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일단 생각을 잘해야 해요. 누나는 왕정민이 몰락했으면 하는 거예요, 아니면 누나의 재산을 가져오고 싶은 거예요?”“만약 이 동영상을 그 여자한테 보낸다면 그 여자는 분명 왕정민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만약 왕정민도 화가 나서 눈이 돌면 누나한테 해코지할 수도 있어요.”“하지만 우리가 손에 든 증거로 왕정민이랑 협상을 한다면 누나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어요.”애교 누나는 화가 덜 풀린 듯했다.“하지만, 원래 나한테 속한 물질적인 것만 가져오면 그 인간 좋은 일만 한 거잖아요! 그 인간이 나한테 했던 일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올라요.”난 누나의 말에 대꾸해 줄 수가 없었다. 나도 그 일에 가담했으니까.문득 나도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애교 누나는 그 순간 내 변화를 포착이라도 한 듯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수호 씨, 수호 씨 들으라고 한 말 아니에요. 난 그냥 왕정민을 탓할 뿐이에요. 난 수호 씨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아요. 난 수호 씨를 탓한 적 한번도 없어요.”난 마음속으로 너무 고마웠다. 애교 누나가 나한테 준 믿음뿐만 아니라 나한테 보여준 관심과 배려 덕에 내가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으니까.“애교 누나, 난 진심으로 누나가 그 일에서 벗어나서 자기 삶을 즐겼으면 좋겠어요. 더 이상 왕정민의 영향을 받지 마요.”이건 나의 진심이다.애교 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수호 씨 말 무슨 뜻인지 알아요. 나도 알고 있어요. 내가 왕정민이랑 빨리 이혼해야 우리가 함께할 수 있다는 걸. 나도 더 고민해 볼 게요!”애교 누나의 대답에 나는 안심이 되었다.“가요. 우리 먼저 룸으로 들어가요. 오늘 저녁 왕정민이랑 싸우고 싶지도 않고 그 인간 보고 싶지도 않아요!”“그래요!”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애교 누나랑 룸으로 향했다.“너네 둘 뭐야? 왜 이렇게 오래 있다가 와?”남주 누나는 심문하는 듯한 눈빛으로 우리 둘을 쳐다보았다.난 남주 누나가 분명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미리 그녀의
갑자기 생각난 건데 내 사진첩엔 남한테 보여줘서는 안 되는 사진들이 있었다.전부 지은이 보내준 사진들이었다.‘남주 누나가 지금 내 사진첩을 뒤지는 건 아니겠지?’난 너무 놀란 나머지 벌떡 일어나 말했다.“남주 누나, 다 봤어요? 다 봤으면 핸드폰 돌려줘요.”남주 누나는 고개도 쳐들지 않은 채 말했다.“아직 다 못 봤어. 다 보고 나서 돌려줄게.”불길한 예감은 점점 더 심해졌다.남주 누나는 지금 분명 나에 관한 걸 보고 있다.그리고 자기의 핸드폰을 꺼내 들고 내 핸드폰에 대고 찰칵찰칵 한참을 찍어 댔다.난 점점 더 불안해져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그대로 걸어갔다.“남주 누나, 진짜 너무 하는 거 아니에요, 내 핸드폰으로 뭘 뒤지고 있는 거예요?”남주 누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푸들, 왜 이렇게 긴장해? 설마 핸드폰에 남들한테 들켜서는 안 되는 비밀 같은 게 있는 거야?”“그런 거 없어요!”“없으면 왜 이렇게 긴장한 건데?”난 마음이 어지러워 대답했다.“누나의 이 행위가 내 사적인 영역을 침범했어요. 만약 내가 함부로 누나 핸드폰을 뒤지고 그러면 누나는 기분이 좋겠어요?”남주 누나는 자신의 핸드폰을 나한테 건네주며 말했다.”난 상관없어, 보고 싶으면 맘껏 봐, 난 전혀 상관없거든.”난 그냥 어이없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남주 누나는 악마인 게 틀림없어.’난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난 좀 화가 난 듯한 말투로 말했다.“누나 핸드폰 필요 없어요. 난 그저 누나가 내 핸드폰을 돌려줬으면 좋겠어요.”“거봐, 넌 나한테 네 핸드폰 속 비밀을 들킬까 봐 급급히 핸드폰을 가져가려는 거잖아?”“아주 순진한 청년인 줄 알았더니 내면엔 짐승이 살고 있었네? 네가 이러니까 더 궁금해지네, 네 핸드폰 속에 대체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남주 누나는 일부러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난 정말 남주 누나 때문에 화병이 날 지경이었다.룸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 그냥 달려들어 빼앗을 수도 없었다.‘하지만 뺏지 않으면 내 핸드폰 속
