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인은 고다정이 떠나가는 모습을 보고 급히 쫓아왔다.“사모님, 지금 하윤 아가씨와 하준 도련님을 찾으러 가시는 거라면 제가 마지막에 있었던 장소를 알고 있습니다.”“안다고요? 그럼 빨리 앞장서요.”아이들이 위험에 빠지면 어쩌지? 머릿속에 이 생각밖에 없는 고다정은 사용인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소담과 화영도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다.그들도 고다정과 마찬가지로 쌍둥이가 몹시 걱정됐다.그들은 심지어 쌍둥이가 실종된 것이 큰 집의 음모와 연관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그렇게 세 사람은 사용인을 따라 점점 더 외진 곳으로 갔다.주변에 널린 폐가를 보고 끝내 이상함을 눈치챈 고다정은 미간을 찌푸렸다.깔끔한 성격인 준이와 윤이는 절대 이렇게 황폐한 곳에 놀러 올 리가 없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고다정은 급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소담과 화영은 그녀의 굳은 표정을 보고 걱정스레 물었다.“작은 사모님, 왜 그러세요?”이때 사용인은 고다정이 근처의 작은 문 앞에서 멈춰 선 것을 발견하고 급히 고다정을 불렀다.“작은 사모님, 빨리 오세요. 이 문을 나가면 하윤 아가씨와 하준 도련님이 실종된 곳에 도착합니다.”“아까 준재 씨가 사람을 보내 두 아이를 찾고 있다 하지 않았어요? 왜 오는 길에 다른 사람들을 보지 못했죠?”고다정은 그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서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용인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사용인의 표정이 확 변했다.그녀가 변명하려 할 때 고다정이 재차 질문했다.“그리고 준이, 윤이가 실종됐다고 했다가 또 실종된 곳을 안다고, 앞뒤가 맞지 않잖아요? 말해요. 누가 보냈어요?”이 말을 들은 사용인은 한참 동안 고다정을 지그시 쳐다보더니 갑자기 비아냥거렸다.“반응이 빠르네요. 이렇게 빨리 수상한 점을 감지하다니. 그런데 아쉽지만 알아채도 이미 늦었어요.”그녀는 우쭐거리며 손뼉을 두 번 쳤다.고다정은 그녀의 동작을 보고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다.“우리 돌아가요.”소담과 화영이 즉시 그녀의 손을 잡고 되돌아가려 했다.
전화를 끊은 후 성시원은 연이어 몇 개 명령을 내렸다.그는 큰 집 사람들이 떠나지 못하게 붙잡고, CCTV를 돌려본 후 고다정이 없어진 지점을 알아내라고 지시했다.여준재도 움직이기 시작했다.저택 전체 분위기가 삽시간에 무거워졌다.손님들은 뜰에 끊임없이 경호원이 드나드는 것을 보고 어렴풋이 무슨 일이 생겼음을 눈치챘다.“무슨 일이 있어요? 성씨 가문의 개인 경호원까지 출동했던데?”“글쎄요. 방금 한 사람을 붙잡고 물었더니 별일 없다네요.”“아무리 봐도 무슨 일이 있는 건데. 성씨 가문에서 우리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가 봐요.”사람들은 의견이 분분했다.여진성 부부도 여준재에게 전화해 물었다.“밖에 무슨 일이 있어? 마당에 경호원들이 몇 번 왔다 가고, 더러는 남고.”“너 우리한테 숨기면 안 돼.”부모님이 묻고 다그치자 여준재는 사실대로 알렸다.“다정 씨가 실종됐어요. 아직 저택을 떠났는지, 다정 씨만 목표인지 아무것도 몰라요. 그래서 어르신과 제가 신변 보호를 위해 경호원을 보낸 거예요.”“뭐? 다정이가 실종됐다고?”심해영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그녀의 음성이 갑자기 높아지자 여준재가 주의를 주었다.“어머니, 목소리를 낮추세요. 다정 씨 외할머니와 준이, 윤이가 들으면 안 돼요. 그 세 사람은 아직 몰라요.”“오, 알았어. 지금 다정이 소식은 있어?”심해영이 목소리를 낮추고 다급히 물었다.“이 일은 오래 숨기지 못해. 오후 배사의식 전에 찾지 못하면 어르신은 틀림없이 알게 될 거야. 그때 가서 놀라는 건 똑같아.”“알아요. 하지만 우리가 그 전에 다정 씨를 찾을 수도 있잖아요.”여진성이 다른 의견을 내놓자, 여준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기 생각을 털어놓았다.이때 밖에서 들어온 구남준이 공손한 말투로 보고했다.“대표님, 소담과 화영을 찾았습니다.”이 말을 들은 여준재는 급히 부모님과 한마디 하고 전화를 끊었다.“단서가 나와서 먼저 끊을게요.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휴대폰을 내려놓고 여준재는 무거운 표정으로 구남준을 바라보
