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연속 푹 쉬고 난 고다정이 연구소에 도착했을 때 성시원과 채성휘는 연구실에 있었다. 가운을 입고 무슨 얘기 중인 건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스승님, 채 선생님, 무슨 얘기 하세요?"고다정이 가까이 가며 묻자 돌아본 둘이 동시에 말했다."왔니? 얼른 와서 결과 봐 봐.""저희 성공했어요!""정말요?"둘의 말을 들은 고다정이 기쁜 표정으로 다가가니 성시원이 손에 들린 보고서를 건넸다."네가 직접 봐."보고서를 보던 고다정의 표정이 밝아졌다. 80%의 확률로 암세포를 억제한다는 문장이 바로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스승님! 너무 다행이에요."고다정이 고개를 들고 성시원을 뿌듯하다는 듯 보자 성시원도 웃으며 답했다."그러게, 성공했네. 이제 임상 실험만 통과하면 더 이상 다른 약에 의존할 필요 없어!"스승과 제자가 기뻐 어쩔 줄 몰라 하자 감정을 잘 다스리던 채성휘도 함께 흥분했다.국민들이 약 부족과 높은 가격으로 인해 약을 못 살 걱정을 줄일 거라는 생각에 행복한 미래를 상상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차분해진 셋이 이 소식을 연구소에 알렸다."특효약이 생겼으니까 이제 M국 사람들 눈치 안 봐도 되겠어요!""그러니까요. 그동안 국민들 한 명이라도 더 넣어 주려고 얼마나 많은 특혜를 줬는지 몰라요.""드디어 한숨 덜었네요."이 소식에 연구소가 소란스러워졌지만 결론은 다행이라는 말들이었다.단체 채팅방에서 누군가 회식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에 채성휘가 단번에 동의하고는 고다정에게 맡겼다.거절할 리 없는 고다정이 바로 친인척들을 데려올 수 있게 호텔을 예약했다. "바빠요?"고다정이 예약하자마자 여준재에게 전화를 걸었다."서류 검토하는 중이라 바쁘진 않아요. 무슨 일이에요?"미소를 머금은 듯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고다정은 돌려말하지 않고 바로 용건을 말했다."저녁에 회식이 있는데 친인척 데려와도 된다길래. 근데 우리 여 대표님 얼굴 비출 시간이라도 있을지 모르겠네요."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여준재가 웃었다."마누라
여준재도 이런 식으로 질투한다는 걸 이제 안 채성휘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그쪽 쪼잔한 거 고 선생님은 알아요?""어떨 것 같은데요."여준재가 살짝 흘기며 대답을 흘렸다."보아하니 모르나 본데, 제가 일러바칠까 두렵지도 않아요?"술을 한 모금 마신 채성휘가 코웃음 쳤다."그게 뭐요. 알게 된다 해도 제가 그만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는 것뿐인데."전혀 타격받지 않은 여준재를 본 채성휘가 쏟아지는 깨에 정신을 못 차릴 것 같아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이렇게 유치한 남자가...’시간이 좀 더 지나서야 성시원이 도착했다. 그와 함께 회식도 정식으로 시작됐는데 여준재는 그제서야 특효약 연구에 성공했다는 걸 알았다."성공한 거 진심으로 축하해요."잔을 들고 고다정에게 감탄을 보내자 고다정이 부드럽게 웃었다."대표님도 축하해요."이 말을 들은 여준재가 의아해 눈썹을 치켜세웠다."임상실험 통과하면 YS그룹 의료 계열사랑 공립 병원에 보급하기로 했어요.""고마워요."여준재가 진심으로 감동받았다. 원래대로라면 빨라도 공립 병원 보급 반 년 뒤에야 살 수 있는 권한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보급이라니.여준재의 감사 인사에 고다정이 여준재가 가르쳤던 자세로 삐딱하게 말했다."고맙다는 말 금지. 다음에 또 하면 그땐 혼날 줄 아세요."말이 끝남과 동시에 여준재를 흘겨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익숙한 말을 들은 여준재가 못 참고 웃었다. 자신의 말을 따라 하는 고다정을 놀릴 심산으로 입을 열려던 차, 성시원이 다가오는 것을 봤다."어르신."하려던 말을 삼키고 성시원에게 인사했다."내가 방해했나?"둘을 슬쩍 보고는 웃었다."그럴 리가요. 무슨 일이세요?"다급하게 부인한 고다정이 묻자 성시원이 곧바로 말했다."저번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해? 배사의식과 동시에 후계자 신분 밝히는 거. 프로젝트 일부가 끝난 거나 다름없으니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하는데.""제가 뭘 준비하면 되나요?"진지해진 고다정이 묻자 성시원이 부드럽게 웃으며 답
