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왕은 평온한 표정으로 우문호를 보았다. 그는 시종일관 온화하고 우아했다. 우문호가 고개를 돌리고 손님 마중을 나가자 안왕은 미소를 거두고 본래 차가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초왕부에는 전례 없이 시끌벅적했다. 실내도 자리가 없어 실외 정원까지 사람들이 서있었다. 손님이 어찌나 많은지 사람들이 구름처럼 뭉게뭉게 뭉쳐 다니는 것 같았다. 황친들과 손님들이 기다리는 것은 딱 하나. 갓 태어난 삼둥이들이다. 시간이 되어도 아이들을 얼굴을 보여주지 않자 사람들은 우문호가 삼둥이를 얼마나 아끼는지 가늠이 된다며 수군거렸다. 때마침 도착한 주수보가 사람들을 진정시키며 조금만 더 기다리자고 했다.주수보도 오랜만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을 보고 기가 빨리는 기분이 들었다. 초왕부에는 흔히 볼 수 없는 고관들도 있었다. 일품이든 이품이든 그보다 높은 고관이든 고대하던 태자 책봉에 다들 기뻐했다.게다가 태자비가 세 사내아이를 순산했다니. 이 얼마나 경사스러운 날인가?안왕은 우문호에게 다가가 “다섯째, 듣자 하니 삼둥이가 모두 똑같이 생겼다면서? 안고 나와서 한 번 보여주지 그래?” 라고 물었다. 안왕의 말을 듣고 우문호도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보았다. 다들 삼둥이들을 보고 싶어서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눈치였다. 안왕은 우문호가 아무 반응이 없자 사람들 쪽으로 시선을 돌려 그들을 선동했다. “태자비가 분명 삼둥이를 낳았다고 했는데, 다들 보고 싶지 않습니까?”“예! 태자 전하, 소신들 기다리다가 숨넘어가겠습니다!” 황친들과 조정의 관리들이 하나같이 삼둥이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그들의 열렬한 환호에 우문호가 마지못해 웃으며 말했다. “삼둥이들이 낮잠을 자고 일어났으니, 이제 여러분들께 보여드려야겠습니다.”그는 탕양에게 준비하라고 손을 흔들었다. 군중은 태손들이 나온다는 말에 기대에 찬 눈빛으로 두리번거리며 얘기를 나누었다.“삼둥이가 모두 똑같이 생겼다는데 정말 신기합니다!” “다 똑같이 생겼다는 게 뭐가 신기해? 같은 배에서 나왔으
“본왕의 조카인데, 본왕이 어찌 대충 보았겠느냐?” 안왕은 노발대발했다.안왕은 우문호의 당당한 태도에 일이 틀어진 게 아닌가 걱정이 됐다. 안왕이 초왕부를 둘러보니 군사들도 평온해 보였고, 우문호도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줄곧 손님들을 맞이했다. 초왕부의 하인들도 마찬가지로 긴장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친정에서 돌아온 지 오래됐고, 아이들이 지금까지 안 씻었을 리도 없었다. 분명 얼굴을 똑똑히 봤을 텐데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 한 걸까? 초왕은 왜 이렇게 침착하지?’안왕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설마 정후가 뭔 수작을 부린 건 아니겠지? 그럴 수는 없는데…… 초왕부에 오기 전에 하인이 와서 정후가 아이를 안고 서산(西山)으로 갔다고 했단 말이다. 그렇다면 세 아이의 얼굴은 똑같지 않을 거고, 우문호는 이렇게 침착할 수 없을 텐데……’안왕은 앞으로 우문호가 겪을 파문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입꼬리가 씰룩거렸다.때마침 유모 상궁이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다.5월이 하늘을 맑고 따스했다. 삼둥이들은 모두 자주색 옷을 입고있었고, 머리에는 금테와 빨간 모자가 씌워져있었다. 사람들은 삼둥이들을 보기 위해 모여들었고, 안왕도 가까이 다가와 삼둥이들을 보았다.‘망할, 셋이 완전 붕어빵이잖아?’안왕은 인상을 쓰고 우문호를 바라보았다. 우문호는 그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찰떡이를 안고는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사람들은 처음 보는 우문호의 다정다감한 모습에 입을 틀어막고 수군거렸다. 안왕은 정후는 쓸모없는 패라는 것을 깨닫고 몹시 화가 났다. 우문호는 안왕에게 화를 낼 시간마저 아깝다는 듯 삼둥이에게만 집중했다. 많은 사람들이 삼둥이를 보러 왔고, 안왕에게 굳이 화를 내지 않아도 그는 죄에 책임을 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옆에 있던 주수보는 작은 생명체를 보고 감탄했다.“한번 안아봐도 되겠는가?” 우문호는 찰떡이를 주수보의 품에 건네주었고, 주수보는 찰떡이를 안고 조심스럽게 좌우로 흔들었다.손왕은 그런 주수보를 바라보며 웃