부한의 말을 들은 성시원은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 마당은 왜 분리되어 나갔어?”“어르신, 지금 그걸 조사할 때가 아니에요. 그자들이 다정 씨를 어디로 데리고 나갔는지 알았으니 사람을 파견해 추격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여준재는 성시원의 말을 자르고 불만스레 한마디 했다.성시원은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뭐가 중요한지 알아. 단지 이 마당을 이렇게 나눈 것이 이상해서 그냥 한마디 물어본 거야.”이때 부한이 뭔가 생각난 듯 갑자기 입을 열었다.“기억났습니다. 10년 전 저택 보수 공사를 할 때 김창석이 작은 나리께서 저택을 재구성하고 너무 낡은 곳은 저택 범위에 넣지 말라고 하셨다며 설계도를 내밀었습니다. 그때 그 설계도에 따라 일부 낡은 마당의 CCTV를 제거했습니다.”이 말을 들은 성시원의 안색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졌다.이건 김창석이 오래전에 만들어 놓은 퇴로인 게 분명하다.“젠장, 다정이를 잡아간 게 그놈이었네.”그는 이를 바득바득 갈더니 지시를 내렸다.“경호팀을 전부 내보내서 아가씨를 반드시 찾아내도록 해. 교통경찰에 연락해 태산시에서 밖으로 통하는 모든 도로를 봉쇄해달라고 부탁하고.”그런데도 오후까지 고다정 실종에 관한 아무 단서도 찾지 못했다.배사의식 시간이 임박하자 성시원은 어쩔 수 없이 날짜 변경 통지를 내렸다.이 소식이 전해지자 구경하러 온 손님들은 전부 어리둥절해졌다.“어떻게 된 거야? 왜 갑자기 날짜를 변경하지?”“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니야?”“그런 거 같아.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사람들은 의견이 분분했다.임은미와 강말숙도 이 소식을 듣고 이상하게 생각했다.“왜 갑자기 취소한 거죠?”임은미가 턱을 괴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채성휘를 쳐다보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다정 씨한테 전화해 봐요.”이 말이 나오자 강말숙과 쌍둥이는 모두 임은미를 쳐다보았다.시선을 한 몸에 받은 임은미는 눈을 깜박이더니 말했다.“그러면 내가 전화해 볼게요.”
김창석의 말을 듣고 손건우는 안색이 돌연 어두워졌다.바보가 아닌 이상 김창석의 뜻을 모를 리 없다. 다른 누군가가 고다정을 노리고 있는데,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다가 결실을 낚아채고 죄는 그들에게 덮어씌우려 한다는 것이다.“X발, 나한테 걸리기만 해 봐. 내가 기어코 죽여버릴 거야. 감히 나를 갖고 꿍꿍이를 꾸며?”손건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욕을 퍼부었다.김창석은 화나서 펄펄 뛰는 그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그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지금 중요한 건 앞으로 닥칠 일에 어떻게 대응하냐는 거예요.”“어떻게 하긴요? 고다정이 손에 있는 것처럼 성시원과 협상해야죠.”손건우가 이를 악물고 표독스럽게 말했다.“설마 성시원과 여준재에게 고다정이 우리 손에 없으니 살려달라고 말할 작정인가요? 그들이 믿을 거라고 생각해요?”이 말을 들은 김창석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흘겨보았다.“그런 뜻이 아니에요. 하지만 원래 계획대로 진행하려면 다시 판을 짜야 해요.”여준재는 이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그들은 하루 종일 아무 단서도 찾지 못했다.강말숙과 쌍둥이는 고다정이 잡혀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불안에 빠졌다.임은미도 너무 걱정되어 찾아 나설 생각까지 했지만 채성휘가 말렸다.“사람 찾는 일은 여 대표님과 성시원 선생님이 알아서 하실 거예요. 도움이 되고 싶으면, 여 대표님을 도와 어르신과 두 아이나 잘 달래요. 초조해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지 않게 말이에요. 그리고 당신은 지금 아이를 가졌고 상태도 불안정한데, 사람 찾으러 나간다면 돕는 것이 아니라 여 대표님께 폐를 끼치는 거예요.”이 말에 마음이 울적했지만 그녀도 채성휘 말이 맞다는 것을 알았다.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여 대표와 고다정을 도와 쌍둥이와 외할머니를 잘 돌보는 것뿐이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고 강말숙을 보러 갔다.“외할머니, 방에 계셔요?”“응.”강말숙이 대답한 후 쌍둥이를 시켜 문을 열었다.방문이 열리고 임은미의 눈에 바로 들어
