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로 고다정은 이틀 간 서재에서 성가 관련 서적을 익히느라 여념이 없었다.쌍둥이도 이를 잘 알기에 의젓하게 강말숙과 시간을 보낼 뿐 고다정을 방해하지 않았다.대신 성가의 방계 친족들이 소식을 정탐하기 위해 고다정을 찾아왔지만 모두 부한에게 문전박대 당했다.부한은 부철광이 입양한 아들인데 그에 의해 만능 집사로 길러졌다.부철광은 고다정이 성가에 온 다음 날이 되어서야 부한을 소개했다. 이유는 부한이 맡은 임무를 수행하러 밖에 나가 있었기 때문이다.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 사흘 동안 고다정은 관련 서적을 어느 정도 익혔다.나흘째 되는 날, 첫날 이후로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성시원이 나타났다."요 며칠 어떻게 지냈어. 누가 시비는 안 걸었고?""편하게 지냈어요. 시비 거는 사람도 없었고요."살짝 웃던 고다정이 피곤해 보이는 성시원을 걱정했다."괜찮으세요? 조금 야위신 것 같은데. 설마 그동안 제대로 안 주무신 건 아니죠?"그에 성시원이 손을 저었다."괜찮아. 다 읽었으면 내일부터 집사들한테 너 보러 오라고 할게."잠깐 말을 잃은 고다정이 생각에 잠겼다. 요 며칠 성시원은 급하게 고다정에게 모든 일을 인수인계하려는 태도를 고수했다."스승님, 저한테 숨기는 거 있죠?""왜 그렇게 생각하지?"성시원이 미간을 좁힌 고다정에게 시선을 맞추자 고다정이 말했다."얼른 저한테 넘기시려는 거잖아요. 스승님 나이면 아직 십 년은 넘게 맡으실 수 있을 텐데..."성시원이 눈썹을 치켜세웠다."왜. 그동안 뼈빠지게 일한 세월이 얼마인데, 먼저 퇴직하면 안 되나? 꼭 내가 여든 넘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할 때가 돼야 물러나게 할 거야?""그건 아니지만..."고다정의 말문이 또 막혔다."맞는 것 같은데?"성시원이 불만을 알리듯 코웃음을 쳤다.그에 고다정이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코끝을 슬쩍 긁었다. 그러다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가까이 가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다."화내지 마세요, 스승님. 그냥 좀 부자연스러우니까 그렇죠.""뭐가 부자연스러워
경고를 들은 고다정이 어쩔 수 없이 무안하게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개를 돌려 성재호를 본 성시원이 낮게 말했다."네 주제에 무슨 성가 무덤에 함께 묻히기를 바라?"그 말에 얼굴이 터질 듯 빨개진 성재호가 살기를 띤 채 주먹을 꽉 쥐었지만 성시원은 안 보이는 것 마냥 말을 이었다."그리고 자꾸 늙은이 얘기 꺼내지 마. 한 번 맡기로 한 이상 우리 가문에 불리한 일은 안 하니까.""너무 확신하지 마세요, 작은아버지."성민준이 참지 못하고 대들었지만 성시원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네 말은 내가 성가에 해가 되는 일을 했다는 뜻이구나.""작은아버지, 정말로 저희 가문을 생각하신다면 저런 피 한 방울 안 섞인 여자한테 주시면 안 되죠. 저 여자는 후계자 자격이 없어요."성민준이 고다정에게 삿대질했다.대화를 듣던 고다정이 얼굴을 구기고 몇 마디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솔직히 다른 사람이라면 이 자리를 가지고 싶어 했겠지만 고다정에게는 아무런 메리트가 없었다. 성시원이 맡아 달라 한 게 아니었다면 절대 이 귀찮은 일을 맡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고다정의 생각을 모르는 성시원이 답했다."너희한테는 아무런 관계 없는 사람일지 몰라도, 나한테는 친 제자라 늙으면 날 돌봐줄 텐데. 자식이랑 다를 게 뭐야. 다정이한테는 자격이 없고, 너희들은 자격이 있다 생각하는 건가?""물론 제가 작은아버지 자식이 아니긴 하지만, 전 적장자예요. 저희 아버지께서는 작은아버지께 평생 아이가 없을 것이라 예상하고 절 입양 보내실 생각이셨어요. 그래서 쭉 후계자 신분으로 기르셨고 작은아버지만 동의하신다면 작은아버지 자식으로서 돌아가실 때까지 지극정성으로 모실 수 있어요."성민준이 간절하게 말했지만 성시원의 화만 더 돋울 뿐이었다."그쪽 사람들이 치밀한 건 여전하네. 성재호, 나한테 아이가 왜 안 생겨? 내가 또 말해 줘야 하나? 여기 얌전히 계획에 따라 줄 천치는 없어."성재호 부자가 말을 잃은 사이 고다정이 내심 놀랐다.‘스승님께 아이가 생길 수 없다니… 어쩐지