나는 불편한 마음으로 식사를 마쳤다.돌아가는 길에 남주 누나가 기어코 나랑 애교 누나를 끌고 같은 차에 탑승하는 바람에 나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그것도 애교 누나가 앞에서 운전하고 나와 남주 누나가 뒤에 앉은 상태로 말이다.“왜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 내가 너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남주 누나는 나를 향해 싱긋 웃으며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심지어 일부러 바싹 붙으며 야릇한 분위기를 풍겼다.이에 나는 얼른 누나한테 경고했다.“남주 누나, 뭐 하자는 거예요? 애교 누나가 앞에 앉아 있는데, 질투하면 어떡하려고요?”“애교는 내가 너한테 호감 있는 거 진작 알고 있었어. 오히려 너야말로, 내가 안 예뻐? 몸매가 좋다는 생각 안 들어?”나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아뇨, 누나 예뻐요. 몸매도 좋고.”“그러면 왜 나랑 안 자는데?”생각지도 못하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남주 누나의 말에 내 마음은 간질거리고 두근대기 시작했다.심지어 말조차 더듬거렸다.“누, 누가 싫댔어요? 누나가 매번 이상한 포인트에서 끊었잖아요.”“그래서 다른 여자 찾아갔어?”‘역시나, 이걸 물고 늘어질 줄 알았어.’나는 사실 진작 변명을 생각해 두었기에 당황하지 않고 느긋하게 대답했다.“누가 다른 여자 찾아갔다고 그래요? 사람 함부로 모함하지 말아요.”“아니야? 그럼 앨범에 있는 적나라한 노출 사진은 어떻게 해명할 건데?”“그 사진이요? 그거 다 인터넷에서 찾은 거예요. 예뻐서 저장했고요.”“정말이야?”“당연하죠. 설마 지금 제가 애교 누나한테 미안할 짓 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이럴 때 보면 내 얼굴도 점점 두꺼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만약 예전이었다면 절대 이러지 못했을 텐데 말이다.그때 남주 누나가 갑자기 내 허리를 꼬집었다. 하지만 나는 감히 신음조차 내지 못했다.“왜 또 그래요?”그저 낮은 소리로 물을 뿐.남주 누나는 입가에 냉소를 띤 채로 물었다.“윤지은이 누구야?”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머
“그 윤지은이라는 여자랑도 이렇게 잠자리 가진 거야?”“아니요.”“그럼 뭔데?”사실 지난번 형수한테 지은과의 일을 들킨 뒤 나는 바로 대화 기록을 삭제했었다.때문에 누나가 본 건 최근 우리가 나눈 대화 내용뿐이다. 그러니 나와 지은이 무슨 사이인지 당연히 모른다.이 일에 대해 나는 숨기거나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다.한번 거짓말을 시작하면 더 많은 거짓말로 그걸 둘러대야 하니까.그건 영원히 끝나지 않는 악순환과도 같다.심지어 지은과의 일을 애교 누나한테 솔직히 털어놓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하지만 내가 진실을 얘기하면 애교 누나가 왕정민을 미워하는 것처럼 나를 미워할까 봐 두려웠다.마음이 너무 모순되고 고민된 나머지 나는 넋이 반쯤 나간 상태로 대답했다.“나중에 기회 되면 천천히 설명할게요.”나는 말하면서 손을 움츠리고는 미안한 표정으로 앞 좌석에 앉은 애교 누나를 바라봤다.순간 너무 죄책감이 들었다.‘지은과의 일도 이미 충분히 애교 누나한테 미안한데 계속 이렇게 해야 하나?’내가 생각하는 사이 어느덧 동네에 도착했다.애교 누나 집에 가자는 남주 누나의 초대도 거절해 버렸다.아직 애교 누나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돌아가서 잘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애교 누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정식으로 애교 누나와 만나고 싶으니까.그렇다면 애교 누나한테 상처 주는 일은 하면 안 된다.집에 도착하니 형이 기분이 언짢은 듯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그런 형을 보자 나는 무의식적으로 물었다.“형, 왜 그래? 형수는?”“샤워 중이야.”자세히 들어 보니 욕실 안에서 희미한 물소리가 들렸다.그 순간 형이 왜 수심에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는지 단번에 이해됐다.형수가 지금 시그널을 보내고 있는데 그걸 만족시켜 줄 수 없으니 고민될 터다.“수호야, 내가 전에 했던 얘기 생각해 봤어?”그때 형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심장이 철렁했다.‘그 일은 생각도 안 해 봤는데.’그도 그럴 게, 형의 요구가 너무 황당했으니까.