고다정이 몇 번 소리쳐서야 만만찮아 보이는 우람한 체격의 외국인 남성이 들어왔다.“누구세요?”그를 본 고다정이 긴장하며 물었지만 남자는 그녀와 말을 섞을 의향이 없었다. 그저 차가운 눈길로 그녀를 힐끗 보고는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아가씨한테 위층 여자가 깨어났다고 전해.”아가씨?고다정은 그 말의 핵심을 포착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아가씨가 누굴까?하지만 그녀가 묻기 전에 그 남자는 문을 닫고 가버렸다.고다정은 의문을 뒤로 하고 냉정해지려 애썼다.그 사람이 아가씨한테 통지했다면 조만간 만날 수 있겠지.사실상 확실히 그랬다. 그 남자가 떠나고 5분도 안 돼서 문밖에서 하이힐 소리가 들렸다.몇 초 후 방문이 열리고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문 앞에 나타났다.“임초연?”“오랜만이야, 고다정, 나를 보고 놀랐어?”임초연은 입가에 묘한 웃음을 띄운 채 오만한 자태로 침대 옆에 다가와 고다정을 내려다보았다.고다정은 이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임초연이 나타난 것이 절대 우연은 아닐 것이다.“나를 잡아 온 게 너였어?”고다정이 나지막이 캐물었다.임초연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무슨 뜻이야?”고다정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임초연은 그녀를 뚫어지게 보더니 느긋하게 말했다.“누가 너더러 그렇게 많은 사람한테 미움을 사래? 네가 잘되는 걸 못 보는 사람이 너무 많아. 단지 그 사람들이 직접 나설 수 없어 내가 온 것뿐이야.”그녀는 고다정의 얼굴을 손으로 만지며 사악한 목소리로 말했다.“너 이 얼굴로 여준재를 유혹했지? 진짜 이 얼굴을 망가뜨리고 싶어.”고다정은 말장난이 아닌 것 같아 마음을 졸였다.지금 온몸에 힘이 없는 그녀는 임초연이 무슨 짓을 해도 반항할 방법이 없다.그녀가 자구책을 고민하고 있을 때 임초연이 그녀의 초조한 마음을 꿰뚫어 봤는지 피식 웃었다.“쫄긴. 걱정하지 마. 네 얼굴을 망가뜨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만 그건 너무 쉬운 벌이야. 나는 네가 죽는
한편, 며칠 동안 계속 고다정의 소식이 없는 바람에 여준재도 며칠 동안 쉬지 못했다. 그는 눈에 띄게 야위고 초췌해졌지만 누가 말려도 소용없었다.고다정이 아직 행방불명이고 심지어 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만 하면 그는 초조해졌고, 자기가 아직 힘이 부족한 것이 한스러웠다. 아니면 이렇게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 감감무소식일 수 없을 텐데.결국 나흘째 되던 날 여준재는 몸이 한계에 달해 과로로 쓰러졌다.그뿐이 아니라 줄곧 잘 관리해 오던 지병이 그에게 복수라도 하듯 이번에 재발해 사나운 기세로 밀려왔다.여준재가 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에 여진성 부부와 강말숙은 깜짝 놀랐다.그들이 부리나케 여준재의 방에 와보니 성시원이 여준재에게 침을 놓고 있었다.쌍둥이는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는 혼수상태의 아빠를 보고 눈시울이 붉어지며 눈물이 핑 돌았다.하지만 그들은 의사가 진료 중일 때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엄마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여진성 부부와 강말숙도 성시원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조용히 옆에 서 있었다.몇 분 뒤, 성시원은 마지막 침을 꽂은 후 허리를 펴더니 옆에 있는 부한이 준비한 수건으로 손과 이마의 땀을 닦았다.이때 그는 곁눈으로 옆에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눈치채고 나지막이 말했다.“오셨어요?”“스승 할아버지, 아빠 어때요?”쌍둥이가 울먹거리며 물었고, 여진성 부부와 강말숙도 걱정스레 그를 쳐다보았다.성시원은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지병이 재발했는데 악화 조짐이 보여요.”이 말이 나오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가슴이 떨렸다.“어떻게 이럴 수 있죠? 다정이가 치료할 때 호전되고 있다고 했는데?”심해영이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여진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얼굴은 심해영과 마찬가지로 왜 그런지 알고 싶은 표정이었다.강말숙이 짐작 가는 게 있는 듯 말했다.“혹시 요 며칠 준재가 제대로 쉬지 못해서 그런 거예요?”“그 원인이 큽니다. 몸이 극도로 피로해 각종 지표가 떨어지면 바이러스도 이 틈을 타서