주수보에게 안겨있는 찰떡이를 보고 다들 삼둥이를 안아보고 싶다고 아우성이었다. 사람들은 삼둥이들을 안기 위해 줄을 섰고, 유모 상궁이 옆에서 사람들에게 아이를 안는 방법을 설명하며 차근차근 한 명씩 안게 해주었다. 사실 찰떡이가 낯선 이의 얼굴만 보면 우는 예민한 성격인데, 오늘따라 기분이 좋은지 안기는 사람마다 방긋방긋 웃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사르륵 녹였다. 예친왕(睿親王)을 거쳐 안왕도 찰떡이를 품에 안게 됐다. 안왕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찰떡이를 보자 예친왕이 안왕에게 “안기 싫으면 본왕이 좀 더 안아주겠습니다.” 라고 말했다.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일제히 안왕에게 시선이 꽂혔다. 안왕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이라도 하듯 찰떡이를 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우문호는 미간을 찌푸리고 안왕을 바라보았다.사람이 많으니 안왕이 찰떡이를 어떻게 하지는 못하겠지만, 우문호 입장에서는 찰떡이가 안왕의 품에 안기는 게 내키지는 않았다.“으앙!” 안왕의 품에 안기자마자 찰떡이가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다. 그 울음소리가 어찌나 큰지 사람들이 일제히 찰떡이를 보았다. 지금까지 방긋방긋 웃던 찰떡이가 왜 저렇게 우는지 모두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찰떡이가 울다 못해 비명을 지르자 사람들은 안왕이 찰떡이에게 무슨 짓을 한 게 아닌가 의심하기도 하고, 안왕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는 듯 그를 노려보았다. 우문호는 발버둥 치는 찰떡이를 뺏다시피 안았다. 그가 아버지라는 것을 아는 듯 찰떡이는 울음을 멈추고 평정을 되찾았다. 사람들은 찰떡이가 아버지의 체면을 살려주는 효자라며 칭찬을 했다. 안왕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람들은 안왕을 벌레보듯 보며 아이가 저러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했다.우문호는 찰떡이의 머리카락을 쓸다 문득 원경릉의 말이 생각났다. ‘삼둥이들은 다른 아이들과 달리 특별해.’우문호는 찰떡이가 위험을 감지하고 운 게 아닌가 의심했다.*잠시 후, 초왕부에 목여태감이 왔다. 그는 태자 책봉을
아이들을 보고 긴장이 풀린 원경릉이 우문호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렸다. 원경릉이 걱정할까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는 우문호도 마음이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이 왕부로 돌아온 것 맞지만, 아이가 밖에서 겪은 일을 생각하면 우문호의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부황께서 안왕을 입궁하라고 했으니 너무 걱정 마.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거니까.”우문호는 가볍게 원경릉의 들을 쓰다듬었다. “응……” 원경릉은 천천히 눈물을 닦으며 우문호를 올려다보았다. 찰떡이는 두 주먹을 꼭 쥐어 ‘어어-‘하며 큰 눈을 이리저리 굴려 우문호를 보았다가 원경릉을 보았다가 했다.두 사람을 찰떡이가 지금처럼 건강한 게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찰떡이는 태어날 때 탯줄이 목에 감겨 낳을 때부터 고생을 했다. 그 때문에 황달도 심하게 앓았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생사를 넘나드는 일을 겪다니……원경릉은 찰떡이가 안쓰러워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다.“아이들을 차별하면 안 된다고 생각은 하지만, 깨물었을 때 더 아픈 손가락은 확실히 있는 것 같아.”우문호가 말했다.원경릉은 그를 노려보며 “안 돼. 우리는 삼둥이를 모두 공평하게 사랑해 줘야 해.”라고 말했다.“알지, 하지만 지금 내 마음이 그렇다고. 앞으로 주의할게.”원경릉은 찰떡이를 안아 그의 얼굴을 보았다. 찰떡이의 통통한 볼을 만지며 원경릉은 우문호의 마음을 이해했다. “아, 그럼 그 아이들은 어쩌지? 원팔룡에게 아이를 어디서 데리고 왔는지 물어서 모두 원래 집으로 돌려보내야 해.” 원경릉이 말했다.“나장군이 말하길, 네가 임신했을 때, 부중의 둘째 노마님이 사람을 구해 은전 두 냥을 주고 샀다고 하던데?”원경릉은 정후의 몹쓸 계략에 고개를 저었다.“원팔룡은 도대체 머리에 뭐가 든 거지? 그 사람은 지금 어디 갔어? 궁으로 불려갔대?” “들어갔대.”“어휴. 확 죽었으면 좋겠네”원경릉이 말했다.우문호는 원경릉을 보며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서는 절대 안 돼. 하지만 죽이는 건 좀……” 라고 말했다.“너
“부황께서도 큰형님이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는 것을 알고 계실 거야. 그러니 큰형님도 좀 더 기다리면 옥에서 풀려나시겠지.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앞으로 조정에서 큰형님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이 줄었어. 지금 큰형님에게 남은 인맥도 별로 없는데, 남아있는 사람마저도 다 기왕비와 연관이 되어있으니 이제 큰형님은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 봐도 무방하지.”우문호의 말을 듣던 원경릉은 순간 주명양이 떠올랐다.“주명양도 괜히 기왕에게 시집가서 기도 못 펴고 살겠네.” 원경릉이 말했다.기왕은 야망은 크지만 머리가 좋지 않았다. 그는 시커먼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인물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유형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불쌍하다거나 안쓰럽다는 것은 아니다. 