두 사람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던 고다정이 함정이란 걸 알았지만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스승님 가문의 다른 분들은 뵌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스승님 가문이니 분명 대단하겠죠. 준재 씨랑 비교한다면... 각자 장점이 있지 않을까요?"말을 끝내자마자 반박할 시간도 주지 않고 다가오는 임은미에게 손을 흔들며 그리로 도망갔다."은미야, 마침 그쪽으로 갈 예정이었는데 타이밍 좋다."그 뒷모습에 못 당하겠다는 듯 웃은 둘의 시선이 마주치자 성시원이 먼저 빈정거렸다."아까 한 말 다 진심이야. 고작 이 정도도 못 깨면 결혼 못 할 줄 알아.""걱정 마세요. 꼭 결혼하고 말 테니까."여준재가 확실하게 못 박았다.성시원이 자리를 떠남으로써 두 사람의 대치가 겨우 종료됐다. 회식은 행복한 분위기를 쭉 유지하다 새벽이 되어서야 파했다.돌아가는 길에 조금 취한 고다정이 여준재의 품에 안겨 배시시 웃었다."그렇게 좋아요?"헝클어진 고다정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말했다."당연하죠. 특효약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기쁜데요?"그러고는 딸꾹질 때문에 끊긴 말을 이었다."무엇보다 희망이 생겼어요. 암세포를 억제할 수 있게 됐으니까 나중에 암세포를 아예 죽일 수 있는 약을 만들어내서 불치병 틀에서 암을 빼 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는..."이 호언장담을 들은 여준재가 입가에 미소만 은은하게 띄울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신난 고다정에게 지금 필요한 건 입이 아니라 귀인 것을 아는 것이다."저는 아직 젊으니까 몇 년만 더 지나면 암이라는 난제를 꼭 해결해서 할머니 무병장수하시게 만들 거예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준재의 품에서 잠들었다.그런 고다정을 보던 여준재가 편한 자세를 찾아 단단히 안아 줬다."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 드릴게요."대화를 듣던 구남준이 룸 미러로 둘을 보며 빛나는 사람들을 옆에서 보필할 수 있다는 것에 내심 감격했다....그 뒤로 고다정은 쭉 성시원을 따라갈 채비를 했는데, 일이 일이니만큼 고다정의 유일한 보호자인 강말숙
다음 날 아침, 여준재의 보호 아래 무사히 성시원과 맞닥뜨려 출발했다.성시원의 본가는 300km 떨어진 태산에 있었는데 2만 평 가까이 되는 사합원이었다.아침 일찍 출발했지만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눈앞에 보이는 저택의 기세에 성시원을 제외한 모두가 차원 이동이라도 한 듯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특히 대문 양옆에 위치한 사자상이 웅장함과 위엄을 증폭하는 듯했다."우와, 어르신 집 굉장해요!"쌍둥이가 입을 다물지 못하자 그에 고다정과 강말숙도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내 집이 아니라, 우리 집이야."성시원이 웃으며 정정했다.말이 끝나기 무섭게 커다란 대문이 열리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줄을 맞춰 걸어 나왔다."둘째 왔냐.""작은아버지 오랜만이에요.“"시삼촌."고다정은 이 호칭에 그들이 성시원의 가족이라는 것을 확신했다.하지만 끼어들어 인사하기보다는 쌍둥이를 데리고 강말숙의 옆에서 그들이 회포를 다 풀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고다정이 간과한 것은 성시원이 그 호의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다.반가워하는 친척들 사이에서도 미소 하나 내비치지 않은 성시원은 친척들의 가식이라면 이제 지겨웠다."가식은 이쯤 해. 이번에 돌아온 건 전화로 말했듯이 제자랑 증조 스승님 뵈고 후계자 선포하러 온 거니까. 누가 자꾸 넘보길래 이제 그만 좀 넘보라고."자신의 말에 분위기가 얼마나 싸해지든 성시원은 손을 휘둘러 고다정을 불렀다."따라와, 다정아.""네, 스승님."대답하고는 쌍둥이와 강말숙을 데리고 함께 대문을 넘었다.성시원의 친척들을 지나치려는 순간이었다."어디서 구르다 온지도 모르는 게 어디서 내 재산을 넘봐? 웃기고 있어. 얼른 여기서 꺼지지 않으면 그 욕망 품은 걸 평생 후회하게 해 주지."큰 소리로 말한 건 아니었지만 고다정에게는 충분히 잘 들리는 크기였다.그에 강말숙의 안색이 어두워짐과 함께 쌍둥이의 얼굴도 분노로 물들었다.고하준이 제 동생에게 눈치를 주자 고하윤이 망발을 뱉은 남자를 가리키며 소리 질렀다."엄마, 이
