달려가 물었다.“엄마, 오늘 준재 씨 집에 가신 건 어떻게 됐어요? 해영 이모가 뭐라 하셨어요?”초연이 말을 꺼내자마자 신해선의 부드러운 인상은 분노로 바뀌었다.엄마의 얼굴을 보자 초연은 불안감이 엄습했다.“해영 이모도 마음을 바꾸신 거예요?”“해영 이모가 결혼은 준재 마음이니 간섭하지 않겠대. 또 준재랑 결혼하고 싶으면 너 스스로 노력하라더구
아버지의 말을 들은 임초연은 너무 혼란스러웠다.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러니까 아빠 말씀은…….”“그건 좀 더 조사해 봐야 알 거 아니냐?”임광원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아버지의 말을 들은 초연은 퀭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조사하라고 할게요.”하지만 신해선은 알 수 없는 두 부녀의 모습을 보며 한동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게 무슨 말이에요? 하나도 이해가 안 돼요.”“지금은 이해 안 되는 게 당연해. 초연이가 확실히 조사해 보면 당신도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야.”임광원은 아내에게 설명할 생각이 없었다.초연은 엄마에게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휴대폰을 챙겨 침울한 얼굴로 방으로 들어갔고, 이 일에 대해 조사할 사람을 찾아 방법을 모색했다.……다음 날 깨어난 고다정은 자기 방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했다.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녀는 자신을 업고 데려왔을 여준재를 생각하니 마음이 달콤해졌다.간단히 씻은 후, 다정은 가족들을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하러 나갔다.식사를 준비하는 와중에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다정은 문을 열러 갔고, 문밖에 서 있는 준재를 발견했다.매일 마주하는 얼굴이지만 그녀는 완벽한 그의 이목구비에 매료되어 잠시 정신을 잃을 뻔했다.다행히 그녀는 빨리 정신을 차렸고,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말했다.“여 대표님, 이렇게 일찍 무슨 일로 오셨어요?”“직접 알려드릴 게 있어서요.”준재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를 본 다정은 즉각 그를 집 안으로 데려왔다.하준과 하윤은 준재를 보자마자 반갑게 인사했다.“아저씨, 오셨네요!”강말숙도 관심을 가지며 물었다.“여 대표님, 아침은 드셨어요?”“네, 먹고 왔어요.”준재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강말숙과 두 아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다정은 준재에게 물 한 잔을 내어준 뒤, 물었다.“여 대표님, 이제 말씀해 주세요.”“별일 아니에요. 전에 김 변이 다정 씨를 대신해서 임초연을 고소하고 배상을 요구한 적이 있어요.
임초연의 말을 들은 최진희는 깜짝 놀랐다.간신히 정신을 차린 후, 그녀는 사실대로 말했다.“전 사모님과 도련님의 대화를 들은 적이 있어요. 사실 고 선생님의 아이들은 도련님의 아이입니다. 대저택의 분위기가 바뀐 것도 전부 손자, 손녀를 데리고 오기 위해서죠.”이 말을 들은 초연은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그때 초연의 머릿속엔 한 문장만이 맴돌았다.‘고 선생님의 아이들은 도련님의 아이입니다.’초연은 자신이 무슨 정신으로 병원을 빠져나왔는지조차 몰랐다.그녀는 차에 타서야 정신을 차렸지만 여전히 믿을 수 없었다.그들은 자기 집안에서 쫓겨난 여자와 대 YS그룹의 대표인 남자다. 게다가 5년 전에 일어난 일이라 초연은 두 사람의 접점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잠깐, 5년 전이라면…….’‘고다정의 스캔들이 터진 날 아니야?’이를 생각한 초연은 과감한 추측을 내렸지만, 더 확실히 조사할 사람을 찾아야 했다.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부하 직원들에게 전화해 지시를 내렸다.“5년 전, 고씨 집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조사해 봐. 특히 고다정이랑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리고 고다정 아이들의 출생의 비밀을 찾아봐.”다정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고, 여준재를 보낸 후, 간단히 짐을 싸서 1억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기 위해 은행으로 갔다.그녀는 그 돈을 어떤 용도로 쓸지 생각해 보진 않았지만, 배상금으로 받은 이상, 어떻게든 사용해야 했다.볼 일을 마친 후, 다정은 차를 몰고 마운시티 별장으로 가서 어제 재배한 약재 중 일부를 신의 약방에 판매하려 했다.다정이 신의 약방의 입구에 다다랐을 때, 신수 노인이 서 있었다.그녀가 약재를 팔러 온다는 소식을 들은 신수 노인은 버선발로 그녀를 마중 나왔다.신수 노인은 직원들과 함께 약재를 확인하고 있는 다정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이제 약재를 팔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그의 말은 과언이 아니었다. 다정은 꾸준히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었고, 신수 노인이 필요로 하는 약재의 양도 매우 많았기
그날 밤, 여준재는 고다정의 동의 하에 하준과 하윤을 데리러 갔다.그러나 그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땐, 다정이 보이지 않았다.“외증조할머니, 엄마는요?”두 아이는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로 거실에 앉아 있는 강말숙을 바라봤다.강말숙은 웃으며 말했다.“너희 엄마가 오늘 좀 늦을 거래. 신수 어르신이 저녁을 사 준다고 했거든.”이 말을 들은 준재는 눈썹을 치켜떴다.평소대로라면 신수 노인이 저녁을 살 때, 그를 부르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그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강말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신수 어르신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중매를 서 문성 어르신의 손자를 소개해 주겠다며 저녁을 산다더라고요.”강말숙은 말을 마친 후, 두 아이를 데리고 손을 씻긴 뒤, 저녁을 준비하러 갔다.준재는 강말숙이 일부러 한 말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준재의 마음이 불편했다는 것이다.그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다정에게 전화를 걸어 어디에 있는지 묻고 싶었다.