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합에서 진 걸 쿨하게 인정했다면 나도 스승님도 당신들을 괜찮은 사람들로 봤을 텐데. 이런 식으로 사람을 헐뜯다니 정말 너무 역겨워요. 다행히 스승님께서 현명하시니 성씨 가문을 당신들 손에 넘기지 않았지. 만약 넘겼다면 멍청한 당신들 때문에 성씨 가문의 몇백 년의 역사가 더럽혀신졌을 거예요!”고다정의 비꼬는 말을 들은 성재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다른 사람들도 귀속말로 소곤소곤 의논하기 시작했다.“내가 듣기엔 일리가 있어. 눈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 알 수 있잖아. 고다정 씨가 왜 멍청하게 무조건 이길 시합에 다시 독약을 먹여서 자신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겠어.”“내가 봤을 땐 저 성민준 아버지가 시합에서 지는 걸 원치 않아 하는 것 같아. 그래서 이런 핑계를 대서 다정 씨를 내쫓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 다들 잊었어? 동문끼리는 서로 죽이면 안 된다고 선조 때부터 내려오던 규칙이 있었잖아.”“흥, 저 집안은 변한 게 없네. 예전에도 잘난 척하며 둘째 나리를 모함하려다 다른 사람이 덫에 걸려서 둘째 나리 부인과 큰 부인을 적의 손에서 죽게 만든 적이 있잖아.”이 말은 소리가 작지 않았다. 말 속에는 성씨 가문에 대한 원한이 가득 담겨있었다.이 말을 꺼낸 사람은 후회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성시원을 바라봤다.다른 사람들도 모두 조용히 침묵했고 순식간에 분위기가 딱딱해졌다. 고다정도 속으로 깜짝 놀랐다.그녀는 줄곧 스승님이 여자에게 관심이 없어 혼자 지내는 줄 알았었다. 사모님이 계셨던 줄은 몰랐었다.고다정은 차가운 시선으로 다시 성재호 부자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성씨 가문을 성씨 집안의 사람들이 아니라 왜 스승님께서 나에게 넘겨주셨나 했었는데 이 집안사람들 하나같이 멍청하기 짝이 없네.'“성민준 씨, 이제 그만 일어나시죠?”고다정의 차가운 목소리가 정원에 퍼졌다.그녀의 말을 들은 사람들의 시선이 성민준에게로 향했다.주위 사람들의 시선 때문인지 기절한 척 연기를 하던 성민준의 몸이 빳빳이 굳었다
저녁이 다 돼서야 성시원과 고다정은 대화를 마쳤다.고다정은 성시원과 함께 저녁을 먹으려 했지만 성시원이 거절했다.결국 그녀는 먼저 서재에서 나와 두 아이와 외할머니를 찾아가 밥을 먹으려 했다.그녀가 정원 앞에 도착했을 때 안에서 두 아이의 웃음소리와 그녀가 생각지도 못했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정원 안에 들어서자 여준재가 눈을 가리고 두 아이와 함께 술래잡기하는 모습이 보였다.외할머니는 옆에서 그들을 보며 허허 웃고 있었다.이때, 잡히기 싫었던 고하윤은 소리를 지르며 고다정이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고다정을 미처 보지 못한 고하윤은 고다정과 부딪혔다.그녀와 부딪힌 고하윤은 두 걸음 정도 뒤로 물러난 뒤에야 똑바로 설 수 있었다.그제야 그녀를 발견한 고하윤은 기뻐하며 말했다.“엄마 오셨어요?”고하윤의 말을 들은 고하준과 강말숙도 그녀가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여준재도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을 풀고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봤다.그녀도 여준재를 바라봤다.그렇게 둘은 달달하게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언제 왔어요?”고다정이 고하윤의 손을 잡고 그에게로 걸어갔다. 그녀는 그리워하던 눈앞의 남자를 보며 물었다.여준재는 입꼬리를 올리고 씩 웃으며 말했다.“다정 씨가 위엄을 떨치고 있을 때 왔어요.”그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그가 오전에 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온 지 그렇게 오래됐으면서 왜 나에게 한마디 말도 없었어요?”“다정 씨와 어르신께서 바쁘신 것 같아 얘기 안 했어요. 그리고 다정 씨를 깜짝 놀래 주고 싶었어요.”여준재는 앞으로 다가가 고다정의 손에 깍지를 끼며 물었다.“일은 다 끝난 거예요?”고다정은 그를 흘기며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네. 거의 다 끝났어요. 나머지는 배사의식이 끝난 뒤에 스승님께서 처리해 주실 거예요.”“그럼 이렇게 해요. 요 며칠 우리 가족 밖에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와요. 준이와 윤이도 밖에 나가 본 적이 없다고 그러더라고요.”여준재가 자신의