원경릉은 그가 지금까지 한 일만 생각하면 속에서 천 불이 끓었다.기왕은 가장 나이가 많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별 볼일 없는 친왕이다. 그는 마치 나이가 어린 정후 같았다.그는 지금까지 모든 일을 기왕비와 주명양을 통해 처리했다. 여자를 통해 태자가 되려고 한 기왕과 정후가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처음엔 기왕비를 이용하다가 기왕비가 병에 걸려 힘이 약해지자 주명양을 들여 다시 한번 세력을 뒤집으려고 했다. 하지만 멍청하게도 기왕은 안왕의 덫에 걸려 죽을 뻔하지 않았는가.*사람들이 어느 정도 탕병을 먹자, 하인들은 분주하게 술상을 준비했다. 안왕이 떠나고 난 후, 초왕부의 연회가 정식으로 시작됐다. 원경릉은 황족들과 그의 부인들에 둘러싸였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원경릉이 대단하다고 칭찬했으며, 새삼 그녀는 삼둥이를 낳은 것이 대단한 일이었구나 생각했다. 다섯째는 사람들과 술을 주고받으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우문호는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속도를 봐가며 천천히 술을 마셨다. 탕양은 황실의 귀한 술인 여아홍을 꺼냈고 사람들은 눈을 번뜩이며 흥이 나는 듯 노래도 부르고 덩실덩실 춤도 췄다. 소로(蘇老)는 우문호의 연회에 흥을 돋기 위해 소씨 집안의 젊은 사내들을 모두 데리고 왔다
원경릉은 원용의를 보고 흠칫 놀랐다. 원경릉은 술이라면 질색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손왕비와 문영 공주의 부추김에 그녀도 어쩔 수없이 술잔을 들었다. “건배!”모두가 술을 입에 털어 넣었고 원경릉도 마지못해 술잔을 비웠다. 근데 이게 웬걸?‘술이 아니고 물이잖아?’그녀는 고개를 돌려 술을 따라준 희상궁을 보았다. 희상궁은 조용히 눈짓을 하며 그녀에 귀에 대고 “제가 술을 따라드리겠습니다. 태자비께서는 분위기만 맞추세요.”라고 말했다.“조금은 괜찮아요.” 원경릉이 웃었다.“아뇨. 태자비 술은 멀리하시는 게 좋습니다.” 희상궁이 고개를 저었다. 원경릉은 자신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흥을 깨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했다. *어서방.안왕은 명원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그는 부황의 화난 얼굴이 무서워 어서방에 들어온 후 한 번도 부황의 얼굴을 올려다보지 않았다. 안왕은 목여태감이 초왕부로 자신을 데리러 왔을 때부터 무슨 일로 자신을 불렀을지 예상했고, 그에 대한 대처 방법도 머리에 짜놓았다.안왕은 혜선생이 모든 죄를 다 뒤집어쓸 거라고 예상했기에 안왕은 그저 모르쇠로 나가기로 했다.만약 정후가 입을 열지 않는다면 안왕이 이 일에 관여됐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었다. 명원제는 안왕을 한참 보았다.“무슨 할 말 없느냐?” 명원제가 물었다. 안왕은 고개를 들었다.“부황, 소자가 가신을 잘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정말 면목없습니다. 벌을 내려주십시오.” 안왕은 명원제의 수를 내다보고 있었다.혜선생은 모든 죄명을 죄다 뒤집어썼으며, 정후도 모든 일이 혜선생이 저질렀다고 말했다. 정후는 혜선생이 자기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자신이 안왕을 설득해 관직에도 복직시켜주겠다고 했다고 했다. 정후는 혜선생의 말을 듣고 바로 태자에게 전했고, 혜선생을 잡을 기회를 줬다고 말했다.이것에 명원제가 알고 있는 정후와 혜선생의 자백이다. 당시 나장군이 찰떡이를 안고 궁으로 들어오는데, 찰떡이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있는 것을 본 명원제는 마음이
“억울하다고? 네가 관련이 없다고 아무리 우겨도 안왕부 사람이 벌인 일이니 너도 책임이 있어! 짐은 네가 억울하다고 하는 것 자체가 어이가 없다! 네 아랫사람이 독단적으로 이런 일을 벌인다고? 웃기는 소리!”명원제는 성난 목소리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부황의 말씀이 맞습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소자는 정말 몰랐습니다. 부황께서 철저한 조사로 이 일의 진실을 밝혀주십시오!” 안왕이 말했다.“믿기 힘들다는 것은 아느냐?”안왕은 흐르는 피를 닦으며 명원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부황,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정후가 혜선생이 자신에게 접근했다는 것을 다섯째에게 알려줬는데, 다섯째는 왜 그 사실을 바로 부황께 알리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고 태손에게 갔겠습니까? 태손에게 가는 것보다 부황께 이 일을 알리고 처리하는 게 훨씬 빨랐을 텐데요. 다섯째가 설마 자신이 벌인 일을 부황에게 들킬까 봐 그런 게 아닐까요?”“……”“게다가 혜선생은 안왕부의 사람은 맞지만 최근 그와 왕래도 적었고, 소자는 그를 신임하지 않아 중요한 일을 맡긴 적이 거의 없습니다. 이는 부황께서도 잘 아실 겁니다. 