고다정의 말에 성시원이 자기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이건 너무 도박이었다. 하지만 성재호 무리의 마음에는 쏙 든 듯했다.성재호가 자기 아들과 눈빛을 슬쩍 나누더니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성시원에게 말했다."이게 무슨 보상이라고 할 수 있나. 둘째 네가 좀 말려 봐라.""그딴 연기는 집어치우고 마음에 드는 것 같으니까 보상은 이걸로 하지."가식이 마음에 안 들었던 성시원은 그냥 그렇게 하기로 했다. 게다가 고다정을 완전히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기 제자가 성민준에게 질 리 없다는 것이다.그 태도에 성재호가 언짢아했지만 심호흡 두 번에 화를 억눌렀다."보상은 정해졌으니 대결에 대해 상의해 보지."성시원은 별말 없이 그저 그들이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봤다."대결은 3판 2선승으로 두 번 먼저 이기는 사람이 이기는 게 어떨까요?"자기 아버지를 등에 업고 득의양양해진 성민준이 앞으로 나와 제안했다."좋아요."고다정이 끄덕이자 성민준이 말을 이었다."심판은 성가 사람들이 보는 걸로 해도 괜찮죠? 작은아버지.""그런 건 내가 아니라 다정이한테 물어."성시원이 코웃음 쳤다.고다정은 물론 동의했다.성재호 부자가 질까 두려워 무슨 꼼수를 부릴지 모르니 다른 사람들을 부르는 게 나았다."대결 내용은요? 아직 말 안 하셨는데."고다정이 묻자 가식적으로 웃은 성민준이 답했다."다정 씨,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대결 내용은 제가 생각해 봤는데, 첫 번째 라운드는 제독과 해독. 만든 독을 상대에게 먹이고 먼저 해독한 사람이 이기는 걸로.“"좋아요. 두 번째 라운드는요?"고다정이 끄덕이고 곧바로 물었다."두 번째 라운드는 독 구별하기요. 심판이 준 백여 가지 약재 중에서 백 가지 약재를 더 빠르고 정확하게 맞힌 사람이 이기는 거예요. 마지막은 뒷산에서 더 가치 있은 약재 찾는 사람이 이기는 건데, 여기까지 올 수 있을까 모르겠네요."고다정을 흘깃 본 성민준은 역시 자신이 이길 것이라고 확신했다.귀찮게 입씨름하고 싶지 않았던 고다정이 덤덤하게 말했
두 시간이 지나고 심판이 호루라기를 불었다. 완성한 독을 공개할 때가 온 것이다."만든 독을 교환하고 복용하세요."심판의 말에 고다정과 성민준이 다시 마주했다."지금 번복해도 안 늦어요. 제가 만든 독은 절대 평범한 독이 아니에요. 해독한다 해도 후유증이 남을 거란 말이에요."성민준이 다시 고다정에게 포기를 권유했다."후회 안 해요. 그리고 잊으셨나 본데, 그쪽도 독을 먹어야 해요."고다정이 픽 웃으면서 독이 든 도자기 병을 넘겼다.도발에 완전히 넘어간 성민준이 거칠게 그 병을 받았다.교환한 독은 심판의 말과 함께 두 사람의 몸으로 들어갔다.독이 식도를 넘어가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안색이 변했다. 그 다음에는 동시에 피를 토했다.그에 보던 사람들이 모두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저거 독성이 보통 아닌 것 같던데... 해독할 때까지 못 버티는 건 아니겠지?""민준 도련님은 그렇다 쳐도, 고다정 씨는 좀 걱정되네.""내 말이. 성민준은 성가에서 체계적으로 배운 사람이라 독약 마셔 본 게 몇십 번은 훌쩍 넘길 텐데. 내성이 생기고도 남았지."창백한 얼굴로 이 대화를 듣던 고다정의 눈에 안광이 사라졌다.해독을 대결 종목으로 넣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성민준 자신에게 유리한 종목이었으니.하지만 성민준의 상황도 그리 좋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고다정을 향해 뻐겼다."다정 씨, 해독할 때까지 버틸 자신 없으면 그냥 말해요. 아직 첫 번째 대결일 뿐이니까."이번 대결을 진다 해도 대결은 두 번 더 남아 있으니 괜찮다는 뜻이었다.저의를 알아들은 고다정이 째려보며 불안정한 호흡으로 답했다."나랑 헛소리할 시간 있으면 해독 약이나 만들어요. 나보다 멀쩡할 리 없으니까."성민준이 자신을 죽일 작정으로 독을 만들 것이라는 걸 예상한 고다정도 절대 대충 만들지 않았다. 그 결과로 고다정이 만들었던 독 중 가장 독한 게 나왔다.만약 성민준의 몸에 내성이 없었다면 지금쯤 고통에 바닥을 구르고 있었을 것이다.거기까지만 생각하고는 성민준을