성민준의 질의에 김창성이 대답하려고 했지만 다시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저 알 것 같아요. 김창석 씨가 분명히 작은아버지 부하들이랑 손잡고 우리 집에 잠입해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김창석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침대에 앉아 확신하는 성민준을 바라봤다.Comment by e: 맞추다는 맞히다의 잘못된 표현'무식한 것들. 이러니까 성시원에게 버림받지.'김창석의 불쾌해하는 모습을 본 성재호가 미간을 찌푸리고 성민준을 나무랐다.“넌 좀 조용히 해.”말을 마친 그는 머리를 들고 김창석을 바라보며 물었다.“방금 한 말 무슨 뜻이야?”“말 그대로입니다. 어르신께서는 저와 손잡을 마음이 있으신지요? 제가 고다정 그년을 없애고 아드님에게 후계자 신분을 드릴 수 있습니다.”김창석이 성재호에게 솔깃한 제안을 건넸다.성재호도 그의 말에 솔깃했지만 이상의 끈을 잡고 바로 동의하지 않았다.이십 년 전에 있었던 그 일이 그에게 깊은 교훈을 가져다줬다. 김창석은 성시원과 성씨 가문을 배신한 적이 있었다. 성재호는 성시원을 모함하고 싶었지만 성씨 가문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그때 일을 떠올리며 성재호가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넌? 네 조건은 뭐야?”성재호가 자신을 바로 믿지 않을 걸 알고 있었던 김창석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핑곗거리를 말했다.“제 조건은 도련님께서 후계자가 되신 후, 저의 지명 수배령을 취소하는 겁니다.”성씨 가문의 지명 수배령은 국제 수배령과 비슷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만약 김창석이 자신에게 뒷길을 마련해 놓지 않았더라면 일찍이 성시원에게 잡혔을 거다.그의 말을 들은 성재호는 의외라는 듯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김창석을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네 조건은 그것밖에 없어?”“네. 이것뿐입니다. 어르신께서 믿지 못하신다면 저도 어찌할 방법이 없네요.”김창석이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여유롭게 그를 마주 봤다.성재호는 어두운 표정으로 눈앞에 있는 사람의 목적이 이렇게 간단하지
고다정은 말을 끝내기 바쁘게 바로 후회했다.'고다정 미쳤네. 미쳤어. 예전 그 일은 스승님의 상처인데 그걸 또 까맣게 잊고 들추어내다니.'“저, 스승님. 제가 했던 말은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전 이만 친구 만나러 가볼게요.”그녀는 하하 웃으며 조금 전의 사실을 어물쩍 넘어가려 했다.이때, 성시원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어딜 도망가. 왜, 네 스승인 내가 지나간 일을 직면할 수 없을까 봐 그러는 거야?”고다정은 걸음을 멈추고 바보처럼 웃으며 돌아서서 온화한 표정의 성시원을 바라봤다.“전 그저 스승님께서 옛날 일에 대해 말씀을 안 해주셔서 물어본 것뿐이에요.”“말하지 않은 건 이미 지나간 일이기 때문이야. 말할 게 없어.”성시원이 담담하게 말하자 고다정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스승님께서는 이제 괜찮으신 거예요?”궁금해 죽겠다는 고다정의 눈빛을 바라보며 성시원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방금 친구들 만나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 왜 아직도 안 가고 있어?”“...”고다정은 할 말을 잃은 채 결국 자리를 떠났다.성시원이 예전 일을 진짜로 내려놨든 아니든 그녀는 제자로서 자신의 호기심 때문에 스승님의 아픈 상처를 들추어낼 자격이 없었다.몇 분 뒤, 그녀는 자기 집 정원에 도착했다. 북적북적한 말소리도 들리고 고기 굽는 냄새도 바람 타고 풍겨왔다.정원에 들어선 고다정은 고기를 굽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맛있겠다.”“엄마, 돌아오셨어요?”두 아이는 고다정을 보고 기름진 얼굴로 달려왔다.아이들 뒤로 임은미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고기를 구우며 그녀에게 소리쳤다.“다정아, 빨리 와서 내가 구운 것들 좀 먹어봐. 예전보다 굽는 솜씨가 더 좋아진 것 같아.”그녀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두 아이와 함께 사람들 쪽으로 걸어갔다.“어머님, 아버님, 신수 어르신, 원빈 어르신 그리고 채 선생님 정말 미안해요. 오늘 바쁜 일 때문에 마중 나가지 못했어요. 제 스승님께서도 접대가 소홀한 것 같다고 미안해하고 계세요. 그래서 성씨