소자가 언제 혜선생을 통해 일을 처리했습니까? 만약 소자가 이 일을 꾸몄다고 해도, 소자는 절대 혜선생에게 시키지 않았을 겁니다.”“……”“부황, 소자 너무 억울하옵니다!”“그러니까, 네 말은 다섯째가 자작이라도 하는 거라고?”“부황,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좀 그렇지만…… 소자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섯째가 이런 일을 꾸민 게 한두 번이 아니잖습니까? 전에도 자해를 하지 않았습니까?”“무슨 헛소리야? 짐이 언제 그놈이 자해를 했다고 말했던가?” 명원제가 노하여 탁자를 쳤다.안왕은 고개를 들고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명원제를 보았다.“자해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범인이 잡히지 않을 리 없잖아요.”안왕의 말을 듣고 명원제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명원제는 순간 기왕이 떠올랐다. 그는 첫째인 기왕을 처벌하는 게 옳지 않다고 생각해서 암살 사건의 결론을 지금까지 질질 끌고 있었
태상황이 어서방으로 들어오자 명원제는 자리를 비켜 태상황의 옆에 섰다. 태상황은 안왕을 노려보며 “네 사람이 죄를 지었는데, 무슨 할 말 없느냐?”라고 물었다. 안왕은 최근까지 태상황과 교류가 없었다. 안왕은 지금까지 태상황과 관련된 일은 모두 외조부인 적위명(狄魏明)을 통해서 들었다. 안왕은 태상황의 등장에 잔뜩 긴장했다.“황조부, 손자는 정말 억울합니다.” 안왕이 말했다.“뭐가 억울한가?” 태상황이 물었다.“황조부,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손자가 어떻게 다섯째의 아들을 가지고 모험을 하겠습니까? 게다가 정후는 다섯째의 장인이니……”태상황은 더는 못 들어주겠다는 표정으로 안왕의 말을 끊었다.“쓸데없는 말은 삼가거라. 네가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조사하면 다 나오게 되어있다! 게다가 네 사람이 이런 일을 하는데 네가 전혀 몰랐을 리가 없지 않아? 어디서 뻔뻔하게 거짓을 말하느냐!”명원제는 태상황의 말을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태상황께서도 저렇게 생각하시는구나. 저 몹쓸 넷째에게 하마터면 내가 속을 뻔했어.’안왕은 태상황의 말을 듣고 입술이 벌벌 떨렸다. “그건……”태상황은 앞에 놓인 탁자를 내리치며 분노했다.“지금 네 태도를 보아라! 네 말대로 넌 이 일에 관련이 없고, 네 아랫사람이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치자, 그럼 그를 잘 돌보지 못한 너에게는 잘못이 하나도 없느냐?”“손자…… 죄가 있습니다.” 태상황의 무서운 눈빛에 안왕이 고개를 속였다. 태상황은 차갑게 웃으며 “그래, 오늘은 사람을 잘 가르치지 못한 죄를 묻겠다. 과인이 직접 이 일에 대해 조사를 할 것이니, 그렇게 알고 있어라. 만약 이 일에 네가 연루되어 있다는 게 확인되면, 과인은 너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했다.안왕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황조부! 왜 손자를 믿지 못하십니까? 태상황께서는 다섯째의 말은 믿으시고 왜 같은 친왕인 제 말을 믿지 않으십니까? 너무 편파적이신 거 아닙니까? 이 일은 정말 제가 꾸민 게 아닙니다! 막말로 다섯
냉정언은 자기도 모르게 죄책잠이 들어 미간을 찌푸렸다.‘이번에 정말 큰일을 저지른 것인가?’그는 그저 탕양에게 술을 먹여 일곱째 아가씨에게 진심 어린 말을 꺼낼 용기를 주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동안 탕양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황제뿐만 아니라 모두가 알고 있었고, 다들 그를 안타까워했었다.탕양은 다섯째가 초왕이었을 때부터 초왕부와 다섯째, 그리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많은 일을 해왔다. 그렇게 반평생을 북당을 위해 헌신했으나, 그를 진정으로 주목한 이는 많지 않았다. 특히 과거에 자신도 용납할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탓에 평생을 스스로도 용서하지 못한채, 조정을 위해 뛰어난 공을 세우고도 관직이나 봉록을 거절하며 죄를 속죄하듯 살았다. 하지만 진심으로 그를 아끼는 사람들은 그를 탓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누구나 실수를 범할 수 있는 법이니까. 탕양은 이미 그 누구보다 훌륭히 잘해왔고, 게다가 정과 의리에 발목 잡힌 것은 많은 영웅이 저지르는 흔한 실수였다. 고금의 역사를 통틀어, 결코 그 혼자만이 저지른 행동이 아니었다.탕양은 일곱째 아가씨와 벗이라는 관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늘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술에 취하지 않은 이상, 맑은 정신으로는 절대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을 것이기에, 술에 취하게 하면, 경성이 아닌 변방의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몇 마디 속마음 정도는 털어놓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하지만 예상외로, 탕 대인의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쌓였던 건지... 만취 상태에서 무슨 일을 저지른 것 같았다. 대체 이 마음을 얼마나 오랫동안 품었던 것일까?상황이 아주 복잡해졌다.‘탕 대인 아주 못 쓰겠구먼! 이를 어찌 마무리 짓는단 말이냐…?!’원가의 상대하기 쉽지 않은 여장군들을 떠올리니, 냉정언은 순간 뒷골이 땡겨 머리를 쥐어뜯었다.그러고 나서 고개를 돌리니, 냉명여가 눈 앞에 서 있었다. 냉명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버지, 탕 대인은 어찌 일곱째 아가씨와 그런 일을 벌인