여준재는 깨어났을 때 지독한 약 냄새를 풍기는 새카만 목욕물이 담긴 나무통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그가 어리둥절해할 때 귓가에 성시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깼어?”“이게 뭐 하는 거예요?”여준재가 미간을 찌푸리며 캐물었다.그는 나무통 가장자리를 짚고 일어서려 했지만 일어서기는커녕 하마터면 나무통 안에 고꾸라질 뻔했다. 성시원이 그의 동작을 보고 어이없어하며 말했다.“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걸. 나무통이 튼튼하지 않거든.”여준재가 맥없이 나무통 가장자리에 기대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방금 전의 동작에 온몸의 힘을 쏟은 듯했다.그는 한참 후에야 숨을 고르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질문했다.“저 왜 이래요? 왜 이렇게 힘이 없죠?”“자네 지병이 재발했는데 상황이 안 좋아. 자네 부모님 의견을 물은 후 치료를 시작했어. 한 달 정도 치료하는 동안 힘이 없을 거야.”성시원은 설명하면서 조제한 약재를 순서대로 나무통에 쏟아 넣었다.여준재는 진중한 표정을 짓더니 잠시 후 무슨 결정을 내린 듯 일어서려고 버둥거리며 나지막이 말했다.“지금 치료하지 않겠습니다. 악화되지 않게 관리만 해 주십시오.”성시원은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덤덤하게 물었다.“치료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여준재는 힘겹게 고개를 저으면서 일어나 나무통에서 나오려고 애를 썼다.이때 그의 귓가에 성시원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치료하지 않으면 마지막 치료 기회를 놓치게 되어 길어서 10년 안에 죽게 될 거야.”말을 마친 성시원은 무표정하게 손을 뻗더니 간신히 일어선 여준재를 손쉽게 다시 나무통에 밀어 넣었다.그는 여준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자네가 다정을 걱정한다는 걸 알아. 하지만 내가 있으니 착실하게 병 치료해. 내 제자가 남편을 잃고 내 손주들이 아빠를 잃는 것을 바라지 않아.”밀려 넘어진 여준재는 약물을 몇 모금 삼키고 나서야 겨우 몸을 일으켜 앉았다.성시원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성시원도 그
고다정이 잡혀간 지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다.그사이 여준재는 매일 성시원에게 추적 상황을 물었지만 한 번도 좋은 소식이 없었다.그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를 때쯤 성시원이 끝내 유용한 정보를 가지고 왔다.“손건우가 끝내 참지 못하고 연락이 왔어. 내일 200억 현금과 손씨 가문의 자산 문서들을 가지고 조양부두에서 만나자네.”“제가 갈게요!”고다정을 직접 데려오고 싶은 여준재는 생각도 해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성시원도 그의 생각을 알지만 동의하지는 않았다.“자네 지금 상태로는 침대에서 내려오기도 힘든데 가서 뭐 하려고? 돌발 상황이 생기면 어떡할 거야? 자네는 자신을 지킬 능력도 없는데 어떻게 다정을 지켜?”“저는 자신을 지킬 능력이 없지만 제 부하가 있잖아요. 어쨌든 저는 직접 갈 거예요. 어르신께서 반대해도 저를 막을 수는 없어요.”여준재는 차갑고 단호한 눈빛으로 성시원을 쳐다보았다.그와 몇 초간 대치한 후 성시원은 결국 패전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자네가 꼭 가겠다면 우리의 계획을 잘 세워봐. 어쩌면 자네 허약한 상태로 손건우 그 늙다리를 현혹시킬 수 있을지도 몰라.”...이튿날 오후, 준비를 마친 여준재가 휠체어에 앉아 출발을 기다렸다.여진성 부부와 강말숙은 그가 고다정을 납치한 사람들을 만나러 간다는 소리에 모두 걱정이 되어 문밖까지 배웅을 나왔다.“어찌 됐든 너 자신과 다정을 잘 지켜야 한다는 걸 잊지 마.”“아빠 조심히 다녀오세요. 저희는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다치지 않도록 조심해.”강말숙도 눈시울을 붉히며 당부했다.여준재는 그들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고 쌍둥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무심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별일 없을 거예요. 이번에 성시원 어르신도 같이 가요.”여준재 뒤에 서 있던 구남준도 그들을 안심시켰다.“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대표님을 잘 지킬 겁니다.”한바탕 당부한 후, 여준재는 구남준과 함께 떠났다.그들은 약속대로 오후 3시 반에 조양부두에 도착했다.그들이 나타나자마자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