“생각해 봐. 만약 내가 네 형수한테 아이를 못 낳는다고, 우리는 앞으로 아이가 없을 거라고 솔직히 말하면 네 형수 심정이 어떻겠어?”“하지만 내가 업무 스트레스 때문에 잠시 힘에 부치는 거라고, 치료만 잘 받으면 나을 수 있다고 하면 네 형수 심정이 어떻겠어?”“전자는 절망이야. 하지만 후자는 그나마 희망이라도 품을 수 있잖아. 한 사람이 무슨 일을 정말 하고 싶을 때 희망도 없다면 어떻게 견지하겠어?”형의 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는 걸 나도 인정한다, 그렇다고 형의 관점을 동의하는 건 아니다.“그래도 이렇게 형수를 속이는 건 아니지. 이러는 게 왕정민이랑 뭐가 달라?”나는 화가 나서 말했다.‘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자기 생각만 하고 형수 생각은 안 하지?’‘이건 형수한테 너무 불공평하잖아.’형은 피식 웃으며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수호야, 넌 아직 너무 어려. 왕정민이 그러는 건 자기 이익 때문이지만, 내가 이러는 건 우리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야.”“내가 네 형수를 마음에 두고 있으니 진실을 알리고 싶지 않은 거고, 이혼하고 싶지 않은 거야. 그러니까 형 한 번만 도와주라. 응?”형은 애원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그 눈빛을 보니 너무 곤란하고 고민되었다.정말이지 이 일은 너무 터무니없는 일이니까.“네 형수 이제 곧 나올 거야. 믿지 못하겠으면 네가 한 번 찔러 봐. 애가 없으면 네 형수가 어떤 반응일지.”형이 또다시 나를 설득했다.그때, 형수가 마침 안방에서 나왔다.형수는 내가 올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목욕 타월 한 장만 걸치고 있었다.풍만하고 글래머러스한 몸매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수호 씨, 언제 돌아왔어요?”형수는 나를 보고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웃으며 인사했다.하지만 나는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대답했다.“아까 금방요.”그때 형이 은근히 팔꿈치로 나를 쿡쿡 찌르며 부추기는 바람에 나는 결국 큰마음 먹고 농담하듯 말을 꺼냈다.“형수, 만약 형이랑 애가 없으면 어떨 것 같아요?”“그런 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애교 누나의 태도를 먼저 살펴야 할 것 같았다.내가 혼자 결정하는 건 너무 독단적이고 무책임하니까.결국 나는 애교 누나한테 문자를 전송했다.[애교 누나,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뭔데요?]곧바로 돌아온 애교 누나의 답장에 나는 깊은숨을 들이켜고 다시 문자를 보냈다.[만약 제가 누나 외에 다른 여자랑 만났어도 저와 만나줄래요?]이 질문이 아주 직설적이라는 걸 알고 있다.만약 애교 누나가 싫다고 하면 내가 전에 했던 노력은 수포가 되는 거고 무척 큰 아쉬움이 남을 거다.하지만 이게 정확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나는 잔뜩 긴장해서 애교 누나의 답장을 기다렸지만, 누나는 한참이 지나도 답장을 보내오지 않았다.그 순간 나는 너무 불안했다.애교 누나의 마음이 안 좋을 거라는 걸 알기에 나는 먼저 해명했다.[제가 애교 누나한테 구애하는 동안에 한 여자를 만난 관계까지 가졌어요. 누나한테 솔직해지고 싶어서 얘기하는 거예요. 만약 받아들일 수 없다면 제 연락처 차단해줘요.]이 문자를 보낸 뒤 나는 핸드폰을 옆에 내려놓았다.애교 누나가 다시 나한테 답장을 하던 말던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고서.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애교 누나의 답장이 도착했다.[수호 씨 정말 바보네요. 사실 진작 눈치채고 있었어요.]애교 누나의 답장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진작 눈치챘다고?’‘그런데도 나한테 몸을 내어주었다는 건가?’이건 너무 놀라운 사실이었다.나는 두근대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떨리는 손으로 타자했다.[어떻게 알았어요?][그때 매일 껌딱지처럼 나한테 들러붙었는데 선 넘는 짓은 한 번도 안 했잖아요. 그렇다는 건 혼자 해결했거나, 다른 방법을 생각해서 해결한 것밖에 더 돼요? 혼자 해결했다면 그 정도로 참을 수는 없었을 텐데, 당연히 다른 방법으로 해결했다고 짐작했죠.][그런데 지금껏 그 상대가 태연이라고 생각했어요. 태연이 절대 수호 씨더러 솔직하게 말하게 하지 않을 테니 그때 태연을 자빠뜨려라고 했던 거고요.]나