성민준의 기절로 인해 시합은 중단되었고 내일 성민준이 깨어나는 것을 보며 다시 시합하기로 했다.대중들은 이내 뿔뿔이 흩어졌다.고다정도 성시원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가서 다시 한번 해독했다.반 시간도 안 되는 사이에 몸에 남아있던 독을 완전히 빼냈지만 고다정은 여전히 기운이 없었다.“돌아가 쉬어. 내일은 두 번의 시합이 있잖아. 기운을 차려야 내일도 잘 대처할 수 있지.”성시원이 손을 저으며 고다정에게 돌아가 보라는 제스처를 취했지만 고다정은 가만히 서서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왜 그렇게 보고 있어?”성시원이 눈썹을 치켜세우고 묻자 고다정은 히죽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스승님, 아까 일부러 성민준의 화를 돋궈 쓰러지게 만든 거죠?”성시원은 온화한 성격이었다. 그렇게 독한 말을 내뱉을 사람이 아니었다.그는 고다정의 궁금해 죽겠다는 눈길을 보며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다정이가 아직 정신이 있나 보네? 그럼 계속 관리자를 만나보던가.”말을 마친 그는 관리자를 불렀다.“스승님 갑자기 가슴이 너무 답답해요. 아까 독을 깨끗하게 빼내지 못한 것 같아요. 방에 돌아가서 해독제 좀 만들어야겠어요.”고다정은 황급히 스승님이 하려는 말을 끊고 가슴을 움켜쥐고는 방을 나갔다.스승님 말대로 한다면 그녀는 오늘 휴식 시간조차 없었기에 일부러 아픈 척 한 거였다.피곤했던 고다정은 방에 돌아오기 바쁘게 침대에 누웠다.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든 그녀는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져서야 잠에서 천천히 깨어났다.그녀가 막 일어나 앉으려 할 때 귓가에 두 아이의 기쁜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깨어나셨어요?”“엄마, 어디 불편하신 곳은 없어요?”두 아이가 관심하며 고다정을 바라봤다.옆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강말숙도 관심하며 다가와서 말했다.“깨어났구나. 먼저 물부터 마셔. 오래 잤으니 목마르지.”손에 들고 있던 물컵을 고다정에게 건네주며 강말숙이 말했다.고다정은 약한 목소리로 고맙다 인사한 뒤 물컵을 건네받아 두 모금 정도 마시고 물었다.“다들 여기엔
다음 날 아침, 고다정이 깨어나자 소담은 핸드폰을 들고 그녀에게로 다가갔다.“사모님, 어젯밤 대표님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사모님께서 휴식하고 있어서 깨우지 않았습니다. 대표님께 전화를 해보십시오.”“알았어요. 소담 씨는 가서 아침 먹어요.”고다정은 고맙다고 말하며 핸드폰을 건네받고 여준재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녀의 전화를 받은 여준재가 관심하며 물었다.“몸은 좀 어때요? 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요?”그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여준재가 어제 자신이 시합한 사실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괜찮아요. 걱정 많이 했죠?”“내가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았으면 다시는 그렇게 위험한 일 하지 말아요.”전화기 너머에서 여준재의 나무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고다정이 여준재와 함께한 뒤, 여준재가 처음 그녀에게 엄한 태도로 말했다. 그에 그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듣고 있을 뿐이었다.그녀는 어색한 듯 코끝을 만지작거렸다. 어제 일로 여준재가 화났다는 것을 안 그녀는 온갖 좋은 말들을 하며 여준재를 달랬다.“내가 잘못했어요. 앞으로 다시는 나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준재 씨, 화내지 말아요. 네?”“미안하다고 말하고 있는 사람이 성의가 너무 없는데요.”여준재가 오만한 태도로 헛기침을 했다.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던 고다정은 그에게 몇 가지를 더 약속했다.그녀가 몇 분 동안 여준재를 달래주자 그도 더는 화를 내지 않고 어제 시합에 관해 물었다.“어르신께서 세 차례 시합을 해야 된다고 그러던데 오늘은 또 무슨 시합을 하는 거예요?”“오늘은 아마 약재를 분별할 거예요. 마지막 시합은 약재를 캐는 거고요.”고다정이 시합 내용을 그대로 알려주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스승님께서 준재 씨에게 말해주지 않으셨어요?”여준재는 헛기침을 하며 둘러댔다.“다정 씨가 중독됐다는 소리를 듣고 걱정하자 어르신께서 얘기하지 않으셨어요.”여준재는 더는 이 사실에 관해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화제를 돌려 성씨 가문에 관해 이야기했다.