늦은 시각, 그들은 바비큐 파티를 끝내고 돌아가서 휴식할 준비를 했다.이때, 고다정이 임은미를 불렀다.“은미야, 속이 더부룩해서 그러는데 나와 함께 화원에 가서 좀 걷자.”“화원? 좋지.”임은미는 고다정이 왜 자신을 불렀는지 의아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미간을 찌푸리고 알 수 없다는 듯이 고다정을 바라봤다.여준재의 의아한 표정을 본 고다정은 그의 곁으로 가서 둘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은미한테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요. 준이와 윤이 데리고 먼저 방에 가 있어요. 금방 돌아올게요.”엄숙한 표정으로 말하는 고다정을 본 여준재는 더는 묻지 않았다.“그럼 빨리 돌아와요.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말을 마친 그는 피곤해하는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떠났다.임은미도 남자친구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성휘 씨도 돌아가요. 나와 다정이는 소화도 시킬 겸 좀 걷다가 들어갈게요.”“...”채성휘는 어이가 없었지만 흥이 나 있는 여자친구를 보며 별말 하지 않았다.그들이 떠난 뒤, 정원에는 임은미와 고다정만이 남게 됐다.임은미는 다정하게 고다정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소화시키러 가자.”고다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와 함께 화원으로 걸어갔다.가는 길에 임은미는 가볍게 뛰며 고요한 주위를 둘러보다가 감탄했다.“그러고 보니 우리 이렇게 밖에서 산책한 지 오래됐네.”“그러네. 한동안 걷지 않았었네.”고다정이 그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이내 그녀는 자신이 임은미를 왜 불러냈는지 생각하고는 걸음을 멈추고 임은미에게 말했다.“손 줘봐.”“왜 그래?”임은미는 의아했지만 고분고분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고다정은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고 맥을 짚어봤다.시간은 일분일초 흘러갔고 임은미는 엄숙한 고다정의 표정을 보며 불안해했다.“다정아, 나 무슨 병이라도 걸린 거야?”“저쪽 손도 줘봐.”고다정은 바로 대답해 주지 않고 임은미에게 다른 한쪽 손도 달라고 말했다.어찌할 방법이 없었던 임은미는 다른 한쪽
채성휘는 발그레해진 임은미의 볼을 보고 관심하며 물었다.“열나는 거예요? 얼굴이 빨개요.”“조금 전까지 멀쩡했는데 나갔다 왔다고 열이 나진 않죠.”임은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그도 약사지만 남다른 의학 상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채성휘는 모르는 게 아니라 마음속의 걱정이 기본 상식을 잊게 만든 것이었다.“열나는 게 아니면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요?”“아휴, 더 이상 물어보지 말아요. 나 성휘 씨에게 할 말이 있어요.”임은미가 쑥스러워하며 화제를 돌렸다.설마 고다정이 맥을 짚어본 뒤 그녀에게 절제하라고 한 얘기를 채성휘에게 말하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채성휘는 갑자기 화를 내를 그녀를 보며 의아하다고 느꼈지만 그래도 좋게 말했다.“알았어요. 물어보지 않을게요. 나에게 말하려고 하는 게 뭐예요?”“나...”임은미는 머뭇거리다가 채성휘의 의아한 눈빛을 보고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말을 꺼냈다.“나 임신했어요!”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방안은 고요해졌다.임은미는 아무런 반응도 없는 남자를 보며 마음이 무거워졌다.“왜 말이 없어요? 이 아기 지우고 싶은 거예요?”그녀의 말을 들은 채성휘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며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었다.“아니요. 난 그런 뜻이 아니에요. 은미 씨 깊게 생각하지 말아요. 내가 방금 너무 놀랐어요.”“진짜예요?”임은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바라봤다.채성휘도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그녀를 침대에 앉히며 말했다.“그럼요. 진짜예요. 방금 나가서 걷다가 와서 피곤하죠? 내가 뜨거운 물을 받아 올 테니 발 좀 담가요. 임산부들이 밤에 편히 자기 힘들다고 들었어요. 아 참, 내일 다정 씨에게 임신 기간에 어떤 걸 조심해야 하는지 물어보고 올게요. 그리고 여기서 돌아가는 대로 양가 부모님들을 찾아 봬야 할 것 같아요. 빨리 결혼식 준비를 해야겠어요. 은미 씨 배가 불러온 뒤에 드레스를 입으면 예쁘지 않잖아요.”그녀는 말하면서 한편으로 뜨거운 물을 준