나는 일부러 애교 부리는 말투로 문자를 보냈다.[그런데 전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요. 제 마음속에는 애교 누나뿐이에요.]애교 누나는 내 말에 곧바로 웃는 이모티콘을 보내오더니 말을 보탰다.[그 말이 진심이든 아니든, 듣기 좋네요. 그런데 만약 출세하고 남들 위에 서고 싶다면 남주 비위는 무조건 잘 맞춰 줘요.]나는 애교 누나의 말에 담긴 의미를 알 것 같았다.남주 누나는 공무원이기에 다른 정계 인사를 많이 알고 있을 거다.때문에 내가 남주 누나의 비위를 잘 맞춰 주면 나중에 발전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거다.하지만 나는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그런데 정말 화 안 내요? 만약 신경 쓰인다면 솔직하게 말해줘요. 출세하는 기회를 버리더라도 누나를 잃고 싶지 않아요.]이 말은 내 진심이다.애교 누나 정말 좋은 여자이기에 절대 놓치고 싶지 않다.그때 애교 누나가 나에게 뽀뽀하는 이모티콘을 보내더니 이내 문자 하나를 보내왔다.[이런다고 나 잃지 않아요. 난 언제나 수호 씨 곁에 있을 테니까. 난 수호 씨 미래가 밝았으면 좋겠어요.]그 문자를 본 순간 나는 너무 감동했다.애교 누나는 어쩜 예쁜 데다 착하기까지 하고 나한테 또 이렇게 잘해주는지.만약 애교 누나 같은 여자와 결혼하면 분명 엄청 행복할 거다.애교 누나는 나한테 또 문자를 보내왔다.[남주가 모레면 간대요. 그러니 남은 시간 얼마 없어요. 내일 기회를 마련해 줄 테니까 꼭 성공해요.]‘나를 도와주려고 내가 자기 친구와 잠자리를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하다니.’애교 누나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이에 나는 곧바로 애교 누나한테 문자를 보냈다.[네, 누나 말대로 할 게요.]애교 누나 쪽 문제가 해결되니 내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형 쪽 문제다.하지만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지 못했다.그때, 밖에서 쨍그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놀란 나머지 문에 귀를 바싹대고 들었더니 곧바로 형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체 왜 그래? 우리 오늘 시도해
끊임없이 담배를 피우는 형을 보니 이 순간 형의 속이 얼마나 탈지 알 수 있었다.곁에서 지켜보는 나까지 속이 말이 아니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형, 너무 낙심하지 마. 요즘 의술이 발달해서 꼭 고칠 수 있을 거야.”“그만 위로해. 내 상태는 내가 잘 알아.”형은 풀이 죽어 말하면서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사실 한의학적으로 봐도 형의 경우는 완치되기 어렵다.때문에 형이 더욱 안쓰러웠다.하지만 지금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나는 침묵을 지켰다.그대 형이 갑자기 내 손을 덥석 잡았다.“수호야, 이러다가 나 정말 미칠 것 같아. 네가 얼른 네 형수 임신시켜. 그러면 나도 이렇게 괴롭지는 않을 거야.”‘또 이 얘기를 하다니.’나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숨이 턱 막혔다.“형, 나 좀 더 고민해 볼게.”나는 거절하면서 형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형은 오히려 내 손을 더 꽉 잡았다.“수호야, 더 고민할 필요도 없어. 네가 나 안 도와주면 난 끝장이야. 너도 내가 네 형수랑 이혼하는 게 싫을 거 아니야. 수호야, 형이 이렇게 빌게.”말하면서 아예 무릎 꿇으려는 형의 모습에 나는 깜짝 놀라 얼른 형을 부축했다.“형, 이러지 마. 알았어. 약속할게.”너무 놀란 나머지 엉겁결에 요구를 들어줬더니 형은 그제야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정말이지? 거짓말 아니지?”사실 나는 형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한 걸 곧바로 후회했다.하지만 이미 말을 꺼냈기에 번복할 수 없었다. 게다가 형의 희망찬 눈빛을 보니 거절하는 말을 할 수 없었다.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울며 겨자 먹기로 대답했다.“어, 진짜야.”형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수호야, 난 이제 모든 희망을 너한테 걸었어. 형이 남은 인생 행복할 수 있을지는 너한테 달렸어.”“형, 너무 오버 아니야?”형의 말에 나는 너무 난감하여 거절하기도 힘들었다.‘우선 이렇게 하는 수밖에. 안 그러면 형이 또 무릎 꿇으면 어떡해.’나는 얼른 형을 부축했다.“형, 이따가 먼저 방에 들어가.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주해진을 바라봤다.“왜 이렇게 쉽게 돈을 주는 거지?”