성민준이 시원시원하게 대답하는 모습을 보며 고다정은 의외라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그의 담담한 태도에 고다정은 이상함을 느꼈다.그녀는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성민준이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고 다음 시합을 준비했다.2차 시합은 약재를 분별하는 시합이다.심판이 천 가지 약재를 준비하여 그들에게 주면, 그들은 한 시간 동안 약재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나면 약재들은 심판이 다시 거두어 가고 참가자들은 반 시간 안에 백 가지 약재의 이름과 효능을 써야 했다. 빠르고 정확하게 적어낸 사람의 승리였다.심판이 규칙을 말하기 바쁘게 성씨 가문의 도우미가 약재들을 들고 나왔다.천 가지 약재들이 놓인 정원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모두 숨을 죽이고 고다정과 성민준이 약재를 살펴보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두 사람이 약재를 살펴보는 속도를 보고 정원에 있던 사람들 모두 이번 시합도 고다정의 승리로 예상했다.성민준은 몸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기에 기운이 없어 보였다. 약재를 드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보였다. 나중에 백 가지 약재의 이름과 효능에 대해서도 적어야 하는데 얼마나 많은 글자를 적어야 할지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 수 있었다.사실도 그러했다.주어진 시간이 끝나고 고다정은 백 가지 약재중 두 개만 틀렸다.하지만 성민준은 50개도 쓰지 못했다.“발표하겠습니다. 시합은 끝났고 고다정 씨의 승리입니다. 삼판 이승제에서 고다정 씨가 두 번을 이겼기 때문에 더 이상의 시합은 없습니다.”심판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성민준은 새빨간 피를 토해냈다.그를 본 성재호의 얼굴이 급격히 변했다. 그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민준아, 왜 그래?”“아버지, 저 여자가... 날 해쳤어요.”성민준이 겨우 의식을 붙잡고 고다정을 가리키며 힘겹게 말했다.고다정은 눈썹을 치켜뜨며 속으로 '그럼 그렇지'하고 생각했다.분명히 이기지 못할 시합을 왜 계속하려고 했나 했더니 이 부자는 여기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였다.
“시합에서 진 걸 쿨하게 인정했다면 나도 스승님도 당신들을 괜찮은 사람들로 봤을 텐데. 이런 식으로 사람을 헐뜯다니 정말 너무 역겨워요. 다행히 스승님께서 현명하시니 성씨 가문을 당신들 손에 넘기지 않았지. 만약 넘겼다면 멍청한 당신들 때문에 성씨 가문의 몇백 년의 역사가 더럽혀신졌을 거예요!”고다정의 비꼬는 말을 들은 성재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다른 사람들도 귀속말로 소곤소곤 의논하기 시작했다.“내가 듣기엔 일리가 있어. 눈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 알 수 있잖아. 고다정 씨가 왜 멍청하게 무조건 이길 시합에 다시 독약을 먹여서 자신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겠어.”“내가 봤을 땐 저 성민준 아버지가 시합에서 지는 걸 원치 않아 하는 것 같아. 그래서 이런 핑계를 대서 다정 씨를 내쫓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 다들 잊었어? 동문끼리는 서로 죽이면 안 된다고 선조 때부터 내려오던 규칙이 있었잖아.”“흥, 저 집안은 변한 게 없네. 예전에도 잘난 척하며 둘째 나리를 모함하려다 다른 사람이 덫에 걸려서 둘째 나리 부인과 큰 부인을 적의 손에서 죽게 만든 적이 있잖아.”이 말은 소리가 작지 않았다. 말 속에는 성씨 가문에 대한 원한이 가득 담겨있었다.이 말을 꺼낸 사람은 후회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성시원을 바라봤다.다른 사람들도 모두 조용히 침묵했고 순식간에 분위기가 딱딱해졌다. 고다정도 속으로 깜짝 놀랐다.그녀는 줄곧 스승님이 여자에게 관심이 없어 혼자 지내는 줄 알았었다. 사모님이 계셨던 줄은 몰랐었다.고다정은 차가운 시선으로 다시 성재호 부자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성씨 가문을 성씨 집안의 사람들이 아니라 왜 스승님께서 나에게 넘겨주셨나 했었는데 이 집안사람들 하나같이 멍청하기 짝이 없네.'“성민준 씨, 이제 그만 일어나시죠?”고다정의 차가운 목소리가 정원에 퍼졌다.그녀의 말을 들은 사람들의 시선이 성민준에게로 향했다.주위 사람들의 시선 때문인지 기절한 척 연기를 하던 성민준의 몸이 빳빳이 굳었다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