성씨 가문의 사당은 저택의 제일 안쪽에 있는 남북으로 통하는 정원에 자리 잡고 있었다.주변에 있는 건물들도 깨끗해 보이는 것이 매년 정성 들여 관리를 한 것 같았다.고다정이 도착했을 때 정원에는 적지 성씨 가문의 사람들이 이미 자리하고 있었다.하지만 대부분이 적손이 아닌 사람들이었고 적손인 사람들로는 고다정과 그녀의 스승 그리고 성재호뿐이었다.고다정은 성재호의 원망 가득한 눈빛을 무시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성시원의 아래쪽에 자리를 잡고 섰다.그렇게 그들이 몇 분을 더 기다리자 성씨 가문의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그제서야 성시원은 부한에게 다음 절차를 시작할 것을 지시했다.“사당 문을 열겠습니다.”부한의 말이 떨어지자 도우미들이 굳게 닫혀 있던 사당 문을 열었다.이를 본 부한이 계속 이어 말했다.“주인님은 앞으로 나가서 향에 불을 붙이고 조상님들께 인사해 주세요.”복잡한 예의 절차로 인해 제사는 반 시간이나 지나서야 끝이 났다. 그 다음으로는 배사의식이 시작되었다.“오늘 사당 문을 열고 조상님들을 찾아뵌 건 두 가지 일 때문입니다.”성시원이 계단 위에 서서 엄숙한 표정으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첫 번째는 여기 계신 모든 분께서 알다시피 성민준과 제 제자가 시합을 했었습니다. 성민준이 진다면 그들은 성씨 가문에서 분가해서 나가 따로 가문을 세우기로 했었습니다. 이에 승복하시나요? 성재호 씨, 이의 있습니까?”“분가하는 건 이의 없습니다. 그러나 내 아들이 중독된 사실에 대해서는 가주께서 해명을 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성재호가 어두운 표정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시합은 되돌릴 수 없는 방법이 없다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고다정이 성씨 가문의 후계자가 되는 게 못마땅했다.그는 바로 무릎을 꿇고 성시원의 뒤에 있는 조상님들의 위패를 보며 소리쳤다.“스승님들께서 세운 규칙이 동문 간에 서로 해하면 안 된다는 게 아니었습니까? 제 아들이 시합에서 진 건 인정합니다. 이에 불만 없습니다. 하지만 누군
사용인은 고다정이 떠나가는 모습을 보고 급히 쫓아왔다.“사모님, 지금 하윤 아가씨와 하준 도련님을 찾으러 가시는 거라면 제가 마지막에 있었던 장소를 알고 있습니다.”“안다고요? 그럼 빨리 앞장서요.”아이들이 위험에 빠지면 어쩌지? 머릿속에 이 생각밖에 없는 고다정은 사용인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소담과 화영도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다.그들도 고다정과 마찬가지로 쌍둥이가 몹시 걱정됐다.그들은 심지어 쌍둥이가 실종된 것이 큰 집의 음모와 연관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그렇게 세 사람은 사용인을 따라 점점 더 외진 곳으로 갔다.주변에 널린 폐가를 보고 끝내 이상함을 눈치챈 고다정은 미간을 찌푸렸다.깔끔한 성격인 준이와 윤이는 절대 이렇게 황폐한 곳에 놀러 올 리가 없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고다정은 급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소담과 화영은 그녀의 굳은 표정을 보고 걱정스레 물었다.“작은 사모님, 왜 그러세요?”이때 사용인은 고다정이 근처의 작은 문 앞에서 멈춰 선 것을 발견하고 급히 고다정을 불렀다.“작은 사모님, 빨리 오세요. 이 문을 나가면 하윤 아가씨와 하준 도련님이 실종된 곳에 도착합니다.”“아까 준재 씨가 사람을 보내 두 아이를 찾고 있다 하지 않았어요? 왜 오는 길에 다른 사람들을 보지 못했죠?”고다정은 그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서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용인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사용인의 표정이 확 변했다.그녀가 변명하려 할 때 고다정이 재차 질문했다.“그리고 준이, 윤이가 실종됐다고 했다가 또 실종된 곳을 안다고, 앞뒤가 맞지 않잖아요? 말해요. 누가 보냈어요?”이 말을 들은 사용인은 한참 동안 고다정을 지그시 쳐다보더니 갑자기 비아냥거렸다.“반응이 빠르네요. 이렇게 빨리 수상한 점을 감지하다니. 그런데 아쉽지만 알아채도 이미 늦었어요.”그녀는 우쭐거리며 손뼉을 두 번 쳤다.고다정은 그녀의 동작을 보고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다.“우리 돌아가요.”소담과 화영이 즉시 그녀의 손을 잡고 되돌아가려 했다.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