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앞에 안개가 낀 듯 고다정의 시야가 흐릿했다.손을 뻗었지만 다섯 손가락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다른 감각들은 더 선명해졌다.마치 한 덩어리의 화염이 온몸을 감싸고 뜨거운 파도가 이따금 엄습하는 것 같았다.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격정적인 움직임이 그녀를 뒤흔들었다. 여자를 반드시 소유하겠다는 의미를 가진 듯한 몸짓이었다.다정은 눈을 힘껏 떠 상대방을 똑똑히 보려고 했지만 눈꺼풀이 천근만근이라 뜰 수가 없었다.얼마나 지났을까, 거센 폭풍이 멈췄다. 마침내 그 남자의 단단하고 섹시한 가슴을 볼 수 있었다. 왼쪽 가슴에 날개를 펴고 비상하는 검은 매가 있었다. 날카로운 맹금류 특유의 눈길로, 흉흉하게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신의 눈길과 마주한 것처럼, 고다정은 온 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으아아악…….”다정은 비명을 지르며 꿈에서 놀라 깨어났다.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침대에서 일어난 다정, 9개월 된 만삭의 배로 동작이 서툴고 힘겨웠다.옆에서 자고 있던 강말숙이 외손녀의 인기척을 느끼고 벌떡 일어났다.“왜 그래? 다정아, 또 악몽을 꾼 거야?”다정은 기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강말숙은 핼쑥한 외손녀의 얼굴을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달랬다.“그때 그 일…… 절대 네 잘못이 아니야.”“그럴까요? 그런데 다들 저를 손가락질하고, 비난하고…… 자업자득이라고 해요.”다정은 초점 잃은 눈빛으로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9개월 전, 그녀는 고 씨 가문의 금지옥엽으로, 소꿉친구인 진시목과 약혼을 앞두고 있었다.하지만, 순조롭게 진행되던 결혼 준비가 약혼 전날 와장창 박살 났다. 그날 밤, 예비신부 고다정이 모르는 남자한테 정조를 잃은 것.그 다음날 스캔들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다.[파격 일탈! 운산시 명문가 장녀의 약혼 전날 원나잇!!]다정은 하룻밤 사이에 모든 것을 잃었다.어머니 강수지는 이 일로 충격을 받아 번개탄을 피워 자살했다.아버지 고경영은 고 씨 집안 망신이라며, 인연을 끊겠다는 불호령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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