대문으로 들어가자 보이는 건 외원에 속하는 일진원이었는데 보통은 손님이 묵는 방이었다.고다정이 성시원을 따라 거실에 입성하면서 느낀 점은 건물은 레트로하지만 가구는 모던하다는 것이다.화려한 샹들리에가 거실을 밝게 비췄고 천연가죽으로 만든 소파는 건물색과 어우러져 레트로함을 과하지 않게 했다.그때 회색 두루마기를 입은 남자가 지팡이를 짚은 채 힘겹게 성시원의 팔을 붙잡았다."둘째 나리, 소인 드디어 나리를 뵙습니다...""할아버지, 오랜만이에요. 몸은 괜찮으셨어요?"노인은 오랜 시간 이 가문을 모셔 온 부철광이었다. 성시원이 얼굴의 냉기를 지우고 옅게 웃으며 부철광을 부축하려 했으나 거절당했다."괜찮습니다. 어찌 나리께 이 늙은이를 부축하라 하겠습니까."이 말에 성시원이 조금 어이없어했지만 노인은 고다정에게 더 호기심이 생긴다는 듯 다가갔다."이쪽은 아씨겠지요? 아씨를 뵙습니다."말을 하며 노인이 고다정의 앞에 무릎 꿇었다.그에 놀란 고다정이 옆으로 한 발짝 옮겨 노인을 일으키려 했다."어르신, 어서 일어나세요..."일으켜 세우고는 성시원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는 눈빛을 보내자 성시원은 노인에게 다가가 부축했다."할아버지, 얼른 일어나세요. 기껏 데려왔는데 도망가면 할아버지께서 책임지고 잡아 오셔야 해요."이 말에 예의를 차리던 노인이 둘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다."죄송합니다, 아씨. 이제 이런 예법을 안 쓴다는 걸 알지만 너무 감격한 바람에... 저희 나리께도 뒷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생겼으니, 돌아가신 나리를 만난다면 꼭 전해 드려야겠습니다."말을 마치자 노인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성시원에 대한 사랑이 가득 담긴 게 확실히 느껴지는 말에 고다정의 마음도 물든 것 같았다."어르신, 걱정 마세요. 스승님께서 농담하신 거예요. 저는 절대 어디 안 갈게요."그녀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노인을 달랬다. 노인의 몸으로 계속 이런 감정을 유지한다면 몸이 버티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그 마음을 알아챈 건지 노인의 감정은 곧 평
함께 온 서재에는 물건을 옮긴 흔적이 남아 있었는데 보아하니 방금 만들어낸 방인 것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던 때 고다정의 귀에 인자한 목소리가 들렸다."저녁 식사 전 작은나리께서 아씨를 위해 만들라 하신 서재입니다. 둘러보시고 부족한 게 있으시다면 사람을 시켜 구해 오라 하겠습니다.""딱히 뭐가 부족해 보이지는 않아서요. 나중에 생각나면 알려 드릴게요."부철광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고다정을 책상쪽으로 안내했다.고다정은 책상에 가까이 가서야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책 무더기와 일기 같은 걸 봤다. 책은 조금 낡아 보였지만, 일기는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지 않았다."이건 뭐예요?""이 묶음은 성가 부흥전기와 족보입니다. 아씨께서 반드시 숙지하셔야 하는 내용이고 이쪽은 성가의 관계도와 장부입니다. 이건 어렴풋이 기억하시면 됩니다."부철광이 책상 위에 놓인 책 두 묶음을 보며 알려 주자 고다정이 당황했다."증조할아버지, 제가 이런 걸 읽기엔 아직 좀 이르지 않을까요?"정신이 돌아온 고다정은 쌓인 책을 보며 머리가 아파 오는 듯했다.성시원이 후계자 신분을 선포하는 건 자리에서 물러나기 위해서가 아닌데, 왜 갑자기 이것들을 보여 주는지 의문이었던 것이다."아씨께서 하신 말씀이 나리께서 예측하신 것과 똑같네요."고다정을 보며 슬쩍 웃던 부철광이 말을 이었다."나리께서 배사의식이 끝나는 대로 성가를 아씨에게 맡길 예정이니 전혀 이르지 않다고 하셨습니다."고다정은 왜인지 자꾸 성시원의 계획에 말려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생각할 틈을 안 주려는 것인지 또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또 나리께서는 아씨께서 이 책들을 사흘 안에 다 보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뒤로는 성가 재산에 대한 자료를 드릴 것이고요.""증조할아버지, 사흘은 조금 짧은 것 같은데요..."고다정이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기한을 늘리려 했다.물론 고다정의 기억력이 좋은 건 맞지만 스치듯 봐도 다 기억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부철광은 확답을 내놓지 않은 채 성시원의 말만 전하고 물러