탕양은 지금까지 살면서 술에 취해 저지른 잘못이 단 하나뿐이었다. 비록 그 일도 나중에 사실이 아니었음이 밝혀졌지만, 그 일로 그는 술에 취하면 정말로 이성과 기억을 잃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렇기에 그 후로 술을 마시더라도 되도록이면 취하지 않게 애썼다. 하지만 어젯밤은 예외였다. 그는 이곳 사람 모두를 믿고 있었기에 경계를 풀었던 것이다.남녀 간의 일도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가 되어서 어젯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의부님! 의부님!"바로 그때, 문밖에서 호명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탕양은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호통쳤다."일단 들어오지 말거라!"그는 급히 이불을 걷어내고, 바닥에서 옷을 찾아 황급히 입은 후, 이마를 문지르며 정신을 가다듬은 뒤에야 문을 열어 주었다.문밖에서 호명이 물었다."이제 막 일어나신 겁니까? 아직도 취기로 힘드십니까?"탕양은 머릿속이 어지럽고 복잡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답했다."괜찮다. 무슨 일이더냐?""식사하시라고 부르러 왔습니다. 아! 일곱째 아가씨께서 경성으로 돌아간 것을 알고 계십니까? 같이 가실 줄 알았는데 먼저 떠나셨더군요.""… 돌아갔다고?!"탕양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예!"호명이 그의 얼굴을 보다가 잠시 멈칫하며 말했다."의부님… 혹시 어젯밤 누구에게 맞으셨습니까?"탕양은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만져 보았는데, 그제야 얼굴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황급히 동경을 찾아 얼굴을 비춰보았는데, 왼쪽 뺨에 여러 개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누군가에게 뺨을 맞은 것 같았다.그러자 어렴풋이 한 여인이 세게 뺨을 때리며 욕설을 퍼붓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떠올랐다.하지만 여전히 머릿속이 텅 비어 있어 창백해진 안색으로 생각에 잠겼다.‘설마 내가 취기를 빌어... 그래서 떠난 것이었구나...’이번 사건은 목숨을 내놓고 속죄해도 부족할 정도였다."말을 준비하거라! 어서!"탕양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소리
연회는 계속 진행되었고, 냉정언은 술잔을 들고 계속 탕양에게 술을 권했다. 잔을 몇 번이나 주고 받자, 탕양은 머리가 머리가 어지러워져 말조차 똑바로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연회가 끝난 후, 냉정언이 일곱째 아가씨에게 말했다."술을 꽤 마셨다 보니, 탕양이 좀 취한 것 같네. 정원에 나가 산책을 조금 하면서 술기운을 가시는 것이 어떻소?"일곱째 아가씨도 약간 취한 상태였기에, 바람을 쐬며 땀을 내면 술이 깰 것 같다며 동의했다."예. 그럼 다들 돌아가서 쉬시지요. 제가 호명과 함께 탕 대인을 돌보겠습니다.""좋소. 수고하시게나!"냉정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자, 어서 돌아가시게!"그렇게 사람들은 모두 새가 흩어지는 것 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일곱째 아가씨는 호명과도 함께 산책할 생각이었는데, 빠르게 사라지는 그들의 모습이 어이가 없는듯 웃음을 터뜨렸다.그러고는 탕양의 붉게 상기된 얼굴을 보고 물었다."괜찮습니까? 걸을 수 있겠습니까?"그러자 탕양이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났는데, 술에 많이 취한듯 몸을 심하게 휘청거렸다."어찌 못 걷겠습니까? 취하지 않았습니다!""예. 그럼, 몇 걸음 더 걸어보시지요. 정말 못 걸으시겠으면 방으로 돌아가 쉬시고요. 취기를 덜어줄 탕을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그러자 탕양은 허리에 손을 얹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나갔다. 곧게 뻗은 직선을 그리며 터벅터벅 걷고는 뒤돌아 일곱째 아가씨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보시지요. 얼마나 똑바로 걷는지! 안 취했습니다. 이제 믿을 수 있습니까?"일곱째 아가씨는 그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하하하. 예, 안 취하셨네요. 그럼 이만 나가서 함께 산책하시지요."그녀는 그가 오래 걷지 못할거라고 생각해, 방으로 데려가 쉬게 하기로 했다.역시나 문을 나서자마자 탕양은 난간을 붙잡고 비틀비틀 걷기 시작했다. 하도 휘청거리는 탓에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기에, 일곱째 아가씨는 결국 어쩔 수 없이 그를 부축했다.그러자