주해진이 오늘 이 사달을 벌이느라 분명 적지 않은 돈을 썼을 텐데, 나한테 2천만 원 가까이 되는 돈까지 배상하니 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지 심히 의심됐다.“이 전에는 이대로 넘어가는 게 도저히 용납이 안 댔는데, 두 사람 실력을 보니 승복했거든. 두 사람 말대로 나도 젊을 때는 이 바닥에서 몇 년을 굴렀는데, 한 번도 두 사람처럼 죽기 살기로 싸우는 사람을 못 봤거든.”사실 주해진은 말을 아꼈다. 그가 가장 두려운 건 우리의 믿기지 않는 전투력이 아니라 궁지에 몰렸으면서 상황을 역전한 거였다. 그거야말로 가장 두려운 거였으니까.주해진은 우리를 맹수라고 느꼈다. 그것도 싸울수록 더 미쳐 날뛰는 맹수. 심지어 궁지로 몰아넣으면 넣을수록 우리는 오히려 피에 굶주린 모습을 드러냈다.주해진은 제 체면을 회복하고 싶어 그동안 승복하지 않은 거였는데, 우리가 절대 건드리면 안 되는 존재라는 걸 알았으니 더 이상 저항할 필요가 없었다. 어쨌든 그는 이미 손을 씻었고, 이제는 그저 장사를 하며 지내기에 어렵게 얻은 걸 망치고 싶지 않았다.나는 여전히 반신반의했지만 민우는 나더러 먼저 돈을 받으라고 계속 눈을 깜박거렸다.나도 민우의 뜻을 알고 있었다. 이걸 나중에 우리의 사업 자금에 보태자는 뜻이었다. 1800만 원이나 되는 돈을 보니 나도 확실히 마음이 동해 결국은 말없이 받았다. 주해진은 김진호와 안명훈더러 우리에게 사과하게 했고, 두 사람은 찍소리 못하고 순순히 사과했다.떠나갈 때 주해진은 제 차를 나에게 주면서 몰고 가라고 했다.그 순간 나는 오히려 경계심이 곤두섰다.“돈도 배상했으면서 차는 왜 주는 거야? 설마 또 해코지하려고?”주해진은 호탕하게 웃었다.“경계심 너무 많은 거 아니야? 그냥 친구 삼고 싶어서 주는 거야.”“그런데 난 그쪽이랑 친구하기 싫은데.”나는 고민도 없이 거절했다.주해진은 여전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너무 빡빡하게 굴지 말고. 친
김진호는 속이 좁고 질투심이 강하지만 실력은 별로 없다. 특히 일이 터지면 항상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난다.그런데 주해진이 자기를 내밀자 안명훈보다 더 겁을 먹었다.“싫어요... 안 돼요... 해진 형, 저 자식 차를 망가뜨리라고 한 건 형이잖아요. 저더러 형 대신 뒤집어쓰게 하면 안 되죠.”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김진호는 제가 한 짓에 책임지지 못하고 주해진의 체면을 바닥에 짓밟았다.주해진은 너무 쪽팔려서 김진호의 뺨을 내리치면서 버럭 소리쳤다.“사과하라면 해. 어디서 말이 그렇게 많아? 젠장. 내가 널 돕지 않았다면 수호 동생한테 미움 살 일이 있었겠어?”한창 화를 내고 있던 나는 그 말에 순간 멍해졌다.‘수호 동생? 지금 나를 말하나?’‘젠장, 내가 언제 제 동생이 됐다는 거야?’“어디서 친한 척이야? 너희 셋 다 내려와.”나는 차를 또다시 쾅쾅 내리쳤다.민우 역시 차 위에서 나를 협조해 주었다.승합차가 우리 때문에 완전히 뒤집힐 지경이 되자 주해진은 우리와 연맹을 맺으려는 듯 은근슬쩍 나를 회유했다.“수호 동생, 그만해. 내려갈게. 우리 사이에는 원한이 없잖아. 수호 동생이랑 원한 있는 건 김진호잖아. 그리고 안명훈 저 자식도 자기 여자 친구더러 동생 친구 꼬시라고 했어. 저 둘 중에 좋은 놈 하나 없어. 내가 지금 바로 이 두 놈 내려 보내겠으니까 마음대로 처리해.”주해진은 말을 마치자마자 정말로 김진호와 안명훈을 끌어내 앞에 내팽개쳤다.내 분노는 사실 김진호와 안명훈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가장 큰 원인은 내 차가 박살 난 것 때문이다. 그리고 주범은 바로 주해진이다.때문에 나는 화가 잔뜩 나서 주해진을 향해 파이프를 휘둘렀다.“이 자식들 빚은 내가 천천히 받을 거야. 하지만 내 차를 망가뜨린 건 어쩔 건데?”주해진은 고개를 돌려 내 차를 흘긋 보더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마도 배상할 수 있는 저렴한 차라 안도한 듯했다.“수호 동생, 저 차는 1600만 정도 하지? 내가 나중에 새 차 하나 뽑아줄게.”주해진이
사실 오늘 안명훈은 이곳에 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주해진이 기어코 자기 위엄을 보여주겠다고 불러냈다.그런데 주해진의 위엄은 못 보고 오히려 나와 민우의 미친 모습만 보게 된 거다. 그러니 혼비백산이 되지 않을 리가 있나?안명훈은 필사적으로 차 문을 흔들었다.“나 내릴래. 내려줘...”주해진은 안명훈의 뺨을 후려갈기더니 씩씩거리며 욕설을 퍼부었다.“사내자식이 내리긴 어딜 내려? 네가 문을 내리면 저놈들이 올라올 거잖아. 문 열면 안 돼. 얌전히 앉아 있어. 설마 저 자식이 문을 부수겠어?”펑!나는 승합차를 향해 쇠 파이프를 세게 휘둘렀다.그러면서 속으로는 방금 전의 울분을 토해냈다.‘내 자식 같은 새 차, 아직 할부도 안 끝나 얼마나 애지중지했는데. 네놈들 때문에 고물이 됐잖아.’나는 승합차를 내리치면서 욕설을 퍼부었다.“나와. 차 안에 숨어 있는 게 겁쟁이랑 뭐가 달라?”