그 뒤로 고다정은 이틀 간 서재에서 성가 관련 서적을 익히느라 여념이 없었다.쌍둥이도 이를 잘 알기에 의젓하게 강말숙과 시간을 보낼 뿐 고다정을 방해하지 않았다.대신 성가의 방계 친족들이 소식을 정탐하기 위해 고다정을 찾아왔지만 모두 부한에게 문전박대 당했다.부한은 부철광이 입양한 아들인데 그에 의해 만능 집사로 길러졌다.부철광은 고다정이 성가에 온 다음 날이 되어서야 부한을 소개했다. 이유는 부한이 맡은 임무를 수행하러 밖에 나가 있었기 때문이다.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 사흘 동안 고다정은 관련 서적을 어느 정도 익혔다.나흘째 되는 날, 첫날 이후로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성시원이 나타났다."요 며칠 어떻게 지냈어. 누가 시비는 안 걸었고?""편하게 지냈어요. 시비 거는 사람도 없었고요."살짝 웃던 고다정이 피곤해 보이는 성시원을 걱정했다."괜찮으세요? 조금 야위신 것 같은데. 설마 그동안 제대로 안 주무신 건 아니죠?"그에 성시원이 손을 저었다."괜찮아. 다 읽었으면 내일부터 집사들한테 너 보러 오라고 할게."잠깐 말을 잃은 고다정이 생각에 잠겼다. 요 며칠 성시원은 급하게 고다정에게 모든 일을 인수인계하려는 태도를 고수했다."스승님, 저한테 숨기는 거 있죠?""왜 그렇게 생각하지?"성시원이 미간을 좁힌 고다정에게 시선을 맞추자 고다정이 말했다."얼른 저한테 넘기시려는 거잖아요. 스승님 나이면 아직 십 년은 넘게 맡으실 수 있을 텐데..."성시원이 눈썹을 치켜세웠다."왜. 그동안 뼈빠지게 일한 세월이 얼마인데, 먼저 퇴직하면 안 되나? 꼭 내가 여든 넘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할 때가 돼야 물러나게 할 거야?""그건 아니지만..."고다정의 말문이 또 막혔다."맞는 것 같은데?"성시원이 불만을 알리듯 코웃음을 쳤다.그에 고다정이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코끝을 슬쩍 긁었다. 그러다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가까이 가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다."화내지 마세요, 스승님. 그냥 좀 부자연스러우니까 그렇죠.""뭐가 부자연스러워
경고를 들은 고다정이 어쩔 수 없이 무안하게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개를 돌려 성재호를 본 성시원이 낮게 말했다."네 주제에 무슨 성가 무덤에 함께 묻히기를 바라?"그 말에 얼굴이 터질 듯 빨개진 성재호가 살기를 띤 채 주먹을 꽉 쥐었지만 성시원은 안 보이는 것 마냥 말을 이었다."그리고 자꾸 늙은이 얘기 꺼내지 마. 한 번 맡기로 한 이상 우리 가문에 불리한 일은 안 하니까.""너무 확신하지 마세요, 작은아버지."성민준이 참지 못하고 대들었지만 성시원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네 말은 내가 성가에 해가 되는 일을 했다는 뜻이구나.""작은아버지, 정말로 저희 가문을 생각하신다면 저런 피 한 방울 안 섞인 여자한테 주시면 안 되죠. 저 여자는 후계자 자격이 없어요."성민준이 고다정에게 삿대질했다.대화를 듣던 고다정이 얼굴을 구기고 몇 마디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솔직히 다른 사람이라면 이 자리를 가지고 싶어 했겠지만 고다정에게는 아무런 메리트가 없었다. 성시원이 맡아 달라 한 게 아니었다면 절대 이 귀찮은 일을 맡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고다정의 생각을 모르는 성시원이 답했다."너희한테는 아무런 관계 없는 사람일지 몰라도, 나한테는 친 제자라 늙으면 날 돌봐줄 텐데. 자식이랑 다를 게 뭐야. 다정이한테는 자격이 없고, 너희들은 자격이 있다 생각하는 건가?""물론 제가 작은아버지 자식이 아니긴 하지만, 전 적장자예요. 저희 아버지께서는 작은아버지께 평생 아이가 없을 것이라 예상하고 절 입양 보내실 생각이셨어요. 그래서 쭉 후계자 신분으로 기르셨고 작은아버지만 동의하신다면 작은아버지 자식으로서 돌아가실 때까지 지극정성으로 모실 수 있어요."성민준이 간절하게 말했지만 성시원의 화만 더 돋울 뿐이었다."그쪽 사람들이 치밀한 건 여전하네. 성재호, 나한테 아이가 왜 안 생겨? 내가 또 말해 줘야 하나? 여기 얌전히 계획에 따라 줄 천치는 없어."성재호 부자가 말을 잃은 사이 고다정이 내심 놀랐다.‘스승님께 아이가 생길 수 없다니… 어쩐지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