"탕 대인이 저를 예쁘다고 말해 주셔서 정말 기쁩니다. 그러니 일곱째 아가씨께도 예쁘다고 말해 보십시오. 분명히 기뻐하실 것입니다!"하지만 탕 대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다를 겁니다. 일곱째 아가씨는 이제 그런거에 좋아할 나이를 지났습니다. 지금 그녀에게 예쁘다고 말하면, 그저 무미건조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어찌 그럴 리 있습니까? 누구나 칭찬받는 것을 좋아하는 법입니다. 탕 대인, 대인께서 정말 재능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십니까?"탕 대인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예? 하하하. 그렇습니까?""예! 모두가 그렇게 말했습니다!"탕 대인은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미소를 지었다."과찬입니다.""기분 좋으십니까?"택란이 묻자 탕 대인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뜻을 알아차리고 멈칫하며 말했다."이 녀석!"택란은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탕 아저씨도 누군가에게 꼭 사랑받으시길 바랍니다."탕 대인은 이 말에 크게 감동해서 택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예. 고맙습니다."저녁엔 계약이 성공한 기념으로 연회가 열렸다.소박한 술자리긴 했지만, 커다란 술통들이 준비되어 있어 모두 마음껏 마시며 즐길수 있었다.택란은 술을 마시지 않기에, 주 아가씨가 매실청을 대신 준비해 주었다. 새콤달콤한 맛이 택란의 마음에 쏙 들었다.술잔을 주고받으며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자, 모두 패기 있게 약도성을 북당에서 제일가는 도성으로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다.일곱째 아가씨는 벌써 독산을 어떻게 개발할지부터 고민하고 있었는데, 독산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막막했기에 사람들에게 의견을 구하기 시작했다.각자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지만 대부분이 경치를 개발하자는 내용이었다.반면, 택란은 새로운 생각을 제안했다. 독산에 온천이 있으니 오두막을 지어 온천을 끌어들여 돈을 받고 여러 개의 탕을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어떻겠냐며, 온천수가 몸에 좋다는 점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자고 제의하였다.택란의 생각은 이 시절
탕양은 자신이 여자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고 자부했었다. 특히 일곱째 아가씨처럼 강인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혼자 지내는 데 익숙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삶을 더 선호하기에 굳이 자신과 인연을 맺으려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는 그의 큰 착각이었다.여인의 마음은 늘 갈대처럼 변덕스럽고, 아무리 강인한 사람이라도 다정함이 필요한 순간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일곱째 아가씨는 오랫동안 혼자 외롭게 지내왔는데, 중년에 접어들며 그 외로움이 더욱 깊어진 것이다.누군가 곁에 있다면, 삶의 방식도 달라질 수 있지만, 물론 잘못된 연으로 나빠질 가능성도 있었다.원가의 가훈은 항상 군주에게 충실하며, 엄청난 용기도 있었다. 심지어는 원가에서 키운 닭조차 남의 집의 닭보다 더욱 용감할 정도였다.하지만 한 번의 좌절로 인해 사랑을 믿지 않겠다는 것이 과연 용기있는 행동 일까?물론 그녀가 반드시 탕양을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어울리는 사람을 만나 다시 한번 용기를 내볼 수도 있었다.하지만 탕양이 먼저 용기를 내어 말한다면, 그녀 역시 그에게 기회를 줄 것이다.여태껏 그녀의 마음에 들어온 사람은 오직 탕양뿐이었다.그리고 어쩌면 시도해 봐야만 서로 맞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탕양과 잘 맞는다고 느끼는 건 그녀가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아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착각일지도 모르니 말이다.경성으로 돌아간 후에도 탕양이 말을 꺼내지 않는다면, 그녀는 공개적으로 구혼에 나설 생각이었다. 한편, 택란이 주 아가씨와 함께 밖으로 나가며 물었다."탕 대인이 왜 나쁜 사람인 것이오?""여인을 훔쳐봤습니다.""탕 대인이 아가씨를 좋아하지 않소? 어찌 못 보는 것이오?"주 아가씨는 택란이 이런 부분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공주에게 가르쳐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사내가 여인을 사모하면 상대의 시선을 바라보지, 다른 곳을 쳐다보지 않습니다. 그러니 탕 대인은 일곱째 아가씨를 사모하는 것이 아닙니다.""그