차 안 세 사람 눈에 나는 충혈되어 시뻘게진 눈을 가진 분노한 맹수나 다름없었을 거다.안명훈은 완전히 겁을 먹어 나한테 끊임없이 간청했다.“오늘 밤 일은 나랑 상관없어... 제발 살려줘. 제발...”주해진도 솔직히 속으로는 무서웠지만 안명훈이 저 하나 살려고 자신을 배신한 걸 보자 화가 나서 그를 발로 차버렸다.안명훈은 그 힘에 못 이겨 옆으로 벌러덩 굴러 넘어졌다.그때, 마침 유리창을 깨뜨린 나는 쇠 파이프로 주해진을 가리키며 소리쳤다.“셋 셀게, 당장 내려. 안 그러면 죽이는 수가 있어.”주해진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그럴 필요까지 있어? 내가 사람을 불러 모으긴 했지만 무기는 안 들었잖아. 게다가 저놈들은 겁을 먹고 이미 도망쳤어. 너희 둘도 크게 다치지 않았으먼서 꼭 미친 짐승처럼 나를 그렇게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겠어?”나는 이를 악물었다.“난 짐승처럼 네 놈을 물고 늘어지는 거로 안 끝나. 아주 뼈도 안 남기고 씹어 먹을 거야. 내가 얼마나 어렵게 산 차인데, 평소 아까워서 조심조심 다뤘는데, 네 놈 때문에 폐차하게 생겼잖아. 내 차 물어
나는 여전히 손에 든 쇠 파이프를 필사적으로 휘둘렀다. 분명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렇다고 기죽을 수도 없었다.민우가 말한 적이 있는데, 싸울 때 가장 무서운 건 싸우기 전부터 겁을 먹는 것이라고 했다.하지만 한참 싸우다 보니 나는 점점 힘에 부쳤다. 놈들 인원수가 너무 많아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그렇다고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었다.인체에는 자극을 받으면 잠재력을 자극하는 혈 자리가 있는데, 그 혈 자리가 자극을 받으면 잠재력이 폭발했다가 나중에 한동안은 몸이 나른해진다.하지만 이 상화에서 다른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에 나는 고민 없이 혈 자리를 눌렀다. 그 순간 온몸에 힘이 솟아나면서 내가 마치 거인이 된 느낌이었다.“야! 다 죽었어!”나는 고함을 지르는 동시에 쇠 파이프를 휘두르면서 달려갔다.나를 에워싸고 있던 놈들은 내가 더 이상 전투력이 없다는 걸 보고 모두 긴장을 푼 상태였다. 하지만 나는 갑자기 미친 것처럼 놈들의 코뼈를 하나씩 부러뜨렸다. 심지어 손이 무척 매웠다.나는 피가 들끓어 끊임없는 힘이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매번 파이프를 휘두를 때마다 젖 먹던 힘까지 짜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는데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나도 한방에 놈들 뼈를 부러뜨릴 수 있다는 것에 흥분됐다.‘만약 동준 형님이 이 모습을 본다면 나에게 재능이 있다고 여기지 않을까?’싸울수록 피가 끓고 힘이 솟아났다. 놈들은 심지어 나를 보자 연신 뒷걸음쳤다.옆에 있던 민우마저 나를 보면서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물었다.“수호야, 너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난 지금 힘들어 죽겠는데...”나는 혈 자리를 가리켰다.그러자 민우는 바로 눈치챘다.민우 역시 의학을 전공한 지라 말하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었다. 곧이어 민우 역시 스스로 한 대 치더니 갑자기 피가 솟구치는 것처럼 흥분했다.“하하하, 나도 다시 회복했어. 너희들 죽었어.”우리는 서로 협조하면서 놈들한테 달려가 퍽퍽, 주먹을 날렸다.우리를 끝장내버리겠다고 큰소리치던 놈
전에는 누가 와서 소란을 피울까 봐 민우더러 나와 함께 가게에서 지내자고 했지만, 지금 사장님 댁에 머물고 있는데 민우까지 데려올 수는 없었다. 때문에 뭐든 나 혼자 해결해야 했다.민우를 집에 데려다 두는 길에 그는 나에게 함께 사장님 댁에 있어 달라냐며 물었다. 그러면 서로 보살필 사람이 있다면서.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나도 그걸 생각해 보지 않은 적 없어. 하지만 사장님을 돌보려고 그 집에서 지내고 있는데 너까지 데려가면 이상하잖아.”“난 그 개자식들이 또 너한테 무슨 짓 할까 봐 그러지.”“나도 무서워. 하지만 이미 준비해 뒀어.”나는 의자 밑에서 도구 몇 개를 꺼냈다.민우는 그 도구들을 손에 들고 무게를 가늠해 보더니 말했다.“이 도구들은 조금 도움이 될 뿐이야. 그래도 내가 너한테 가르쳐준 방법을 사용해.”민우는 말하면서 손을 움켜쥐는 동작을 했다.그 동작에 나는 풉, 하고 웃음이 터져 버렸다.“그 방법 확실히 좋더라...”우리가 한창 얘기하고 있을 때 백미러에 언뜻거리는 차 한 대가 비쳤다.무의식적으로 뒤에 따라붙은 사람이 운전할 줄 모른다며 투덜거리던 나는 갑자기 이상한 낌새를 챘다. 그도 그럴 게, 뒤에서 달려오는 차는 속도가 아주 빨랐는데 마치 나를 강제로 세울 것처럼 굴었으니까.“잘 앉아.”