하지만 통화는 연결되지 않았다.준재는 눈살을 찌푸렸고, 그가 다시 전화를 걸려고 할 때, 강말숙이 말을 건넸다.“여 대표님, 안 들어오세요? 이미 저녁 준비가 끝났으니 손 씻고 와서 드세요.”“전 안 먹어도 돼요. 할머님, 얼른 저녁 드세요. 전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이 말을 남긴 뒤, 준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1층에 대기하고 있던 구남준은 준재가 굳은 얼굴로 차에 타는 것을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왜 그러십니까?”“아무것도 아니야.”준재는 무뚝뚝하게 대답한 후,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이번에도 다정에게 건 전화였다.그는 다정이 전화를 받을 거라 믿고 있었지만, 들려오는 현실에 절망을 맛봤다.“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이후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기계음에 준재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계속해서 연결이 되지 않자, 준재는 전화를 끊고 문진혁에게 전화를 걸었다.[준재 형, 무슨
따뜻한 조명 빛 아래, 고다정과 여준재 둘뿐인 룸 안은 긴장감이 맴돌았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에 드러난 감정은 기대감과 약간의 설렘이 담겨 있었다.준재가 말을 이어 하려던 순간,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화면에 뜬 발신자의 이름에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발신자는 그의 어머니였다.“왜 전화하셨어요?”[준재야, 빨리 와야 할 것 같아. 아버지가 아프셔.]휴대폰 너머 심해영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준재는 한순간에 얼굴이 굳어졌고, 다정을 바라보며 미안함을 표했다.“죄송해요. 아버지가 편찮으시다고 하셔서 빨리 가 봐야 할 것 같아요.”“그럼 저랑 같이 가는 건 어때요? 제가 아버님 상태를 봐 드릴게요.”말은 이렇게 했지만 다정은 다소 실망스러웠다.준재는 이를 알 리 없었다.그는 잠시 생각한 후, 다정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그녀와 함께 대저택으로 향했다.심해영은 준재가 다정을 데리고 온 모습에 달갑지 않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준재는 어머니를 따라 침실로 들어갔다. 아버지가 초췌하게 침대에 기대 누워있는 것을 본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왜 병원에 안 가셨어요?”“너희 아버지가 가기 싫다고 하더구나. 병원 소독약 냄새는 맡기도 싫대. 네가 아버지한테 말씀드려 봐.”심해영은 유감스러운 표정으로 남편을 바라보며 말했다.여진성은 그런 상황을 보고 준재에게 담담히 말했다.“별일 아니야. 오늘 회식이 길어져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술병이 났을 뿐이야. 너희 엄마는 너무 놀란 마음에 널 부른 것 같구나.”“뭐가 별일이 아니에요, 예전에 의사가 당신이 술을 끊지 않으면 위궤양이 올 수도 있다고 했잖아요!”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남편의 모습에 심해영은 매우 화가 났다.말다툼을 하는 부모님을 보고 있던 준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하지만 다정에게 눈앞에 일어난 상황은 서로를 걱정하는 가족의 정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그녀는 고개를 살짝 돌려 준재를 바라보며 물었다.“여 회장님께서 위
돌아오는 길, 차 안은 매우 조용했다.고다정은 운전에 집중하는 여준재를 바라보았고, 누가 그녀의 심장을 간지럽히는 것 같았다.그녀는 준재가 식당에서 뭘 말하고 싶었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 얘기를 꺼내기는 조금 부끄러웠다.결국 그녀는 이 마음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준재는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렸지만, 고백할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았고, 그렇게 성급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그도 마음속에서 요동치는 감정을 억제했다.그렇게 두 사람은 말 한마디 없이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다.“다 왔어요.”준재는 차를 세우고 적막을 깼다.멍하니 있던 다정은 그의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조심히 들어가세요.”이 말과 함께 그녀는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준재는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는 다정을 확인하고 나서야 차를 몰고 떠났다.집에 들어온 다정은 실내화로 갈아 신으며 아직 거실에 있는 외할머니를 봤다.“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왜 아직 안 주무세요?”“생각할 일이 있어 잠이 안 오는구나. 이리 와 보렴. 물어볼 게 있어.”기분이 좋아 보이는 강말숙은 다정에게 오라고 손짓하며 말했다.다정은 할머니를 바라보다 무력감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정말 짓궂으신 우리 외할머니, 정말 왜 그러신 걸까?’‘너무 짓궂으셔.’다정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모두 오늘 밤에 일어난 일 때문이었다. 그 일은 강말숙도 동조한 것이 분명했다.이 생각과 함께 다정은 강말숙의 옆에 앉았다.다정이 자리에 앉자마자 강말숙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다가왔다.“오늘 밤에 너랑 여 대표는 혹시…….”강말숙은 뒷말을 하지 않았지만, 뭘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다정은 그 모습에 화가 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오늘 밤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저희는 여전히 친구예요.”“아직도 친구라고!?”강말숙은 깜짝 놀라며 눈살을 찌푸렸다.“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여 대표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거야?”강말숙은 불만스러워하며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다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