그녀는 탕양을 힐긋 바라보는데, 예전의 담담하고 온화한 모습 없이 뜨겁게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그녀는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기에, 절대 먼저 말을 꺼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평생 그렇게 죽을 때까지 버틴다 해도, 제자리에 머물러 기다리지 않을 것이었다."탕 대인, 지금 어디를 보는 것이오?"그때, 냉정언이 물었다."예? 무슨 말이십니까?"탕양은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냉정언을 바라보자, 냉정언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탕 대인께서 계속 일곱째 아가씨의 가슴팍을 보고 있었소.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것이오?"이 말이 끝나자마자, 모두가 술렁이며 이상한 시선으로 탕양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주 아가씨가 급히 택란의 귀를 막으며 말했다."보지도, 듣지도 마십시오!"탕양은 크게 당황하며 두 손을 마구흔들었다."아닙니다! 전 그러지 않았습니다! 냉 대인께서 잘못 보신 겁니다.""아니오. 분명 아가씨의 옷깃과 가슴을 보고 있었소!"말을 마치자마자 냉 대인은 숭이를 안고 단호하게 밖으로 나갔고, 탕양은 얼굴을 붉히며 변명이라도 하기 위해 일곱째 아가씨를 쳐다봤다. 그러자 일곱째 아가씨는 기침을 하며 옷깃을 정리한 뒤 소리쳤다. "흥. 변태!"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도 돌아서 나가버렸다.탕양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당황한 얼굴로 주 아가씨와 홍엽을 보며 말했다."다들 보지 않았습니까? 제가 그런 게 아니라는..."홍엽이 소매를 휘두르며 말했다."눈이 자네 얼굴에 달려 있는데, 자네가 누굴 보고 어디를 보는지 우리가 어찌 알겠는가?"주 아가씨는 택란의 손을 잡고 나가며 말했다."마마, 이제 탕 대인 같은 사람하고 어울리지 마십시오. 인품이 좋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탕양은 여전히 몹시 당황한 상태였다. 냉정언의 한마디에 그의 처지가 아주 난감해져 버렸다.그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말이다. "명여야..."냉명여 또한 귀를 막고 밖으로 달려 나가며 외쳤다."탕 대인께서는 정말 나쁜 사람이십니다!"탕양은 그만 머리를 감싼
이처럼 독산은 마치 진실한 사람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처럼 가장 진솔한 생각을 감출 수 없게 만들었다.일곱째 아가씨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탕양을 바라보며 말했다."저를 배신한 것을 아직 기억하고 계십니까?"탕양은 그동안 일곱째 아가씨와 이 일을 얘기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항상 담담한 태도로 과거 이야기를 피하며 언급하지 않았었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이 말을 꺼내니, 탕양은 잠시 멍해졌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요..."일곱째 아가씨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기억하고 있다면, 제가 독산을 얻을 수 있게 잘 도우십시오. 독산을 개발할 수 있다면 앞으로 15년간의 수익은 전부 제 것이 될 겁니다. 그리고 15년 뒤에는 이익을 반으로 나누겠습니다. 절대 3할만 받을 수는 없습니다."탕양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폐하께 이미 3할이라고 말씀드렸는 걸요.""그건 대인의 일이지요. 폐하를 오랫동안 모셔 왔으니, 대인의 공로를 인정하고 배려해 주실 것입니다. 이건 대인께서 누구의 이익을 우선시할지에 달린 것 아닙니까?"그러자 탕양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아가씨, 3할이라도 충분히 좋은 제안이지 않습니까? 그저 길만 새로 만들면 되고, 심지어는 조정에서 나서서 도와줄 것이니, 초반 투자 비용도 그렇게 많이 들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장사를 시작하면, 놀러 오는 자들에게 먹거리와 즐길 거리로 돈을 적잖이 벌 수 있습니다.""반으로 나누는 것까지만 양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익을 중시하는 상인인 것을 잘 알지 않습니까."탕양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예. 폐하께 돌아가 말씀은 드리겠지만… 무조건 그 조건을 따내겠다고 장담할 순 없습니다.""못 따내도 그만입니다."일곱째 아가씨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앞으로 제가 독산에 몇 번이나 올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조정에서 독산을 얻는다고 해도, 굳이 그렇게 많은 돈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탕양이 웃으며 답했다."이곳에서 지내면서 머물어도 되지 않습니까? 늘