나는 불안한 예감에 다급히 액셀을 밟아 속도를 냈다.다만 내 차의 유일한 단점은 속도를 너무 빨리 낼 수 없다는 거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뒤 차에 따라잡혔다.놈들은 내 차를 강제로 멈추게 할 작정인 듯했다. 하지만 나는 멈추고 싶지 않았다. 상대방 차량은 승합차였는데, 그런 승합차는 용량이 커 적어도 열댓 명을 태울 수 있었다.만약 차에서 열 몇 명이 우르르 내리면 나와 민우 둘이 대처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때문에 나는 액셀을 밟았다. 하지만 승합차 두 대는 좌우에서 협공하며 내 차를 가운데 몰아 끼긱끼긱, 하며 긁히는 소리가 났다. 분명 차가 내는 소리였지만 내 살점이 뜯겨나가는 기분이었다.아직 차 할
내가 한창 망설이고 있을 때 사장님도 말을 보탰다.“수호 씨, 남아서 좀 도와줘. 우리 마누라가 요즘 너무 힘들어서 그래. 어릴 때부터 금지옥엽으로 자라나 이런 고생 언제 해 봤겠어? 이것 봐, 피곤해하는 거 보이지? 나도 솔직히 마음 아파.”사장님과 사모님이 모두 나를 남으라고 설득하는 상황이라 나도 더 이상 거절하기 곤란했다.“그래요. 제가 남아서 도와드릴게요.”사장님이 드시고 사용해야 하는 약이 너무 많아 확실히 번거롭긴 하다. 때문에 나도 사모님 혼자 사장님을 케어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됐다.사모님은 내 말에 이내 환한 표정을 지었다.“수호 씨는 아무것도 가져올 필요 없어요. 여기 모두 있으니까. 전처럼 계속 객실에서 자면 돼요. 그곳 채광이 좋고 공기도 좋아요...”사모님은 내가 이곳에서 지내는 데 불편해할까 봐 끊임없이 말을 늘어놓았다.사장님 내외가 사는 집은 모두 고급 가구를 사용했는데, 내가 이곳에 남아 도와주지 않는다면 이런 걸 누려볼 기회가 어디 있을까?사장님 내외는 나한테 너무 잘해줘서 내가 다 미안할 따름이었다.사장님 몸은 우선 한약으로 며칠간 보양해야 하지만 약을 다 먹으면 사실 힐 것도 없어 나는 가게 일을 돌볼 수 있었다.요 며칠간 주해진은 소란 피우러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이대로 포기했다는 건 아니었다. 때문에 나는 동료들한테 주의할 것을 당부했다.한편 주해진은 그날 도망치듯 가게를 떠난 뒤 마음이 계속 안 좋았다.하지만 최근 일손을 구해봤지만 누구도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 첫째 이유는 주해진이 깡패라 정계와 연이 닿는 지인이 적었고, 두 번째 이유는 사촌 형이 다시는 화인당을 다시는 건드리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었다.주해진은 입으로는 싫다고 했지만 요 며칠간 그래도 제 분수를 지켰다. 다만 김진호 병문안을 간 뒤, 마음이 또 바뀌었다.김진호는 나를 여자 등에 빨대 꽂고 출세한 놈으로 말하면서, 깡패인 주해진이 나 같은 등신 하나 해결하지 못한 게 알려지기라도 하면 얼마나 웃음거리
어르신도 허허 너털웃음을 지었다.“너도 잘했어. 처방한 게 거의 다 맞췄으니까. 새내기 같지가 않아. 네 할아버지한테서 많이 배웠나 보네?”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그럭저럭요. 그런데 그때는 너무 어려 할아버지의 모든 재능을 배우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에요.”“괜찮아. 앞으로 내가 네 할아버지니까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언제든 나한테 물어봐.”나는 얼른 감사를 표했다.어르신과 약처방을 확인한 뒤, 나는 화인당에 가 이틀 치 약을 짓고 동료들에게 사장님이 퇴원했다는 사실을 말했다.다들 사장님이 다 나은 줄 알고 기뻐하는 눈치였다. 특히 민우는 슬그머니 내 팔을 잡으며 말했다.“사장님이 돌아오면 우리 따로 나가는 거지?”나는 얼른 민우의 말을 잘랐다.“사장님이 돌아와도 이런 말은 급하게 하면 안 돼. 화인당이 안정되고 가게에 일손이 부족하지 않을 때 떠날 수 있어. 우리가 다른 길을 찾아 나서는 건 자신을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지만, 화인당에 누를 끼쳐서는 안 되지. 사장님이 우리 둘한테 얼마나 큰 은혜를 베풀었는지는 내가 말 안 해도 알잖아.”민우는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내가 생각이 짧았네. 앞으로 절대 함부로 말 안 할게.”“참, 요즘 태진 선배는 어때? 가게에서 본 적 있어?”나는 가게에 들어오자마자 모태진이 오늘 없다는 걸 발견했다.내 말에 민우가 대답했다.“누가 알겠어? 또 그깟 일 때문에 가게에 피해 갈까 봐 안 나왔겠지. 상관하지 마. 다 큰 어른이 본인 몸 하나 건사 못 하겠어? 수호야, 아직은 따로 나가는 말은 안 할게. 하지만 천수당을 관찰하는 건 괜찮지?”“관찰하는 건 괜찮아. 하지만 함부로 하지 마.”나는 신신당부했다.그러자 민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뜻을 내비쳤다.나는 약을 가진 후 다시 사모님 댁으로 돌아갔다.이 약 일부는 목욕용이고 일부는 마시는 약이라 나는 위애 상세하게 적어 따로 분리했다. 그리고 먹는 약은 모두 달여 진공 포장한 뒤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이렇게 하면 마실 때 데
윤지은은 보기 드물게 이번만큼은 내 편에 섰다.“동의하기 싫어도 동의해야지. 내가 진작 서약이 부작용이 있고 중독성이 커서, 장기적으로 이렇게 치료하면 환자가 오히려 탈탈 털릴 거라고 말했는데. 유미한테는 내가 말할게. 걔네 부모님은 아무튼 B시에 계시잖아? 한동안 돌아올 수 없으니까 당분간 비밀로 하지 뭐.”윤지은이 전에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 건 이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이기 때문이다. 서의학 의사면서 서의학이 안 좋다고 하면 분명 안 좋은 영향이 있을 거다.하지만 친구 남편인 정호섭의 생명이 달린 일이니 더 이상 거리낄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친구 임유미가 가장 마음에 걸렸다.만약 정호섭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임유미는 어떡하라고?나는 사장님을 바라봤다.“그래도 되겠어요?”사장님은 효심이 강한 분이라 장인 장모를 속이는 게 안 좋다고 여겼다. 게다가 두 분이 지금껏 사장님을 길러왔으니.하지만 사장님이 고민하는 동안 윤지은은 이미 사장님 대신 결론을 내렸다.“뭐 그렇게 생각할 게 많아요? 두 분한테 말하면 절대 동의 안 할 거예요. 이 일은 내가 말한 대로 해요. 나도 한의학을 전공했던 사람이라 파악이 없으면 이런 말 안 해요.”나와 사장님 모두 머뭇거렸는데, 윤지은이 이런 태도로 나오니 오히려 감화되었다.나는 윤지은이 진심으로 존경스러웠다. 뭐든 엄격하고 신속하게 하는 모습은 내가 따라 배울 점이었다.윤지은은 나더러 병원에 남아 사장님을 돌보게 하고 본인은 유미 사모님을 모셔 오면서 한의 치료 방법에 대해 말해주겠다고 했다.그사이 나는 사장님이 아침 식사를 드시는 걸 도와드렸지만, 사장님은 입맛이 없다면서 조금밖에 드시지 않았다.요즘 매일 많은 양의 약을 먹어 위장이 망가져 음식을 먹는 것조차 무리였다.이렇게 부작용이 큰 게 바로 서양의학의 가장 큰 단점이다.나도 사장님을 강요하지 않았다.환자가 입맛이 없다는데 억지로 먹게 하면 오히려 위장의 부담을 더해주기 때문이다.나는 따뜻한 물을 받아와 사장님의 얼굴과 몸을 닦아주었다.
어르신은 내가 보인 자신감에 매우 만족해했다. 하지만 주의할 점을 귀띔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침술 하기 전에 모든 서약을 끊고 한동안 몸보신해야 해. 지금 너의 사장님 몸은 너무 나약해서 기혈이 거의 다 사라진 거나 다름없어. 이 상태로 침술 할 수 없어. 이 일은 먼저 환자 가족들과 상의하고 동의를 구한 뒤 진행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때마침 윤지은이 회진하러 와서 나는 그녀더러 사장님을 잠시 봐달라고 하고는 어르신을 모시고 밖으로 나갔다.“됐어. 데려다 줄 필요 없어. 이 부근에 마친 공원이 있으니 나도 좀 산책하다가 택시 타고 가면 돼. 네 사장님 상황은 서둘러서 가족과 상의해. 더 지체되면 천지신명이 와도 어쩔 수 없어.”어르신의 긴박한 말투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 할아버지.”나는 진심으로 어르신께 감사했다. 90세가 넘는 분이 내 전화 한 통에 아무 이유 없이 도와준 거니까.이 은혜는 꼭 마음에 새길 거다.어르신은 허허 너털웃음을 지었다.“사람을 구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지. 이건 나를 위해 덕을 쌓는 거야. 너도 얼른 가 봐. 이 일은 지체하면 안 된다는 거 잊지 말고.”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어르신이 뒤돌아 떠난 뒤에야 나는 병실로 돌아갔다.다른 사람은 이미 떠나고 윤지은만 병실에 남아 있었다.나는 얼른 윤지은과 사장님께 방금 전 상황을 말씀드렸다.“수호 씨, 한의학 치료법으로 정말 내 병을 완화할 수 있어?”사장님은 나를 조금 믿는 눈치였지만 그래도 한번 확인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설명했다.“아까 보신 분이 우리 마을에서 엄청 유명한 명의세요. 젊을 때 저희 할아버지랑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람들 병을 치료해주셔서 엄청 유명해요. 저도 그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본 건데 정말 방법이 있다더라고요.”“사장님이 입원한 뒤 몸 상태가 확실히 점점 나빠지셨잖아요. 이 부분은 제가 말하지 않아도 사장님도 느끼셨을 거예요. 서약은 비록 효과는 빠르지만 부작용도 커요. 사장님 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