일곱째 아가씨는 산 입구에서 지옥의 불꽃을 보자마자 순간 홀린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꿈속에서 본 그 꽃이 눈앞에 펼쳐지니,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는 것 같았다.탕양이 손을 뻗어 꽃을 따려 하자, 일곱째 아가씨가 급히 소리쳤다."지금 뭐 하는 것입니까? 당장 멈추십시오!"하지만 탕양은 이미 지옥의 불꽃을 손에 쥔 채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이것이 바로 해독제입니다."그는 손바닥에서 꽃을 비벼 즙을 내고는 일곱째 아가씨의 손을 잡아 즙을 그녀의 손등에 묻혔다. 즙은 선혈처럼 선명한 붉은빛을 띠고 있어, 일곱째 아가씨의 손등에 피가 묻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그녀가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며 물었다."정말입니까? 이렇게 신기하단 말입니까…?"그제야 그녀는 과거 산속에서 넘어졌을 때, 얼굴이 지옥의 불꽃에 닿아 꽃 즙이 묻고 나니, 정신이 돌아왔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때 자신의 강한 의지로 깨어난 것인줄 알고 있었다."이걸 어떻게 알게 되신 겁니까?"일곱째 아가씨가 호기심 어린 눈길로 묻자, 탕양은 숨기지 않고 답했다."안풍친왕이 말해준 것입니다. 예전에 독산에 와서 방 장군의 유해를 찾을 때 산을 드나든 적이 있었는데, 이 비밀을 알고 있었기에 독산을 드나드는 것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고 합니다. 지금 손등에 지옥의 불꽃 즙을 바른 이상, 산에 들어가도 환각에 휘말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독산의 절경을 마음껏 감상하실 수 있다는 말입니다!""그렇습니까? 독산의 비밀을 푸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고 여겼는데, 이렇게 쉽게 지옥의 불꽃으로 독성을 없앨 수 있었다니요…!"일곱째 아가씨가 중얼거리며 탄식하자, 탕양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예. 겉보기엔 어려운 일도, 걷기 힘든 길도, 내리기 힘든 결정도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의외로 쉽게 해결할 수 있답니다.""어찌 말 속에 다른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일곱째 아가씨가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힐끗 바라봤다.그러자 탕양이 당황한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독산은 약도성에서 ‘귀역’이라고도 불린다.약도성 백성들은 거의 독산에 들어가지 않는다. 해마다 보물을 찾아 벼락부자가 되길 꿈꾸며 산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무사히 나오는 사람은 극소수였기 때문이다.심지어 살아서 나온 사람 중에서도 정신이 나가거나 미쳐버린 자들이 적지 않다.그래서 조정 신하가 독산에 들어가겠다는 소식은 백성들의 큰 주목을 받았고, 심지어 일부는 관저로 직접 찾아와 독산이 위험하다고 경고하며 요괴와 귀신이 들끓으니 절대 들어가지 말라며 충고까지 했다.그러자 탕양은 그들에게 독산에 요괴나 귀신이 있는 곳이 아닌, 신령과 신선들이 지내는 신성한 곳이라 말했다. 그동안 산에 들어갔던 백성들이 그만 욕심에 사로잡혀 신령을 거슬렀기에 독산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경외심을 품고 신앙심을 가지고 들어가면 무사히 나올 수 있다며 설명까지 덧붙였다. 그리고 이 말은 당대 국사가 직접 언급한 것이라며, 이를 검증하기 위해 자신이 파견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탕양 또한 이 말을 하면서도 내심 불안했다. 사실은 이 이야기 모두 황제가 부유한 이들과 이웃 나라의 신도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근거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하지만 독산의 풍경은 북당에서의 유일무이한 절경이었기에 탕양은 결국 독산의 모습을 드러내고 개방하자는 제안에 동의했던 것이다. 탕양의 말을 믿는 사람은 그저 소수에 불과했고, 믿지 않는 사람, 의심하거나 반신반의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저 상황을 지켜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산에 들어가기 전, 탕양이 일곱째 아가씨에게 물었다.“정말 나와 함께 들어갈 셈입니까?”일곱째 아가씨는 젊은 시절 한 번 독산에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멀리 가기도 전, 산속에서 만난 지옥의 불꽃에 매료되었다. 그렇게 꽃밭에서 넘어진 후, 정신을 차리자마자 황급히 산을 빠져나왔던 것이다.하지만 산을 떠난 후에도 그 붉은 색의 꽃은 그녀의 마음속에 잊히지 않았고, 마치 주문에 걸린 듯 계속 머릿속에 떠올랐다.다시 독산에 오자, 과거의